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반도체 전쟁, 한국의 선택은 [곽인찬의 뉴스가 궁금해?]](http://www.ekn.kr/mnt/thum/202306/2023060901000460200022601.jpg)
<요약> 미·중 반도체 전쟁의 불똥이 한국으로 튀었다. 주한 중국 대사의 ‘도발적인 언행’이 논란을 불렀다. 당장 마이크론 이슈가 코앞에 닥쳤다. 단기적으론 미국과 한 배를 타는 게 현명해 보인다. 장기적으론 중국의 반도체 굴기 전략을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관건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반도체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다. 그래야 국익을 지킬 수 있다. 미·중 패권 경쟁, 특히 반도체 전쟁이 한·중 갈등으로 번졌다. 싱하이밍 주한 중국 대사는 8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듣는 자리에서 "일각에서 미국이 승리하고 중국이 패배할 것이라는 베팅을 하고 있다"며 "단언할 수 있는 것은 현재 중국의 패배에 베팅하는 이들이 나중에 반드시 후회한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외교관이 한 말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직설적이다. 중국이 핵심이익으로 여기는 대만 문제에서도 한국은 미국 편에 섰다. 중국 외교부는 9일 "현재 중한 관계는 어려움과 도전에 직면해 있으며 책임은 중국에 있지 않다"며 싱 대사를 두둔했다. 한국 외교부는 즉각 반응했다. 9일 외교부는 "장호진 1차관이 싱 대사를 외교부 청사로 초치해 싱 대사의 외교 관례에 어긋나는 비상식적이고 도발적인 언행에 엄중 경고하고 강력한 유감을 표명했다"고 밝혔다.집권 국민의힘은 9일 더 격한 반응을 보였다. 김기현 대표는 특히 이 대표를 겨냥해 "싱 대사가 작심한 듯 대한민국 정부를 비판하는데도 이 대표는 짝짜꿍하고 백댄서를 자처했다"며 "교지를 받들듯 고분고분 듣고만 있었다"고 말했다. 당내에선 "청나라의 위안스카이처럼 막말" "오만의 극치" "삼전도의 굴욕" "겁박, 훈수, 조공" 이란 말까지 나왔다.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은 G2 패권 경쟁을 승리로 이끌 비장의 카드로 반도체를 꺼냈다. 반도체는 산업 경쟁력은 물론 국가 안보의 핵심 변수로 떠오른 지 오래다. 한국은 반도체 강국이다. 싫든 좋든 미·중 패권 다툼의 한복판에 서게 됐다. ‘싱하이밍 논란’은 그 전초전이다. 당장 코앞에 마이크론 이슈가 닥쳤다. 한국은 어떤 길을 가야 할까?◇ G2 반도체 전쟁바이든 대통령은 전임 트럼프 대통령과 스타일이 딴판이지만 한가지는 똑같다. 바로 중국 때리기다. 지난해 8월 바이든 대통령은 이른바 칩스법(CHIPS Act)에 서명했다. 미국 반도체 산업 중흥이 목표다. 이어 10월엔 대중 반도체 통제 조치를 발표했다.사실 미국 반도체 산업은 지금도 세계 최강이다. 바이든은 한발 더 나아가 중국이 첨단 반도체 기술에 접근하는 통로를 아예 막으려 한다. 동시에 한국, 일본, 대만, 네덜란드 등 동맹에게도 동참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지난 5월 일본 히로시마에서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가 열렸다. 윤석열 대통령도 초청국 정상으로 참석했다. G7 공동성명은 대중 경고문구로 가득 찼다. 그 직후 중국은 반격의 포문을 열었다. 미국 반도체 업체인 마이크론의 제품 구입을 금지했다. 마이크론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이어 세계 3위 메모리 기업이다. 2022년 기준 마이크론 전체 매출에서 중국 시장은 11%가량을 차지한다. ◇ 한국에 불똥마이크론 퇴출은 곧장 한국으로 불똥이 튀었다. 마이크 갤러거 하원 미중전략경쟁특위 위원장은 5월 23일 성명을 내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마이크론의 빈자리를 채워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이어 6월 2일엔 마이클 매콜 하원 외교위원장과 갤러거 위원장이 합동으로 지나 러몬도 상무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일본과 한국 기업들이 마이크론 시장점유율을 가져가선 안 된다고 말했다. 6월1일 로버트 앳킨슨 정보기술혁신재단(ITIF) 회장은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주최한 대담에서 "중국이 우리를 응징하는 상황을 한국 기업들이 이용하면 한·미 간에 신뢰를 무너뜨려 큰 문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 SK하이닉스는 우시에 D램 반도체 공장을 두고 있다. 반면 중국은 어떻게든 한국을 미국에서 떼어놓으려 애를 썼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지난 5월 26일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무역장관 회의에서 왕원타오 중국 상무부장을 만났다. 회동이 끝난 뒤 중국 측은 "양측은 반도체 산업망과 공급망 영역에서의 대화와 협력을 강화하는 데 동의했다"고 발표했다. 물론 한국 측 설명은 결이 다르다. 중국 관영매체 글로벌타임스는 5월 29일자 칼럼에서 한·중 양국이 반도체 협력을 강화하려면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마이크론) 구멍을 메워주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딜레마에 빠진 한국한국 정부는 마이크론 이슈에 대해 공식 입장을 밝힌 적이 없다. 5월23일 파이낸셜타임스(FT)는 "중국의 마이크론 제재로 인한 공백을 한국 기업들이 메울 수 있다는 신호를 한국이 보냈다"라고 보도했다. 산업부는 곧바로 이를 부인했다. 산업부는 "정부는 현재 (마이크론 제재) 관련 상황을 파악하는 중이며, 이에 관한 우리 정부의 전망 및 대응계획에 대해서는 밝힌 바 없다"고 말했다.이와 관련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은 주목할 만하다. 윤 대통령은 8일 ‘반도체 국가전략회의’에서 "반도체 전쟁은 단순한 경쟁이 아니라 산업 전쟁이며 국가 총력전"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근 지정학적 이슈가 기업들의 가장 큰 경영 리스크가 되고 있다"며 "이는 기업 혼자 해결할 수 없는 문제고,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들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긴밀한 소통을 통해 풀어가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우방국과 협력 강화’는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공조에 동참을 시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윤 대통령이 전략회의를 주재한 날 싱하이밍 대사의 문제 발언이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 지금은 미국과 한 배 타는 게 국익에 부합우리 앞에 놓인 선택지는 단기와 장기로 나눌 수 있다. 우선 단기적으로 보면 한국은 미국 편에 서는 게 유리하다. 미국은 군사, 경제 모두 세계 최강이다. 이같은 지위는 꽤 오랫동안, 적어도 10년 이상 지속될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반도체 종합경쟁력도 미국이 압도적인 1위다. 한국이 메모리 반도체, 대만이 로직 칩(시스템 반도체) 생산에서 선두를 달리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반도체는 생산 못지 않게 설계, 설계용 소프트웨어, 장비 기술력이 중요하다. 인공지능(AI) 시대의 총아로 떠오른 엔비디아는 그래픽처리장치(GPU) 설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다만 생산만 대만 TSMC에 위탁할 뿐이다.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는 세계 1위 장비업체로 꼽힌다. 퀄컴이 설계하는 통신용 칩은 스마트폰 시대를 활짝 연 일등공신이다. 인텔과 마이크론도 건재하다. 크리스 밀러 미 터프츠대 교수는 "미국이 만드는 장비 없이 최첨단 반도체를 생산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칩워’).미국은 설사 우방이라도 반도체 1위 자리를 넘겨줄 생각이 없다. 1980년대 일본 반도체 산업이 미국을 능가했다. 당시 모리타 아키오 소니 회장은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란 책을 써서 미국을 격분시켰다. 미국과 일본 사이가 벌어진 틈을 한국과 대만이 파고 들었다. 미국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한국이 메모리, 대만이 로직 칩 생산대국으로 성장하는 걸 간섭하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세계 반도체 시장을 쥐락펴락하는 건 미국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향후 중국 공장을 업그레이드하려면 미국산 장비를 들여오는 게 필수다. 국내 공장도 마찬가지다. 현재로선 미국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게 국익에도 부합한다. 마이크론 공백을 한국 기업이 메우지 말라는 요구는 수용이 바람직해 보인다.장기적으론 중국의 반도체 경쟁력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성장할지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중국은 ‘제조 2025 전략’에 따라 첨단 기술 육성에 온힘을 쏟고 있다. 그 중에서도 핵심은 반도체 굴기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는 얼마전 파이낸셜타임스(FT)와 인터뷰에서 "만약 (중국이) 미국에서 (반도체를) 살 수 없다면 그들은 스스로 그걸 만들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 제이미 다이먼 JP모건 체이스 회장도 대중 디커플링 전략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 디커플링은 중국을 글로벌 공급망에서 배척하는 것을 말한다.미국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2022년 12월 보고서에서 "중국이 오는 2035년께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 경제국이 될 것"으로 예측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산하 싱크탱크인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은 중국이 오는 2039년 국내총생산(GDP) 규모에서 미국을 따라잡을 것으로 내다봤다. 정확한 시점이 언제이든 중국이 미국과 기술력 격차를 줄여나갈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 한국이 살 길은 오직 기술력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것은 역설적으로 한국 기업의 반도체 경쟁력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뜻이다. 기술력이 낮으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윤 대통령은 "다자 정상회의에 가면 많은 나라가 우리나라와 양자회담을 원하고, 여러 가지로 손짓하는데 왜 그렇겠냐"면서 "다 우리가 가진 기술, 기업의 경쟁력 덕분"이라고 말했다. 단기전략이든 장기전략이든, 미국이든 중국이든 한국의 선택 기준은 딱 하나, 바로 국익이다. 국익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기술력을 우리가 갖추고 있을 때라야 지킬 수 있다. 크리스 밀러 교수의 말을 곱씹어보자. "중국 시장에 대한 접근을 계속 이어나가는 것은 매출 유지에 있어 필수적인데, 그러자면 한국 기업은 중국이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기술 수준과 격차를 유지해야 한다. 반도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려면, 한국 기업은 기술 우위를 지켜나가기 위해 더 노력하는 길뿐이다."<경제칼럼니스트>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8일 저녁 서울 성북구 중국 대사관저에서 싱하이밍 주한 중국 대사를 만나고 있다. 싱 대사는 "중국의 패배에 베팅하는 이들이 나중에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사진=연합뉴스윤석열 대통령이 8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제17차 비상경제민생회의 겸 반도체 국가전략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반도체 전쟁은 단순한 경쟁이 아니라 산업 전쟁이며 국가 총력전"이라고 말했다. 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