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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요금정상화·개혁’ 한전 신임 사장에 거는 기대

한국전력공사 신임 사장 공모가 마감됐다. 정승일 전 사장이 재무 악화 책임과 함께 떠밀리듯 사퇴한 만큼 선뜻 지원할 인사가 없을 것이란 우려도 있었지만 복수의 인사가 지원하면서 예정대로 선임 절차가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신임 사장은 누적된 한전 적자를 해소하고, 내부 조직·제도 개혁 등 여러 현안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관료 출신보다는 유력 정치권 인사가 선임될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신임 사장이 누가되든 임명 직후 ‘전기요금 정상화’ 과제에 맞닥뜨릴 전망이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 당시부터 ‘시장원칙이 작동하는 에너지 시장’을 주창했기 때문이다. 현 정부는 지난 정부가 ‘에너지전환(탈원전)에 따른 전기요금 인상은 없다’며 5년간 요금 인상을 막았다며 강하게 비판해왔다. 지난 정부에서 임명된 사장에게 적자의 책임을 씌워 임기가 남았음에도 쫓아낸 만큼 현 정부에서 임명한 신임 사장은 뭔가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현재 국제유가와 천연가스 가격 등 연료비가 떨어지고 전기요금도 소폭 오른데다 통상적으로 가장 실적이 좋은 3분기가 됐지만 한전 직원들의 표정은 여전히 어둡다. 시장에서는 한전이 오는 3,4분기 흑자에도 불구하고 올해도 연간 7조원대 적자를 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누적된 적자를 감안하면 50조원에 달해 연말에는 자본잠식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까지 제기된다. 누적적자 해소를 위해서는 여전히 남은 3,4분기에도 최소 각각 킬로와트시(kWh)당 10원 이상 인상이 필요하다. 그러나 3분기는 전력사용량이 가장 많고, 4분기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있어 당정이 인상을 단행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신임 사장이 이를 어떻게 해결할지 주목된다. 한전은 적자와 요금문제 외에도 2050 탄소중립 목표달성을 위한 재생에너지 확대, 시장제도 개혁, 에너지신산업 육성, 에너지규제거버넌스 혁신 등 수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 한전은 신임 사장 자격으로 △경영·경제, 전력산업에 대한 전문적 지식과 이해력을 소유하신 분 △경영혁신 주도할 수 있는 개혁 지향적 의지와 추진력 가지신 분 △공공성과 기업성을 조화시켜 나갈 수 있는 소양이 있으신 분 △대규모 조직 이끌 수 있는 리더십과 비전제시 능력을 내걸었다. 부디 한전을 잘 이끌어 줄 신임 사장이 선임되길 기대한다. jjs@ekn.krclip20230427101231 전지성 정치경제부 기자.

[데스크 칼럼]

정당의 핵심 집권전략은 지지층을 넓히는 것이다. 새 지지자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내야 한다. 산토끼를 찾아나서야 한다는 뜻이다. 결국 산토끼를 누가 많이 잡느냐가 승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아쉬운 입장에서야 산토끼든 집토끼든 모두가 소중하다. 둘 다 잡기도 말처럼 쉽지 않다. 다만 굳이 선택해야 한다면 우리 현실정치에선 산토끼보다 집토끼를 잡는 게 더 중요하다. 남의 표를 끌어오기보다는 우리 표를 빼앗기지 않는 게 우선이다.이 원칙은 우리 정치 지형과 무관치 않다. 우리나라 전체 유권자의 기본적인 이념성향은 대략 보수와 진보가 각각 45%대 45%이고 나머지 10%는 중도다. 정당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금 양당 중심 체제라면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지지성향도 그 비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역대 선거 결과가 그랬다. 선거 때 후보 경쟁관계, 이슈 등에 따라 이 비율이 조금씩 조정돼 어디 한 쪽으로 기울면서 승부가 결정 났다. 이념 성향은 좀처럼 상대 진영으로 바뀌지 않는다. 특정 진영 지지자가 해당 진영에 실망했다고 해서 상대 진영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그냥 중도로 대기하고 있다가 그 실망 요인이 사라지면 다시 원래 진영으로 돌아간다.이런 상황에서 우리 표를 지키려면 상대 당을 거세게 몰아붙여 우리 표를 다지는 게 효율적이다. 상대방에 대한 무차별 공격을 통해 우리 측이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하게 방어 전선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우리나라 각 정당들은 이처럼 각 진영의 표를 결집시키기 위해 오랫동안 이른바 ‘가두리 정치’를 해왔다. 가두리 정치는 국민들을 한 쪽 진영에 묶어두고 이탈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넓은 바다나 강 등에 그물을 치고 그 그물 안에 물고기를 가두어 기르는 가두리 양식처럼 말이다.고상하게 말하면 심리학의 인지부조화이론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개인의 신념·태도·행동이 서로 맞지 않으면 느끼게 되는 불편감을 줄이려고 하는 심리를 이용, 가두리 정치로 개인의 기존 신념·태도·행동을 강화한다는 의미다. 정치권은 이 가두리 정치를 위해 특정 프레임을 짜 갈라치기한다. 지역·세대·계층 등의 편을 갈라 상대방을 적으로 몰면서 자기편을 열광하게 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게 이재명 민주당 대표 ‘개딸’(개혁의 딸), 문재인 전 대통령 ‘대깨문’(대가리가 깨져도 문재인), 박근혜 전 대통령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 노무현 전 대통령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 등이다. 처음엔 단순히 누구를 사랑하는 지지모임이었던 게 해를 거듭하면서 상대를 배격하는 극단적인 세력으로 자리잡아왔다. 실제 개딸이 얼마 전 같은 진영 내 다른 세력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수박’(겉과 속이 다른 인물) 색출에 나선 적도 있다.특정 정치인의 팬덤은 2000년대 들어 본격화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대중문화를 중심으로 이어져오던 대중스타 지지세력 ‘오빠부대’ 현상이 노무현 정권을 탄생시킨 16대 대선 때 정치권으로도 옮겨왔다.정당 또는 정치인은 최근 들어 당초 거리를 둬온 팬덤(특정한 인물이나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현상)에 의존, 진영을 결집시키고 세력을 확장한다. 가두리 정치를 위해선 가짜뉴스·괴담 등을 적극적으로 전파하고 선동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이는 자극적이고 일방적인 입장을 전달하며 수퍼챗(라이브방송 직접 후원 기능) 수익 등 실속을 챙기는 유튜버들이 활개를 치게 한다. 그 사이 국민의 사실 접근이 방해받고 과학적 사고가 마비된다. 당연히 사회혼란을 부르고 국력은 낭비될 수밖에 없다. 과거 유모차 부대를 거리로 나서게 하고 촛불집회를 요란하게 열었던 광우병 사태 등의 결과가 어땠나. 정치권은 그 혼란과 피해를 국민에게 안겨주고도 책임지는 사람 아무도 없이 가두리 정치의 또 다른 이슈로 희생양 찾기에 정신이 빠져 있다.가두리 정치 상황에선 각 진영 내 다른 목소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구조적으로 내부 견제 도 이뤄질 수 없다. 민주당은 금태섭 전 의원에 본때를 보여줬다. 공직자비리수사처 설치법 처리의 당론을 따르지 않고 기권한 게 죄목이다. 국민의힘에선 이준석 전 대표가 조리돌림 당한 뒤 내쳐졌다. 당 대표로서 윤석열 대통령을 만들고도 윤 대통령을 수차 공개 저격한 이유로 미운털이 박혔다. 가두리 정치의 원조 수단은 지역감정이다. 정치의 지역감정 악용은 국민의 의식을 갈기갈기 찢어놨다. 영남·호남·충청 등의 정치색은 각 지역의 맹주 역할을 한 김영삼·김대중·김종필 등 3김이 사실상 결정했다. 그런 정치색은 3김이 모두 이 세상을 떠나고 없는데도 그 그림자가 아직까지 짙게 드리워져 있다.보수정권은 안보·성장, 진보정권은 환경·복지를 프레임으로 내걸어 유권자들을 각 진영에 가둬놓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보수 정권이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 든 바로 북풍(北風) 카드 등으로 하락세였던 지지율의 반전을 시도했다. 2020년의 서해 공무원 피격사건과 2019년 탈북 어민 북송사건 등 대응과정의 문제점을 집중 부각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세 차례 정상회담을 한 문재인 정부의 대북 유화 정책을 전면 폐기하고 대북 강경대응 노선을 분명히 했다. 윤 대통령은 ‘반국가 세력’까지 언급하며 안보의식 고취에 나섰다.이재명 대표는 최근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관련 이슈화로 자신의 ‘사법리스크’에서 돌파구를 찾고 있다. 여권으로부터 ‘괴담’ 전파의 진원지로 지목받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윤석열 정부의 일방적인 대일관계 개선 행보를 비판하는데 화력을 모으고 있다. 장외투쟁까지 주도하면서 오염수 관련 ‘핵 폐수’, ‘방사능 테러’ 등으로 규정했다. 오염수의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는 전문가들엔 ‘돌팔이’란 딱지를 붙였다. 각 진영은 가두리 정치에 빠져 보수는 평화논의의 판을 걷어찼고 진보는 먹거리 밥상을 뒤엎었다. 정치권이 가두리 정치에 매몰돼 안보나 먹거리 가지고 장난치는 것에 대해선 마땅히 준엄한 심판이 따라야 한다. 양 진영이 총력을 쏟고 있는 가두리 정치의 효과는 갈수록 작아진다. 일방적인 대북 강경정책은 안보 불안의 역효과를 키우고 감성적인 일본 오염수 반대론은 거꾸로 먹거리 불안을 부채질하고 있다. 북한이 시도 때도 없이 미사일을 펑펑 쏘아대는 것이나 개방경제에서 어처구니없는 소금 사재기가 일어나는 게 그 사례다. 국민들도 가두리 정치에 이제 점차 등을 돌리고 있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양 진영이 그토록 공을 들인 안보 팔이 또는 안전 장사의 효과는 기대만큼 크지 못한 것 같다.그런데도 정치권은 아직 가두리 정치에서 벗어날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진영 간 갈등·대립·반목·분열만 갈수록 커져갈 뿐이다. 그냥 서로가 앞으로 나란히다. 각자 앞만 보고 제 갈 길만 간다는 뜻이다. 옆을 보고 대화와 타협을 하며 갈등을 해소하는 정치본령은 이미 실종됐다. 아니 죽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1년을 넘기고도 아직 원내 절대 다수당인 민주당의 이재명 대표와 만나 둘이 밥 한 번 먹은 적 없다. 그런 우리 정치에 뭘 기대하겠나. 현 정부의 주요 정책은 사사건건 국회에서 막히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개혁에서 식물정부나 다름없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 몫이다. 어떤 이유로도 온당치 않다.결국 국민들이 똑똑해져야 한다. 무엇보다 사실 확인과 과학적 사고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객관적이면서 공정한 시각으로 유연한 입장을 갖는 게 필요하다. 사실 진영이 밥 먹여주는 건 아니다. 가두리 정치에 갇혀 인질로 잡혀 있는 동안 그 상처와 피해는 깊고 넓었다.국민은 선거 때만 되면 주권자로서 어깨가 으쓱해진다. 그러나 냉정하게 보면 가두리 정치에서 국민은 한낱 물고기일 뿐이다. 주권자인 국민의 표를 먹고 사는 대리인, 바로 정치인이 양식하는 그 물고기 말이다. 그저 정치인 낚시나 양식의 대상인 셈이다. 국민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불쾌하고 참담한 일이다. 국민이 그런 물고기 신세 안 되려면 정신 바짝 차리는 수밖에 없다.

소수인종 우대정책 폐지,더 팍팍해진 미국[곽인찬의 뉴스가 궁금해?]

<요약> 미국 연방 대법원이 소수인종 우대 정책을 위헌으로 판결했다. 앞으로 흑인과 히스패닉 학생들은 명문대 입학의 문이 더 좁아졌다. 백인과 아시아계 학생들에겐 문이 더 넓어졌다. 이번 판결은 기업 채용 관행에도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수십년 간 미국의 관용과 다양성을 상징해온 정책이 폐지된 것은 못내 아쉽다. 공무원 채용과 대학입시에서 소득과 지역에 따라 일부 계층을 우대해온 한국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소수인종 우대 정책 폐지로 미국이 시끌벅적하다. 미국 연방 대법원은 6월 29일(현지시간) 사립 하버드대와 공립 노스캐롤라이나대가 시행 중인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이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두 대학이 입학 전형에서 흑인과 히스패닉계를 부당하게 우대하고 백인과 아시아계를 차별했다고 봤다. 이것이 평등보호(Equal Protection)를 규정한 수정헌법 14조를 위반했다고 본 것이다.조 바이든 대통령은 "정상적인 법원이 아니다"라며 "법원의 결정에 강력히 반대한다"고 거친 반응을 보였다. 현재 대법원은 전체 9명 중 보수 6명, 진보 3명으로 구성돼 있다. 보수 공화당 출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남긴 유산이다. 앞서 지난해 5월엔 대법원이 낙태 허용 판례를 뒤집을 거란 보도가 나왔다. 낙태와 소수인종우대 정책은 내년 미국 대선에서 뜨거운 이슈가 될 것으로 보인다.이번 판결은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도 대학입시와 공무원 채용에서 소득과 지역을 기준으로 일부 계층을 우대한다. 장차 이민자가 늘면 인종이 기준으로 등장할 수도 있다. 이 경우 미국처럼 치열한 찬반 논쟁이 예상된다.◇ 어퍼머티브 액션이 뭔가1961년 진보성향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행정명령(10925호)에 서명했다. 공무원을 채용할 때 인종, 신조, 피부색, 출신국에 상관없이 공평하게 선발하는 ‘적극적인 행동’(Affirmative Action)을 취하라는 내용이다. 1965년 민주당 출신 린든 존슨 대통령 역시 비슷한 내용의 행정명령(11246호)를 발동했다. 1960년대는 미국 민권운동이 꽃을 피운 시기다. 1963년 8월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수도 워싱턴 DC에서 저 유명한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I hava a dream)라는 연설로 미국은 물론 세계인의 심금을 울렸다. 이어 1964년 역사적인 민권법이 시행됐다. 민권법은 인종, 피부색, 종교, 성(性)에 따른 차별을 금지했다. 자연스럽게 어퍼머티브 액션은 미국의 다양성을 상징하는 정책으로 기업 채용과 대학 입시에 뿌리를 내렸다. ◇ 소수인종 우대는 정의에 부합하는가어퍼머티브 액션은 줄기차게 위헌 논란에 휩싸였다.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는 명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한 장(제7장)을 이 논쟁에 할애했다. 찬성론자들이 제시한 논거는 세가지다. 첫째, 시험 격차 바로잡기다. "사우스브롱크스의 열악한 공립학교에 다닌 학생이 학업적성시험(SAT)에서 700점을 받았다면, 어퍼이스트사이드의 일류 사립학교를 졸업한 학생이 700점을 받은 것보다 더 잘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뉴욕의 사우스브롱크스는 흑인과 히스패닉 밀집 지역이다. 어퍼이스트사이드는 거주자의 약 80%가 백인인 부자동네다. 이 논리는 딱히 반박할 거리가 보이지 않는다.둘째, 과거의 잘못 보상하기다. 소수인종 학생들을 불리한 처지에 몰아넣은 역사적 차별을 보상하는 차원에서 이들을 우대해야 한다는 논리다. 대표적인 차별은 흑인 노예제일 것이다. 하지만 보상 논리는 만만찮은 도전에 직면한다. "풍요로운 휴스턴 교외에 사는 흑인 학생이 그들보다 형편이 더 어려운 백인 여학생보다 더 큰 혜택을 누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대답이 군색해진다. 사실 흑인이나 히스패닉 학생 중에도 부모가 의사·변호사·교수 등 전문직이거나 재력이 풍부한 사람이 꽤 많다. 셋째, 다양성 증대 논리다. 학교에 여러 인종이 고루 섞여 있으면 서로에 대해 더 배울 수 있고, 소수인종 학생들이 공직이나 전문직으로 갈 경우 지역 발전과 공동선에 더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수인종 우대정책은 그에 속한 학생들의 자부심을 훼손하고, 인종 간 긴장을 높이며, 백인의 분노를 유발할 수 있다는 반론이 있다. 요컨대 소수인종 우대 정책은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운 데다 득보다 해가 많다는 것이다.◇ 아슬아슬한 판결의 연속소수인종 우대 정책에 대한 대법원 판결은 1978년에 처음 나왔다. 해병 장교 출신 앨런 바키는 캘리포니아대(UC) 데이비스 의대에 응시했으나 두 번 떨어졌다. 바키는 소송을 냈다. 주 대법원은 바키의 손을 들어주면서 입학 허가를 명령했다.그러나 연방 대법원은 어퍼머티브 액션이 헌법과 민권법에 부합한다고 판결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UC 데이비스 의대의 소수인종 우대 정책은 지나친 감이 있다며 폐지를 명하는 한편 바키를 입학시키라고 명했다. 경계선에 선 법원의 고민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1992년 백인 여학생으로 가정 형편이 어려운 셰릴 홉우드는 텍사스대 로스쿨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학업 성적이 우수한 자기는 떨어진 반면 점수가 낮은 흑인과 히스패닉 학생은 붙었기 때문이다. 1심은 대학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2심은 홉우드의 편에 섰다. 텍사스대는 연방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연방 대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항소심 판결이 최종심이 됐다. 항소심 판결은 관할권이 있는 텍사스와 루이지애나, 미시시피주에 적용됐다.2003년 바바라 그루터는 미시간대 로스쿨을 상대로 위헌 소송을 제기했다. 연방 대법원은 소수인종 우대 정책이 수정헌법 14조(평등보호 조항)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2016년에는 아비가일 피셔가 텍사스대 오스틴 캠퍼스를 상대로 위헌 소송을 냈으나 연방 대법원은 소수인종 우대 정책에 합헌 판결을 내렸다.그러다 마침내 2023년 6월 연방 대법원이 종례 판례를 뒤집는 판결을 내렸다. 연방 대법원은 ‘공정한 입학을 위한 학생들’(SFFA·Students for Fair Admissions)이란 단체가 제기한 소송에서 소수인종 우대 정책은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SFFA는 2만여명의 학생과 학부모를 회원으로 둔 단체로, 백인과 아시아계 학생들이 명문대 입학에서 역차별당하지 않도록 지원한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판결문에서 "학생은 인종이 아닌 개인으로서 경험을 바탕으로 대우받아야 한다"고 말했다.재판의 흐름에서 보듯 소수인종 우대 정책은 합헌과 위헌의 경계선을 걸었다. 그러다 결국 보수가 지배하는 연방 대법원이 결정타를 날렸다.이번 판결은 대학을 넘어 기업 채용 관행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재판에서 구글, 애플, 메타플랫폼(페이스북) 등 약 80여개 기업은 대학의 소수인종 우대 정책을 지지하는 의견서를 법원에 냈으나 소용없었다. 앞으로 누군가 채용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소송을 내면 기업들은 곤란한 지경에 빠질 수 있다. ◇ 국내에도 영향 미칠 것미국은 무한경쟁이 펼쳐지는 자본주의의 천국이지만 빌 게이츠가 세운 자선 재단 사례에서 보듯 상류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숨통을 터준다. 소수인종 우대 정책은 초점을 개인에 두면 억울한 백인 학생이 나올 수 있는 불완전한 제도다. 그러나 초점을 공동선에 두면 공동체 유지라는 대의(大義)에 부합하는 제도다. 미국이 소수인종에 대한 관용과 포용, 다양성을 상징하는 근사한 정책을 끝내 폐지한 게 못내 아쉽다. 인종은 아니지만 우리도 소득과 지역을 기준으로 채용과 입학에서 일부 혜택를 준다. 9급 공무원 채용엔 저소득층 기초수급자 몫의 쿼터가 있다. 또 지방대육성법 개정에 따라 의대, 약대, 간호대에서 지역인재 선발은 의무가 됐다.이같은 제도는 공동체를 유지하고, 수도권 집중을 막아 국토 균형발전을 촉진한다는 대의 아래 큰 반발 없이 시행 중이다. 장차 저출생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민이 늘면 인종이 기준이 될 수도 있다. 한국 사회는 대학입시에 목을 맨다. 미국에서 나타난 갈등이 몇 배 더 센 강도로 국내에서 되풀이 될 수 있다. 미국 사례를 꼼꼼히 들여다 봐야 할 이유다.<경제칼럼니스트>소수인종 우대 정책 찬성파와 반대파가 6월 29일(현지시간)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 각각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날 연방 대법원은 소수인종 우대 정책을 위헌으로 판결했다. 사진=로이터/연합미국 매사추세츠주 캠브리지에 있는 미국 최고 명문 하버드대학교의 모습. 하버드대는 신입생을 선발할 때 흑인과 히스패닉계 등 소수인종을 우대했으나 연방 대법원은 이같은 관행이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사진=AP/연합뉴스

한일 통화스와프 재개, 어떤 의미가 있나 [곽인찬의 뉴스가 궁금해?]

<요약> 한·일 통화스와프가 8년만에 재개됐다. 100억달러 규모에 3년 기한이다. 대일 통화스와프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금액을 점차 예전 최고치인 700억달러까지 늘리는 게 좋겠다. 또한 대미 통화스와프는 지금처럼 임시변통형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상설 채널을 구축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한·일 통화스와프가 재개됐다. 2015년에 종료된 지 8년만이다. 규모는 100억달러, 기간은 3년이다. 스와프(교환)하는 통화는 미국 달러로 정했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6월 29일 일본 도쿄에서 스즈키 슌이치 재무장관을 만나 이같이 합의했다.한·일 통화스와프 재개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다른 나라와 맺은 통화스와프는 어떤게 있는지 등을 알아보자.◇ 정권 따라 출렁인 통화스와프2001년 김대중 정부 때 일본과 처음 통화스와프 협정을 맺었다. 금액은 20억달러 규모였다. 외환위기 직후라 우리로선 외화 한 푼이 아쉬울 때다. 한국 돈 원과 일본 돈 엔을 교환하는 방식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엔화는 준 기축통화 대우를 받는다. 미국 달러만은 못해도 국제 결제통화로 활용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노무현 정부 때 이 금액이 130억달러(20+30+80억달러) 규모로 불어났다.보수 이명박 정부도 처음엔 대일 통화스와프에 공을 들였다. 잔액은 금세 700억달러(130+270+300억달러) 규모로 커졌다. 그러다 2012년 8월 사단이 벌어졌다. 이명박 대통령이 전격 독도를 방문했다. 전·현직 통틀어 대통령으로 처음 독도 땅을 밟았다. 발끈한 일본은 만기가 돌아온 통화스와프 협정을 연장하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 말기에 규모는 130억달러로 쪼그라들었다.박근혜 정부는 위안부 문제 등을 두고 일본과 각을 세웠다. 2013년 6월 당시 아소 다로 일본 재무장관은 통화스와프 연장과 관련, "아직 한국으로부터 요청이 없었다"고 말해 우리 속을 긁었다. 마치 일본이 시혜를 베푸는 듯한 태도에 우리 정부도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았다. 결국 2015년 2월 100억달러 만기를 끝으로 한·일 통화스와프는 14년만에 전면 중단됐다.2015년 12월 양국은 위안부 합의문을 발표했다. 한·일 관계도 개선 기미가 엿보였다. 2016년 8월 재무장관 회담에서 당시 유일호 부총리는 아소 재무장관과 통화스와프 재개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듬해 초 일본은 부산 일본 영사관 앞에 위안부 소녀상이 설치된 것을 핑계로 협상을 일방적으로 중단했다. 문재인 정부는 위안부 합의를 사실상 파기했다. 2018년 가을 대법원은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해 일본 기업이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에 반발한 일본은 반도체 핵심 소재 수출을 통제하고, 전략물자 수출심사 우대국(화이트리스트) 명단에서 한국을 뺐다. 문 정부 5년 내내 한·일 관계는 긴장으로 치달았다. 통화스와프 재개는 입도 벙긋 하지 못했다.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3월 일본을 찾아 기시다 후미오 총리를 만났다. 기시다 총리는 5월 한국을 답방했다. 해빙 무드 속에 수출입 관련 통제도 다 풀렸다. 8년만의 통화스와프 재개는 그 연장선상에 있다.◇ 통화스와프 뭐가 좋은가한·미 통화스와프를 예로 들어보자. 1990년대 말 외환위기 땐 한·미 통화스와프 장치가 작동하지 않았다. 대신 ‘폭탄’이 터진 뒤 국제통화기금(IMF)이 구제금융을 제공했다. IMF는 ‘상전’ 노릇을 했고 우리는 그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폭탄’이 터지기 전에 한·미 통화스와프 장치가 가동됐다. 2008년 10월 한국은행은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와 300억달러 통화스와프 협정을 맺었다. 그러자 흔들리던 금융시장이 금방 안정을 찾았다. 통화스와프는 일종의 비상금이다. 만약 한국이 달러 고갈로 어려움을 겪으면 미 연준이 언제든 300억달러를 빌려주겠다는 약속이다. 시장은 이를 연준, 곧 미국이 한국의 금융시장 안정을 보증하는 신호로 해석했다. 300억달러 스와프 협정은 2009년 12월 14개월만에 종료됐다.2020년에도 한국은 대미 통화스와프 덕을 봤다. 코로나 위기가 덮치자 세계 경제가 흔들렸다. 한은은 잽싸게 연준과 600억달러 협정을 맺었다. 코로나 위기 국면에서 한국 경제는 여타 신흥국들과 달리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경상수지 흑자, 대외채권 등 펀더멘털이 탄탄한 데다 여차하면 연준이 나선다는 믿음이 주효한 덕이다. 600억달러 협정은 2021년 12월에 종료됐다.때늦은 후회이지만, 만일 외환위기 때 우리가 일 터지기 전에 한·미 통화스와프를 가동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 한·중 스와프는 590억달러 규모한국과 중국은 금융위기가 진행 중이던 2009년 봄에 260억달러 규모로 통화스와프를 처음 체결했다. 한국 원과 중국 위안을 맞교환하는 방식이다. 위안은 쓰임새가 점차 넓어지고 있긴 하나 아직 국제통화로 인정받기엔 이르다. 그럼에도 대중 무역 의존도가 높은 한국으로선 중국과 통화스와프를 체결하는 게 나쁘지 않다. 중국은 위안화 국제화를 촉진하는 차원에서 통화스와프 정책을 적극 펴고 있다. 2014년 한·중 통화스와파는 560억달러 규모로 커졌다.2017년 가을엔 중국이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갈등을 빌미로 통화스와프 협정을 연장하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하지만 중국은 별 이견 없이 3년 연장에 동의했다. 이어 2020년엔 규모를 오히려 590억달러로 키우는 한편 기간도 5년으로 늘렸다. 중국이 위안화 국제화 작업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일본, 미국, 중국 외에도 한국은 여러 나라와 통화스와프 협정을 맺었다. 캐나다, 스위스, 호주,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등이다. 특히 캐나다와 맺은 협정은 한도가 없다. 아세안 국가들과는 치앙마이 이니셔티브, 곧 다자간 통화스와프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는 궁극적으로 원화 국제화에도 도움을 준다. ◇ 남은 과제는대일 통화스와프는 규모를 점차 키우는 게 좋다. 적어도 예전 최고액인 700억달러까지 늘릴 필요가 있다. 우리 경제 펀더멘털에 큰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 한국은 외환보유액 세계 9위국이며, 대외채무보다 대외채권이 더 많은 순채권국이다. 국제사회에선 선진국 대우를 받는다. 25년 전 외환위기 또는 15년 전 금융위기 때처럼 달러 고갈로 비틀거릴 체력은 아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전장치를 겹겹이 마련해서 손해 볼 게 없다. 국제 금융위기 대가인 찰스 킨들버거 교수(전 MIT)는 저서 ‘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에서 금융위기를 ‘계속 피어 오르는 질긴 다년생화’라고 불렀다. 주기적으로 다가오는 금융위기로 언제 어디서 둑이 무너질지 모른다. 이런 때 대일 통화스와프는 둑을 지탱하는 보강재 역할을 할 수 있다. 대미 통화스와프는 장기적으로 상설 채널 구축에 힘을 쏟아야 한다. 기한·금액에 제한을 둔 임시변통 성격의 통화스와프가 아니라 무기한·무제한 채널을 마련하면 좋다. 현재 미국은 유럽연합(EU), 영국, 스위스, 캐나다, 일본 등 5개국(지역)과 2013년부터 상설 유동성 스와프 라인(standing liquidity swap lines)을 가동하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한국도 이 대열에 합류하는 걸 목표로 삼아야 한다.<경제칼럼니스트>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29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8차 한-일 재무장관회의’에서 스즈키 슌이치 일본 재무장관과 통화스와프 재개에 합의했다. 사진=연합뉴스

[기자의 눈] 대환대출·청년도약계좌 흥행과 은행의 역할

대환대출 인프라, 청년도약계좌 등의 정부의 서민금융 정책이 잇따라 흥행하고 있다. 하나의 앱에서 낮은 금리의 신용대출로 갈아탈 수 있는 대환대출 인프라는 지난달 31일 출범한 후 지난 9일까지 열흘 동안 총 3844억원(1만1689건)이 이동한 것으로 나타났다. 청년도약계좌는 지난 15일 계좌 개설 신청을 받은 후 일주일 만에 가입자가 70만명을 넘어섰다. 두 상품 모두 예상보다도 더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두 상품의 특징은 금리에 있다. 대환대출 인프라는 가지고 있는 신용대출의 금리를 더 낮게 갈아탈 수 있어 차주들의 금융비용 부담을 줄일 수 있다. 청년도약계좌는 최대 연 6% 금리에 정부의 기여금, 비과세 적용을 받아 시중은행 상품에서는 기대하기 힘든 수준의 목돈을 마련할 수 있다. 청년도약계좌는 월 최대 70만원씩 적금을 하면 5년 동안 5000만원을 모을 수 있다. 대환대출 인프라, 청년도약계좌는 모두 출시 전 참여자인 은행들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대환대출 인프라의 경우 대환대출 비교 플랫폼을 제공하는 플랫폼 기업에 은행이 종속될 수 있고, 은행의 금리 줄세우기로 과도한 경쟁이 발생할 수 있다는 비판이 거셌다. 출범 당일에도 은행들은 일부 플랫폼에만 참여하며 적극적인 참여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청년도약계좌 또한 은행들은 역마진을 우려했다. 시장금리가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최고 연 6%의 고금리는 손해 보는 구조라는 논리다. 은행들은 출시 전 우대금리를 2%로 제시하고 조건도 까다롭게 해 뭇매를 맞은 뒤 우대금리를 낮추고 조건을 완화해 기본금리를 지금의 연 4.5%(지방은행 제외) 수준으로 높였다. 금융소비자들을 위한 상품과 서비스가 출시될 때마다 은행권에서 진통을 겪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대환대출 인프라와 청년도약계좌의 흥행은 금리에서 조금이라도 혜택을 보고 싶어하는 수요자가 그만큼 많다는 의미다. 장기간의 고금리 속에 경기 상황은 좋아지지 않고 있고 금융소비자들의 고통은 커지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은행들은 막대한 이익을 벌어들이면서 사상 최고 실적 행진을 이어갔다. 물론 은행은 공공재가 아니다. 주주가 있고 이익을 벌어들여야 하는 주식회사인 것도 맞는다. 하지만 은행은 이자를 통해 수익을 내고 있으며, 우리 경제에서 자금을 중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 공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은행은 수익이 우선일 수는 있지만 수익만을 챙겨서는 안된다. 은행의 사회적 역할로 인해 어려운 시기를 지나는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바뀔 지도 모를 일이다.

[EE칼럼]

이동일 법무법인 에너지 대표 분산에너지활성화특별법 시행(2024년 6월14일)이 1년 앞으로 다가왔다. 지난 2021년 7월 입법발의 된 이후 수년간 정부와 한국에너지공단, 한국전력, 전력거래소 등의 유관기관과 학계의 논의가 이어졌다. 한편으로는 관련 전문가와 사업자들을 대상으로 수차례의 공청회를 통해 분산에너지활성화특별법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됐고 법안의 구체적 내용에 대한 의견 조과 수정을 통해 분산에너지활성화특별법이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된 결과이다. 그동안 우리나라 전력시스템은 발전, 송전, 배전 판매까지 전 과정에 대해 전기사업법에서 규율해왔다. 전기사업법은 수차례 개정을 통해 ‘전기자동차충전사업’, ‘소규모전력중개사업’ 및 ‘재생에너지 전기공급 사업’ 등의 전기 신사업을 도입하는 등 변화하는 전력시장 흐름을 반영했다. 그러나 대형발전소, 송전탑, 송전망 건설에 대한 사회적 갈등 발생과 낮은 주민수용성으로 인한 문제 등 현안을 해결하기에는 현행 법령으로는 한계에 있다. 이번 분산에너지활성화특별법은 중장기적 관점에서 이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배경에서 제정됐다. 우리나라는 다른 주요국과 비교해 값싸고 품질 좋은 전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해 왔다. 이를 바탕으로 제철, 조선, 석유화학, 자동차, 반도체 등 에너지 다소비 산업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는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근간이 됐다. 값싸고 품질 좋은 전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었던 것은 적절한 시기에 해안가 중심의 대형발전소가 건설됐고 생산된 전기를 수요처에 공급하는데 필요한 송전탑과 송전망을 신속히 건설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 아래 우리나라의 국민 1인당 GDP는 1953년 67달러에서 현재 3만 달러를 넘어 4만 달러를 넘보는 괄목할 성장을 이뤘다. 다만 이같은 전력시스템의 특징으로 부산, 인천, 강원, 충남, 전남, 경북, 경남과 같이 해안가의 대형발전소를 보유한 지역은 전력 자급률이 높지만 해안가의 대형발전소를 보유하지 못한 서울, 대구, 광주, 대전, 세종, 경기, 충북, 전북은 상대적으로 낮은 전력 자급률을 보이고 있다. 그 동안의 경제성장으로 우리 국민의 삶의 질은 크게 향상돼 가전제품, 냉난방의 증가 등으로 1인당 전기소비는 세계적 기준으로 상대적으로 높고,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한편으로 기후변화 협약의 대응관점에서 화석연료를 사용한 자동차는 전기자동차로 전환 되는 등 전기사용량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이 같은 전기수요의 증가 추세에 맞춰 전기의 생산 및 공급시설도 더욱 증설해야 한다. 그런데 2013년 밀양 송전탑 갈등을 시작으로 당진 송전망, 동해안 송전망, 새만금 송전망, 수도권 송전망 등 대규모 송전선로 건설에 따른 갈등으로 사회·경제적 비용이 눈덩이처럼 늘고 있다. 최근에는 동해안 원자력 발전소와 선탁화력발전소들이 완공돼 가동 중인 가운데 송전 제약 탓에 전기를 생산해도 보내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등 동해안의 송전선로 용량은 포화 상태에 다다랐다. 이런 상황에서 에너지 시스템의 전환 필요성이 대두됐다. 기존의 에너지 시스템은 대규모 발전소 기반의 집중형 발전 및 해안가에서 발전한 후 수도권 등으로 원거리를 송전해 소비하고, 송전망 기반의 전국적 네트워크로 규모의 경제 중심의 전력시장을 특징으로 한다. 이에 비해 미래형 분산에너지 시스템은 지역 중심의 분산형 발전을 하고, 지역 단위 내에서 에너지를 소비하며 지역중심의 배전 네트워크 및 자가소비와 수요지 인근 거래를 그 특징으로 한다. 분산에너지활성화 특별법은 기존의 에너지 시스템을 미래형 분산에너지 시스템으로 전환할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분산에너지특별법 시행으로 분산에너지 시설 설치가 활성화되면서 대규모 발전시설 및 송전망 구축이 필요없게 돼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적 갈등을 해소와 전력공급 안정화라는 ‘세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게됐다.이동일 에너지 대표 이동일 법무법인 에너지 대표

[이슈&인사이트] 기업의 인공지능 활용법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영화 아이언맨의 ‘자비스’와 같은 개인용 인공지능 비서가 스크린에 등장했을 때 우리는 감탄했다. 또 빌게이츠는 향후 PDA(Personal Digital Agent)와 같은 맞춤화된 개인용 디지털 에이전트가 시장을 지배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많은 사람들이 인공지능은 인간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미래의 사회 구조를 형성할 것이며 우리는 인공지능과의 공존을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게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곁에 있는 인공지능은 ‘자비스’의 서비스를 기대하기에는 아직 한계가 있다. 주요 기업들은 인공지능이 제시하는 장밋빛 미래를 전망하며 이를 활용한 다양한 서비스 모델 개발에 나서고 있지만 실패로 끝나는 경우도 많다. 기업들이 인공지능을 도입할 때 실패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는 인공지능 도입의 목적과 가치를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거나 어떤 비즈니스 단계에서 인공지능을 적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고민이 없는 경우다. 기업은 인공지능을 도입하기 전에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지, 어떤 가치를 창출하고자 하는지를 명확하게 설정하고 그에 맞는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인공지능을 협업과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도구로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빅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를 인공지능을 통해 분석하며 분석된 결과를 사람이 해석해 의사결정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인공지능과 사람들이 함께 효과적으로 협력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원활하게 소통하며 팀으로 일하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다양한 관점을 수용하며 협력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중요하다. 인공지능은 인류사회에 많은 혁신과 발전을 가져왔지만 여전히 한계와 문제점이 존재한다.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한 서비스 모델이 모든 문제점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기대는 현실적으로 섣부른 판단이다. 인공지능은 강력한 도구지만 그 자체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은 기계 학습과 패턴 인식을 통해 데이터를 분석하고 예측하는 데 강점을 가지고 있지만 의사 결정에 있어서도 한계가 있다. 데이터 편향, 모델의 편향, 개인정보 보호, 윤리적 고려 사항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더불어 인공지능은 사람의 감성, 윤리적 판단, 창의성 등 인간적인 요소를 완전히 대체하기 어렵다. 인공지능 도입에 대한 조직 내 변화 관리의 부재도 문제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즉,인공지능 도입은 조직의 프로세스와 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변화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조직 내에서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방법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지원이 없으면 인공지능 도입은 실패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합리적인 인공지능 기술의 활용을 위해서는 목적과 가치의 명확한 정의, 데이터 품질과 가용성의 고려, 변화 관리와 조직 내 인력의 준비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기업들은 인공지능 도입의 잠재적인 이점을 인식하면서도, 전략적이고 신중한 접근을 통해 인공지능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인공지능의 도입과 활용에 있어 윤리적인 고려와 투명성, 책임성을 갖추어야 하고 사회적인 영향과 역사적인 문제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고려가 필요하다. 특히 인공지능은 데이터에 의존해 작동하기 때문에 품질이 좋고 충분한 양의 데이터 분석이 요구된다. 기업이나 조직에서 인공지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려면 인공지능의 특성과 작동원리 그리고 인공지능이 제시하는 분석결과를 업무프로세스와 연계해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문제의 속성에 따라 사람이 해결할 문제, 인공지능과 협업할 문제, 인공지능이 더 잘 해결할 문제로 나누어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인공지능은 도구로서 인간에게 많은 혜택을 제공할 수 있다. 다만 문제 해결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고려해 다양한 전문분야의 지식과 인간의 지혜를 결합한 종합적인 접근이 기업경영에 있어서 인공지능을 성공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이홍주 숙명여자대학교 소비자경제학과 교수

[기자의 눈] ‘가격 인하 압박’은 처음인 식품업계...익숙한 시중은행들

최근 농심이 7월 1일부로 신라면, 새우깡 출고가를 각각 4.5%, 6.9% 인하한다는 소식이 소비자들 사이에서 화제였다. 신라면 가격 인하는 2010년 이후 13년 만에 처음이었고, 새우깡 가격 인하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이번 가격 인하는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발언이 영향을 미쳤다. 추 부총리는 이달 18일 KBS 일요진단에 출연해 "지난해 9~10월 (기업들이 라면값을) 많이 인상했는데, 현재 국제 밀 가격이 그때보다 50% 안팎 내렸다"며 "기업들이 밀 가격 내린 부분에 맞춰 적정하게 내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추 부총리는 "정부가 하나하나 원가를 조사하고 가격을 통제할 수는 없다"면서도 "이 문제는 소비자 단체가 압력을 행사하면 좋겠다"고 했다. 사실상 라면업체들을 향해 가격 인하를 권고한 셈이다. 사기업의 가격 결정권에 대해 정부가 개입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일부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일반 서민이 자주 찾고 먹거리 물가에도 즉각 영향을 미치는 식품기업들이 원재료 가격이 오를 때는 즉각적으로 가격을 올리다가 원재료가가 하락할 때는 모르쇠로 일관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논란의 소지가 적은 듯하다.정부의 가격 인하 권고가 당황스러운 라면업계와 달리 은행권은 이러한 상황이 너무나도 익숙하다. 특히나 식품업계는 원재료가 인하로 가격을 내릴 수 있는 명분이라도 있지만, 은행권은 한국은행이 2021년 8월부터 기준금리를 10차례에 걸쳐 인상했음에도 금융당국으로부터 금리 인하 압박을 지속적으로 받아왔다. 금리 상승기 은행이 시장금리 수준, 차주 신용도 등에 비춰 대출금리를 과도하게 올리는 것을 근절하고, 예대금리차 확대로 인한 지나친 이익 추구를 근절하라는 게 당국 발언의 요지다. 금리 인하뿐만 아니다. 당국이 금융지주사 최고경영자(CEO) 선임은 물론 지배구조 개선과 같은 은행, 금융사의 세세한 내부 살림에도 발언을 쏟아내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놀랍지도 않다. 최근 은행들이 청년도약계좌를 내놓은 것 역시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공약에서 청년들에게 자산 형성 기회를 만들어주겠다며 도입을 약속한 영향이 컸다.그간 시중은행들은 주인 없는 회사라는 이유로 다른 업종에 비해 유독 당국의 간섭에 휘둘리는 경향이 있었다. 당국이 적절한 수준의 메시지를 내놔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때로는 당국의 시각들에 지나침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앞서 식품업계의 사례에서 보듯이 민생 경제를 위해서는 업권 간에 차별적인 시선, 편파적인 시각을 어느 정도 절제할 필요가 있다. 정작 서민 물가에 영향을 주는 기업들의 꼼수에는 눈을 감은 채 주인 없는 회사니까, 은행이니까, 금융지주사니까 당국의 말에 따라야 하고, 은행권은 이자 장사에만 몰두하기 때문에 당국이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는 편파적인 시각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또 한 가지, 은행을 넘어 다른 업권으로 확대된 정부의 권고 발언과 이로 인한 기업들의 가격 인하 행보가 부디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았으면 한다. 식품가격을 올려야 한다고 정답을 정해두지 않고, 가격 인상의 적정선은 무엇인지, 그 근거가 타당한지, 인상 요인과 인하 요인은 무엇인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할 때다.ys106@ekn.kr

[EE칼럼]전력산업,선도형 산업으로 전면 재편해야

요즘 매일같이 전력 관련된 뉴스가 등장한다. 대부분이 전기요금, 원자력, 신재생에너지 관련이다. 이들 이슈는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들이 적지 않다. 특정 전원의 발전량이 적거나 많아지면 당연히 다른 전원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주어진 수요에 맞춰서 공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력수요가 적은 지역에서 제어하기 어려운 재생에너지의 발전량이 많아지면 강제로 차단하거나 다른 발전기의 출력을 줄여야 한다. 제도를 설계할 때 미처 예상치 못한 문제라면 서둘러 경제적, 기술적 미비점을 보완해야 할 것이다. 지역별로 편중된 수급불균형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설비보완 뿐 아니라 획일적인 보조금이나 요금체계도 바꿔야 한다. 가뜩이나 전원믹스, 공급비용, 공급신뢰도, 보조금 문제, 환경문제 등과 얽히면서 점점 복잡해지고 있다. 새롭게 나타나는 문제들도 있지만, 어디서나 발생할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들도 난마처럼 얽히고 있다. 매듭을 풀기 어렵다면 매듭을 끊어내는 새로운 결단이 필요하다. 지금은 우리 전력산업에 대한 성찰과 미래에 대응하는 방향 전환이 필요한 때다. 먼저 전력산업에 대한 공감대가 필요하다. 전력산업이 언제까지 산업에 필요한 동력을 싸고 안정되게 공급하는 책무를 수행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다. 일각에서는 제조업 경쟁력과 값싼 에너지 공급이 상호 불가분의 관계라고 여긴다. 전력이 생산요소이자 산업인프라 기능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에너지가 필요할 때 제대로 공급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지, 반드시 낮은 가격을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일부 전기 다소비 업종을 제외하면 전기요금이 원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전기요금이 제조업 경쟁력에 미치는 효과도 마찬가지다. 다음으로 전기 재화는 국가가 국민에게 값싸게 충분히 공급해야 하는 공공재인가의 문제다. 전기가 일정한 범위에서 필수재적 성격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넘어서면 시장재화의 기능도 한다. 갈수록 많은 전기제품이 보급되며 전력수요는 늘어나는 추세다. 냉난방도 지속적으로 전기에너지로 전환되고 있다. 요금이 낮다고 무턱대고 쓰지는 않겠지만 가격효과는 있다. 주택용 전력수요는 주택 유형, 가구원수, 기후와 같은 외적 요인과 소득수준, 요금과 같은 경제적 요인에 영향을 받는다. 낮은 전기요금이 국민의 후생에 크게 이바지한다면 원가보다 낮더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반드시 다다익선은 아니다. 낮은 요금이나 불합리한 요금체계로 인해 에너지 낭비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요금이 갖고있는 가격신호 역할이 필요한 이유다. 앞서 언급한 두가지 문제에 대한 사회적 통념이나 정책결정자의 시각이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 전력산업은 내일도 여전히 똑같은 행태를 반복하며 허망한 담론만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자주 얘기되는 전원 문제나 송전망 확충 그리고 전기요금 문제는 발등의 불을 끄는 기존의 방식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 여태껏 보아왔듯이 이러한 문제는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시스템 변화와 함께 전력산업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지에 대해 새로운 시각에서 답을 찾아야 할 때다. 전력산업 환경은 지난 10년을 보더라도 크게 변했다. 온실가스 감축 문제는 이제 변수가 아니라 상수가 되었다. 국제적 협약과 국가적 체면을 넘어 산업 전반에 걸쳐 전방위적 기술규제 압력으로 다가오고 있다. 국지적 전쟁만으로도 국제유가가 폭등하고 에너지 안보가 위협받는 현상도 상존하는 불확실성의 하나다. 나아가 기술적 변화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생활방식 자체를 크게 변화시키고 있다. 전기차, 수소차는 물론 반도체, 데이터센터로 이어지는 새로운 에너지 수요는 얼마 전만 해도 생각하기 어려운 것 들이다. 원거리 전력망으로 유지되던 전력네트워크도 이제는 보다 정교하고 지역화된 분산에너지 시스템으로 빠르게 전환되고 있다. 사회구조의 변화와 더불어 에너지시스템에도 커다란 변화의 물결이 몰려오고 있다. 아직도 전력산업이 송전망을 확충하고 대형 발전소 몇 개를 더 지어서 공급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가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전력산업은 이제 단순히 규모의 경제나 공급안정이라는 지표로 보던 관점에서 산업의 경계를 넘어서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전력산업이라는 좁은 시각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앞으로 더 이상 답을 찾기 어렵다. 전력은 철강, 석유화학, 반도체, 자동차, IT와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다. 국방, 안전, 금융과 같이 거리가 있어 보이는 분야와의 접합점도 생겨나고 있다. 전력은 새롭게 전개되는 사회경제시스템의 핵심 드라이버로서의 역할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정해진 파이를 놓고 치고 받는 치킨게임에 더 이상 매달릴 때가 아니다. 새로운 사회,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 가는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시스템과 제도적 기반을 구축하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 새로운 인식과 발상의 전환을 통해 전력산업의 새로운 미래를 준비할 때다.이창호 가천대학교 에너지시스템과 교수

[이슈&인사이트] 진보 vs. 보수의 차이

필자의 미국 유학시절 시카고대에서 학교를 옮긴 교수가 수업시간에 보수와 진보의 차이가 무엇인지 정의를 내려보라고 했다. 대부분의 MBA 학생들은 보수와 진보에 대해서 우리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추상적인 개념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즉, 보수는 기존의 것을 지키고 보존하며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고, 진보는 기존의 것을 버리고 급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라고들 답했다. 그러나 교수의 답은 뜻밖이었다. 진보와 보수의 차이를 ‘세금’에 있다고 했다. 보수인 공화당이 선거에서 이기면 세금을 낮추고, 진보인 민주당이 집권하면 세금을 올리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공화당은 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에 움직이며, 정부는 공정한 관찰자의 역할만 하면 되기에 세금을 인하하면 민간은 소비를 촉진하고 기업은 투자를 늘린다고 주장한다. 반면 큰 정부를 지향하는 민주당은 시장을 그대로 놔두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정부가 재정을 투입해 경기를 일으키고 복지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흥미로운 것은 시카고대는 시장 자유주의 중심의 대학으로 공화당 정책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며 공화당이 집권하면 시카고대 경제학자들이 경제정책자문을 한다고 했다. 반면 민주당이 집권하면 자유방임주의는 시장실패로 귀결된다고 주창하는 프린스턴대·컬럼비아대 등 동부해안에 자리 잡은 대학들의 경제학자들이 대거 백악관의 정책자문으로 입성한다는 것이다. 복지혜택의 수혜자인 저소득층을 제외하고는 세금인상은 인기가 적어 2차 세계대전 이후 선출된 미국 대통령 중 연임에 성공한 민주당 대통령은 클린턴 대통령이 최초다. 미국 역사상 전쟁에서 승리한 대통령이 연임을 못한 경우는 드문데도, 걸프전을 승리로 이끈 공화당 대통령인 아버지 부시대통령을 물리치고 무명에 가까운 아칸소 주지사였던 민주당의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경제가 보수와 진보 모두에게 첨예한 이슈가 될 것이라는 전조를 시사한다. 클린턴의 대통령 당선은 ‘경제대통령’이라는 국민의 기대에 힘입었다. 부시 대통령을 겨냥해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그의 구호가 유명세를 타며 지지를 얻었다. 클린턴은 집권 후 4년만에 걸프전으로 인한 막대한 재정적자를 해결하며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초로 재선에 성공한 민주당 대통령이 됐다. 재정적자 해소라는 클린턴의 전무후무한 업적에도 세금 인상정책을 펴는 민주당이 클린턴의 뒤를 이어 3 연임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클린턴 이후 미국 대통령은 공화당의 아들 부시가 연임한 뒤 민주당의 오바마가 연임했다. 그 이후엔 공화당의 트럼프가 단임에 그치고 다시 민주당의 바이든이 집권하는 등 미국정치 지형에 격랑이 일고 있다. 클린턴 이전까지만 해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공화당 대통령이 연임 하고, 잠깐 민주당에 대통령 자리를 넘겨 준 뒤 다시 찾아오는 상황이 반복됐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공화당을 지지하는 미국의 중산층이 미래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는 여유가 있던 시기에는 공화당 대통령을 두 번 찍고는 사회 안정화를 위해 자신이 세금을 더 내더라도 민주당으로 스윙 보트를 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클린턴 이후로는 공화당의 부시가 8년 집권한 이후 민주당의 오바마가 8년을 집권하고는 공화당의 트럼프가 연임에 실패를 한 것을 보면 미국의 선거 지형이 달라진 것 같다. 사실 클린턴 이후부터는 대통령 선거마다 민주당과 공화당이 접전을 벌이며, 선거 후에도 결과를 승복하지 않고 소송전을 벌이는가 하면, 부정선거 의혹이 불거지고, 심지어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들이 선거불복을 내세우며 의회 의사당에 난입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는 미국의 소득불평등이 1990년대 중반 이후 심화되고 있고, 특히 과거의 중산층에 속했다고 생각한 백인 중산층이 더 이상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여유롭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를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지표인 지니계수를 보면 2019년 0.395로 0.339인 우리나라보다도 높다.미국보다 지니계수가 낮다는 이유로 우리나라가 안심할 수는 없다. 한국은행은 우리나라가 저성장 국면에 들어섰다고 봤다.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도 1.5%로 낮췄다. 정치도 마찬가지로 위기이다. 윤석열 정부는 ’공정‘이라는 시대정신을 중심으로 서서히 지지를 확보해 나가는 정책을 펴고 있다. 국민의힘이 집권했지만 여전히 민주당의 지지층도 37%로 팽팽하다. 대한민국은 ’팬덤정치‘라는 극한적 이념 갈등의 중심에 있다. 이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최우선 과제는 경제활성화다. 경제활성화에 따른 소득 불평등의 감소는 자연스레 정치적 대립을 감소시키고 나아가 사회의 안정으로 이어질 것이다.박주영 숭실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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