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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E칼럼] 황해의 위기, 미세먼지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

얼마전 우연히 다롄, 칭다오 등 중국 해안가에서의 끔찍한 오염상태를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 악취는 물론이고 기형적인 물고기들이 떠다니며 모래사장마저 거품처럼 끈적해진 상태였다. 얼마 깊지도 넓지도 않은 황해를 사이에 두고 지척에서 한국은 해산물와 소금 등을 조달하고 있다. 다행히 남쪽에서 올라오는 해류가 한반도 해안가를 먼저 타고 북상해 발해만을 거쳐 중국 해안으로 남하하기에 크게 체감 못하는거 같다. 하지만 해류에 희석되어 봐야 이 좁은 황해 내에선 거기가 거기일 뿐이다. 한국 정부는 나름 연안 환경 관리를 위해 다양한 정책을 시행해왔다. 대표적인 정책은 연안오염총량관리제로, 특정 연안에 흘러드는 오염 부하량을 해당 해역의 환경 수용능력 이내로 제한하는 방식이다. 이를 위해 환경부와 해양수산부는 분기별로 연안 수질 상태를 모니터링하고, 각 지자체에 생활하수와 산업폐수 등의 총 배출허용량을 할당하여 관리하고 있다. 아울러 지자체들은 지역 개발계획을 수립할 때 환경개선 사업과 연계하여 오염물질 배출량을 감소시키는 노력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바다 건너 중국은 이와 관련해서는 그냥 손 놓고 있는 듯하다. 동부 연안에 거대한 공업 지대를 형성했고, 이에 따른 폐수와 폐기물이 상당 부분 황해로 흘러들고 있다. 그 결과 황해의 오염 수준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수준으로, IUCN(국제자연보전연맹)은 황해 생태계를 멸종위기 등급으로 분류할 정도다. 중국 당국은 늘 그렇듯 공식적으로는 환경 보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중앙정부의 표면적 스탠스와는 달리 정작 해안 지방정부들은 투자 유치를 위해 환경 단속을 소홀히 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산둥성 연안에서는 질소 비료와 하수로 인한 대규모 녹조 현상이 빈발하고, 그 중 일부는 해류를 타고 내려와 한반도 서남해안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고된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언제나 그렇듯이 한국이 제기한 문제를 정치적 의도로 몰아가거나 지나친 반응으로 깎아내리곤 한다. 이런 중국의 태도는 자국 연안 개발에만 매몰될 뿐, 이웃 국가가 겪는 피해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관심한 그들의 속내를 드러낸다. 중국이 경제적 성장가도를 달리는 동안 황해는 마치 중국만을 위한 거대한 폐수 처리장으로 전락해 버렸다. 이와 비슷한 이슈로는 중국발 미세먼지를 들 수 있다. 대기와 해양과 같이 여러 나라가 공유하는 자원을 둘러싼 오염 문제는 전형적인 “공유지의 비극" 양상을 띤다. 한국과 중국 정부 모두 미세먼지 문제의 심각성을 언급했지만, 중국은 자국도 피해자 라거나 한국 내부 배출 탓이라는 논리를 내세우며 책임을 분산시켰다. 그 사이 한국은 수동적으로 실내공기청정기 보급이나 비상저감조치 같은 자학적 자구책에 기댈 뿐, 근본 원인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미세먼지와 황해 오염은 본질적으로 분명한 차이가 있다. 미세먼지는 국경을 넘어 공기 중에서 끊임없이 섞이고 이동하기 때문에 어느 국가의 배출량이 얼마나 되는지를 정확히 수치로 잡아내기가 사실상 어렵다. 중국에서 배출한 미세먼지 비율이 크다고 짐작은 할 수 있으나, 특정 배출원을 정확히 지목하여 책임을 묻기엔 한계가 명백하다. 이에 반해 황해의 해양오염은 과학적이고 명확한 물리·화학적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바닷물과 퇴적물에서 오염물질 농도를 분석하면 오염의 진원지와 그 기여도를 비교적 정확히 밝혀낼 수 있다. 실제로 황해의 퇴적물과 해수 내 중금속이나 영양염 농도를 측정한 결과, 중국 연안에서 유입되는 하천 부근이 압도적으로 높은 오염 수치를 나타냈고, 한국 연안으로 다가올수록 농도가 눈에 띄게 감소했다. 이는 중국의 육상 배출원이 황해 오염의 결정적 원인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근거다. 미세먼지처럼 복잡한 모델과 추정에 의존할 필요 없이, 비교적 단순하고 명료한 수질 데이터를 근거로 중국발 오염 책임을 피할 수 없도록 압박할 수 있다는 점이 결정적인 차이다. 이 명확성은 향후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중국의 책임을 묻고 대응책을 이끌어내는 데 효과적인 카드로 활용될 수 있다. 중국이 민감해한다고 해서 우리 정부가 늘 저자세와 소극적 태도로 일관할 이유는 전혀 없다. 한국 국민의 생존권과 직결된 중대한 국가 이익으로서, 중국이 그토록 강조하는 “핵심 이익"에 해당되는 사안이다. 환경 피해에 대한 책임과 배상은 국제적으로 널리 인정된 '오염자 부담 원칙(Polluter Pays Principle)'을 엄중히 적용하면 된다. 이미 국제법적 틀에서도 초국경 환경 피해를 야기한 국가의 책임이 명백히 규정되어 있다. 1972년 스톡홀름 선언과 1992년 리우 선언에서 분명히 밝힌 바와 같이, 어느 나라도 자국 관할에서 발생한 활동으로 인해 타국 환경에 피해를 주어선 안 된다. 국제사법재판소(ICJ) 역시 국경을 초월한 환경 피해 방지 의무를 수차례 재확인했다. 한국 정부는 한중 환경장관 회담이나 한중해양협력협의회 등 공식적인 외교 채널에서 황해 오염 문제를 최우선 의제로 삼고, 공동 모니터링 체계 구축과 구체적 오염 저감 목표를 이끌어내야 한다. 그간 정부 차원에선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해왔지만 이재명 정부는, 최근 이슈가 된 중국의 불법 구조물 이슈와 함께 새 정부 들어서는 대로 시급히 대응해야 한다. 더 이상 중국의 눈치를 살피며 미온적인 접근으로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다. 유종민

[데스크칼럼] 21세기 AI 전성시대 ‘AI맹’ 없어야

지난해 미국 오픈AI의 생성형 챗GPT가 한창 국내외 이슈를 몰고 왔던 시기에 한 모임에서 인공지능(AI)을 재판 과정에 도입하는 문제가 안주거리로 올랐다. 당시 필자를 포함해 참석자 전원이 'AI 재판관' 도입에 찬성했다.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인간 재판관'보다 AI 재판관이 더 빠르고 정확하게 일을 처리함으로써 사법 서비스가 크게 향상될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다만, AI 재판관의 업무 영역을 놓고는 의견이 갈렸다. 판사와 변호사 역할까지 AI에 맡겨 개인의 감정과 가치관이 개입되는 '인간적 오류'를 차단해야 한다는 실용주의 견해와 법리 해석의 '기계적 한계'를 지적하며 판결만은 마지노선으로 지켜야한다는 인본주의 견해로 팽팽히 맞섰던 것이다. 오픈AI의 챗GPT가 지난 2022년 11월 첫 공개된 이후 전세계는 그야말로 'AI 블랙홀'이라 불릴 만큼 AI 전성시대로 빠르게 빨려들고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국내 AI 기술 수준은 최근 몇 년 새 가장 빠르게 성장한 국가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해 기준으로 미국의 AI 기술 수준을 100으로 친다면 한국은 88.9%로 1.3년의 기술격차를 보이고 있다. 중국 92.5%(0.9년), 유럽 92.4%(약 1년)보다는 뒤지지만 일본 86.2%(1.7년)에는 앞서고 있다. AI기본법도 지난해 12월 국회를 통과해 내년부터 본격 시행을 앞두고 있다. 또한, 지난 5월 출범한 이재명 정부는 'AI 3대 강국'을 국가산업 아젠다로 정하고, 100조원 규모의 AI 투자, 전국 AI데이터센터 중심의 AI 고속도로 구축, 독자적 AI 주권 확보를 위한 '소버린 AI' 정립 등을 적극 추진한다. 이렇듯 대한민국 AI산업을 위한 법적, 제도적 지원 체계는 완비된 셈이다. '빨리빨리 문화'의 장점과 '탁월한 응용력'의 강점만 제대로 발휘한다면 한국이 글로벌 AI산업을 선도할 것이라 믿는다. 그럼에도 간과해서는 안될 부분이 있다. AI산업의 육성과 발달이 '누구를 위한 것'이냐는 점이다. 초기 발전단계에선 연구개발과 투자를 국가와 기업이 주도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성과물에 따른 이익 역시 국가와 기업에 우선권이 주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다만, 이전의 단순 기계적 발달이 가져온 민간의 수용성 속도와 달리 21세기의 인공지능 전환(AX), 디지털 전환(DX)의 급속한 발달은 수용성의 진입장벽을 높이 쌓아 그 과정에서 분배와 포용의 불균형(소외) 문제를 심각하게 야기할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말 AI기본법과 함께 제정된 '디지털포용법'이 주목받는 점도 이런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루가 멀다않고 급변하는 AI 및 디지털 시대에 사회적 약자의 기술 소외(불평등)를 해소하는 문제는 AI산업 발전 못지 않게 사회통합과 AI 대중화 차원에서 필수다. 마침 이재명 정부가 표방한 'AI 3대 강국' 아젠다에 전국민 대상 AI 무료 서비스를 표방한 '모두의 AI 프로젝트'가 포함돼 있어 다행이다. 20세기에 '컴맹(컴퓨터를 모르는 문맹자)'이란 신조어가 있었지만, 21세기에는 'AI맹'이 사회문제로 등장하지 않기를 희망한다. 이진우 기자 jinulee6464@ekn.kr

[기자의 눈] 국그릇 든 대통령, ‘쇼’가 아닌 제도를 남겨라

“후루룩". 이재명 대통령은 식판 위에 놓인 국그릇을 통째로 들고 마셨다. 지난 14일 충북 진천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을 찾아 신입 공무원들과 나란히 앉아 점심을 먹은 자리였다. 얼굴 전체가 국그릇에 가려졌고, 식판은 말끔히 비워졌다. 국그릇도 직접 치웠다. 이후 대통령실은 이 대통령의 옆모습을 찍은 사진을 공개했다. 소탈한 '보통 사람'의 모습을 보여줬다. 문득 이런 광경이 그리 낯설지 않다. 당장 윤석열 전 대통령도 재임 중 정부세종청사 구내식당을 찾아 식판에 고추장불고기를 담고 공무원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식사를 마친 뒤엔 식판을 퇴식구에 직접 반납했고, 조리사에게 “잘 먹었다"고 인사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구내식당을 이용하고선 직원들에게 깎듯이 인사하는 모습을 공개했다. 다른 역대 대통령들도 취임 초 비슷한 이벤트가 있었다. 문제는 취임 초기의 이런 파격 행보와 격식 파괴가 대통령과 정권의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명박 전 대통령만 해도 성공한 기업가 이미지로 당선돼 강한 리더십과 실용주의를 내세웠지만, 결국 110억원대 뇌물수수와 횡령·배임 혐의로 옥살이를 했다. 윤 전 대통령도 직접 고기를 굽는 등 '소탈'함을 자랑해왔지만 결국 12·3 불법 비상계엄과 각종 비위 혐의로 구속기소된 상태다. 그런 의미에서 이 대통령 뿐만 아니라 모든 공직자의 전통으로 자리잡았으면 하는 게 있다. 임기 내내 공과 사를 명확히 구분하고, 공금을 절대 사적으로 낭비하지 않는 것이다. 먼저 이 대통령이 관저의 식비와 비품비 등 사적 비용을 자부담하는 전통을 확립해라. 미국은 이미 19세기부터 그렇게 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임기 동안 실천한 적이 있지만, 이 대통령은 아직까지 이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대통령실도 이를 묻는 에너지경제신문의 질문에 “바빠서 겨를이 없다"며 대답이 없다. '별 걸 다 묻는다'며 귀찮아하는 태도마저 엿보인다. 진짜 파격은 이벤트가 아니라 제도에서 나온다. 국그릇을 들고 국을 마시는 대통령의 '소탈한 한 끼'보다 국민이 알고 싶은 건, 그 식사의 비용을 누가 부담했는가다. 과연 이 제안을 받아 들여 이재명 정부가 공금 집행과 관련해 '성공한 정부'가 될 수 있을까? 출발은 살짝 불안하다. 지난해 국회에서 대폭 삭감됐던 대통령실과 검찰의 특수활동비가 이번 추경을 통해 절반가량 되살아났다. 삭감 당시의 명분은 사라진 채 '내로남불'만 남았다. 국그릇 하나로 시작된 '보통사람 대통령' 이미지가 단지 '쇼'가 아닌 제도화된 정치문화로 이어지는 것. 그것이 이재명 정부가 남길 수 있는 진짜 유산이 될 것이다. 김하나 기자 uno@ekn.kr

[박원주 칼럼] 중국 제조 2025의 교훈

2015년 5월, 중국 국무원은 '중국 제조 2025(Made in China 2025)'라는 산업발전 전략을 발표했다. 리커창 총리가 주도했던 이 정책은 성장 정체와 중등국 함정에 대한 경계심 속에서 출발했으며, 2025년까지 자국 제조업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했다. 반도체, 인공지능, 로봇, 신에너지차, 항공우주, 해양공학, 전력장비, 고급철강, 신소재, 바이오의료 등 10대 핵심 전략 산업의 자급률을 70% 이상으로 높이겠다는 구체적 계획이 제시됐다. 중앙정부는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200억 달러 규모의 '빅펀드'를 조성했고, 지방정부들도 자체 산업클러스터를 구성해 기업 유치와 R&D 투자를 경쟁적으로 추진했다. 외국 기업에는 기술이전 압력을 가했고, 국내 기업들엔 글로벌 M&A를 독려해 선진 기술을 단기간에 확보하려는 초공격적 전략이 전개됐다. 당시 한국 정부에 중국의 제조 2025는 매우 심각한 위협으로 인식됐다. 이미 조선과 석유화학 등 일부 주력 산업이 중국발 저가 공세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반도체, 디스플레이, 2차전지 등 첨단 산업 분야마저 추격당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정부와 산업계는 중국과의 기술 격차를 면밀히 점검하기 시작했다.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2016년 7월 사드(THAAD) 배치 발표 이후 중국의 한한령 보복이 이어졌고, 이는 단순한 한류 콘텐츠 차단에 그치지 않고 산업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중국 전기차에 지급되는 보조금 대상에서 한국산 배터리가 배제되며, 국내 2차전지 기업들은 중국 시장에서의 입지를 잃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전기차, 배터리, 로봇 등 전략 산업의 글로벌 판도는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제 중국이 공언했던 '세계적 수준'의 제조업 달성 시한이 다가오고 있다. 냉정한 분석이 필요한 시점이다. 중국은 2차전지, 전기차, 산업용 로봇, 스마트폰 등 일부 분야에서 목표에 근접하거나 초과 달성했지만, 핵심 기술 확보에는 여전히 한계가 명확하다. 전기차의 경우 BYD와 NIO 등의 수출 확대로 2015년 1% 미만이던 글로벌 점유율은 2024년 30%를 넘어섰고, 휴대폰 분야에서도 화웨이, 오포, 비보 등이 전 세계 시장의 2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산업용 로봇은 세계 시장 점유율 50% 이상을 차지하며 일본과 독일을 추월하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반도체 분야에서는 200억 위안 규모의 우한훙신(HSMC) 프로젝트가 부실과 비리로 좌초되었고, 핵심 경영진은 기술 확보 없이 공장만 짓고 자금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외에도 지방정부가 주도한 반도체 프로젝트 수십 건이 실패하거나 중단되며 '좀비 팹(zombie fabs)'이란 말도 생겼다. 철강, 타이어, 로봇 등에서도 과잉 설비와 저가 투매로 재무구조가 악화되고, 전기차는 밀어내기식 수출로 시장 점유율은 확보했지만 기업들의 수익성은 오히려 악화되고 있다. 특히 반도체 분야는 국가적 역량을 집중했음에도 성과가 저조하다. 중국은 외국 기술인력을 유치하고, 해외 기업의 기술공여를 압박하는 등의 방법을 동원했지만, 극자외선(EUV) 장비나 고급 설계 기술 등 핵심 분야에선 여전히 미국, 일본, 네덜란드에 크게 뒤쳐져 있다. 반도체 산업의 자립 시도는 오히려 미국의 경계심을 자극했고, 미중 기술패권 경쟁을 촉발했다. 미국은 반도체법을 제정하고 IPEF 추진, 첨단장비 수출 통제, M&A 차단 등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견제해 왔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집권한 현재는 기술·무역의 전 영역에 걸쳐 규제와 압박이 더욱 노골화되고 있다. 결국 제조2025는 기술 자립과 일부 산업의 경쟁력 강화에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고비용 저효율 구조와 국제 갈등을 피하지 못했다. 동시에 이 정책은 한국에도 예기치 못한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우리는 중국이 우리 기술을 얼마나 빨리 따라잡을지에만 집중했지만, 정작 더 큰 충격은 미국의 반격이었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는 과정에서 핵심 기술과 공급망을 아예 자국으로 이전하려 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한국 기업들도 미국 내 생산 확대를 요구받고 있다. 반도체, 2차전지, 전기차 등 한국의 주력 산업이 미국 중심 체제로 재편되는 가운데, 중국 시장에서의 입지는 약화되고 있다. 10년 전 중국의 산업 전략은 지금의 글로벌 공급망과 지정학 질서를 완전히 재편해 놓았고, 그 여파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중국 제조2025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포인트는 중국식 경쟁 모델이다. 중앙정부가 큰 방향을 제시하되, 실제 산업 선정과 기업 육성은 지방정부가 주도하며 지역 간 치열한 경쟁을 통해 승자만 살아남는 구조였다. DJI, BYD, 화웨이 등은 바로 그런 환경에서 성장했다. 기업 보호와 대마불사의 프레임에 갖혀 있던 우리 정책이 혁신 스타트업들의 건강한 성장을 발목 잡아 온 것은 아닌지 반성할 부분도 있어 보인다. 이에 더해, 실패한 분야도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한국의 중형 컴퓨터 사업이 실패했지만 그 경험과 인재들이 훗날 IT 강국의 토대를 마련했듯, 중국의 실패 역시 향후 산업 지형 변화에 따라 또 다른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다. 우리가 중국의 산업정책 동향을 앞으로도 두눈 똑바로 뜨고 주시해야 하는 이유이다. 박원주

[기자의 눈] 믿고 샀다가 물렸다…리포트는 왜 늘 ‘매수’일까

처음 주식에 발을 들였을 때, 기자도 리서치 리포트를 믿었다. '매수' 의견이 붙은 종목이라면 당연히 오르는 줄 알았다. 분석도 꼼꼼하고, 목표주가도 훨씬 위였다. 그대로 샀고, 지금도 몇 년째 물려 있다. 주가가 반 토막이 나도 애널리스트는 '매수'를 바꾸지 않았다. 그제야 알았다. 리포트 속 '매수'는 '진짜 매수'가 아닐 수 있다는 걸. “왜 비관적으로 보느냐"며 항의하는 개인 투자자, “이번 리포트 이후 인터뷰는 어렵겠다"는 기업 홍보팀. 애널리스트는 이 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 기업과 관계를 지켜야 하고, 투자자와 신뢰도 잃지 말아야 한다. 이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나온 리포트의 상당수는 여전히 '매수'다. 아무리 실적이 꺾이고 주가가 빠져도, '매도'는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실제로 올해 상반기 국내 주요 증권사들이 낸 수천 건의 리포트 가운데 '매도' 의견은 0.1%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대부분은 찾아보기 힘들고, 무려 18곳의 증권사는 상반기 내내 단 한 건의 매도 리포트도 내지 않았다. 실적이 꺾인 기업조차 “저평가" “일시적 조정"이라며 낙관적으로 해석된다. 시장을 읽는 나침반이어야 할 리포트가 오히려 기대만 부풀리는 도구가 되는 셈이다. 2차전지 대표 종목 중 하나는 몇 분기째 실적이 뒷걸음질 치고 있지만, 최근 수십 건의 리포트 중 단 한 건만 '중립'이었고 나머지는 전부 '매수'였다. 일부 리포트는 “주가 하락이 이해되지 않는다"며 시장을 탓하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종목은 영업이익이 반 토막이 났는데, 목표주가는 도리어 상향 조정됐다. 실적은 낮추면서도 주가 기대치는 높이는, 앞뒤 맞지 않는 해석이다. 이런 흐름은 리서치 기업의 구조적 한계와도 맞닿아 있다. 애널리스트가 분석하는 기업은 동시에 자기 회사의 유력 고객일 수 있다. 부정적인 리포트 한 줄에 향후 인터뷰가 막히거나, 마케팅 협조가 끊기는 건 업계에선 낯설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리서치센터는 직접 수익을 내지 못하는 조직이라는 인식도 여전하다. 수치 분석보다 인간관계가 더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되는 이유다. 물론 최근엔 일부 증권사에서 다른 흐름도 감지된다. 주가가 급등한 방산·증권주에 대해 '보유'나 '트레이딩 바이' 의견을 내는 경우가 생겼다. “좋은 기업이 항상 좋은 주식은 아니다"는 조심스러운 메시지도 조금씩 담긴다. 리서치 리포트는 투자자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지도와도 같다. 하지만 그 지도가 늘 같은 길만 표시한다면, 결국 아무도 그 경로를 믿지 않게 된다. 애널리스트가 때로는 불편한 현실도 짚어낼 수 있어야, 리포트는 다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윤수현 기자 ysh@ekn.kr

[박영범의 세무칼럼] 죽음, 이혼, 등산배낭, 쓰레기에 재산 숨긴 체납자들

'세금은 죽어야 피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로 죽음과 이혼으로 세금을 피하고, 등산배낭과 쓰레기 속에 재산을 숨기는 일이 일어났다. A 씨는 백억 원 대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데 생전에 부동산을 팔면 고액의 양도소득세를 내고, 상속재산으로 물려주면 절반은 상속세로 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A 씨는 백억 원의 부동산을 양도한 후 양도 대금을 어딘가 숨기고 양도소득세를 체납한 후 본인 명의 재산은 없이 고액 체납자로 사망하고, 자녀들은 상속 포기하여 재산 절반에 달하는 양도소득세와 상속세를 한 푼도 안 내는 상속에 성공하였다. 국세청 체납 추적팀은 체납자가 생전에 고액의 양도 대금을 입금한 예금 계좌를 금융 추적하여 양도 대금이 수백 회에 걸쳐 현금인출기를 통하여 소액 현금 인출되거나 타인의 계좌를 거쳐 현금으로 인출된 사실을 포착하였다. 현금인출기 CCTV를 확보하여 자녀들이 A 씨의 금융 계좌에서 양도 대금을 현금으로 찾아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자녀 주거지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수색하여 현금 등 수억 원을 찾아서 압류하고 체납액에 충당하였다. 또한 민법에 따라 자녀들이 상속을 승인한 것으로 간주하여 A 씨의 체납액을 자녀들에게 전액 승계하여 체납처분 면탈범으로 고발하였다. B 씨는 수도권 소재 아파트를 양도하면 수억 원의 양도소득세가 나올 것을 예상하여 취득 금액을 허위로 신고하여 양도소득세 납부 기한을 최대한 늦추었다. 예상한 대로 취득 금액이 허위인지 확인한 세무서에서 수억 원 양도소득세 고지서를 보내자 바로 부인과 협의 이혼하고 본인이 가지고 있는 아파트를 부인에게 재산 분할하여 증여하여 재산 없는 고액 체납자가 되었다. 국세청 체납 추적팀은 이혼 후에도 이혼 전과 동일하게 부부간 생활비 등 금융거래하고 배우자의 주소지에 동거하는 등 위장 이혼으로 재산을 회피한 사실을 포착하고, 배우자에게 증여받은 아파트 명의를 되돌려 놓으라는 사해행위 취소 소송을 하고 처분금지 가처분하였다. 이처럼 죽음과 이혼으로 세금을 피하려는 사례도 있지만, 현금·금괴·수표를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숨겨놓은 것을 찾아내는 사례도 있다. C 씨는 상가를 팔고 수억 원의 양도세를 내기 싫어서 양도 대금 중 5억 원을 100만 원권 500매 수표로 출금한 후 서울 시내 은행지점 15곳을 방문하여 수표를 어딘가 숨겨 놓았다.국세청 체납 추적팀은 실거주 확인을 위해 주소지 소재 CCTV를 확인하여 보니 수표를 현금으로 바꾼 날 등산 배낭을 들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경찰관 입회하에 강제로 집 문을 열어, 안방 서랍장에서는 현금 및 귀금속을 발견하였고, 지녔던 등산 배낭을 찾아내 열어본 결과 현금, 금괴 뭉치 수백 돈 등 총 3억 원을 발견하여 징수하였다. D 씨는 가전제품 도매업 법인의 대표이사로 법인이 거짓 세금계산서를 수취한 사실이 밝혀져 부과된 부가가치세를 납부하지 않음에 따라 제2차 납세의무자로 지정되어 수억 원을 고지할 것을 알고 법인과 자신의 금융 계좌에서 수억 원의 수표를 발행하여 어딘가 숨겨놓았다. 국세청 체납 추적팀은 수표 지급 정지만으로는 체납 세금에 충당할 수 없으므로 미제시된 수표를 확보하기 위해, 탐문을 통해 체납자가 거주하는 집을 수색하여 신문지로 덮어 쓰레기로 위장한 10만 원권 수표 다발을 5억 원어치를 발견하여 압수하여 징수하였다. 국세청은 고액 체납자에 대하여 국세청은 본인의 계좌는 물론 소비지출이 많은 배우자 금융 계좌도 정밀 추적하고, 이와 연계된 친·인척 명의의 금융 계좌도 확대하여 추적하여 자금 추적하고 있다. 또한 현금인출기 CCTV, 주차장 출·입차량 기록, 도로 CCTV 분석 등 탐문과 잠복을 통해 특정 장소에 숨겨놓은 재산을 찾아내고 있지만,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재산을 몰래 숨기는 경우 국세청에서 찾아내는 것은 한계가 있다. 주변인 중에 고액 상습 체납자로 숨겨놓은 은닉재산이 있다면 국세청 홈택스와 국세상담센터에 국번 없이 126 번호로 신고하면 최대 30억 원 포상금도 지급하고 있으니, 적극적으로 신고하여야겠다. 박영범

[EE칼럼] 기후위기 시대, 실용적 기후정치를 바란다.

임은정 공주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2025년 7월, 세계 곳곳이 기후 재난에 시달리고 있다. 미국 텍사스와 중국 충칭에서는 기록적인 집중호우로 도시 기능이 마비됐고, 인도 북부와 유럽 남부는 50도에 육박하는 폭염 속에서 전력 공급이 한계에 이르고 있다. 이상기후는 더 이상 '기후위기'라는 미래형 담론 속에 존재하는 위협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실시간으로 체감되는 일상이 되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시점에, 세계 주요국에서는 오히려 기후정치가 후퇴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트럼프 행정부의 재집권 이후, 파리협정 재탈퇴, 화석연료 규제 완화, 미국 환경보호국(EPA: 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 구조개편, 기후손실·피해기금(Loss and Damage Fund) 기여 중단 등 강력한 반기후 조치가 잇따르고 있다. 환경 규제뿐만 아니라, ESG 투자 및 정보공시에 대한 제도적 후퇴도 진행되며, 연방정부 차원에서의 기후변화 대응 정책은 급속히 무력화되고 있다. 기후변화 대응에 있어서 가장 선도 주자였던 유럽연합(EU) 역시 일정 부분 정책 후퇴가 감지된다. 2024년 유럽의회 선거 이후, 우파 정당의 약진과 농민 시위, 산업계 반발 등을 계기로 기존의 EU 그린딜(Green Deal) 정책은 후속 입법과 집행에서 제동이 걸렸다. 탈산림 규제(EUDR: EU Deforestation Regulation) 유예, 지속가능성 공시 기준(CSRD: Corporate Sustainability Reporting Directive) 완화, 자동차 배출 기준 이행 시점 연기,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Carbon Border Adjustment Mechanism) 예외 확대 등 규제 완화 움직임이 잇따랐다. 친환경 농약 규제와 생물다양성 복원 법안도 통과가 지연되고 있다. 물론 EU는 여전히 강력한 배출권거래제(ETS: Emission Trading System)를 유지하고 있으며, 2050년 탄소중립 목표도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정치·경제적 여건 변화로 인해 실제 규제 수준은 약화되고 있고, 산업계와 금융시장에서는 기후 규범 피로감이 누적되고 있다. ESG 투자자들은 과도한 공시 부담과 고금리 환경 속에서 점차 자본 흐름을 재조정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이 기후정치의 '종말'을 초래하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주(州) 정부나 연방 법원이 연방정부의 규제 후퇴를 견제하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한국과 여러 사정이 비슷한 일본은 2025년 상반기에 2035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NDC: 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를 오히려 상향 조정하며 주목을 받기도 했다. 2013년 대비 60% 감축이라는 높은 수치를 제시했는데, 그 수단으로 재생에너지는 물론 원자력 발전, 수소·암모니아 발전, 탄소 포집, 활용 및 저장 기술(CCUS: Carbon Capture, Utilization, and Storage) 기술 등 녹색전환(GX: Green Transformation)의 관점에서 다양한 감축 전략을 제시했다. 이는 결국 탄소감축과 산업경쟁력 제고를 동시에 달성하려는 이중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전환의 시기, 한국 같은 중견국은 어떤 전략을 취할 수 있을까? 신정부는 '기후에너지부' 출범과 함께 정책 통합을 예고하고 있으나, 현재까지의 행보는 명확한 산업전략과 사회적 설득 모두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김성환 환경부 장관 후보자는 인사청문회에서 “재생에너지와 원자력발전을 적정하게 믹스하면서 가는 게 장차 한국의 에너지 방향"이라고 말하며, 탈원전 정책으로의 회귀 가능성에 대한 우려에는 선을 긋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원자력 확대, 수소와 LNG 활용, 전기요금 조정 등은 여전히 정치적 대립의 대상이 되기 일쑤이며, 기업 부담과 민생 불안은 정책 조율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추상적 수사보다, 실용적 기후정치의 재구성이다. 국제사회와의 약속은 유지하되, 감축 수단과 기술 투자 방향은 한국의 현실에 맞게 조정할 필요가 있다. 일본처럼 목표는 높이더라도, 수단은 산업 정책까지 아우르며 전략적으로 구성해야 탄소중립을 위한 정책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을 것이다. 기후정치의 후퇴는 위기인 동시에 기회일 수 있다. 글로벌 규범과 국내 산업전략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능력, 그것이 신정부 기후정치의 핵심 경쟁력이 되기를 요구한다. 임은정

[기자의 눈] 소니의 변화에서 찾는 LG전자의 내일

LG전자는 요즘 바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미래 먹거리를 찾는 건 기업의 당연한 과제임에도 그 중에서도 LG전자는 유난히 속도를 높이고 있다. 분주한 행보로 주목받는 대표사례가 LG의 냉난방공조(HVAC)사업이다. LG전자는 지난해 말 기존 H&A(가전) 사업본부에서 HVAC를 분리해 'ES사업본부'를 신설한데 이어 최근 첫 기자간담회를 열어 오는 2030년까지 매출 20조원 달성이라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이재성 ES사업본부장은 “데이터센터용 냉각솔루션 수주를 지난해보다 3배 이상 확대해 시장보다 2배 빠른 성장 속도를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또한, LG전자는 자동차 전자장비(전장), 로봇, 스마트팩토리, 모듈주택, 신소재 등 다양한 기업간 거래(B2B) 영역으로 보폭을 넓히고 있다. LG전자는 글로벌 가전업계의 맹주다. 지난해 미국 월풀과 매출 격차를 11조원 가까이 벌리며 3년 연속 글로벌 생활가전 1위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최근 중국 제조사들의 추격이 심상치 않다. 저가 공세로 시장을 파고든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는 이제 중저가를 넘어 프리미엄 영역까지 진출해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더구나 LG전자는 스마트폰과 반도체라는 '굵직한 축'이 없다. 국내외 경쟁 전자기업들과 구별되는 뚜렷한 아킬레스건이다. 따라서, LG전자의 체질 개선은 '선택이 아닌 생존'이라는 전략으로 받아들여진다. 성공한 기업일수록 기존에 잘 하던 것을 내려놓고,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기란 더더욱 어렵다. 변화는 언제나 리스크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LG전자는 '제2의 소니'를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브라운관TV와 워크맨으로 성장했던 소니는 경쟁이 치열해지자 2010년대 들어 '탈(脫)전자'를 선언했다. 2012년 매출의 70%를 차지하던 전자제품 비중이 이제 30%대로 줄었고, 그 빈자리에 게임과 영상콘텐츠 등 엔터테인먼트로 메웠다. 이같은 체질 개선 결과, 소니는 지난해 말 주가가 25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고, 지금도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과감한 결단'과 '변화'라는 두 혁신 키워드가 소니의 '제2 부흥기'를 이끈 핵심 동력으로 꼽히고 있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지난 3월 주주총회에서 “지금이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변화와 혁신의 골든타임"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급변하는 시대, 변화 없이는 기업이 살아남기 어렵다. LG전자의 과감한 도전만이 '제2의 소니'를 넘어서는 새로운 성공 방정식이 될 것이다. 김윤호 기자 kyh81@ekn.kr

[이슈&인사이트] 중앙선관위에 대한 국민적 신뢰도를 더 높이자

한국정당학회가 6월 3일 조기 대선을 앞두고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는 10점 만점에 4.7점으로 높은 편이었다. 5월 15일 한 신문에 보도된 내용을 보면 6개 국가 기관 가운데 신뢰도가 가장 높은 것은 역시 헌법재판소로 5.2점이었고 바로 그다음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4.7점)이었다. 그 뒤로 행정부가 4.2점이었고 국회와 법원이 똑같이 3.8점을 받았고 검찰은 3.2점으로 꼴찌였다.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진다. 2025년 3월 14일에 공개된 한국갤럽의 기관별 신뢰여부 여론조사 결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헌법재판소를 신뢰한다는 여론이 가장 높아서 53%였다. 그다음이 경찰(48%)과 법원(47%)인데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44%로 그 뒤를 이었다. 공수처(29%)와 검찰(26%)은 가장 낮은 신뢰도를 보였다. 현직 대통령이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면서 비상계엄을 선포했고 전직 대통령 권한대행이 부정선거론을 퍼뜨리고 다니고 있는데도 국민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손을 들어준 셈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대한 국민적 신뢰는 그냥 생긴 게 아니다. 이번 대선에서만 해도 기상천외한 일이 많이 발생했는데 선관위는 대체로 다 잘 막아냈다. 충북 금산군 군북면의 한 투표소에서는 술에 취한 유권자가 자기가 사전 투표한 사실을 잊어버리고선 본투표를 다시 시도하면서 오히려 112로 부정선거를 신고한 사례가 있다. 이건 그저 해프닝에 그치나 더 심각한 일이 있었다. 사전투표에 갔다가 또 본투표에 다시 들어가 투표하는 부정선거를 시도하거나 또 이에 성공했다고 선전할 목적으로 선관위를 시험한 사례가 전국적으로 거의 200건에 달했다고 한다. 선관위는 대통령선거라는 민주적 절차의 정당성을 훼손하려는 이러한 조직적인 시도를 딱 한 건을 제외하고 다 막아냈다. 그런데 문제는 법체계에 있다. 사전투표에서 이미 투표한 뒤 본투표에서 다시 투표하려고 시도한 사람들은 모두 다 현행법 위반으로 처벌했다. 하지만 정작 의도적으로 투표사무원을 속이고 실제로 두 번 다 투표한 사람은 처벌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더 중대한 것은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면서 선관위의 신뢰와 권위를 훼손하는 일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데도 이런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처벌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부정선거 의혹을 통해서 대한민국 선거관리의 완벽에 가까운 수준을 마구 깎아내려도 아무런 처벌을 가할 수 없다. 이번 대통령선거가 끝난 뒤에도 미국의 극우인사까지 동원해서 대한민국 선거의 정통성을 훼손해도 속수무책이라는 말이다. 지금도 매일 같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청사 앞에는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모여든단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마치 면죄부를 가지고 있는 듯이 계속해서 반복적이고 조직적으로 그 의혹을 확산시키고 있다. 선관위는 다시는 두 번 투표하려는 조직적 시도를 단 한 건이라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면서 명예를 훼손하고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데 대하여 관련 법률을 개정해서라도 처벌할 수 있도록 방안도 모색해야 한다. 또한 이번에는 다른 때보다 투표소에서 소란을 피우거나 선거사무원을 폭행하거나 또는 투표용지를 훼손하는 행위가 늘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법이 허용한 최대한의 처벌을 가해 국법의 엄중함을 깨닫게 해야 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대한 국민적 신뢰는 쉽게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 신뢰가 허물어지는 것은 그야말로 한 순간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그간 채용비리 건으로 수년간 국민적인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올봄에 채용비리 관련자 전원을 임용취소하면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자체적으로 개혁하겠다는 의지가 분명해졌다. 이제 사법부에서 임용취소자 가운데 위법한 사람은 깔끔하게 정리해주고 억울한 사람은 다시 깨끗하게 대접해주면 될 것이다. 그 사이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헌법재판소가 왜 국가기관 가운데 국민적 신뢰도가 가장 높은지 분석하고 따라 배워야 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그것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하고 정당(정치인)에 줄 서지 말고 국민만 바라보며 변신하고 또 혁신해야 할 것이다. 이준한

[EE칼럼] 원전 수소는 철기문명의 디딤돌이다

인류는 3천 년 전 철기 시대를 열어젖힌 이후, 세계사는 지금까지 사실상 철기 시대의 연속이다. 철의 시대를 개막한 히타이트 제국, 코크스 제철 방식으로 산업혁명을 이끌었던 영국 등 문명 전환기에는 항상 철이 있었다. 제철 기술에 앞선 국가는 번영했고, 그렇지 못한 국가는 쇠퇴의 길을 걸었다. 실제로 청동기에 머무르고 있던 잉카제국이 철제무기로 무장한 스페인에게 힘없이 무너진 역사적 경험도 있다. 오늘날 현대 문명도 여전히 철강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 세계는 약 19억 톤의 철강을 소비하고 있다. 전체 금속 소비의 95%에 해당하는 압도적 물량이다. 철강 생산이 문명의 지속 가능성과 맞닿아 있는 이유다. 철을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된 결정적 계기는 코크스 제철 방식의 발견이다. 철은 산화철에서 산소를 제거하는 환원 과정을 거쳐야 생산된다. 1000도 이상의 고온이 필요한 공정이다. 처음에는 목탄을 사용했으나 목재 공급이 걸림돌이었다. 산림이 빠르게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급기야 영국 의회는 16세기 수목 벌채를 금지하는 법령을 제정하기도 했다. 제철산업 더 나아가 문명 발전의 위기였다. 구리 제조업자였던 아브라함 다비는 1709년 오늘날 코크스라 불리는 점결탄을 용광로에 넣어 철을 녹이는데 성공했다.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사용되는 코크스 제철 방식의 탄생이다. 코크스 방식은 연료비 절감, 고온유지, 규모의 경제 등의 이유로 철강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증가시킬 수 있었다. 실제로 1700년대 초반 2,500톤 정도에 불과하던 영국의 철강 생산량이 1850년에는 약 1,000배가 증가한 250만 톤으로 급증했다. 화학적으로 탄소 덩어리인 코크스는 당연히 제철 과정에서 다량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제철산업의 이산화탄소 배출량 비중은 7%에 이르고 있다. 단일 산업으로 최대 규모다. 당연히 금세기 최대 의제인 탄소중립과 충돌한다. 탄소중립은 단순 선언을 넘어 실존하는 무역 규제로 진화하고 있다. 실제로 전 세계 140개 이상의 국가가 탄소중립을 선언했으며, 유럽연합은 2026년부터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기준으로 관세를 부과하는 탄소국경조정제도를 시행한다. 철강·알루미늄·시멘트 등 6개 업종이 첫 시험대에 오른다. 이들 산업에서 이산화탄소 배출량 감축은 이제 생존의 문제가 된 것이다. 한국은 세계 6위의 철강 대국이다. 철강산업의 위기는 곧 한국 경제에 치명적일 수 있는 배경이다. 현재 이산화탄소 배출 없는 제철 기술은 수소환원제철이 유일하다. 이산화탄소 배출의 원인이 되는 코크스 대신 수소를 사용하는 방식이다. 시험 생산설비에서는 이미 검증된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대규모 생산설비의 상업 생산에는 본격적으로 적용되지 못하고 있다. 대량의 수소를 값싸고 안정적으로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산화탄소 배출 없이 수소를 생산하는 방식은 기본적으로 물 분해인데, 저온 전기분해와 고온 전기분해 방식이 있다. 전자는 전기만을 사용하는 반면, 후자는 열과 전기를 함께 사용하는 방식이어서, 고온의 열을 값싸게 얻을 수 있다면, 훨씬 경제적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바로 여기에 한국 철강산업의 활로가 있다. 원전과 철강 산업의 결합이다. 원전에서 24시간 생산되는 전기와 열을 활용해 얻는 소위 핑크수소를 제철 환원제로 사용하면, 수소환원제철 단가를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 평균 3시간 남짓 전기만을 생산할 수 있는 재생에너지를 기반으로 하는 소위 그린 수소보다 훨씬 경제성이 높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인다. 세계는 이미 수소환원제철 경쟁력 확보 경쟁을 시작했다. 스웨덴의 HYBRIT 프로젝트는 수력과 원전을 기반으로 생산된 수소를 활용하는 수소환원제철 방식을 2026년부터 본격 가동할 예정이다. 프랑스 EDF도 자국 원전을 활용해 2030년까지 1GW 규모의 청정 수소 생산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한국도 뒤처지지 않았다. 포스코는 일찌감치 독자적인 수소환원제철 기술인 하이렉스 기술을 개발했고, 현대제철은 하이큐브라는 독자적 수소환원제철 기술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하지만, 수소 확보는 난항이다. 산업 현장에서는 원전 수소만이 답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여전히 재생에너지 중심의 수소경제에 집착하고 있는 모습이어서 안타깝다. 철은 현대 문명의 근간이다. 수소는 미래의 에너지다. 원자력은 탄소중립 시대에 철기 문명을 이어갈 디딤돌이다. 박주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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