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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인사이트] AI 춘추전국시대

필자의 어렸을 적 바나나는 매우 귀한 과일이었다. 국민소득이 오르고 수입이 자유로워지면서 이제는 마트에서도 국산 과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싼 값에 팔리지만 보드랍고 뽀얀 과육과 달콤하고 향긋한 향으로 인기가 많다. 이렇게 많이 재배되고 팔리는 바나나가 멸종 위기를 겪는다는 소식은 한편으로 놀랍기도 하다. 세계적으로 소비되는 바나나는 캐번디시 품종인데, 무성생식을 통해 동일한 맛을 낸다고 한다. 결국 품질관리를 위해 전 세계적으로 동일한 유전자를 갖는 단일 품종이 재배되는 것이다. 그런데 1960년대 널리 재배됐던 그로미셸 종을 멸종시킬 뻔한 파나마병의 변종이 이번에는 캐번디시 품종의 바나나를 위협하고 있다. 이처럼 유전적 단일성은 19세기 필록세라 진딧물로 멸종 위기에 처했던 와인 주조용 포도나무처럼 돌발적인 변수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이른바 ‘알파고’ 충격 이후 인공지능이 특정 영역이나 기능에서 인간보다 뛰어날 수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그 이후 오픈 AI에서 출시한 챗GPT는 인공지능이 단지 특정 영역만이 아니라 보편적 영역에서 인간처럼 혹은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을 갖출 가능성을 생각하게 했다. 실제로 이후 개발된 GPT-4 모델은 글짓기 뿐 아니라 프로그램 코드를 작성하거나 그림을 그려주기도 한다. 이런 기반 모델(Foundation Model)은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능력을 발휘한다. 인공지능 진화하더라도 경제적 이유에서 단순한 기능과 능력치를 갖춘 인공지능이 활용되는 영역도 있을 것이다. 다만 현재 주목받고 있는 챗GPT 등 생성형 인공지능 개발 경쟁이 가열되면서 그만큼 인공지능 이용 비용도 저렴해져 더 발달된 인공지능을 이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앞으로 다양한 영역에서 인공지능이 필수적인 역할을 하게 되면 인공지능의 성능만큼이나 우리가 사용하는 인공지능의 다양성이 중요해질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업무 자동화의 기초가 되어 미래 시장을 주도할 생성형 인공지능 개발이 가속화되고 있다. 많이 알려진 오픈AI의 GPT나 구글의 바드(Bard), 메타의 라마(LLAMA)와 이 보다 매개 변수를 줄인 소규모모델도 다양하게 나오고 있다. 국내에서도 네이버의 하이퍼클로바X, LG의 엑사원 등 다양한 생성형 인공지능이 개발되고 있는데, 오픈AI나 구글 등 글로벌 모델에 비해 학습한 한국어 데이터가 많아 한국어에 기반한 기능에 강점을 갖고 있다. 인간처럼 사고능력과 자유의지를 가진 인공지능에 대한 경고가 나와도, 이미 경쟁의 선두에 서 있는 국가나 기업들이 후발 주자들의 추격을 따돌리려는 선전이라는 의심을 사기도 하다. 생성형 인공지능 개발에 소요되는 노력과 비용이 어마어마하기에 현재 주도권을 쥔 국가나 기업들이 그 격차를 유지하기 위해 후발 주자의 싹을 자르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이런 경쟁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류가 소수의 인공지능 모델만을 사용했을 때의 잠재적 위험성도 간과할 수 없다. 게리 겐슬러 미국 증권감독위원회(SEC) 회장은 최근 투자자들이 인공지능으로 인해 네트워크의 상호 연결성이 증가된 상태에서 동일한 정보에 의존하게 돼 집단행동을 하면 금융의 취약성을 높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향후 소수의 인공지능 플랫폼이 금융을 지배하면 동일한 알고리즘에 따라 작동하는 인공지능이 대규모 금융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선도적인 인공지능을 개발해 보유한 국가나 기업은 그 정보와 데이터가 핵심 자산인 국가기밀이나 영업비밀로 철저히 보안을 유지하려 할 것이다. 그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개발된 수많은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 시스템은 내재된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국제경쟁력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구축할 디지털 세계의 안전성을 위해서도 근시안적으로 해외의 인공지능 활용만 고민할 것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다양한 인공지능을 개발해야 한다. 수천 년간 인류의 정신세계를 풍부하게 만들었던 춘추전국시대 사상가들처럼 다양한 인공지능의 백가쟁명을 통해 안전성을 갖춘 미래의 세계를 꿈꿔 본다.양희철 법무법인 명륜 파트너변호사

[이슈&인사이트] 중국의 아이폰15 금지령과 한국의 선택

최근 출시된 아이폰15가 미·중 무역 및 기술 분쟁의 또 다른 상징이 됐다. 미국이 안보상의 이유를 들어 중국 기업에 대한 제재를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중국이 지난달 중국 공공기관 종사자들에게 미국 최대 IT기업인 애플의 아이폰 사용 금지령으로 맞대응하면서다. 금지령 직후 이틀동안 애플 시가총액이 6% 이상(2000억달러) 가까이 추락했다. 이는 더 광범위하고 복잡한 관계가 지속되는 양국 무역분쟁 영향의 신랄한 예이다. 미국이 2018년 중국에서 수입하는 제품에 대한 관세를 도입한 지 5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는 데도 서로 감정적인 보복 조치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미·중 무역분쟁은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에서 더욱 고조되는 양상이다. 이번 아이폰 금지령은 여러 분쟁 중에 일반 소비자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양국 무역 전쟁의 국지전으로 볼 수 있다. 이 국지전은 당사자인 애플사는 물론이고 그 제조 파트너사 등 업계 전반, 더 나아가 그 공급망에 속해 있는 제3국 기업들도 큰 영향을 받는다. 우리나라의 LG이노텍과 LG디스플레이 주가도 9월 첫째주에 연중 최고가 대비 20% 하락하는 직격탄을 맞았다. 이처럼 중국과 미국 간의 경제 분쟁이 우리나라 주식시장을 변동성을 초래하고, 외환 시장, 금융 시장을 포함한 전체 자본 시장 전반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중국과 미국은 우리나라의 1·2위 수출시장이다. 따라서 미·중 무역분쟁으로 인해 양국의 수입품 가격 상승이나 관세 부담 등이 발생하면 이는 우리나라의 주요 수출 품목에 대한 수요 감소로 이어진다. 또 미·중의 공급망 붕괴로 인해 원자재 및 부품 확보에 어려움을 겪게 되면, 이는 우리나라 기업들의 생산활동에 큰 지장을 준다. 특히 중국에서 제조된 부품을 많이 사용하는 우리나라의 산업에서는 그 영향이 더욱 크다. 한국경제가 지속되는 미·중 무역 분쟁으로 인한 영향을 최소화하려는 노력과 함께 치밀한 전략이 필요하다. 가장 먼저 내수시장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내수시장 활성화는 외부 충격에서 견딜 수 있는 기반이다. 소비자 심리개선, 창작산업 육성 등 내수시장의 활력 제고를 위한 정책을 총동원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내수에 기반을 두고 있는 중소기업 지원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 중소기업의 경영환경 개선에 필요한 지원 정책을 통한 경제 구조의 변화와 기술 혁신은 내수 산업 경쟁력 강화에 중요한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중소기업들에 대한 새로운 기술 개발 지원으로 그 층이 두터워지면 창조경제 발전에 큰 기반이 될 것이다. 둘째, 신시장 개척과 대체시장 발굴을 통해 수출시장 다변화를 꾀해야 한다. 쉽지는 않겠지만 이제는 미국과 중국에 대한 의존을 점차 줄이고, 제3의 국가와의 무역을 확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은 이미 다양한 국가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고 있는 만큼 이를 통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수 있다. 이를 위한 정부의 전략적 외교 노력은 필수적이다. 미·중분쟁으로 영향을 받는 국가들끼리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도 좋은 전략이다. 우리나라는 아세안+3 및 RCEP 등과 같은 지역 협력체에 참여해 협력관계를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실제로 동남아, 인도와 같은 신흥 시장 탐색 및 다변화를 추진하는 등 대응 방안 모색에 주력하고 있다. 동남아시아, 인도는 물론이고, 유럽, 중남미 등의 시장에 적극적으로 진출한다면 민간 주도의 수출 다각화와 경제성장 또한 이뤄낼 수 있다. 미국, 중국과의 양자간 혹은 다자간 회담 등을 통해 교각 역할을 하면서 두 나라 사이의 긴장 완화와 상호 이익에도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박세원 S&P글로벌l 상무/거시경제·국가리스크 한국 총괄

[이슈&인사이트] 섬의 가치 재조명 할때

섬은 일반적으로 자연의 영역에서 지리적인 모습을 떠올리지만 경제와 문화 측면에서도 다양한 가치를 지닌다. 한국은 반도국가지만 북으로 휴전선이 가로막혀 사실상 섬이나 다름없다. 한반도에 부속된 섬들도 오래전부터 나라의 일부로 자리잡고 있다. 고려의 항몽전쟁과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을 만드는 데 섬을 이용하고 유배지이기도 한 어느 섬은 지금은 역사적 의미를 바탕으로 이야기가 있는 주요 관광지가 됐다. ‘독도 역시 우리땅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한국 사회가 섬의 가치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효과적으로 활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다만 그 섬들이 현대 사회에서의 무슨 가치를 가지며, 그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해하고 활용해야 하는 지에 대해 더 많은 이해와 고민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섬은 자원의 부족으로 다양한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환경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연적 가치를 보존하면서도 그 한계를 넘어 새로운 가치를 찾는 답을 만들어야 한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국제사회의 다른 지역이나 국가가 어떻게 노력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와 로마를 거쳐 대항해시대와 식민제국주의 이후까지 연결된 역사에서 지중해와 대양의 섬들은 유럽인들에게 큰 의미를 가진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섬을 차지하고 지키기 위한 그들의 노력과 갈등은 현재까지도 수많은 서사로 전해지고 있다. 그만큼 섬은 전근대 유럽인들에게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유럽연합(EU)과 유럽 국가들은 섬의 지리적 특성을 파악하고 이를 활용하기 위한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여기에는 어업이나 해양 정책 뿐 아니라 산업, 통상, 교통, 문화 분야 등도 아우른다. 최근에는 사회의 패러다임 전환에 따라 섬의 가치를 새로 조명하려는 시도도 이뤄지고 있다. 섬에 관한 면밀한 조사를 바탕으로 통계자료를 정리하는 것에서 시작해 효과적인 정책 관리를 위해 섬과 해양 문제 전담부서를 설치하고, 정책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협력에 나서고 있다. 특히 유럽에서는 ‘스마트 아일랜드’(Smart Island)와 청정에너지 정책 등을 섬에 적용하면서, 회원국과 지방정부 또는 민간이 협력하고 섬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주목할 점은 전에는 이런 프로젝트가 주로 지중해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됐지만 최근에는 북극 지역의 지정학적 중요성과 정치·경제적 활용도가 높아지면서 북유럽의 섬들로 확산되고 있다. 지중해의 섬 프로젝트는 환경 문제나 생물다양성의 보존, 그리고 관광산업 활성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데 비해 북유럽의 섬 프로젝트는 주로 교통물류, 지역 자급화를 위한 산업·기업 투자 활성화에 집중됐다는 게 특징이다. 특히 북극 지역은 최근 국제협력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며, 프로젝트에서 도출된 결과를 공유하고 다른 프로젝트에 접목하려는 시도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섬에 대한 유럽의 이해와 인식, 그리고 정책과 제도들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섬의 가치를 제대로 발견하기 위해서는 섬에 관련된 조사 및 세밀한 통계화가 필요하고 도출된 결과를 공유함으로써 이해관계자가 협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EU는 이미 이러한 섬 관련 정보를 공유하고 이해당사자들이 협력하기 위한 플랫폼을 구축했다. 여기에는 회원국 및 지역의 정부, 기업, 민간단체 등이 주요 행위자로 참여하고 있다. 한국도 장기적인 안목에서 이해관계자들(중앙, 지방정부, 시민, 언론, 기업, 민간단체, 전문가 집단)이 소통하고 협력할 수 있는 컨트롤 타워와 전담 창구를 만들어야 한다. 도서지역의 권한 강화와 충분한 예산 확보도 필수적이다. 이를 통해 섬과 인근 지역이 가지는 가치와 중요성을 인식하는 사회적 비전 연구와 교육을 활성화해야 한다. 유럽 국가들은 단편적인 경제개발이나 지역경제 활성화보다는 섬이 가지는 가치와 비전을 마련, 사회구성원과 함께 공유함으로써 지역∼국가∼국제사회로 이어지는 이익의 공유체계를 마련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유럽의 선례를 통해 우리도 지역민과 시민들이 자신들의 눈으로 섬을 관찰하고 가치를 생각하도록 하는 기회가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김봉철 외국어대 국제학부 교수/ EU연구소 소장

[이슈&인사이트] 공급망 실사 법제화, 서두를 일 아니다

기업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환경 보호와 인권존중 등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따라서 기업의 ESG 경영에 반대하는 국민은 없을 것이다.‘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이 있듯이 제대로 된 ESG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을 취할지가 중요하다. 모든 제도의 설계는 비용과 편익의 타협점을 찾아야 하는 매우 정교한 작업이다. 즉 환경과 인권의 보호라는 목적을 동시에 실현하기 위한 적절한 제도의 설계가 중요하다. 최근 국회에 ‘기업의 지속가능경영을 위한 인권환경보호에 관한 법률안’,이른바 ‘공급망 실사법안’이 제출됐다. 공급망 실사는 쉽게 말해 하청기업이 인권, 환경 관련 법규 등을 잘 지키는지를 원청기업이 감시하라는 것이다. 의무를 위반한 원청기업에 대해 5년 이하의 징역까지 부과할 수 있는 강력한 기업규제 법안이다. 국제적으로 공급망 실사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것은 아동노동이었다. 나이키의 파키스탄 하청기업이 상품생산을 위해 아동을 고용한 것이 발단이 됐다. 필자가 1998년 프랑스 유학 당시 유명 프랑스 TV에서 나이키의 파키스탄 하청업체가 아동을 동원해 가혹한 노동환경에서 상품을 만드는 자극적인 고발 프로그램을 방송했다. 방송 이후 나이키에 대한 국제적 비난이 거세지자 하청업체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생산기지를 방글라데시로 옮겼다. 이후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가족 중 유일하게 돈을 벌던 아이들이 일자리를 잃으면서 가족 전체가 생존의 문제에 부딪힌 것이다. 이런 사건이 발생한 이후 유럽 국가를 중심으로 기업의 서플라이 체인내 에서 발생하는 인권, 환경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UN, OECD 등에서 가이드라인, 권고 등이 나왔고 프랑스, 독일 등 일부 국가에서는 공급망 실사 법안을 제정했다. EU 차원에서도 지침(directive) 제정 절차를 진행 중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우리나라도 이러한 움직임에 동참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먼저, 공급망 실사를 법률로 제정한 국가는 소수에 불과하다. 유럽국가 중에 프랑스, 독일 등이 있고 일본은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미국은 지난해 6월 위구르강제노동방지법(UFLPA)을 제정해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강제노동(노동착취)으로 만든 상품의 수입을 금지하고 있는 데 이 것은 일견 공급망 실사와 유사한 성격이지만 실제로는 중국 상품의 미국 수입을 막기 위한 ‘중국견제’ 법률의 성격이 짙다. 둘째, 공급망 실사법을 도입한 나라에서는 실효성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2017년 ‘기업경계법’이라는 공급망 실사 법률을 제정한 프랑스는 당시 의회 논의 과정에서 경제계의 반대로 법안이 수차례 부결됐고 결국 상징적인 내용만 남아 사실상 사문화돼 있다. EU 내에서도 공급망실사 지침 제정에 대해 경제계에서는 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릴 것을 우려해 공급망실사 지침의 도입에 지속 반대하는 등 이해관계자간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셋째, 법률의 실효성 문제다. 나이키 하청공장의 사례에서 보듯이 빈곤과 인권의 문제는 기업이 혼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나이키 하청공장이 아동을 고용한 것은 분명 문제가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빈곤을 해결할 수 없는 국가의 역량과도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기업에게만 빈곤과 인권에 대해 책임을 지울 수 없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의 산업구조를 고려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인 제조업 강국이다. 전체 산업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6%로,세계에서 중국(28%) 다음으로 높다. 공급망실사 법률이 시행되면 제조업 생태계 전반에 큰 혼란이 빚어진다. ‘인권과 환경의 보호’라는 전 인류가 공감하는 원칙이라도 법률로 강제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국내 산업의 특성과 경제현실을 고려하고 외국의 시행사례를 면밀히 따져보고 우리 현실에 맞는 묘수를 찾아야 한다.유정주 한국경제인협회 기업제도팀장

[이상호 칼럼] 러북 밀착과 동북아 정세 변화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회 위원장이 9일간의 러시아 방문 일정을 마치고 만족한 모습으로 평양으로 돌아갔다. 이번 방러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전으로 부족해진 탄약과 장비를 북한에서 공급받기 위해 추진했다고 알려졌다. 대화 상대방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항상 회의 장소에 늦게 나타나던 푸틴이 김정은 보다 무려 30분이나 먼저 와서 대기할 정도로 마음이 급했다는 평가도 있다. 이번 러북간 정상의 만남으로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북한의 지원 대가로 러시아가 북한에 최신 무기와 각종 첨단 기술을 공급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체면을 구겼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군사 강국이면서 군사기술 대국이다. 전차, 헬기 등 일부 러시아제 무기의 성능이 과대포장 되고 부실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대공방어체계, 자살 드론 등 첨단 장비는 우수하다고 알려진다. 문제는 탄약 부족 등 러시아의 전쟁 지속능력 부재로 지루한 소모전 양상이 계속되는 것이다. 이는 러시아만의 문제가 아니라 나토 등 대부분의 서방 군대가 당면한 도전으로 이들 국가의 전쟁 수행 능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국이 최근에 폴란드를 비롯해 여러 국가에 무기 수출로 대박을 터뜨릴 수 있었던 이유가 분단 준 전시 국가로 탄약 등 각종 무기와 보급품 재고가 충분해 빠른 물자 공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병영국가인 북한 역시 대규모 군수물자를 비축했다. 한국이 방산 수출로 큰 이익을 봤듯이 북한으로서도 한몫을 챙길 기회다. 문제는 러시아의 북한에 대한 최신 무기 수출이나 기술 이전이 동북아 전략 지형을 바꿀 만큼 민감하다는 사실이다. 특히 핵과 미사일 관련 기술의 이전은 중장기적으로 큰 골칫거리가 될 것이다. 러시아는 무기 수출을 전략적 지렛대로 사용해 왔다. 소련 붕괴 이후 외화 획득을 위해 무기 수출에 집중하면서 중국과 인도 같은 아시아 지역 국가를 지원했다. 초기에는 러시아가 이들 국가에 주로 무기 완제품을 판매하며 상호 이해를 충족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되다 경제가 더 어려워지자 중국과 인도의 전략적 고성능 무기와 최첨단 핵심 기술 이전 요구에 굴복했다. 러시아도 무기 판매 시장 유지를 위해 전략적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첨단 무기 판매와 기술 이전을 수용하는 등 스스로 문턱을 낮췄다. 서방 입장에서 가장 껄끄러운 것은 중국을 강력한 패권 국가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결국 러시아는 경제 등 내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도·태평양 지역 힘의 균형과 역학의 균열을 초래했다. 러시아는 서방과의 긴장을 아시아로 확산하며 국제적인 ‘갈등 수출국’이 됐다. 이는 서방이 인도를 중국 견제 세력으로 만들고, 인도가 미국에 접근해 아시아·태평양 안보 공동체를 구성하더라도 해결되기 어려운 지구촌 안보 난제가 됐다. 이번 북한과의 밀착도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가 북한에 첨단 무기와 기술을 넘겨주면 동북아 지역 힘의 균형이 깨지고 국제 질서도 복잡해진다. 이로 인해 서방의 인도·태평양 지역 안보 정책을 짜기도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더군다나 러시아가 당장은 우크라이나 문제에 집중하고 있지만 중장기적으로 시베리아와 극동 지역에서 영향력 강화를 노릴 것이다. 아시아 지역이 전략적· 경제적 중심지가 됐고 러시아는 여기서 소외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번 러북 정상의 만남은 수세에 몰린 러시아가 북한에 손을 내민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북한 지원을 통한 동북아 지역 이익 수호 및 영향력 확대, 중국 견제 및 대 서방 연합전선 구축 등 다중 목표 달성을 위한 중장기 전략적 포석이다. 북한은 이 기회에 러시아와 중국 사이를 오가며 국익 극대화를 꾀할 것이다. 북한은 이미 1960~1970년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전개하며 많은 이익을 챙겼다. 이후 러시아 쇠퇴와 함께 중국에 종속됐던 북한으로서는 자존심과 실리를 동시에 살릴 절호의 기회를 맞은 셈이다. 여러모로 북한에는 좋은 일이다. 이 상황이 한국에겐 커다란 도전이다. 북한은 러시아의 최신 기술을 가지고 핵 무력을 비롯한 전력 강화를 통해 김정은 체제를 굳히고 4대 세습 추진 동력을 확보할 수 있다. 과거 러시아 행보를 보면 북한을 지원하지 말라는 한국과 국제사회 설득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과거 냉전 시대와 유사한 동서 진영 간 대결 구도가 현실화된 상황에서 한국은 다시 한번 국제 갈등의 최전선에 서게 되는 어려운 상황을 맞이할 운명에 처했다.이상호 대전대학교 정치외교학 전공교수

[이슈&인사이트] PF굴레에 갇힌 주택건설 시장

아파트, 오피스텔, 주상복합 등의 부동산 개발 사업의 자금 조달 방식으로 주로 쓰이는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roject Financing)은 일반적으로 브릿지론, 본 PF, 중도금 대출, 잔금대출 순서로 진행이 된다. 그리고 각 진행과정에서 자금이 유동적으로 연계돼 단계마다 자금회수와 신규 공급이 이루어지면서 부동산 금융과 건설 자금이 흘러간다. 자금을 대는 증권사, 금융기관 등은 해당 사업과 사업 시행자에 대한 PF대출을 심사하는 과정에서 PF대금의 회수를 위해 시행자에게 시행목적이 되는 부동산을 신탁하도록 하고, 시공사의 보증을 요구한다. 부동산 시행사업의 수익구조는 분양수익금과 사업에 지출된 비용을 비교해 분양수익금에서 사업비용을 뺀 순수익이 크면 클수록 시행자의 이익이 커지는 구조다. 이에 따라 분양률이 높을수록 시공사는 공사대금을 온전히 회수할 수 있고, 새로운 주택공급사업을 벌일 ‘실탄’을 확보하게 된다. 그런데 미국발 고금리 및 원·달러 환율 상승에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원자재 파동 등으로 철근, 시멘트 등 건설 원자재 가격이 치솟아 원가가 크게 오르면서 시공사는 시행자에게 공사대금 추가 증액을 요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시행자 역시 고금리에 따라 PF대출에 대한 이자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마당에 시공사의 공사대금 증액 요구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형편인 데다 주택경기 침체로 분양마저 어려워지면서 이중고를 겪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모든 PF사업장으로 확산되며 주택건설시장에 PF발 동맥경화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기존에 이뤄진 PF대출의 변제가 어려워지며 유동성 위기가 발생하고, 제1금융권은 물론이고 새마을금고 증권사 등 PF 대출 중단사태로 이어진다. 수익성이 좋은 곳으로 평가되던 노른자위 시행사업 PF대출 마저도 선순위 대출금리가 10~12%에 달하고, 중·후순위는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치솟는다. 분양경기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비용과 금리마저 치솟아 사업성을 확보할 수 없으니 재개발·재건축 사업시행자 입장에서는 손해보고 사업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더구나 PF보증을 선 시공사도 공사대금의 회수가 지연되면서 신용평가등급이 떨어지는 등으로 자금확보에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다. 이 같은 PF자금의 경색은 재개발·재건축사업의 중단으로 이어지고 수급난을 가중시켜 결국에는 시장 불안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정치권은 선거 때마다 표심잡기용으로 공급확대를 통한 주거안정을 공약의 단골 메뉴로 앞세운다. 윤석열 정부도 지난해 8월 16일 규제완화를 통해 재개발·재건축 등 정비사업과 민간도심복합사업 등 수도권 위주의 민간개발사업을 촉진해 5년간 270만가구의 주택을 공급하는 내용의 ‘국민주거안정 실현방안’을 내놨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실적은 참담하다.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지난해 주택 분양 및 준공물량이 각각 28만7624가구, 44만3370가구에 그쳤다. 올해는 7월까지 공급물량은 7만8631가구에 불과하고, 준공물량도 23만758가구에 그치고 있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는 올해 1월 PF보증제도 개선을 통해 10조원을 공급하고, 준공 전 미분양사업장에 대한 보증지원으로 미분양대출보증을 신설해 5조원을 추가로 공급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올해 4월을 기준으로 기존 PF대출 상환 용도의 PF보증 실적은 1건에 불과했고, 미분양 대출보증은 발급실적이 없다. 이렇게 보증실적이 저조한 이유에 대해 건설업계는 HUG의 대출 심사기준이 지나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시행자가 토지비의 10%와 총사업비 2% 중 큰 금액을 먼저 투입하고, 시공사는 HUG자체 신용평가에서 BB+등급 이상·시공능력평가순위 500위권 이내로 책임준공이 가능한 경우 등의 까다로운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여기에 더해 사업부지를 HUG가 지정하는 부동산 신탁사에 신탁해야 하고, 외부전문기관으로부터 사업성분석보고서를 받아 별도심사를 거쳐야 하는 등 지나치게 가혹해 사실상 ‘하지 말라는 거와 다름없는 시늉만 낸 지원책’이라는 볼 멘 소리가 나온다. 사업시행자와 건설사의 도산 위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런데도 대출 부실화 방지에만 신경 쓸 뿐 PF정상화에는 정부나 공기관, 금융기관 누구 하나 관심을 갖는 이가 없는 것 같아 안타깝다.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건지,애써외면하는 건지. 주택 건설 활성화와 대출부실화 예방이라는 두 토끼를 잡을 정교한 부동산 PF 정상화 정책 마련이 절실한 시점이다.박지훈 비욘드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이슈&인사이트] 생성형 AI의 역습

생성형 AI(Generative AI)가 매우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GPT-3, DALL-E 2, PaLM, Stable Diffusion과 같은 주요 모델이 모두 최근 2~3년 동안에 나왔다. 이처럼 생성형 AI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데는 트랜스포머, TPU(구글이 자체개발한 AI전용 칩), 슈퍼컴퓨팅, 클라우드 인프라를 통해 제공되는 컴퓨팅 성능 향상이 한몫 했다. 여기에 많은 생성형 AI 모델의 오픈 소스 특성에 힘입어 학계와 스타트업이 기존 프레임워크를 기반으로 혁신을 더욱 가속화한 것도 한 요인이다. 자연스럽게 문맥을 인식하는 GPT-3, PaLM과 같은 모델을 통해 강력한 언어 이해 능력을 발휘하며 텍스트 생성 능력도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미드져니, DALL-E 2 및 Stable Diffusion과 같은 모델이 매우 일관성 있고 사실적이며 사용자 정의 가능한 이미지를 생성하며 이미지 생성 품질도 크게 향상되고 있다. 더 나아가 복잡한 다단계 추론 및 강화 학습과 같은 새로운 기술이 더해지면서 일관성과 추론 능력의 한계도 극복하고 있다. 생성형 AI는 이제 이미지, 텍스트, 코드, 음악, 동영상, 3D모델 등 다양한 유형의 크리에이티브 콘텐츠를 생성한다. 영어는 물론이고 100개 이상의 언어로 모델을 확장해 언어 장벽을 허물며 소비자 엔터테인먼트에서 거의 모든 산업에 이르기까지 생성형 AI는 예술, 마케팅, 소프트웨어 개발, 신약 개발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폭넓게 활용되는 추세다. 글로벌 전략컨설팅 기업인 매킨지가 올해 초 금융.의료, 소매, 제조, 기술 둥 전 분야의 1684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해 지난 8월 발표한 리포트에 따르면 응답자의 33%가 조직에서 이미 한 가지 이상의 비즈니스 기능에서 생성형 AI를 정기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가장 많이 사용하는 분야는 마케팅, 영업, 제품 개발 및 서비스 운영으로, 이는 생성형 AI의 고부가가치 영역과 일치하는 결과다. 또 AI를 사용하는 조직의 40%가 생성형 AI로 인해 전체 AI 투자를 늘릴 계획이라고 답해, 생성형 AI에 대한 우선순위가 높아지고 있음을 보여줬다, 이처럼 생성형 AI의 성능이 향상되고 활용범위도 빠른 속도로 넓어지면서 AI의 법적·윤리적 문제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커지고 있다. 특히 창작 영역에서 AI 시스템이 창작물을 무단으로 복제하는 사례와 함께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어 내면서 개인의 인권 침해는 물론 저작권 관련 이슈가 부각되고 있다. 특히 AI 복제(AI cloning) 경우 생성형 AI가 음성, 문학, 음악, 이미지, 연기(동영상) 등을 대상으로 저작물을 무단 복제하는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발생하지 않은 상황을 임의로 생성하면서 문제의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공연 복제(performance cloning)의 경우, 2021년에 유명 배우인 톰 크루즈가 아닌데도 우스꽝스런 표정을 짓는다든가, 골프를 치는 딥페이크 동영상이 ‘CNN BUSINESS’ 자료인 것처럼 TikTok에 등장했다. 한편으로 생성형 AI가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어 내면서 저작권을 둘러싼 법적 다툼도 늘어나는 추세다. 각국의 저작권법 관련 판례에 따르면 인간이 창작한 경우에만 저작권을 인정한다. AI가 만든 예술작품을 포함해 ‘인간이 아닌 자(non-human)’의 작품에 대한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일부 예술가들은 창작가로부터 도구를 분리할 수가 없기에, AI가 작품의 창작자일 경우 이 작품에 저작권을 부여하고, AI 사용자에게 저작권을 양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행법에서는 이러한 주장도 채택하지 않는 상황이다. 하루빨리 새로운 법체계가 마련돼야 한다. 생성형 AI의 진화는 기술 혁신과 함께 다양한 산업 분야로의 확장성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 속도와 광범위한 적용 영역에 비해 윤리적·및 법적 이슈에 대한 대응은 따라가지 못한다. 특히 AI에 의한 창작물의 저작권 문제와 생성형 AI의 개인 프라이버시 침해와 같은 이슈는 새로운 법적 판단에 앞서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먼저다. AI와 인간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어떤 규정과 가치체계를 수립해야 할지에 대한 공론화가 필요하다. 기술의 발전은 멈추지 않고 있기에 이러한 윤리적, 법적 측면을 고려한 균형 잡힌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일이 무엇보다 급하다.김한성 마이데이터코리아 이사

[이슈&인사이트] 리튬인산철 배터리의 역습

김필수 대림대학교 교수/김필수 자동차연구소 소장 전기차 시대가 열리면서 핵심 부품인 배터리 전쟁도 가열되고 있다. 배터리는 전기차 가격의 약 40%를 차지할 정도로, 배터리 없는 전기차는 상상할 수 없다. 그만큼 배터리의 확보는 전기차 생산의 기반이면서 기본이다. 특히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체제 아래 배터리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완성차업체와 배터리업체간 짝짓기(합작)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동시에 배터리 업체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려 직접 배터리를 생산하기 위한 완성차 업체들의 배터리 내재화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하지만 전기차용 배터리 생산은 전기 저장능력을 높이는 에너지 밀도 확보와 함께 안전성,경제성(가격),대량 생산체제 구축 등 해결해야 할 난제가 많아 그리 간단치가 않다. 한국의 배터리 3사가 글로벌 시장에서 위력을 보이는 것도 바로 전기차 시대를 앞서서 20여 년 전부터 준비하고 투자해온 결과다. 이런 점으로 볼 때 국내는 물론 글로벌 자동차 제작사들에게 배터리 내재화는 난제중의 난제다. 그러나 테슬라는 다년간의 노력을 통해 조만간 자체 배터리 생산을 예고했다. 기존의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도 내재화에 힘을 쏟고 있다. 현대차도 최근 ‘산타페 하이브리드 모델’에 자체적으로 설계·제작한 배터리를 탑재하는 것을 시작으로 배터리 내재화에 시동을 걸었다. 다만 하이브리드차용 배터리는 용량이 작은 만큼 쉬게 접근하고 앞으로 대용량으로 안정되게 생산하기 위한 중간 과정이다. 세계 전기차용 배터리 시장은 중국 기반의 리튬인산철 배터리인 ‘LFP배터리’와 서방 중심의 리튬이온 배터리인 ‘NCM배터리’로 양분돼 있다. 리튬인산철 배터리는 리튬이온 배터리에 비해 에너지 밀도,즉 충전용량이 떨어진다는 단점은 있다. 하지만 최근 에너지 밀도를 높이는 셀투백 기법, 즉 블레이드 배터리 등이 추가되면서 단점을 점차 극복하는 추세다. 여기에다 상대적인 장점인 가격경쟁력과 안전성(화재)을 무기로 글로벌 전기차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더구나 최근들어 전기차 시장에 ‘반값 전기차’가 화두로 등장하면서 ‘값싼 배터리’ 확보가 전기차 전쟁에서의 승패를 가르는 주요 변수로 떠 올랐다. 이 때문에 리튬이온배터리보다 리튬인산철 배터리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는 추세다. 테슬라와 포드 등은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우회하면서 미국 내에 리튬인산철 배터리 공장을 건설을 추진 중이다. 올해 초부터는 일본에서 중국산 BYD 전기차 판매가 시작된 데 이어 우리나라도 인산철 배터리가 장착된 BYD 상용차가 판매되고 있다. 심지어 기아 레이 전기차와 KG모빌리티의 EVX는 리튬인산철 배터리를 장착하는 등 국산 모델에 리튬인산철 배터리 장착이 점차 확산될 전망이다. 결국은 글로벌 전기차 시장에서 표준 이상의 고급모델은 리튬이온 배터리, 가격 등 가성비를 따지는 보급형 전기차에는 리튬인산철 배터리로 시장이 양분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운데 리튬인산철 배터리의 기술개발이 가속화되면서 주도권 싸움은 더욱 거세질 것이다. 중국의 CATL 등은 리튬인산철 배터리와 리튬이온 배터리 모두를 생산, 공급 중인 만큼 리튬이온 배터리만을 공급하는 국내 배터리 3사는 그 만큼 경쟁력측면에서 불리하다. 국내 모든 배터리사가 리튬인산철 배터리 기술개발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다. 더 나아가 중국 CATL은 최근 10분 충전으로 400㎞를 주행할 수 있고,영하 10도에서도 80%까지 충전이 가능한 리튬인산철 배터리를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앞으로 이 배터리가 실제로 생산돼 상용화될 지는 더 두고 봐야 하겠지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초격차 시대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배터리 기술 경쟁에서도 더 이상 주저할 시간이 없다.김필수 새사진 김필수 대림대학교 교수/김필수자동차연구소 소장

[이슈&인사이트] 홍범도 장군 논란 바로보기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논란이 뜨겁다. 이념에 따른 역사전쟁이 시작됐다는 시각도 있다. 역사를 대상으로 전쟁을 치러 승리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 승리가 진정한 승리일까? 여기서 이 논란의 진위를 따지자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결국 역사 해석의 문제이고, 역사의 해석은 오늘을 사는 우리만의 특권이 아니다. 유구한 역사의 흐름 속에 끝없이 해석과 재해석이 반복되는 것이 역사이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의 논란이 왜 문제이고,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지에 대한 필자의 입장을 제시함으로써 독자들의 이해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논란은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세워진 독립운동가 5인의 흉상 중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이전하려는 학교와 국방부의 시도가 발단이 됐다. 문재인 정부에서 홍 장군의 유해를 봉환해 대전현충원에 모셨고, 그 묘비를 하필이면 좌파의 상징적 인물인 신영복의 글씨체로 만들면서 우파 세력의 심기를 건드렸다. 홍범도 장군의 행적에 대해서는 일부 우파 역사학자와 군 장성들을 중심으로 그의 자유시 참변에서의 역할과 이후 행적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어 왔다. 문재인 정부는 월북한 공산주의자 김원봉의 복권 시도가 여의치 않아 그랬는지 레닌으로부터 권총을 하사받고 이후 공산주의자로 행동한 홍 장군의 유해 봉환 과정과 묘지의 크기 등에서 법규를 고쳐가면서까지 환대했다. 또 1962년에 이미 서훈 받은 홍 장군에게 다시 훈장을 추서한 것도 명백한 동일 공적에 대한 이중 서훈이다. 대통령실이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면서 사실상 이념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강력히 밝힌 가운데 육사와 국방부의 홍 장군 흉상 이전 시도는 당연하게 좌파 및 야권과의 이념 갈등을 촉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의도적인지, 우연인지, 또는 대통령실이 사실상 주도한 것인지는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현재로선 그런 의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공산주의의 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수호해 온 군의 입장에서는 공산주의자로 평가될 수 있는 홍범도 장군을 국군의 뿌리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군과 국방부가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철거 또는 이전하려는 시도는 현시점에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홍범도 장군은 우리 국민 모두가 수십 년에 걸쳐 자랑스런 독립운동의 하나로 교육받아 온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의 영웅이다. 그런 영웅의 흉상을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지도 않았는데 이전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당장 광복회도 절대 반대를 부르짖고 나서지 않았나. 대다수 국민도 마찬가지다. 평생을 독립운동의 영웅으로 배워온 홍범도 장군이 하루아침에 공산주의자로 평가되는 것을, 그것도 군 일각에서 그런 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국민이 어디에 있겠는가. 일부 군과 국방부의 홍 장군에 대한 이해가 유일한 해석일 뿐 이것이 반드시 옳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조선일보에 연재되고 있는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자유시 참변과 이후의 홍범도 장군의 행적에 대한 다수의 역사적 사실을 제시하고, 홍 장군의 자서전과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홍 장군에 대한 평가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비록 ‘사실’이라고 해도 사실의 역사적 의미와 해석은 끊임없이 평가와 재평가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오늘 군과 국방부가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철거하거나 이전한다고 해서 그것이 최종적일 것이라 보는가. 정권이 바뀌고 역사 해석이 달라지면 오늘 홍 장군의 흉상 이전을 주도한 사람들이 단죄되고 다시 원래의 위치로 되돌려질 가능성은 없을까. 만일 그렇다면 홍 장군의 흉상은 이리저리 이전을 반복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어리석은 짓을 무엇 때문에 하는가. 정치가 역사를 해석하고 재단하는 일을 한다면 반대 세력에 의한 동일한 행위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 반복될 것이다.홍성걸 국민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이슈&인사이트] 영혼 없는 산업안전 정책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 교수 ‘기업의 안전문화가 조성되려면 규제기관부터 안전문화가 조성돼야 한다’. 안전을 제1로 여기는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오래 전부터 강조해 온 말이다. 기업의 안전수준을 높이려면 정부의 인프라 조성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산업안전 인프라 현실은 어떨까. 정부부터 안전에 대한 철학 부재 속에 갈지자 행보를 하고 있다. 이는 조악하고 무분별한 안전규제의 반복 재생산으로 나타나고 있다. 실효성 없는 땜질식의 규제가 넘쳐나는 이유다. 안전 관련 법제가 거의 누더기 수준으로,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난감한 지경이 되었다. 정부에 이론적 수원지 역할을 해야 할 안전학계는 문제가 더 심각하다. 아이러니하게 우리 사회의 안전부문 중 학계의 존재감이 가장 적다. 무늬만 안전학자인 자들로 가득하다. 그런데도 안전전문가 행세를 하며 알맹이 없거나 허황된 자문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니 자문내용이 어떠하리라는 건 불을 보듯 훤하다. 안전인프라 조성에 되레 걸림돌이라는 비난을 들을 지경이다. 안전 관련 중요한 인프라 중 하나인 안전자격증·면허도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안전자격증·면허가 실력 향상을 위한 기제로 작용하지 못하고 겉멋 부리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기본서를 학습하지 않고 기출문제 중심의 단편적 지식만 공부해도 너끈히 자격·면허를 취득할 수 있는 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렇게 취득한 자격·면허는 스스로 안전전문가가 되었다고 착각하게 하거나 외부에 이들을 안전전문가로 보이게 하는 잘못된 정보를 주고 있다. 시험과목을 보면 점입가경이다. 안전역량과 무관하거나 그 향상을 유도하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산업안전지도사의 경우 국제적으로 메가트렌드에 해당하는 과목(안전보건경영시스템)조차 포함돼 있지 않고 안전관리에 필수적인 안전심리 과목도 빠져 있다. 그 대신 안전과 별 무관한 경영학, 산업심리와 같은 과목이 들어 있어 수험생에게 큰 혼란과 시간낭비를 초래하고 있다. 문제는 자격·면허를 관장하는 당국은 왜곡된 현실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조차 없다는 점이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으로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안전인력 부족사태가 발생하자 고용노동부는 안전인력을 벽돌 찍어내듯이 초단기간 속성교육으로 배출하고 있다. 시장에 안전은 별거 아니고 아무나 할 수 있다는 잘못된 신호를 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폐해는 자못 크다고 할 수 있다. 가뜩이나 미흡한 안전인력의 전문성 문제를 오히려 악화시키는 데 정부가 앞장서는 꼴이다. 안전관련 학과가 우후죽순 격으로 생기는 건 중장기적으로 심각한 후과를 낳을 수 있다. 안전의 기초지식도 없는 사람들을 교수진으로 구색만 갖추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겠다는 셈이다. 학생들과 사회를 기만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일은 고용부가 한국기술교육대학교를 통해 앞장서고 있다. 안전인프라를 구축해야 할 정부가 안전인프라를 훼손하고 있으니 말문이 막힌다. 우리나라에서 안전 일류기업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건 기업의 잘못도 있지만 정부의 엉성한 인프라와 시스템 부재 탓이 크다. 이는 고비용 저성과의 산업안전대책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에도 정부는 정작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설익은 산업안전 대책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다. 이러한 기조가 계속된다면 앞으로도 우리나라에서 안전 일류기업이 나오는 것은 기대난망이다. 정부에 거창한 정책을 기대하지 않는다. 안전을 망가뜨리는 겉멋만 부리는 정책에서 하루빨리 탈피할 것을 바랄 뿐이다. 보여주기식 대책을 양산하고 이행과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는 ‘먹튀 행정’이야말로 산업안전을 수렁에 빠뜨리는 주범이다. 전문가 이전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부가 산업안전 역사 앞에 책임 있는 자세로 임하기를 촉구한다.정진우 서울과기대 교수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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