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너지경제신문 여헌우 기자] 전세계 주요국이 ‘탄소중립 속도조절’을 시작하자 재계도 관련 전략 수정을 고심하고 있다. 고물가 등으로 당장 경제가 나빠지자 친환경 규제 도입 시기를 늦추는 국가가 속출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탄소중립을 향해 무작정 달리기는 힘든 상황이라 대응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분석이 나온다.26일 재계와 주요 외신 등에 따르면 미국, 유럽연합(EU), 영국, 스웨덴 등에서는 최근 친환경 관련 규제가 느슨해지고 있는 추세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는 20일(현지시간) 기후변화 대응 정책 조정 방안을 발표했다. 내연기관차 신차 판매 금지 시작 시기를 기존 2030년에서 2035년으로 5년 미루는 게 골자다. 중고차의 경우 휘발유차와 경유차도 계속 거래할 수 있게 했다. 또 가정용 가스보일러를 재생에너지 활용식 히트펌프로 전환하는 속도도 늦출 계획이다. 전세계 최초로 탄소중립을 선언했던 스웨덴은 갑자기 자세를 바꿔 국제사회 이목을 끌고 있다. 스웨덴 연립정부는 최근 내년도 예산안 초안을 발표하면서 고물가를 이유로 유류세를 인하하겠다고 했다. 이로 인해 당장 유류 소비량이 증가하고 전기차 전환에는 방해가 될 것으로 관측된다.EU 이사회는 25일(현지시간) 새로운 배기가스 규제인 ‘유로 7’ 배출 기준을 현재 시행 중인 ‘유로 6’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을 골자로 한 협상안을 채택했다고 밝혔다. EU는 해당 규제를 통해 자동차의 오염 물질 배출량 제한을 꾸준히 줄여왔다. 완성차 업계 역시 기준을 맞추기 위해 기술개발에 시간과 자원을 써야 했다. 특히 유로 7이 시행되면 현실적으로 전기차를 팔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될 것으로 업계는 예측했다. 아직 최종안 수정 가능성은 남아있지만 ‘탄소중립 속도조절’ 기조 자체는 바뀌지 않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미국에서는 내년 대선이라는 큰 이벤트를 앞두고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있다. 공화당 후보로 유력시되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지지율이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게 핵심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기차 전환과 기후위기를 ‘사기’라고 표현하는 인물이다. 차기 대선에서 그가 승리할 경우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등 민주당이 중점적으로 추진해온 친환경 정책이 대폭 수정될 확률이 높아 보인다. 재계는 일단 이 같은 변화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삼성, SK, 현대차, LG 등 주요 그룹사는 이미 전력 소비량의 100%를 재생에너지를 통해 조달한다는 ‘RE100’에 가입한 상태다. 현대차그룹의 경우 미국 바이든 정부의 정책기조에 맞춰 현지에 전기차 전용 공장을 건설 중이기도 하다. IRA 추진 현황을 살피며 대비책을 마련해온 이차전지 업계도 셈법이 복잡해질 전망이다. 일각에서는 우리 기업들이 일정 수준 친환경 전략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미 자유무역 질서가 무너지고 각국이 자국 우선주의 정책을 펼치는 와중에 탄소중립에 대한 부담까지 짊어질 필요는 없다는 논리에서다. 우리나라 환경에 맞게 ‘CF100’(RE100에 원자력·수소를 추가한 개념) 등을 전면에 내세우자는 의견도 재계에서 나온다.한국은행이 전날 발간한 ‘기후변화 대응이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하려면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0.6% 포인트 낮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온실가스 배출권 가격이 상승해 기업의 비용 부담이 증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에서 고탄소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7.6%로 경쟁국 대비 높은 편이다.재계 한 관계자는 "기후위기에 대응해야 한다는 공감대는 여전하지만 속도를 조절하는 분위기가 조성된다면 우리도 더욱 유연하게 반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yes@ekn.kr자료사진. HD현대에너지솔루션의 고출력 태양광 모듈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