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ESG 평가가 발표될 때마다 관심은 등급에 쏠린다. 누가 A를 받았는지, 누가 한 단계 떨어졌는지가 뉴스가 된다. 평가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투자자가 기업을 비교하려면 공통의 척도가 있어야 한다. 다만 한 해의 높은 점수가 그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얼마나 설명할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다. 유럽의 최근 움직임은 이 질문을 던지게 한다. EU 집행위원회는 지난 7월 개정 유럽지속가능성보고기준(ESRS)을 채택해 유럽의회와 이사회 심사 절차에 넘겼다. 개정안은 의무 데이터포인트를 60% 이상, 전체 데이터포인트를 70% 이상 줄였고, 기업별 보고비용도 30% 이상 낮출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고 기후변화와 생물다양성, 인권 같은 지속가능성의 핵심 의제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이 변화는 'ESG의 후퇴'라고만 보기 어렵다. 오히려 질문이 달라지고 있다. 얼마나 많은 자료를 내놓았느냐보다 투자자와 이해관계자에게 정말 필요한 정보를 얼마나 정확하고 일관되게 보여주느냐가 중요해진 것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사람에게 믿음이 없으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人而無信 不知其可也)"고 했다. 기업도 크게 다르지 않다. ESG에서 신뢰란 거창한 윤리적 구호만을 뜻하지 않는다. 지난해 공개한 탄소배출량과 올해의 숫자를 같은 기준으로 비교할 수 있는가, 협력업체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숨기지 않고 고칠 수 있는가, 이사회가 그 정보를 실제 투자 결정에 사용하는가 하는 문제다. 사회적 자본 이론이 신뢰를 중요한 경제자원으로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신뢰가 높으면 매번 상대방을 의심하고 확인하는 비용이 줄어든다. 기업과 투자자, 원청기업과 협력업체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신뢰는 선언 한 번으로 생기지 않는다. 같은 행동이 여러 해 반복될 때 비로소 자산이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눈여겨볼 만한 연구가 있다. 카르티카(Kartika), 쿠수마(Kusuma), 누스티니(Nustini)가 2026년 'Economic Studies'에 발표한 연구는 2008~2022년 동남아시아 6개국 251개 상장기업의 1263개 기업-연도 자료를 분석했다. 연구진은 한 해의 ESG 점수와 별도로 최근 4년 가운데 적어도 3년 동안 해당 국가와 산업의 평균보다 높은 ESG 성과를 유지했는지를 'ESG 지속성(ESG permanency)'으로 측정했다. 결과는 의미가 있다. 당해 연도의 ESG 점수도 기업가치와 양의 관계를 보였지만, 여러 해 지속된 ESG 활동 역시 기업가치와 유의한 정(+)의 관계를 나타냈다. ESG를 일회성 행사나 한 해의 성적표가 아니라 축적되는 경영능력으로 볼 근거가 생긴 셈이다. 기업의 축적된 역량을 보여주는 또 다른 연구도 있다. 누라흐만(Nurahman)과 헤르수곤도(Hersugondo)가 2026년 'Economic Studies'에 발표한 연구에서는 인도네시아 비금융기업 44개사를 분석한 결과, 기업연령이 ESG와 재무성과의 관계를 조절하는 효과가 일부 지표에서 확인됐다. 특히 ESG와 기업연령의 상호작용은 자기자본이익률(ROE)에서 통계적으로 유의했다. 이것을 “오래된 기업일수록 ESG를 잘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기업연령이 높아지면 조직의 관성이 커질 수도 있다. 다만 오랜기간 축적된 내부통제와 정보체계, 이해관계자 관계가 ESG를 실제 경영성과로 전환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할 가능성은 생각해 볼 만하다. 한국 기업에는 이 문제가 곧 현실이 된다. 금융위원회가 지난 7월 발표한 최종안에 따르면 지속가능성 의무공시는 2028년(FY2027) 연결자산총액 10조원 이상인 코스피 상장사부터 시작된다. 산업통상부는 올해 중소·중견기업 500개사에 ESG 공급망 실사 컨설팅을 지원하고 2028년까지 간편 공급망 실사 플랫폼을 구축한다. 기후에너지환경부도 온실가스 배출량 산정과 전과정평가(LCA) 등을 다루는 전문인력 교육을 확대하고 있다. 문제는 이 일을 수동적인 '규제 대응'으로만 받아들일 때 생긴다. 에너지 사용량을 측정하고 스코프3(Scope 3)를 계산해도 그것이 설비투자와 구매·조달 방식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숫자는 늘어도 경영은 달라지지 않는다. 재생전력 조달과 에너지 효율 투자, 협력업체 관리가 일상의 경영 판단에 들어와야 공시도 의미를 갖는다. 앞으로 기업 간 차이는 보고서를 얼마나 두껍게 만드느냐보다 같은 기준으로 데이터를 축적하고, 그 정보를 실제 의사결정에 얼마나 오래 사용해 왔느냐에서 벌어질 것이다. 등급은 기업의 현재 위치를 보여주는 사진이다. 하지만 경영은 사진 한 장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만들어지는 기록이다. ESG 역시 그렇다. 결국 오래 남는 것은 점수가 아니다. 반복된 실행이 만든 신뢰다. *이창언 우석대학교 미래융합대학 창업컨설팅학과 교수 / 우석대 일반대학원 ESG·공공정책학과 주임 교수 / 우석대 ESG 국가정책연구소 소장 송민규 기자 songmg@ek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