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깜깜이 사후정산’ 깬 정유업계, 신뢰 회복의 첫발 뗐다

유가가 요동칠 때마다 국내 석유 시장에서는 어김없이 같은 장면이 반복된다. 주유소 판매 가격이 치솟으면 소비자는 의문을 제기한다. “왜 올릴 때는 번개처럼 빠르고, 내릴 때는 거북이처럼 굼뜨냐"는 불만이다. 이에 대해 정유업계가 내놓는 해명은 늘 비슷하다. 국제 제품 가격의 변동성, 환율, 그리고 유통 시차 때문이라는 논리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복잡한 수식과 설명은 정작 매일 기름을 넣는 소비자의 체감과는 거리가 멀다. 핵심은 가격의 절대적인 높고 낮음이 아니다. 그 가격이 도대체 어떤 경로와 기준을 거쳐 만들어지는지 소비자 눈에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 즉 '과정의 불투명성'에 있다. 시장은 가격의 등락은 견딜 수 있어도, 설명되지 않는 등락에는 참지 못하는 법이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SK에너지가 발표한 주 단위 공급가격 사전 확정과 사후정산 폐지 조치는 정유업계의 뿌리 깊은 불신을 해소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변화로 눈여겨볼 만하다. 그동안 정유사와 주유소 간의 거래는 제품을 먼저 공급한 뒤, 일정 기간이 지나 시장 시세를 반영해 뒤늦게 값을 매기는 '사후정산' 구조가 관행처럼 유지돼 왔다. 국제유가 변동 리스크를 완화하기 위한 장치였다고는 하나, 유가 급등기에 주유소가 미래의 정산 리스크를 소비자 가격에 선반영해 가격을 빠르게 올리는 빌미로 지목돼 온 것 또한 사실이다. 정유사 공급가격 사전 확정이라는 새로운 체계에서는 주유소들이 매입 가격을 미리 알고 판매가를 세울 수 있게 된다. 가격 결정 과정 자체가 시장과 소비자에게 한결 읽기 쉬워지는 셈이다. 이는 단순히 값을 직접 깎아주는 단기적 처방을 넘어, 값이 만들어지는 구조 자체를 투명하게 여는 본질적인 조치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지난 4월 국회에서 정유사·주유소 간 체결된 상생협약의 후속 조치로서, 약속을 이행하려는 선제적 결단이기도 하다. 일각에서는 원가를 공개하라는 요구도 있다. 원유라는 하나의 원자재에서 휘발유, 경유 등 여러 제품이 동시에 쏟아지는 정유 공정 특성상, 품목별 원가를 칼로 자르듯 완벽하게 공개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완전한 원가 공개가 차단되어 있다면, 다음으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은 가격이 정해지는 규칙과 절차를 시장이 납득할 수 있도록 투명하게 제시하는 것이다. 이번 조치는 바로 그 최선의 첫 단추를 꿴 셈이다. 국내 정유업계는 세계 5위권의 정제 역량을 바탕으로 평시에는 수출을 통해 국가 경제를 떠받치고, 위기시에는 국내 에너지 공급망을 사수하는 중추 역할을 해왔다. 이번에 함께 발표된 영세 운수 사업자를 위한 경유 리터당 50원 한시 할인이나, 중동산 원유 비중을 70%에서 50%로 낮추겠다는 도입선 다변화 계획 역시 민생 안정과 에너지 안보라는 책임감의 발로일 것이다. 번번이 불거지는 기름값 논란 앞에서 그동안 정유업계는 해명과 방어에 급급했다. 그러나 이번처럼 거래 구조 자체를 손보겠다고 나선 것은 시장의 신뢰를 되찾기 위한 뚜렷한 첫걸음으로 평가할 만하다. '설명할 수 있는 가격'만이 소비자의 납득을 이끌어내고 정유업계를 향한 고질적인 색안경을 벗길 수 있는 유일한 열쇠다. 윤병효 기자 chyybh@ekn.kr

[데스크칼럼] 에너지가 곧 국력인 시대, 중동 전쟁이 남긴 과제

미국과 이란 간의 종전 합의는 작은 변수에 흔들리기도 하겠지만 결국엔 성사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정치적으로, 이란은 물리적으로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해 나갈 여력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번 전쟁은 상대적 약소국이 초강대국과의 싸움에서 어떻게 해야 버틸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바로 에너지 공급망을 집중 공략하는 것이다. 과거의 에너지가 단순한 산업의 동력이었다면, 지금의 에너지는 국가의 생존과 직결된 핵심 안보 자산이다. 글로벌 필수재인 에너지 공급에 차질이 발생하면, 초강대국은 그 공급망과 직접적 연관이 없더라도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고 이는 전쟁의 승패와도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 이번 중동 전쟁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이는 앞으로도 에너지 공급망이 주 타깃이 될 수 있고, 우리는 이를 강건히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중동 전쟁이 주는 강건한 에너지 안보 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조건은 크게 4가지로 볼 수 있다. 우선 공급망 다변화다. 우리나라는 에너지의 9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는 대표적인 에너지 고립국이다. 특히 석유 수입의 70%를 중동의 의존하면서 타격이 컸던 반면, 가스(LNG) 수입의 중동 의존도는 10%도 안돼 타격이 크지 않았다. 특정 국가나 특정 지역에 지나치게 편중된 에너지 도입선을 과감하게 넓혀야 한다. 자원 부국들과의 전략적 파트너십을 공고히 하고, 비상시를 대비한 자원 비축 역량을 획기적으로 확대하는 것이 공급망 리스크를 분산하는 첫걸음이다. 에너지원의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는 '에너지 믹스'의 최적화도 필요하다.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청정에너지로의 전환은 당위 과제다. 그러나 현실을 도외시한 급진적인 전환은 전력 수급 불안정이라는 부작용을 낳는다. G2인 미국과 중국이 석탄발전을 늘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석탄은 최악의 반기후 에너지원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여전히 가장 저렴하면서도 가장 확보하기 쉬운 에너지원이다. 종국적으로 탈석탄은 필요하지만 적절한 속도조절도 필요하다. 가장 확실한 에너지 안보는 우리 영토 안에서 에너지를 자급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중동 안에서도 강력한 경제력과 외교 노선을 가질 수 있는 배경도 '타마르' 가스전 같은 초대형 유가스전을 통해 에너지 자급을 넘어 수출까지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재명 정부는 동해심해 가스전 개발사업을 별로 탐탁지 않아 하지만, 장기적 국가 미래를 위해선 반드시 추가 시추가 필요하다. '제5의 에너지원'으로 불리는 에너지 효율도 절대 필요하다.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를 접목한 지능형 전력망을 구축하고, 차세대 배터리와 가상발전소(VPP) 등 에너지 신산업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에너지를 수입하는 나라에서 '에너지 기술을 주도하는 나라'로 체질을 바꾸는 것만이 궁극적인 안보를 보장한다. 에너지 안보는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는다. 정권의 변화나 시장의 단기적 등락에 흔들리지 않는 일관된 국가적 마스터플랜이 필요하다. 에너지가 곧 국력인 시대, 지금 준비하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 윤병효 기자 chyybh@ekn.kr

[데스크 칼럼] 부동산 시장 해법, ‘자만’은 금물이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적극 지원했던 핵심 '명픽' 인사인 정원오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낙선하면서 이 대통령의 정국 주도권은 적잖은 타격을 입었다. 많은 전문가들과 여론은 서울시장 선거가 결국 부동산으로 귀결됐다고 분석한다. 정부 여당의 부동산 정책에 대해 긍정하는 편보다 부정하는 서울 민심이 더 높았다는 것이다. 서울은 집값이 비싼 만큼 전국에서 자가 보유율이 가장 낮은 지역이다. 국가데이터처의 '국민 삶의 질 2025'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시 가구의 자가 비율은 44.1%에 그친다. 이는 전국 평균 가구 자가 비율(약 58% 수준)보다 10%p 이상 낮은 수치다. 서울시 가구 절반 이상인 56%가 전세나 월세 등 임차 형태로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서울의 부동산 민심은 전월세 시장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선거 전 정부의 부동산 규제 정책으로 인해 특히 서울에서 전월세난이 심화되면서 서울 민심은 악화일로를 달리고 있었다. 서울에 자기 집을 가진 44%도 정부 여당의 부동산 정책에 거부감이 높았다. 서울에서도 특히 집값이 높은 강남 3구를 중심으로 한 한강벨트 지역은 오세훈 시장에게 70~80%대 수준의 몰표를 던졌다. 비싼 아파트에 높은 세금을 매기겠다는 정부 여당의 부동산 정책은 고가 주택이 많은 서울 강남과 한강벨트의 정부 여당 비토 성향을 더욱 강화시켰다. 여기에 정부 여당이 재건축초과이익환수제 폐지를 추진하는 등 도시정비사업 규제에 나선 것도 큰 타격이 됐다. 개발 이슈가 많이 걸려있는 서울 집주인들은 정원오 후보가 이길 경우 자신들의 재산권이 침해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오 시장에게 표를 줬다. 이처럼 서울 민심이 현 정부 여당의 부동산 정책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다는 신호가 곳곳에서 감지됐지만, 대통령과 민주당은 여론조사 결과에 취해 이를 가볍게 여겼다. 올해 초부터 이 대통령은 오히려 자신의 페이스북에 부동산 시장 정상화가 코스피 5000이나 계곡 정상화보다 쉽다면서 자신과 여당에게 돌아선 서울 부동산 민심을 바로 읽지 못하고 더욱 가속화 엑셀을 밟았다. 그 결과는 비단 이번 선거 결과 뿐만 아니라 본지가 리얼미터에 의뢰한 6월 2주차 국정여론 지지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이 대통령 지지율은 이번 주 51.5%를 기록하면서 50%선이 깨질 위기에 처했다. 정당 지지도는 국민의힘이 44.3%를 기록해 38%에 그친 민주당을 오차범위 밖에서 역전하는 결과가 나왔다. 정부 여당은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해 다시 한번 되돌아 봐야 한다. 특히 부동산 이슈가 사실상 선거 결과를 가른 서울 민심에 대해선 더욱 심사숙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집권 초기 높았던 지지율을 까먹고 정권을 내준 것은 결국 부동산 정책 실책 때문이었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 패배에는 서울 부동산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한 정부 여당의 실정과 함께 이재명 대통령의 '부동산 자만'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에 서울 민심은 1순위 '명픽' 정원호 후보를 떨어트리고, 야당 국민의힘 소속 오세훈 시장을 연임시켜 표로써 심판했다. 임진영 기자 ijy@ekn.kr

[데스크 칼럼] 8000과 1500 사이, 경고등 아래서 달리는 경제

한국 경제는 지금 낯선 숫자들 위에 서 있다. 환율은 1500원을 넘는데 주가는 사상 최고치를 향하고 성장률 전망치는 오히려 높아지고 있다. 코스피 8000은 새로운 도약에 대한 기대를 담고 있지만 환율 1500원은 여전히 위기와 불안을 떠올리게 한다. 성장률 2.6% 전망까지 더해지면 과거라면 좀처럼 공존하기 어려웠던 숫자들이 나란히 놓인다. 경제를 읽는 오래된 공식이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최근 경제 상황과 관련해 “오늘의 고금리·고물가·고환율은 한국 경제가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성공의 비용"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달라진 현실을 달라진 눈으로 직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환율 자체보다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경제의 체력이 더 중요해졌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분명 일리 있는 진단이다. 한국 경제를 바라보는 기존의 잣대가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다는 점도 부인하기 어렵다. 다만 달라진 현실을 인정하는 것과 그 현실을 낙관적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지금 우리 경제가 마주한 과제는 경제지표의 개선 속도를 국민의 체감경기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증시만 봐도 그렇다. 코스피는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지만 상승의 열기가 시장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지수를 밀어 올린 것은 사실상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한 반도체주였다. 인공지능(AI) 열풍 속에 글로벌 자금이 반도체로 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지만, 국내 증시의 경우 그 의존도가 유난히 높다. 지수 상승에도 체감이 따라오지 못하는 배경이다. 실물경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성장률 전망치는 높아졌는데 가계가 체감하는 경기는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다. 반도체 수출이 성장률을 끌어올릴 수는 있어도 그 성과가 산업 전반과 가계로 확산되지 못한다면 국민이 체감하는 경기 역시 달라지기 어렵다. 특정 산업의 초호황이 국가경제를 견인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국민경제의 개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최근의 성장은 과거처럼 고용과 임금 증가를 폭넓게 동반하는 성장과는 성격이 다르다. 반도체와 AI 산업은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반면, 상대적으로 고용 유발 효과는 제한적이다. 성장률과 수출 개선이 곧바로 체감경기 회복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간극이 커질수록 경제정책에 대한 국민의 신뢰 역시 약해질 수밖에 없다. 정부가 성장률과 주가를 이야기할 때 국민은 물가와 월급, 주거비와 교육비를 먼저 떠올린다. 숫자로 확인되는 성과와 체감 현실이 어긋나면 경제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낙관론도 비관론도 아니다. 달라진 경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이면을 함께 들여다보는 균형감각이다. 성장률이 높아졌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 성과가 얼마나 넓게 퍼지고 있는가다. 반도체가 주도하는 호황이 산업 전반의 활력으로 이어지고 있는지, 개선된 거시지표가 가계의 소득과 소비 여력 확대로 연결되고 있는지를 함께 점검해야 한다. 새로운 단계로 들어선 우리 경제의 출발점은 어쩌면 더 높은 숫자보다 성장의 모습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될지 모른다. 송재석 기자 mediasong@ekn.kr

[데스크 칼럼] 삼전닉스를 쥔 ‘환상 속의 그대’

1년 전엔 '5천만 국민이 정치, 종교전문가'라고 했다. 누구든 정치가, 종교가 어떠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요즘 전문 분야가 달라졌다. '5천만이 주식전문가'다. 묻지 않아도 AI와 주식의 아름다운 미래에 대해 식견을 펼친다. 나는 묻지도 않았다. 주제는 단연 '삼전닉스'다. '자본시장부장이신데 몇 층에 들어가셨냐?' 'AI가 어쩌고 저쩌고인데 어떻게 전망하시냐'는 질문을 자주(최근엔 매번) 받는다. '주식 잘 안한다'고 답하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길거리에 돈이 굴러다니는데 그걸 왜 안 주워?' '주식 초짜인 나도 어떻게 버는지 알겠는데? 바보인가'라는 투다. 집요하게 캐물어 오면 못 이겨 답한다. “6층에 들어가 견디다 급전이 필요해 9층에서 나갔다" 그러면 대부분 “안타깝다"고 말은 해준다. 그러나 능글한 표정에선 '나보다도 주식을 모르면서 증권부장을 하고 있구먼'이라는 의미가 잘 전달된다. AI에 대한 전망도 캐묻는다. “AI 발전 속도는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수준에 도달했고, 그 발전이 어느 특이점을 만나면 반도체 수요도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메모리반도체가 아니라 범용의 칩이 이를 대체하면 발주했던 반도체 물량도 거둬들일 수 있다"는 정도로 답한다. 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중간에 말을 끊으며 “반도체는 3년 동안 수주할 물량을 이미 확보했다. 삼전닉스 끄떡 없다. 유튜브만 보면 다 나온다"란다. 표정을 보면 '내가 산 미국 Ai주식과 삼전닉스는 3년 동안 절대 떨어지지 않을 거야'란 확신성 소망이 읽힌다. '삼전닉스신자' 앞에서 머쓱해질 때 이런 가사가 떠오른다. '그대의 환상 그대는 마음만 대단하다 / 그 마음은 위험하다 자신은 오직 / 꼭 잘 될 거라고 큰 소리로 말하고 있다 / 하지만 지금 그대가 살고 있는 모습은 무엇인가' 서태지와 아이들의 라는 곡이다. 그때의 '아이들'이 이미 노년에 접어들고 있을 정도로 오래 전 노래다. 주가는 환상이고, 살고 있는 모습은 실물이다. 1년간 코스피 지수는 2000에서 현재 8500까지 급등했다. 지수가 약 4.25배 상승하는 동안 시총은 4000조원 이상(절대 자산) 늘었다. 그 4000조는 어디에서 왔나. 예적금은 물론 마통 등 신용대출, 주담대, 보험 해약 등등 거의 모든 금융자원을 한데 끌어모은 거다. M2 대비 주식 시가총액 비율은 약 135% 정도에 달한다. 실리콘밸리에 사는 아이들이 AI 발전 방향을 살짝 틀어버리면 이런 환상은 쉽게 깨진다. 투매가 일어나고 증시에서 실물 시장으로 현금이 쏟아져 나온다. 거대한 주가 차익이 부동산으로 넘어가면 그동안 대출규제로 잡아놨던 아파트 가격이 급등한다. 이에 더해 임금 수준이 올라가며 근원물가도 자극하게 된다. 금통위 점도표가 50bp 인상에 몰린 이유 중에 하나다. 물가 고삐를 쥐려면 금리를 크게 올릴 수밖에 없다. 금리를 올리면 현재도 유동성 수혜를 입지 못한 다양한 섹터(시총 절반은 삼전닉스)는 돈줄이 더 꽉 막힐 수밖에 없다. 주식으로 돈은 벌었으되 물가로 까먹고, 유동성은 풍부해졌으되 기업에 자금은 마르게 된다. 지방선거까지 나온 증시 부양책이 '환상'을 채워줬다면 이제는 '살고 있는 모습'을 챙겨야 할 때다. 박상주 기자 redphoto@ekn.kr

[데스크 칼럼] 정용진 회장, 조직 DNA ‘재 각인’이 필요하다

스타벅스코리아의 5·18 민주화운동 폄훼 논란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온라인에서는 스타벅스 불매 인증과 구매 인증이 경쟁적으로 올라오고, 오프라인에서는 시민단체의 고소·고발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정부와 정치권이 사태에 불을 지피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사태 발생 당일인 18일 '저질 장사치'라고 표현한데 이어 23일에는 2년 전 세월호 참사 10주기에 '사이렌 머그잔'을 출시한 것을 거론하며 '악질 장사치'라고 비판 수위를 높였다. 이에 동조해 행정안전부 장관은 각종 국민참여 설문조사와 공모전 등에 스타벅스 상품권을 활용하지 않겠다고 밝혔고, 국방부는 스타벅스와 체결한 격오지 부대 방문 음료 지원 사업을 잠정 중단했다. 법무부는 검찰청에 스타벅스 구매 내역을 점검하도록 했고, 국가보훈부는 당분간 스타벅스 상품권을 사용하지 말라는 내부 지침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6.3 지방선거를 앞둔 정당들과 후보들이 이번 이슈를 선거에 이용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중앙정부부처들이 특정 기업 불매에 나선 것은 공공행정에서 형평성, 일관성, 예측가능성의 중요성을 감안하면 과도해 보인다. 앞으로 민주주의 역사와 사회적 가치를 가볍게 여기는 사건, 국가적 비극을 폄훼하는 사건이 또 발생하면, 그때마다 해당 기업을 모두 불매할 것인가. 불매의 판단 기준은 무엇으로 정할 것인가. 행정부가 갈등의 중재자가 아닌 갈등의 증폭자가 돼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이 모든 사태의 발단은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에서 비롯됐음을 부인할 수 없다. 경영학에서는 기업이나 조직의 '관성적 행동'을 설명할 때 '임프린팅(각인효과)'이라는 개념을 쓴다. 초기 창업기나 CEO 교체기와 같은 '민감한 시기'에 창업주나 교체된 CEO의 개인적 성향이 조직의 문화, 전략, 관행에 마치 '도장'처럼 새겨져 이후 시간이 지나고 외부 환경이 변화돼도 초기에 새겨진 창업주(CEO)의 DNA가 사라지지 않고 지속된다는 개념이다. 정용진 회장은 신세계그룹 부회장 시절이던 2021~2022년 사이에 수차례에 걸쳐 자신의 SNS에 '멸공' 등 자신의 개인적 성향을 드러내는 게시물을 수 차례 올렸다. 이후 2024년 신세계그룹 회장에 오른 이후에는 SNS 활동을 전면 중단하고 과거 게시물을 삭제하기까지 했지만, 이미 80만명이 넘는 인스타그램 팔로워를 보유한 인플루언서인 정 회장의 성향은 널리 알려진 상태다. 문제는 정 회장이 외부로 드러낸 개인적 성향을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은 외부 팬들이나 소비자, 투자자보다 내부 조직 구성원이라는 점이다. 그룹 오너의 의중을 다른 직원보다 더 빠르게 간파해 더 충실하게 이행하고자 직원들간 경쟁을 벌이는 상황은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정 회장이 자신의 SNS 활동을 두고 개인적인 일상이라거나 팬들과의 소통이라고만 여겼다면 이를 조직 내부 구성원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간과한 경솔한 행동이었다고밖에 할 수 없다. 지난 18일 최측근 중 한 명이던 손정현 스타벅스코리아 대표를 해임하고 당시 사태에 대해 격노했다는 정 회장은 26일 신세계그룹 차원에서 진행한 진상조사 결과와 함께 직접 대국민 사과를 발표한다. 정 회장이 이번 사태를 온전히 수습하고자 한다면 그룹 내에 어떤 과거의 각인이 남아있는지 파악하고 '재각인(Re-imprinting)' 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김철훈 기자 kch0054@ekn.kr

[데스크 칼럼] ‘선거’에서 이기는 법

이번 6·3 지방선거와 재·보궐선거에 이름을 올린 후보는 모두 7829명이다. 평균 경쟁률은 1.8대 1. 숫자만 놓고 보면 싱거워 보인다. 실제로 기초단체장 3명과 지방의원 510명 등 513명은 무투표 당선을 확정지었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분위기는 달라진다. 광역단체장과 재보선 경쟁률은 3.4대 1. 단 한 사람만 살아남는 구조인 만큼 치열할 수밖에 없다. 마치 시리즈 '오징어게임'을 연상케 한다. 후보들에겐 하루하루가 생존 경쟁일 수밖에 없다. 정치인들이 선거를 두고 “전쟁"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같은 절박함은 선거판을 더욱 뜨겁게 달군다. 후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오는 21일부터 선거 전날인 다음 달 2일까지 13일뿐이다. 한 번이라도 더 새벽 시장을 돌고, 출근길에 고개를 숙이고, 밤늦게까지 지역 곳곳을 훑는다. 선거는 결국 사람을 만나 마음을 얻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과정이다. 선거의 본질은 국민에게 더 나은 미래를 제시하는 경쟁이어야 한다. 현실의 선거판은 늘 정책보다 감정이 먼저 앞서기 마련이다. 이번 선거 역시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되기도 전에 벌써부터 네거티브 공방이 전면에 등장했다. 서울시장 선거가 대표적이다. 정원오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무능 심판론'을 내세우고 있고,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는 '부동산 실정론'으로 맞받고 있다. 양당 지도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청래 민주당 대표는 '내란 청산'을 외치며 지지층을 자극하고 있고,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이재명 심판'이라는 프레임으로 보수층 결집에 사활을 걸었다. 특히 전통적인 보수의 텃밭으로 여겨졌던 대구·경북과 부울경 지역이 이번 선거 최대 승부처로 떠올랐다. 격전지로 꼽히는 부산 북구갑 보궐선거만 봐도 후보들마다 '철새', '손털기', '강남 도련님' 같은 꼬리표가 붙어 있다. 투표일이 다가올수록 정치권의 언어는 거칠어지고, 민생은 뒤로 밀린다. 유권자들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정작 국민이 듣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다. 폭등한 집값에 좌절하는 청년들, 고물가에 신음하는 서민들, 생존의 벼랑 끝에 선 자영업자들에게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지금 정치권은 삶의 문제보다 상대 진영을 공격하는 데 더 많은 힘을 쏟고 있다. 선거라는 게임의 룰은 단순하다. 가장 많은 표를 얻는 사람이 이긴다. 선거는 상대를 탈락시키는 데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유권자들은 생각보다 훨씬 영리하다. 누가 더 자극적인 말을 하는지보다 누가 현실을 제대로 보고 있는지를 본다. 청년의 불안, 자영업자의 한숨을 읽고 실질적인 해법을 내놓는 후보에게 표심이 움직인다. 선거운동 기간 13일은 짧다. 하지만 민심의 흐름을 바꾸기에는 충분하다. 상대를 향한 설전보다 국민의 삶에 대한 고민이 더 많이 보이는 선거. 그 비전을 보여주는 후보만이 마지막에 웃을 수 있다. 진짜 승리의 조건은 유권자의 삶을 정확히 읽어내는 데 있다. 유권자가 원하는 것은 상대를 향한 네거티브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바꿀 해법이다. 선거에서 최종 승자는 유권자의 마음을 움직인 후보다. 오유신 기자 news@ekn.kr

[데스크칼럼] 두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는 환상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한 마리도 못 잡는다"는 속담이 있다. 욕심을 부려 동시에 두 가지 일을 처리하려다가 결국 둘 다 이루지 못하고 실패하는 상황을 뜻한다. 이재명 정부의 산업과 기후와 에너지 정책을 보고 있노라면 이 속담이 절로 떠오른다. 이재명 정부는 핵심 국정과제로 AI 3대 강국과 탄소중립을 정했다. 그러나 두 과제는 서로 상반되는 특징을 갖고 있어 절대 동시에 달성할 수 없다. AI는 엄청난 전력을 필요로 한다. 대표적으로 미국 수도 워싱턴DC와 인접한 버지니아주는 최근 6년간(2019~2025) 신규 전력수요가 3000만MWh 증가했다. 1.4GW급 원전 3기 분량이다. 대부분의 신규 수요는 데이터센터 증설 때문이다. 이 많은 양의 전력을 24시간 끊김없이 공급할 수 있는 발전원은 원전, 석탄, 가스밖에 없으며, 이를 짧은 기간 안에 공급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가스밖에 없다. 미국은 가스발전 건설에 주저함이 없다. 미국은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천연가스를 생산하고 있지만, 이것도 모자라다며 더 많은 시추와 생산을 장려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초 “드릴, 베이비, 드릴"을 외친 것도 이 때문이다. 드릴은 시추를 뜻한다. 미국은 이 덕분에 현재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AI 강대국이 되고 있다. 세계 AI 서비스 가운데 이용률이 가장 높은 챗GPT, 제미나이, 클로드, 퍼플렉시티 등은 모두 미국에 기반을 두고 있다. 막대한 AI용 전력을 공급하려면 탄소 배출은 증가할 수밖에 없다. 미국은 AI를 얻기 위해 탄소중립을 포기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파리기후협약부터 재탈퇴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도 AI 3대 강국을 위해 중요한 입법이 진행 중이다. 대표적으로 인공지능 데이터센터(AIDC) 특별법안이 지난 7일 국회를 통과했다. 당초 법안에는 AIDC 사업자가 직접 전력을 사용할 수 있는 대상에 재생에너지와 LNG가 포함됐다. 하지만 결국 LNG는 빠졌다. 전력산업을 총괄하는 기후에너지부의 강력한 반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후부는 LNG를 허용할 경우 탄소중립이 저해될 수 있다며 이를 반대하고 있다. 법안이 그대로 국회를 통과하면서 AIDC 사업자들은 전력을 한전으로부터 공급받거나, 재생에너지로만 공급해야 한다. 한전이 공급한다면 새 발전소를 짓고 전력망도 구축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추세를 봤을 때 과연 어느 세월에 이걸 다 할 수 있을까. 사업자가 직접 재생에너지로 공급한다면 수백MW 규모의 태양광, 풍력을 구축해야 하는데, 과연 어느 지역에서 이게 가능할까. AI 사업자 입장에서 봤을 때 미국은 AI 천국, 한국은 AI 지옥이나 다름없다. 어느 사업자가 AI 지옥에 오려 하겠는가. 이래놓고 AI 3대 강국을 꿈꾸는 건 어불성설이다. 이재명 정부는 AI 3대 강국을 잡던지, 아니면 AI를 포기하고 탄소중립을 잡던지 선택을 해야 한다. 이제 정부는 솔직해져야 한다. AI 3대 강국이라는 비전이 진심이라면, 탄소 배출 증가를 감수하더라도 LNG나 원전 같은 현실적인 에너지 믹스를 과감히 수용해야 한다. 반대로 탄소중립이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가치라면, AI 강국 목표는 불가능함을 자인해야 한다.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 실익 없는 명분 싸움을 멈추고, 대한민국 경제의 백년대계를 위한 '고통스러운 선택'을 내릴 시점이다. 윤병효 기자 chyybh@ekn.kr

[데스크 칼럼] 안보자원으로 떠오른 ‘재생나프타’ 법제화 서둘러야

중동전쟁 여파로 플라스틱 제품의 핵심 원료인 '나프타'가 자원 안보의 키워드로 떠올랐다. 최근 지속되고 있는 나프타 수급불안은 석화업계는 물론 식품, 유통 등 생활경제 전반에 불안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에 정부는 지난달 28일 나프타 수급불안 상황에서 지속가능한 플라스틱 순환경제 생태계 구축을 위해 '탈플라스틱 순환경제 전환 추진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불필요한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고 재생원료 사용을 늘려 2030년 폐플라스틱 배출량을 당초 전망치 1000만톤에서 700만톤으로 줄이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 계획은 중동전쟁을 계기로 정부가 내놓은 종합적인 탈플라스틱 계획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세부 내용을 보면 호르무즈 해협 봉쇄 등 긴박한 상황 속에서 마련된 대책이 무색할 정도로 구체적인 계획이나 시행 일정이 결여돼 있다. 특히 중동전쟁으로 수급 불안이 커진 나프타 수요를 대체할 수 있는 핵심인 '재생 나프타' 활용 방안은 찾아볼 수 없다. 이 계획은 '재생원료로 나프타 수입을 대체한다'며 “폴리에틸렌(PE)·폴리프로필렌(PP) 등으로 만든 식품·화장품 용기, 비닐류를 재생원료를 사용할 수 있도록 업계와 논의해 목표율을 설정할 예정"이라고 밝혔지만, 언제까지 얼마의 사용량을 의무화할지 등 세부 내용은 없다. 특히 나프타에서 직접 생산되는 제품이 아닌 페트(PET)병 재생원료 의무사용이나 경찰복의 재생 폴리에스터 재사용, 장례식장 일회용기 사용 감축 등 다소 지엽적인 실천계획이 나열돼 있다. 바이오디젤, 지속가능항공유(SAF) 등 '재생연료'에 비해 재생 나프타 등 '재생원료'에 대한 법제도가 상대적으로 미흡한 이유는 고품질 재생원료 생산기술이 상대적으로 난이도가 높아 그동안 법제도로 규율할 만큼의 제품이 개발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내에는 폐플라스틱·폐비닐을 열분해해 재생유로 만드는 업체가 약 20곳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생산하는 재생유는 모두 중질유 수준의 저급 품질로, 나프타분해시설(NCC)에 직접 투입할 수 있는 나프타급 재생원료가 되지 못하고 정유시설에서 원유에 섞어 정제하는데 그칠 뿐이다. 순도가 낮은 만큼 가격도 싸다. 그러다 지난해 11월 국내 한 벤처기업이 폐플라스틱·폐비닐을 전기로 열분해해 NCC에 직접 투입할 수 있는 고품질의 '나프타급 재생원료'를 상용 생산하는데 세계 최초로 성공했다. 이 기업이 생산하는 나프타급 재생원료는 유럽의 글로벌 자원 트레이딩 기업 T사로부터 NCC에 직접 투입 가능한 수준이라는 품질 테스트 결과를 받기도 했다. 더욱이 이 기술은 기존 열분해유 생산업체들이 사용하는 고온 열분해 방식이 아니라 전기를 사용하는 저온 열분해 방식이라 온실가스·대기오염물질 배출이 없다는 점에서도 획기적이다. 그러나 세계 유일의 기술로 만든 재생유다보니 이 제품을 다루는 품질 기준이나 의무 사용 규정 등이 전무하다. 이 제품은 품질상 나프타급이지만 법적으로 기존 중질유급 재생유와 똑같은 제품으로 분류된다. 저급 재생유와 같은 가격이 책정되고 의무사용 규정도 없으니 기껏 개발해 놓은 기술이 적극 활용되기 어렵다. 법제도가 기술의 발전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대표적 사례다. 정부와 국회는 이제라도 신기술 발전을 반영해 기존 저품질 재생원료가 아닌 나프타급 재생원료에 대한 법제도 마련을 서둘러야 한다. 우선 재생유 품질기준을 세분화해 재생연료, 일반원료, 나프타급 재생원료 등을 명확히 구분하고, SAF나 바이오디젤에 적용되는 재생연료 의무사용 제도를 고품질 재생원료에도 도입해야 한다. 이밖에 국가산업단지에 재생나프타 생산시설 우선 설치, R&D 지원 등을 통해 시급한 과제로 떠오른 나프타 수급 문제에 보다 신속히 대처해야 한다. 김철훈 기자 kch0054@ekn.kr

[데스크 칼럼] 집단소송법 소급적용, 누구를 위한 법인가

지난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집단소송법 제정을 위한 공청회가 열렸다. 집단소송제는 제조물·금융·통신·이커머스 등 소액 피해자가 다수 발생하는 사건에서 대표당사자가 가해 기업이나 국가를 상대로 승소하면 그 판결의 효력이 소송에 참여하지 않은 다른 피해자에게도 자동으로 미치도록 하는 제도다. 현대의 대량 생산·유통·소비 사회에서 대규모 불특정 다수의 피해 구제 방안으로 필요성이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정부와 여권이 추진하고 있는 집단소송법은 그 효과에 의문이 든다. 선례가 없을 뿐 아니라 우리 법체계와 맞지 않은 파격적인 내용을 다수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대표당사자가 승소하면 명시적으로 소송 불참을 표명한 피해자를 제외하고 모든 피해자가 자동으로 배상받지만, 반대로 대표당사자가 패소하면 소송 불참을 표명하지 않은 피해자는 더 이상 동일 사건에 대해 소를 제기할 수 없다. 이는 집단소송제의 '기판력(旣判力)' 때문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헌법상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옵트 아웃(명시적으로 제외를 표명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포함)' 방식에 '소급 적용'이 결합되면 법의 파급효과는 더욱 예측하기 어려워진다.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 등이 대표발의한 집단소송법안들은 법 시행 전에 손해배상청구의 사유가 발생한 경우에도 적용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우리 법체계는 소급입법 금지 원칙을 두고 있지만 이 법안 발의자들은 2011년 처음 공론화된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나 지난해 발생한 쿠팡 정보유출 사태 등 피해 구제가 완료되지 않은 사건은 부진정 소급입법이 가능하다는 입장인 것이다. 그러나 집단소송의 천국 미국에서도 '옵트 아웃' 방식은 일반화돼 있지만 소급 적용은 매우 엄격히 제한된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옵트 아웃' 방식의 집단소송제를 도입하고 있는 증권관련집단소송법도 불소급 원칙에 따라 법 시행 이후 행위부터 적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손해배상액 산정도 논란거리다. 발의된 법안들은 정확한 손해액을 산정하기 곤란한 경우 '표본적·평균적·통계적 방법'으로 정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지난해 발생한 쿠팡 사태의 경우 손해배상액은 얼마나 될까. 증권집단소송법은 거래이력 등 비교적 손해액을 산정하기 용이하지만 무단결제 등 2차 피해가 미미했던 쿠팡 정보유출 사태 피해자들의 정신적 피해는 얼마로 산정해야 할까. 만일 1~2년 후 2차 피해가 발생한다면 입증 책임 부담까지 떠안게 될 쿠팡의 배상액 규모는 더욱 예측하기 어려워진다. 이는 경영 불확실성을 크게 높인다. 문제는 현재 발의된 법안들이 모든 분야, 모든 기업의 손해배상청구소송 전반에 포괄적으로 적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옵트 아웃 방식에 소급 적용까지 결합돼 기업은 언제 수백억~수천억원의 손해배상소송에 휘말릴지 예측하기 어렵다. 이 정도 배상액이면 중견·중소기업은 하루아침에 문닫을 수밖에 없다. 기업이 존폐위기에 처했을 때 가장 큰 위협을 받는 자들은 종사자들과 소액주주, 소액채권자, 하청업체들이다. 정부와 여권은 중대재해처벌법, 노란봉투법 등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충격요법'이 필요하다고 보는 듯하다. 그러나 정부나 거대여당이라면 소비자, 노동자, 주주, 경영자 모든 경제 주체에게 새로 만드는 법제도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 두루 살펴 신중한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김철훈 기자 kch0054@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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