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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E칼럼] 전기차 배터리 주도권 싸움, 리튬부터 확보해야

전기차 배터리 주도권 싸움이 치열하다. 배터리는 전기차 원가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시장에 나온 배터리는 리튬을 소재로 한 리튬이온배터리이다. 리튬배터리 시장을 두고 NCM(니켈 코발트 망간)과 LPF(리튬 인산 철)의 대결이 본격화 되고 있다. 한국의 NCM과 중국의 LPF로 대표되는 시장이 점차 가열되고 있는 양상이다. 양극재로 구분되는 두 배터리 중 니켈 코발트 망간 계열은 높은 성능과 주행거리를 장점으로 하고 있고, 리튬인산철(LPF)은 가격 경쟁력과 안전성을 특징으로 가지고 있다. 전기차와 ESS(에너지저장장치) 등장 초기만해도 에너지 효율이 높고 업력이 오래된 NCM이 글로벌 시장에서 우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중국의 적극적인 투자로 이후 LPF가 가격 경쟁력이 높아졌고 소재를 한번에 포장하는 셀투펙(CTP) 기술 등의 등장으로 점유율을 확대하면서 시장은 점차 양분화되고 있다. 최근에는 LPF가 더 우세하다.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전기차용 배터리시장은 한국 배터리 3사의 점유율을 합쳐도 중국 CATL의 점유율에 못미치고 있다. 2분기 양극재 평균 판가를 참고해 보면 LPF 셀은 미드니켈 삼원계 셀에 비해 27%가 낮다. NCM(A) 8과 같은 하이니켈의 경우 니켈 비중이 높다 보니 미드니켈에 비해 LPF와의 괴리는 좀 더 크지고 있다. 또하나의 배터리 원료 확보 경쟁은 리튬이다. “배터리 전쟁"의 저자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의 배터리 부문 수석 애널리스트 루카스 베드나르스키는 “앞으로 5년은 한.중.일 3국이 세계 배터리 시장에서 계속 우위를 차지하겠지만 10년후에는 미국, 유럽에 따라 잡힐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중요한 것은 배터리 핵심 원료인 리튬을 누가 먼저 확보하느냐가 핵심이라고 했다. 리튬 금속은 리튬 정광을 채굴하거나 염호(소금호수)에서 리튬을 뽑아내는 원재료 생산과 이를 제련해 탄산리튬과 수산화리튬을 생산하는 공정으로 나눤다. 현재 사용되는 리튬은 대부분 카메라, 노트북 컴퓨터의 재충전이 가능한 리튬전지에 사용된다. 또 전기차에도 리튬전지가 많이 쓰이고 있어 리튬의 수요는 크게 증가할 것이다. 이런 리튬의 세계 매장량의 절반 가량을 갖고 있는 지역이 남미의 칠레-아르헨티나-볼리비아인데 이 중 볼리비아가 가장 많은 매장량을 갖고 있다. 그런데 볼리비아가 최근 리튬 개발-생산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 6월 중국 컨소시엄과의 첫 리튬 개발 협약에 이어 이번에는 중국. 러시아 업체와 각각 리튬 개발 협약을 했다. 볼리비아 국영기업 꼬미볼과 해외 기업 간 협약을 통해 볼리바아의 리튬 개발은 리튬의 구조적인 수요 증가에 대한 확신을 강화시켜 주는 동시에 중장기적으로는 리튬 공급 증가에 기반한 가격 안정화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리튬 매장량에 있어 염호가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이다. 그 중에서도 칠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는 대표적인 리튬 염호 중심지이다. 칠레는 아타카마 염호에서 리튬을 생산하고 있으며, 아르헨티나도 현재 몇 군데 염호에서 리튬을 생산 중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국가 주도로 리튬 사업을 통제하고 있는 볼리비아는 리튬 생산을 하지 못하고 있다.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사막은 단일 지역으로는 세계 최대 탄산리튬 매장량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의 볼리비아 리튬 사업은 2010년 3월 26일 한국광물자원공사(현,한국광해광업공단), 한국지질자원연구원, 포스코 산하 포항산업과학연구원 등 3기관의 결의로 시작됐다. 한국 사업단은 볼리비아 염수를 이용한 독자적 탄산리튬 제조 기술 개발을 통해 볼리비아 리튬 개발권 경쟁에서 기술적 우위를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두고 있었다. 프랑스, 일본, 독일, 중국 등 세계 여러 나라들이 볼리비아 리튬 확보 경쟁에 뛰어 들었지만 결국 우리나라 사업단이 최종적으로 선정되었던 이유는 독창적인 리튬 개발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튬을 얻기 위해 한국의 노력은 볼리비아 정부를 감동시켰고 마침내 2011년 7월 29일 한국과 볼리비아 간 리튬 사업은 체결 되었다. 볼리비아는 여러 차례 리튬 개발을 추진 했지만 정권의 불안정성과 리튬의 국유화 정책 등의 이슈로 그 동안 성과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리튬 개발 자체가 국익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지는 현시점에서 볼 때, 볼리비아의 리튬 개발은 리튬의 구조적 수요 증가를 더욱 확실하게 하는 요인이자 중장기적으로 리튬 가격을 안정화 시키는 요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국내 배터리 소재 기업들이 향후 리튬 가격 변화가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만큼, 볼리비아의 리튬 생산 확장 의지 현실화를 우리의 리튬 공급망 확보에 잘 활용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 당시 우리 정부가 다른 국가보다 먼저 볼리비아 리튬 사업을 따낸 노하우를 거울삼아 민관이 협력해 다시 리튬 확보에 나서야 한다. 강천구

‘사조그룹 명예회장’ 이일향 시인 별세

시조 시인 이일향 씨가 지난 2일 별세했다. 향년 94세. 고(故) 이일향 시인은 주진우 사조그룹 회장의 어머니이자 사조그룹과 푸른그룹의 명예회장이었다. 이 시인은 1930년 대구에서 태어나 1949년 사조산업 창업자인 고 주인용 선대 회장과 결혼으로 연을 맺고 슬하에 2남 3녀를 뒀다. 회사 경영은 주인용 회장 별세 후 장남인 주진우 회장이 이어받았다. 고인은 1989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은관 서훈을 받은 시조계 거장 고 이설주 시인의 딸이다. 이일향 시인은 1979년 남편과 사별한 후 정완영 선생으로부터 시조를 배우며 그리움과 상실감을 극복했다. 이후 1983년 '시조문학'으로 등단하며 본격적으로 시조 시인의 길을 걸었다. 작품집으로 '지환을 끼고' '밀물과 썰물 사이' '석일당시초' 등 15권이 있다. 2016년에도 시조집 '노래는 태워도 재가 되지 않는다'를 출간하는 등 최근까지 왕성하게 활동을 이어갔다. 고인은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윤동주문학상, 노산문학상, 정운 이영도문학상, 한국시조시인협회상 등을 수상했으며 1992년 신사임당상으로 추대됐다. 가장 최근작인 '노래는 태워도 재가 되지 않는다'는 구상문학상을 받았다. 삶에 대해 따뜻하고 긍정적인 시선과 사랑을 고스란히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는 이 시인은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고문, 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 여성시조문학회 회장 등을 지냈다. 고인은 사조산업 이사, 명예회장에 오르는 등 시조 작품 확동 외 사조산업 경영에도 참여했다. 특히, 1983년 남편의 호를 딴 취암장학재단을 세우고 이사장을 맡아 인재 양성과 교육 발전에 헌신했다. 이후 대구가톨릭대에 매년 장학금 1억원을 전달하는 등 장학 사업에 힘썼다. 유족은 주진우 사조산업 회장, 주영주 전 이화여대 교수, 주연아·주안나 씨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장례식장, 발인은 5일, 장지는 경기 용인시 천주교용인공원묘원이다. 조하니 기자 inahohc@ekn.kr

[EE칼럼] 초대형 국내 민간 에너지기업 탄생에 대한 기대

허은녕 서울대학교 에너지시스템공학부 교수/ 산업통상자원부 에너지위원회 위원 100조 원 규모의 자산을 가진 에너지기업이 우리나라에도 드디어 등장했다. 제대로 된 부문별 수직계열화를 갖춘 에너지기업이 이제 우리나라에도 생긴것이다. 11월 1일 자로 출범한 SK E&S와 SK이노베이션의 합작회사 이야기이다. 1962년 대한석유공사로 시작한 SK이노베이션은 1980년 선경이 인수하여 민영화 이후 오랫동안 '유공'으로 국민에게 불려 왔으며, 1990년대 이후 SK의 이름 아래 여러 법인으로 나누어져 있다가 이번에 통합법인으로 재출발하게 된 것이다. 통합 SK이노베이션은 자산 100조 원대, 매출 88조 원대로 국내는 물론 아시아권 민간기업 중 최대 규모이다. 한국전력공사의 2023년 매출액이 88조 원 규모였으니 실로 국내 최대 에너지기업이 탄생한 것이다. 물론, 아시아에서도 중국 등에 더 큰 규모의 에너지 공기업들이 있지만 이들을 포함해도 아시아에서 8~9위권이다. 실로 엄청난 규모이다. 통합 SK이노베이션은 이제 에너지자원의 개발을 담당하는 상류 부문은 물론 정유, 석유화학, 주유소 등 중류 및 하류를 모두 갖추고 있는 명실공히 제대로 된 에너지기업이다. 엑손모빌(ExxonMobil), 로열더치셸(Royal Dutch Shell), 아람코(Aramco) 등 국제적인 에너지기업은 상·중·하류 부문을 모두 한 회사 안에 가지고 있어 실로 우리나라 기업으로서는 공기업 및 민간기업을 통틀어 국제적인 에너지기업들과 가장 유사한 사업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있는 에너지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전력, 원자력, 재생에너지, 천연가스, 도시가스, 그리고 수소와 배터리 등 에너지 분야의 주요 사업들을 모두 가지고 있어 명실공히 제대로 된 에너지 대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대형기업 탄생에 대한 기대로 주주총회에서 외국인 주주 95%가 찬성표를 던졌다고 한다. 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기관인 ISS와 글래스루이스가 합병안 찬성을 권고한 영향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은 주주가치 훼손 우려를 표명하며 반대 의견을 내었다. SK이노베이션 주주가 합병으로 손해 볼 수도 있음을 우려하였다고 한다. 통합 SK이노베이션은 당장에는'한 지붕 두 가족' 형태로 운영된다고 한다. 통합법인은 SK이노베이션이라는 이름으로, SK E&S 부분은 SK이노베이션 E&S이라는 사내 독립기업(CIC)으로 운영한다. 또한 SK이노베이션의 자회사인 SK트레이딩인터내셔널과 SK엔텀, 그리고 배터리 회사인 SK온 등도 함께 합병 절차를 밟는다고 한다. 이를 통하여 미래 먹거리에 대한 투자 자금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SK E&S가 매년 1~2조 원대의 안정적인 영업이익을 창출하고 있었기에 다양한 미래 사업에 대한 투자 역량을 확보할 것으로 기대된다. SK의 발표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은 합병을 통하여 2030년에는 연간 영업이익 20조 원대를 달성하겠다고 목표를 세웠다. 두 기업의 사업역량과 연구개발 역량을 모두 합한다고 해도 달성이 그리 쉽지 않은 목표이다. 특히 우려되는 부분은 현재 수익 대부분이 정유 및 가스 부분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향후 미래 최대 먹거리로 평가받고 있는 전력 기반 탄소중립 시스템과 자원순환 사회시스템의 구성과 운영에 상당한 사업 기반과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통합 SK이노베이션이지만 기업의 체질과 과감한 사업 분야 구조조정 과정을 잡음 없이 부드럽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제적 경쟁력 있게 효과적으로 이룰 수 있을지는 아직은 미지수이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현재 전 세계 시장의 불확실성이 너무나 커져 있으며 이들 불확실성이 단기적으로 해결될 기미가 전혀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합 SK이노베이션에 거는 기대는 정말 크다. 에너지 분야는 규모의 경제성(economies of scale)이 매우 중요한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지난 반세기 내내 국제적 규모의 에너지기업 하나 제대로 없어 선진국은 물론 자원 보유국들에 무시당하고 사업에 참여할 기회도 얻지 못하였다 한탄해 왔다. 이번에야말로 우리나라도 제대로 한번 에너지 사업을 해 볼 수 있겠다는 기대, 그것도 국가 예산에 기대지 않고 민간기업의 역량으로 해 볼 수 있다는 기대, 이 기대가 아주 들뜬 마음으로 통합 SK이노베이션을 바라보고 또 응원하게 되는 이유이다. 허은녕

[기자의 눈] 과열되는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 선의의 투자자 피해 우려

MBK파트너스와 영풍의 공개매수로 시작된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이 두 달 가량 지났다. 그동안 MBK파트너스·영풍의 공개매수는 물론 경영권을 확보하고 있던 최윤범 회장 측이 내놓은 자사주 대항 공개매수까지 마무리됐다. 결과적으로 양측 모두 과반수 지분을 확보하지 못하면서 승부는 2라운드로 넘어갔다. 현재 지분을 더 많이 확보한 MBK파트너스·영풍 측이 고려아연 이사회를 장악하기 위해 임시 주주총회 소집을 청구하고 법원의 가처분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이에 최윤범 회장 측은 최근 대규모 유상증자를 추진하겠다고 밝혀 반격을 시도하는 모습이다. 문제는 이 같은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주가가 출렁이면서 소액주주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점이다. 공개매수가 시작되기 직전 1년인 지난해 9월부터 올해 8월 말까지 기간 동안 고려아연의 평균 주가는 49만543원에 불과했다. 그러나 공개매수가 과열되면서 경영권 분쟁 당사자인 양측이 공개매수 가격으로 83만원과 89만원을 제시하는데 이르자 지난달 15일 고려아연 주가는 80만원을 돌파했다. 양 측의 공개매수가 마무리된 이후에도 경영권 분쟁 지속된다는 소식에 연일 주가가 급등하면서 29일에는 154만3000원까지 치솟았다. 경영권 분쟁 전 평균 주가보다 3배 이상 급등해 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고점은 길지 않았다. 고려아연의 유상증자 소식이 전해진 30일 하한가를 기록해 하루만에 46만2000원이 급락했다. 지난달 31일에도 8만3000원이 추가로 떨어졌음을 감안하면 고점에서 산 개인투자자는 이틀 만에 주당 54만원 이상 손해를 본 셈이다. 더 큰 문제는 주가 급등락을 예상하고 투자 행위를 한 소액주주 뿐 아니라 선의를 가지고 지금의 고려아연을 지키기 위해 힘을 보탠 사람들도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경영권 분쟁이 발생한 이후 고려아연 사업장이 소재한 울산시에 거주하는 시민들과 노조원을 중심으로 고려아연 주식 갖기 운동이 진행돼 왔다. 고려아연 주식 갖기 운동이 시작됐을 당시 이미 주가가 49만원 이상 치솟았기에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혹은 그 이후 주가가 다시 그 전 수준으로 되돌아간다면 고려아연을 지켜주겠다고 나선 선의의 주주들이 그만큼의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는 말이 있다. 어떤 분쟁이든 장기화되고 과열될수록 그 관계자들의 피해나 손실 사례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 피해나 손실은 분쟁을 주도하는 강자들보다는 그 주위에서 영향을 받는 약자들에 전가되는 경우가 많다. 이번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도 마찬기자다. 분쟁 당사자들이 한 발 멈춰 분쟁이 너무 과열되지 않았는지 한 번 생각해볼 때가 아닌가 싶다. 윤동 기자 dong01@ekn.kr

[기자의 눈] 구조조정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최근 산업계 전반에 불어닥친 구조조정 한파가 맵차다. 시장 침체 장기화와 기술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인력 감축' 카드를 꺼낸 것이다. 자회사 분사 및 대규모 희망퇴직을 단행하는 기업이 눈에 띄게 늘면서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단 불안감이 증폭되고 있다. 특히 조직개편이란 이름의 인위적 구조조정에 대한 우려가 크다. 구조조정 대상자가 된 이들은 원활한 의사소통과 절차의 투명성, 명확한 선정 기준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계획안 설계 과정에서 이해당사자인 노동조합과의 사전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됐다는 이유에서다. 조직과 사람이 헤어질 때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기도 하다. 자신이 왜 '자리를 빼야 할' 사람이 됐는지도 모른 채 사측 통보에 짐을 싸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회사 발전에 크고 작게 이바지해 온 직원들을 소모품 취급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희망퇴직의 자발성이 사실상 정리해고의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비판도 적잖다. 물론 부득이하게 구조조정을 결정한 후 희망퇴직과 관련해 개인 면담을 시행하는 것 자체는 법에 위배되지 않는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퇴직을 직·간접적으로 강요하는 사례가 있단 것이다. 신청 기한을 연장한 후에도 이를 거부하면 각종 불이익을 주는 식으로 압박 수위를 높이는 것이다. 근래 들어선 이 같은 전략이 인력 조정 과정에 폭넓게 쓰이는 모양새다. 최근 한 대기업 임원이 자회사 전출 대상 직원 설명회에서 “자회사로 이동하지 않으면 태스크포스(TF)에 잔류하게 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모멸감과 자괴감에 힘들어질 수 있다"고 말하는 영상이 공개돼 논란을 빚고 있다. 사실상 자회사로 옮기지 않을 경우, 고된 업무를 맡기는 방식으로 불이익을 줄 수 있음을 내포한 셈이다. 이를 듣는 직원들의 고용불안이 커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본사에 남아 모욕을 감내하기보단 마음이 편해질 것이란 판단에 자회사 전출이나 희망퇴직을 신청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일을 겪고 있는 이들의 대부분은 자녀를 성인으로 키워 낸 부모 세대다. 희망퇴직 신청 가능 연령대가 30대로까지 확산되고 있는 추세를 감안하면, 멀지 않은 미래엔 이들의 자녀들도 같은 일을 겪게 될 지 모른다. 나무에서 썩은 가지를 쳐내는 것과 같이 더 큰 성장을 위해선 때론 인력 감축이 불가피할 수 있다. 그러나 회사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선 인재 확보가 필수적인 만큼 이런 조치가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훗날 회사의 상황이 나아져 다시 인력을 모집할 때 과연 인재들이 믿고 지원할 수 있을까. 옆자리 동료의 밥그릇이 정당한 이유 없이 뺏기는 과정을 목격한 이들의 신뢰를 다시 얻을 수 있을까. 구조조정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이태민 기자 etm@ekn.kr

[이슈&인사이트] 삼성전자가 소니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2001년 1월 일본의 경제주간지 동양경제는 소니의 이데이 노부유키(出井伸之) 회장을 '21세기형 경영자'로 선정하였다. 그런데 10년 만에 소니는 정크본드 수준으로 퇴락했다. 소니의 몰락은 최고경영자의 리더십 문제가 아니라 일본 전체에 40년 전에 만연했던 이공계 기피 현상에서 빚어진 기술개발 핵심역량의 붕괴에 있다. 그런데 현재 한국의 입시 배치 상황이 바로 소니를 몰락시킨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우수한 이공계 지망생은 의약계로 진학하며, 공학계열은 차하위 학생이 진학한다. 서울공대생의 20%가 미적분을 모르고, 진학한 학생들도 반 이상이 의전원, 로스쿨, MBA 과정으로 전공을 바꾼다. 40년 전의 일본 사회의 이공계 기피에 의한 기술개발 핵심역량의 붕괴로 소니가 삼전(삼성전자)에 추월당하듯, 현재 한국의 이공계 기피 현상은 삼전이 대만의 TSMC 등에 추월당하는 평행이론이 전개되고 있다. 삼전이 소니를 이기고 최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던 것은 1980년대 초의 대학입시 배치표에 답이 있다. 당시 한국 최고 인재들이 진학했던 학과가 바로 전자공학과였다. 그들이 바로 삼전의 기술개발 핵심 인력인 이공계 박사 6천여 명과 연구 인력 6만 여명이었다. 1999년만 해도 삼전의 4배에 달하던 소니의 시가총액은 현재 ¼에 불과하다. 1999년만 해도 소니는 세계 5위의 특허 출원 기업이었고 삼전은 16위에 불과했다. 그런데 2022년 현재 삼전은 세계 1위다. 소니는 10위 내에도 이름이 없다. 아직은 삼전의 기술력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1990년대에 입학한 우수한 이공계 출신이 임원급 기술자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영국 업체 퓨처브랜드가 '미래 가치가 높은 브랜드 순위 1위 기업'으로 선정한 이유다. 그러나 10년 이내에 이들이 은퇴할 때 잃어버린 일본의 30년이 반복될 것이다. 2023학년도 속칭 명문대학으로 통하는 SKY(서울대·연세대·고려대) 대학의 이공계 정시모집에 합격한 뒤 등록을 포기한 학생이 1,200여 명에 달한다. 이는 모집 정원 4,660명의 1/4에 해당한다. 이들 등록을 포기한 합격생 중 상당수는 의학 계열로 옮겨갔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의대 정원 확대라는 일본의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1970년 일본 후생노동성은 1985년까지 인구 10만 명당 의사 수를 150명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모든 현에 의대를 설치했다. 1961년 3,000명의 의대 입학정원이 1973년 6,200명으로 배가 되었고, 현재는 9,357명으로 3배가 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의대 정원 확대가 일본의 이공계 기피 현상을 촉진하였고 그 결과가 소니 몰락을 초래했다. 소니와 삼성전자의 평행이론은 한국의 50배에 달하는 중국의 이공계 졸업생 470만 명에서 예견된다. 양적으로도 비교가 안 되지만 질적으로 더욱 무섭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라서 의대 선호도가 지극히 낮다. 2019년 이래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세계 특허 출원 1위 국이 되었다. 삼전의 미래사업기획단이 일본 전기 산업의 쇠퇴와 부흥의 미시적 연구에 국한하지 말고 한국, 일본, 중국의 사회 전반에 대한 마크로 연구로 큰 개혁의 그림을 그려야 한다. 소니와 같은 편법이 아닌 기술력 본연에 충실한 해법을 내야 한다. 삼전 경영진이 사과했지만,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이재용 회장이 작년 한 해 동안 7번이나 대통령을 수행하여 해외 방문하는 여유를 보인 점이다. 모건스탠리가 지적한 오류에 대한 해답도 요원하다. HBM 시장에서 경쟁력을 입증하지 못한다. 엔비디아에 대한 납품은 미뤄지고 있다. 비메모리 부문은 만성 적자다. 파운드리에서 막대한 투자에도 TSMC와의 격차는 커지고 있다. 외국인들은 무차별 순매도한다. 8만 전자는 5만 전자가 되고 시가총액은 450조에서 350조 원으로 줄었다. 삼전이 소니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호암이 반도체 선언을 하던 1983년 2.8 도쿄 선언의 기본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미래사업기획단의 첫 과제는 의학 계열 진학 수준의 우수한 이공계 인력을 삼전으로 유도하는 방안을 강구하는 일이다. 윤덕균

[EE칼럼] 전력망 위기 극복, 국가적 대타협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의 전력망이 한계에 다다랐다. 산업 발전과 친환경 에너지 전환이라는 두 가지 도전 과제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전력망 인프라는 이미 포화 상태다.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이 늘어나면서 전력망 운영의 복잡성은 더욱 증가하고 있으며, 곳곳에서 송전제약이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외적 압박마저 가중되고 있다. EU는 2023년 10월부터 CBAM을 시행하고 있으며, 미 의회에서 준비 중인 탄소규제 법안들은 더욱 광범위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미 의회에서 논의 중인 청정경쟁법(CCA)과 외국오염부과금법(FPFA)은 EU CBAM이 철강, 알루미늄 등 6개 부문에 국한된 것과 달리, 석유화학, 식품첨가물, 플라스틱 등을 포함한 광범위한 산업군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 EU 공급망실사법(CSDDD)까지 발효되면서 글로벌 기업들은 협력사들에게 RE100 달성은 물론, 탄소배출, 환경영향, 인권 등을 포함한 전반적인 지속가능성 입증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완제품 제조기업뿐만 아니라 공급망 전반에 걸친 중소·중견기업들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재생에너지 발전사업자들은 심각한 송전제약에 직면해 있다. 발전은 가능하지만 전력을 보낼 수 없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송전선로 부족으로 계통 연결을 대기 중인 태양광 발전소의 용량만 10.9GW로, 이는 원전 11기에 맞먹는 규모다. 이러한 상황이 더욱 심각한 것은 전력망 문제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재생에너지 발전설비는 2023년 기준 24.9GW로 2017년 대비 4배 증가했다. 문제는 이 중 약 70%가 전남·경북 등 특정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송전망이 이러한 급격한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계통 연결 지연이 심화되고 있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전력망 확충을 책임지고 있는 한전이 대규모 부채로 적극적인 투자가 어려운 실정이라는 대목이다. 전기요금 통제로 인한 적자 누적은 필수 인프라 투자마저 위협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전국 곳곳에서 발생하는 송전설비 증설에 대한 님비 현상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이 단순한 기업 차원의 대응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이다. 재생에너지 발전단지를 구축하고 싶어도 송전망 부족으로 계통연계가 불가능하고, 산업단지 내 자가발전 설비를 설치하려 해도 기존 전력망의 용량 제약에 막히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결국 전력망 문제는 개별 기업의 생존을 넘어 국가 산업 경쟁력의 문제가 되고 있다. 이제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전력망은 더 이상 한전 혼자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도로, 철도와 마찬가지로 국가 핵심 인프라로서 정부의 직접적인 재정 투자가 필요한 시점이다. 미국이 인프라 투자 법안을 통해 대규모 전력망 투자를 진행하는 것이나, 독일이 에너지 전환을 위해 송전망에 대규모 국가 투자를 단행한 것은 좋은 선례가 될 수 있다. 한편, 송전설비 확충에 대한 지역사회의 반발 문제도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독일의 사례처럼 지역주민들과 함께하는 전력 인프라 구축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단순한 일회성 보상을 넘어, 지역사회와의 지속가능한 협력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국회는 지역 간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중심 역할을 고민해볼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 지역별로 전력 생산자, 송전설비 인근 주민, 수혜 기업, 지방정부가 참여하는 '지역 전력망 협의체'를 통해 지역 내 대화, 지역 간 대화를 통한 대타협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이 모든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식의 전환이다. 전력망은 특정 지역이나 집단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다. 산업 경쟁력과 일상생활을 지탱하는 핵심 인프라인 전력망의 확충 없이는 우리의 미래도 없다. 전기를 사용하는 모든 국민이 이 문제의 당사자이며, 해결의 주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전력망 문제는 단순한 기반시설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존립의 문제다. 반도체, 이차전지 등 우리의 주력산업이 도약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필수적이다. 탄소중립이라는 시대적 과제 역시 튼튼한 전력망 없이는 달성할 수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력망의 공공재적 가치를 인식하고, 이를 위한 사회적 비용 분담에 합의하는 것이다. 정부의 과감한 투자, 기업의 책임 있는 참여, 지역사회와의 진정성 있는 소통이 어우러질 때, 우리는 이 난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윤희

[이상호 칼럼] 북한군 파병에 따른 한국의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 딜레마

지난 6월 19일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북한을 공식 국빈 방문하여 양국 관계를 포괄적 전략 동반자로 격상시키는 조약에 서명했다. 특히 양국 간 군사 동맹에 준하는 군사협력 및 자동 개입 가능성을 시사하는 조항을 조약에 명시하여 북한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어떤 형태로도 개입하게 될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했다. 이 조항이 한국을 겨냥한 러시아의 도발이라는 분석이 있었지만, 우크라이나에서 고전하는 러시아가 북한의 탄약과 인력 지원을 확보하려는 시도라고 보는 의견이 많았다. 북한 병력이 러시아에 여러 지역에서 활동 중인 정황은 이미 몇 주 전에 식별되었고 조만간에 우크라이나군이 장악한 러시아 영토인 쿠르스크 지역에 배치될 것으로 알려졌다. 많게는 1만 2천 명 정도의 병력이 참전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온 상황이다. 미국 국방부는 28일(현지시간) 북한이 러시아로 병력 약 1만명을 파견했으며 그 중 일부는 이미 우크라이나 쪽으로 더 가깝게 이동했다고 밝혔다. 북한이 훈련을 위해 러시아 동부 지역에 군인 총 1만명 정도를 파견했으며, 향후 수주간 우크라이나 가까이서 러시아 병력을 증원할 것이라고 덧붙혔다. 이에 한국에서는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를 포함한 각종 장비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확산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도 “상황 좌시 않고 대응하겠다“면서 한국의 개입 가능성이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이 당장 공격 무기를 제공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지원 여부는 북한의 우크라이나 개입 수준과 위협 수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한편, 군과 국가정보원은 모니터링 요원과 전문가를 우크라이나에 파견해 북한군 포로를 심문·관리하고 우크라이나와 협력하여 북한의 전력과 전술을 탐색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소련이 지휘하고 중국이 지원하여 북한이 일으킨 6.25 불법 침략전쟁에서 유엔군의 도움으로 기사회생한 한국으로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불법 무력 침공을 좌시할 수 없는 입장이다. 더군다나 러시아가 참전 대가로 한국을 위협할 수 있는 다양한 무기체계와 첨단 기술, 금전을 북한에 제공하는 등 소위 '레드라인'을 넘는다면 한국은 반드시 조치해야 하는 상황에 몰리게 된다. 한국은 그동안 돈독했던 관계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러시아가 한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상황을 용납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한국이 흥분해서 서둘러 행동할 필요는 없다. 러시아가 북한에 대해 어떤 지원을 약속했고 어떻게 이를 실천하는가를 보면서 단계별로 상응한 대응을 하는 게 효과적일 것으로 판단한다.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제공할 수 있는 지원은 다양하다. 한국은 막대한 산업 생산 능력을 보유한 방위산업 강국으로 지금까지 유럽 전체가 지원한 포탄보다 한국 한 나라가 지원한 포탄 수가 훨씬 많다. 여러 첨단 무기와 장비로 완비한 한국군의 재래식 전력은 미국 이외 전 세계 자유민주주의 국가 중 가장 강력한 수준이다. 한국이 마음만 먹으면 러시아의 힘을 뺄 방법이 여러 가지 있다. 그러나 유럽 국가도 참전 안 한 전쟁에 한국이 단독으로 군사 개입을 할 필요는 없다. 만약 한다면 나토와 공조를 강화하면서 필요한 것만 제한적으로 지원하는 단계적인 접근 방식이 유효하다. 더 중요한 것은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이 향후 동북아 지역 위기의 불씨가 되는 것을 막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패배하지 않도록 서방세계의 국제 공조 강화가 필요하다. 매우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일촉즉발 상황인 현 국제관계를 잘 관리하기 위해 한국의 냉정한 판단과 대응이 필요한 시기이다. 이상호

[기자의 눈] 정부 인증 배터리서 불나면 정부가 책임지나

배터리 화재로 인한 '전기차 포비아'가 극심해지자 정부가 나섰다. 배터리 인증제를 시행해 전기차 탑재 배터리에 더욱 깐깐한 기준을 적용하겠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정부의 이런 발표에도 소비자들의 민심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정부가 검사한다고 불이 안날 것도 아니며, 만약 정부 인증 배터리서 불이 나도 정부는 책임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배터리 인증제의 기준도 부실해 '유명무실한 정책'이 될 것이란 우려가 쏟아지고 있는 현실이다. 지난 15일 국토교통부는 전기차 배터리 안정성 인증제 시범사업을 실시했다. 이 사업엔 현대자동차, LG에너지솔루션 등 여러 전기차 관련 기업들이 참여한다. 배터리 인증제의 목적은 단순하다. 배터리의 안정성을 정부가 직접 검사해 화재 위험을 낮추기 위해서다. 그간 제조사 자기인증으로 이뤄지던 절차에 정부가 개입해 보다 까다로운 기준을 적용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제도는 다소 허점이 많다. 첫 번째로 '정부 인증' 마크를 단 배터리를 정부가 책임 지냐는 것이다. 기존 자기인증 방식에선 온전히 자동차 회사가 책임을 져왔다. 차를 잘못 만들었으니 제조사가 당연히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이에 정부가 낀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 정부에서도 안전하다고 했는데 불이 난다면 정부도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비판과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심화된다면 전기차 화재 발생이후 책임을 묻는데 시간이 전보다 더 지체될 것이며 애꿎은 소비자만 전전긍긍하는 시간이 길어질 것이 분명하다. 두 번째로는 배터리 인증 기준이 팩이 아닌 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선 자동차 회사와 배터리사의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고 있다. 반면 대부분 관계자들은 '셀 단위' 인증을 강조하고 있다. 배터리는 셀을 모아 팩으로 구성된다. 보편적으로 소비자들이 알고 있는 전기차 배터리는 '팩'이라고 불린다. 현행대로라면 전기차 화재 발생시 '배터리팩'을 조사하기 때문에 셀을 만든 배터리 회사는 책임에서 자유로운 상황이다. 대부분의 전기차 화재는 배터리 오류로 인해 발생하는데, 이 배터리를 만든 제조사는 수사망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배터리 인증제도 발표 당시 '셀 단위' 인증에 대한 기대가 있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해당 내용은 빠져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제도가 허점이 많은 유명무실한 정책이란 지적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전기차 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불이 나지 않을 것이란 '신뢰'가 중요하다. 신뢰를 받기 위해선 이를 뒤받쳐 줄 믿을 수 있는 국가 정책이 필요하다. 그저 보여주기식 제도가 아닌 정말 국민들을 위한 전기차 화재 대책이 나오길 촉구한다. 이찬우 기자 lcw@ekn.kr

[EE칼럼] 에너지 정책에 대한 신뢰성이 무너지고 있다

다른 모든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정부의 에너지 정책에 신뢰(trust)가 갖는 의미는 절대적이다. 에너지 인프라는 최소 20~30년의 수명을 갖는 설비로서 초거대자본이 투입되기 때문이다. 발전설비, 송배전망, 천연가스 저장 탱크, 집단에너지 설비 등은 최소 몇천억 원 때로는 수조 원의 어마어마한 자본이 투입된다. 이렇게 큰돈을 조달하려면 설비 완공 후 안정적인 수익성을 보이는 현금흐름이 필요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에너지 인프라는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되어 독점 및 수요독점의 횡포에 취약할 수 있다. 당사자간의 장기계약, 정부의 규제 그리고 안정적 에너지 정책이 주는 신뢰성으로 이러한 문제점이 보완되어야 한다. 우리 정부는 신뢰성 있는 안정적 에너지 정책을 통해 급속한 에너지 인프라의 건설을 지원해 왔다. 그 결과 다른 어떤 개발도상국보다 빠른 속도로 에너지 인프라를 건설했다. 안정적 에너지 공급에 정부의 공이 적지 않았다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이제 경제성장에 따라 에너지 산업의 규모 자체가 엄청나게 커지고, 산업구조도 공기업 독점체제에서 민간이 참여하고 경쟁하는 개방적 시스템으로 변화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에너지 산업의 규모와 구조가 변했다고 해서 에너지 거래의 본질이 바뀐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정부의 에너지 정책이 갖는 신뢰성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정부의 에너지 정책에 대한 신뢰성이 무너져 가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한전과 가스공사 등 대표적인 공기업의 재무상태가 급격히 악화되고 있다. 그 결과 이들과 거래하는 수많은 에너지 사업체와 소비자들에게 그 위험이 전가되고 있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한전과 가스공사의 적자, 미수금 및 부채 규모에 대한 '알람(alarm)'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다. 문제는 그 후유증과 이에 따른 연쇄효과다. 재무적 어려움에 처한 한전의 송전망 공사 지연으로 동해안에 건설한 여러 석탄발전소와 원전의 가동에 어려움이 발생하였다. 현금이 떨어진 한전은 발전자회사에 대해 무리하게 중간배당을 받아냈으며 발전사업자에 대해 결제주기를 줄이고 대금 입금도 늦추려 하고 있다. 가스공사는 재무적 어려움과 자가용 직수입 사업자에 빼앗기는 시장을 만회하기 위하여 평균요금제에서 개별요금제로 공급방식을 일방적으로 바꾸었다. 그 결과 효율성이 떨어지는 오래된 발전소가 계약만료에 따른 개별요금제 적용으로 급전순위가 개선된 반면 효율성 높은 신규 발전소가 남은 계약기간으로 인하여 평균요금을 적용받는 바람에 급전순위가 역전되는 웃지 못할 사건이 벌어졌다. 이런 식으로 급작스럽게 공급조건을 변경하는 것은 상법에서 말하는 '신의성실의 원칙'에 위배된다. 2011년 9·15 순환정전 전후, 거듭되는 전력부족으로 정부는 몇 차례의 전력수급기본계획에 걸쳐 민간 석탄발전소의 건설을 독려한 바 있다. 그러나 10여년 후 공급과잉으로 사정이 달라지자 당초 '차액계약(vesting contract)'으로 지급하려던 공급조건을 바꾸고 용량요금 지급에 어려운 입지여건을 고려하지 않는 등 시큰둥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19년에 완공되어야 할 동해안-수도권 송전선이 2026년 이후로 무한정 연기되어 민간 발전소의 경제적 어려움은 가중되고 있다. 최근 정부가 발표한 지역별 차등요금도 소매요금이 아닌 도매요금의 차등화며 이마저도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양분화로 섬세한 시그널 효과는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정치적 여건의 미성숙으로 소매요금 지역 차등화는 쉽지 않다고 하지만 발전설비를 갑자기 이전시킬 수도 없고 새로운 발전설비의 입지에도 시간이 걸리게 마련인데 도매요금 지역 차등화를 시행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게다가 비수도권에 신규 발전설비를 완공한 사업자에게는 날벼락 같은 소식일 수 있다. 사업도 개시하기 전에 불이익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업자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깜짝 방식으로 지역별 도매요금 차등화를 시행하는 것은 정책의 신뢰성을 훼손하게 된다. 조성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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