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조 영업이익에도 웃지 못한 SK하이닉스…AI메모리 훈풍 속 ‘어닝 미스’

인공지능(AI) 서버용 메모리 수요 확대에 힘입어 SK하이닉스가 또 한 번 분기 기준 역대 최대 실적을 갈아치웠다. 영업이익률은 76%까지 치솟으며 글로벌 반도체·빅테크 기업을 통틀어도 손꼽히는 수익성을 기록했다. 다만 워낙 높아진 시장 눈높이 탓에 매출과 영업이익 모두 증권가 예상치(컨센서스)에는 못 미치는 '어닝 미스'를 냈다. SK하이닉스는 29일 올해 2분기 연결 기준 매출 79조3187억원, 영업이익 60조5426억원, 당기순이익 93조9226억원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전년 동기 대비 매출은 256.8%, 영업이익은 557.2%, 순이익은 1242.5% 늘었다. 직전 분기와 비교해도 매출은 50.9%, 영업이익은 61% 증가했다. 영업이익률은 76%로 1분기(72%)보다 4%포인트(p) 높아졌다. 앞서 SK하이닉스는 1분기에 매출 52조5763억원, 영업이익 37조6103억원을 기록한 바 있는데, 이번 분기 실적으로 지난해 연간 영업이익(47조2063억원)을 단 한 분기 만에 넘어섰다. 상반기 누적 매출은 131조8950억원으로 사상 처음 100조원대를 돌파했다. 누적 영업이익은 98조1529억원, 누적 순이익은 134조2685억원으로 집계됐다. ◇ 어닝 미스에도 최고 수익성…배경엔 HBM 비중과 장기계약 역대 최대 실적이지만 에프앤가이드가 집계한 증권가 컨센서스(매출 84조원, 영업이익 64조원 안팎)에는 미치지 못했다. 업계에서는 우선 SK하이닉스는 경쟁사보다 고대역폭메모리(HBM) 매출 비중이 커, 최근 범용 메모리 가격 급등이 이끈 이익 수직 상승의 수혜를 상대적으로 덜 봤다고 본다. 또 D램·낸드 가격이 수개월째 오르며 고점에 다다르면서 2분기 단가 상승폭 자체가 1분기보다 둔화됐다. 범용 D램 상승률은 1분기 60% 중반에서 2분기 약 30%로, 낸드는 70% 중반에서 50% 중반으로 낮아졌다. 여기에 대형 고객사와 맺은 장기공급계약(LTA)으로 판매가격 일부가 고정되면서 가격 상승 효과를 온전히 누리지 못한 측면도 있다. 매출의 상당 부분이 LTA로 묶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영업이익률 76%는 마이크론(81.2%)에 이어 글로벌 빅테크 중 2위권으로, 엔비디아(65.6%)와 TSMC(60.3%)를 웃도는 수준이다. 2분기에는 2018년 베인캐피탈 컨소시엄을 통해 투자했던 키옥시아 지분 일부를 처분하며 영업외이익 62조1660억원이 추가로 발생, 세전순이익이 122조7083억원까지 늘었다. 현금성 자산은 전 분기 말보다 33조6000억원 늘어난 88조원, 차입금은 7000억원 줄어든 18조6000억원을 기록해 순현금이 69조4000억원으로 확대됐다. 최근 'AI 버블론'과 '피크아웃(정점론)' 우려로 반도체주가 조정을 받아온 가운데,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AI가 아직은 네 살짜리 어린아이인데 성인이 되려면 메모리가 쓰일 수밖에 없다"며 “메모리는 앞으로도 계속 필요하기 때문에 시간을 두면 우상향으로 간다"고 강조한 바 있다. ◇ HBM4 하반기 본격 확대…10여 곳과 장기계약, 3분기 78조 전망 SK하이닉스는 AI가 사용자를 대신해 복잡한 업무를 수행하는 에이전트 형태로 진화하면서 AI 메모리뿐 아니라 일반 메모리 수요까지 함께 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에 핵심 고객을 포함해 10여 개 고객사와 장기공급계약(LTA) 협상을 마무리했고, 다른 주요 고객과도 추가 협상을 이어가고 있다고 밝혔다. 6세대 HBM인 HBM4는 2분기 양산 출하를 시작해 하반기 생산을 본격 확대한다. 회사는 “HBM4는 고객이 요구하는 동작 속도를 구현하면서도 업계 최고 수준의 전력 효율과 원가 경쟁력을 달성했다"고 설명했다. 후속 제품인 HBM4E는 상반기 중 주요 고객사 샘플 공급을 마쳤고, 기술 성숙도와 양산 안정성을 고려해 적용 공정을 확정했다. 차세대 서버 모듈인 SOCAMM2도 2분기 판매가 크게 늘었으며, 10나노급 6세대(1c) 공정을 적용한 제품 공급이 본격화됐다. 낸드에서는 321단 제품이 이미 전체 생산량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연말까지 국내 생산능력의 50%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생산능력 확충을 위한 투자도 속도를 낸다. 충북 청주 M15X 양산 일정을 앞당기고, 내년 초 경기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1기 팹 클린룸 가동에 맞춰 설비를 신속히 투입할 준비를 하고 있다. 첨단 패키징 공장 P&T7과 낸드 생산기지 M17, 신규 클러스터 조성 등 중장기 투자는 고객 수요와 투자 효율성을 고려해 단계적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회사는 고객 수요가 공급 역량을 웃도는 상황에서, 필요한 물량을 제때 공급하는 능력이 앞으로 사업 경쟁력을 좌우할 것으로 내다봤다. 시장에서는 하반기 실적이 더 개선될 것으로 보고 있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3분기 SK하이닉스 매출은 약 100조원, 영업이익은 78조원에 이를 전망이다. 엔비디아의 신형 AI 가속기 '베라 루빈' 양산이 본격화하면서 여기에 탑재되는 HBM4 매출이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반영될 것이라는 관측이다. AI 에이전트 활용도가 높아지며 메모리 수요가 더 커지는 데다, 하반기 스마트폰 신제품 출시까지 겹치면 메모리 공급 부족은 한층 심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오일선 CXO연구소장은 “AI가 아직 초입 단계이기 때문에 반도체 수요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며 “하반기 실적도 나름대로 선방할 것"이라고 봤다. 다만 그는 “실적이 좋다고 해서 이게 바로 주가에 반영되기는 당분간 힘들 수도 있다"며 환율 변수와 최근 투자자 관심을 끌고 있는 중국 반도체 업체의 부상, 여름철 개인 투자자들의 자금 여력 약화 등을 이유로 들었다. 이어 “6월보다 점점 내려가고 있는 추세인데 실적 말고 뭔가 더 획기적인 재료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딱히 눈에 띄는 게 없다"며 “당분간은 고전을 면치 못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김하나 기자 uno@ekn.kr

[단독] 삼성전자, 평택 LNG 발전소 ‘수소 혼소’로 추진…AI·탄소감축 다 잡는다

삼성전자가 평택캠퍼스 P5 펩1,2 생산라인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추진 중인 1기가와트(GW)급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소에 수소 혼소를 적용하는 방안을 본격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29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사업 참여를 검토하는 민간 발전사들에 입찰 제안서 제출 시 수소 혼소 목표와 단계별 이행 방안을 함께 제시하도록 요구한 것으로 확인됐다. 반도체 생산시설에 필요한 대규모 전력을 LNG로 적기에 확보하면서도 향후 수소 비중을 높여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와 글로벌 탄소 규제 등에 대응하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삼성전자 측은 “수소 혼소 발전은 LNG와 수소를 함께 연소해 전기를 생산하는 방식으로, LNG 발전의 안정성을 유지하면서도 수소 비중을 높여 탄소배출을 단계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며 “AI 시대에 필요한 안정적인 전력 공급과 탄소감축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설명했다. 산업계에서는 AI·반도체 경쟁력과 탄소중립 사이에서 현실적인 접점을 찾으려는 첫 대형 프로젝트가 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삼성전자는 다음 달 중 평택캠퍼스에 500MW급 발전설비 2기, 총 1GW 규모의 LNG 열병합발전소를 건설하는 방안을 구체화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사업 방식은 GS와 E1, 한화에너지 등 민간 발전사업자가 건설·운영하는 형태와 삼성전자가 직접 사용하기 위한 자가발전 형태가 함께 검토되고 있다. 삼성전자가 최근 산업부 출신 공무원들과 한국전력 출신 인사들을 대거 영입한 만큼 자가발전 방식으로 추진할 가능성도 큰 상황이다. 주목되는 부분은 삼성전자가 단순한 LNG 발전소가 아니라 수소 혼소를 전제로 한 설비와 운영 계획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업 참여를 검토하는 발전사들은 설비의 수소 혼소 대응 능력뿐 아니라 목표 혼소율과 향후 수소 비중 확대 경로, 연료 조달 및 설비 전환 방안 등을 제안서에 담아야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따라 발전소는 초기부터 수소 혼소가 가능한 가스터빈과 부대설비를 갖추는 방향으로 설계될 가능성이 크다. 운전 초기에는 LNG를 주연료로 사용하되 수소 공급망과 경제성, 관련 제도가 갖춰지는 시점에 맞춰 실제 혼소 비중을 단계적으로 높이는 방식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삼성전자가 설비의 수소 대응 능력뿐 아니라 실제 혼소 목표까지 요구한 것은 장기간 LNG 전소 방식으로 발전소를 운영하는 데 따른 탄소배출 부담을 의식한 조치로 분석된다. 신규 LNG 발전소는 한 번 건설하면 30년 안팎을 가동하게 되는 만큼, P5에 필요한 전력만을 기준으로 사업을 설계할 경우 향후 탄소 감축 비용과 규제 부담이 커질 수 있다. 특히 삼성전자는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기업으로 국내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뿐 아니라 해외 고객사들의 RE100·CF100 요구와 공급망 탄소관리 기준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 LNG 발전으로 전력 공급의 안정성을 확보하더라도 장기적으로 배출량을 줄일 수 있는 전환 경로를 사전에 마련해야 하는 이유다. 평택캠퍼스 P5는 삼성전자의 차세대 반도체 생산능력 확대와 연결되는 핵심 시설로 꼽힌다. 반도체 공장은 24시간 전력 공급이 필요하고 순간적인 전압 변동이나 정전에도 생산라인과 수율이 영향을 받을 수 있어 발전원의 안정성이 중요하다. 그러나 대형 원전은 건설 기간과 입지 문제로 증설 일정에 맞춰 공급하기 어렵고, 재생에너지와 에너지저장장치(ESS) 조합도 현 단계에서는 1GW급 반도체 공장 전력을 상시 공급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평가가 많다. 소형모듈원전(SMR) 역시 중장기 대안이지만 상용화와 인허가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업계에서 LNG 발전을 적기 전력 공급을 위한 현실적인 수단으로 보는 배경이다. 수소 혼소는 LNG 발전의 안정성을 활용하면서 탄소배출을 단계적으로 줄이기 위한 방안이다. 다만 혼소율이 높아질수록 수소 조달 비용과 안정적인 공급망 확보, 질소산화물 배출 관리, 가스터빈 성능 유지 등의 과제도 커진다. 이 때문에 발전사들이 제안하는 혼소 목표와 실행 가능성이 사업자 선정 과정의 주요 평가 요소가 될 가능성이 있다. 이번 사업은 이재명 정부가 추진하는 AI·반도체 산업 육성과 탄소중립 정책이 실제 현장에서 어떻게 조율될지를 보여주는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정부는 반도체 메가프로젝트의 속도전을 강조하면서도 NDC 상향과 화석연료 감축 기조를 함께 유지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수소 혼소 목표를 입찰 조건에 포함한 것도 정부와의 인허가 협의에 대비한 조치라는 분석이 나온다. 삼성전자의 평택 발전소가 LNG 전소가 아닌 수소 혼소형으로 추진될 경우, 적기 전력 공급과 중장기 탄소 감축을 결합한 절충 모델로 활용될 수 있다. 향후 SK하이닉스와 AI 데이터센터, 대규모 제조업체들의 자가발전 및 분산전원 사업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에너지업계 관계자는 “P5에 필요한 전력을 제때 공급하려면 현 시점에서는 LNG가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라며 “다만 장기간 LNG만 사용하기는 어려운 만큼 삼성전자가 설비 단계부터 수소 혼소를 요구하고 실제 혼소 비중 확대 방안까지 함께 검토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어 “발전사 입장에서는 단순한 건설비와 전력단가뿐 아니라 어느 수준의 혼소율을 언제부터 구현할 수 있는지, 수소를 어떻게 조달할 것인지까지 제시해야 한다"며 “이번 입찰은 국내 대형 산업용 발전사업에서 수소 전환 경쟁력을 확인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전지성 기자 jjs@ekn.kr

[속보] SK하이닉스, 2분기 영업이익 60조5426억원…작년보다 557%↑

SK하이닉스가 올해 2분기에도 분기 사상 최대 실적을 새로 썼다. 인공지능(AI) 인프라 투자 확대에 힘입어 메모리 수요가 계속 늘면서, SK하이닉스는 지난 1분기 기록한 최고 실적을 한 분기 만에 다시 넘어선 것이다. SK하이닉스는 29일 올해 2분기 매출 79조3187억원, 영업이익 60조5426억원(영업이익률 76%), 순이익 93조9226억원(순이익률 118%)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K-IFRS 기준이다. 전분기(매출 52조5763억원·영업이익 37조6103억원)와 견주면 각각 51%, 61% 늘었다. 어닝쇼크 수준이었던 지난해 2분기(매출 22조2320억원·영업이익 9조2129억원)와 비교하면 매출은 257%, 영업이익은 557%, 순이익은 1242% 급증했다. 이로써 상반기 누적 매출은 사상 처음 100조원대에 올라섰다. D램과 낸드플래시 모두 전분기에 이어 큰 폭의 가격 상승을 기록한 영향이 컸다. 회사는 “HBM과 AI 서버용 D램, eSSD 등 고부가가치 제품 중심으로 판매를 늘려 최고의 수익성을 창출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실적 호조에 힘입어 2분기 말 현금성 자산은 전분기 말 대비 33조6000억원 늘어난 88조원, 순현금은 69조4000억원으로 확대돼 재무 여력도 크게 강화됐다. SK하이닉스는 향후 성장 기반도 다지고 있다. 핵심 고객을 포함해 10여 개 고객과 장기공급계약(LTA) 협상을 마무리했고, 차세대 제품인 HBM4는 2분기 양산 출하를 시작해 하반기 생산을 본격 확대한다. 상반기 샘플 공급을 마친 HBM4E도 준비를 마쳤다. 낸드는 321단 제품이 이미 생산량 비중 1위에 올랐고, 연말까지 국내 생산능력의 50% 수준까지 늘릴 계획이다. SK하이닉스는 M15X 양산 일정을 앞당기는 한편, 내년 초 용인 1기 팹 클린룸 오픈에 맞춰 생산능력을 확대할 방침이다. 최근 발표한 첨단 패키징 공장 P&T7과 낸드 생산기지 M17, 신규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등 중장기 투자도 단계적으로 진행한다. 다만 회사는 “설비투자 원칙(CapEx Discipline)을 유지하며 생산능력과 재무 건전성을 함께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김하나 기자 uno@ekn.kr

[인터뷰] “국가 전폭지원 中 반도체, 韓 턱밑까지 추격” 前 삼성전자 부사장의 섬뜩한 경고

“내가 볼 때는 거의 낙동강까지 갔다고 봐요." 15년간 삼성그룹 중국본사에서 반도체 투자를 진두지휘했던 이병철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위원(전 삼성전자 부사장)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6·25전쟁 당시 국군이 마지막까지 사수했던 전선에 지금의 한국 반도체 산업을 빗댄 것이다. 최첨단 반도체 일부 분야만 겨우 지키고 있을 뿐, 범용 반도체는 이미 중국이 턱밑까지 따라왔다는 얘기다. AI 붐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HBM 시장 점유율 80%를 차지하며 승승장구하는 사이, 중국은 빠르게 추격하고 있다. 지난 27일 상하이증시에 상장한 창신메모리(CXMT)는 거래 시작 1시간 만에 거래대금 1000억위안(21조원)을 돌파하며 시가총액 1위에 올랐다. 허페이시와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연구개발 인력과 반도체 기업이 집결하면서 허페이는 중국 메모리 산업의 핵심 거점으로 성장했다. 지난 24일 서울 종로구 세종연구소에서 100분간 진행된 인터뷰에서 이 위원은 이러한 흐름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의 한국 반도체 호황이 오래가지 않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삼성을 떠난 뒤 연구자의 시선으로 산업을 바라보게 된 그는 중국발 반도체 위기를 미리 경고하는 '늑대가 왔다'는 사람을 자처하고 있었다. - 반도체가 지정학이 된 계기는 무엇인가. “2019년 트럼프 1기 때 미국이 중국 화웨이를 제재하기 시작했어요. 명목상은 '이란 제재 위반' 등 국가안보 또는 외교정책 이익에 반하는 활동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막겠다는 거였죠. 제재 목록에 올려 반도체 기술이나 장비를 못 팔게 한 게 그때부터예요. 그다음 해에는 미국 기업뿐 아니라 미국 기술을 쓰는 제3국 기업도 동참하도록 강제했어요. 그때부터 삼성이나 하이닉스도 화웨이에 반도체를 공급하지 못하는 상태가 됐죠. 원래 정상적인 기업 간 거래에 미국이라는 국가가 들어와 간섭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걸 보면서 느꼈죠. '반도체가 이제 전략의 문제가 됐구나.'" 이후 바이든 행정부의 반도체법(칩스법)과 AI 시대의 개막이 겹치며 반도체는 산업을 넘어 국가안보의 핵심 품목이 됐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그는 이 흐름 속에서 한국 메모리 업계가 얻은 반사이익도 짚었다. AI 발전 초기에는 GPU의 연산 성능이 경쟁력을 좌우했지만, AI 모델이 급속히 커지면서 GPU가 처리해야 할 데이터의 양이 폭증했고 기존 D램으로는 데이터 공급 속도가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병목현상이 발생했다. 이러한 병목을 해결하기 위한 핵심 기술로 HBM이 부상했으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 시장에서 합산 약 80%의 점유율을 확보하며 AI 시대의 최대 수혜자가 됐다. - 최근 애플이 중국산 D램을 테스트하고 있다고 한다. 애플이 중국산 반도체를 채택할 경우 실제로 메모리 가격 급락 사태가 일어날 수 있나.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애플 입장에서는 공급업체가 하나 더 늘어나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상대로 가격 인하를 요구할 수 있어 메모리 가격 하락 압력이 커질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중국 업체의 기술 향상입니다. 애플이 CXMT 제품을 채택하면 품질과 성능에 대한 까다로운 피드백을 제공하게 되고, 이를 개선하는 과정에서 CXMT의 기술력도 빠르게 발전할 것입니다. 현재 한국 메모리 기업들은 높은 시장점유율을 바탕으로 막대한 이익을 창출하고 있지만, 중국 업체가 대규모 생산능력을 확보해 저가 물량 공세에 나서면 이러한 수익구조는 흔들릴 수 있습니다. 중국의 가장 큰 강점은 국가와 지방정부가 막대한 자본을 장기간 투입하며 단기 손실도 감수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가격보다 시장점유율 확보를 우선하는 물량 공세가 시작되면 개별 기업은 물론 메모리 산업 전체가 큰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EUV 노광장비를 비롯한 최첨단 반도체 장비의 중국 반입은 미국의 수출통제로 제한되고 있지만, 중국은 이미 확보한 DUV 장비를 활용하고 국산 장비와 공정기술의 수준을 높이면서 생산능력을 빠르게 확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 반도체 생산능력 증설분의 약 절반이 중국에 집중되고 있다. 이에 따라 향후 2~3년 안에 중국산 반도체 공급 물량이 본격적으로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당장 현실화되기는 어렵겠지만, 중국은 현재 '중국판 맨해튼 프로젝트'로 불리는 EUV 장비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EUV 장비까지 개발된다면 최첨단 반도체 분야도 위협받는 상황이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반도체에서는 수율이 중요합니다. 10개를 생산해 9개가 정상 제품이면 수율이 90%이고, 3개만 정상이면 30%입니다. 중국 업체들은 아직 수율과 품질 안정성에서 격차가 있지만, 생산 경험이 축적되면서 그 차이를 계속 좁혀가고 있습니다." ◇ 낙동강 전선, 그리고 희토류라는 반격 카드 -왜 '낙동강 전선'이라는 표현을 썼나. “반도체는 AI·국방·자동차·통신 등 모든 첨단산업의 기반입니다. 중국 경제 규모가 미국의 75% 수준까지 커지고 기술 격차도 좁혀지자, 미국은 이를 산업 경쟁이 아니라 안보 문제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이 첨단 장비·설계도구를 미국과 동맹국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미국이 통제 수단으로 전환한 것이죠. 국제정치에서는 이를 '무기화된 상호의존'이라 부릅니다. 공급망의 핵심 길목을 쥔 나라가 그 지위를 압박 수단으로 쓰는 겁니다. 중국은 국가 역량을 총동원해 반도체 자립에 나섰고, 이 경쟁이 시작된 지 벌써 7~8년입니다. 문제는 그 결과가 미국보다 우리에게 먼저 닥칠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중국은 최첨단 공정에선 여전히 제약을 받지만, 성숙공정과 범용 메모리엔 막대한 투자를 이어왔습니다. 그 결과 생산능력이 빠르게 늘고 있고, 본격 공급이 시작되면 우리가 주도해온 범용 D램·낸드플래시 시장 점유율과 수익성이 동시에 흔들릴 수 있습니다. 지금 한국이 확실한 우위를 가진 건 HBM 등 최첨단 메모리뿐입니다. 그런데 범용 메모리 수익이 무너지면 그 돈으로 HBM·차세대 기술에 투자해온 선순환 구조도 약해집니다. 결국 우리 우위가 최첨단 일부만 남을 수 있다는 거죠. 아직 그 단계까지 온 건 아니지만, 지금처럼 중국 생산능력이 계속 커지는데 우리가 대비하지 못하면 마지막 핵심 경쟁력만 남기고 나머지 시장을 내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봅니다." 이 위원은 미국의 카드가 반도체라면 중국의 반격 카드는 희토류라고 짚었다. “희토류는 첨단산업과 무기 생산에 반드시 들어가는 '산업의 비타민'입니다. 쓰이는 양은 적지만 없으면 산업 전체가 마비됩니다. 핵심은 채굴이 아니라 분리·정제인데, 중국이 이 공정의 글로벌 80% 안팎을 장악한 대표적 초크포인트입니다. 실제로 일본은 총리의 대만 유사시 관련 발언 이후 희토류를 비롯한 희귀광물 공급에서 중국의 제재·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최근 미중 갈등도 이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됐습니다. 중국이 지난해 희토류 수출통제 강화를 발표하자 트럼프는 100% 관세로 맞섰고, 중국도 관세 인상으로 맞불을 놨습니다. 이후 부산 정상회의에서 1년 휴전에 합의했고, 올해 5월 정상회담에서는 희토류를 포함한 통상 현안을 다룰 공동위원회를 구성해 협의를 이어가기로 했습니다. 11월 중순 휴전 종료가 중요한 분기점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휴전이 끝나면 어떻게 되나. “가장 가능성이 큰 시나리오는 휴전을 연장하면서 양국이 갈등을 관리해 나갈 것이라 보이지만 그 와중에 “가장 우려되는 것은 희토류와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제재가 협상의 교환 카드가 되는 것입니다. 중국이 '반도체 제재를 계속하면 희토류 공급을 제한하겠다'고 압박하면 미국도 일부 수출통제를 조정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중국 반도체 기업의 기술 확보와 시장 진입이 빨라져 한국 기업에는 오히려 불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 정부도 반도체를 단순한 산업이나 통상 문제가 아니라 기술·공급망·외교·안보가 연결된 전략산업으로 봐야 합니다. 미·중 관계의 변화 자체보다 어떤 제재가 완화되고, 그것이 중국의 기술력과 생산능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반도체 경쟁은 이제 기업 간 경쟁이 아니라 기술·인재·자본·외교·통상·안보가 총동원되는 국가 간 총력전입니다." -1980년대 미·일 반도체 협정으로 일본이 침몰했던 상황과 지금 한국의 처지가 비슷하다는 경고도 있다 “일부 비슷한 점은 있지만 본질은 다릅니다. 당시 미국은 일본을 직접적 경쟁상대로 보고 시장점유율·무역불균형 해소를 위해 통상압박을 가했습니다. 일본 반도체의 경쟁력을 낮추고 미국 산업을 회복시키는 게 정책의 핵심 목적이었죠. 반면 지금은 중국을 상대로 한 기술패권 경쟁입니다. 반도체는 이제 단순 수출상품이 아니라 AI·군사력·경제안보를 좌우하는 전략자산이 됐습니다. 그래서 미중 모두 국가의 명운을 걸고 경쟁하고 있고, 통제 대상도 가격·점유율을 넘어 첨단장비, AI칩, HBM, EDA, 첨단인력까지 확대되고 있습니다. 경쟁의 강도와 범위가 1980년대보다 훨씬 치열하고 장기적입니다. 한국의 위치도 당시 일본과는 다릅니다. 한국은 미국이 경쟁력을 낮춰야 할 대상이라기보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반드시 유지해야 하는 핵심 동맹이자 첨단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축입니다. 그래서 일본처럼 한국 산업 자체를 약화시키는 정책이 전면적으로 추진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다고 봅니다. 다만 이것이 한국에 반드시 유리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동맹이기 때문에 더 많은 역할과 부담을 요구받을 수 있습니다. 미국은 자국 내 생산 확대와 공급망 재편을 추진하며 한국 기업에 미국 투자 확대, 대중 기술이전 제한, 중국 사업 조정, 공급망 재편 참여 등을 계속 요구하고 있고, 이런 요구는 앞으로도 이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결국 일본이 미국과의 산업 경쟁에서 어려움을 겪었다면, 한국은 미중 전략경쟁 속에서 두 시장·두 공급망 사이의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더 복잡한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한국 기업은 기술 경쟁력뿐 아니라 공급망 관리와 지정학적 리스크 대응력까지 핵심 경쟁력으로 갖춰야 할 겁니다." -주 52시간제를 완화해야 한다고 보나. “지금 반도체 산업은 기업 간 경쟁을 넘어 국가 간 기술패권 경쟁의 중심에 있습니다. 반도체는 AI와 국가안보를 좌우하는 전략자산이 됐고, 각국이 국가의 명운을 걸고 경쟁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반도체 연구개발을 일반 사무직과 동일한 근로시간 기준으로 관리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는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술은 어느 날 갑자기 '유레카'처럼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시행착오와 반복 실험이 축적되면서 만들어집니다. 연구가 중요한 고비에 이르면 하루 이틀 몰입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일률적으로 시간을 제한하면 연구의 흐름이 끊길 수 있습니다. 저는 장시간 노동을 일상화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반도체 연구개발과 같이 국가 경쟁력이 걸린 분야만큼은 프로젝트 특성과 연구 단계에 따라 보다 유연하게 운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큰 문제는 경쟁 환경입니다. 중국은 매년 약 500만 명의 이공계 인력을 배출하는 반면, 우리는 10만 명대 수준입니다. 절대적인 연구개발 인력 규모에서 이미 큰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에 연구개발의 유연성까지 부족하다면 기술 경쟁력을 유지하기는 더욱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 '따라올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 따라오느냐'의 문제로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연구개발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제도와 환경을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초격차의 본질은 무엇인가. “권오현 전 삼성전자 부회장은 『초격차』라는 저서에서 초격차를 '상대적 우위가 아니라 비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절대적 수준의 차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저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덧붙이고 싶습니다. 오늘날 초격차의 본질은 대체 불가능한 초크포인트(Choke Point)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TSMC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TSMC는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에서 약 70%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고, 3나노 이하 최선단 공정에서는 90% 이상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숫자 자체가 아닙니다. 세계 어느 기업도 단기간에 TSMC를 대체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대만에서는 TSMC를 '호국신산(護國神山)'이라고 부르고, '실리콘 방패(Silicon Shield)'라는 표현도 씁니다. 최첨단 반도체 생산능력이 곧 대만의 외교적·전략적 자산이 된 것입니다. HBM도 같은 사례입니다. AI 반도체에는 HBM이 필수이고, 현재 한국 기업들이 세계 공급망의 핵심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만약 HBM 공급이 중단되면 AI 산업 전체가 영향을 받을 정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초크포인트입니다. 결국 초격차는 단순한 점유율 자체 격차가 아니라 '이 기술이나 제품이 없으면 산업 전체가 움직일 수 없는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점유율은 그 결과일 뿐입니다. 최근 삼성전자가 로봇 전담 조직을 신설한 것도 같은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로봇 산업은 반도체처럼 대량 생산능력만으로 승부하는 시장이 아닙니다. 결국 삼성만이 제공할 수 있는 AI, 소프트웨어, 핵심 부품 또는 플랫폼 등 대체 불가능한 초크포인트를 어디에서 만들 것인지가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될 것입니다." ◇ '우아한 도태'를 경계하며 인터뷰 말미, 그는 정책 결정자와 산업계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묻는 질문에 잠시 뜸을 들였다. “이건 국가 총력전입니다. 기업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반도체는 이제 AI와 국가안보를 좌우하는 전략자산이 됐고, 각국이 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해 주도권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지금은 AI 반도체 호황으로 좋은 실적을 내고 있지만, 이러한 독점적 이익이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낙관해서는 안 됩니다. 중국도 막대한 자본과 인재를 투입하며 빠르게 추격하고 있고, 기술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좁혀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정치 논리나 이해관계에 따라 흔들리기보다 장기적인 산업 경쟁력을 우선해야 합니다. 반도체는 우리 수출의 약 20%를 차지하는 핵심 산업이고, 수많은 협력업체와 지역경제가 함께 연결된 국가 산업 생태계입니다. 정부와 기업, 임직원 모두 조금씩 양보하고 힘을 모아 장기적인 경쟁력을 키워야 합니다. 제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우아한 도태'입니다. 저녁이 있는 워라밸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국가 총력전이 벌어지는 산업에서 경쟁국과 다른 속도로 움직이면서도 지금의 경쟁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인터뷰를 마친 그는 “그 많은 인력이 밤새도록 일하는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가 같이 경쟁하면 결국 우아하게 도태되는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잠시 말을 고르더니,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을 떠올렸다. “예전에는 이건희 회장님께서 늘 위기의식을 강조하실 때 '왜 저렇게까지 위기를 말씀하실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산업 현장을 떠나 연구자의 입장에서 세계 반도체 경쟁을 지켜보니 그 심정을 이제는 이해하게 됩니다. 밖에서 보면 기술패권 경쟁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변화를 준비하지 않으면, 그때 회장님께서 말씀하셨던 위기가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걱정이 듭니다." 〈프로필〉 이병철 전 부사장은 다른 직장을 거치지 않고 2022년까지 삼성전자 한 곳에서만 근무했고, 그중 절반가량인 15년을 중국 주재원으로 보냈다. 삼성그룹 중국 본사 소속으로 삼성전자뿐 아니라 삼성SDI·삼성디스플레이, 삼성물산 등 그룹 전체의 중국 투자·현안을 총괄했으며, 특히 시안 반도체 공장 투자를 초기 단계부터 현지에서 팔로업했다. 퇴임 후 아주대에서 미중 기술패권 속 반도체 기업 생존 전략을 주제로 정치외교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이를 기초로 『K-반도체 초격차 전략』을 펴냈다. 현재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위원이자 경기대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김하나 기자 uno@ekn.kr, 신은서 인턴기자

[김한성의 AI시대] 더 큰 AI보다 더 나은 판단

김한성 투비유니콘 최고철학책임자(CPO) 지난 7월 14일, 인공지능 시장에서는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뉴스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미국의 데이터센터 개발·운영사들은 수백억 달러 규모의 지분 매각을 추진했다. 허깅페이스 통계에서는 가중치를 공개한 중국계 AI 모델, 이른바 오픈웨이트 모델이 올봄 다운로드의 41%를 차지했다. 반면 IBM은 이례적인 실적 경고를 내놓은 뒤 주가가 25% 급락했다. 한쪽에서는 AI 인프라를 향한 투자가 이어지고, 다른 쪽에서는 비용이 낮고 통제하기 쉬운 모델이 확산되는 동안 전통적인 기업용 기술의 강자는 시장의 혹독한 질문을 받았다. 세 뉴스가 가리키는 방향은 하나다. AI 경쟁의 질문이 바뀌고 있다. 지금까지는 “얼마나 크고 똑똑한 모델을 만들 수 있는가"를 물었다. 이제는 “어떤 문제에 어떤 모델을 적용해, 얼마의 비용으로 어떤 성과를 낼 것인가"를 묻는다. 최첨단 모델은 고난도 업무에 쓰이는 프리미엄 수단으로 남겠지만, 일상적인 서비스는 더 작고 저렴하며 맞춤화하기 쉬운 모델로 이동할 가능성이 크다. 기업이 선택해야 할 것은 가장 뛰어난 모델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와 비용 구조에 가장 적합한 조합이다. 양자컴퓨터 경쟁조차 개별 큐비트 수보다 반도체·광통신·냉각·제어 소프트웨어를 하나로 묶는 시스템 엔지니어링의 문제로 옮겨가고 있다. 여기에 더 근본적인 경고도 나왔다. 케임브리지대와 캘리포니아대 샌타바버라 연구진은 특정 동적 시스템에서는 데이터가 무한히 주어져도 어떤 알고리즘도 안정적으로 학습할 수 없는 문제가 있음을 보였다. AI가 무용하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실패를 데이터 부족이나 모델 규모의 문제로 돌려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풀 수 있는 문제라도 과도한 메모리와 전력, 냉각을 요구한다면 비용과 사회적 부담을 다시 계산해야 한다.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이 곧 실제로 해야 한다는 결론은 아니다. 이 대목에서 19세기 철학자 찰스 샌더스 퍼스의 통찰은 놀랍도록 현재적이다. 퍼스에게 의미는 말 속에 고정된 내용이 아니라, 그 말이 실제 경험과 행동에서 만들어내는 차이를 통해 분명해진다. 탐구는 이미 아는 답에서가 아니라 예상과 현실이 어긋나는 '놀라움'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그 어긋남을 설명할 가설을 세우고, 예상되는 결과를 추론한 뒤, 현실과 다시 대조해 믿음을 고친다. 이 관점에서 AI의 답은 완성된 지식이 아니라 하나의 '해석 후보'다. 생성형 AI는 그럴듯한 문장과 관계를 풍부하게 만들지만, 현실은 그 문장에 저항한다. 따라서 좋은 AI는 오류가 전혀 없는 AI가 아니다. 출처와 현장 데이터, 실행 결과와 반례에 연결되고, 인간의 비판을 받아 판단을 고칠 수 있는 AI다. 검증할 수 없는 확신보다 수정할 수 있는 추론이 더 높은 지능이다. 기업과 공공기관은 AI 도입 전에 세 가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첫째, 이 문제는 AI가 학습하고 풀 수 있는가. 둘째, 기대 성과가 비용과 위험을 넘어서는가. 셋째, 그 결과는 어떤 업무 습관과 제도를 남기는가. 그다음에야 어떤 모델을 쓸지 결정해야 한다. 화려한 성능 시연보다 시간 단축, 오류 감소, 위험 통제와 서비스 품질을 측정해야 한다. 중단 조건과 인간의 판단 권한을 정하고, 검증된 결과를 표준 절차와 정책, 조직의 기억으로 남겨야 한다. 성과를 내지 못한 시도도 원인을 기록해야 같은 오류에 다시 비용을 쓰지 않는다. 이때 필요한 것은 단순한 모델 연결기가 아니라 '판단 체계'다. 사실과 가설을 구분하고, AI가 생성할 것과 도구가 계산할 것, 사람이 결정할 것을 나누는 운영 구조다. 개인의 학습도 마찬가지다. AI가 핵심을 요약해 주면 낯선 분야에 빠르게 들어갈 수 있지만, 요약은 이해의 입구일 뿐이다. 반례를 찾고 실제 문제에 적용하며 자신의 질문을 고칠 때 비로소 지식은 판단 능력이 된다. 한국의 기회도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 최고 모델 순위와 데이터센터 규모만 좇기보다 오픈웨이트 모델과 최첨단 모델, 현장 데이터와 규칙, 인간의 판단과 감사 기록을 연결하는 '판단 인프라'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모델이 더 우수한지를 넘어, 어떤 조건에서 누구의 판단을 얼마나 개선했는지를 축적하는 국가적 학습 체계가 필요하다. 이는 기술 경쟁에서 물러나는 길이 아니라 기술의 가능성을 실제 가치로 전환하는 길이다. AI 시대의 수준은 얼마나 큰 모델을 가졌는가보다, 그 모델이 틀렸을 때 얼마나 빨리 현실로 돌아와 판단과 제도를 고칠 수 있는가에서 드러날 것이다. AI의 다음 경쟁은 더 많은 답을 생산하는 경쟁이 아니다. 현실의 저항 앞에서 답을 수정하고, 그 경험을 더 나은 습관과 제도로 축적하는 능력의 경쟁이다. bienns@ekn.kr

로봇 ‘눈’ 넘어 ‘피부’까지…LG이노텍, 피지컬AI 정조준

LG이노텍이 로봇의 시각(Vision) 기술에 이어 촉각(Tactile)까지 영역을 넓힌다. 스마트폰용 비전 센서로 쌓은 광학·초정밀 설계 기술을 로봇용 멀티 센싱 모듈로 확장하겠다는 전략이다. 28일 업계에 따르면, LG이노텍이 일본 전자부품 기업 TDK와 피지컬 AI 분야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양사는 LG이노텍의 광학·초정밀 설계 기술과 TDK의 센서 기술을 결합해 '차세대 비전 센싱 모듈'과 '촉각 센싱 모듈'을 공동 개발한다. 최근 로봇 업계에서 비전 센싱 모듈 안에 다양한 기능을 결합하는 추세가 확산하면서, 기존 비전 센싱 모듈 사업을 하던 LG이노텍도 다른 센서를 추가로 결합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압력·온도·위치 등 광범위한 센서 포트폴리오를 보유한 TDK가 파트너로 낙점된 배경이다. LG이노텍 관계자는 “수십여 종의 센서 기술을 보유한 TDK와의 시너지를 통해 만들어낼 수 있는 차세대 비전 센싱 모듈의 형태는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 먼저 비전 센싱 모듈은 로봇의 '눈' 기능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기존 비전 센싱 모듈이 시각 정보 위주로 데이터를 수집했다면, 이번 협력으로 개발되는 차세대 모듈은 TDK의 관성·위치 센서와 마이크 등을 결합해 움직임·방향·음향 데이터까지 통합 처리한다. 예컨대 관성 센서(IMU)를 장착하면 로봇이 이동할 때 발생하는 영상 데이터의 흔들림을 보정해 주변을 더 정확히 인식할 수 있다. 로봇 제조사 입장에서도 여러 센서를 개별 구매·연결하는 부담 없이 하나의 통합 모듈로 공급받을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관성 센서 탑재 모듈은 내년 개발 완료될 계획이다. 촉각 센싱 모듈은 로봇의 '피부' 역할을 하는 부품이다. 손(Hand)뿐 아니라 팔·몸통 등 여러 부위에 장착돼 접촉 여부와 압력을 인식하게 해주며, 초정밀·초박형·유연 구조가 요구돼 개발 난도가 높은 고부가 부품으로 꼽힌다. 양사는 내년 개발 완료를 목표로, LG이노텍의 모듈화 및 디지털 신호 처리 기술과 TDK가 소비재·자동차 등 여러 산업 분야에서 쌓아온 초정밀 촉각 센싱 기술을 결합해 로봇 작업환경에 최적화된 고성능 촉각 센싱 모듈을 선보인다는 방침이다. LG이노텍은 이미 글로벌 최고 수준의 카메라·라이다(LiDAR)·레이더(Radar) 등 센싱 부품을 결합해 피지컬 AI 센싱 시장을 적극 공략해왔다. 카메라·라이다·레이더를 모두 자체 기술로 제공할 수 있는 차별화 경쟁력을 발판으로 보스턴다이내믹스를 비롯한 글로벌 빅테크들과 활발한 협력을 이어가고 있다. 향후 양사는 피지컬 AI 분야에서도 협력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업계에서는 이번 협력은 LG이노텍의 로봇 사업 확장 전략과도 맞닿아 있다고 본다.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비전 센서 중심으로 사업을 키워온 연장선에서 로봇용 비전 센서 사업을 하다가, 촉각 센서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하는 셈이다. 로보틱스 사업은 포트폴리오 다변화의 메인 축 중 하나로 꼽히며 그 비중은 점차 확대될 전망이다. 업계 관계자는 “포트폴리오 다변화에 로보틱스 사업이 거의 메인 축에 있다"며 “점차 비중을 늘려나가고 있고, 앞으로 더 속도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문혁수 LG이노텍 사장은 지난 1월 7일(현지시간) CES 2026 전시장을 찾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LG이노텍은 지금 단품을 파는 회사가 아니라 솔루션 제공자로 가고 있다"며 사업 구조 재편 방향을 분명히 한 바 있다. 김하나 기자 uno@ekn.kr

환전 공짜에 10% 적립까지…삼성월렛 여행카드 나왔다

삼성전자가 하나카드와 손잡고 해외여행 특화 혜택을 담은 '삼성 월렛 하나 트래블로그 체크카드'를 선보였다. 무료 환전과 해외 이용수수료 면제는 물론, 삼성 월렛으로 해외 오프라인 매장에서 결제하면 결제 금액의 10%를 삼성월렛 포인트로 적립해 주는 혜택을 앞세워 여름 휴가철 여행객 공략에 나선다. 삼성전자가 하나카드와 협력해 해외 여행객 특화 혜택을 담은 '삼성 월렛 하나 트래블로그 체크카드'를 본격적인 여름 휴가 시즌에 맞춰 27일 삼성 월렛에 추가한다고 밝혔다. 이 카드는 삼성 월렛의 결제 편의성과 하나카드 기존 트래블로그 카드의 해외 여행 특화 혜택을 결합한 것이 특징이다. 무료환전(환율우대 100%), 해외 가맹점 이용수수료 면제, 해외 ATM 인출 수수료 면제 혜택에 더해 해외 오프라인 결제 시 삼성 월렛을 이용하면 결제 금액의 10%를 '삼성월렛 포인트'로 적립해준다. '삼성월렛 포인트'는 결제할 때마다 적립되는 선불형 간편 결제 서비스로, 삼성 월렛 앱을 통해 국내 온·오프라인 가맹점에서 사용할 수 있다. 최근 가입자 250만 명을 확보했다. 연회비는 없다. 삼성 월렛 앱에서 발급을 신청할 수 있으며, 발급 후에는 자동으로 카드 간편 등록 알림이 와 바로 삼성 월렛에 등록할 수 있다. 삼성전자는 카드 출시를 기념해 하나카드와 다양한 이벤트도 마련했다. 8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는 삼성월렛 포인트 적립 한도를 기존 1만 포인트에서 2만 포인트로 확대하고, 8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는 해외 가맹점에서 20만원 이상 결제한 고객을 대상으로 갤럭시 폴드8, 갤럭시 워치9, 갤럭시 버즈4, 항공권, 키캡 등을 제공하는 추첨 이벤트를 진행한다. 삼성전자 MX사업부 디지털월렛팀장 채원철 부사장은 “삼성 월렛은 해외 결제, 여행 서비스 등으로 글로벌 사용성을 지속 강화해 왔으며 이번 신규 카드로 갤럭시 사용자들에게 차별화된 혜택을 추가했다"고 말했다. 김하나 기자 uno@ekn.kr

삼성 갤럭시 Z 폴드8 시리즈 오늘부터 사전판매…“256GB 사면 512GB로”

삼성전자가 28일부터 폴더블폰 신제품 '갤럭시 Z 폴드8 울트라', '갤럭시 Z 폴드8', '갤럭시 Z 플립8'과 스마트워치 '갤럭시 워치 울트라2', '갤럭시 워치9'의 사전 판매에 돌입한다. 사전 판매는 다음 달 3일까지 진행되며, 국내 공식 출시일은 다음달 7일이다. 사전 구매 고객은 다음달 4일부터 제품을 수령하고 개통할 수 있다. '갤럭시 Z 폴드8 울트라'는 바이올렛 쉐도우·그라파이트·크림·그린 쉐도우 4가지 색상으로 나온다. 가격은 12GB 메모리·256GB 스토리지 모델이 257만 7300원, 512GB 모델이 283만 300원, 16GB 메모리·1TB 모델이 345만 1800원이다. '갤럭시 Z 폴드8'은 라벤더·그라파이트·크림·피스타치오 4가지 색상으로 출시되며, 256GB 모델 227만 8100원, 512GB 모델 253만 1100원, 1TB 모델 315만 2600원에 판매된다. '갤럭시 Z 플립8'은 핑크·그라파이트·크림·민트 4가지 색상이다. 256GB 모델은 168만 3000원, 512GB 모델은 193만 6000원이다. 이 중 '갤럭시 Z 폴드8 울트라' 그린 쉐도우, '갤럭시 Z 폴드8' 피스타치오, '갤럭시 Z 플립8' 민트 색상은 삼성닷컴과 삼성 강남 전용 자급제 모델로만 판매된다. 사전 판매는 전국 삼성스토어와 삼성닷컴, 이동통신사 매장 등 온·오프라인에서 이뤄지며, 28일 0시에는 삼성닷컴을 비롯해 쿠팡·네이버·11번가·G마켓에서 라이브 커머스도 진행된다. 사전 구매 고객을 위한 혜택도 마련됐다. 256GB 모델 구매 고객에게는 512GB 모델로 저장 용량을 2배 업그레이드해주는 '더블 스토리지' 혜택이 제공된다. 512GB 모델 구매 고객은 31만 700원을 추가 결제하면 1TB 모델(메모리 16GB)로 바꿀 수 있는데, 이는 두 모델 간 정가 차이(62만 1,500원)의 절반 수준이다. 다만 '갤럭시 Z 폴드8 울트라·폴드8' 1TB 모델과 '갤럭시 Z 플립8' 512GB 모델은 사전 판매 대상에서 빠졌다. 삼성전자는 이와 함께 삼성닷컴 앱에서 쓸 수 있는 갤럭시 워치 10% 할인 쿠폰, 액세서리 30% 할인 쿠폰, 구글 AI 프로 6개월 구독권, 윌라 3개월 구독권, 갤럭시 스토어 게임 테마 11종 등의 혜택도 함께 제공한다. 액세서리도 새로워졌다. 8세대 갤럭시 Z 시리즈 전용 케이스는 마그넷과 킥 스탠드를 적용해 '갤럭시 Z 폴드8 울트라·폴드8'은 카본 마그넷·카본 스탠딩·실리콘 마그넷·클리어 마그넷으로, '갤럭시 Z 플립8'은 플립 수트·실리콘 링 마그넷·클리어 마그넷으로 구성된다. 앞서 갤럭시 버즈4 시리즈에서 인기를 끌었던 자개 케이스도 이번엔 '갤럭시 Z 폴드8'과 '갤럭시 Z 플립8' 마그넷 케이스로 나온다. 28일부터는 '뉴(New) 갤럭시 AI 구독클럽' 가입도 시작된다. 자급제 모델 구입 시 가입 가능하며, 지난 2월 갤럭시 S26에 도입됐던 3년형 상품이 이번엔 분실 보상까지 추가돼 갤럭시 Z 시리즈에 적용됐다. 가입하면 기기 반납 시 최대 50% 잔존가 보상과 삼성케어플러스, 액세서리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갤럭시 Z 플립8' 2년형은 반납 보상률이 기존 40%에서 1년형과 같은 50%로 올랐다. 월 구독료는 '갤럭시 Z 폴드8 울트라'·'갤럭시 Z 폴드8'이 1·2년형 9900원, 3년형 1만4500원, '갤럭시 Z 플립8'은 1·2년형 8900원, 3년형 1만1500원이다. 사전 구매 고객은 더블 스토리지 할인이 적용된 기준가로 반납 보상을 받아 혜택이 더 크다. '갤럭시 워치 울트라2', '갤럭시 워치9'도 같은 날 사전 판매를 시작해 다음달 7일 정식 출시된다. '갤럭시 워치 울트라2'는 티타늄 실버·티타늄 그레이 2가지 색상의 LTE 모델 1종으로 96만 9100원에 판매된다. '갤럭시 워치9'는 44mm(실버·그라파이트)와 40mm(크림·그라파이트) 모델로 나뉘며, 가격은 44mm LTE 모델 56만 9800원·블루투스 모델 53만 9000원, 40mm LTE 모델 52만 9100원·블루투스 모델 49만 9000원이다. 삼성전자는 8월 31일까지 워치 구매 고객에게 전용 밴드 50% 할인 쿠폰 2매와 타임플릭 워치페이스 6개월 구독권을 무상 제공하며, 같은 기간 밴드·워치페이스로 꾸민 스타일이나 사용 후기를 SNS에 올리는 '워꾸 챌린지' 이벤트도 진행한다. 9월 14일까지 삼성닷컴 이벤트 페이지에 인증하면 전원에게 갤럭시 워치 클리어 케이스가 지급되며, 우수 참여자에게는 추첨을 통해 러닝 용품이 증정된다. 삼성전자 한국총괄 정호진 부사장은 “이번에 선보이는 신규 폼팩터의 '갤럭시 Z 폴드8'을 비롯해 삼성전자의 폴더블 노하우가 집약된 8세대 폴더블폰 라인업을 사전 판매로 가장 빨리 만나보시길 바란다"며 “'더블 스토리지' 할인, 'New 갤럭시 AI 구독클럽', '갤럭시 워치 울트라2·워치9' 할인 등 풍성한 혜택과 함께 신제품을 선보이겠다"고 말했다. 김하나 기자 uno@ekn.kr

빅테크가 키우는 AIDC…韓 ‘기가와트 전략’ 통할까

국내 기업들이 '샌프란시스코 AI 서밋'을 계기로 글로벌 빅테크와 손잡고 기가와트(GW)급 AI 데이터센터(AIDC) 구축에 나섰다. 전력 용량 기준 총 5GW 규모로, GPU 약 200만대를 가동할 수 있는 초대형 프로젝트다. 이를 계기로 국내 AI 인프라 구축도 기가와트급으로 확대될 전망이다. 27일 업계에서는 단순한 투자 규모보다 송배전망 연계와 입지 규제 해소 속도가 AI 데이터센터 구축의 성패를 좌우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 글로벌 'GW 경쟁'…한국도 5GW 구축 시동 청와대에 따르면 1박 2일간의 샌프란시스코 방문 기간 공개된 민간 협력 규모는 총 9500억달러(약 1400조원)에 달한다. 이 가운데 국내 기업들이 글로벌 빅테크와 공동 추진하는 AI 데이터센터는 전력 용량 기준 총 5GW 규모로, GPU 약 200만장을 가동할 수 있는 수준이다. 기가와트급 AI 데이터센터 구축은 세계적인 추세다. 오픈AI와 오라클은 미국에서 4.5GW 규모로 시작한 AI 인프라 프로젝트 '스타게이트(Stargate)'를 최근 7GW 안팎까지 확장했으며, 일론 머스크의 xAI는 테네시·미시시피 접경지에 세계 최대 규모로 꼽히는 AI 데이터센터 '콜로서스(Colossus)'를 짓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도 엔비디아 등과 협력해 GW급 AI 데이터센터 조성에 나서는 등 글로벌 빅테크를 중심으로 초대형 AI 인프라 투자가 이어지고 있다. 네이버는 엔비디아·브룩필드와 함께 100억달러(약 14조6000억원) 규모의 'AI 팩토리'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브룩필드가 최대 90억달러, 엔비디아가 10억달러를 투자하는 구조다. 이를 통해 세종 데이터센터 '각 세종'의 초기 용량을 55MW에서 200MW로 확대하고, GPU 약 10만개를 수용하는 AI 인프라를 구축한다. 장기적으로는 GW급 소버린 AI 인프라로 확대할 계획이다. 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은 “엔비디아와 브룩필드의 브랜드와 네트워크가 네이버의 노하우를 스케일업하는 데 큰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네이버·SK·삼성SDS, 글로벌 빅테크와 AI 동맹 SK텔레콤은 엔비디아와 최대 2GW 규모 AI 데이터센터 구축·확장을 추진한다. SK하이닉스의 HBM4가 탑재된 엔비디아의 차세대 AI 플랫폼 '베라 루빈(Vera Rubin)' 시스템을 우선 도입해 2027년부터 순차 가동할 계획이다. 앤트로픽과는 국내 GW급 AI 데이터센터 구축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고, 마이크로소프트와는 AI 메모리 장기 공급 협력에 합의하는 등 총 5000억달러 이상 규모의 AI 인프라 협력을 이끌어냈다. SK텔레콤 관계자는 “이번 AI 서밋에서 발표한 엔비디아와 최대 2GW 규모 AI 데이터센터 구축 협력은 2027년 첫 가동을 목표로 추진된다"며 “2GW 사업만을 위한 협력이 아니라 앞으로 추진할 15GW 규모 AI 데이터센터 사업의 시작점"이라고 설명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이번에 발표된 대규모 AI 인프라 계획이 실제 시장 수요에 기반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 회장은 샌프란시스코 AI 서밋에서 “대한민국이 발표한 3대 메가 프로젝트가 생소할 수는 있어도 허황된 것은 아니다"며 “글로벌 빅테크가 요구하는 AI 컴퓨팅 수요를 보면 오히려 지금 발표한 계획이 작은 숫자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삼성SDS는 앤트로픽과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고 기업용 AI 신사업 발굴과 클로드 전문인력 양성에 나선다. 현재 삼성그룹 20개 관계사 임직원 7만명에게 '클로드 엔터프라이즈'를 제공하고 있으며, 이를 기반으로 기업용 생성형 AI 사업을 확대할 계획이다. ◇ 아시아 AI 허브 도약하나…시장 “수요 커질 것" 정부는 이번 AI 서밋을 통해 한국을 '아시아 AI 허브'로 육성하겠다는 구상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26일(현지시간) 브라질에서 화상으로 주재한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샌프란시스코 AI 선언은 대한민국이 AI 시대를 이끄는 대체불가한 선도자로 도약하겠다는 국가적 출사표"라고 말했다.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한국에 총 5GW 규모 AI 데이터센터 구축이 추진된다"며 “이를 갖추면 한국은 아시아에서도 손꼽히는 AI 허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시장에서는 이번 AI 서밋을 계기로 글로벌 빅테크와의 협력이 구체화하면서 국내 AI 데이터센터 시장의 성장세도 한층 가팔라질 것으로 보고 있다. 이준호 하나증권 연구원은 27일 “이번 AI 서밋을 통해 글로벌 빅테크와의 파트너십이 구체화되면서 반도체뿐 아니라 AI 데이터센터도 핵심 공급 자원이라는 점이 확인됐다"며 “그동안 제기됐던 국내 AI 데이터센터 수요에 대한 의구심은 글로벌 빅테크의 투자 행보로 상당 부분 해소된 만큼 기존 전망보다 높은 수요가 나타날 가능성을 열어둘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나증권은 앞서 발표한 보고서에서 2030년 국내 AI 데이터센터 유효 수요를 기본(Base) 시나리오 기준 3.0~4.2GW, 강세(Bull) 시나리오 기준 5.1~7.0GW로 전망했다. 한 데이터센터 업계 관계자는 “기가와트급 AI 데이터센터는 단순한 서버 증설이 아니라 AI 산업 전반의 성장을 이끄는 핵심 인프라"라며 “충분한 컴퓨팅 인프라가 구축되면 국내 AI 산업 경쟁력은 물론 AI 서비스 수출 기반도 한층 강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 “전력망이 관건"…송배전망·입지 확보 숙제 대규모 투자 계획이 잇따르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전력 인프라 확충은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꼽힌다. 김진수 한양대 자원환경공학과 교수는 “1~2GW 규모 AI 데이터센터는 충분히 도전적인 목표지만 문제는 발전설비보다 전력망"이라며 “예비율 22% 수준을 감안하면 전력 공급 능력 자체는 부족하지 않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원전 계속운전과 재생에너지 확대, 이용률이 낮은 가스발전 등을 활용하면 필요한 전력을 확보할 수 있다"면서도 “데이터센터에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하기 위한 에너지저장장치(ESS)와 다양한 전원믹스, 송전망 확충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정부가 전력망 특별법 제정 등 제도 개선에 나서고 있지만 실제 사업 추진 속도는 AI 데이터센터가 요구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나현 기자 knh@ekn.kr

[이슈&인사이트] AI 시대, 왜 다시 가스터빈인가

반도체가 AI의 두뇌라면, 전기는 혈액이다. 아무리 뛰어난 두뇌도 혈액이 공급되지 않으면 제 기능을 할 수 없듯, AI도 전력 없이는 단 한 번의 연산도 수행할 수 없다. AI 시대의 경쟁력은 더 이상 반도체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이제는 안정적인 전력을 얼마나 확보하느냐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최근 발표한 Energy and AI 보고서에서 전 세계 데이터센터의 전력소비가 2030년 약 945TWh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현재 일본 전체의 연간 전력소비량을 넘어서는 규모다. 우리나라도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와 AI 데이터센터 구축이 본격화되면서 막대한 전력 수요가 예상된다.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기술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확보하고도 이를 뒷받침할 전력을 적기에 공급하지 못한다면 국가 경쟁력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막대한 전기를 무엇으로 공급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재생에너지와 원자력을 해법으로 제시한다. 탄소중립과 에너지 안보를 고려하면 두 전원 모두 앞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그러나 AI 시대는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현실이 되었고, 기존의 전력 수급 전망은 근본적으로 다시 쓰이고 있다. 원자력은 건설과 송전망 확충에 긴 시간이 필요하고, 재생에너지는 자연조건에 따라 출력이 달라진다. 에너지저장장치(ESS) 역시 빠르게 발전하고 있지만 급증하는 전력 수요를 단기간에 모두 감당하기에는 아직 한계가 있다. 문제는 새로운 전원을 확충하는 속도보다 AI가 전기를 요구하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는 데 있다. 이러한 변화는 이미 미국에서 현실이 되고 있다. 최근 셰브론(Chevron),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 GE 버노바(GE Vernova)는 텍사스에서 약 2.67GW 규모의 가스발전 설비를 AI 데이터센터와 함께 구축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기존 송전망 확충을 수년씩 기다리기보다 발전설비와 데이터센터를 동시에 구축해 필요한 전력을 직접 공급하는 방식이다. 일본 역시 원자력과 재생에너지 확대를 추진하면서도 고효율 가스터빈 발전을 적극 활용하고 있으며, 유럽도 재생에너지 확대와 함께 전력계통의 유연성을 높일 수 있는 다양한 전원을 확보하는 데 정책의 무게를 두고 있다. 이들 국가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원자력과 재생에너지를 확대하면서도 AI 시대의 급증하는 전력 수요를 두 전원만으로 감당하기는 어렵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느 나라도 특정 발전원에 의존하지 않고, 가스터빈을 포함한 다양한 전원을 조화롭게 활용하는 방향으로 미래 전력시스템을 설계하고 있다. 역설적인 사실은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아질수록 오히려 가스터빈의 가치가 더욱 커진다는 점이다. 전기는 생산과 소비가 거의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는 에너지다. 태양광 출력이 갑자기 감소하거나 풍속이 변하면 그 부족분을 즉시 보충할 발전원이 필요하다. 가스터빈은 안정적인 전력을 공급하는 동시에 출력을 빠르게 조절할 수 있어 산업단지와 AI 데이터센터의 주전원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아질수록 전력계통의 균형을 유지하는 중요한 조정전원의 역할도 수행한다. 다시 말해 가스터빈은 재생에너지의 경쟁자가 아니라, 재생에너지가 더욱 안정적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핵심 기반시설인 셈이다. 기술적 장점도 분명하다. 가스터빈은 수십 메가와트 규모의 분산형 발전부터 대규모 복합발전까지 폭넓게 적용할 수 있으며, 최신 대형 가스터빈 두 기를 활용한 복합발전은 약 1.2~1.4GW 규모의 전력을 생산해 원자력발전소 한 기에 버금가는 전력 공급도 가능하다. 또한 발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폐열을 산업용 증기나 지역난방에 활용하는 열병합발전을 적용하면 총 에너지 이용효율은 약 90%까지 높아질 수 있다. 같은 연료로 전기와 열을 동시에 생산하는 대표적인 고효율 에너지 시스템이다. 물론 천연가스를 사용하는 가스터빈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하지만 이미 상용화된 고효율 복합발전과 열병합발전의 장점을 적극 활용하고, 수소 혼소와 탄소포집(CCS) 기술을 단계적으로 확대한다면 탄소 배출을 줄이면서도 AI 시대에 필요한 안정적인 전력을 현실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강점이 있다. 우리나라는 미국, 독일, 일본,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대형 발전용 가스터빈 독자 기술을 확보한 나라다. 발전용 가스터빈과 전투기·무인기 등에 사용되는 항공엔진은 동일한 가스터빈 기술을 기반으로 하며 핵심 원리와 요소기술을 공유한다. 가스터빈은 전력설비를 넘어 항공우주와 방위산업까지 뒷받침하는 국가 전략기술인 것이다. AI 시대의 에너지 정책은 어느 한 전원을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발전원의 장점을 어떻게 균형 있게 조합할 것인가의 문제다. 원자력과 재생에너지, 그리고 가스터빈이 각자의 강점을 살려 상호 보완적으로 활용될 때 우리는 AI 시대의 폭발적인 전력 수요와 탄소중립이라는 두 과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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