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E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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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E칼럼] 정치와 규제가 합작한 한전의 부실

정치와 규제가 합작한 한전의 부실

한전이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에 25조 원어치의 전기요금을 선납해 달라고 제안했다. 삼성전자 20조 원, SK 하이닉스 5조 원에 달하는 전기요금은 작년 기준으로 5년 치에 해당한다. 지난 7월 재정부 국고실장과 국채정책과장이 한전과 삼성전자 그리고 SK 하이닉스의 고위관계자를 만나 논의하였고 청와대에도 관련 보고가 이뤄졌다고 한다.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미납 전기요금을 나중에 내는 경우는 있어도 미래의 전기요금을 선납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전력을 얼마나 썼는지 계량을 한 다음 그 값을 치르는 것인데..

[특별기고] 대미 원전투자, 두 가지 원칙이 필요하다

[특별기고] 대미 원전투자, 두 가지 원칙이 필요하다

정부의 3500억 달러 규모 대미 전략투자 사업에서 미국 원전 건설이 핵심 과제로 급부상했다. 구상 단계를 넘어 구체적인 협상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미국은 인공지능 데이터센터와 첨단 제조업의 급속한 성장에 대응하고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대규모 원전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수십 년간 신규 원전 건설이 정체되면서 이를 뒷받침할 공급망과 전문인력, 건설 역량이 충분하지 않다. 한국은 원전을 계획된 기간과 예산 안에서 건설할 수 있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산업 기반을 갖추고 있다. 설계, 주기기 제작, 시공, 시운전과 운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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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인사이트] 대미 투자, 전략적으로 하자

대미 투자, 전략적으로 하자

미・중 갈등 속에 중국의 대미 수출과 무역흑자는 줄어들지만, 중국은 동남아와 EU 시장에 대한 수출을 대폭 확대하면서 대체시장을 찾았다. 중국은 관세가 낮은 국가를 경유하여 미국에 수출하는 우회 수출로 미국에 대한 수출을 어느 정도 유지하였다. 미국은 중국산 제품에 관세를 부과하면서 인플레이션에 직면하게 되자, 결국 소비자물가에 민감한 품목의 관세를 다시 낮추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미국 정부는 여전히 중국산 태양광 제품, 전기차 및 배터리, 반도체, 철강 및 알루미늄 등 핵심 전략 품목에 대해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였다. 미국 정부의..

[이슈&인사이트] 성장으로 빚을 갚는다는 약속, 그 청구서는 누가 받는가

성장으로 빚을 갚는다는 약속, 그 청구서는 누가 받는가

스콧 베센트 미 재무장관의 화법은 일관된다. “40조 달러라는 숫자에 마법 같은 것은 없다. 우리는 성장을 통해 빚에서 벗어날 수 있다." G20에서도 CNBC 인터뷰에서도 반복된 이 말은 사실상 미국 재정 전략의 선언문이다. 증세도, 지출 삭감을 통한 긴축도 아니다. 관세 수입과 국채 바이백으로 당장의 불을 끄면서, AI가 만들어낼 생산성으로 부채의 절대액이 아니라 GDP 대비 비중을 낮추겠다는 것이다. 케빈 워시 신임 연준 의장도 이 그림 안에서 움직인다. 인플레이션이 3%대 중반을 웃도는데도 시장은 그에게서 금리 인하 신호를...

데스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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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인사이트] 겪어보지 않은 지진위험

지진재해는 지진의 크기와 지진과의 거리에 따라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큰 지진이 가까이에서 발생하면 위험하고, 먼 곳에서 발생하면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지진재해가 언제나 이런 상식과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재해가 발생하기도 한다. 2025년 3월 미얀마에서 발생한 규모 7.7 지진이 대표적인 사례다. 지진으로 1,000 km 가량 떨어진 태국 방콕의 고층 건물들이 크게 흔들렸고, 건설 중이던 30여 층 건물이 붕괴했다. 지진으로부터 이처럼 멀리 떨어진 대도시에서 심각한 피해가 발생한 것이다. 이 지진재해의 핵심에는 장주기 지진동이 있다. 지진파는 땅속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거리가 멀어지면 점차 에너지가 감소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장주기 지진파 성분은 단주기 지진파 성분보다 먼 거리까지 효과적으로 전파될 수 있다. 특히 규모가 큰 지진일수록 장주기 에너지가 풍부하게 발생한다. 여기에 퇴적분지의 증폭 효과까지 더해지면 특정 주기의 지진동이 크게 증폭될 수 있다. 방콕의 두꺼운 연약 퇴적층은 이러한 장주기 지진동을 증폭시켰고, 고유주기가 긴 고층 건물의 진동과 결합하면서 큰 흔들림을 일으켰다. 큰 지진에서 발생하는 장주기 지진파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렇듯 지진의 규모나 거리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또 다른 형태의 지진 위험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다른 사례도 있다. 1985년 멕시코 미초아칸 해역에서 발생한 규모 8급 지진은 350 km 떨어진 멕시코시티에 큰 피해를 입혔다. 연약한 호수 퇴적층에서 특정 주기의 지진파가 증폭되면서 많은 건물들이 무너졌다. 지진파의 주기와 건물의 고유주기가 일치하여 공진이 일어나면서 먼 거리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피해가 발생한 것이다. 결국 원거리 지진의 경우, 어떤 주기의 에너지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가 위험의 핵심 요소이다. 이런 장주기 지진파에 의한 지진재해로부터 우리도 자유롭지 못하다. 일본 동남해안에 위치한 난카이 해곡에서는 과거 100~150년의 간격을 두고 규모 8급 이상의 거대지진이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1944년 도난카이 지진과 1946년 난카이 지진 이후 이미 80년이 흘렀다. 일본 지진조사위원회는 2025년 초 난카이 해곡 규모 8~9급 지진의 30년 이내 발생 확률을 80%로 평가하기도 했다. 난카이 해곡의 남쪽 구간은 한반도 남해안 지역에서 불과 500 km 거리에 위치해 있다. 서울 등 한반도 중부 지역까지도 1,000 km 이내의 거리다. 미얀마 지진보다 훨씬 크고, 더 가까운 거리에서 발생할 지진이 한반도에 미칠 영향은 반드시 평가되어야 할 문제다. 특히 대규모 고층 건물이 밀집한 도시가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단주기 최대지반가속도를 바탕으로 한 위험도 평가뿐 아니라, 장주기 지진파에 의한 지진재해 평가도 필요하다. 최근 우리나라도 이러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음을 보인 사례가 있다. 2024년 8월 난카이 해곡 남단에서 발생한 규모 7.1 지진에 의해 남해안 일대에서 1 cm의 수직 지진동이 관측되었다. 이곳에서 동일본 대지진과 같은 규모 9.0 지진이 발생하면 30 cm가량의 흔들림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의미다. 특히 지난 7월에 구마모토에서 발생한 규모 6.8 지진으로 우리나라 남해안 일대에서 진도 2~3 가량의 지진동이 관측되기도 했다. 이보다 규모가 큰 지진이 발생한다면, 지진동 역시 더 커질 것은 자명하다. 특히 현대적인 초고층 건물과 대규모 도시 기반시설이 들어선 시기는 난카이 해곡에서 마지막으로 규모 8급 거대지진이 발생한 1946년 이후이다. 많은 초고층 건물과 대형 교량, 원전, 산업시설, 데이터센터가 존재하는 오늘날의 한반도에 이러한 지진동은 큰 위협 요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경험해 보지 못한 장주기 지진동을 설계기준에 반영하기 어렵고, 재난대응 시나리오에서 충분히 고려하기 어렵다. 더욱이, 긴 주기의 진동이 오랫동안 지속되면, 건물은 견디더라도 가스관이나 배관, 승강기, 천장, 외장재와 같은 비구조 요소의 파손이 인명 피해로 연결될 수 있다. 특히 우려되는 것은 경험의 부재가 자칫 안전하다는 착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점이다. “지금까지 그런 피해가 없었다"는 말은 앞으로도 그런 피해가 없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님을 구분해야 한다. 겪어보지 못한 지진이 위험한 이유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난카이 해곡 거대지진은 단순히 일본에서 발생할 큰 지진이기보다는 도시화된 우리나라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지진동과 처음 마주하게 되는 사건일 수도 있다. 주도면밀한 사전 평가와 준비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EE칼럼] 최고가격제의 부담 떠안은 정유사도 명분이 필요하다

지난 7월 국내 휘발유 소비량이 886만 배럴로 역대 7월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지난 4월과 비교하면 소비가 28%나 늘어난 것이다. 가격 신호를 인위적으로 눌러놓은 최고가격제가 만들어낸 황당한 일이다. 휘발유 소비만 늘어난 것이 아니다. 국제선 여객도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지난 7월에는 전년보다 8.1% 늘었고, 8월에는 다시 9.6% 증가해서 월간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더욱이 정부는 지난 7월 1일 공공기관 차량 5부제를 전면 해제했고, 자원 안보 위기 경보를 경계에서 주의로 낮췄다. 대통령까지 나섰다. 지난 12일 엑스(X)에 “유가에 관한 한 전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며 “휘발유·경유 등 정제유 가격은 계속 안정된다"고 썼다. 최고가격제 등으로 국내 가격을 확실하게 지키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세계는 허리띠를 졸라매는데 우리는 요란한 잔치판을 즐기는 것이다. 국제 상황은 더욱 꼬여가고 있다. 중동 전쟁의 전선이 오히려 확대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내륙 횡단 송유관도 전쟁에 휩쓸렸고, 홍해의 관문인 바브엘만데브 해협도 불안해지고 있다. UAE의 후자이라 항구까지 마비되면 세계 원유 공급량의 20%에 차질이 생긴다. 호르무즈와 홍해의 '이중 봉쇄' 위기 속에 브렌트유 가격이 다시 가파르게 치솟으면서 배럴당 105달러를 넘어섰고, 전 세계 비축유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정유사의 부담도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중동 전쟁이 시작되고 2주일 만인 지난 3월 13일 전격적으로 시행한 '석유제품 최고가격제'에 의한 사회적 피로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누적되고 있다. 물론 최고가격제가 서민 경제의 안정에 실질적인 도움을 준 것은 분명한 팩트다. 국제 유가가 배럴당 120달러를 넘나드는 데도 국내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1900원 수준에서 안정적으로 버텨 냈다. 최고가격제 덕분이다. 그러나 부작용도 증폭되고 있다. 위기감을 체감하지 못한 소비자들이 주유소로 몰려드는데도, 정부는 대통령의 트윗만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세상에 공짜는 없다. 최고가격제의 부담은 온전하게 정유사의 몫으로 돌아간다. 정부의 강력한 의지 탓에 휘발유·경유·나프타의 수출도 자유롭지 않다. 지금까지 정유사가 떠안은 기회손실 비용이 5조 원을 훌쩍 넘어선 상황이다. 이제 정부가 정유사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할 때다. 최고가격제로 인한 정유사의 손실 보전은 정부의 선택에 맡겨진 일이 절대 아니다. 석유사업법 제23조에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는 의무사항이다. 정부가 절대 외면할 수 없는 강제 사항이라는 뜻이다. 정산위원회를 구성해서 휘발유와 경유의 '원가'와 '정제 마진'을 따져보겠다는 산업부의 꼼수는 부끄러운 궤변이고 억지다. 휘발유와 경유는 원유를 정제하는 과정에서 함께 생산되는 연산품(連産品)이다. 등심과 갈비가 소 한 마리에서 함께 나오듯, 휘발유 따로 경유 따로 '원가'를 계산한다는 발상 자체가 회계학의 가장 기본적인 상식을 무시한 것이다. 더욱이 원가 논란은 15년 전 회계사 경력을 자랑하던 최중경 당시 지식경제부 장관이 말끔하게 정리해 놓은 사안이다. 그런 원가 논란을 반복하는 산업부의 모습은 절망적이다. 싱가포르 국제 석유시장에서 경유는 휘발유보다 33%나 비싸게 거래된다. 최고가격제 시행 이후 국내에서는 더 비싼 경유가 오히려 더 싸게 팔리는 역전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원가 개념도 모르는 산업부가 가격 체계까지 뒤틀어놓았기 때문이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정유사에 대한 정산은 공정하고 정의로워야 한다. 정유사의 손실 보전은 싱가포르 석유제품 가격(MOPS)을 기준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다른 꼼수는 없다. 오히려 물가 안정을 위해 막대한 재정적 불확실성을 떠안아준 정유사에 정부가 감사해야 한다. 물론 손실 보전에 따른 정부의 재정 부담은 걱정이다. 어쨌든 최고가격제를 지속가능한 정책이 아니다. 최고가격을 싱가포르 가격에 단계적으로 근접시키면서 연착륙을 시도해야 한다. 정유사가 위기 극복에 기여할 수 있는 구체적인 통로도 열어줘야 한다. 원유와 석유제품을 비축하고, 나프타 공급을 흔들림 없이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사회 공헌이다. 정유사를 무작정 몰아세우는 정부의 낡은 습관을 버려야 그 명분도 살아난다. 정유산업은 국가 경제와 서민 경제를 안정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동반자다. 정유사는 규제와 압박의 대상이 아니라 에너지 안보와 산업 안보의 파트너로 정부와 우리 사회가 끌어안아야 하는 상대다. bienns@ekn.kr

[기자의 눈] ‘스타플레이어’ 한동훈, 국민의힘은 어떻게 할 것인가

요즘 정치권에서 유독 홀로 눈길을 사로잡는 정치인이 있다. 무소속 한동훈 의원이다. 거대 정당이라는 울타리도, 자신을 지켜줄 제도적 방패도 없지만 인사 청문 정국에서 여권과 정면으로 맞붙으며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문득 리오넬 메시가 떠오른다. 2026 북중미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를 결승 무대까지 이끈 메시처럼, 팀 전체보다 한 명의 선수가 유독 크게 보이는 순간이 있다. 지금의 한동훈 의원이 그렇다. 한 의원에게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도 겹쳐 보인다. 노 전 대통령 역시 초선 시절 5공 청문회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거침없는 질문과 추궁을 이어가며 대중적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거대 정치세력의 중심에 있어서가 아니라 '싸우는 정치인'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만들어냈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한 의원의 최근 행보에 대해 “국민들이 궁금해하는 김승원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의혹을 직접 파고들어 알 권리를 충족시키고 있다"며 “정치인이 인사 검증의 길을 열어주는 것은 박수를 받을 일"이라고 평가했다. 물론 그의 공세가 곧바로 의혹의 사실관계를 확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검사 출신이라는 강점을 앞세워 여권을 정면 겨냥하고, '대여 저격수'라는 정치적 입지를 다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문제는 국민의힘이다. 한 의원의 공세가 반갑기는 하면서도, 그의 존재감이 커질수록 복당과 당내 주도권을 둘러싼 셈법은 복잡해진다. 이를 두고 한 정치권 관계자는 “여당과 맞서 싸우려면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밥그릇 싸움이 웬 말이냐"고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과 탄핵 이후 보수는 여전히 재건의 길 위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무소속으로도 여권을 상대로 선명한 메시지를 내는 '스타플레이어'가 나타났다면, 보수 진영이 고민해야 할 것은 견제가 아니라 활용법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한 의원을 둘러싼 당내 세력 계산이 아니다. 국민의힘이 그를 배척할 경쟁자로 볼 것인가, 보수의 귀중한 자산으로 안을 것인가다. 메시가 그라운드에서, 노무현이 청문회장에서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듯 한 의원 역시 스스로 만든 무대에서 존재감을 입증하고 있다. 이제 그를 팀 밖에 세워둘지, 다시 그라운드 안으로 불러들여 핵심 공격수로 쓸지는 온전히 국민의힘의 선택에 달렸다. 김윤호 기자 kyh81@ekn.kr

[이슈&인사이트] 대미 투자, 전략적으로 하자

미・중 갈등 속에 중국의 대미 수출과 무역흑자는 줄어들지만, 중국은 동남아와 EU 시장에 대한 수출을 대폭 확대하면서 대체시장을 찾았다. 중국은 관세가 낮은 국가를 경유하여 미국에 수출하는 우회 수출로 미국에 대한 수출을 어느 정도 유지하였다. 미국은 중국산 제품에 관세를 부과하면서 인플레이션에 직면하게 되자, 결국 소비자물가에 민감한 품목의 관세를 다시 낮추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미국 정부는 여전히 중국산 태양광 제품, 전기차 및 배터리, 반도체, 철강 및 알루미늄 등 핵심 전략 품목에 대해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였다. 미국 정부의 관세 부과조치는 단순히 중국산 제품의 수입을 줄이기 위한 목적을 넘어 미국에서 이 제품들을 생산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중국의 제조업이 단순 노동집약적 제조업을 넘어 첨단 제조업으로 발전하면서 고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반면, 미국은 제조업이 급속도로 약화하면서 무기 제조나 군함 건조・수리 등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국가 안보까지 타격을 주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인플레이션을 감수하더라도 미국 제조업 특히 첨단 제조업을 육성하는 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마침 피지컬 AI가 발전하면서 로봇 제조가 활성화할 경우 미국에서도 저렴하게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될 전망이다. 미・중 갈등과 미국 정부의 제조업 부흥 정책이라는 큰 흐름 속에서 우리나라는 더 이상 미중 갈등 때문에 발생하는 피해 상황에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야 할 것이다. 한・미 관세 합의와 투자협정에 따라 우리나라가 향후 10년간 3,500억 달러를 미국에 투자하기로 하였다. 또한 미국은 관세를 무기로 반도체와 같이 전략적으로 자국에 필요한 업종이나 품목의 투자를 하도록 압박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전략적으로 대미 투자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냉정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우선 우리나라 기업이 개별적으로 투자하는 것과 한・미 투자협정에 따라 투자하는 것을 긴밀하게 연결해야 한다. 삼성전자는 텍사스주 테일러에 400억 달러 이상 투입하여 첨단 파운드리 팹 2곳과 첨단 패키징 R&D 및 제조라인을 구축하고 있으며,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주 웨스라피엣에 40억 달러 이상 투입해 차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AI 메모리용 첨단 패키징 생산기지 및 R&D 시설을 착공하였다. 그럼에도 베선트 미 상무부 장관은 미국에서 반도체를 생산하지 않으면 반도체에 고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압박하고 있다. 한화오션과 한화시스템은 펜실베니아주 필라델피아에 1억 달러를 들여 미 필리 조선소 지분을 100% 인수했고, HD현대중공업도 미 해군 함정 MRO 사업 자격(MSRA)을 획득하고 미 현지 방산 업체 및 조선 파트너들과 협력을 타진하며 미국 시장 공급망 편입을 추진 중이다. 그 외에도 HD현대일렉트릭의 앨라바마주 변압기 투자, 효성중공업의 테네시주 멤피스 변압기 투자 등 전력 관련 투자가 진행 중이다. 그럼에도 확정적이라고 거론되는 우리나라의 대미 투자 1호는 기존 투자나 투자 예정인 건과 별개로 논의되고 있다. 정부와 국내 기업 간에 충분한 소통을 통해 한・미 투자협정과 연계하여 전략적으로 투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기업은 정부와 소통 없이 투자할 경우 향후 기업의 투자 여력이 약화하여 더 이상 한・미 투자협정 관련 투자를 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적으로도 기업은 기업대로 정부는 정부대로 투자하면 과잉투자가 이루어져 국내에 투자할 여력을 잃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bienns@ekn.kr

[EE칼럼] 정치와 규제가 합작한 한전의 부실

한전이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에 25조 원어치의 전기요금을 선납해 달라고 제안했다. 삼성전자 20조 원, SK 하이닉스 5조 원에 달하는 전기요금은 작년 기준으로 5년 치에 해당한다. 지난 7월 재정부 국고실장과 국채정책과장이 한전과 삼성전자 그리고 SK 하이닉스의 고위관계자를 만나 논의하였고 청와대에도 관련 보고가 이뤄졌다고 한다.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미납 전기요금을 나중에 내는 경우는 있어도 미래의 전기요금을 선납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전력을 얼마나 썼는지 계량을 한 다음 그 값을 치르는 것인데 얼마나 쓸지도 모르면서 미리 돈부터 내라는 것이다. 양사도 반도체 슈퍼 사이클이 5년 후까지 지속될 지 모르는 상황에서 당연한 결론이다. 어쩌다 한국의 대표 공기업 한전이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한전은 상반기 기준 210조 7,160억 원의 부채를 갖고 있다. 하루 이자 비용이 115억 원, 1년이면 4조 2천억 원에 달한다. 작년 기준으로 한전의 총괄원가는 120조 원 정도 되는데 이 중에서 구입전력비용이 82조 원에 가깝다. 전력망을 건설하는 데에 73조 원 정도 써야 한다. 당연히 쓸 돈이 모자란다. 그래서 사채를 발행하지만 이 또한 자본금과 적립금 합계의 2배 이내로 제한되어 있다. 그런데 2022년에 이를 5배까지 늘려주는 정부의 특례를 한전법을 개정해서 통과시켰다. 이 특례도 2027년말 종료된다. 이제 돈 꾸기도 어려워졌다. 공기업 중 가장 뛰어난 인재와 경쟁력을 가진 한전이 왜 이렇게 적자와 부채의 수렁에 빠졌을까? 한마디로 그 원인은 정부의 지나친 요금규제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전기요금은 '물가안정에 관한 법률' 제4조(공공요금 및 수수료의 결정)에 따른 공공요금으로 규정되어 재정경제부의 협의와 전문가의 자문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사실상 전기요금은 대통령이 결정한다고 보아야 한다. 한국은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와 같은 전국 선거를 때론 매년 또는 격년, 적어도 3년에 한 번씩은 치른다. 선거를 앞둔 정치권에서는 웬만해서는 전기요금을 인상하려고 하지 않는다. 역대 한전 사장들이 두부값이 콩값보다 싸다는 식으로 전기요금이 원가에 터무니없이 못 미친다고 하소연하였으나 정치권은 여지없이 전기요금을 동결하거나 도저히 채산성을 마치기 어려울 정도로 미미하게 인상하곤 하였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급등한 국제 에너지 가격을 무시하고 한전의 전기요금을 동결하였던 정치권의 무책임은 회복하기 어려운 한전의 부실을 초래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표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정치권은 그렇다고 치자. 공기업 운영과 경제정책을 맡은 재정경제부 엘리트 관료들이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가격 규제를 정당화하고 대표적 공기업을 부실에 빠뜨리는 것을 보면 공무원들의 전문성과 책임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유야 어떻든 한전의 이와 같은 부실은 경제정책을 담당하는 엘리트 관료들이 국민경제보다는 부처 이기주의와 관료 권한을 더 중요시한다는 반증이다. 9월 초 관계부처 합동으로 발표한 「공공기관 기능개혁 추진방안: 공공기관 DIET 2026」에 따르면 정부는 석탄공사를 청산하기로 하였다. 석탄 수요의 감소와 함께 2025년 말 기준 부채가 2조5천9백억 원이고 연간 750억 원 이상의 이자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석탄산업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석탄공사는 청산하면서 이보다 부채는 81배 이상, 연간 이자 비용은 56배가 넘는 한전에 대해서는 왜 한마디 언급도 없는지 이해할 수 없다. 발전소로부터 전기 살 돈과 전력망 깔 돈 그리고 빚과 이자를 갚을 돈이 없어서 반도체 경기 호황으로 돈 벌고 있는 국내 1·2위 재벌에게 5년 치 전기요금을 미리 달라고 구걸하는 한전의 모습은 너무 안타깝다. 한전의 부실 재정은 정치와 공무원들의 규제가 합작한 전형적인 인기영합주의의 비극이다. 조성봉

[특별기고] 대미 원전투자, 두 가지 원칙이 필요하다

정부의 3500억 달러 규모 대미 전략투자 사업에서 미국 원전 건설이 핵심 과제로 급부상했다. 구상 단계를 넘어 구체적인 협상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미국은 인공지능 데이터센터와 첨단 제조업의 급속한 성장에 대응하고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대규모 원전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수십 년간 신규 원전 건설이 정체되면서 이를 뒷받침할 공급망과 전문인력, 건설 역량이 충분하지 않다. 한국은 원전을 계획된 기간과 예산 안에서 건설할 수 있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산업 기반을 갖추고 있다. 설계, 주기기 제작, 시공, 시운전과 운영에 이르는 전 주기 공급망을 갖추고 있으며 국내외에서 풍부한 건설·운영 경험도 축적했다. 미국에는 원전산업을 신속히 재건할 역량이 필요하고, 한국에는 새로운 시장이 필요하다. 대미 원전투자는 양국의 필요와 강점을 결합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다. 그러나 투자의 규모보다 중요한 것은 그 조건과 구조다. 한국이 대규모 자금을 투자하면서도 우리 원전산업의 참여와 미래 시장 진출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성공적인 전략투자라고 하기 어렵다. 대미 원전투자는 다음 두 가지 원칙을 바탕으로 추진돼야 한다. 첫째, 미국 원전사업에 한국 원전산업의 실질적인 참여가 보장돼야 한다. 한국의 자금이 미국 원전사업에 투입된다면 사업 여건과 기업별 경쟁력에 따라 설계, 기자재 제작, 시공, 사업관리 등의 분야에서 투자 규모와 산업적 기여에 걸맞은 역할과 사업 기회를 확보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한국 기업의 참여를 확보하는 차원을 넘어, 검증된 공급망과 건설 역량을 활용해 미국 원전사업의 일정 지연과 비용 상승 위험을 낮추는 길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사업 발굴과 선정 단계부터 양국 기업이 함께 참여하고, 한국 기업의 참여 범위와 합리적인 수익 구조, 그에 따르는 책임과 권한을 정부 간 협의와 사업 계약을 통해 명확히 해야 한다. 미국의 원전산업 기반을 확충하는 동시에 한국의 공급망과 전문인력도 함께 성장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협력이 지속될 수 있다. 둘째, 대미 원전투자의 일부는 한국이 개발한 APR1400의 미국 내 건설로 이어져야 한다. APR1400은 국내외에서 건설·운영 경험을 축적했으며, 이미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의 설계인증을 취득해 미국 시장 진출을 위한 제도적 기반도 갖추고 있다. APR1400의 미국 건설은 한국의 투자에 대한 단순한 반대급부가 아니라, 미국이 검증된 노형과 공급망이라는 새로운 선택지를 확보해 원전 건설의 속도와 실행력을 높이는 방안이다. 이는 미국 노형과 APR1400 가운데 하나만을 선택하자는 뜻이 아니다. 사업 여건에 따라 미국 노형 사업에서 양국 기업이 협력하는 한편, APR1400을 적용한 사업도 병행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자는 것이다. 두 노형이 각자의 경쟁력을 발휘하며 함께 추진된다면, 미국은 원전사업의 선택지를 넓히고 한국은 새로운 시장을 확보할 수 있다. 양국 원전산업이 함께 성장하는 상호 호혜적 협력은 이러한 구조에서 가능하다. 대미 원전투자는 미국의 원전산업 재건과 한국 원전산업의 새로운 도약을 함께 이루는 산업전략이 돼야 한다. 한국 원전산업의 실질적인 참여와 APR1400의 미국 내 건설이 함께 실현된다면, 미국은 원전 확대에 필요한 공급망과 건설 역량을 확보하고 한국은 새로운 시장을 열 수 있다. 나아가 양국이 이러한 협력을 바탕으로 세계 원전시장에 공동 진출한다면, 대미 원전투자는 한미 산업협력의 대표적인 성공 모델이 될 것이다. chyybh@ekn.kr

[기자의 눈] 지지율에 흔들려선 안 될 에너지·환경 정책

최근 이재명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이 하락하면서 정부의 에너지·환경 정책도 조급해지는 모양새다. 하지만 에너지·환경 정책은 단기간에 성과를 낼 분야가 아니다. 한번 정한 방향이 향후 10년, 20년의 국가 기반을 좌우한다. 특히 정부가 미국과의 대미 투자 협상을 서두르는 듯 싶다. 원전 수출과 맞물려 웨스팅하우스 지분 투자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다. 원전 업계에서는 신중론이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투자를 끌어내야 할 이유가 있는 만큼 우리가 급한 모습을 보일수록 협상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원전 산업의 미래와 수십조원의 투자가 걸린 문제라면 더욱 냉정한 손익 계산이 필요하다. 투자 주체로 거론되는 한국전력의 재무 사정이 녹록지 않다. 반도체 산업단지와 데이터센터 등 메가프로젝트가 잇따라 등장하면서 전력수요 전망은 크게 흔들리고 있다.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은 지난해 12월 수립 논의를 시작했다. 지난 4월 처음 공개된 수요 전망에서는 2040년 최대전력을 최대 138.2기가와트(GW)로 내다봤다. 그 후 메가프로젝트가 발표되면서 지난달 2040년 최대전력 수요를 165GW로 수정했다. 한 국가의 전력수요 전망치를 4개월 만에 바꿀 만큼 메가프로젝트가 갑작스럽게 나타났다는 증거다. 여기에 2050년 탄소중립을 위해 화석연료 발전을 줄이는 동시에 메가프로젝트를 감당하기 위해 재생에너지를 대폭 확대해야 한다. 최근 12차 전기본 논의에서는 2040년 재생에너지 설비를 자가용 태양광까지 포함해 총 236GW로 확대하는 전망까지 제시됐다. 지금 재생에너지 용량 37GW보다 6배 넘게 많아 상당히 도전적인 목표다. 물은 얼마나 필요한지도 잘 모른다. 정부는 윤석열 정부가 추진했던 신규댐 가운데 5곳을 예정대로 추진하기로 했다. 그런데 정작 앞으로 데이터센터가 얼마나 많은 물을 필요로 할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영산강 수계가 대규모 반도체 산업단지에 물을 공급할 만큼 수질에는 문제가 없는지도 논란거리다. 전기는 계획이라도 나왔는데 물은 이제 제대로 계산해봐야 한다. 이 외에도 대통령 공약인 '햇빛소득마을', 공기업 통폐합 등 쏟아지는 정책들이 너무 많다. 기자 입장에서야 정책이 쏟아지면 쓸 기사가 많아져서 좋지만 요즘은 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정책들이 하나의 전략 안에서 맞물려 움직이는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 윤석열 정부는 지지율 하락 국면에서 동해 심해 석유·가스 탐사·개발 사업인 '대왕고래 프로젝트'로 반전을 노렸다. 결과적으로 그 조급함은 국내외 자원개발 정책에 적지 않은 상처를 남겼다. 지지율이 떨어질수록 정부는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고 싶어진다. 그러나 국가의 미래를 결정할 정책일수록 때로는 속도를 늦출 용기가 필요하다. 에너지·환경 정책의 시계는 5년인 정권의 시간보다 훨씬 길다. 정책의 속도가 대통령의 지지율 그래프에 너무 좌지우지되어서는 안 된다. 이원희 기자 wonhee4544@ekn.kr

[이슈&인사이트] 성장으로 빚을 갚는다는 약속, 그 청구서는 누가 받는가

스콧 베센트 미 재무장관의 화법은 일관된다. “40조 달러라는 숫자에 마법 같은 것은 없다. 우리는 성장을 통해 빚에서 벗어날 수 있다." G20에서도 CNBC 인터뷰에서도 반복된 이 말은 사실상 미국 재정 전략의 선언문이다. 증세도, 지출 삭감을 통한 긴축도 아니다. 관세 수입과 국채 바이백으로 당장의 불을 끄면서, AI가 만들어낼 생산성으로 부채의 절대액이 아니라 GDP 대비 비중을 낮추겠다는 것이다. 케빈 워시 신임 연준 의장도 이 그림 안에서 움직인다. 인플레이션이 3%대 중반을 웃도는데도 시장은 그에게서 금리 인하 신호를 기대하고, 재무부는 장기금리를 억누르기 위해 채권 시장에 이례적으로 개입한다. 월가에서 “스스로 한계를 설정한 자멸적 전략"이라는 비판까지 나오는 배경이다. 문제는 이 성장 서사가 현실화되기까지의 시차다. AI 투자가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져 세수를 늘리기까지는 최소 몇 년이 걸리지만, 청구서는 지금 날아오고 있다. 브렌트유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선 것은 중동發 지정학적 긴장 때문이고, 미 국채 금리가 들썩이는 것은 AI 데이터센터에 투입되는 천문학적 자금 수요와 재정 적자에 대한 시장의 의구심이 겹친 결과다. 경제의 온기가 서민 가계에 닿기까지는 시간이 걸리지만, 기름값과 대출금리, 카드 리볼빙 이자는 지금 청구서로 날아든다. 성장의 과실은 AI 관련주와 부동산을 가진 자산가에게 먼저 쌓이고, 고금리·고물가의 부담은 임금노동자와 무주택 서민에게 먼저 전가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그렇다고 이를 “부자를 위한 정책"으로 단정하는 것도 성급하다. 폴 크루그먼도 최근 장기금리 급등 원인을 행정부 실책보다 AI 붐에 따른 자금 수요 급증에서 찾았다. 지금의 고금리는 워싱턴이 서민을 버리기로 “선택"한 결과라기보다, 세계적으로 동시에 벌어지는 기술 투자 붐과 지정학적 리스크가 만든 구조적 국면에 가깝다는 것이다. 다만 그 국면 속에서 증세 대신 성장을 택한 것은 고통 분담 방식을 선택한 것이기도 하다. 증세는 자산가에게 더 크게 작용하는 반면, 고금리·고물가는 서민에게 더 크게 작용한다. 성장론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행 과정의 고통 배분이 역진적이라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15일 상원 표결을 국가부채 해법으로 곧장 연결 짓는 것도 성급하다. 이날 상원이 다루는 클래리티법(CLARITY Act)은 부채 감축 법안이 아니라 가상자산의 법적 성격과 SEC·CFTC 감독 권한을 정리하는 시장구조 법안이다. 다만 통과되면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커지면서 발행사들이 준비자산으로 단기 국채를 대거 사들여, 결과적으로 국채 수요를 늘려 금리에 하방 압력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지금까지 나온 분석이다. 부채를 “해결"한다기보다 국채를 소화할 매수 주체를 늘리는 간접 경로에 가깝다. 그마저도 15일은 법안 가결이 아니라 본회의 토론 개시 여부를 정하는 절차적 표결(클로처)이며, 60표를 채우려면 민주당 의원 최소 7명이 필요하고 트럼프 일가의 이해충돌 방지 조항을 둘러싼 협상이 막판까지 꼬여 있어 통과 자체가 불투명하다. 결국 미국이 걷는 길은 확실하지만 값비싼 증세 대신, 불확실하지만 부담 적은 성장 처방이다. 그 선택이 틀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효과를 내기까지의 시차 동안 발생하는 고통을 자산을 가진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이 똑같이 나눠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짚어야 한다. 서민들이 이 시기를 버텨낼 수 있느냐는, AI가 약속대로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속도와 정부가 그 충격을 얼마나 흡수해주느냐는 두 변수의 경주에 달려 있다. 우리나라도 AI 성장을 선택하면서 추가 금리 인상이 예고된다. 성장의 청구서는 일단 서민에게 먼저 날라 올 거다. bienns@ekn.kr

[EE칼럼] 부족한 것은 kW가 아니라 km다

지난 20여년간 선진국의 전력수요 곡선은 지루할 만큼 평평했다. 에너지효율 향상과 경제구조 변화가 성장분을 상쇄했다. 지금은 AI 데이터센터와 전기화를 통한 탄소중립이 가속화되면서 전력수요가 크게 늘고 있다. 그러나 발전소를 지어도 전기를 보낼 길이 없다. AI 데이터센터와 재생에너지가 동시에 늘어난 지금, 전력 시스템의 병목은 발전이 아니라 전력망으로 옮겨갔다. 이것은 한 나라의 사정이 아니라 한국과 미국, 유럽에서 거의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로렌스버클리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미국 전력망 접속 대기열에는 8,244개 사업, 2,061GW가 걸려 있다. 이는 미국 전체 전력설비 용량의 두 배에 가깝다. 접속신청부터 준공까지 소요기간은 2008년 22개월에서 지난해 61개월로 늘었다. 그사이 345kV 이상 송전선 신설은 2013년 약 6,400km에서 2025년 약 646km로 쪼그라들었다. 필요량은 연 8,000km로 추산된다. 송전 관련 투자비가 사상 최고수준인 연 250억 달러를 넘겼지만, 90% 이상이 신뢰도 개선과 노후설비 교체 사업에 들어갔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장거리 송전망을 못 짓는 것이다. 유럽도 비슷한 상황이다. 영국은 2025년 풍력 출력제어와 대체발전에 약 14억 파운드를 썼다. 올해는 8월 초에 이미 10억 파운드를 넘겼다. 출력제어의 98%가 스코틀랜드에서 발생했다. 북부 스코틀랜드에서만 8.8TWh가 생산되지 못했고, 생산될 수 있었던 풍력 발전량 중 61%만이 실제로 전력망에 공급되었다. 2025년 독일은 예비발전소와 출력제어 보상을 포함한 계통혼잡관리 비용으로 30.7억 유로를 지출했다. 독일 남북을 잇는 700km, 4GW급 직류선로 쥐드링크는 당초 2022년 준공 예정이었다. 현재 목표는 2028년 말이다. 2015년 정치적 타협으로 지중화가 결정되면서 계획을 다시 짜야 했고 수십억 유로가 추가됐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지난해 12월 내놓은 '유럽 전력망 패키지(European Grids Package)'는 물량과 속도를 내걸었다. 2040년까지 필요한 전력망 투자규모를 1조 2,000억 유로로 잡고, 인허가 간소화와 국가간 전력망 연결사업 우선지원, 금융 및 투자 지원 등의 방안을 담았다. 한국도 이미 그 벽에 부딪혔다. 동해안 지역 발전설비는 17.8GW인데 수도권으로 보낼 송전용량은 14.5GW에 그친다. 이를 풀 열쇠인 동해안~수도권 500kV 초고압직류송전망(HVDC) 건설사업은 당초 목표보다 수년째 밀리고 있다. 송전선로가 지나는 지역의 주민 반발과 지방자치단체 인허가 갈등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재생에너지 쪽도 사정은 비슷하다. 한전은 2024년 광주·전남 103개, 전북 61개, 동해안 25개, 제주 16개 등 205개 변전소를 '계통관리변전소'로 지정해 신규 접속을 제한했다.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이 지난해 9월 시행되면서 국무총리 소속 위원회가 생기고, 인허가 의제가 18개에서 35개로 늘었다. 허수 물량 7GW 중 2GW를 회수해 재배분했다. 제주는 올해 계통관리변전소에서 해제되기도 했다. 배터리 에너지저장장치(BESS)를 지난해 0.1GW에서 2030년 12GW 이상으로 늘린다는 목표도 세웠다. 서남해 재생에너지를 실어 나를 서해안 HVDC 1단계 사업은 2030년 준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태양광은 1~2년, LNG 복합발전소는 3~4년이면 상업운전에 들어간다. 송전선 하나를 놓는 데는 10년이 넘게 걸린다. 전력망 건설이 지연되는 가장 큰 이유는 기술이 아니라 주민 수용성이다. 송전 설비는 사회가 합의해야 지어진다. 수용성을 높이기 위해서 햇빛소득마을처럼 계통소득마을 사업을 추진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송전망이 마을의 지속가능한 수익원이 되는 구조적 전환이 필요하다. 일회성 지원사업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수익을 주민 복지와 공동체 사업에 활용하는 것이다. 지금은 전기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전기를 보내는 길이 부족하다. 전기 생산은 바닷가와 비수도권에서 이루어지고, 수요는 수도권과 첨단산업 클러스터에 몰려 있다. 전력망 병목은 산업과 탄소중립을 동시에 제약하는 구조적 리스크가 되고 있다. 이를 해결하지 못하면 반도체도 AI도 재생에너지도 같은 지점에서 멈춰 설 것이다. 막힌 길을 뚫어낼 열쇠는 혁신적인 기술이 아니라, 지역사회와 이익을 공유하는 사회적 혁신에 있다. bienns@ekn.co.kr

[기자의 눈] ATM 줄이는 은행, 금융 접근성은 누가 지키나

현금 사용이 줄고 모바일뱅킹이 일상화되면서 은행의 현금자동입출금기(ATM)가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있다. 그러나 ATM이 줄어들수록 고령층과 디지털 금융 취약계층을 중심으로 금융서비스 접근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면서 금융 접근성을 어디까지 보장할 것인지에 대한 금융권의 책임도 커지고 있다. 은행 입장에서는 이용률이 낮은 ATM을 유지하는 비용을 줄이고 디지털 금융에 집중하는 것이 효율적일 수 있다. 현금 사용 감소와 비대면 금융 확산이라는 변화 속에서 오프라인 채널을 효율화하는 것은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모든 금융 소비자가 디지털 금융에 익숙한 것은 아니다. 실제 ATM 감소세는 뚜렷하다. 최근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서일준 국민의힘 의원이 금융감독원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22년 말 2만9321개였던 전국 은행 ATM은 올해 6월 말 2만4711개로 3년 반 만에 4610개, 15.7% 줄었다. 은행 영업점 역시 같은 기간 5657개에서 5381개로 276개 감소했다. 특히 지역별 감소폭을 보면 금융 접근성 문제를 단순히 은행의 점포 효율화로만 보기 어렵다. 울산의 ATM은 21.5%, 경남은 20.8%, 제주도는 18.2% 줄었다. 수도권보다 지방에서 ATM이 더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인구와 거래량이 적은 지역일수록 은행이 오프라인 채널을 유지할 유인이 작기 때문이다. 문제는 ATM이 단순히 현금을 인출하는 기계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스마트폰으로 대부분의 금융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소비자에게는 ATM 한 곳이 사라지는 것이 큰 불편이 아닐 수 있다. 반면 디지털 금융에 익숙하지 않은 고령층이나 현금 사용이 필요한 소상공인에게 ATM은 여전히 중요한 금융 인프라다. 특히 지방에서는 ATM 하나가 사라질 때 이를 대신할 시설을 찾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은행에 모든 ATM과 영업점을 과거처럼 유지하라고 요구하기도 어렵다. 이용률이 낮은 시설까지 일률적으로 유지하면 은행의 비용 부담이 커지고 결국 금융서비스 비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 결국 핵심은 은행의 효율화를 막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금융 접근성의 공백을 어떻게 메울 것인지다. 금융위원회도 금융 접근성이 낮은 지역을 중심으로 우체국을 통한 은행대리업을 시범 운영하고 은행권 공동 ATM 확대를 추진하는 등 대체 금융채널 마련에 나서고 있다. 다만 은행이 줄인 금융 인프라를 공공 영역이 어디까지 대신할 것인지, 공동 ATM을 어느 지역에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는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다. 앞으로는 ATM의 절대적인 숫자보다 지역별 금융 접근성을 기준으로 시설을 관리할 필요가 있다. 고령층 비중과 인구 규모, 주변 대체 금융채널의 유무 등을 고려해 금융 취약지역을 정하고 최소한의 금융서비스 접근성을 보장하는 방식이다. 은행별로 따로 ATM을 유지하기보다 금융권이 공동으로 비용을 부담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 디지털 금융으로의 전환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다. 그렇다고 그 변화의 비용을 금융 취약계층에 일방적으로 떠넘겨서는 안 된다. 은행의 효율성과 금융의 공공성이 충돌하지 않도록 사라지는 ATM의 빈자리를 누가 어떻게 메울지에 대한 사회적 기준을 마련해야 할 때다. 박지성 기자 captain@ek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