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데스크칼럼] 정무위 국감, 증인 실종과 호통의 데시벨

21대 국회 마지막 국정감사 시즌이 돌입됐지만 정무위 국감에서 주요 증인들이 대거 빠지며 ‘맹탕 국감’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지난 8일 열린 정무위 국감장에는 횡령사고 등을 책임질 CEO급 증인들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국회 정무위원장인 백해련 더불어민주당 의원마저 국감 직전 열린 정무위 회의에서 "금융권 관련 증인들이 지금 다 빠져 있는 상태"라며 "종합국감 때 다시 간사님들이 관련된 증인도 논의해 주시기 바란다"고 당부에 나선 상황이다.최근만 해도 ‘역대급’ 금융 사고가 잇달아 발생했지만 증인 불참 역시 ‘역대급’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경남은행에서는 무려 3000억원 횡령 사고가 있었고 KB국민은행은 고객사 내부정보를 빼돌려 주식투자에 활용해 127억의 부당이득을 올린 사실이 적발됐다. DGB대구은행에서도 고객 동의 없이 1600여개의 증권계좌 부당개설이 드러났다.하지만 지난 4일 의결된 정무위 증인 30명 명단에는 지주회장 뿐 아니라 은행장들도 포함되지 않았다.이 기간 책임을 통감해야할 주요 인사들은 ‘국감 외유’에 나선 상황이다. 윤종규 KB금융지주회장, 진옥동 신한금융지주 회장, 임종룡 우리금융지주 회장, 함영주 하나금융지주 회장, 이석준 NH농협금융지주 회장 모두 모로코 마라케시에서 열리는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WB) 연차총회 참석을 이유로 출국한 상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번 국감은 목소리가 커질수록 ‘알맹이’는 죄다 빠진 공회전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금융지주 회장과 은행장이 빠진 자리는 사실상 ‘객(客)’인 준법감시인들이 자리를 채웠다.지난 10일 의결된 17일 금융감독원 국정감사 증인명단에는 우리은행 박구진, 국민은행 이상원, 신한은행 이영호, 하나은행 이동원, NH농협은행 홍명종, BNK경남은행 정윤만, DGB대구은행 우주성 등 준법감시인만 포함됐다.증권업계 역시 상황은 유사하다. 증권사 최고경영자로는 최희문 메리츠증권 부회장과 홍원식 하이투자증권 사장이 증인으로 채택됐다. 최 부회장은 이회전기 매매 정지 직전 신주인수권부사채(BW) 전량 매도 의혹으로, 홍 사장은 PF 상품 꺾기 관련 소비자 보호 실태 파악이 부실했다는 이유로 각각 소환 됐다.하지만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라덕연 사태(CFD발 반대매매 사태)’와 관련한 김익래 전 다움키움그룹 회장·황현준 키움증권 사장은 빠져있다. 라임자산운용 펀드 특혜 환매 의혹 역시 김상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거론되며 정치권의 공방이 이어졌지만 미래에셋증권의 수장 최현만 회장 역시 명단에 보이지 않는다.국회증언감정법에 따르면 증인 출석요구서 발부는 7일전까지 이뤄져야한다. 이제 오는 20일 열리는 금융위·금감원 종합감사에 시선이 쏠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은행권과 증권가에서는 다소간 억울한 측면이 강하다는 항변을 내놓는다. 국감의 권위 하락도 한몫을 한다. 재계총수와 금융지주 회장, 증권사 CEO를 불러 망신주기와 의원 개개인의 몸값 높이기에 활용한 측면이 분명히 존재했다.하지만 논란이 된 사태를 일으킨 금융권의 항변 내용을 들어보면 실망스러운 수준이다. 개인적인 직원의 일탈, 피해자 호소 프레임이 대부분이다.실제로 억울한 측면이 강하다면 당당히 나와 국민들을 상대로 설명할 기회를 피하지 않기를 당부한다.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의원님들의 ‘호통의 데시벨’을 이미 뛰어넘는 다는 점은 그간 무수히 되풀이된 국정감사의 교훈이기 때문이다.김현우 에너지경제 자본시장부장

[기자의 눈] 韓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

[에너지경제신문 여이레 기자] ‘어떤 일의 성패를 결정지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시간대’ 골든타임의 사전적 정의다. 최근 미국의 전방위적 제재를 받고 있는 중국 최대 통신장비업체 화웨이가 스마트폰에 이어 태블릿PC에도 7나노미터 공정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를 탑재해 논란이 됐다. 덩달에 중국은 반도체 산업에서 세계 1위로 올라서겠다는 ‘반도체 굴기’를 더욱 강화하는 추세다. 다행인 것은 한국 반도체 산업이 아직 중국을 앞서고 있다는 점이다. 삼성전자는 3나노 수율을 75%까지 끌어올린 상태다. 하이닉스와 삼성전자는 새로운 먹거리로 떠오른 전 세계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을 양분하고 있다. 우리 정부도 글로벌 반도체 주도권 경쟁에서 기업들이 초격차를 확보할 수 있도록 적극 뒷받침하고 있다. 정부는 반도체 투자세액공제 상향 및 임시투자세액공제 재도입, 2조8000억원 규모의 반도체 정책금융을 지원하고 있다. 또 내년 반도체 인재양성 예산도 기존 4000억원에서 5000억원으로 확대했다. 디스플레이 업계는 전 세계 1위 자리를 중국에게 내준 상태다. 중국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은 중국 기업들이 액정표시장치(LCD)를 필두로 공급량을 늘리며 저가 공세를 펼친 결과다. 한국은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분야에서 중국을 앞서고 있으나 중국 기업들이 향후 2~3년 내로 우리 OLED 기술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디스플레이 산업은 정부로부터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지난해 11월 국가첨단전략산업으로 지정됐다. 이후 세계 1위 탈환을 위한 산업통상자원부의 △디스플레이산업 혁신전략 수립 △디스플레이 첨단산업 특화단지 지정이 연달아 이어지면서 재도약 계기가 마련된 상태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과 디스플레이 시장은 꾸준한 성장세를 보일 것으로 관측된다.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은 지난 2021년 5837억달러에서 오는 2025년 7235억달러로 연평균 8.8%의 성장세를 보일 전망이다. 디스플레이 시장은 올해 1220억달러에서 오는 2024년 1312억달러로 성장이 예상된다. 중국이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 주도권을 쥐기 위해 매섭게 추격하는 가운데 우리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이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고 업계를 선도해나가길 바라본다.산업부_여이레 여이레 산업부 기자

[이슈&인사이트] 서민 주거대책, 공공분양 중심으로 확 바꿔야

이영한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명예교수/ 지속가능과학회장 전국 자가보유율이 2019년 61.2%에서 2020년에는 60.6%로 떨어졌다. 정부는 이후 2021년과 2022년에는 자가보유율을 발표하지 않았지만 2020년 수준에서 별반 나아지지 않았을 것이다. 서울은 2021년 자가보유율이 43.5%에 불과하다. 무주택자 문제는 단순히 주택 문제 넘어 사회적 문제로 국가 발전에 커다란 걸림돌이다. 역대 정부마다 서민 주거안정을 선거 주요 공약으로 내걸고 서민 주거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지만 뚜렷한 성과를 낸 정부는 아직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민의 주거 안정을 국정의 전면에 내세웠던 노무현 정부나 문재인 정부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자가보유율이 되레 떨어졌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자가보유율이 상대적으로 낮다. 중국은 자가보유율이 95%에 달하고 대만과 싱가포르도 90%를 넘는다. 우리나라는 이들 나라에 비해 집값 급등으로 인한 피해가 매우 크다. 집값이 급등하면 이들 나라 국민들은 대부분 내집이 있어 자산 증식효과로 이어지지만, 상대적으로 자가보유율이 낮은 우리나라는 주택 유무에 빈부의 양극화가 극명해진다. 이에 더해 우리나라는 자산 중에서 부동산 비중이 매우 높아 그 심각성은 배가된다. 일본의 경우 가계의 자산 중 부동산 비중은 41%(자가보유율 61%), 미국은 35% 수준(자가보유율 65%)이다. 이들 나라에 비해 부동산 비중이 높은 우리나라에서 집값 급등이나 또는 급락은 ‘재앙’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자가보유율은 높이기 위해서는 우선 주택공급을 획기적으로 늘려 주택보급률을 높여야 한다. 동시에 집값 대비 소득의 비율인 PIR이 무주택자들에게 부담가능한 수준이어야 한다. 서울의 주택보급률이 94% 수준에서 정체되고 있다. 이러한 정체 현상은 앞으로도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서울의 민간 주택은 PIR가 20에 육박한다. 이는 최소 20년을 모아야 집을 장만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부담가능한 주택’은 뭘까. 유엔은 PIR기준으로 5로 본다. 5년치 소득으로 집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2인가구 기준 중위소득(연 4147만3860원)을 기준으로 5배인 2억원 수준이다. 적어도 서민에게 부담가능한 가격은 3억원 미만이어야 한다. 현재 민간 주택 시장에서는 불가능한 수준이다. 그렇다면 공공부문에서 ‘부담가능한 주택’을 공급할 수밖에 없다. 싱가포르가 ‘주거 천국’으로 칭송받고, 세계 최고의 부국으로 성장한 바탕은 공공분양주택인 ‘HDB 주택’을 부담가능한 가격대로 대량 공급한 데 있다. HDB 주택은 싱가포르 전체 주택 재고의 80%이상을 차지한다. 공공임대주택 비중은 단지 5%에도 못미친다. 가뜩이나 부동산에서 ‘소유’ 개념이 강한 국민 정서를 감안할 때 현행 공공임대주택 중심의 서민주거 정책을 자가보유율 제고에 초점을 맞춘 공공 분양주택 위주로 전면 개편해야 한다. 특히 현재 주택난에 대한 해법으로 쓰는 공공임대주택 모델은 재정 부담이 커 공급 한계가 있다. 공공분양주택은 공공임대주택에 비하여 재정 투자가 적고, 관리비 부담도 없다. 특히, 내 집을 가진 자립 민주 국민으로서의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공공임대주택은 약 200만가구로 전체 주택의 9%를 차지한다. 중장기적으로 공공임대주택 비중을 5%로 줄이고, 공공분양주택 비중을 10%로 늘여야 한다. 공공분양주택의 의미는 부담가능성과 함께 공공성과 개인 소유권을 동시에 만족하는 것이다. 분양 이후에도 공공주택의 원래 취지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개인 소유권을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 올해 사전 청약한 동작구 수방사 아파트(8억원이상, 전용 59㎡)와 같은 고가 공공분양 아파트는 진정한 의미의 공공분양주택이라고 할 수는 없다. 수도권 중심으로 공공분양주택 100만호 공급 뉴딜을 추진해도 좋을 것이다. 노후되고 용적률이 낮은 기존 공공임대주택 단지를 대대적으로 초고층·고밀도로 재건축(용적률 400% 내외)해 공급가구수를 2배 이상 늘릴 필요가 있다. 일반주거지역의 각종 규제를 혁파하고 용도지역의 종을 상향해 늘어난 용적률에서 공공기여분으로 공공분양주택 공급을 획기적으로 확대해야 한다. 녹지가 훼손된 명목상 그린벨트를 과감히 풀어 부담가능한 공공분양 주택을 지을 필요도 있다. 서민 주거문제는 지금과 같은 ‘찔끔대책’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 과거에는 없던 혁신이 필요하다.이영한 서울과기대 교수 이영한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명예교수/지속가능과학회장

[기고] 늘어나는 금융 전산 장애, 제3자 품질 검증이 답이다

금융 분야의 IT 시스템이 날로 고도화되면서 덩달아 전산장애와 이로인한 소비자 피해가 갈수록 늘고 있다. 시스템 불안정으로 장애나 사고가 발생하면 업무 중단으로 이어져 최종적으로 이용고객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초래한다. 금융감독원의 ‘국내 금융업권 전산장애 현황’(2022년)에 따르면 시중은행,증권사,저축은행,보험사,카드사 등 전 금융권에서 발생한 금융사고는 2020년 198건에서 2021년 228건으로 늘어난 데 이어 지난해에는 8월까지 253건으로 전년도의 연간 발생건수를 넘어서는 등 꾸준히 늘고 있다. 금융사고가 늘어나면서 업무 중단, 고객 피해 및 VOC(고객 민원) 발생도 급증하는 추세다. 금감원은 2019년 이후 3년여 동안 금융사고로 인한 피해액을 346억원으로 추정했다. 실제로 한 시중은행에서는 모바일 뱅킹 장애 발생으로 몇 시간 동안 타행 송금 및 앱 접속이 제한됐고, 저축은행에서는 차세대 시스템 업데이트 후 하루 종일 대 고객 앱 작동이 마비됐다. 손해보험사에서는 전산 시스템 개편 중 고객 데이터 누락으로 환급이 몇 주 지연되는 장애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러한 전산 사고로부터 금융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해 정부기관의 규제와 감독 강화가 필요한 시대가 됐다. 또 다른 금융 환경 변화의 동인이 될 수 있는 이 같은 새로운 흐름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선 제3자 관점에서 품질 검증 등 다양한 계획을 철저히 수립해야 한다. 정순영 고려대학교 컴퓨터학과 교수는 "국내외 금융산업은 디지털트랜스포메이션(Digital Transforamtion)의 물결과 핀테크에 의한 금융서비스 혁신,빅테크(BigTech)의 금융업계 진출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IT가 새로운 비즈니스 목적에 부합하면서 빠른 결과를 내 주기를 기대할 뿐만 아니라 단 한 건의 오류도 없도록 짧은 시간에 대규모 검증을 완료할 수 있는 지속적인 테스트 자동화를 원하는 만큼, 신기술을 활용한 효과적인 품질 검증 계획과 실행의 필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고 피력한다. 제3자 품질검증은 객관적인 시각에서 다양한 테스팅 기술을 이용해 IT 시스템의 문제를 찾고, 나아가 잠재 결함을 예방하는 투명하고 효과적인 품질 확보 방법이다. 이런 많은 장점에도 그동안 국내 금융권에서는 도입을 외면해 왔다. 하지만 최근들어 국내 선두권의 생명보험사가 선제적인 검증 대책 차원에서 3자 품질 검증 컨설팅 사업을 추진해 업계의 주목을 받는 등 변화의 움직임이 형성되고 있다. "프로그램 등록·변경·폐기 내용의 정당성에 대해 제3자의 검증을 받을 것"을 권고한 금융감독원의 전자금융감독 규정 제29조 프로그램통제 정책이 점차 작동하는 모습이다.이렇듯 금융사들이 핵심적 시스템의 점검 항목에 대한 검증 및 보고서 작성, 잠재적 리스크 발생 요인 탐색 및 대응방안 수립, 데이터 품질 향상을 위한 DB 점검 및 성능 개선 등에 노력해야 한다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는 추세다. 이런 노력에는 품질 검증 및 시스템 테스팅 전문기업의 역할도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차세대 시스템 구축,클라우드 전환,대 고객 서비스에 대한 AI 적용 등으로 금융권 IT 시스템 검증의 중요성이 지속적으로 커지는 환경에 맞춰 제3자 검증의 모범 기업들이 많이 생겨나야 한다. 동시에 금융기관들도 검증기업들과 적극적인 상생 협력에 나서야 한다. 갈수록 고도화되고 복잡해지는 금융권시스템의 장애와 소비자들의 피해를 줄이려면 금융업계와 IT기반 검증전문기업이 힘을 합쳐 튼실한 검증 기반 구축과 대응체계를 확립해야 한다.오선근 아트랩소프트 대표이사금융권 전산장애 발생 추이

[이슈&인사이트] 중산층의 조건

수년 전 뉴스에서 회자됐던 한국의 직장인 설문조사에 따르면 한국에서 중산층의 기준으로 월 급여 500만 원 이상 받는 사람, 30평 이상의 부채 없는 집을 소유한 사람, 2000cc 이상의 중형차를 소유한 사람, 예금액 잔고가 1억 원 이상인 사람, 연 1회 이상 해외여행을 다니는 사람 등 주로 소득이나 재산 등 물질적인 측면만을 따진다. 이에 비해 선진국에서의 중산층의 기준은 우리와는 사뭇 다르다. 프랑스의 퐁피두 전 대통령이 ‘삶의 질’에서 정한 기준은 외국어를 하나 정도는 하는 사람,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하나 이상 있는 사람, 다룰 줄 아는 악기가 하나 이상 있는 사람, 남과 다른 요리를 할 수 있는 사람, ‘공분’에, 즉 공의에 의연히 참여하는 사람, 약자를 돕고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는 사람이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은 페어플레이를 하는 사람,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가진 사람, 독선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사람, 약자를 두둔하고 강자에 대응하는 사람, 불의·불평·불법에 의연히 대처하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미국 중산층의 교육을 책임지는 공립학교에서 가르치는 기준도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 자신의 주장에 당당한 사람, 사회적인 약자를 돕는 사람, 부정과 불법에 저항하는 사람, 10년 이상 정기적인 비평지를 읽어 보는 사람 등 물질적인 가치보다는 정신적인 가치에 방점을 둔다. 미국 명문 시카고대학에서 계층을 다룬 ‘계급(The Class)’이라는 사회학 강좌는 수강 신청이 ‘하늘의 별 따기’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이 강좌의 교재내용 중 흥미를 끄는 것은 거실 척도(living room scale)다. 거실의 물건이나 실내장식에 대해 점수를 매겨서 노동자,중산층,상류층 등으로 계급을 측정했다. 1935년에 미국의 저명한 사회학자인 샤핀(Chapin)이 개발한 이 척도는 당당히 교재 부록에 수록돼 있는데, 오늘날에는 정치적으로 옳지 않아 연구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필자가 1990년대 중반 미국 중서부대학에서 이 책의 거실척도를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매 학기 서베이를 해봤는 데 놀랍게도 응답한 학생들조차 이 척도의 정확성에 탄복했던 기억이 난다. 이 척도에 따르면 거실에 새 카펫이 놓여 있으면 마이너스, 낡은 카펫은 플러스로 점수를 매기는데, 이는 졸부가 실내장식을 호화스럽게 장식한다고 사회계층이 상승하지 않으며 자신의 업적, 능력, 소유물을 지나치게 자랑하는 것을 경계하고 겸손한 것을 장려하는 문화를 반영한다. 힙합 문화의 플렉스, 브래깅과 같은 자랑 문화와는 정반대로 보일 수도 있으나 이는 겸손한 척하면서 인종차별을 하는 백인 상류층을 비꼬고 일부러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또 책꽂이에 책이 가지런히 꽂혀 있기만 하고 바닥이나 테이블 위에 책이 없는 거실은 마이너스다. 오히려 책들이 펼쳐져 있거나 여기저기 놓인 거실이 가점을 받는다. 이것이 주는 메시지는 책은 읽으라고 있는 것이지, 장식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양한 잡지구독도 가점 중 하나인데 어떤 주제로 대화를 해도 의견을 내놓거나 대화에 끼어들 수 있는 교양이 상류층이 갖춰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거실에 재떨이가 없는 것은 마이너스인데, 담배를 피우는 손님이 방문했을 때 배려를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 배려를 본받아 필자는 재떨이와 함께 담배와 라이터까지 세트로 딸린 손님 접대용 상자를 학교 연구실 테이블에 놓아두었는데, 점심 식사 후 들려서 담배 한 대 태우고 가는 교수님들이 너무 많아 한 달을 못 버티고 치워버렸던 웃지 못할 추억도 있다. 물론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던 것이 용인되던 오래전 일이다. 요즘 시각으로 볼 때 거실척도는 물질로 계급을 구분한다는 지극히 비윤리적인 발상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척도를 통해 계층이나 계급은 물질만능이 아니라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특히 도덕과 교양 등의 정신적 가치도 함께 평가돼야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은 실내장식에도 반영된다는 데 시사점이 있다. 하지만 현대사회 들어 중산층의 의미가 점점 더 경제적·물질적 가치에만 쏠리고 있다. 물질주의 사상은 매체가 가속화한다. 한 자동차 광고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어떻게 지내냐’는 물음에 고급 자동차로 대답했다는 등의 표현이 나오는 것을 보면 물질만능주의 사상이 팽배하다는 세태를 반영한다. 진정한 사회계층은 이를 넘어선 의미를 지닌다. 한국의 중산층도 물질적 기준을 넘어서 정신적 기준이 반영되는 날이 오기를 소망해 본다.박주영 숭실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기자의 눈]  리볼빙 부추기는 카드사...금리폭탄에 내몰린 소비자는

"이렇게 꽉 막히고 어렵고 힘들 때 생을 마감하는구나 하는 걸 절실히 느꼈어요.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었어요." ‘토지’, ‘개국’ 등에 출연했던 액션배우 백찬기씨가 지난 5일 방송된 MBN 다큐멘터리 ‘특종세상’에 출연해 밝힌 심경이다. 백 씨는 카드빚을 감당하지 못해 신용불량자로 지내는 근황을 함께 전해 안타까움을 샀다.최근 저축은행 대출을 갚지 못한 차주 규모가 지난 코로나19 이후 정점에 달하고, 신용카드 리볼빙이 연내 최고 수준에 도달하는 등 각종 지표들에 따르면 백 씨와 같이 카드빚에 내몰린 저신용자가 급속도로 불어나고 있는 것으로 예상된다. 일부결제금액이월약정 서비스라고 불리는 리볼빙은 당장 카드값을 갚을 능력이 없는 취약층이나 저신용자가 주로 활용하는데, 연체없이 카드대금을 나눠서 갚을 수 있으나 금리가 18~19%에 달해 서민을 ‘이자 악순환’에 빠뜨릴 수 있다. 카드사들은 리볼빙을 통해 법정 최고 이율인 20%에 육박하는 이자를 취하고 있다. 롯데카드의 리볼빙 평균금리는 17.76%며, KB국민카드와 신한카드도 17%를 넘거나 근방 수준을 보이고 있다. 신용점수 700점 이하의 저신용자의 경우 금리는 더 높아져 KB국민카드의 경우 19.18%에 달한다. 현대카드와 롯데카드, 신한카드, 비씨카드, 하나카드도 18%를 웃돌고 있다. 카드사들은 취약계층이 어려울수록 수익이 늘어난다는 곱지 않은 시선에도 이자를 내릴 수 없다는 입장이다. 조달금리가 상승하며 리볼빙 수수료율이 덩달아 오르는 구조인데다, 최근 업계가 겪는 수익성 악화로 인해 형편상 더 내릴수가 없다는 게 이유다. 금융당국은 취약차주 보호를 위해 카드사에게 리볼빙을 자제할 것을 권고하는 한편 소비자에게도 경고 메세지를 지속적으로 보내왔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지난해 ‘여신전문금융회사 CEO’들을 만난 자리에서 "리볼빙은 불완전 판매에 대한 우려가 있는 게 사실"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권고’ 수준으로 저신용자 등 서민의 악순환을 끊어내거나 금융사 부실 뇌관에 대한 우려를 그치기엔 무리가 있어보인다. 설상가상 최근 금리인하 경쟁을 유도하기 위해 금리 공시 체제를 개편했으나 취지가 무색한 상태다. 한편, 리볼빙으로 연체율이 늘면 카드사 건전성도 해칠 수 있어 소비자 뿐 아니라 전 업권에도 악영향이 될 수 있다. 모든 지표가 극으로 치닫기 전 소비자 가계부채율과 금융사 건전성 모두를 안정시킬 특단의 대책 강구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pearl@ekn.kr박경현 금융부 기자

[주원 칼럼] 이-팔 전쟁발 중동정세 불안과 한국 경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분쟁은 이미 선을 넘어섰다. 이스라엘이 협상은 없다고 단언한 가운데 하마스가 있는 가자지구(Gaza Strip)로의 지상군 투입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지상군이 투입되면 인명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하루 속히 평화가 오기를 바래본다. 이-팔 전쟁을 오로지 경제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번 분쟁은 분명 이제 막 코로나 펜데믹을 벗어나 정상화를 도모하고 있는 세계 경제에 큰 악재다. 다행스러운 것은 대부분 전문가들이 공감하는 바이지만, 이번 분쟁이 주변국의 참전을 의미하는 확전으로 번지지만 않는다면 일정 수준의 쇼크에서 악영향이 멈출 것이다. 악영향은 바로 국제유가의 상승이다. 최근 국제 유가는 안정세를 보이다가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 이후 배럴당 90달러 수준으로 급등했다. 일각에서는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 150달러까지 갈 가능성까지도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이 정도 수준까지 국제 유가가 오르면 한국 경제에는 재앙이다. 한국은 2022년 원유소비량 기준으로 미국, 중국, 인도, 사우디, 일본, 러시아에 이어 세계 7위, OECD 국가에서는 미국과 일본에 이어 3위를 기록할 정도로 의존도가 높다. 특히 1인당 연간 원유소비량은 20.2배럴로 OECD 국가 중 4위, GDP1만 달러당 원유소비량은 6.3배럴로 1위를 기록하고 있다. 국가를 기업이라고 볼 때 국제 유가가 오르면 ‘대한민국’이라는 기업은 다른 기업보다 더 큰 비용 상승 압력에 직면하게 되고, 결국은 제품 가격이 비싸져 수출이 안 되거나 채산성 악화로 경제성장률의 하락압력을 받게 된다. 그래서 이번 이-팔 전쟁이 국제 유가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해야 한다. 국제 유가의 향방을 가늠해 보기 위해 과거의 사례를 살펴보자. 먼저 이번 사태와 가장 비슷한 성격을 가지는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가자지구에서 교전(2014년7월8 ~ 8월26일)이다. 이때 개전일 두바이 유가는 배럴당 106.9달러에서 종전 시 100.5달러로 하락했다. 당시 국제 유가는 교전 전후로 100달러 수준을 상당 기간 넘어 있었는데 이는 분쟁 때문이 아니라 ‘아랍의 봄’으로 대변되는 중동 국가들 자체의 전반적인 정치 불안 때문이었다. 둘째, 보다 확전된 개념의 걸프전(1991년 1월17 ~ 2월28일)과 미-이라크전(2003년 3월20 ~ 4월 9일)을 들 수 있다. 이때의 유가 흐름은 오히려 전쟁이 시작되면서 하락하는 모습을 보인다. 마지막으로 중동 지역의 분쟁으로 국제 유가가 폭등했던 사례는 1차 오일쇼크를 유발했던 1973년의 4차 중동 전쟁(다수의 산유국 참전)이다. 이 때 국제 유가는 4배가 급등했던 것과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공급이 불안해지면서 유가가 약 2.5배 상승했던 사례가 있다. 따라서 이번 이-팔 사태가 앞의 어느 사례를 따라갈지가 국제 유가의 향방을 가늠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첫 번째 사례, 즉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가자지구 내에서의 국지적 교전 가능성이 가장 커 보인다. 또 한 가지 변수는 이해관계를 가진 국가들의 생각이다. 이스라엘은 물론 주변 산유국과 미국까지도 이번 하마스의 공격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는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테러 수준의 공격이 아니고 로켓탄 수천 발을 사용하는 대규모의 공격이다. 즉 많은 준비와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각국의 정보기관에서 이를 놓치기 쉽지 않다. 특히 주변 산유국들이 몰랐을 가능성은 더더욱 없다. 어쩌면 이번 사태로 이전부터 관계 개선이 시급한 미국-사우디아라비아, 미국-이란 간 대화 채널에서 협상력을 선점하기 위한 국가별 고도의 국제정치적 역학 관계가 작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셈법은 더욱 복잡해진다. 요약하면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공격하더라도 국제 유가를 크게 올리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세계 경제의 화약고인 중동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장담 못 한다. 빨리 종전이 돼 평화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은 한결같다. 그럼에도 왠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 한국 경제에 큰 위협이 될 가능성을 지워버리기는 어렵다.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

[EE칼럼] 이-팔 전쟁과 석유파동 50년 주기설

지난 6일 유대교 축제일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전쟁이 발발했다.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인 ‘하마스’가 1973년 10월 전쟁 발발 50주년인 이날 기습 도발했다. 더 많은 중동 나라들이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참여하고 석유 전쟁에 협조하기를 유도한 것 같다. 전쟁 상황은 수시로 변하지만 일단 이스라엘의 전면 반격이 진행되고 있다. 이스라엘 총리는 하마스 궤멸 전쟁을 공식 선포했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지상군 투입을 위해 30만 명 이상의 예비군을 동원한다. 미국은 핵추진 항공모함을 이스라엘 앞바다로 전진 배치하는 등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 지원에 나섰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번 사태를 ‘완전히 사악한 행위’라고 언급했다. 미국과 서방 주도의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수교 시도 등 지역 긴장해소 노력이 이번 사태의 한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일단 부인하고 있지만 이란과 하마스의 연계가 밝혀지면 향후 확전이 불가피할 것 같다. 양측 사상자는 이미 2000명을 넘어서며 계속 늘어나고 있다. 국제유가는 당연히 지정학적 위험을 반영하여 미국(서부 텍사스유)이나 유럽(브렌트유) 선물 시장에서 배럴당 80달러 후반으로 4% 가량 올랐다. 이는 금리 인상과 경기 부진으로 원유 수요 증가의 한계가 반영된 9월 마지막 주의 90달러 중반 수준에서 약 7∼8% 하락한 수준이다. 따라서 지금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산유국이 아니라서 원유 수급에 미치는 영향이 작고, 사우디아라비아나 미국이 원유 생산량 유지 정책을 견지할 것이어서 급변 상황은 진정되고 있다. 러시아 역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곤궁으로 원유·가스 감산을 시행할 처지가 못 된다. 1973년 석유 파동 때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 등 주요 아랍 국가들이 일제히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지지하면서 강력한 석유 감산에 나섰지만, 이번에는 그런 움직임은 아직 없다. 결국 산유국들의 동시다발적 감산과 수출통제 가능성은 거의 없어 50년 전 상황과는 다를 것 같다. 따라서 우리는 종래와 전혀 다른 다음의 에너지-석유 위기 대응 전략을 심각하게 그리고 시급하게 추진해야 한다. 사실 1970년대 아랍 석유 금수조치의 충격은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 에너지 및 외교 정책의 주요 기반을 형성했다. 석유의 지정학적 무기로 사용 가능성은 모두에게 ‘에너지 독립’에 대한 강박적인 탐구로 이어지게 했다. 미국은 셰일 붐으로 인해 1952년 이후 처음으로 에너지 순수출국이 됐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에너지 독립’의 필요성이 다시 커지고 있다. 더욱이 청정에너지로의 전환 필요성으로 인해 에너지정책 수립 기반은 더욱 복잡해지고, 불확실한 기술적-경제적 여건에 직면해 효율적 정책 구도 정립 방안이 혼돈 속에 있다. 이런 불확실성에 대응해 많은 나라에서 이미 국민적 지지가 어느 정도 입증된 1970년대 식의 에너지정책을 주저 없이 채택하고 있다. 가격을 통제하고 에너지 독립을 중시하며 수입 감축을 추구한다. 이는 지금과 1970년대와 에너지 위험의 성상과 구조가 매우 달라졌다는 사실을 일정 부문 간과한 것이다. 지금 세계 에너지정책 기조는 미국과 중국 사이의 경쟁 심화, 분열과 보호주의 강화, 화석 연료에서 청정에너지로의 다소 ‘무질서한’ 전환 시도, 기후 변화의 영속적 폐해 가능성과 같은 종래와 다른 정책 수요가 있다는 걸 인지해야 한다. 결국 석유파동 50주년을 맞이하는 지금 우리는 1973년의 교훈을 냉철하게 되새겨야 한다. 필자는 ‘에너지 독립’이라는 개념은 ‘이루어질 수 없는 환상’ (Chimera)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어느 국가이든 오래 에너지 독립을 추구하지만, 깊이 통합되고 상호 연결된 세계 시장에서 그 독립 가능성은 매우 제약된다. 어떤 특정 산유국에서든 석유 공급 장애가 발생한다면 시장이 연료 가격을 결정하는 모든 국가의 유가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순 석유 수출국의 지위를 가진 미국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각종 연구에서 입증됐다. 따라서 진정한 에너지 안보는 단지 수입을 줄이거나 국산 생산증대보다 덜 사용하고 효율화하는 것에서 달성할 수 있다. 세계는 연비 기준을 부과하고 대체에너지를 개발하는 등 석유 사용감축 조치를 통해 1970년대 오일 쇼크를 극복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와 같은 에너지수입국의 경우 석유 위기에 따라 국가 차원의 원유 확보 장애 뿐 아니라 소비자 차원 적정가격의 휘발유 부족 사태에서 더 많은 고통을 받는다. 이는 유가 통제와 인플레이션에 대처하기 위해 채택된 복잡한 위험 할당 정책 때문이다. 석유 회사들은 정부 지침 등에 따라 원유 수입을 줄인 이후에 주유소 등 소매점에 대한 판매를 제한하는 시장 실패를 자초했다. 소비자 희생을 바탕으로 한 관-민 정책 야합으로 매도해도 할 말이 없다. 되돌아보면 1973년 당시 대부분의 석유는 장기 계약 형태였기 때문에 계약된 공급에 차질이 생기면 대체공급원 확보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지금은 대규모 현물 시장과 함께 다양한 대체에너지 시장, 그리고 청정 전환 시장이 잘 준비되고 갈수록 그 작동 효율이 높아지고 있다. 심지어 우크라이나 사태 당시 유럽의 러시아 가스 및 원유 가격 상한제 실시는 정책 실패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가격 신호 기능 약화는 항상 나쁜 선택이다. 더 많은 공급을 촉진하고 수요 억제를 통해서만 시장 및 정책 실패를 방지할 수 있다. 그 대신 정책 당국은 시장 주도자 위치를 고수하기보다 저소득층과 취약 가구 지원과 보호에 더 큰 관심을 둬야 한다.최기련 아주대학교 에너지공학과 명예교수

[EE칼럼] 난이도 높아진 전력망 운영 해결사로 등장한 AI

1902년 6월부터 스위스 특허국에서 특허 신청 서류를 검토하는 지루하고 평범한 일을 하던 아인슈타인은 이 덕분에 생각할 시간이 많았다. 1905년 여름, 아인슈타인은 다섯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중 하나가 <빛의 발생과 변환에 관한 하나의 모색적 관점에 대하여>라는 다소 모호한 제목의 논문이다. 광전효과를 다룬 이 논문으로 아인슈타인은 노벨상을 탔다. 이 논문은 한 세기가 지나서 등장한 태양광 산업의 이론적 기초가 됐다. 태양광 발전이 태양 빛을 전기로 바꾸는 빛의 연금술이 된 것이다. 고대 이집트에서 바람을 이용한 배의 돛대는 노예와 함께 주요한 동력원이었다. 중세시대 유럽에서는 풍차를 이용해 곡물을 빻았다. 네덜란드는 풍차를 제방 뒤쪽의 습지나 호수에서 물을 빼내 농경지를 만드는 데 사용했다. 유럽의 풍차는 밀을 빻는 것부터 용광로의 풀무를 돌리는 등 다양한 산업적 용도로 활용됐다. 19세기에 증기기관이 발명되기까지 수 백년 간 유럽 산업에너지의 4분의 1은 바람에서 나왔다. 우리는 수시로 전등과 TV를 켜고 끈다. 전력망은 수시로 변하는 전력 수요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 ‘급전가능(dispatchable)’한 발전원을 필요로 한다. 컴퓨터를 켜는 순간 바로 전기가 공급돼야 한다. 태양광과 풍력은 태양이 얼마나 강렬하고 바람이 어느 정도 부는지에 따라 발전량이 수시로 달라진다. 이런 변동성은 태양광과 풍력 산업 성장에 장애로 작용한다. 재생에너지 보급이 많은 국가의 전력망은 에디슨과 테슬라가 살았던 100여 년 전 전력망을 처음 도입했을 때와 매우 유사하게 작동한다. 날씨, 시간대, 요일, 계절에 따라 전력 수요와 공급을 맞추기 어려워진다. 대규모 송전 또는 발전 시설의 예기치 않은 손실과 같은 우발적 상황에 대한 관리도 중요해진다. 재생에너지가 늘어나면서 이런 불확실성과 변동성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 전력 시스템의 유연성을 확보하는 방식으로는 발전소, 전력망, 수요 측 대응, 에너지 저장과 같은 네 가지가 있다. 최근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70% 이상을 차지할 때 기후 조건에 따라 비용 최소화를 위해 유연성 자원을 어떻게 조합할 것이 최적인지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를 쾨펜-가이거 기후 구분에 따라 온대, 열대, 건조, 대륙성 기후와 같은 네 가지 기후로 구분해 살펴보자.여름이 무더운 ‘온대 기후’에서는 여름에 냉방 수요로 인해 최대 전력수요가 발생하고, 겨울에 난방 수요로 인해 이 보다는 작은 피크가 발생한다. 겨울에는 평균적으로 풍속이 높아 풍력이 피크 수요 대응에 도움이 되고, 일사량과 강수량이 많은 여름은 태양광과 함께 수력을 활용하는 것이 적절한 것으로 나타났다. ‘열대 기후’에서는 연중 전력 수요가 일정하다. 그러나 계절별로 풍속이 크게 달라지므로 건기에 공급 과잉이 발생한다. 우기에는 발전량이 떨어져 수력을 보완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건조 기후’에서는 계절별 전력 수요가 일정한 편이다. 태양광 발전량도 연중 균일하지만, 풍력 발전은 연초의 짧은 우기 동안에는 크게 줄어드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나라와 같은 ‘대륙성 기후’에서는 여름에 일사량이 최고조에 달하고, 겨울에 강한 바람이 분다. 태양광과 풍력이 상호보완적이므로 계절적 변동성에 대응하는데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최근 세계기상기구(WMO)는 7년 만에 엘니뇨 현상이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미국 해양대기청(NOAA)에 따르면 엘니뇨로 인해 일반적으로 겨울에 아시아 대부분과 캐나다 서부의 날씨가 따뜻해지고, 중국 남부와 미국에 강수량이 늘어난다. 여름에는 호주, 인도, 인도네시아, 필리핀, 특히 중미에 건조한 날씨를 일으킨다. 엘니뇨로 인한 가뭄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곳 중 하나인 파나마 운하에 병목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파나마 운하는 배가 산을 넘어야 해서, 갑문에 물을 채워 배를 높이 띄워 운하를 지나가게 한다. 가뭄으로 인해 운하에 물을 공급하는 가툰호(Gatun Lake)의 수위가 낮아졌다. 이에 최근 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선박 수가 줄었다. 전체 LNG 거래의 약 20%를 차지하는 아시아로 향하는 미국 LNG 선박이 가장 큰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가스 발전소는 신속하게 켜고 끌 수 있어 태양광과 풍력 발전의 변동성에 대한 백업 발전으로 유용한 데, 엘리뇨의 영향 때문에 가스 가격의 변동성이 커질 수 있다. 기후는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쳐왔고 지금도 그렇다. 농경사회의 농민은 갈라진 논을 바라보며 비가 오기를 기도했고, 따뜻한 햇볕으로 벼가 익기를 소망했다. 햇빛과 바람을 이용해 전기를 생산하는 현대 사회에서 다시 기후에 대한 의존도가 커졌다. 그러나 우리는 천수답 앞에서 기우제를 올리지 않아도 된다. 산초 판자가 ‘아무리 봐도 풍차가 틀림없다’며 말렸지만, 30개가 넘는 거대한 괴물을 향해 창을 겨누고 돌격한 돈키호테가 될 필요도 없다. 발달한 인공지능과 모델링 기법을 토대로 기후에 대한 더 많은 연구를 통해 기후를 예측하고 어떻게 대응할 지 차근차근 준비하면 된다.박성우 한국에너지공단 신재생에너지정책실장

[이슈&인사이트] 온플법, 서두를 일 아니다

박윤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2차관은 얼마 전 ‘글로벌 디지털 전쟁, 플랫폼 자율규제가 해법’이라는 글에서 "급변하는 플랫폼 시장에서 모든 문제를 입법을 통해 해소하려는 것은 국내 플랫폼의 혁신 동력을 저해할 우려가 있다. 정부는 국정과제로 민간 주도의 플랫폼 자율규제를 우선 추진하고 있으며 …"라고 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시작 단계인 플랫폼 자율규제의 성공을 위해 법ㆍ제도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면서 플랫폼 자율기구 설립ㆍ지원 근거와 참여 인센티브 등을 규정한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이 같은 자율규제방식은 매우 바람직한 것으로, 국내 빅테크 기업들은 환영하는 분위기다. 이미 8월 자율규제 방안 마련을 위한 플랫폼 민간 자율기구가 출범해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공정거래위원회는 이와는 다른 행보를 보인다. 공정위는 본래 ‘온라인 플랫폼 공정화법’(온플법)이라는 단행법을 제정할 계획이었으나 근래에 입장을 바꿔 단행법 제정보다는 기존의 공정거래법 개정과 자율규제 제도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자율규제에 초점을 둔 방향으로 정책을 변경한 것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온플법은 유럽연합(EU)의 DSA(디지털서비스법)과 DMA(디지털시장법)과 유사한 규제방식을 취하기로 해 시장 관계자들은 크게 우려하고 있다. DSA는 게이트 키퍼 역할을 하는 대형 디지털 플랫폼 사업자의 불공정행위에 대한 사전규제 도입이 목적이고, DMA는 EU 단일 시장의 디지털 부분에서 시장지배력을 보유하거나 시장지배력보유가 예견되는 게이트 키퍼에 대한 사전규제 도입이 목적이다. 이처럼 DSA와 DMA는 사전규제방식을 취하는데, 온플법 역시 사전규제방식을 취할 예정이다.이에 업계에선 자율규제와 사전규제 원칙이 충돌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시장 내 독과점을 견제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국내 온플법의 도입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EU의 DSAㆍDMA 도입 배경이 한국과 한참 다르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EU는 EU 플랫폼 시장을 장악한 애플, 구글, MS 등 미국의 빅테크 기업을 견제하고 자국 기업을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DSA와 DMA를 제정한 것이지, 자국 기업을 규제하려는 목적에서 제정한 게 아니다. 이에 반해 온플법은 한국 빅테크 기업에 대한 규제가 목적이다. 한국은 네이버, 카카오 등 토종 자생 플랫폼이 자국 시장을 선점한 세계적으로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다. 이들이 국내 시장을 독식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국제사회에서 한국 플랫폼 기업은 스타트업 수준이다. 국내 기업이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정책적으로 지원해도 모자랄 판인데 온플법 제정은 플랫폼 기업의 국제경쟁력을 악화시켜 국가 경제 성장을 발목잡는 모양새다. 무엇보다 온라인 플랫폼 관련 글로벌 스탠다드가 수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온플법을 도입하려는 것은 지나치게 성급하다. 가뜩이나 온플법에 포함될 것으로 예상된 규제들은 이미 공정거래법, 대규모 유통법, 전기사업법 등 기존 법령으로도 충분히 제재가 가능해 이중규제 여지도 있다. 지금 이 순간 해외 빅테크 기업들은 온라인 소통, 검색, 쇼핑, 문화생활 등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슈퍼앱’을 만드는 데 힘쓰고 있다. SNS를 보다가 마음에 드는 상품이 있으면 바로 구매하고, OTT 플랫폼에서 영화를 보다가 인상 깊었던 OST를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바로 들을 수 있는 식이다. 이는 단순히 사업 확장 목적이 아니라 사용자의 편의를 위한 측면이 크다. 모든 기업이 그렇듯 소비자를 만족시켜야 성장할 수 있다. 한국의 플랫폼 기업들도 이같은 세계적 흐름에 올라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한 노력을 규제로 옭아매어 한국형 글로벌 빅테크 기업이 탄생할 수 있는 싹을 자르는 일은 없어야 한다. 한국 플랫폼 기업들이 세계적인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정부가 기업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최준선 성균관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