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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E칼럼] 전력 공기업 구조조정, 미래를 위한 투자와 혁신을 기대한다

전력 공기업 구조조정, 미래를 위한 투자와 혁신을 기대한다

허은녕 서울대학교 에너지시스템공학부 교수/ 전 세계에너지경제학회(IAEE) 부회장 지난 9월 3일 정부가'공공기관 기능개혁 추진 방안'을 발표하였다. 109개에 이르는 공공기관의 구조조정을 시작하겠다는 발표였다. 공공기관 구조조정은 21세기 내내 꾸준히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나 사실 제대로 진행된 적이 없었기에 이번 정부의 발표는 전문가는 물론 일반 국민들도 큰 관심을 보였다. 무엇보다도 대중의 주목을 받은 것은 지난 2001년 총 6개의 자회사로 분할하였던 한국전력공사의 발전 부문 중 한국수력원자력을 제외한 5개 발전 자회사를 가칭...

[EE칼럼] 원전종주국이 인정한 K-원전, 이제 준비의 시간이다

원전종주국이 인정한 K-원전, 이제 준비의 시간이다

1978년 4월, 고리 1호기가 상업운전을 시작했다. 우리나라 첫 원전이었다. 설계부터 시공까지 미국 웨스팅하우스가 주도했다. 우리는 공사 현장에서 어깨너머로 기술을 배웠다. 1990년대 한빛 3·4호기에서 기술자립의 첫발을 뗐고, 2009년 아랍에미리트 원전 수출에 이어 지난해에는 체코 신규 원전 사업까지 수주했다. 고리 1호기 이후 반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 우리가 원전의 본고장 미국에 원전을 짓는 길을 열었다. 지난 1일 한미 양국은 20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전략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이 가운데 최대 1200억 달러를 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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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미국 원전시장에 필요한 ‘마지막 1마일’

[특별기고] 미국 원전시장에 필요한 ‘마지막 1마일’

미국 시장 진출을 준비하는 한국 기업은 전시회와 상담회에서 적지 않은 기회를 만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바이어의 관심이 기술자료 요청과 공급자 등록, 견적 협의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현지 대응이 늦어지면 어렵게 만든 첫 접점도 오래가지 못한다. 미국 현지에서 한국 제조업체의 제품을 수입·판매하며 필자가 자주 마주한 장면이다. 이런 흐름은 미국 원전시장에서 더욱 중요하다. 기존 원전의 계속운전과 수명연장, 신규 원전 건설 논의, 소형모듈원전(SMR) 공급망 경쟁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국내 원전 중소·중견기업이 참여할 기회도 커지고 있..

[이슈&인사이트] 건배는 끝났고, 경쟁은 계속된다

건배는 끝났고, 경쟁은 계속된다

건배사는 대개 지루하다. 우정과 협력을 말하고 서로의 건강을 빈다. 그러나 9월 24일 백악관 만찬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200년이 넘는 미·중 관계를 몇 분의 연설에 담았다. 조지 워싱턴이 구입한 중국 도자기에서 시작해 제2차 세계대전의 험프 항로, 마오쩌둥과 리처드 닉슨의 관계 정상화, 중국 사막에 나무를 심은 미국인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날 낮 협상장에 놓였던 관세와 반도체, 희토류는 이 역사에서 빠져 있었다. 시진핑이 고른 첫 단어는 중추절이었다. 워싱턴에서 만찬이 열린 24일 밤, 베이징은 이미 가족이 다시 모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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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미국 원전시장에 필요한 ‘마지막 1마일’

미국 시장 진출을 준비하는 한국 기업은 전시회와 상담회에서 적지 않은 기회를 만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바이어의 관심이 기술자료 요청과 공급자 등록, 견적 협의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현지 대응이 늦어지면 어렵게 만든 첫 접점도 오래가지 못한다. 미국 현지에서 한국 제조업체의 제품을 수입·판매하며 필자가 자주 마주한 장면이다. 이런 흐름은 미국 원전시장에서 더욱 중요하다. 기존 원전의 계속운전과 수명연장, 신규 원전 건설 논의, 소형모듈원전(SMR) 공급망 경쟁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국내 원전 중소·중견기업이 참여할 기회도 커지고 있다. 그러나 미국 시장은 전시회에 참가하거나 한 차례 상담을 했다고 열리는 곳이 아니다. 공급자 등록부터 기술 질의, 견적 협의, 샘플 관리와 추가 자료 요청까지 이어지는 과정이 수개월, 때로는 수년에 걸쳐 진행된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원전수출산업협회(KNA)는 수출 준비부터 계약까지 컨설팅, 시장조사, 바이어 발굴, 인증·등록, 입찰 자문 등을 지원하고 있다. KOTRA의 해외 네트워크와 한수원의 원전산업 네트워크도 시장 진입에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이다. 관건은 이미 만들어진 기회를 현지에서 실제 거래로 이어갈 실행 기능을 갖추는 데 있다. 국내 중소기업이 이 일을 혼자 감당하기는 쉽지 않다. 본사는 생산과 기존 고객 대응으로 바쁘고, 미국 고객은 자신의 업무시간에 맞춰 답을 받기를 원한다. 법인을 세우고 창고를 마련했다고 거래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운영사, EPC, SMR 개발사마다 구매 절차와 공급자 등록 요건이 다르고, 품질보증 문서와 기술자료에 대한 요구도 품목에 따라 달라진다. 이런 과정에서 고객의 연락을 받고 기술자료와 샘플을 보내며 견적과 납기를 다시 확인할 사람이 현지에 있어야 한다. 이 연결이 끊기면 어렵게 만든 첫 접점도 명함 교환으로 끝날 수 있다. 그 실행 기능의 한 가지 해법으로, 여러 기업이 함께 쓸 수 있는 '공동 현지 실행 거점'을 시범 운영해 볼 수 있다. 이는 새로운 기관이나 대형 물류센터를 만들자는 뜻이 아니다. 기존 사무·물류 인프라를 활용해 바이어 연락, 기술자료 전달, 샘플 관리, 공급자 등록과 견적 후속 조치를 맡을 현지 실무 기능을 두자는 것이다. KOTRA의 해외공동물류센터와 해외지사화사업도 참고할 수 있다. 원전 분야에서는 단순한 물류나 상담 지원에 더해, 원전 구매 절차와 미국의 물류·엔지니어링 환경을 이해하는 외부 전문인력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KNA나 한수원 등은 참여기업 선정과 사업 관리, 네트워크 연계를 맡고, 기술 판단과 품질보증 문서의 승인·관리, 계약에 대한 책임은 각 기업이 갖도록 하면 된다. 우선 미국 진출 준비가 된 5개사 안팎을 선정해 1~2년간 시범 운영해 볼 수 있다. 성과도 상담 건수나 명함 수보다는 공급자 등록, 견적 요청, 첫 구매주문, 반복 거래처럼 실제 거래 과정에서 얼마나 진전이 있었는지를 기준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정부와 KNA, 한수원, KOTRA가 열어놓은 수출의 문을 통과한 기업이 미국 현지에 뿌리내려 사업을 키워갈 수 있도록 '공동 현지 실행 거점'과 같은 시범사업을 검토해볼 시점이다.

[EE칼럼] 전력 공기업 구조조정, 미래를 위한 투자와 혁신을 기대한다

허은녕 서울대학교 에너지시스템공학부 교수/ 전 세계에너지경제학회(IAEE) 부회장 지난 9월 3일 정부가'공공기관 기능개혁 추진 방안'을 발표하였다. 109개에 이르는 공공기관의 구조조정을 시작하겠다는 발표였다. 공공기관 구조조정은 21세기 내내 꾸준히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나 사실 제대로 진행된 적이 없었기에 이번 정부의 발표는 전문가는 물론 일반 국민들도 큰 관심을 보였다. 무엇보다도 대중의 주목을 받은 것은 지난 2001년 총 6개의 자회사로 분할하였던 한국전력공사의 발전 부문 중 한국수력원자력을 제외한 5개 발전 자회사를 가칭 '한국발전'으로 통합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도 이번에는 상당한 수준의 전력 분야 공기업 혁신이 진행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2001년'전력산업 구조개편'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구)한국전력공사의 분할은 사실 1997년 IMF 외환위기가 발화점이었다. 대량의 외화가 필요하였던 정부는 외국 자본이 눈독을 들이던 발전사업을 매각하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주요 발전소를 하나씩 쪼개어 매각하려 하였다. 이후 주제는 매각보다 분할과 경쟁 또는 민영화로 넘어갔는데, 김대중 정부는 학계와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자 하였다. 그 덕분에 막 대학에 자리를 얻었던 필자를 포함 수십명의 학자들이 관련 연구를 진행하였으며 학술대회와 토론회에서 치열한 토론이 이루어졌다. 토론의 대표적인 키워드는 '규모의 경제(economies of scale)'였다. 즉, 전력회사의 규모가 어느 정도일 때 전력 생산단가가 가장 낮은가 하는 논의다. 발전 부문의 분할에 찬성하는 쪽은 그시절 한국전력공사의 발전 부문이 너무 커서 몇 개 기업으로 나누어도 충분한 규모가 되며 경쟁을 통해 단가가 하락할 것이라는 연구결과를, 분할에 반대하는 쪽은 규모가 더 커야 규모의 경제를 이룰 수 있으며 특히 원료를 100% 수입에 의존하고 있기에 나누어 수입하게 되면 구매단가가 올라갈 것이라는 연구결과를 내어놓았다. 김대중 정부는 분할과 경쟁이 원가를 낮출 수 있다는 쪽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2015년 파리협정 등 기후변화협약으로 인한 국제적인 압박이 강해지자 정부는 이를 달성하기 위하여 석탄발전소를 폐쇄하기로 결정하고 그 대신 재생에너지를 확대하기로 한다. 또한 정부가 바뀔 때마다 원자력 발전에 대한 입장차이를 보이면서 발전원에 대한 국민 갈등이 깊어졌다. 이러한 변화들은 기존의 '규모의 경제'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이슈였기에 학계는 전력산업의 구조와 역할에 대한 추가적인 개편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여러번 제기하였으나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면서 기존 구조개편의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연구개발이 그 하나이다. 2001년 구조개편 이전에는 발전 및 송배전 기술의 연구개발이 하나의 회사에서 이루어졌다면, 이후에는 발전 자회사 6개와 송배전을 담당하는 한국전력공사 등 총 7개의 회사로 나누어 진행하다보니 제대로 된 신기술 개발이 부족해졌다는 지적을 받게 되었다. 또한 자원개발비리 등으로 정부가 공기업의 해외투자를 억제하자 세계 최고 수준이던 국내 전력산업의 국제경쟁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며, 정부의 전력요금 억제 정책의 지속으로 부채가 200조원이 넘는 부실기업이 되었다. 이제는 매물로 내어놓아도 아무도 원하지 않는 기업이 된 것이다. 따라서 이번 전력 공기업의 개혁 목표가 단순히 2001년의 구조개편 이전으로의 원상복구여서는 부족하다. 통합을 통하여 규모의 경제를 이루는 것은 물론 AI, IoT, Big Data 등 4차산업혁명을 선도하는 국제적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과감한 투자와 혁신이 수반되어야 한다. 혁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전력 공기업에 쌓여있는 빛더미를 해결할 방안은 더욱 더 찾기 어려울 것이며 그 미래는 크게 어두워질 것이기 떄문이다. 멀리 볼 필요도 없다. 이번 공공기관 기능개혁 추진 방안에 포함된 또 하나의 공기업인 대한석탄공사가 좋은 사례이다. 대한석탄공사는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가장 잘나가는 공기업이었지만 천연가스 등 새로운 에너지원도 함께 담당할 기회를 거부하고 석탄만 고집하다가 잊혀진 기업이 되었으며, 이름만 겨우 유지하다가 이번에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다음 기회는 없다. 정부와 전력 공기업들은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말고 미래를 제대로 준비하는 투자와 혁신을 이루어내어야 할 것이다. bienns@ekn.kr

[기자의 눈] 신규원전 건설만큼 폐기물 해법도 절실

인공지능(AI) 시대 원자력 발전의 역할을 공론화하는 작업을 정부가 시작했다. 2040년까지 해당하는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수립을 마무리해야 할 시점에서 공론화가 진행되는데다 AI발(發) 전력 수요 증가에 대응해 신규 원전 건설을 검토하겠다는 입장이 나온 터라 원전 확대를 위한 명분 쌓기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탄소 배출량 감축이 목표대로 잘 안되는데 AI 붐까지 일면서 무탄소 전원으로서 원전의 역할이 불가피해졌지만, 방사성 폐기물이 나온다는 한계가 과제로 뒤따라온다. 원자력 발전의 부산물로 나오는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은 습식 저장소에 수년 동안 임시 보관한 뒤 건식 저장소로 옮겨 영구 보관하는 식으로 관리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지어진 원전들도 2030년 한빛원전을 시작으로 습식 저장소가 포화 상태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건식 보관소는 주민 반발 여론이 워낙 커 월성원전을 제외하고 지어진 곳이 없다. 발전을 계속 해야 하는데 방사성 폐기물이 오갈 데가 없어지는 상황이 가능해졌다. 폐기물 문제는 원전뿐만이 아니다. 일반 쓰레기 처리 문제도 아슬아슬하다. 서울과 경기, 인천에서 나오는 쓰레기가 향하는 인천 서구의 수도권 매립지가 거의 꽉 찬 데다 인근 주민들의 환경 피해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정부는 올해부터 종량제 쓰레기 직매립을 원칙적으로 금지했다. 쓰레기를 소각한 뒤 땅에 묻으면 쓰레기의 양이 직매립의 약 15%로 줄어든다. 서울·경기·인천 등 광역자치단체들은 공공 소각장 확충에 나섰지만 주민 반발로 추진이 쉽지 않다. 수도권 매립지 문제는 1·2매립장 포화가 임박하자 사용 연장을 둘러싸고 2010년경 시·도끼리 맞선 것이 시작이다. 이때는 3매립장 추가 사용으로 가닥을 잡아 해결했을 뿐이다. 주민들은 포화가 안됐더라도 2025년 이후 매립 중단이 필요하다고 요구 중이다. 일상에서 발생하는 쓰레기와 원전에서 나오는 방사성 폐기물로 주민들이 우려하는 피해 유형은 다르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두 유형의 폐기물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공통점이 있다. 이번 원전 공론화 과정에서도 원전 인근 주민들이 우려하는 폐기물 처리 문제가 가장 큰 쟁점으로 논의될 것이다. 건식 저장시설을 확대하며 관리 감독 체계를 강화하거나, 포화가 임박한 습식 저장시설이라도 당장 증설에 나서거나, 아니면 AI를 포기해 전력 수요 '폭증'을 막는 3방향 중 하나로 정해질 것이다. 어느 방향으로 가든, 그간 미루기만 했던 방사성 폐기물 저장시설 포화 문제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해결책 도출이 절실하다. 방사성 폐기물은 쓰레기보다 관리가 더 어려운 만큼 대충 매듭지을 일이 아니다. 정승현 기자 jrn72benec@ekn.kr

[EE칼럼] 원전종주국이 인정한 K-원전, 이제 준비의 시간이다

1978년 4월, 고리 1호기가 상업운전을 시작했다. 우리나라 첫 원전이었다. 설계부터 시공까지 미국 웨스팅하우스가 주도했다. 우리는 공사 현장에서 어깨너머로 기술을 배웠다. 1990년대 한빛 3·4호기에서 기술자립의 첫발을 뗐고, 2009년 아랍에미리트 원전 수출에 이어 지난해에는 체코 신규 원전 사업까지 수주했다. 고리 1호기 이후 반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 우리가 원전의 본고장 미국에 원전을 짓는 길을 열었다. 지난 1일 한미 양국은 20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전략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이 가운데 최대 1200억 달러를 들여 미국에 대형 원전 8기를 짓는다. 이 중 2기가 우리 APR1400이다. 한국형 원전이 미국 본토에 들어서는 첫 사례다. 원전 기술을 배워 온 나라가 이제 원전종주국의 시장에 진출하는 셈이다. 우리 원자력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다. 상징적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 한국의 원전 기술력과 시공 역량을 인정하고 전략적 동반자로 선택한 것이다. APR1400은 이미 2019년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의 설계인증을 받았다. 외국 노형으로는 처음이었다. 아랍에미리트 바라카 원전 4기를 성공적으로 지은 실적도 있다. APR1400 2기가 전부가 아니다. 나머지 AP1000 6기에도 국내 설계·시공 기업과 기자재 기업의 참여가 추진된다. 노형 하나를 수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미국 원전 공급망과 건설시장에 들어가는 것이다. 미국 역시 무너진 원전 공급망과 건설 역량을 복원해야 하는 상황이다. 한국의 기술력과 건설 경험이 미국의 원전 확대와 맞물리는 이유다. 원전은 이제 국가 전략기술이 됐다. 필요한 기술과 공급망을 가진 나라는 협상장에서 목소리가 커진다. 반도체와 조선에 이어 원전이 한미 경제안보 협력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았다. 한미 원자력협력과 원전 외교에서도 우리의 발언권은 한층 커질 것이다. 그러나 기회의 문이 열렸다고 결실이 저절로 따라오지는 않는다. 국내 신규 원전 건설과 체코 원전 사업이 추진되는 가운데 미국 사업까지 더해진다. 여러 사업을 함께 해내려면 우리 기업의 역량을 키우고 이를 뒷받침할 제도를 미리 갖춰야 한다. 첫째, 미국의 품질보증과 인증 체계를 갖춰야 한다. 미국 원전에 기자재를 공급하려면 연방규정이 정한 원자력 품질보증 요건과 관련 인증을 충족해야 한다. 안전 관련 결함을 규제기관에 보고할 법적 의무도 따른다. 대기업은 미국 원전에 주기기를 공급한 경험이 있다. 문제는 수많은 중소 협력사다. 정부가 이들 기업의 인증 취득 비용과 품질 전문인력 양성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 둘째, 현지 법과 건설제도에 대비해야 한다. 미국은 연방법뿐 아니라 주(州)별로 건설과 노동 관련 제도가 다르다. 인허가 절차, 현장 안전기준, 노무 관행도 우리와 다르다. 사업 초기부터 현지 법률과 인허가, 노무제도에 정통한 전문인력을 확보해야 한다. 셋째, 공기와 비용의 불확실성을 제도로 관리해야 한다. 미국 보글 3·4호기는 공기 지연과 비용 증가가 신규 원전 사업의 가장 큰 위험임을 보여줬다. 미국 정부가 신규 원전 인허가 기간을 대폭 줄이겠다고 밝힌 만큼, 이를 이번 사업에 실제로 적용해야 한다. 한미 양국은 원전 사업 부지에 적용되는 연방법과 주법, 인허가 절차와 규제기관 간 관계를 미리 정리해야 한다. 불필요한 중복 절차를 줄이는 특례 장치도 마련해야 한다. 우리 기업 역시 설계 확정과 기자재 조달을 철저히 준비해 공기를 지켜야 한다. 공기 지연과 비용 증가의 위험을 어느 한쪽에 떠넘기지 않는 합리적 분담 체계도 필요하다. 넷째, 우리 근로자를 보호할 제도를 갖춰야 한다. 지난해 조지아주 배터리 공장에서 불거진 한국인 근로자 비자 문제는 해외 대형 사업에서 근로자의 법적 지위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줬다. 원전은 장기간 고도의 전문인력이 필요하다. 착공 전에 기술인력의 입국과 근무를 보장하는 비자·취업허가 체계를 양국이 합의해야 한다. 현지 산업재해 보장과 법률 지원 체계도 함께 마련해야 한다. 반세기 전 우리는 배우는 나라였다. 이제 미국과 함께 원전을 건설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기회는 준비된 나라의 몫이다. 정부는 제도로, 기업은 역량으로 답해야 한다. 미국 원전시장 진출의 성패는 계약이 아니라 지금부터 시작되는 준비에 달려 있다. 이제는 준비의 시간이다. 문주현

[이슈&인사이트] 건배는 끝났고, 경쟁은 계속된다

건배사는 대개 지루하다. 우정과 협력을 말하고 서로의 건강을 빈다. 그러나 9월 24일 백악관 만찬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200년이 넘는 미·중 관계를 몇 분의 연설에 담았다. 조지 워싱턴이 구입한 중국 도자기에서 시작해 제2차 세계대전의 험프 항로, 마오쩌둥과 리처드 닉슨의 관계 정상화, 중국 사막에 나무를 심은 미국인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날 낮 협상장에 놓였던 관세와 반도체, 희토류는 이 역사에서 빠져 있었다. 시진핑이 고른 첫 단어는 중추절이었다. 워싱턴에서 만찬이 열린 24일 밤, 베이징은 이미 가족이 다시 모이는 명절을 맞고 있었다. 그는 두 나라의 관계도 그렇게 한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역사를 어디서 시작하느냐에 따라 식탁의 풍경은 달라진다. 2018년에서 시작하면 무역전쟁이다. 시진핑은 더 먼 과거의 도자기와 교역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외교의 건배사는 역사를 편집하는 일이기도 하다. 연설의 끝에서는 트럼프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와 자신의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나란히 놓았다. 두 목표가 서로를 북돋울 수 있다고도 했다. 상대의 구호를 반박하는 대신 옆자리를 내준 셈이다. 그러나 두 나라가 바라는 '다시'가 언제까지 같은 식탁에 앉아 있을 수 있을까. 이 물음의 답은 건배사보다 산업정책에 가까이 있다. 미국의 대중국 전략은 한때 중국을 세계경제에 편입하면 경제뿐 아니라 정치도 변하리라는 기대에 기초했다.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 가입은 그 기대의 정점이었다. 이후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 재균형, 트럼프 1기의 관세와 기술 제재, 바이든 행정부의 반도체 수출통제를 거치며 워싱턴의 무게중심은 관여에서 경쟁으로 옮겨갔다. 정권은 바뀌었지만 중국의 기술적·군사적 부상을 견제하려는 방향은 이어졌다. 트럼프 2기가 그 경쟁을 멈춘 것은 아니다. 다만 모든 거래를 끊는 대신, 전략적으로 중요한 분야에는 장벽을 세우고 나머지 교역은 관리하려 한다. 미국 무역대표부는 미·중 무역위원회를 통해 안보상 민감하지 않은 상품의 교역을 논의하면서도 경제·국가안보를 위한 관세는 계속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봉쇄를 포기했다기보다 압박과 거래를 함께 쓰는 쪽으로 전술을 조정한 것이다. 중국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냉전기의 소련과 달리 중국은 세계 제조업과 공급망 깊숙이 들어와 있다. 미국이 첨단기술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면 중국은 핵심광물과 제조업 공급망을 협상 카드로 쓸 수 있다. 미국의 기술통제가 중국에 비용을 안기듯, 중국의 수출제한도 미국과 동맹국에 비용을 안긴다. 서로를 밀어붙일 수는 있어도 그 충격에서 자신만 벗어날 수는 없다. 두 나라가 거듭 협상장으로 돌아오는 이유다. 이런 점에서 백악관의 건배와 협상장의 긴장은 모순되지 않는다. 두 정상은 경쟁을 끝낸 것이 아니라 경쟁의 비용을 관리하려 했다. 미국은 중국과 대화하는 동시에 반도체와 인공지능, 조선과 핵심광물에서 자국의 우위를 지키려 한다. 중국 역시 관계를 안정시키는 동안 기술자립과 공급망의 영향력을 키우려 한다. 악수는 화해의 결론이 아니라, 계속될 경쟁을 다루는 방식이다. 한국에도 기회와 부담이 함께 온다. 미국이 전략산업에서 중국 의존을 줄이려 할수록 한국의 반도체와 조선, 배터리와 방산 역량은 중요해진다. 그러나 그 가치는 미국 내 투자 요구와 공급망 재편 비용을 동반한다. 중국 시장과 소재 공급망도 하루아침에 지울 수 없다. 미·중 경쟁이 길어질수록 한국은 더 필요해지는 동시에 더 어려운 선택을 요구받는다. 시진핑은 건배사에서 두 나라의 오랜 우정을 말했다. 그러나 한국이 주목해야 할 것은 잔을 든 손보다 협상장에 남은 계산서다. 어느 쪽 잔에 먼저 부딪칠지 묻기 전에, 두 나라 모두 쉽게 빼놓을 수 없는 산업과 외교의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건배는 끝났다. 복잡한 계산은 이제부터다. 성일권

[EE칼럼] “한전 전력망 25조 선납, 깔세인가?”

얼마전 한국전력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앞으로 5년 치 전기요금 총 25조원을 미리 받아 전력망을 건설하려 했던 사안을 다시 되짚어보자. 사실 본 사안의 핵심은 사실 돈의 규모나 업황의 문제이기 전에 '권리'의 문제다. 돈은 대라면서 망에 대한 권리 (재산권)는 주지 않기에, 애초에 받을 수 없는 제안이었다. 부채에 허덕이는 (주)한국전력 입장에선 전력망을 제때 깔아보려고 짜낸 고육지책이란건 안다. 하지만, 전력망의 소유권과 운영권은 전혀 포기 않으면서, 수십조원의 자금조달 위험과 건설 부담은 통째로 민간에 넘기겠다는 시도이다. '민영화'라는 말이 나올 틈은 원천 봉쇄해 두고 돈만 끌어오겠다는 건데, 경제학적으로 당연히 유인 불합치(incentive incompatibility)가 발생하게 된다. 왜 선납은 기형적인가. 정상적인 인프라 투자를 떠올려 보자. 투자자가 돈을 대면 그 대가로 무언가가 남아야 한다. 재무제표에 자산(asset)이 잡히고, 감가상각이 되고, 장기 운영권이나 배당·리스료 같은 수익 흐름이 따라온다. 반면 선납은 어떤가. 25조원을 넣어도 장부에는 '선급금'이라는 채권 한 줄이 남을 뿐이다. 송전탑 한 기, 변전소 한 곳도 내 것이 아니다. 자본은 잔뜩 묶이는데 생산적 자산은 커녕 경비처리 하나도 못하는 구조다. 부동산 거래에서 속칭 '깔세'라고 월세를 한꺼번에 내는 선례가 있긴 하다. 하지만 이걸 투자라 부르긴 어렵다. 깔세 세입자는 흔히 계약 상 매우 열등한 위치인 경우가 많으며, 여튼 뭔가가 아쉬워서 담보 없이 집주인에 목돈을 빌려주는 것이다. 이자를 쳐주지 않았느냐고? 국고채 2년물보다 조금 높은 금리를 얹어 반기마다 요금에서 깎아 주겠다는 조건이 붙긴 했다. 하지만 그 이자로 무엇을 담보받는가. 지자체 인허가가 막히고 주민 반발로 공기가 밀려도, 전력이 제때 들어온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권리는 제로에 가깝고 위험은 사실상 무한대인 비대칭 계약이다. 반도체 경기의 사이클과 글로벌 설비투자 경쟁을 감안하면, 이런 계약에 도장을 찍는 경영진은 주주 앞에서 배임 시비를 각오해야 한다. 그렇다면 한전과 정부는 왜 BTO(수익형)나 BTL(임대형) 같은 정통 민자 방식을 놔두고 이런 우회로를 찾았을까. 답은 뻔하다. '전력망 민영화'라는 프레임이 무섭기 때문이다. 정치권과 노조가 이 네 글자를 꺼내는 순간 논의는 산으로 간다. 그래서 망 소유권은 성역으로 남겨두고 돈만 끌어올 궁리를 한 것이다. 지난 8월 국회를 통과한 전력망 특별법 개정안도 같은 뿌리다. 민간이 송전망을 짓되 준공과 동시에 소유권을 한전에 넘기고, 투자 원금과 약정 수익을 나중에 정산받는 BT(Build-Transfer) 방식이다. 정부 스스로 “민간은 정산만 받을 뿐 운영권은 없다"고 못 박았다. 건설 위험은 지고, 자산은 못 갖고, 돈은 나중에 받는다. 과연 연기금이든 인프라펀드든 대형 외국계 자본이든, 소유도 운영도 없는 사업에 대규모 자본을 장기간 묶어둘까 싶다. 해법은 어렵지 않다. 자본이 흐르게 하려면 정당한 반대급부, 곧 재산권(property rights)을 제도로 인정하면 된다. 첫째, BTL 방식의 도입이다. 민간이 망을 짓고 소유하되, 한전이나 정부가 이를 장기 임차해 확정된 시설임대료를 지급하는 구조다. 운영과 급전은 지금처럼 한전이 맡는다. 민간에는 예측 가능한 현금흐름이 생기고, 그 현금흐름이 자산으로 잡히니 금융투자자(FI)가 붙게 된다. 학교와 군 관사, 하수관거를 이미 이 방식으로 지어 왔다. 유독 전선만 안 될 이유가 없다. 둘째, 대형 첨단 산단에 한해 발전소와 공장을 잇는 전용 사설 송전망의 민간 소유와 직접 급전을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것이다. 전국 계통을 쪼개자는 게 아니다. 수용가가 제 돈으로 짓고 제 책임으로 관리하는 “전용선"을 허용하자는 것이다. 반도체 단지 하나 때문에 나라 전력망 전체가흔들릴 일은 없다. 기간산업이 전기가 없어 멈추지 않도록 망을 제때 까는 것, 그것이 지금 가장 시급한 공공성이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전력망 없이는 신기루다. 한전의 텅 빈 곳간과 민영화 금기라는 이중의 제약조건에 갇혀 있는 한 해결은 요망하다. 정부와 정치권은 '소유권 없이 돈만 대라'는 발상을 접고, 전력망 투자에 합당한 소유권과 운영권을 보장해 자본을 유치하는 방향으로 틀어야 한다. bienns@ekn.kr

[기자의 눈] 수백쪽 내고도 모르는 금감원 유증 심사 기준

“수차례 정정 요구를 받아 수백 페이지의 자료를 추가로 제출했지만, 아직도 금융감독원의 심사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최근 유상증자를 추진한 한 상장사 대표의 말이다. 이 대표는 금감원이 요구하는 자료를 그때그때 보완했지만 어느 수준까지 소명해야 충분한 것인지 명확하지 않았다고 했다. 담당 직원에 따라 요구사항과 자료의 범위도 달라지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 회사는 금감원으로부터 수차례 정정신고서 제출을 요구받았다. 요구에 맞춰 보완한 자료만 수백 페이지에 달했다. 그럼에도 무엇을 어느 수준까지 기재해야 심사 기준을 충족하는지는 알기 어려웠다고 한다. 다른 코스닥 상장사 대표의 얘기도 비슷했다. 정정 요구 자체보다 기준을 사전에 가늠하기 어렵다는 점을 문제로 꼽았다. 담당 직원에 따라 요구하는 자료와 설명의 정도에도 차이가 있다고 했다. 처음부터 기준에 맞춰 신고서를 작성하기보다 심사를 받으면서 필요한 내용을 하나씩 확인하는 구조에 가깝다는 얘기다. 금감원의 설명은 투자자 보호에 맞춰져 있다. 투자자가 유상증자 참여 여부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도록 기업에 최대한 많은 근거를 제시하도록 한다는 취지다. 자금 사용 목적과 사업계획의 실현 가능성 등을 충분히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원칙에는 이견이 생기기 어렵다. 유상증자는 기존 주주의 지분을 희석할 수 있다. 재무상태가 취약하거나 자금 사용 목적이 불분명한 기업이라면 더욱 면밀한 심사가 필요하다. 부실한 증권신고서를 걸러내는 것도 감독당국의 역할이다. 문제는 '충분한 근거'의 기준이다. 어느 정도의 자료를 제출해야 충분한지, 어떤 경우 추가 소명이 필요한지 구체적인 기준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기업들의 지적이다. 금감원이 요구할 때마다 자료를 추가하는 방식이라면 기업은 정정 요구를 받은 뒤에야 필요한 수준을 확인할 수 있다. 증권신고서 심사는 자금조달 일정과도 직결된다. 정정이 반복되면 당초 계획했던 발행 일정도 늦어진다. 시장 상황과 주가에 따라 발행 조건이 달라지는 유상증자에서는 일정의 예측 가능성 역시 중요하다. 실제 시장에서도 반복적인 정정으로 자금조달 일정이 흔들리는 데 대한 불만이 나오고 있다. 모든 기업을 하나의 잣대로 심사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재무상태와 자금 사용처, 사업계획이 기업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감독당국의 판단과 재량이 필요한 영역은 분명히 존재한다. 재량이 곧 모호한 기준을 의미할 필요는 없다. 복수의 상장사 대표가 수차례 정정을 거친 뒤에도 다음에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면 심사의 예측 가능성은 짚어볼 문제다. 담당자에 따라 요구사항이 다르다는 인식 역시 마찬가지다. 금감원이 기업에 충분한 근거를 요구하는 만큼 기업에도 판단의 근거를 보다 명확하게 제시할 필요가 있다. 반복적으로 정정이 요구되는 사항을 유형화하거나 주요 사례를 구체적으로 안내하는 것도 방법이다. 투자자가 제대로 판단하려면 충분한 정보가 필요하다는 게 금감원의 설명이다. 증권신고서를 작성하는 기업 역시 어떤 기준을 충족해야 하는지 알아야 제대로 준비할 수 있다. 수백 페이지를 추가로 제출하고도 “기준을 모르겠다"는 말이 반복된다면 심사 기준의 예측 가능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 장하은 기자 lamen910@ekn.kr

[이슈&인사이트] 러시아의 유럽 침공 가능성과 나토의 고민

최근 유럽에서 러시아의 도발로 심각한 안보 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이 커지며 나토(NATO)가 긴장하고 있다.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은 러시아가 유럽과 나토를 공격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한 후, 9월 21일에는 유럽 정보수장들이 러시아가 수개월 내 나토를 직접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런 와중에 영국의 합참의장은 “영국은 러시아와의 잠재적 전쟁에서 우리의 아들과 딸(젊은이들)을 잃을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리투아니아 총리는 22일 영국 BBC와의 인터뷰에서 러시아의 위협에 대비해 국민 피난 계획까지 세웠고 공격받더라도 “절대 항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상황이 매우 심각함을 알렸다. 이런 위기감은 러시아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 우크라이나 인접국인 폴란드, 심지어는 독일에 대해 드론 침범과 기반 시설 파괴 공작, 대민 심리전 전개 등 다양한 형태의 복합 하이브리드 도발을 계속하면서 확산하고 있다. 발트 3국은 철저한 반러시아지만, 동부 일부에는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친러시아 인구가 다수인 지역이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 때 같이 발트 3국에 대해서도 자치를 원하는 러시아인을 보호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공격을 감행할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확실한 승기를 잡지 못한 러시아가 모종의 상황 전환을 노리면서 이런 도발을 기획하고 있다는 평가다. 유사시 과거 소련의 일부였던 발트 국가를 제한적으로 공격해 나토와 전면전은 회피하면서 회원국에 대한 공격을 동맹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는 나토 조약 5조에 명시한 '레드라인'을 시험하는 시나리오다. 만약 나토가 러시아의 도발에 굴복해 발트 3국 보호를 위한 집단방위권 발령을 주저하면, 우크라이나도 제대로 지원하기도 어렵게 되어 나토 방어선이 무력화된다. 이 경우 지지부진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어려워진 푸틴의 정치적 입지가 개선된다. 러시아는 미국이 개입하거나 지원을 충분히 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미국이 빠진 나토의 전쟁 지속 능력이 제한되면 러시아는 나토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더군다나 이런 충돌이 핵전쟁으로 갈 수 있는 제3차 세계대전의 실마리가 된다면 일부 국가는 자국 생존을 위해 나토 동맹 탈퇴를 결심할 수도 있다. 이는 나토의 붕괴를 의미한다. 그러나, 러시아의 기대는 희망에 불과할 가능성이 크다. 우크라이나에서 작전 능력을 보면 러시아군이 나토와 제대로 전쟁을 수행할지 의문이다. 나토 집단자위권을 무력화할 수 있다는 근거도 부실하다. 발트 3국에는 영국, 독일군 등 나토군이 대규모로 주둔하고 있어 유사시 전쟁에 자동 개입하는 것이 확정적이다. 러시아가 나토와 전면전을 각오하지 않고서 일부 국가에 대한 제한적 도발을 감행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대규모로 전력을 증강해 온 폴란드는 과거 러시아로부터 호되게 당한 역사 때문에 도발에 즉시 응전할 가능성이 크다. 폴란드, 독일 등에 기지를 보유한 미국도 아무리 유럽과 갈등이 있어도 자위 차원에서 러시아 공격에 대응하게 될 것이다. 결국 러시아가 나토와의 긴장을 조성하는 이유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자기 의지대로 종결하기 위한 기만책일 가능성이 크다. 나토를 위협해 우크라이나를 포기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시도가 성공하면 정치적·경제적 수렁에 빠진 러시아의 빠른 정상화도 기대할 수 있다. 만약 러시아가 나토와의 갈등을 내세워 그동안 하지 못했던 국가 전시 총동원령을 발령한다면 압도적인 전력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승리로 이끌 가능성도 커진다. 유럽은 러시아의 이런 계산을 알고 있다. 나토는 러시아 도발에 단호하게 대응하겠지만, 전면전으로 확전은 피할 것이다. 전력 부족에 시달리는 러시아도 나토에 본격적인 군사 도발은 회피하려고 할 것이다. 대신 드론전, 사이버전, 여론전, 국지 도발, 특수부대의 비정규전 전개는 가능하다. 아마 러시아가 도발한다면 이런 복합 하이브리드전·제한적 국지전을 우선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유럽에서 전쟁이 터질 수 있는 매우 민감한 시기다. 나토와 러시아의 전면전은 제3차 세계대전을 촉발할 수 있는 기폭제가 될 가능성이 있다. 분명한 사실은 서방 사회가 누려온 평화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은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질서 안에서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더 이상 유럽의 안보 무임승차를 거부한다는 2기 트럼프 행정부의 압박은 현실이 되었다. 이제 유럽은 단순한 군사력 증강을 넘어 사회 전체의 심리적·구조적 재무장이 필요한 시간이다. bienns@ekn.kr

[김병헌의 체인지] 보여주기라면 기업총수를 국회에 세우지 말자

10월 6일 산업통상자원부 국정감사를 앞두고 국회에 익숙한 이름들이 다시 등장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다.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투자와 관련해 야당이 증인 채택을 요구했다. 1차 명단에서는 빠졌지만 추가 협의 가능성은 남아 있다. 국감철이면 되풀이되는 '기업인 줄소환' 풍경이다. 기업은 성역이 아니다. 불공정거래나 소비자 피해, 산업재해처럼 최고경영자의 판단과 책임을 직접 확인해야 한다면 총수도 국회에 나와야 한다. 1994년 미국 의회가 7개 담배회사 CEO를 증인석에 세운 것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니코틴이 중독성이 없다고 믿는다는 취지로 증언했지만 이후 소송 등을 통해 공개된 내부자료는 이런 주장과 배치됐다. 의회의 강력한 소환권이 왜 필요한지를 보여준 사례다. 문제는 '누구를 부르느냐'보다 '왜 부르느냐'다.우리 국회는 기업 총수를 부르는 데 지나치게 익숙해졌다. 2025년 국감에서는 기업인 증인이 190명을 넘어 당시 역대 최대 규모였다. 전년도 159명보다도 많았다. 출석하고도 질문 한 번 받지 못하고 돌아간 사례까지 있었다. 여기서 국회가 스스로에게도 질문할 필요가 있다. 기업에는 혁신을 요구하면서 정치는 얼마나 혁신했는가. 글로벌 기업은 정치가 호통치지 않아도 혁신한다. 하지 않으면 시장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기술을 놓치면 경쟁사가 고객을 가져가고 투자 판단을 잘못하면 수십조원의 손실을 떠안는다. 기업에는 선거가 없는 대신 시장이라는 심판이 매일 열린다. 정치도 선거라는 심판을 받는다. 다만 몇 년에 한 번이다. 바로 그 시간차 때문에 정치에는 더 강한 자기절제가 필요하다. 지역 발전을 이유로 기업 총수를 국회로 부르기 전에 정치인도 돌아볼 일이다. 기업이 투자할 인재를 길렀는가. 전력과 용수, 교통과 주거를 준비했는가. 불필요한 규제를 걷어냈는가. 청년이 머물 산업 생태계를 만들었는가. 기업에 자강을 요구한다면 지역구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정치 자신은 무엇을 바꿨는지도 답해야 한다. 특히 반도체 투자를 여전히 개발연대의 '정경유착'이라는 안경으로만 바라봐서는 곤란하다. 오늘의 반도체 공장은 전력·용수·인재·세제·공급망은 물론 미·중 기술패권과 AI 시장의 미래까지 계산해야 하는 초장기 투자다. 물론 정부가 부당하게 기업 투자에 개입했다는 증거가 있다면 철저하게 밝혀야 한다. 그것이 국회의 책무다. 그러나 의혹을 제기하는 것과 의혹을 사실로 전제하는 것은 다르다. 외압 여부는 유명한 총수를 증인석에 앉히는 장면이 아니라 자료와 증언, 증거로 밝혀야 한다. 정권은 5년이지만 반도체 공장은 수십 년을 간다. 정치인은 다음 선거에서 구호를 바꿀 수 있지만 기업은 잘못 지은 공장을 들고 다음 선거를 기다릴 수 없다. 이재용과 최태원도 과거의 '재벌총수'라는 한 단어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경영자들이다. 오너 경영인이면서 세계 각국 정부와 글로벌 기업을 상대로 기술·투자·공급망을 결정하는 최고 의사결정자다. 잘못에는 엄격하게 책임을 묻되 국민에게 국회의 권위를 보여주기 위한 상징물처럼 증인석에 세우는 일은 경계해야 한다. 그래서 기업 총수 소환에도 최소한 세 가지 기준이 필요하다. 직접성, 대체불가능성, 공익성이다. 해당 사안에 직접 관여했는가. 실무책임자가 아니라 반드시 총수가 답해야 하는가. 그리고 국민적 공익을 위해 그 답변이 꼭 필요한가. 이 기준을 충족한다면 당당하게 부르면 된다. 그렇지 않다면 사안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할 사람을 부르는 것이 국감의 효율에도 맞다. 증인을 채택했다가 철회한다면 이유도 기록해야 한다. 몇 시간씩 기다리게 하고 몇 분 질문하거나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면 그것 역시 공개하자. 증인 요구권이 강한 만큼 요구한 의원의 책임도 무거워야 한다.국감장은 기업인을 혼내 국회의 힘을 보여주는 무대가 아니다. 잘못을 찾아내고 책임을 묻고 국가의 더 나은 길을 찾는 자리다. 기업 총수를 증인석에 앉히기 전에 국회의원도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볼 일이다.국회의 권위는 높은 사람을 불러 세우는 힘에서 나오지 않는다. 꼭 필요한 사람을 불러 꼭 필요한 질문을 하고, 국민이 궁금해하는 진실을 밝혀낼 때 비로소 생긴다.

[기자의 눈] 실패를 조리돌림하는 야만적 사회에 혁신은 없다

“돈 대줬는데 왜 실패해? 예산 슈킹(가로채기)한 것 아니야? 준비도 안 됐는데 외빈들 앞에서 개망신당한 꼴인데 국방부랑 방산 업체들은 왜 이리 당당하냐?" 지난달 포천 승진 훈련장에서 국방부 주관으로 열린 '국방 드론 기술전'에서 첨단 무인기들이 이륙 직후 곤두박질치자 터져 나온 힐난이다. 무지하고 거친 비난은 대중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당장 필자가 참석한 편집 회의에서도 “그래서 국방부를 조져야 하는 것 아니냐"는 날 선 목소리가 서슴없이 나왔을 정도다. 실제 타 매체 들도 약속이라도 한 듯 이번 시연이 대참사이자 실패로 귀결됐다며 비난 일색의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현장을 취재하고 첨단 연구·개발(R&D) 생태계의 이면을 취재하는 기자로서 이 살벌한 마녀사냥을 지켜보며 숨이 턱턱 막혔다. 시제기 몇 대가 흙먼지에 처박혔다고 득달같이 달려들어 침을 뱉고 누군가의 밥줄을 끊을 궁리부터 하는 모습을 보며 사회 전반적으로 야박한 인식과 발상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사실에 참담함을 넘어 분노마저 치민다. 이들의 맹목적인 융단 폭격은 팩트 체크부터 실패했다. 막대한 혈세를 허공에 날렸다는 조롱은 번지수조차 잘못 짚었다. 가장 큰 질타를 받았던 고속 제트 무인기는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자체 예산을 들여서 제작했고, 이 공개 시연 역시 100% 무결점 성능을 뽐내야 하는 양산품 쇼룸이 아니라 지난한 개발 과정 중 일부였을 뿐이다. 방위산업을 비롯한 첨단 기술 분야에서 프로토타입과 같은 초도분이 존재하는 이유는 극한의 환경에 기체를 내던져 버그(결함)를 잡아내 후속분 양산에 차질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행사 당일 2000여 명의 인파가 뿜어내는 거대한 통신 트래픽 속에서 주파수 혼선을 겪은 것은 조롱거리로 소비할 게 아니라 향후 복잡한 전자전(EW) 환경의 항재밍 기술을 고도화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귀중한 실측 데이터 확보 과정이었다. 새로운 기술을 테스트할 때 문제점이 무조건 나오기 마련인데 안 잡힌다면 개발진에겐 그 자체로 재앙이다. 시연장에서 체면을 구기는 것이 두려워 결함을 덮어둔 채 전력화했다가 훗날 적탄과 전파 교란이 빗발치는 실전에서 아군의 드론이 통제 불능에 빠져 장병들이 몰살당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진짜 참사다. 이 당연한 진리를 두고 언론이 나팔수가 돼 여론을 선동하고 예산 낭비와 사전 준비성을 운운하며 칼춤을 추는 동안 글로벌 혁신 선도국들은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우주 패권을 쥔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X는 수조 원짜리 로켓 '스타십'이 공중에서 폭발해 산산조각 났을 때 전 직원이 기립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폭발 직전까지 쏟아낸 원격 데이터가 다음 설계의 완벽함을 보장하기에 이를 '성공적인 실패'라 부르는 것이다. 미국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은 100% 성공이 보장된 뻔한 프로젝트는 아예 취급조차 하지 않는다. 이웃 나라 일본 자위대조차 1000억 원을 호가하는 실전 배치용 정찰기 '글로벌 호크'가 동해에 추락해 수장됐음에도 냄비처럼 끓어오르는 문책론이나 호들갑 없이 다음 무인기 전력화 일정을 묵묵히 강행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대한민국 국가 R&D 성공률이 90% 후반대라는 기형적인 수치를 기록하는 이유가 바로 이 지독한 '실패 불용'의 정서 때문이다. 한 번 삐끗하면 감사원의 표적이 되고 숱한 언론이 가차 없이 조리돌림을 행하는데 대체 어떤 연구자가 미지의 영역에 몸을 던지겠는가. 당장의 비난과 징계가 두려워 무조건 성공할 만만하고 안전한 연구만 골라 하는 비겁한 보신주의는 실패를 범죄 취급하는 우리 사회의 폭력성이 잉태한 괴물이다. 과정 중의 실패를 어떻게든 흠집 내 누군가를 박살 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천박한 사회에서는 결코 미래 전장의 '게임 체인저'를 만들어낼 수 없다. 남의 기술을 급히 베끼는 '패스트 팔로어'를 넘어 진정한 '퍼스트 무버'로 도약하는 길은 숱하게 부서지고 산화한 시제기들의 거대한 무덤 위로만 열려 있을 따름이다. 시행착오를 용인할 줄 알아야 개선하고 성공으로 이어지는 법일진대, 도깨비 방망이처럼 뚝딱 나오길 바라는 걸 보면 우리 사회는 아직 갈 길이 많이 멀다. 혁신의 숨통을 끊어놓는 것은 땅에 떨어진 드론이 아니라 아무런 희생이나 비용 지불 없이 100%의 성공만을 공짜로 얻어내려 하며 실패에 돌팔매질부터 하고 보는 우리 사회의 미개한 조급증이다. 박규빈 기자 kevinpark@ek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