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철도 산업이 중대한 변곡점을 맞이했다. '최저가 낙찰제'로 인한 출혈 경쟁과 수입산 저가 부품의 공세라는 내수 시장의 구조적 위기를 극복하고, 고부가가치 기술 중심의 글로벌 수출 산업으로 도약해야 하는 기로에 섰다. 이에 완성차 체계 결합 기업인 현대로템이 대규모 상생협력 프로젝트를 전격 가동했다. ◇“함께 숲을 이룬다"…1500억 유동성 수혈·860억 R&D 지원 12일 현대로템은 전날 경남 창원특례시 창원 공장에서 '2026 현대로템 레일 솔루션 상생 협력 컨퍼런스'를 열고 중소 부품 협력사들을 '운명 공동체'로 규정하며 역대급 자금 지원과 기술 이전을 포괄한다고 밝혔다. 이날 행사에는 허성무 더불어민주당 의원·김종양 국민의힘 의원 등 지역구 국회의원과 50개 핵심 협력사 관계자, 현대로템 임직원 등이 대거 참석해 철도 산업 생태계의 지속 가능한 성장 방안을 논의했다. 이용배 현대로템 대표이사는 환영사를 통해 “최근 고속철 최초 해외 수출에 이어 베트남 메트로 시장 진출이라는 값진 결실은 현대로템과 협력사가 함께 맺은 것"이라며 “글로벌 철도 강국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모든 철도산업 구성원들이 하나의 운명 공동체로 결속해야 한다"고 상생 의지를 천명했다. 현대로템은 협력사의 가장 큰 고충인 유동성 위기 해소를 위해 파격적인 지원책을 내놨다. 기존 700억 원 수준이던 동반 성장 펀드 규모를 올해 총 1500억 원으로 두 배 이상 늘려 금리 감면을 돕는다. 또한 신한은행, 한국수출입은행과 상생 금융 협약을 맺고 무역 금융과 보증, 우대 금리를 지원해 협력사의 글로벌 시장 동반 진출에 든든한 금융 우산을 편다. 미래 기술 주도권 확보를 위한 R&D 투자액은 과거 연평균 280억 원 수준에서 860억 원으로 대폭 늘린다. 아울러 올해 6500명 이상의 협력사 임직원에게 품질·생산 직무부터 AI 활용, 업무 프로세스 자동화 등 맞춤형 기술 교육을 전액 무상 제공하고 자체 보안 진단과 보안 라이선스 배포 등 전문 컨설팅으로 핵심 기술 유출을 최전선에서 차단할 방침이다. ◇생태계 위협하는 중국산 부품…현장선 “수명 주기 비용 따지는 '종심제' 시급" 현대로템이 전례 없는 규모의 상생안을 내놓은 배경에는 벼랑 끝에 몰린 국내 공공 조달 시장의 뼈아픈 현실이 자리 잡고 있다. 현재 공공 철도차량 조달 시장에 만연한 '최저가 낙찰제'는 1단계 기술 점수만 넘기면 오직 단가만을 낮춘 업체가 수주를 독식하는 기형적인 구조를 고착화시켰다. 극단적인 출혈 경쟁 속에 원가 절감을 위한 저가 중국산 철도 부품 수입액은 2018년 약 4206만 달러에서 2023년 약 6887만 달러로 5년 만에 63.8% 폭증하며 전체 부품 수입액의 46%를 잠식했다. 검증되지 않은 저품질 부품의 범람은 최근 수도권 광역 전동차 고장 사태 등 시민 안전마저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50개 부품 협력사 대표들은 이날 현장에서 생존을 위한 호소에 나섰다. 이들은 검증된 기술 도입을 위한 입찰 참가 자격 조건 강화와 기술력 중심의 입찰 평가 제도 개선을 촉구하는 정책 건의서를 전달했다. 단순한 초기 도입 가격이 아니라, 열차의 30년 수명 주기 동안 발생하는 생애 주기 비용(LCC)과 안전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종합 심사 낙찰제(종심제)'로 패러다임을 당장 전환해야 한다는 현장의 절박한 목소리다. ◇국산화율 90% 달성한 'K-철도 원팀', 세계 무대 질주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현대로템과 협력사가 30년 넘게 이어온 끈질긴 기술 결속은 찬란한 성과를 내고 있다. 최근 대국민 영업 운행에 돌입한 시속 320km급 신형 고속열차 'KTX-청룡(EMU-320)'은 경제성 등의 이유를 제외한 전체 부품의 90% 이상을 순수 국내 기술로 채우며 사실상 완전한 '기술 주권'을 증명했다. 탄탄해진 밸류체인을 무기로 현대로템은 중소 파트너사들과 'K-철도 원팀(Korea One Team)'을 꾸려 글로벌 영토 확장에 속도를 내고 있다. 미국 LA 메트로 전동차 사업(약 8845억 원)에서는 아예 현지에 전장품 조립 공장(HRSEA)을 세워 국내 협력사들을 동반 진출시켰고, 호주 퀸즐랜드(약 1조 2164억 원) 사업에서도 상생 진출의 활로를 뚫었다. 특히 K-철도 125년 역사상 최초의 고속철 수출인 우즈베키스탄(2700억 원) 사업과, 향후 100조 원 규모로 추산되는 베트남 북남 고속철도의 핵심 교두보가 될 호찌민 메트로 2호선(4910억 원) 턴키 수주는 대한민국 철도 기술의 우수성과 촘촘한 공급망의 위력을 전 세계에 각인시킨 쾌거로 평가받는다. ◇5조 규모 'KTX 대폐차' 골든 타임…생태계 살릴 국가적 결단 필요 글로벌 도약을 앞둔 K-철도 생태계의 명운을 가를 최대 분수령은 향후 수년 내 다가올 약 5조 원 규모의 'KTX-I 대폐차(노후 열차 전면 교체)' 사업이다. 2004년 도입된 1세대 KTX 46대가 설계 수명(30년) 도래로 교체가 시급하지만, 21조 원의 누적 적자를 안고 있는 코레일의 독자적 자금 조달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더욱이 일반 광역철도와 달리 고속열차 전면 교체에 대한 국비 지원의 법적 근거가 부족해 관련 내용을 담은 '철도산업발전기본법(철산법)' 개정안 통과가 절실한 상황이다. 이날 컨퍼런스에 참석한 국회의원들도 철도산업 육성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허성무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 창원 성산구)은 “차량 한 편에 들어가는 수천 개의 부품 하나하나에 협력기업의 기술과 땀이 배어 있다"며 “앞으로 추진될 KTX-I 대폐차 사업이 국내 기술과 부품 생태계를 지키고 키우는 방향으로 추진되도록 입찰 제도 개선과 철도 산업 지원 입법을 상임위에서 꼼꼼히 챙기겠다"고 약속했다. 김종양 국회의원(국민의힘, 창원 의창구) 역시 “나무는 혼자서 숲을 이루지 못하듯, 현대로템과 협력사들은 함께 숲을 이루고 있다"며 K-철도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한 초당적 지원을 다짐했다. 전문가들은 최소 5조 원 규모의 이 거대 내수 프로젝트가 구태의연한 최저가 입찰로 저가 외산 부품사들의 배를 불리는 전철을 밟아선 안 된다고 경고한다. 엄격한 종심제를 통해 국내 300여 개 토종 협력사들의 생태계에 투명하게 재투자돼야만 이로써 확보된 기술력과 자본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메가 인프라 수주전에서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현대로템 관계자는 “협력사는 현대로템의 중요한 동반자이자 철도산업 경쟁력의 핵심축"이라며 “앞으로도 상생협력 문화를 전방위로 확대해 K-철도가 세계 시장을 온전히 선도할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박규빈 기자 kevinpark@ek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