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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미분양 무덤’, 대구 위한 대책 시급하다

올해 대구를 방문해 본 사람 중 미분양 문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이라면 누구나 도시 내 미분양이 얼마나 심각하며 향후 ‘차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실감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대부분의 아파트는 신축으로 보였으며 완공된 아파트 건물 위로 분양을 홍보하는 초대형 현수막 또한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었다. 더욱 무서운 것은 대구 내 미분양 문제가 이미 심각한 수준을 넘어섰음에도 불구하고 도시 곳곳에는 견본주택이 성행하고 아파트 건설 현장 또한 활발한 모습을 띄고 있다는 점이었다. 1월 기준 전국 미분양 주택 수는 7만5359가구이며 수도권은 1만2257가구에 달해 상반기 중 전국 미분양 물량이 심각 수준인 10만가구를 돌파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가운데 대구의 미분양 주택 수는 1만3565가구로 수도권 수치를 상회하며 전체의 18%가량을 차지했다. 이 같은 미분양 가속화의 가장 큰 이유로는 공시지가와 원자잿값 상승으로 인한 고분양가가 꼽힌다. 1월 전국 아파트 평균 분양가는 2018년 1월(1036만2000원) 이후 5년 만에 51.66% 폭등해 역대 최고치인 3.3㎡당 1571만5000원을 기록했다. 대구의 아파트 평균 분양가 또한 3.3㎡당 1710만원을 기록하면서 최초로 1700만원대에 진입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건설사들은 아파트 가격을 기존 분양가 대비 75% 수준으로 인하하거나 입주 시 분양가 10%에 해당하는 현금을 지급하는 등의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사태 해결의 실마리는 여전히 보이지 않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공급물량 부족 지역인 수도권과는 다르게 공급과잉인 대구의 미분양 사태 호전은 어려우며 분양가 또한 지속적으로 상승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문제가 더욱 심화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대구 미분양 가속화를 멈추고 사태 해결을 위한 정부 개입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생각되는 현시점에 정부가 빠른 판단을 통해 전국 분양시장에 불어올 ‘나비효과’를 사전에 방지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본다.증명사진

[기자의 눈] 어느 날, 은행에서 일어난 일

날씨가 맑은 어느 날 오전. 거동이 불편한 집안 어르신을 모시고 은행에 갈 일이 있었다. 워낙 고령이신지라 직접 모시기 죄송스러웠지만, 당신 명의로 된 계좌에 관한 일인 데다 대리권을 위임할 서류를 뗄 시간이 없었다. 아쉬운 대로 어르신을 휠체어에 태워 집에서 가까운 K은행 지점에 방문하기로 했다.문제는 건물 앞에서부터 시작됐다. 해당 은행은 건물 2층에 있었는데, 당장 건물 입구 자동문이 폐쇄돼 직접 문을 열고 들어가야만 했다. 그 문은 자동문 옆에 붙어 폭이 좁았고, 얕은 오르막이 있어 혼자 힘으로 휠체어를 들이기 벅찼다. 보다 못한 건물 청소부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5분은 더 고생해야 했을 터다. 건물에 들어서서도 엘리베이터까지 가는 복도에 굵은 전선을 가로질러 까느라 생긴 큰 턱이 있어 휠체어를 한번 크게 들어야만 했다. 노약자나 장애인이 혼자서 해낼 만한 일은 아니었다.간신히 은행에 들어서서도 수난은 계속됐다. 번호표를 뽑고 대기하는데, 모신 어르신께서 앉아 계시느라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하셨다. 하지만 수많은 창구 중 절반가량이 비어있어 앞번호가 빠지는 순서가 느렸다. 뭣보다 ‘노약자우선창구(휠체어거동, 임산부)’, ‘고령·장애인 금융소비자 전담창구’라고 적힌 창구에서도 우리를 외면한 채 정상적인 순번대로 고객을 받고 있었다. ‘고객 여러분들의 양해바랍니다’라는 문구는 어떤 고객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인지 궁금했다.기나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겨우 순번이 돌아왔다. 이제 계좌 업무를 위해 계좌주 본인의 서명이 필요했는데, 서명하는 태블릿과 휠체어의 높이가 맞지 않아 어르신께서 팔꿈치를 높이 올리셔야만 했다. 하지만 어르신의 어깨가 좋지 않아 이마저도 여의찮은 상황. 게다가 필요한 서명이 워낙 많아 가까스로 어르신께서 땀을 뻘뻘 흘리며 오랜 시간을 들여야만 했다. 창구 담당자의 안내 설명은 친절했어도 뾰족한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어르신께서는 어깨에서 울리는 고통 속에서도 직원의 시간을 뺏고 있다는 생각에 민망해하시는 마음이 앞선 눈치였다. 간신히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도 열리지 않는 자동문, 복도에 놓인 높은 턱으로 경비원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K은행에서의 불쾌한 경험은 금융권에서 여전히 금융 약자에 대한 배려, 인식이 부족하다는 현실을 깨닫게 했다. 만일 필자와 같은 조력자의 도움이 없었다면 은행을 방문하는 노약자·장애인 등이 혼자서, 급박한 상황의 은행 업무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을까. 예대마진에 의한 실적 잔치로 웃기 전에 진정 고객을 위한 금융 서비스를 철저히 하고 있는지, 은행이 스스로를 돌아볼 때인 것 같다.suc@ekn.kr

[기자의 눈] 원희룡 장관이 건협 아닌 전건협 찾은 의미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지난 8일 건설업계의 ‘건설현장 불법·부당행위’ 고발 증언 현장에 참석하기 위해 전문건설회관을 방문했다. 이날 건설노조의 공사방해 및 태업행위 등 불법 실태로 힘들어 했던 업계의 목소리가 이제야 정부의 귀에 닿았다는 듯 전문업계 관계자들은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박수갈채로 뜨겁게 원 장관을 맞이했다.화답하듯 원 장관은 "건설현장에서 가장 힘든 이들이 전문건설인들이다. 그런데 노조라는 간판을 단 세력들이 온갖 명목으로 업계에 빨대를 꽂고 있다"며 전문건설업계 고충을 함께 이해했다. 실제로 원 장관의 힘 있는 이런 발언은 전문업계 관계자들에게 큰 감동을 줬다는 후문이다.이 과정에서 원 장관은 "‘원청사’는 전문건설업계가 노조에게 당하는 동안 페이퍼업무만 하고 있었고, 수익만 가져가는데 그게 무슨 ESG경영이냐"라고 일갈했다. 여기서 원청사라고 하면 보통 원도급사를 말하고, 이는 즉 종합건설업으로 확대해석 할 수 있다.원 장관이 건설노조 불법행위를 비판하다가 원도급사까지 비난하자 가만있던 종합건설업계는 고기 씹다 혀 깨문 표정으로 뒤통수 맞은 모양새가 연출됐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각에선 종합건설업을 이끌고 있는 대한건설협회가 국토부와 소원한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게다가 건협이 건설업계 맏형 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들린다.의견은 분분하다. 건설노조는 본래 전문건설업인 철근·콘크리트공사업이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고 있다. 또한 윤학수 전건협 회장은 최근 취임했고 김상수 건협 회장은 내년 초면 임기가 종료되기에 현안을 두고 퍼포먼스 차이가 있는 건 당연하다는 시각이 있다. 게다가 이미 건협은 지난달 원 장관과 노조 관련 간담회를 한 적이 있기도 하다.그러나 중요한 것은 건협이 이번 계기를 통해 전건협에게 건설업계 주요 이슈와 관련 주도권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불안이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건설산업에선 건설노조 불법행위 외에도 건설산업 생산체계 개편 중 하나인 종합-전문업 상호시장 진출에 의한 수주 불균형 초래가 양측 간 현안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원 장관과 전문건설업계가 이번 행사를 계기로 끈끈한 유대감을 형성하게 되면 종합건설업 입장에선 좋을 것이 없다는 시선이다. 본래 종합건설사도 영세업체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갑’의 이미지가 강한 만큼 전문건설업계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높아 추후 원 장관과 조우할 날 건협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할 것이다.

[기자의 눈] "물은 들어왔는데 노를 저을 사공이 없다"

"물은 들어왔는데 노를 저을 사공이 없는 격이다."우리 조선업계는 친환경·고부가가치 선박에 대한 경쟁력을 바탕으로 수 년치 일감을 확보했다. 지난달에는 전 세계 선박발주의 74%를 수주하며 신바람을 냈다.그런데 정작 선박을 만들 사람이 없다. 산업부는 올해 말까지 조선업 생산 인력은 1만4000여 명 부족할 것이라 발표했다.조선소에 사람이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일한 만큼에 대한 대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통계청의 제조업조사에 따르면 2007년 기준 조선업 종사자 1인 평균 임금은 4340만원으로 제조업 평균(2910만원)의 1.5배 수준이다. 하지만 조선업 평균 임금은 장기간 불황으로 2019년까지 우하향했다. 2020년 기준 조선업 임금은 4620만원으로 전년 대비 600만원 올랐지만 제조업 평균(4780만원)에 미치지 못한다.조선업은 대표적인 3D 업종이다. 어렵고·더럽고·위험한 일이다. 공장 내 작업이 적고 옥외 작업 비중이 높은 만큼 날씨에 영향도 많이 받는다. 임금도 더 많고 덜 힘든 제조업에 사람이 몰리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조선하청지회 역시 "하청노동자의 저임금이 인력난의 핵심원인"이라고 지적한다. 그렇다고 조선사들이 임금을 깎으며 본인 배만 불린 것도 아니다. 2020년부터 시작된 카타르프로젝트로 수주 호황이 찾아왔을 때도 조선사들은 조 단위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조선업계 특성상 선박의 인도시기에 대금을 지급받고 실적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선박의 건조 기간은 짧게 잡아도 2∼3년이다. 일은 많아지는 데 임금은 적으니 인력은 빠져나가고 노사 갈등도 재점화됐다. 많은 수의 조선업 종사자들이 그나마 대우가 나은 한국조선해양 혹은 타 제조업으로 이직했고, 대우조선해양은 지난해 파업의 여파로 수 천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조선사들은 올해 흑자를 자신하고 있지만 평균 임금이 올라오는 데는 2∼3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정부가 도움의 손길을 건냈다. 고용부는 ‘조선업 상생 패키지 지원사업’을 통해 2년간 모든 하청근로자에게 400만원을 지원하고 임금을 최저임금 120% 이상으로 지급할 경우 기업에 월 100만원씩 채용장려금도 줄 계획이다.정부가 2년이라는 시간을 제공했으니 이제는 조선사들이 바뀔 차례다. 수익성을 극대화시키는 사업전략을 마련하고 ‘고노동·고임금’의 체계를 구축하지 않으면 2년 후에는 정말 아무도 남지 않을 것이다. 2년 뒤에도 우리나라가 조선업 세계 1위의 위상을 뽐낼 수 있기를 바란다.lsj@ekn.kr이승주 산업부 기자

[기자의 눈] SM 막차 탄 주린이는 웁니다

"갑자기 극적 합의라니 하한가 계속되면 어쩌죠?" "공개매수로 물량 다 넘길 수 있을까요?" "여기 16만원에 물린 사람 없죠?"SM인수전 종료 소식이 발표되자 SM 소액 주주들 사이에서 쏟아져 나온 질문들이다. 대부분 카카오와 하이브의 지분경쟁이 본격화하면서 급등한 SM 주식에 투자를 결정한 개인 투자자들이다. 카카오가 15만원에 공개매수를 그대로 진행하기로 하면서 어느 정도 주가 방어선은 유지될 것이라고 예상하는 투자자들도 많지만, 유통 물량을 공개매수로 전부 소화할 수 없어 주가가 급락할 경우 일부 투자자들의 손해는 예견된 일이라는 우려도 나온다.카카오와 하이브의 지분경쟁이 시작된 이래 SM 주식은 60% 이상 급등해 지난 8일 장중 16만1200원까지 올랐다. 누가 경영권을 차지하던 ‘승자의 저주’에 빠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지난 10일 결국 하이브는 SM인수를 포기하고, 카카오는 하이브와 파트너로서 다양한 협력관계를 이어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날 SM 주가는 하락세에 마감해 현재 13일 오전 10시 34분 기준 전 거래일보다 18.81% 하락한 12만원에 거래 중이다.하이브, 카카오 등의 지분을 제외한 유통 주식은 전체 지분의 70% 수준이지만, 카카오의 공개 매수 물량은 전체 35% 규모인 833만3641주에 불과하다. 카카오의 공개매수에 청약 물량이 대거 몰리면 카카오는 안분 비례해서 공개매수할 예정이다. 공개 매수를 원한다고 해도 보유 주식 모두를 15만원에 팔 수 없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하이브가 공개 매수에 응해 투자 차익을 거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분 인수 경쟁으로 급격히 오른 SM 주식은 적정 거래가를 찾아 하향 안정화 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 카카오의 경영권 확보 소식은 기업 가치 상승 측면에서는 긍정적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간 지속된 오너리스크를 해소하게 됐으며, 카카오라는 빅테크 공룡과의 사업 시너지가 기대되기 때문이다.중요한 것은 그동안 카카오와 하이브의 지분 인수 경쟁 과정에서 정작 K팝 팬들의 의사는 철저하게 외면받고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됐다는 사실이다. 실제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향한 권리 행사를 위해 SM에 투자를 결정한 팬들도 무수히 많다.SM이라는 기업의 정체성과 가치를 높이기 위해, 또 카카오와 SM의 ‘정보기술(IT)+지식재산권(IP)’ 라는 콘텐츠 사업 시너지를 극대화하기 위해, 카카오는 SM 인수 절차를 빠르게 마무리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카카오와 SM이 엔터 사업의 본질인 소속 아티스트와 팬덤, 그리고 개인 투자자들의 주주 가치 제고를 고려한 방향으로 K-콘텐츠 사업을 추진해 나가길 바란다.sojin@ekn.kr윤소진 산업부 기자.

[기자의 눈] 바이오헬스위원회 신설 앞서 풀어야 할 과제

정부는 지난달 28일 윤석열 대통령 주재로 ‘바이오헬스 신시장 창출 전략 회의’를 갖고 제약·바이오·헬스케어 분야 범정부 거버넌스인 가칭 ‘디지털바이오헬스혁신위원회’를 신설하겠다는 방침을 처음 공식화했다. 글로벌 제약바이오산업의 시장 규모(1600조원)는 반도체(700조원)·자동차(600조원)산업을 합친 것보다 크고,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국민보건을 넘어 국가안보에 직결된다는 인식이 확산됐던 터라 국내 제약바이오헬스 업계는 범정부 거버넌스 신설 추진을 크게 반겼다. 그렇다고 무조건 환영일색이 아니라는 점에서 정부가 새겨들어야 부분도 없지 않다. 디지털바이오헬스혁신위원회가 과연 명실상부한 범정부 컨트롤타워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업계에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실제로 이번 전략 회의에서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윤 대통령에게 보고한 ‘바이오헬스 신시장 창출 전략’은 복지부를 비롯해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업통상자원부, 특허청, 식품의약품안전처, 개인정보보호위원회 등 관계부처들이 각자 추진해 온 5대 핵심과제 16개 과제를 모아놓은 종합판이다.따라서, 각 부처의 과제 담당자들은 자신이 맡은 사업 외에 다른 사업은 잘 알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렇기에 컨트롤타워를 새로 두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그렇더라도 위원회 신설 계획을 보면, 국무총리와 민간위원장이 공동위원장을 맡지만 복지부장관이 간사를 맡는 등 설립 준비단계부터 운영까지 복지부가 주도적인 역할을 맡는다. 위원회 사무국 역시 국무총리실이 아닌 복지부 산하에 둔다. 이번 전략이 신시장 창출, 기업 육성, 수출 촉진에 방점을 두고 있지만 복지부는 ‘육성’보다 ‘규제’에 강점을 가진 조직이란 점에서 의구심이 제기되는 이유이다. 더욱이, 정부 부처와 협업해 본 경험이 있는 일부 민간 산업계 관계자들은 특정부처가 사업을 주도하면 동등한 위치의 다른 부처는 소극적으로 따르는 ‘관가의 고질적 병폐’를 우려하고 있다. 업계가 그토록 염원했던 디지털바이오헬스혁신위원회인 만큼 기존 부처별로 흩어져 있던 법정위원회의 통합과 단순 자문 기능을 넘어 미래 먹거리산업인 제약바이오헬스의 중장기 로드맵 수립부터 집행력을 아우르는 진정한 컨트롤타워가 탄생하기를 바란다. kch0054@ekn.kr김철훈 유통중기부 기자

[기자의 눈] 尹정부 징용 해법안, 한일 정상화의 재물인가

"나 곧 지하철 역 도착하거든? 빨리 나와줘."몇 년 전 어느 날 밤. 친한 친구가 전화를 걸어 급하게 마중을 나와달라고 했다. 사연을 들어보니 ‘전단지 아르바이트 구합니다’라는 공지를 보고 지원한 게 화근이었다. 공고를 올린 사람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에 나갔더니 검은 봉고차 한 대가 나타났다고 했다. 친구는 ‘뭐지? 조금 이상한데?’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별 일은 없겠지’라고 스스로 안심하며 탑승했다. 수상한 사람들과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키스방’.친구는 상황파악도 하기 전에 사람들 손에 밀려 작은 방으로 내던져 졌고 무작위로 배치된 ‘손님’이라는 자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틈을 타 부리나케 도망쳤다. 무작정 큰 길로 달려 택시를 탄 뒤 가까운 지하철 역에 내려서 오는 길이라고 했다. 정신이 없던 친구에게 따듯한 국밥을 사주고 조금 진정됐을 쯤 귀가했다.명백한 범죄다. 진작 알았으면 지원하지도 않았을 일인데 사람을 속여가면서 납치까지 했으니 말이다. 궁금했다. 저 조직들은 아직도 일말의 죄책감 없이 저렇게 범죄를 저지르고 다닐까. 물론 누군가는 친구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피해자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저들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건 아니다. 친구가 도망치지 않았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 지 모른다.최근 정부는 명백한 피해사실과 피해자가 있음에도 옳지 않은 해결책을 제시했다. ‘일제 강제징용 배상 해법안’이다. 윤석열 정부는 강제징용 해법으로 2018년 대법원으로부터 배상 확정판결을 받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국내 재단이 대신 판결금을 지급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피해자에게 배상해야 할 재원을 가해자가 아닌 ‘제3자’를 통해 지급하겠다는 말이다.자세히 말하자면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한국 기업 기부로 마련한 기금으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배상금을 마련한다는 거다. 곧바로 ‘반쪽 해법’이라는 비판이 거셌다. 정부의 해법안을 납득하기 어렵다. 일본이 전범국가이고 일본기업이 전범기업인데 왜 국내 기업이 배상금을 마련하고 국내 재단이 변제를 해야 하는지 말이다. 분명 가해국가와 피해국가가 있는데 피해국가의 정부가 수습을 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한 가지 문제가 더 있다. 사과를 인정하는 주체도, "해결됐다"고 사안을 매듭지을 주체도 피해자다. 지금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해결됐다"고 인정한 적이 없다. 피해자들의 요구는 하나다. 금전적 배상을 넘어선 도의적 배상이다. 일본이 마음을 다 해 잘못을 뉘우치고 사과하는 ‘진정성’을 보이기를 기다리고 있다. 일본이 사과를 하지 않았다는 게 아니다. 그동안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 고이즈미 담화 등이 있었다. 수많은 사과 속에 ‘강제 동원’ 여부를 인정한 적은 없다. ‘반쪽 사과’에 불과한 셈이다.정부는 그동안 피해자 입장을 존중하면서 한일 양국의 공동 이익과 미래 발전에 부합하는 방안을 모색해온 결과라고 설명했다. 물론 한일관계 정상화는 필요하다. 하지만 역사 문제는 따로 놓고 봐야 한다. 일본은 외교·경제협력을 인질로 내세워 역사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묻고 가려 한다. 지지율이 ‘1%’만 나오더라도 해야 할 사안이 아니다. ‘피해자를 외면한 피해 배상’은 있을 수 없다. 역사 문제 해결의 원칙과 피해자 인권, 국민의 품격을 버리는 외교방안은 정상화의 탈을 쓴 요행일 뿐이다.claudia@ekn.kr

[기자의 눈] RE100을 자발적 캠페인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을까

RE100은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을 2050년까지 재생에너지 전력으로 100% 전환하는 자발적인 캠페인이라고 RE100을 추진한 국제단체 ‘탄소정보프로젝트(CDP)위원회’가 정의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RE100을 정말 자발적 캠페인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국내에서 RE100이 자발적 캠페인이 되기 어려운 이유는 비싼 재생에너지 전기요금 때문이다. 기업이 비싼 전기요금을 자발적으로 지불하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RE100에 대해 성급했다. 반강제로 정부와 기업을 RE100으로 몰아가는 분위기다. RE100을 하지 못하면 기업들이 국제시장에서 도태된다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지난 2021년 문재인 정부 당시 기업들이 RE100을 이행할 수 있는 수단도 만들었다. 여기서 조그만 성과가 나와도 정부와 기업은 홍보에 열을 올렸다. 잘 안된다 싶으면 정치권은 RE100 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언론 또한 여기에 끼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3월 20대 대통령 선거 때 당시 이재명 대선 후보가 토론회에서 RE100을 언급하면서 RE100 이슈에 대한 관심은 정점을 찍었다. RE100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기업들의 부담으로 이어졌다. 최근 대한상공회의소는 재생에너지 전력구매계약(PPA)을 맺은 기업에 전기요금을 너무 높게 선정했다며 요금 인하 요청 건의서를 정부에 전달했다. 일반 전기를 비싼 값에 쓰고 재생에너지 사용 실적을 인정받는 녹색프리미엄으로 RE100을 추진하려는 기업은 전기요금을 약 10% 추가로 내야 한다. 하지만 녹색프리미엄으로는 온실가스 감축 실적을 인정받지 못한다. RE100과 온실가스 감축을 함께 하고 싶다면 신재생에너지공급인증서(REC)를 구입해야 한다. 대신 탄소배출권보다 10배 더 비싼 가격으로 살 수밖에 없다. 결국 기업이 RE100을 자발적으로 이행하려면 재생에너지 전기요금이 다른 에너지원으로 생산한 전기요금과 비슷해져야 한다. 기업이 재생에너지 전력을 쓰는 게 더 싸다면 RE100 하지 말라고 해도 할 것이다. 이게 자발적인 캠페인이다. 정치권은 RE100에 관심을 두는 만큼 재생에너지 전기요금을 낮추는데도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게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재생에너지 생산비용을 낮추는 데 관건 중 하나는 재생에너지 설치 지역 인근의 주민을 설득하는 일이다. 지역 주민이 반대하면 재생에너지 설치비용을 오를 수밖에 없다. 과연 정치인 중에서 재생에너지 설치를 위해 지역주민을 설득하는 일에 힘을 쏟는 이가 얼마나 될까 싶다.wonhee4544@ekn.kr이원희(증명사진)

[기자의 눈] ‘반도체 산업 지원’ 우리도 선 넘어보자

청첩장을 받았다. 성대한 결혼식이다. 축의금은 필요 없단다. 오히려 용돈을 두둑이 챙겨준다니 솔깃하다. 초대에 응했다. 그제야 이런저런 말이 나온다. 앞으로는 다른 결혼식에 가지 말란다. 행사 도중 참석자가 무슨 색깔 속옷을 입었는지 수시로 검사한다고 한다. 감정이 상한다. 거절할까 생각하는데 상대가 인상을 구기며 주먹을 쥐고 있다. 우리나라 반도체 업계가 처한 상황이다. 미국 정부가 최근 반도체지원법 세부 내용을 공개했다. 보조금을 줄 테니 중국에서는 반도체를 사실상 만들지 말라는 게 핵심이다. 자신들이 원하면 내부 정보도 들여다보겠다고 했다. 초과 이익은 반납해야 한다. 배당이나 자사주 매입까지 규제하겠다고 하니 ‘선을 넘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입장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중국이 최대 수요처긴 하지만 미국의 기술력 없이는 반도체 제작이 어렵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이미 미국 텍사스주에 최첨단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 중이다. 정부도 마땅히 할 수 있는 게 없다. 중국을 완전히 누르고 반도체 패권을 장악하겠다는 미국의 의지가 너무 강력하다. 완성차 업계를 긴장하게 했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 오버랩된다. 동맹이라는 단어는 한없이 가볍게만 느껴진다. 외교 역량을 총동원해 우리 기업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해 보인다. 미국과 중국의 노골적인 압박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우리나라가 경제의 근간인 반도체 산업 경쟁력을 포기할 수도 없다. 정부·국회도 ‘선을 넘는’ 생각을 해야 한다. 상식을 뛰어넘는 수준의 전폭적인 지원책을 마련해보자는 뜻이다. 결혼식장 안에서는 강대국들이 총을 들고 싸우고 있을 게 분명하다. 우리 기업들만 몽둥이 하나 들고 들어가게 할 수는 없다. 이런 와중에 ‘K-칩스법’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반도체 설비투자 세액공제율을 현행 8%에서 15%로 높이자는 내용이다. 답답하다. yes@ekn.kr2023012901001323300060631 여헌우 산업부 기자

[기자의 눈] 금융사는 관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금융사는 관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금융사의 한 관계자가 최근 기자에게 한 말이다. 정부의 금융권에 대한 전방위적 압박이 이어지고 있는 것에 대한 답변이었다.정치권에서도 의견이 나뉜다. 윤석열 정부에서도 시장 자율성을 거스르는 ‘관치금융’의 역사가 되풀이되고 있다는 평가와 고금리로 지나치게 돈을 번 은행과 카드사, 증권사, 보험사 등의 ‘과도한 이자장사’를 비판하고 압박하는 건 당국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의견이 맞서는 중이다.당국이 금융권에 본격적으로 ‘칼’을 겨누기 시작한 것은 ‘성과급 잔치’ 논란이 터지면서다. 이에 당국은 경영·영업 관행·제도 개선 태스크포스(TF)‘ 운영을 시작으로 금리산정체계와 성과보수를 점검·검토하기로 했다. 소비자들이 합리적인 수준에서 금융사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금융사 내부에서는 달갑지 않은 모습이다. ‘금리’를 내리는 것에 대해선 소비자들을 위해 당연한 조치라면서도 ‘성과급’까지 문제 삼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목소리가 높다.금융사들은 지난해 금리인상기에 맞물려 어려운 시기를 보냈지만, 내부에서는 영업 확대, 상품개발 등은 물론, 리스크 관리를 위한 내부 다이어트도 진행하는 등 정신 없는 한 해를 보냈다고 한다. 성과급은 각 사 구성원들이 노력해서 일궈낸 성과에 대한 보상인데, 당연히 기존 산정체계에 따라 지급 받아야 하는 것이 맞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거세지는 이유다.정부의 잘못은 금리 인하를 요구한 게 아니라, 방식이 틀렸다는 것이다. 기업 자체의 고유 권한을 침해하면서까지 압박을 가하면서 ‘금리’를 내릴 게 아니라, 자율적으로 금리인하에 동참하도록 했어야 했다. 인사도 마찬가지다. 우리금융그룹 회장에 임종룡 전 금융위원장, 한국예탁결제원 사장에 금융연구원 은행보험연구2실장이 내정됐다는 소식을 시작으로 ‘역시나, 낙하산’이라는 얘기가 퍼져나갔다. 윤 정부는 대선 후보 시절 ‘시장 자율성’을 그 무엇보다 강조했다. 과연, 지금 현재의 모습이 시장 자율성을 지켜주고 있는 것인지 다시금 생각해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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