[에너지경제신문 오세영·윤수현 기자] 국회 내 비례대표제가 개편의 기로에 서있다.국회의원 정수 증원을 두고 여야가 팽팽한 의견 대립을 이어온 가운데 비례대표 의원들에 대한 ‘불투명한 공천 과정’ ‘각 진영의 투사 혹은 얼굴마담’이라는 폐단이 끊이지 않으면서다.비례대표는 의회 등 대의기관의 구성원을 선출하는 선거에서 정당의 득표율에 비례해 당선자 수를 결정하는 선거 제도다. 국회에서는 성별·나이·직업 등의 쏠림을 막고 전문성을 띈 직능을 대표하거나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해 도입됐다.하지만 근본취지와 다르게 과거에는 ‘전(錢)국구 비례대표’, 현재에는 ‘정당의 얼굴마담’이라는 불명예 꼬리표가 뒤따랐다. 비례대표의 경우 통상 비례대표 재선의 공천 기회를 갖기 어렵다.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진보·보수 정당을 넘나들며 국회의원 다섯 차례(11·12·14·17·20대 국회)를 모두 비례대표로 원내에 입성했던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현역 비례대표 의원이 다음 총선에서도 금배지를 달고 원내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지역구 의원으로 출마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비례대표제를 두고는 ‘지역구 진출을 위한 발판’이라는 이미지도 강한 편이다.비례대표 선거는 대학입시로 보면 일종의 수시 특별전형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된다. 각 정당이 일정한 전문성을 갖춘 인물이나 특별히 배려해야 할 인사를 공천하면 그 정당의 득표율을 고려, 당선자 숫자를 낸다는 점에서 그런 평가가 나온다. 수능 점수만으로 각 대학 학과 지원자들과 다투는 정시처럼 유권자의 득표만으로 경쟁의 우열, 즉 당락을 결정 짓는 지역구와 다르다는 것이다. 역대 선거의 사례를 보면 주요 정당의 경우 통상 각각 비례대표 공천 순번 15∼25번까지 당선됐다. 주요 각 정당에서 대략 비례대표 공천 15번까지는 당선 안정권에 들 수 있는 뜻이다. 비례대표 제도의 실상이 이러니 주요 정당들은 그간 비례대표 공천 때 1∼5번 순위에만 상징적인 인물을 배치, ‘얼굴마담’ 역할을 하게 하고 나머지 10여명의 경우 각 정당 실세 정치인들끼리 ‘공천 나눠먹기’를 해왔다는 게 정치권의 일반적인 인식이었다.이에 따라 국민과 정치권에선 비례대표 의원 수를 늘리려면 비례대표의 취지를 살릴 수 있도록 고도의 전문성을 갖췄거나 특별배려의 필요성이 있는 인사를 중심으로 공천하되 공천과정도 명실상부하게 투명하고 공정하게 이뤄지게 하는 제도 정비를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한다. 21대 국회의 숙원사업인 선거제 개편안에는 선거구제 뿐 아니라 비례대표 제도를 개선하겠다는 의지도 담겨있다. 정치 전문가 사이에서도 ‘지역구 보다 비례를 강화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국민들의 비례대표 증원에 대한 인식도 많이 바뀐 것으로 분석됐다. 국회의원 수 증원을 반대하는 여론보다 비례대표를 늘려야 한다는 여론 공론조사 결과도 나왔다.정치 전문가들은 25일 "비례대표제를 도입 취지에 맞게 운영하면서 새로운 정당을 국회 내 진입시키고 의원들이 차별화 된 의정활동을 펼칠 수 있으려면 비례의석을 증가하고 선거제는 물론 정당 체제도 바꿔야 한다"고 분석했다.◇ 국회 선거제 개편안 속 비례대표, 병립형 혹은 준연동형정치개혁이 절박하다는 인식은 정치권, 시민사회, 학계 등 다방면에서 커져왔다.정치권에서는 21대 총선을 앞두고 선거에서 비례성을 높이기 위한 준연동형비례대표를 도입했다. 올해 초에는 윤석열 대통령은 중대선거구제를 정치개혁의 화두로 던지면서 정치개혁 공론화에 시동을 걸었다.이후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정개특위)가 여야합의로 가동됐고 4월 중순 경 김진표 국회의장의 제안에 따라 20년 만에 국회의원 모두가 참여하는 전원위원회도 열렸다. 국회는 전원위를 가동해 정개특위가 마련한 세 가지 결의안을 중심으로 토론을 벌였지만 합의를 도출해내진 못했다.지난달 초 국회 정개특위 주최로 일반시민 약 500인이 참여하는 선거제도에 대한 공론조사도 열렸다. 지난달 11일에는 양당 원내지도부가 회동을 했지만 국회 전원위 소위원회 구성이 무산되면서 협상은 최종 결렬됐다.개편안 속 비례대표제 내용은 △권역별 병립형(1안) △전국 병립형(2안) △권역별 준연동형(3안) 등으로 구성됐다.비례대표제는 지역구 의석수와의 연동 여부에 따라 크게 ‘병립형’과 ‘연동형’으로 나뉜다.1안과 2안인 병립형은 국회 내 비례의석 수 안에서 정당 득표율대로 비례대표 수를 배정하는 것이다. 준연동형은 국회 전체 의석 수에서 정당 득표율대로 비례대표 수를 배정하는 방식이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선호하는 제도다.연동형은 지역구에서 정당 득표율 만큼의 의석을 채우지 못했을 때 비례대표에서 그 만큼의 의석을 채워주는 제도다. 만약 A정당이 득표를 5%를 했다면 전체 300석 중 5%인 15석을 채워준다. A당이 지역구에서 10석을 차지했다면 비례대표는 5석을 주는 것이다. 지역구에서 이미 20석을 모두 차지했으면 비례대표 의석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거대 정당들에게 불리하고 소수 정당의 원내 진출에 유리한 제도다. 이 경우 비례성을 높일 수 있어 소수 정당인 정의당이 지지하고 있다.3안은 지역구 의석과 연동하는 정도를 낮춘 준연동형 제도다. 우리 국회는 21대 총선에서 비례대표 47석 중 30석에 제한해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적용했다. 연동형이 채워야 할 비례대표 의석의 절반만 주고 나머지 17석에는 기존의 병립형 비례제를 적용했다.개편안에 포함된 ‘권역별’이란 전국의 정당 득표를 모두 모아 비례대표를 배분하는 현재의 방식에서 6개 권역으로 나눠 비례대표를 선출하는 방법이다. 김진표 국회의장이 제안한 권역별 비례대표제는 전국을 서울, 인천·경기, 충청·강원, 전라·제주, 경북, 경남으로 나눈다. 이 제도는 국회 내 비례 의석수를 권역별로 나누고 각 권역에서 정당이 얻은 득표율에 따라 비례 의석을 배분하는 것이다. 이 제도는 영·호남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주의를 타파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한편 여야는 선거제 개편에 대한 각 당 의견을 수렴해 이달 중순 이후 본격적인 협상에 돌입할 예정이다.□ 역대 의회별 국회의원 선거제도 및 의석 규모
의회(연도)
내용
제1대(1948)
1구 1인 소선거구제/200석
제2대(1950)
1구 1인 소선거구제/210석
제3대(1954)
1구 1인 소선거구제/203석
제4대(1958)
1구 1인 소선거구제/233석
제5대(1960)
양원제민의원-소선거구제(233명)/참의원-대선거구제(58명)
제6대(1963)
지역구와 비례대표제 전국구전체의석수 175석(지역구 131/전국구 44)
제7대(1967)
지역구와 비례대표제 전국구전체의석수 175석(지역구 131/전국구 44)
제8대(1971)
지역구와 비례대표제 전국구전체의석수 203석(지역구 152/전국구 51)
제9대(1973)
1구 2인제 직접선거와 간접선거 중선거구제 도입전체의석수 219석(지역구 146/통일주체국민회의 선출 73)
제10대(1978)
전체의석수 231석(지역구 154/통일주체국민회의 선출 77)
제11대(1981)
1구 2인제의 직접선거와 비례대표제 전국구전체의석수 276석(지역구 184/전국구 92)
제12대(1985)
1구 2인제의 직접선거와 비례대표제 전국구전체의석수 276석(지역구 184/전국구 92)
제13대(1988)
1구 1인제 지역구와 비례대표제 전국구전체의석수 299석(지역구 224/전국구 75)
제14대(1992)
1구 1인제의 지역구와 비례대표제 전국구전체의석수 299석(지역구 237/전국구 62)
제15대(1996)
1구 1인제와 비례대표제 전국구전체의석수 299석(지역구 253/전국구 46)
제16대(2000)
1구 1인제와 비례대표제 전국구전체의석수 273석(지역구 227/전국구 46)
제17대(2004)
1구 1인제와 비례대표제 전국구전체의석수 299석(지역구 243/전국구 56)
제18대(2008)
1구 1인제와 비례대표제 전국구전체의석수 299석(지역구 245/전국구 54)
제19대(2012)
1구 1인제와 비례대표제 전국구전체의석수 300석(지역구 246/전국구 54)
제20대(2016)
1구 1인제와 비례대표제 전국구전체의석수 300석(지역구 253/전국구 47)
제21대(2020)
1구 1인제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전체의석수 300석(지역구 253/전국구 47)
(자료=국회)◇ ‘전(錢)국구’부터 ‘얼굴 마담’…비례대표 ‘불명예’ 꼬리표비례대표는 소수집단의 이익을 대변하자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하지만 국내 정치 흐름 속에서 근본취지가 많이 변질돼 왔다.민주화 이전에는 정당이 득표율과 관계없이 비례대표를 임명하기도 했다. 또 정당 운영에 필요한 특별당비를 낸 사람들이 의원 배지를 받기 시작하면서 ‘전(錢)국구 비례대표’라는 불명예 꼬리표가 붙기도 했다.민주화 이후 헌법에 비례대표 관련 법안이 명시되면서 도입 취지를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지금의 비례대표는 ‘기성 정치인들 물갈이 효과’라는 점이 특징이다. 초선이면서 전문성을 갖춘 외부 인재들이 영입되기 때문이다.하지만 21대 총선 직전에 도입됐던 준연동형제는 ‘위성정당 창당’이라는 기형적 결과를 낳았다는 점에서 비판받는다.국회 입법조사처는 ‘선거제 개편 논의, 왜 침체에 부딪혔나’ 보고서를 통해 준연동형제로 국회의원 선거를 치른 결과 오히려 지역구와 비례대표 의석의 불비례성이 늘어났고 거대양당 강화라는 예상치 못한 현상이 발생했다고 꼬집었다.제도 측면에서 보면 비례대표 의석이 적고 전문성을 내세우기 힘들다는 게 문제점으로 꼽힌다.조진만 덕성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지역구에서 1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방식이다 보니 정치 신인, 여성, 직능대표 등의 의회 진입이 어렵기 때문에 비례대표를 둔 것"이라며 "지금 비례대표 의석 수가 47석인데 이 숫자로 비례성을 높일 수 있다고 보기 어렵고 정당이 비례 후보 순위를 정하다 보니 민심과 달리 당 지도부의 영향력이 크다"고 설명했다.박상병 인하대 정책대학원 초빙교수는 "비례대표의 가장 큰 매력이 전문성이다. 우리나라 비례대표 의석에도 비교적 전문성 있는 사람이 많이 들어와 있다"면서도 "하지만 비례대표가 결국 여야로 나눠지기 때문에 전문성을 대표해 당이나 의회에 진출하는 사람일지라도 결국 전문성보다 당에 충성하게 되는 정당 체제의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 "의석 수 증원·비례성 제고 등이 개선 방법"비례대표제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의석 수 증원, 비례성 제고할 선거제 도입, 개헌 등의 방법이 거론된다.특히 ‘비례대표 증원’과 관련해서는 국민들의 요구가 높아지는 상황이다.국회 정개특위가 지난달 발표한 ‘선거제 개편을 위한 숙의형 공론조사’에 따르면 대표성과 비례성 강화를 명분으로 한 비례대표 증원에 대한 공감대가 크게 늘었다.‘선거제도 공론화 500인 회의’ 전 설문조사에서는 ‘비례대표를 더 늘려야 한다’는 의견이 27%, ‘지역구 의원을 더 늘려야 한다’는 의견이 46%로 나타났다.반면 토론회 이후 ‘비례대표를 더 늘려야 한다’는 의견이 70%로 늘었고 ‘지역구를 더 늘려야 한다’는 의견은 10%까지 줄었다.조진만 교수는 "의석 수를 늘리고 비례성을 강화할 선거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조 교수는 "요즘 다양성이 중요한 시대이고 전문 분야가 많아지는 만큼 전문성을 강조한 의석도 늘려야 한다"며 "지금 비례의석인 47석은 전체 의석수에 20%도 안되는 비율이라 전문 분야를 대표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이어 "지금의 선거제도는 국민들의 의사가 왜곡되고 사표들이 많다"며 "비례성 높은 선거제도를 채택하고 만약 소선거구제를 유지한다면 비례 의석이 의미 있게 늘어나야 새로운 정당이 의회에 진입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의원이 되면서 차별화 된 의정활동을 펼칠 수 있다"고 덧붙였다.박상병 교수는 "근본적인 문제는 대통령중심제인 권력 구조"라며 "대통령 뜻에 반대하는 경우 지탄을 받고 여야 대립만 극단적으로 흘러가 협치가 어려운 상황만 벌어진다"고 지적했다.박 교수는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본받아야 한다"며 "정당 득표율에 따른 비례대표제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전문성을 강화하는데 상당히 이 제도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그러면서 "의회내각제를 적용한 다수 국가들도 전문가를 발탁하는 방식으로 비례대표를 뽑아 정당 지지율을 높여가고 있다"고 부연했다.국회 본회의.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