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E칼럼]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 부지 찾기보다 먼저 할 일

집을 지을 때, 땅부터 덜컥 사는 사람은 드물다. 어떤 집을 지을지 설계도부터 그린다.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도 마찬가지다. 부지 찾기보다 먼저 정할 것이 있다. 무엇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지를 담은 기준처분시스템(이하 '처분시스템')이다.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의 영구처분은 단순히 폐기물을 땅속에 묻는 일이 아니다. 폐기물을 어떤 형태로 만들어 어떤 용기에 담을지, 어떤 완충재로 감쌀지, 어떤 암반을 천연방벽으로 삼을지, 각 방벽이 오랜 세월 어떤 안전기능을 맡을지를 하나의 체계로 설계하는 일이다. 처분시스템은 처분시설의 설계도에 그치지 않는다. 어떤 지질환경이 필요한지, 무엇을 연구·실증해야 하는지, 장기 안전성을 어떻게 입증할지를 결정하는 출발점이다. 따라서 처분시스템을 먼저 정립하고 그 성능을 실증하면서, 이에 적합한 지질 조건을 갖춘 부지를 찾아야 한다. 동시에 부지조사 결과를 반영해 처분시스템을 구체화해야 한다. 결국 처분시스템이 부지 선정을 이끌고, 부지가 그 시스템을 검증·보완하는 순환이 되어야 한다. 우리나라도 이 작업을 해왔다. 한국원자력연구원 등을 중심으로 수십 년간 처분기술을 연구해 왔고, 최근에는 관리사업자로 지정된 한국원자력환경공단이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사업을 담당하고 있다. 태백에 지하연구시설 건설이 추진되고, 영구처분시설 부지 선정도 곧 시작된다. 그렇다면 이제 물어야 한다. 우리가 지금껏 연구해 온 처분시스템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국민이 알아야 할 것은 “안전하게 처분하겠다"는 원론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채택한 처분 원칙과 개념, 공학적·천연 방벽의 구성, 그리고 장기 안전성 입증 방법이다. 이는 단순한 정보공개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향후 건설할 지하연구시설과 영구처분시설의 기술적 타당성을 검증하는 출발점이다. 핀란드와 스웨덴이 이를 잘 보여준다. 두 나라는 사용후핵연료 처분을 위해 'KBS-3' 개념을 오랫동안 발전시켜 왔다. 사용후핵연료를 구리와 주철로 만든 이중 용기에 넣고 벤토나이트로 감싼 뒤 안정된 암반에 묻는 다중방벽 방식이다. 오랜 연구개발과 현장 실험으로 각 방벽의 성능과 부지 특성을 검증하고, 이를 종합해 처분시스템의 장기 안전성을 평가해 왔다. 핀란드는 이미 올킬루오토섬에 온칼로 처분시설을 짓고 운영허가 절차를 밟고 있다. 2026년 8월 핀란드 안전규제기관 STUK는 이 시설이 안전요건을 충족한다고 평가했다. 스웨덴도 KBS-3를 기반으로 포르스마르크에 처분시설을 건설 중이다. 두 나라의 경험이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처분시스템의 기본 개념과 안전요건을 먼저 확립하고, 그 개념을 검증할 수 있는 지질 조건을 갖춘 부지를 찾되, 부지조사 결과에 따라 처분시스템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우리도 이제 그동안 쌓아 온 처분시스템 연구성과를 공개해야 한다. 물론 모든 자료를 공개할 필요는 없다. 기술적·법적으로 공개가 제한돼야 할 사유가 있다면 제외하면 된다. 그러나 처분의 기본원칙과 개념, 처분시스템의 구성, 각 방벽의 안전기능, 설계의 기본방향, 장기 안전성 입증전략, 지하연구시설에서 검증할 핵심 과제만큼은 공개해야 한다. 공개는 오히려 연구의 완성도를 높인다. 외부 전문가가 검토하고 다른 연구자가 문제를 제기하며 빈 곳을 메울 수 있기 때문이다.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장은 특정 지역에 짓지만, 그 안전의 책임은 지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초장기 안전성을 전제로 하는 국가적 사업이다. 그래서 부지 선정 과정에서 지역주민에게 “이곳이 안전하다"고 설명하려면, 먼저 무엇을 어떻게 처분할지부터 제시해야 한다. 현행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에 관한 특별법」 제5조도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와 시설의 부지 선정·건설·운영 등 주요 사항을 국민에게 투명하게 공개하도록 하고 있다. 부지 선정이 처분시스템 확립보다 앞서면, 부지 특성에 맞춰 처분개념을 뒤늦게 조정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처분시스템의 안전성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는다면 지역주민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 잘못 끼운 첫 단추를 바로잡으려면,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을 치러야 한다.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의 첫 단추는 부지가 아니다. 우리가 선택한 처분시스템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검증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지하연구시설의 연구 방향이 분명해지고, 부지 선정의 기술적 기준도 또렷해진다. 그간 연구한 처분시스템을 이제 국민 앞에 내놓을 때다. 문주현

[EE칼럼] 원자력 르네상스, 사람을 준비해야

임은정 공주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최근 세계 곳곳에서 “원자력 르네상스"가 회자된다.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저탄소 전력원으로서의 가치, 전쟁과 지정학적 갈등으로 인한 에너지 안보에 대한 경각심에 더해 인공지능(AI)과 데이터센터의 급속한 확산에 따른 가파른 전력수요 증가가 원자력에 대한 관심을 다시금 끌어올렸다. 신규 원전 건설을 추진하거나 기존 원전의 수명을 연장하려는 국가가 늘고 있으며, 소형모듈원자로(SMR)를 비롯한 차세대 원자로 개발 경쟁도 치열하다. 그러나 이러한 원자력 르네상스가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기술과 자본만으로는 부족하다. 결국 원전을 설계하고 건설하며, 운영하고 규제할 사람이 필요하다. 주요 원전 운영국들은 이미 이 문제와 마주하고 있다. 미국 에너지부(DOE)의 조사에 따르면 원자력발전 관련 제조업체의 63%가 인력 채용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2월 결정한 「7차 에너지기본계획」에서 재생에너지뿐만 아니라 원자력의 최대 활용을 기조로 정한 일본에서는 후쿠시마 사고 이후 원자력 관련 전공자가 감소하면서 인력의 고령화와 기술 전승 문제가 새로운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한국의 상황은 조금 더 복잡하다. 국내 원자력 산업 인력은 최근 다시 증가하고 있지만, 원자력 전공 입학생은 2024년 709명에서 지난해 654명으로 감소하는 등 대학의 인력 공급 기반은 오히려 약화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동시에 국내에서는 기존 원전의 계속운전과 신규 원전, 혁신형 SMR 개발, 원전 해체와 사용후핵연료 관리 등 서로 다른 분야의 전문인력 수요가 늘고 있다. 여기에 체코 두코바니 사업을 시작으로 해외 원전 수출이 확대된다면 필요한 인력의 범위는 더욱 넓어진다. 문제는 숫자 너머에도 있다. 원자력은 사람을 뽑는다고 곧바로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산업이 아니다. 원전의 설계와 제작, 건설, 시운전, 운영, 정비에서부터 규제와 핵안보, 안전조치, 방사선 방호, 핵연료와 사용후핵연료 관리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에서 오랜 교육과 경험을 쌓은 전문인력이 필요하다. 특히 원전 건설이 오랫동안 중단됐던 국가에서는 숙련된 기술과 경험을 다음 세대로 어떻게 이전할 것인가가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된다. 따라서 원전 르네상스 시대를 맞아 인력 문제 역시 한 국가의 문제로만 접근하기 어렵다는 공감대가 형성될 필요가 있다. 원자력 공급망을 공유하고 높은 수준의 안전·비확산 기준을 함께 유지하는 신뢰할 수 있는 국가들 사이에서 인력 수급에 관한 정보를 보다 체계적으로 공유할 필요가 있다. 어느 국가에서 어떤 분야의 인력이 언제 얼마나 필요한지, 어느 분야에서 부족이 예상되는지를 미리 파악한다면 대학과 연구기관, 기업의 교육 프로그램을 보다 장기적으로 설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 특정 프로젝트에서 전문인력이 일시적으로 부족할 경우 국가 간 교육과 파견, 공동훈련 등을 통해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방안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협력은 한국에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한국은 원전을 직접 설계하고 건설하며 장기간 운영해 온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다. 여기에 해외 원전 건설 경험까지 가지고 있으며 원자력 안전규제와 비확산 분야에서도 상당한 경험을 축적해 왔다. 앞으로 원전 수출 경쟁에서도 이러한 경험과 인적 자산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처음으로 원전을 도입하는 신규 진입국의 경우 이 문제는 더욱 중요하다. 원전 건설을 결정하는 것만으로 원전 운영이 자동으로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원전을 안전하게 운영할 기술자뿐 아니라 독립적으로 이를 감독할 규제기관과 전문인력, 비상대응 체계, 핵안보와 비확산 역량, 그리고 다음 세대의 인력을 길러낼 대학과 교육기관까지 필요하다. 이러한 제도와 인력은 원자로처럼 완제품으로 수입할 수도, 단기간에 만들어 낼 수도 없다. 따라서 운영자 교육, 규제 역량 강화, 대학과 연구기관의 인력 양성, 정비와 안전문화 교육까지 포함하는 장기적인 인적 역량 구축 프로그램이 한국 원전 수출 패키지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이는 수입국의 원자력 안전을 높이는 동시에 공급국과 수입국 사이에 수십 년간 지속되는 신뢰와 협력 관계를 만드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원자력 르네상스가 현실이 될수록 가장 희소한 자원은 연료보다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원자로는 수출할 수 있지만 경험은 하루아침에 수출할 수 없다. 지금부터 국내 인력의 양성과 기술 전승을 준비하고, 신뢰할 수 있는 국가들과 인력 협력체계를 구축하며, 신규 진입국의 인적 역량 구축까지 원전 수출 전략에 포함해야 하는 이유다. 다가오는 원전 르네상스에서 한국이 원자로뿐 아니라 상대국의 원자력 인력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국가로 자리매김하기를 기대한다. bienns@ekn.kr

[EE칼럼] 물에너지, 기술 목록을 넘어 정책 패키지로

가뭄이 오면 발전소의 냉각수와 수력발전량이 줄고, 폭염이 오면 전력수요와 상수도 처리·이송에 필요한 전기가 함께 늘어난다. 데이터센터와 첨단산업단지는 전력뿐 아니라 대규모 용수와 냉각, 폐열·하·폐수 처리능력까지 요구한다. 이제 물 문제와 에너지 문제를 따로 풀 수 없는 이유다. 이런 배경에서 국제적으로 확산한 개념이 물-에너지 넥서스(WEN)다. 유엔(UN), 유럽연합(EU), 국제에너지기구(IEA) 등은 물과 에너지의 상호의존성을 하나의 체계로 보고 정책, 투자, 규제와 인프라 계획을 함께 논의해 왔다. 넥서스는 유행어가 아니라 한 부문의 선택이 다른 부문의 비용과 위험으로 이전되는 것을 막기 위한 정책조정의 틀이다. WEN은 물이 에너지 생산에 필요한 '워터 포 에너지(water for energy)'만을 뜻하지 않는다. 물을 취수·이송·정수·재이용하고 하·폐수를 처리하는 데 에너지가 드는 '에너지 포 워터(energy for water)'까지 함께 봐야 한다. 양수발전, 수상태양광, 수열, 조력발전처럼 물과 에너지가 한 사업에 등장한다고 자동으로 넥서스가 되는 것도 아니다. 두 방향의 영향이 입지, 규모, 운영과 투자 결정에 실제로 반영돼야 한다. 한국은 WEN을 정책에 적용할 필요성이 특히 크다. 국토와 산업이 밀집돼 있고, 하나의 댐이 용수공급·홍수조절·수질·생태·발전을 동시에 맡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국가물관리기본계획과 전력수급기본계획은 각자 수립·운영되고 두 계획의 연결은 아직 약하다. 기후변화, 인구, 산업구조, 전력·용수 수요 같은 기본 전제와 시나리오부터 맞추지 않으면 가뭄과 폭염 때 계획 간 충돌이 커질 수 있다. 단기적으로는 물과 전력 계획이 공동 시나리오와 데이터를 사용하고, 대규모 산업입지와 공공투자 단계에서 물·전력·열 영향을 함께 검토하도록 해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국가 물관리, 전력 수급, 산업입지, 집단에너지와 지역개발을 연계하는 종합계획 체계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새 계획을 하나 더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존 법정계획을 공통 기준과 조정 절차로 묶는 작업이다. 여기서 WEN과 물에너지 산업정책은 구분하되 연결해야 한다. WEN은 사업을 평가하고 조정하는 의사결정 원칙이고, 물에너지 산업은 그 원칙 아래 양수발전·수상태양광·수열·조력과 수처리 에너지 회수 같은 기술과 서비스를 묶어 육성하는 정책 패키지다. 개별 기술만 나열해서는 산업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공동 목표, 시장, 지원수단과 담당 체계가 있어야 한다. 재생에너지의 성장이 이를 보여준다. 태양광, 풍력, 수력, 바이오에너지는 기술적으로 서로 긴밀한 하나의 산업이 아니다. 그러나 법률이 이들을 '재생에너지'로 묶고, 보급목표와 신재생에너지 공급의무화제도(RPS), 예산, 인허가와 연구개발을 결합하면서 하나의 시장과 산업군이 형성됐다. 기술적 유사성보다 제도적 기반이 산업 확대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물에너지에도 같은 제도화가 필요하다. 가칭 '물에너지 기본법' 또는 '물에너지 산업 진흥법'을 마련해 산업의 범위와 정책목표를 정하고, 국가 기본계획, 부처 간 조정체계, 통계·산업분류, 연구개발과 실종, 공공구매·금융지원, 전문인력 양성, 지자체 사업의 근거를 담아야 한다. 법적 지위가 있어야 안정적인 예산과 시장 창출, 지역사업의 지속성도 확보할 수 있다. 다만 법은 사업 확대만을 위한 진흥법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공통 시나리오에 따른 물·에너지 통합 검토, 유역과 전력망 단위의 누적영향, 독립적인 자료 검증, 주민과 이용자의 참여, 성과가 예상과 다를 때 운영을 조정·중단·복원하는 규칙도 포함해야 한다. 그래야 '물에너지'가 선호 사업을 포장하는 이름이 아니라 국제적 WEN 원칙을 실현하는 산업정책이 된다. 올해 국내에서 본격화된 물에너지 논의도 이제 개별 사업 발굴을 넘어 법제화와 종합계획으로 이어져야 한다. 물에너지 포럼 역시 기술 소개와 협력 선언에 머무르지 않고 기본법 제정, 부처 간 계획 연계, 예산과 시장제도 마련까지 연결하는 역할을 맡을 필요가 있다. 재생에너지가 그랬듯 산업은 기술의 목록만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물과 에너지를 함께 보는 국제적 시각을 국내의 법과 계획으로 바꿀 때 비로소 물에너지 산업이 만들어진다. bienns@ekn.kr

[EE칼럼] 발전기를 끌 것인가, 암호화폐 채굴기를 켤 것인가

올해부터 호남권을 시작으로 재생에너지 출력제어에도 보상이 붙는다. 발전을 멈추라고 해놓고 손실은 나 몰라라 하던 관행에 비하면 분명한 진일보다. 그런데 한 발 물러서서 보면 그림이 묘하다. 우리 전력시장에는 이미 지어놓기만 하면 나가는 용량요금(CP)이 있고, 급전 지시로 돌리지 못한 발전기에 얹어주는 제약비발전 정산금이 있다. 여기에 출력제어 보상까지 더해졌으니, 공급 쪽에는 돌려도 주고 못 돌려도 주는 보상이 세 겹으로 깔린 셈이다. 근데 정작 전기를 쓰는 쪽, 즉 부하를 줄여주는 값에는 여전히 인색하다. 발전기를 끄는 일은 생각보다 비싸고 굼뜨다. 석탄이나 가스 같은 기력 설비는 출력을 내리는 데 수십 분이 걸리고, 급하게 세웠다 올리는 과정에서 설비 수명이 깎인다. 원전 감발에 따라 설비에 엄청난 무리가 간다는 무시무시한 의견도 많다. 인버터로 즉시 감발이 가능한 태양광은 사정이 다르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다. 그 순간 당연히 만들어졌을 전기가 영영 사라진다는 점이다. 세상에 나오지도 못한 전기에 국민이 값을 치르는 구조인 것이다. 언제까지 만들지 못한 전기에 돈을 물어줄 것인가? 사업자들은 계속 우는 소리를 할거고, 다양한 발전원들을 챙겨줘야 하는 정부는 이들 전원들이 계속 영업을 확장할 수 있게 해줘야하기 때문에 결국엔 이런 용량요금+제약비발전정산금+출력제어보상 같은 파퓰리즘에 기반한 정책에밖에 기댈 수 밖에 없다. 전문가들도 각종 전원 편을 갈라 영역 지키기만을 하고 있으니, 막상 돈을 내는 국민들은 눈가린 장님이나 다름없다. 반대로 부하를 끄면 어떻게 되나. 발전기는 그대로 돌고, 만들어진 전기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 전기를 먹고 있던 소비처가 잠시 빠져줄 뿐이고, 그 몫은 폭염 속 에어컨과 병원, 냉동창고로 흘러간다. 같은 돈을 쓰더라도 한쪽은 허공에 지불하는 것이고, 다른 쪽은 배분을 조정한 대가다. 계통 입장에서 공급을 조절하는 것보다 수요를 조절하는 편이 훨씬 싸고 빠르다는 건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우리 제도는 여태 공급 쪽만 만지작거리고 있다. 그래서 수요를 조절할 수 있는 유연성 부하가 중요한 것이고, 그동안 남는 전기로 수전해 수소를 만들어 축적하던지 열로 만들던지 전기차를 충전하던지 양수나 배터리 충전을 하던지 등등 소위 섹터커플링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경제성 부족으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암호화폐 채굴(mining)은 그 경제성에 비해서 아직 주목을 못받는거 같다. 일전에 한 세미나 자리에서 본 주제를 꺼냈는데, 전기가 안그래도 부족한데 비트코인 같은 “투기자산"을 생산하기 위해 또 전기를 낭비하자는 것이냐며 비판도 받은 바 있다. 그래서 필자도 이 소재를 꺼내기가 여전히 조심스럽다. 그러나 계통이 보는 것은 그 부하가 무엇을 위해 전기를 쓰느냐가 아니라, 신호를 보냈을 때 몇 초 만에 사라져 주느냐다. 채굴장은 결국 컴퓨터 더미다. 수백 MW를 수 초에서 수 분 안에 0으로 내릴 수 있고, 껐다 켜도 망가지지 않으며, 계통에 여유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지을 수 있다. 단 요즘 각광받는 AI 데이터센터와 헷갈리면 안되는 것이, 데이터센터는 오히려 경직성 부하로서 서비스 약정상 24시간 켜져 있어야 한다. 실제로 텍사스에서도 채굴장이 데이터센터로 갈아타면서 계통의 비상 제동장치가 줄어든다는 우려가 나온다. 물론 국내 사정은 다르다. 암호화폐 채굴은 여태 제도의 회색지대에 놓여 있어, 수요자원으로 시장에 등록될 길 자체가 열려 있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채굴이 쓸모없다는 증거가 아니라, 제도가 아직 그 소중한 쓸모를 담을 그릇을 만들지 않았다는 뜻일 뿐이다. 딱히 기술적인 문제가 존재한다기 보다는 제도적인 인허가의 문제일 뿐인거 같은데 말이다. 이러한 방식이 통할 수만 있다면, 맞지도 않을 주기적인 전력수급기본계획 같은 것을 계속 만들어 전원별 칸막이를 치면서 개별 전원의 성장을 정부가 주도하기보다는, 유연성 부하를 넓게 인정해줘서 발전원 신설도 사업자에게 완전히 맡길 수 있다. 전기가 남아돌면 뭐 어떤가? 사업자들이 알아서 남는 전기 이용해 수소를 축적하든 비트코인 채굴시키면 되지 않은가. 즉 구조적으로 수용량의 상한이 올라가는 것이다. 잉여를 흡수할 수요가 있으면 출력제어 걱정이 줄고, 출력제어 걱정이 줄면 재생에너지를 수요보다 훨씬 많이 짓는 초과건설(overbuilding)도 합리적인 투자가 된다. 수용량이 경직적으로 딱 정해져 있으니 “전력 부족한데 2배 비싼 신재생 쓰느라…멀쩡한 원전 쉬게 했다." 류의 비판도 계속 나오는게 아닌가. 언제쯤 우리는 제약발전으로 전기가 얼마나 덜 만들어졌는지, 넉넉잡은 예비율에 생산비가 얼마나 새는지를 해마다 세어보는 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전력이란 상품만 유독 시장경제의 예외가 되니, 정부는 항상 발전사업자 각각의 손익계산서를 들여다보며, 이 집은 적자가 나겠구나 저 집은 못 버티겠구나 일일이 헤아려 줘야 한다. 시장을 열어놓고 정작 그 안에서 아무도 다치지 않도록 받쳐주는 일을, 우리는 꽤 오랫동안 또 너무도 당연하게 정책이라고 부르고 있다. bienns@ekn.kr

[김성우 시평] 에너지 전환에 대한 세제지원 확대

김성우 김앤장 법률사무소 환경에너지연구소장 이달 3일 재정경제부가 '2026년 세제개편안'을 발표한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다. 부동산 세제의 개편안에 대해 언론이 하루가 멀게 다루었고, 집을 가진 사람이나 갖고 싶은 사람에게는 집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세제개편안이 초미의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2026년 세제개편안에는 부동산 이외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 대상이 있는데, 이는 에너지전환에 대한 세제지원 확대이다. 특히 법인세제 부문은 녹색전환 및 경제안보 차원에서 전략적 중요성이 높은 산업의 국내 생산기반을 확충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는 바, 기존에도 전략산업으로 다루어져 온 반도체·이차전지·AI 등에 태양광·풍력·원자력 등 에너지가 새롭게 강조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글로벌 지정학적 공급망 리스크가 반복되면서 국내에 에너지 생산 기반을 확보하려는 흐름이 전 세계적으로 가속화되고 있다는 점도 이러한 세제개편 방향의 배경이다. 에너지전환에 대한 세제개편안은 크게 두 가지를 주목해야 한다. 첫째는 신설되는 국내생산세액공제의 주요 대상이 에너지전환 품목이라는 점이다.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녹색전환 추진이 시급하고, 보호무역 확산 등으로 경제안보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산업 중 국내 생산기반이 취약한 품목을 지원하기 위하여 국내생산세액공제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다. 또한, 기존 통합투자세액공제는 시설투자(CapEx)에 대한 지원에 집중되어 있어 생산운영비(OpEx) 비중이 상대적으로 큰 산업에는 지원 효과가 제한적이었다는 문제의식도 반영되어, 생산량에 기초하여 세액공제하는 새로운 지원 체계가 마련된 것으로 풀이된다. 지원 대상은 중요성·유망성·필요성의 기준에 따라 태양광발전, 풍력발전, 이차전지, 반도체, 핵심소재, AI로봇부품의 6개가 선정되었고, 구체적인 적격품목은 조세특례제한법 시행령에서 규정될 예정이다. 적용요건으로 내국인(거주자 또는 내국법인)이 적격품목을 국내에서 직접 생산하고 직접 판매하는 경우에 적용된다. 참고로 통합투자세액공제 적용 시설 생산분과 수도권과밀억제권역 생산분은 국내생산세액공제가 적용배제되지만, 2026년 12월 31일 이전에 통합투자세액공제를 적용받은 납세자는 이를 취소하고 국내생산세액공제로 전환 신청할 수 있다. 둘째는 국가전략기술 중 '수소' 분야가 '미래형 에너지' 분야로 확대 개편된다는 점이다. 국가전략기술 및 관련 시설에 대한 통합투자 세액공제율은 일반기술 및 신성장·원천기술보다 높게 설정되어 있다. 기존 국가전략기술은 반도체, 이차전지, 백신, 디스플레이, 수소, 미래형 운송 및 이동수단, 바이오의약품, 인공지능의 8개 분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번 개편안은 '수소' 분야를 소형모듈원전(SMR, Small Modular Reactor)과 같은 '미래형 에너지' 분야로 확대 개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글로벌 초격차 성장동력 확보를 위한 3대 메가프로젝트 이행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도 안정적 에너지원 확보가 긴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태양광발전, 풍력발전, 이차전지와 같은 에너지전환 품목을 생산하거나 SMR 등 미래형에너지 기술에 투자하는 기업이라면 신설되는 국내생산세액공제과 확대되는 국가전략기술 세액공제 개편의 적용 가능성과 요건을 미리 숙지할 필요가 있다. 2025년 세제개편 역시 경제 대도약 지원을 위한 과제로 미래 전략 산업에 대한 지원 강화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그 핵심 수단으로써 국가전략기술과 신성장·원천기술의 범위를 확대했고 여기에 에너지전환 기술이 추가된 바 있는데, 올해는 중동사태까지 더해져 에너지전환에 대한 지원이 더 늘어나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세제개편안은 통상 7월 발표 후 9월 국무회의를 거쳐 정기국회에 제출되고 12월 본회의 의결로 확정되면 다음해 1월 1일 시행된다. 이에 국회 논의 과정에서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세부 내용은 하위법령(시행령·시행규칙)에서 정해질 예정이다. 따라서, 기업은 향후 국회 본건 개정안 심사 경과 및 시행령 등 하위 규정 제정 동향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할 필요가 있고, 수준 높은 세제혜택에 상응하는 엄격한 요건 입증과 사후 검증에도 미리 대비하는 자세도 필요하다. bienns@ekn.kr

[EE칼럼] 공영주차장 태양광 발전

요즘 각 시군에서는 공영주차장에 태양광발전기를 설치하는 사업이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다. 이는 주차구획면적이 1,000㎡를 넘는 공영주차장의 경우 태양광 설치를 의무화한 재생에너지법이 지난해부터 시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자체는 올 11월28일까지 태양광설치사업계획서를 한국에너지공단에 제출해야 한다. 어떤 지자체는 'ㅇㅇ형 햇빛연금' 모델로 홍보하며 적극적으로 사업에 임하는 곳도 있다. 지난해 이 법이 시행된 후 전주시정연구원은 추진 방안에 대한 연구를 통해 지난 7월 '전주시 공영주차장 내 태양광 발전설비 설치 방안 연구'라는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는 사업 방식을 공공 직접형과 민간투자 임대형, 주민참여 협동조합형, 공공 민간 협력형(SPC 등)으로 나누어 검토한 뒤 지역 내 대상 주자창 별로 유용한 사업 방식을 분석하여 다른 지자체에게도 도움이 될 만하다. 먼저 공공 직접형은 수익의 공공성이 확보되는 장점이 있지만 예산과 인력에서 어려움이 있다. 태양광 발전 보급의 초기 단계라면 공공이 앞장서 주민 수용성을 높이는 효과를 취할 수도 있지만 보급이 확대되는 단계에 들어선 지금 민간의 참여를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민간투자 임대형은 민간 발전사업자가 임차한 주차장에 자기 자본으로 설비를 설치하고 소유하는 방식이다. 공공은 임대료를 수취하지만 수익은 민간사업자에게 귀속되어 공익적 활용은 사업자의 선의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주민참여 협동조합형은 주민이 출자하여 에너지 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이 조합이 공영주차장 부지를 임차하여 태양광 발전설비를 설치·소유·운영하는 방식이다. 발전수익은 조합원에게 배당금으로 돌아가고, 수익의 일부는 지역공동체로 환원되어 에너지 빈곤층 지원 등 공익적 활동에 사용된다. 공공 민간 협력형은 지자체나 산하 공기업과 민간사업자가 공동으로 출자하여 특수목적법인(SPC)을 설립하고 이 SPC가 발전사업을 추진하는 방식이다. 자본 조달이 용이하여 시설관리공단 등 지방 공기업이 있는 지자체에서 선호하기도 하나 SPC 설립·운영의 복잡성과 비용에 비해 사업 규모가 작아 효과는 떨어지는 편이다. 주민과 이용자의 편의를 위해 운영하는 공영주차장의 목적에 비추어 보면 네 가지 방식 중 주민참여 협동조합형이 가장 적합하다는 평가이다. 따라서 주민주도형을 기본으로 하고 개별 주차장 여건에 따라 공공 민간 협력형으로 추진하되 이 경우에도 주민참여와 수익의 지역환원을 제고하기 위해 에너지 협동조합을 참여시킬 것을 권고하고 있다. 실제 전국의 주민참여 에너지 협동조합 중 91개에 대한 조사를 보면 2025년 말 현재 9만 여 명의 조합원이 참여하여 404억원의 출자금을 모으고 49MW에 이르는 411개소의 발전소를 운영하고 있다. 공공부지를 임대하여 세워진 이 발전소들은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주민들로 구성된 조합원의 공동체 자산이다. 지난해에는 각 조합별로 6% 이상의 배당을 실시하여 시민펀드(조합원차입) 이자 지급까지 하면 30억원 이상의 주민소득을 가져왔다. 더불어 조합 운영이나 발전소 관리를 위한 인력 고용을 통해 지역내 일자리도 창출하고 있다. 또한 조합별로 공익적 사용을 위해 조성한 잉여금으로 저소득 가정의 에너지 효율 향상을 위한 LED등 교체나 지역 장학기금에 기부하는 등 주민 복지 향상에 기여하고 있다. 지난해 경기도의 33개 주민참여 에너지협동조합이 사회공헌활동에 사용한 금액은 3억9천만원을 넘어섰다. 이렇듯 공영주차장을 주민참여 협동조합형으로 추진하는 것은 주민소득 향상과 공동체 자산 형성, 지역 내 일자리 창출, 공익 활동 자금 마련이라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적은 예산으로 이만한 효과를 내는 정책 사업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이미 재생에너지법에서 지자체나 공공기관이 주민참여 협동조합에 부지를 임대할 수 있는 길은 열려 있다. 게다가 지난 20일 국회를 통과한 '사회연대경제기본법'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국유재산법」, 「공유재산 및 물품 관리법」, 그 밖의 관계 법률에도 불구하고 사회연대경제기업이 사업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국유ㆍ공유재산을 직접 사용하는 경우에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방식으로 대부 또는 사용하게 할 수 있다."고 근거를 마련하였다. 공영주차장 태양광 발전 설치는 주민참여 협동조합형을 기본으로 하되 개별 주차장의 조건에 따라 공공 민간 협력형을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울러 에너지 협동조합은 더 많은 주민의 참여를 유도하고 조합원 1인1표에 의한 민주적 운영을 활성화해야 함은 물론이다. bienns@ekn.kr

[EE칼럼] 지역별 차등 전기요금제를 둘러싼 논점들

정부가 지역별 전기요금제 도입에 다시 속도를 내고 있다. 전력이 부족한 수도권의 가격은 올리고, 발전소가 몰린 지방의 가격은 낮춰 기업 이전을 유도하고 송전망 부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얼핏 보면 에너지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원론적 이야기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의 요금제 설계는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수요공급 메카니즘과 가격결정 원칙과 거리가 멀다. 도매가격 산정의 불투명성, 지역 구분의 임의성, 정산조정계수의 형평성, 송전망 건설 책임의 공백. 이 네 가지를 해결하지 않으면 지역요금제는 '정치요금'으로 전락할 것이다. 첫째, 도매가격 선정이 불투명하다. 현행 도매시장은 가격을 시장이 아니라 행정이 만든다. 발전사를 변동비 순서로 계통한계가격(SMP)이 정해지는 변동비만을 기반하여 만든 한시적인 CBP 구조이고 강제풀 시장이다. 현재 SMP는 전국 단일가격이라 계통 혼잡이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진짜 시장이라면 조류 분석을 통한 도매 지역 구분을 통하여 노드별 가격제를 채택해야 한다. 수요 공급의 구역이 어딘지 도매시장의 입장에서 명백한 구분이 필요하고 그러한 기반으로 지역의 도매 가격이 결정되어야 한다. 실제 최종 정산을 좌우하는 것은 정산조정계수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원전과 석탄 같은 저비용 전원은 SMP보다 훨씬 낮은 단가로 정산되는 등, 거래 가격과 정산 가격이 이원화된 구조를 소비자는 알 수 없다. 산정 근거와 산출 데이터가 제대로 공개된 적이 없다. LMP 전환 역시 같은 우려를 낳는다. 가격 산정 로직과 시뮬레이션 결과가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으면, 지역 간 가격 차이는 논쟁과 갈등의 빌미가 될 뿐이다. 둘째, 소매 지역 구분이 임의적이다. 애초 수도권·비수도권·제주의 3분할 방안이 반발에 부딪히자, 급하게 인천을 경기북부로 묶고, 경기 남부는 가장 비싼 지역으로 따로 분리해 내고, 강원과 충청을 묶고, 영호남을 묶는 정치적 묘수를 찾아낸 것으로 보인다. 그럴 만하다. 전력 자립도가 천차만별인 지역을 하나로 묶는 논리적 기준이 없다. 정부는 권역을 잘게 쪼개면 그 이유가 있어야 하고 현행 4권력 방식도 논리가 있어야 한다. 행정 구분은 전력의 조류 분석과 아무 상관이 없고 소매 시장도 전기의 수요공급과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어떤 원칙으로, 몇 개 권역으로 나눌 것인가. 계통 혼잡도, 전력 자립도, 지방 낙후도 등을 고려 했다지만 여전히 그 차별화는 지역을 설득하기에도 부족하고 전력만으로 지역 이전을 강요하는 인센티브로도 여전히 미약하다. 셋째, 정산조정계수의 형평성이 의문이다. 이 계수는 애초 저비용 발전원의 과도한 이익을 제한하려던 장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발전사별로 다른 계수가 적용돼 '같은 전기를 생산하고도 다른 가격'을 받는 구조가 고착됐고, 연 1회 행정적으로 결정되는 과정의 공정성은 계속 지적되어 왔다. 한전의 발전자회사가 한 개로 통합되면 막강한 발전사의 사업에 정산조정계수를 통하여 안전판 위에서 몸집을 키울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에서 비용인상은 모조리 사횢거 비용이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피해보는 몇몇 민간 LNG 발전사는 계수 적용 대상에서 빠져 LMP 도입 시 도매가격 하락을 수익성 악화로 그대로 맞을 처지다. 시장원리에 따라 각자 정산받게 하려면 그 전제인 공정하고 투명한 기준이 먼저다. 넷째, 송전망 미건설의 책임 공백이다. 지역요금제의 존재 이유는 송전 혼잡이다. 그런데 우리의 혼잡 상당 부분은 자연이 아니라 정책 실패의 결과다. 주요 송전선로 31곳 중 26곳 건설이 지연됐고 동해안의 석탄과 남해안의 재생에너지는 송전혼잡의 피해자가 되기 일보 직전이다. 한전은 송전망 독점 사업자다. 그런데 송전망 건설사업은 주민들의 반대로 절반 이상이 지연되고 있다. 지역에 발전소가 있지만 송전망도 지방을 지나간다. 주민 수용성 갈등을 방치해온 정부·한전의 책임은 묻지 않은 채, 요금 차등으로 혼잡 비용을 소비자에게 전가하는 것은 책임의 역전이다. 송전망 적기 건설을 위한 보상·협의 제도 개선을 지역요금제 도입과 반드시 병행해야 한다. 송전망 건설의 비용은 결국 혼잡 비용에서 나와야 하고 그 비용은 송전망 혜택을 보는 수도권 소비자이어야 할 것이다. 건설 미비의 책임과 미비의 혜택이 불균등한 상황에서 이러한 문제는 전혀 언급되지도 않고 정치권이 책임져야할 것을 방기한 상황이다. 지역요금제는 재생에너지 확대와 AI 전력수요 급증이 맞물린 전환의 시대에 꼭 필요한 제도다. 시장 감시 기구의 독립성 강화 역시 이 투명성의 전제 조건이다. 다만 이 네 가지 흠결을 안고 출발해서는 안 된다. 가격 산정의 투명성, 권역 설정의 과학성, 정산의 공정성, 그리고 송전망에 대한 국가의 책임이 담보될 때, 지역요금제는 비로소 국토 균형과 에너지 정의를 함께 실현하는 미래의 제도가 될 것이다. 에너지는 정치의 도구화 되고 정치적 비합리적 요금 체계의 개편은 미래 소비자의 부담일 뿐이다. 조홍종

[EE칼럼] 녹지 보존이 친환경 도시인가?

서울의 주택 공급을 위한 공공택지 개발을 둘러싸고 곳곳에서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논란이 된 용산 어린이정원 부지도 마찬가지다. 한쪽에서는 서울 도심의 귀한 땅을 활용해 주택을 공급해야 한다고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어렵게 확보한 녹지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논쟁에는 오래된 전제가 하나 숨어 있다. 개발은 환경파괴이고 보존은 친환경이라는 이분법이다. 물론 도시 녹지는 탄소를 흡수하고 열섬을 완화하며 시민에게 휴식 공간을 제공한다. 그러나 녹지가 있다는 사실과 현재의 토지 이용이 환경적으로 최적이라는 것은 다른 문제다. 용산은 더욱 그렇다. 용산공원 대상지의 기존 식생에 대한 공식 조사에서는 현존 식생의 자연성이 매우 낮은 것으로 평가됐다. 산림은 5.7%에 불과하고 조경수 27.4%, 잔디 7.5% 등 오랜 군사기지 이용 과정에서 형성된 인공적 공간의 특성이 강하다. 땅 아래도 살펴봐야 한다. 과거 용산 미군기지 내외 지하수 조사에서는 석유계총탄화수소와 벤젠 등의 오염이 실제 확인됐다. 일부 기지 내부 관정에서는 벤젠이 당시 기준치의 수백 배에 달한 사례도 있었다. 이것이 현재 어린이정원 전체의 오염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장기간 군사기지로 사용된 토지라면 지상의 나무와 잔디만큼 토양과 지하수의 상태를 철저하게 규명해야 한다. 상처에 고름이 있는지 확인하지 않은 채 붕대로 덮어둔다고 치료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땅도 마찬가지다. 필요한 곳은 제대로 조사하고 오염됐다면 철저하게 정화해야 한다. 지표가 녹색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대로 두는 것을 환경보전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때때로 자연을 인간이 손대서는 안 되는 '신의 영역'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적어도 도시 안에서 어느 땅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은 신념이 아니라 과학의 영역이어야 한다. 탄소의 관점에서 녹지 보존과 개발의 환경효과를 숫자로 한번 따져보자. 용산 어린이정원 약 30만㎡ 전체에 국내 도시녹지 연구에서 제시된 탄소흡수 원단위를 단순 적용하면 수목의 이산화탄소 흡수량은 연간 약 70~400tCO₂ 범위로 추정된다. 실제 흡수량은 수목의 밀도와 크기, 수종과 식재구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반면 서울 평균을 기준으로 5000가구가 주거에너지에서 배출하는 탄소는 연간 약 1만5000t 규모다. 물론 5000가구의 배출량 전체를 녹지의 탄소흡수량과 직접 비교할 수는 없다. 주택이 어디에 들어서든 에너지는 소비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입지와 건축방식에 따라 그 배출량을 얼마나 줄일 수 있느냐이다. 고성능 제로에너지 건축과 재생에너지, 지역에너지 시스템을 적용하면 이 운영탄소를 크게 줄일 수 있고, 직주근접에 따른 교통에너지 절감도 기대할 수 있다. 도시의 탄소를 결정하는 것은 녹지의 면적만이 아니라 건축과 에너지, 교통을 포함한 도시구조 전체인 것이다. 물론 이것만으로 개발이 환경적으로 우월하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건설에 사용되는 철강과 콘크리트에서도 상당한 내재탄소가 발생한다. 기존 수목의 탄소저장, 열섬 저감, 생태와 물순환의 가치도 함께 계산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한쪽의 숫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환경비용과 편익을 같은 계산대 위에 올려놓는 것이다. 그래야 녹지 면적만으로 도시의 친환경성을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불완전한지 알 수 있다. 정부와 서울시는 용산을 놓고 개발과 보존이라는 구호로 싸울 것이 아니라 30년, 50년의 '환경 대차대조표'를 만들어야 한다. 녹지의 탄소흡수와 열섬 저감, 건설의 내재탄소, 건물의 에너지효율과 재생에너지, 직주근접에 따른 교통 탄소 감소, 물순환과 생태, 토양·지하수 정화까지 함께 평가해야 한다. 그 결과 현재보다 환경성능이 좋아지는 개발이라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야 한다. 토양을 정화하고, 가치 있는 수목은 보존하면서 탄소흡수와 생태적 기능이 더 높은 녹지를 조성하고, 제로에너지 건축과 재생에너지, 대중교통과 직주근접을 결합하는 것이다. 개발하면서도 개발 이전보다 환경적으로 더 나은 도시를 만들겠다는 발상의 전환이다. 용산의 선택은 용산에서 끝나지 않는다. 서울의 공공택지마다 같은 갈등이 반복되고 있다. 주택은 필요하고 땅은 부족하다. 탄소중립도 포기할 수 없다. 이제 '개발은 환경파괴, 보존은 친환경'이라는 오래된 이분법을 넘어야 한다. 환경정책의 목표는 자연을 손대지 않는 것이 아니라 환경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어야 한다. bienns@ekn.kr

[특별기고] 전력수요 급증 시대, 가스 인프라를 활용해야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수립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미래 전력수요가 당초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증가할 수 있다는 전망이 제시됐다.최근 수요계획 소위원회가 반도체 클러스터와 AI 데이터센터 등 대규모 신규 수요를 반영해 제시한 2040년 최대전력 목표수요는 158.4~165.0GW로, 불과 몇 달 전 전망보다 약 27GW 늘어났다. 이는 단순히 전력수요 전망치가 높아졌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AI와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산업이 국가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에는 안정적인 전력공급 자체가 산업경쟁력이기 때문이다. 이제 전력정책은 '얼마나 많은 전력을 생산할 것인가'뿐 아니라 '필요한 전력을 언제, 어디에서 공급할 것인가'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급증하는 전력수요에 대응하려면 원전과 재생에너지 등 충분한 발전설비를 확보하고 전력망도 적기에 확충해야 한다. 그러나 대규모 발전소와 송전망 건설에는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다. 특히 반도체 클러스터와 데이터센터처럼 대규모 전력수요가 특정 지역에 집중되면 발전설비의 총량 못지않게 필요한 지역에 전력을 제때 공급할 수 있느냐가 중요해진다. 따라서 기존의 '대규모 발전-장거리 송전-수요지 소비' 방식과 함께 수요지 인근에서 직접 전력을 생산하는 분산형 전력공급 체계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분산전원의 역할을 신규 전력수요에 대한 추가 공급수단으로만 볼 필요도 없다. 기존에 대규모 발전소와 송전망을 통해 전력을 공급받던 산업체와 대형 수요처의 일부가 중소형 자가·분산발전으로 전환한다면 중앙계통이 담당해야 할 전력수요 자체를 줄일 수 있다. 이는 기존 발전설비와 송·변전망의 부담을 완화하고, 그렇게 확보된 계통의 여력을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등 새롭게 증가하는 전력수요를 수용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분산전원은 단순히 새로운 발전설비를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전력 인프라에 새로운 공급여력을 만들어내는 수단이라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다시 살펴봐야 할 것이 가스 인프라다. 우리나라는 수십 년에 걸쳐 LNG 인수기지와 주배관망, 전국의 도시와 산업단지를 연결하는 도시가스 배관망을 구축해 왔다. 그동안 이러한 인프라는 주로 가정과 산업체에 연료를 공급하는 수단으로 인식돼 왔다.그러나 전력수요가 급증하는 시대에는 가스망을 전력망과 함께 국가 에너지시스템을 지탱하는 또 하나의 에너지 수송 인프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모든 에너지를 전기의 형태로 장거리 수송할 필요는 없다. 기존 가스망을 통해 에너지를 수요지까지 운반하고, 그곳에서 열병합발전, 연료전지, 가스엔진·가스터빈 등을 활용해 필요한 전력으로 전환할 수 있다. 전력망과 가스망이라는 두 개의 국가 에너지 네트워크를 상호 보완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특히 앞으로는 대규모 가스발전뿐 아니라 수요지 가까이에 설치되는 중소형 가스 분산전원의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 중소형 발전설비는 산업단지, 데이터센터, 병원, 대형 상업시설 등 수요처의 특성에 맞춰 설치할 수 있고, 수요 증가에 따라 단계적으로 확충하는 것도 가능하다. 열수요가 있는 곳에서는 열병합발전을 통해 전기와 열을 동시에 생산함으로써 에너지 이용효율도 높일 수 있다. 여기에 '적기 전력공급(Time to Power)'이라는 가치도 주목해야 한다. 글로벌 첨단산업 투자 경쟁에서는 전력가격 못지않게 필요한 전력을 언제 공급받을 수 있느냐가 중요한 입지 조건이 되고 있다. 반도체 공장이나 데이터센터는 준비됐는데 송전망이 수년 뒤에 완성된다면 그 시간의 차이는 투자 지연과 산업경쟁력의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 이미 구축된 도시가스 배관망을 활용한 중소형 분산전원은 이러한 시간과 공간의 간극을 메울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탄소중립 시대에 천연가스 소비를 무조건 확대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천연가스 역시 탄소를 배출하는 화석연료인 만큼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한편, 장기적으로는 가스 자체의 저탄소·무탄소화를 함께 추진해야 한다. 그 가능성은 다양하게 열려 있다. 고효율 열병합발전과 연료전지의 활용을 확대하고, 바이오메탄과 청정수소뿐 아니라 재생에너지 기반 수소와 포집된 이산화탄소를 합성해 생산하는 e-메탄의 활용도 검토할 수 있다. 천연가스의 생산과 이용 과정에 CCUS를 결합해 탄소배출을 줄이는 것도 중요한 선택지가 될 수 있다. 따라서 현재의 가스 인프라를 단순히 화석연료 시대의 유산으로 볼 필요는 없다. 공급되는 가스의 탄소집약도를 단계적으로 낮추고 다양한 탈탄소 기술을 결합해 나간다면 기존 가스망은 미래의 저탄소·무탄소 에너지를 수송하고 활용하는 플랫폼으로 진화할 수 있다. 이미 구축된 인프라를 활용하면서 에너지의 탄소집약도를 지속적으로 낮춰가는 것은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과 탄소중립을 함께 추구하는 현실적인 전환전략이다. 이제 정책과 시장제도도 이러한 변화에 맞춰야 한다. 중소형 분산전원이 생산하는 전력량만을 평가할 것이 아니라 송전망 부담을 얼마나 줄이는지, 기존 계통에 얼마나 새로운 공급여력을 만들어내는지, 필요한 지역에 얼마나 신속하게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지, 계통 유연성과 에너지효율에 얼마나 기여하는지를 종합적으로 평가하고 그 가치를 적절히 보상할 필요가 있다.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도 이러한 관점이 적극 반영되기를 기대한다. 급증하는 전력수요에 대응하는 방법은 대규모 발전소와 송전망을 계속 확충하는 것만이 아니다. 신규 전력수요의 일부를 수요지에서 직접 충당하고, 기존 전력수요의 일부도 중소형 자가·분산발전으로 전환해 중앙계통이 감당해야 할 수요를 줄이는 것 역시 중요한 전력수급 대책이다. 전력수요가 급증하는 시대일수록 국가가 이미 구축한 에너지 인프라를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전력망과 가스망, 중앙집중형 발전과 분산형 발전은 서로 경쟁하는 인프라가 아니라 상호 보완하는 인프라가 되어야 한다. 전기화 시대에 가스 인프라의 역할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달라지고 있다. 급증하는 전력수요에 대응하면서 탄소중립과 산업경쟁력, 에너지안보를 함께 달성하기 위해서는 국가 에너지 인프라 전체를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새로운 발전소와 전력망을 구축하는 노력과 함께, 이미 전국에 구축된 가스 인프라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활용할 것인지 고민해야 할 때다. bienns@ekn.kr

[EE칼럼]전력투자비 조달, 원가회수율 공개가 핵심이다

지난 20일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수립 과정에서 공개된 전력수요 재전망은 충격적이다. 2040년 목표 최대전력은 지난 4월 전망한 131.8~138.2GW에서 158.4~165.0GW로 26.6~26.8GW 늘었다. 연간 전력소비량도 657.6~694.1TWh에서 847.3~885.1TWh로 약 190TWh 증가했다. 불과 몇 달 만에 최대전력 전망이 20%, 전력소비량이 28%가량 상향된 것이다. 반도체와 AI 데이터센터 등 '3대 메가프로젝트'가 전력수요 지형을 바꿨다. 전기를 어떻게 생산할지도 문제이지만, 전기를 필요한 곳까지 보낼 전력망은 누가, 무슨 돈으로 건설할 것인가. 한전은 제11차 장기 송·변전설비계획에서 2038년까지 72조8천억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이 계획에는 이미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10GW 이상 전력공급 설비가 반영돼 있다. 하지만 호남권 반도체 산단과 AI 데이터센터가 추가되고 정부가 전력망 건설 시기를 앞당기라고 요구하면서 72조8천억원 보다 크게 높아질 것이 확실시된다. 김동철 한전 사장은 최근 기후에너지환경부 업무보고에서 연간 투자비가 약 10조원, 이 가운데 송전망 투자가 약 8조원이라고 밝혔다. 지중화 확대, 주민 보상 강화, 자재비 상승까지 고려하면 부담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올해 상반기 한전의 영업이익은 4조9천억원이다. 흑자라고 안심할 상황이 아니다. 연결 기준 부채는 210조원을 넘었고 차입금은 133조원에 달한다. 상반기 이자비용만 2조1천억원이다. 여기에 정부는 11차 전기본의 2030년 재생에너지 설비목표 78GW를 100GW로 높였다. 재생에너지 확대는 필요하지만 발전설비만 세운다고 전기가 저절로 공급되는 것은 아니다. 송전망과 변전소, 에너지저장장치(ESS), 계통 안정화 설비가 함께 들어가야 한다. 반도체·데이터센터처럼 대규모 수요처가 특정 지역에 집중되면서 전력망 비용은 더 커진다. 공짜 점심이 없듯 공짜 전력망 역시 없다. 민간투자를 끌어들인다 한들 비용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처럼 한전에 차입을 떠넘기는 방식도 한계에 이르렀다. 전기요금 조정과 재정 분담을 피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와 한전은 과연 유의미한 전기요금 인상을 추진할 수 있을까. 소비자는 자신이 내는 요금이 원가보다 비싼지 싼지조차 알 수 없다. 정부가 인상률만 결정해 통보하니 요금 조정 때마다 모든 소비자가 “왜 나만 올리느냐"고 반발한다. 지역별 차등요금제 역시 원가 차이를 반영하는 것인지, 지역 지원 정책인지 구분하지 않으면 또 다른 교차보조로 기능할 가능성이 높다. 전력이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왔음에도 전기요금은 여전히 경제 논리가 아니라 정치 논리의 그늘을 못벗어나고 있다. 전기요금 탈정치화의 핵심은 '용도별 원가회수율 공개'다. 정부는 2012년까지 주택용·일반용·산업용·농사용 등 종별 원가회수율을 공개했다. 그러나 이후에는 별다른 설명도 없이 자료 공개가 중단됐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2013년 원가회수율은 평균 95.1%, 산업용 97.9%, 일반용 99.7%, 주택용 89.6%, 농사용은 35.1%였다. 산업용 원가회수율이 높아진 것은 2003년부터 2013년까지 총 11회에 걸처 80.6%를 인상한 결과이다. 2022년 이후에도 산업용은 kWh당 80.0원, 주택용은 40.4원 인상됐다. 지금은 '전기요금'이라는 명목으로 누가 누구를 얼마나 보조하고 있는지 추정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런 깜깜이 상태에서 막대한 전력망 비용 마련을 위해 전기요금을 인상한다고 하면 산업계와 일반 국민 모두 납득하기 어렵다. 정책적으로 특정 용도의 전기를 원가 이하로 공급해야 한다면 그 차액은 투명하게 계산해 정부 예산으로 지원할 때가 왔다. 복지·농업·산업정책 비용을 한전 장부 속에 숨겨 다른 소비자에게 떠넘기는 구닥다리 방식은 이참에 일소해야 한다. 원가를 알아야 지원이 필요한 경제 주체와 정책 목적이 분명해지고 그 지원 비용을 누가 부담할지도 사회적 합의를 통해 결정할 수 있다. 전기요금 인상 발표보다 앞서 정부가 해결할 일은 용도별 공급원가와 원가회수율을 공개하고 앞으로의 용도별 전기요금 인상 원칙을 세우는 것이다. “얼마나 더 지을 것인가"를 넘어서 “누가, 어떤 원칙으로 그 비용을 부담할 것인가"에 대해 모두 고민할 때다. bienns@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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