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사이트]안중근 의사 사상적 배경은](http://www.ekn.kr/mnt/thum/202305/2023052601001399600067601.jpg)
윤석열 정부의 대일외교를 규탄하는 시민들이 안중근 의사를 상징하는 ‘단지(잘린 손가락)’ 그림을 들고 ‘굴종 외교 중단’, ‘강제동원 해법 무효’ 등을 요구하는 것은 안중근 의사의 사상적 배경을 폄훼하는 것이다. 일본인의 대부분은 안 의사를 테러리스트로 폄훼하지만 한편으로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을 아는 일본인들의 추모 열기도 대단하다. 매년 안 의사 서거 기념일에는 십 수명의 일본인 추모객이 참여한다. 2010년 서거 100주기 행사에는 안중근연구회 소속의 일본인 100여 명이 참석했다. 안중근연구회는 안도도요로쿠(安藤豊祿) 오노다시멘트 회장 등이 1979년 창설했으며 현재 회원이 200여 명에 이른다. 이들이 안 의사를 추모하는 것은 안 의사가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서는 추호도 나쁜 생각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는 처형 직전까지 한일 친선과 동양평화를 강조했다. 안 의사의 유묵 ‘일한교의선작소개(日韓交誼善作紹介·일한 친선은 서로를 잘 아는 데서 생긴다)’처럼 그 내용뿐 아니라 어순에서도 ‘일한’이라고 일본을 앞세워 일본을 배려하는 포용성을 보여줬다. 사사가와 노리가쓰(笹川紀勝) 일본 메이지대 교수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국제학술회의’에서 ‘안중근의 재판-안중근과 칸트의 사상 비교연구’ 논문에서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핵심 동기는 한·중·일 동양 3국의 평화에 있었으며, 이토의 저격은 이토가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핑계로 동양평화의 공적이었기에 제거한 것이지 반일의 동기는 아니다"고 했다. 안 의사의 동양 평화론 구상은 서구의 침략에 대응해 한·중·일 동양 3국이 ‘평화회의’를 조직, 공동화폐를 주조하고 공동의 군단을 구성해 영구한 평화와 행복을 얻자는 게 골자다. 그래서 칸트의 ‘평화연맹’과 유사하면서도 그 구상을 넘어선 현재의 EU에 가까운 형태다. 1909년 10월 26일 거사 이후 1910년 3월 26일 처형될 때까지 4개월 동안 안 의사는 뤼순 감옥에서 보냈다. 그런데 교도소에서 안 의사를 직접 접한 일본인들은 모두 안 의사의 동양 평화론에 감화됐다. 담당 교도관인 치바 토시치는 고향인 미야기현 다이린사에 안 의사를 가신으로 모셨다. 이후 가신의 전통은 장년인 우에노 도시코(上野俊子)에게 전승됐다. 뤼순 감옥 형무소장 쿠리하라(栗原貞吉)의 딸 이마이(今井房子)도 안 의사를 가신으로 모신다. 검사 야스오카 세이시로는 안 의사의 인품과 신앙심에 감화돼 안 의사와 같은 가톨릭교도가 됐다. 안중근을 직접 심문한 미조부치 타카오도 안 의사를 살인범이 아닌 지사(志士)로 존경했다. 교도소의 교화 승 츠다 카이준, 통역관 소노키 스에요시 등 거의 모든 일본인 관헌들이 안 의사에게 감화되었다. 안 의사는 이들에게 총 200여 편의 유묵을 기증했는데, 그들은 대부분을 한국에 반환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안 의사가 반일이었다면 이들의 감화는 불가능했다. 안 의사가 사형 선고를 받은 직후 미즈노 기치타로(水野吉太郞) 변호사의 수첩에 쓴 친필 4행시가 오사카 마이니치신문(1910년2월22일 자)에 소개됐다.내용은 ‘곡돌사신무견택(曲突徙薪無見澤·곡돌에 섶을 제거한 이는 혜택을 바라지 않는데)/ 초두난액위상객(焦頭爛額爲上客·머리를 태우며 이마가 짓무른 이가 상객이 되는구나)/ 위초비위조(爲楚非爲趙·초나라를 위한 것이지 조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네)/ 위일비위한(爲日非爲韓·일본을 위한 것이지 한국을 위한 것이 아니네)’이다. 안 의사는 한서 곽광전에 나오는 고사성어를 인용해 "자신이 이토를 저격한 것은 큰 재앙을 미리 내다보고 화근을 없앤 선각자적인 위업으로 일본을 위한 것이지 한국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적시했다. 안 의사의 사상적 배경은 반일이 아니라 동양 평화론에 기초한 상호 선린의 한일관계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윤덕균 한양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