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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中 세탁기 전쟁] 기술 장벽 낮은 세탁기 시장, 韓 기업 ‘M&A 전략’ 고민할 때

“여기에 오는 (소득수준이 높은) 사람들은 중국 세탁기 같은 건 찾지 않습니다. 용량이 크고 성능이 뛰어난 제품을 찾는 경우가 더 많아요."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버뱅크 인근에 있는 대형 주택·가전제품 매장 로우스(Lowe's) 직원이 한 말이다. 그는 중국산 가전은 가격이 저렴한 대신 품질이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고 귀띔했다. 그러면서 추천 브랜드로 LG전자와 제너럴일렉트릭(GE)의 고급 버전 Profile을 꼽았다. 이 직원은 GE에 대해 '전통 미국 브랜드'라고 소개했다. 40대 백인인 그의 말투에서 자부심 같은 게 느껴졌다. 중국 하이얼이 2016년 GE 가전사업부를 인수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일본 도쿄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전자제품 매장 '요도바시카메라'(Yodobashi Camera) 아키하바라점에서 일하는 한 영업사원은 한국 제품 인기가 없는 이유에 대해 “일본인들은 자국 브랜드 제품에 대한 충성심이 상당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도로 위에 토요타·닛산·혼다 차가 많이 보이는 것처럼 가정에서는 파나소닉, 히타치, 샤프, 도시바 등 세탁기를 대부분 쓴다"고 말했다. 샤프가 대만 폭스콘, 도시바가 중국 메이디에 팔렸다는 사실은 모르는 눈치였다. 글로벌 세탁기 시장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기업은 단연 삼성전자와 LG전자다. 중국·일본에 발을 못 붙였다는 한계가 있지만 미국·유럽 등 선진국에서는 압도적 위상을 자랑하고 있다. 트랙라인(Traqline)에 따르면 지난해 매출 기준 미국 세탁기 시장 브랜드별 판매 순위에서 LG전자(21.1%)와 삼성전자(21%)는 GE(18%)·월풀(15%)을 앞서고 있다. 하이얼, 메이디, 하이센스, TCL 등 중국 기업들은 그간 '저가 공세'를 펼쳐왔다. 소득 수준이 낮은 신흥 시장을 중심으로 가격이 저렴한 제품을 선보이며 몸집을 키우는 식이다. 문제는 중국의 전략이 통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수 시장에서 실력을 키운 뒤 해외에 진출해 속속 성과를 내고 있다. 출하량 기준으로 보면 인도,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권을 중심으로 속속 1위 자리를 꿰차고 있다. 중국 업체들은 여기서 축적한 자본으로 미국·일본 같은 선진국 대표 기업들을 사들이고 있다. GE와 도시바를 '국산'이라고 믿는 소비자들이 상당하다는 점은 중국산 '자본 공세'의 무서움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한국인들도 벤츠를 '독일차'라며 구매하지만 그 돈 중 일부가 중국 베이징차 연구개발(R&D) 비용으로 쓰인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세탁기는 TV나 스마트폰에 비해 기술 장벽이 낮은 편이다. 인구가 많아 성장가능성이 높은 나라 소비자들은 프리미엄 제품을 구매하기 힘들다는 특징도 있다. 제품이 무겁고 각국 관세율도 높아 다양한 곳으로 수출하기도 부적합하다. 이런 상황에 한국 기업들이 눈여겨봐야 할 분야가 인수합병(M&A)이다. 신흥국 내 인기 있는 브랜드들을 인수해 저가 제품 시장 점유율 확대를 도모하는 것이다. GE 등 프리미엄 브랜드를 사들이며 인지도 제고에만 신경 쓰고 있는 중국 업체들의 허를 찌를 수 있다. 기술만으로는 시장을 지킬 수 없다. 자본이 투입된 M&A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중국은 이미 글로벌 '세탁기 전쟁' 구도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바꾸고 있다. 우리도 더 늦기 전에 대응 시나리오를 마련해야 한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정부광고 수수료를 지원받아 제작됐습니다. 여헌우 기자 yes@ekn.kr

[장박원 칼럼] ‘기후에너지환경부’ 이념에 갇히면 망한다

기후에너지환경부가 10월 1일 드디어 닻을 올린다. 기후 환경과 에너지 정책을 모두 총괄하는 부처의 필요성은 찬반이 극명하게 엇갈리며 오랜 기간 논의가 이어졌다. 국회미래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산업부 에너지 조직과 환경부를 합치려는 입법 활동이 시작된 건 2012년부터다. 이때부터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한 정부 부처의 지배구조(거버넌스) 개편과 관련한 법률 개정안이 지속적으로 발의됐다. 그러나 규제 부처인 환경부와 에너지 산업 육성을 담당하는 조직이 조화를 이룰 수 없을 것이라는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특히 기후 위기를 막아야 한다는 당위론에 에너지 안보가 뒷전으로 밀리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는 의견이 많았다. 기후에너지환경부 출범을 앞두고도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인공지능(AI) 사용이 확산하면 에너지 수요가 폭증할 텐데 환경 문제에 매달리다 전력 부족 사태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재생에너지에만 의존하다 보면 전기요금이 폭등할 수도 있다. 이를 막으려고 과거 정부처럼 전기요금을 억지로 묶어두면 많은 부작용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적자에 허덕이는 한국전력의 투자 여력이 급속이 떨어지며 급증하는 전력 수요에 대응할 수 없게 된다. 정부도 이런 걱정이 현실이 되는 것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기후 환경과 에너지 정책을 조화시킬 수 있을까.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11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밝힌 의견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정책을 놓고 이념 전쟁을 하면 안 된다. 에너지 믹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원전도 있는 건 써야 한다. 저는 철저한 실용주의자이다. 기후에너지환경부는 기후에너지부를 만들어서 환경부를 갖다 붙였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에너지부, 에너지 차관, 환경부서, 규제부서, 환경 담당 차관이 한 부서 안에서 막 갑론을박하며 정책을 결정하는 것하고 아예 독립 부서가 돼서 서로 말도 안 하는 거 하고 어떤 게 낫나. 에너지 분야는 내부 토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게 더 시간 절감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대통령은 이에 대한 근거로 전기차 보조금을 예로 들었다. 환경부 주도로 보조금을 주었더니 중국산 전기버스가 국내 시장을 장악했다는 것이다. 이는 환경 보존 측면만 생각해 보조금을 지급한 결과다. 만약 환경과 산업 정책을 담당하는 조직이 같은 부처에 있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렇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는 게 이 대통령 생각이다. “에너지와 기후 환경 정책을 지금처럼 따로 놔두면 안 된다. 차라리 에너지 담당 부서와 환경부서가 그 안에서 치열하게 토론하게 해야 한다." 이 대통령의 논리는 그럴 듯하지만 치명적인 함정이 있다. 현실과 괴리돼 있다는 점이다. 에너지 정책 담당자와 기후 환경 담당자가 치열한 토론을 통해 최선의 방안을 도출할 것이라는 기대는 기대로 끝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모든 조직에서는 파워 게임이 벌어진다. 이권을 놓고 다툰다. 이견을 가진 두 집단이 합의점을 찾지 못하면 결국 가장 큰 권력을 쥔 사람이 최종 결정을 내리게 된다. 정부 부처에서는 장관이 최종 결정권자다. 장관이 누구냐에 따라 에너지와 기후 정책은 일방적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 만약 장관이 기후 환경을 중시하는 전문가라면 에너지 안보가 소홀해질 수 있다. 에너지부와 환경부를 합친 유럽 국가들이 바로 이런 문제로 어려움에 겪고 있다. 이들 나라에서는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전기요금이 급등했다 . 미래 세대와 지구를 살리기 위해서는 탄소 배출을 줄여야 한다. 기후변화로 지구촌이 홍역을 앓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탄소 중립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탄소 중립이 모든 가치의 최상위에 있지는 않다. 꼭 가야 할 길이지만 국민 안전과 생명, 국가의 번영을 희생하면서까지 밀어붙여야 하는 지고지순의 가치라고는 할 수 없다. 기후에너지환경부가 '기후 이념'에 갇혀 에너지 산업을 등한시하면 국가 안보와 국민의 삶이 위협받을 수 있다. 기후에너지환경부가 탄소 중립과 에너지 안보 둘 중 하나를 고르는 식으로 정책을 펼쳐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실패가 불 보듯 뻔하다. 치열한 토론을 통해 최적의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우리보다 먼저 기후 환경과 에너지 조직을 하나의 부서로 합쳐 실패했던 유럽 국가들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정책을 놓고 이념 전쟁을 하면 안 된다. 나는 철저한 실용주의자다." 이재명 대통령은 기후에너지환경부의 성공으로 이 말을 증명해야 한다. 장박원 기자 jangbak@ekn.kr

[기자의 눈] 1·2차 상법 개정,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

The road to hell is paved with good intentions.(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일을 시작했다 하더라도 결과는 끔직하게 나올 수 있다는 뜻이 담긴 서양 속담이다. 한국 증시의 고질병인 '코리아 디스카운트(Korea Discount)'를 치료하겠다며 이재명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 두 번째 처방전을 내놨다. 대통령의 국정 과제인 '5000피' 달성을 위해 낮은 주주 환원율과 불투명한 지배 구조라는 병폐를 해소하기 위해 대규모 상장회사의 집중 투표제 의무화와 감사위원 분리선출 최소 인원 1명에서 2명으로 확대라는 강력한 약을 더 쓰겠다는 것이다. 이미 지난 7월 3일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전체 주주'로 확대 △감사위원 분리 선출제 실효성 보완 △3%룰 강화 △전자 주주총회·전자 투표제 의무화 △0.5% 이상 주주에 감사위원 후보 추천권 부여 △사외이사 명칭을 독립이사로 변경하는 1차 상법 개정안이 민주당의 주도로 원안 가결됐다. 거여(巨與)의 독주 속에 통과된 상법 개정안들은 기업을 옥죄어 단기적 주주 이익을 짜내는 것이 곧 기업 가치 제고라는 위험한 착각에서 비롯된 입법 과잉이자 정책 실패로 귀결될 것이다. 이사회는 전쟁터가 되고 경영진은 소송 공포에 시달리며, 한국 시장은 예측 불가능한 '규제 섬'으로 고립될 것이다. 결국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라는 본래 목표를 달성하기는커녕 한국 기업들을 투기 자본의 놀이터로 전락시키고 장기 성장 동력을 파괴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시장의 불신은 지배구조 문제 외에도 지정학적 리스크와 규제의 불합리성 등 복합적인 요인에서 비롯된다. 그런데도 일련의 상법 개정안은 기업 경영의 안정성을 파괴해 시장의 불안정성을 오히려 키우는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 병을 고치겠다며 병의 원인을 악화시키는 모순이다. 개정안 지지자들은 '글로벌 스탠더드'를 내세우지만 이는 사실을 교묘하게 왜곡한 것이다. 1차 상법 개정안의 핵심 조항들 중 특히 감사위원 선임 시 '3%룰'과 같은 의결권 제한은 미국·독일·일본 등 주요 선진국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갈라파고스 규제'다. 이는 한국 시장의 예측 가능성을 떨어뜨려 오히려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심화시키는 요인이 될 것이다. 미국은 엔론 사태 이후 사베인스-옥슬리법(SOX)을 통해 감사위원회의 독립성을 대폭 강화했지만 이는 경영진으로부터의 '재정적·인적 독립성'에 초점을 맞춘 것이지, 주주 총회에서 특정 주주의 의결권을 인위적으로 제한하는 방식이 아니다. 독일의 이원적 지배 구조나 일본의 감사등위원회설치회사 제도 역시 마찬가지다. 특정 주주의 의결권을 3%로 제한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이는 주주 평등의 원칙이라는 자본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조치다. 이것이 바로 '선무당'식 입법의 전형이다. 해외 제도를 도입한다며 각국이 오랜 시간 동안 쌓아 올린 균형과 견제의 시스템은 무시한 채 가장 공격적인 규제들만 입맛에 맞게 짜깁기했다. 미국에는 강력한 주주 소송권이 있지만 동시에 경영자의 선의의 판단을 보호하는 '경영 판단 원칙'이 확립돼 있고 '포이즌 필'과 같은 경영권 방어 수단도 존재한다. 하지만 한국의 상법 개정 세력은 공격용 무기만 잔뜩 쥐여주고 방패는 주지 않는 불공정한 게임을 강요하고 있다. 모든 경영 판단은 소송 리스크를 피하는 방향으로 극도로 보수화 될 수밖에 없다. 인수·합병(M&A)·대규모 설비 투자 등 기업의 미래를 위한 과감한 결단은 위축되고, 혁신에 쓰여야 할 에너지는 소송 방어를 위한 문서 작업과 법률 검토에 소모될 것이다. 기업의 가치는 주주권 강화라는 구호만으로 오르지 않는다. 기업의 본질인 성장 가능성과 매출, 영업이익 등 기초 체력이 튼튼해야 오르는 것이다. 이번 개정안은 바로 그 펀더멘털을 훼손하는 자해 행위다. 지금이라도 이 위험한 실험을 멈춰야 한다. 진정으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고 싶다면 소수 주주권 강화와 함께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경영권 방어 수단을 균형 있게 도입하고, 기업의 장기적 성장을 저해하는 배임죄 규정 등을 합리적으로 개선하는 '진짜 전문가'의 처방이 필요하다. 선무당에게 계속 칼을 맡겨둘 수는 없다. 한국 경제의 미래가 걸린 문제에 대해 국회의 신중한 재고와 현명한 판단을 촉구한다. 박규빈 기자 kevinpark@ekn.kr

[이슈&인사이트] 대미투자, 통화스왑 그리고 그 후유증

지난 9월 26일 KOSPI 지수가 2% 넘게 하락하면서 3,500선 마저 깨고 내려갔었다. 문제의 발단은 전일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와 맺은 관세 협상에서 대미 투자 금액 3,500억 달러는 선금이라는 발언에 의한 것이었다. 우리의 투자금은 미국 조선업을 살리는 MASGA 프로젝트에 1,500억 달러를 투자하고 나머지 2,000억 달러에 대해서는 우리가 금융보증을 통해 간접투자로 진행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을 180도 바꿔 놓은 발언이기에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 외화보유고 4,100억 달러의 85%가 미국으로 빠져나가 제 2의 IMF 사태가 일어날 지 모른다는 공포심으로 시장의 폭락을 불러왔다. 지나친 공포감이지만 관세협상 최종 서명을 하지 못하는 정부의 책임도 크다. 게다가 금융위를 해체하고 금감원을 분리하려는 시도도 무산되자 자사주 소각을 다루는 3차 상법개정안도 그 대상에서 기존 자사주가 빠지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도 증폭되고 있다. 특히 9.7 부동산 공급 대책이 실질적으로 어떤 공급이 일어날 지 모른다는 이유로 다시 마포, 성동, 광진구를 중심으로 아파트 가격이 고개를 쳐들고 있다. 물론 향후 전세자금 대출 축소와 부동산 거래 허가제가 이 지역들까지 넓혀 질 거지만 거의 유일한 공급 해결책인 기존 주택소유자들이 아파트를 팔 수 있는 세제의 변화가 없이는 수도권 공급, 특히 서울의 공급은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부동산 자금이 금융 시장으로 넘어올 거라는 정부의 말 또한 신뢰감을 잃어가는 상황에 트럼프의 발언까지 나오면서 장이 급락하였다. 트럼프가 대미 투자금은 선불이라 했으니 할 수 없이 돈을 미국에 줘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 외화 보유고에서 빼 준다면 우리 외환시장의 혼란이 너무나 명약관화 하기에 트럼프 몽니도 해결하고 우리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지금으로서는 통화스왑 밖에는 없다. 미국의 주한미군 감축 압력을 작전권 회수로 맞서고 있는 것처럼 대미 투자금에 대한 얘기도 조선업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제조업을 살릴 수 있는 유일무이의 상대국이 우리나라 밖에는 없다는 카드를 미끼로 일본처럼 무제한 통화스왑은 힘들겠지만 대미투자 자금 이상의 스왑 한도를 체결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문제는 대미 투자금의 안정성과 회수 기간이 될 거다. 우리의 대미 투자금이 들어갈 소위 말하는 트럼프 펀드가 오랜 시간에 걸쳐 미국의 제조업 부흥을 위해 쓰여 질 거라 공언하였기에 그들의 기간 산업과 제조업 공장을 짓는 데 사용이 될 거다. 그렇다면 미국 국채에 그 돈이 묶여 있지 않는 한 향후 펀드 운용 성과에 따라 최악의 경우에는 손해도 볼 수 있을 거다. 혹자는 차라리 3,500억 달러를 주지 말고 관세를 25% 때려 맞자고 주장한다. 만약 관세가 25%로 정해진다면 510억 달러의 관세 비용이 발생할 것이다. 이걸 단순히 트럼프의 남은 3년 임기 또한 지불해도 1,500억 달러이고 이는 3,500억 달러보다는 적을 거니 차라리 대미투자를 하지 말고 25% 관세를 물자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미국 내 우리의 자동차는 발붙일 곳이 없어지고 반도체를 제외하고는 우리 상품은 대미 수출 길이 막히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게다가 트럼프가 괘씸죄를 물어 우리에게 관세를 50% 물린다면 어떻게 한 건가? 감정적으로 대응할 사안은 아니다. 우리 후손들의 먼 미래를 위해서는 트럼프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한다. 다만 2024년 우리나라 설비 투자 규모가 237조원이었음을 비교한다면 미국에 470조가 넘어간다면 국내 설비투자는 거의 할 수 없을 거다. 그렇다면 우리 젊은이들의 일자리 어려움은 가중될 건데 그들의 고충은 어떻게 해결할까? 최용

[김성우 시평] 국가별 온실가스 감축목표의 함의

김성우 김앤장 법률사무소 환경에너지연구소장/기후대응기금 운용심의위원 매년 9월 미국 뉴욕에서 UN총회와 함께 열리는 '기후주간(Climate Week NYC)'가 어제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로이터는 행사 시작 직전인 20일(현지시각) 역대 최다 기업과 기관이 참여하고, 진행되는 행사가 지난해 보다 10% 늘어난 1000건을 넘어섰다고 전했다. 이는 2009년부터 유엔 총회 기간에 맞춰 열리는 세계 최대 민간 주도의 기후행사로, 각 국가의 정부는 물론 기업이나 시민사회가 모여 기후위기 대응 방안을 논의한다. 다양한 글로벌 기후정책 및 시장 변화를 미리 볼 수 있기 때문에 필자도 트럼프 1기 시절 KPMG 기후부문 아시아태평양 대표 및 국제배출권거래협회(IETA) 이사 자격으로 여러 차례 발표 및 토론에 참여했었다. 올해는 기후변화 심각성이 가중되면서 국가별 온실가스 감축목표(NDC) 상향을 요구하는 국제사회의 목소리와 미국의 반기후 정책 기조가 교차하는 가운데, 기후주간내 UN 기후 정상회의에서 발표되는 NDC포함 국가별 기후대응계획에 시선이 쏠렸다. 이는 각 국이 오는 11월 브라질에서 개최하는 제30차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당사국 총회(COP30)에서 협상할 내용의 기초가 되기도 한다. 특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4일(현지시간) 자국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오는 2035년까지 고점 대비 7∼10% 감축하겠다고 밝힌 것에 가장 큰 관심이 쏠렸다. 전세계 온실가스의 30%를 넘게 배출하는 중국이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 목표를 원단위 감축이 아닌 절대량 감축 수치로 내놓은 것은 처음이다. 또한, 2035년까지 전체 에너지 소비 중 화석연료 비중을 30% 이상으로 증가시킬 것이라고도 부연했다. 이를 위해 풍력·태양광 발전 설치 용량을 2020년 수준의 6배 이상으로 늘리고, 전기·수소·하이브리드차가 신규차의 주가 되도록 만들 것이라고도 했다. 국제사회에서는 중국의 목표가 지구를 살리기에 충분한가에 대해 논란이 있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중국이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재생에너지 및 전기차 등 청정기술 시장확대와 연계하고 있다는 점이다. 청정산업 육성 및 글로벌시장 확대가 아니라면 디플레이션 압력 등 대내외적 위기 속에서 굳이 기후정책 목표를 강화할 이유가 잘 보이지 않는다. 유럽연합(EU)의 경우,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가 정한 2035년 NDC 제출 기한인 9월24일을 맞추지 못했는데, 이는 2035년 NDC와 연동되어 있는 2040년 온실가스 감축 계획에(1990년 대비 90% 감축) 대해 회원국들간 합의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에 EU는 2035년 NDC를 확정하진 못했지만, UN 기후 정상회의를 통해 의향서(Statement of Intent) 수준의 감축 계획을 발표했고, 그 범위는 1990년 대비 2035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66.3~72.5% 감축하는 것이다. 잠정 합의된 수치라도 72.5% 감축은, 러·우 전쟁 및 대미 협상 등 정치경제 위기를 감안하면 도전적인 수치다. 이는 글로벌 기후리더십과 청정산업 경쟁력을 동시에 확보하고, 에너지 가격안정화 및 안보도 달성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이는 필자가 올해 2월 파리에서 열린 청정산업 협력을 위한 전문가 회의에서 EU 집행위원회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에 기반한다. 이처럼 미국이 파리협정 탈퇴를 선언해 미국은 더 이상 온실가스 감축에 동참하지 않는 상황에서, 경제구조상 감축이 쉽지 않은 중국이나 회원국간 이견이 많은 EU가 강화된 감축 목표를 국제 사회에 발표한 이유는, 이를 산업정책과 연계해 자국내 청정산업 육성을 도모하면서 동시에 국제사회에서 기후리더십을 강화해 글로벌 청정산업을 선도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지난달 세계자원연구소(WRI)는 EU, 중국 등 주요 배출국들의 목표가 글로벌 배출량 격차 해소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했다. 새로 제출된 NDC들이 이행돼도 2035년까지 14억톤 추가 감축에 그쳐, 지구 온도를 1.5도 이내 상승으로 억제하려면 최소 260억톤 이상은 더 감축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어쩌면 중국과 EU는 자신들이 리드하는 온실가스 감축과 산업정책이 잘 연계될 경우, 국제사회가 더 줄여야 할 260억톤은 자신들의 기술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가장 많이 이 기술을 사야 하는 국가는 지금 감축을 뒤로 미루는 국가일 것 같다. 김성우

[기자의 눈] 위고비가 쏘아올린 비만약 ‘속도전’…규제개혁 서둘러야

먹는 OOO, 붙이는 OOO, 장기 지속형 OOO. '위고비(성분명 세마글루타이드)'를 넣으면 단어가 완성된다. 비만치료제 열풍을 증명하는 단어들이다. 덴마크(위고비)가 띄우고 미국(마운자로)과 중국(신얼메이)이 이어받은 비만치료제 시장에서, 후발주자인 우리 기업의 상당수는 이처럼 '제형 혁신'을 택했다. 세마글루타이드 등 단일 인크레틴 수용체를 타깃으로 하는 기존 주사제형 비만치료제가 '지는 해'인 탓이 크다. 글로벌 빅파마에서 속속 나타나는 개발중단 선택이 이를 뒷받침한다. 주사제형 개발중단을 선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성이다. 오는 2027년을 기점으로 세마글루타이드의 특허 만료가 다수 국가에서 이어져, 이미 '제네릭 쓰나미' 경보가 울린 상태다. 아무리 오랜 기간 공들여 개발한들 위고비와 차별점이 없는 한 제 값을 받기 힘든 상황이 됐다. 심지어 우리 기업들의 생존 전략인 제형 다양화마저 각국에서 경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비만치료제 개발에 있어 '속도전'이 강조되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해외 주요 규제당국은 이미 속도전에 대비하기 위한 포석을 깔아두고 있다. 신약개발 과정에서 핵심 절차인 임상시험계획(IND)의 규제 완화가 대표 사례다. 덴마크 의약품청(DMA)은 최근 임상 1·2상의 IND를 14일 내 처리하는 신속심사제를 도입해 자국 내 제약기업의 속도전을 지원했다. 중국 국가약품감독관리총국(NMPA)도 IND 처리 기한을 현행 60일에서 미국 식품의약국(FDA)와 동일한 수준인 30일(영업일)로 단축하는 방침을 추진 중이다. 사실 우리 식품의약품안전처 규정도 FDA와 같은 '30일 기한'이다. 문제는 30일 이내 IND를 처리한 사례가 전무한 수준에 가깝다는 점이다. 30일은 고사하고 평균 6개월 가까이 걸린다는 게 업계의 불만이다. 임상 3상까지 거치면 IND 승인에만 1년 이상 소요되는 셈이다. 전통제약사, 바이오텍 가릴 것 없이 모두 '벤처 입장'이 된 우리나라 비만치료제 업계로서는 이 같은 허울 뿐인 규제는 하루라도 빨리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최소한 규정대로라도 처리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물론 기존 규제를 더욱 혁신하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다. 2020년 코로나19 펜데믹 당시 문재인 정부와 식약처는 '고(GO)·신속 프로그램'을 도입해 백신·치료제 후보물질에 한해 IND 처리 기한을 최장 15일까지 일시적으로 단축한 바 있다. '국가적 재난 상황'이라는 명분이다. 지금 우리 제약업계는 닥쳐올 제네릭 쓰나미와 글로벌 규제혁신 폭풍,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눈보라 속에 놓여 있다. 말그대로 재난 상황이다. 정부의 과감한 IND 규제 혁신이 간절한 시점이다. 박주성 기자 wn107@ekn.kr

[데스크칼럼] ‘신뢰’라는 가장 값비싼 보안

총체적 난국이자 점입가경이다. SK텔레콤, KT, 롯데카드에서 잇따라 발생한 해킹사고 말이다. 통신사와 카드사를 가리지 않고 대규모 정보 유출이 줄줄이 이어지면서 국민 불안은 커지고 있다. 사태의 심각성은 피해 규모에서 드러난다. SK텔레콤은 지난 4월 전체 가입자의 90%에 해당하는 2324만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됐고, KT도 고객 정보를 악용한 무단 소액결제 사고가 발생했다. 이동통신 1·2위 사업자가 동시에 보안망을 뚫린 셈이다. 통신사 정보는 단순 인적사항을 넘어 본인인증과 통신내역까지 직결되는 만큼 파급력이 훨씬 크다. 그러나 피해 공지는 늦었고 초기 발표와 실제 피해 규모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었다. 고객 불신이 커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롯데카드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이번 해킹으로 297만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됐고 이 가운데 28만명은 카드번호, 비밀번호, CVC번호 등이 포함돼 직접적인 부정사용 위험에 노출됐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유출 정보량이다. 지난 1일 관계기관에 보고한 1.7기가바이트의 100배가 넘는 200기가바이트 분량으로 최종 확인됐다. 문제는 사고 이후 기업들의 대응 태도다. 대부분의 회사들이 “범죄에 악용된 정황은 없다" “실질적 피해는 확인되지 않았다" 논리로 책임을 가볍게 만들고, 각종 서비스 혜택을 피해 보상인 양 내놓는다. 하지만 개인정보 유출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장기적·잠재적 피해를 동반한다. 고객 입장에서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악용될지 알 수 없는 정보가 이미 외부로 나간 상태인데 일회성 혜택으로 피해가 보전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정보유출 피해고객 입장에서 더 큰 문제는 불확실성이다. 지금 당장은 피해가 드러나지 않더라도, 유출된 개인정보가 수년간 다크웹을 돌며 범죄에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불안은 장기간 지속되는데 기업들은 미봉책에 그친 보상으로 책임을 털어내려 한다. 이는 피해자 보호보다 기업 이미지 관리가 우선이라는 인식을 준다. 사이버 침해사고가 급증할 때마다 기업들은 수천억원대 IT·보안 투자를 해왔다고 강조한다. 롯데카드의 최대주주 MBK파트너스도 “2020년부터 2025년까지 5921억원을 투입했다"고 밝혔다. 통신사들 역시 보안 인력 확충을 내세웠다. 그러나 결과가 연이은 대규모 해킹이라면 투자 액수만 내세운 해명은 공허할 뿐이다. 보안 투자가 '필요 비용'이 아니라 '가치 창출과 직결되는 핵심 투자'라는 인식 전환이 절실하다. 정부와 당국의 역할도 가볍지 않다. 징벌적 과징금 강화, 정보보호 투자 의무화 등 제도적 장치가 논의되는 이유다. 기업의 자율에만 맡겨서는 반복되는 대형 사고를 막기 어렵다. 규제 강화가 부담이라는 불만이 나오지만 신뢰 회복을 위한 최소한의 비용이기도 하다.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1995년 구미사업장에서 불량 애니콜 15만대를 쌓아두고 불태웠다. “품질은 나의 인격이요, 자존심"이라는 현수막이 함께 내걸렸다. 금융사와 통신사에 있어 소비자 신뢰와 고객 보호는 곧 회사의 인격이자 자존심이다. 30년 사이 기업 환경과 시장 규모가 크게 달라졌지만 정작 고객 보호라는 기본 책무는 제자리걸음 아닌가. 이익만을 기업의 핵심 가치로 여긴다면 장기적 신뢰와 기업의 지속 가능성도 그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다. 송재석 기자 mediasong@ekn.kr

[EE칼럼] 블루수소 외면, 수소경제의 선순환도 멈춘다

최근 정부가 추진하는 그린수소 사용 강제 정책은 온실가스 감축이라는 명분 면에서는 일견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인프라 확충에는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 아직 경제성이 취약한 상황에서 블루수소를 배제하고 그린수소만을 인정한다 해도, 수소 생태계의 성장은 지체되고 실질적 성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린수소와 블루수소를 인위적으로 구분해 차별하는 정책이 과연 얼마나 실효성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더 나아가 이런 조치들이 결국 값싼 중국산 그린수소 수입을 위한 '레드카펫'을 까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지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불과 몇 년 전, 디젤 차량에 필수적인 요소수 공급이 중국 수출제한에 막혀 국가적 혼란을 겪었던 기억을 떠오른다. 어떠한 상품이든 성공하기 위해서는 생산–유통–활용을 아우르는 선순환 구조가 전제되어야 한다. 저탄소 경제 전환의 핵심 수단으로 주목받는 수소 역시 예외가 아니다. 충전소, 생산시설, 운송망 등 인프라가 갖춰져야 수소차와 연료전지의 수요가 늘어나고, 확대된 수요는 다시 민간 투자를 촉진하는 순환 고리를 형성한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초기 투자비용은 막대하고 단기 수익성은 낮아 민간 기업의 자발적 참여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른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딜레마를 풀기 위해, 탄소중립을 향한 과도기에서 블루수소는 반드시 거쳐야 할 가교적 대안이다. 재생에너지 기반의 그린수소가 충분히 확대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사실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는 천연 혹은 부생가스 개질에 CCUS(탄소포집·저장기술)를 접목한 블루수소로 공급을 늘리는 전략이 가장 현실적이다. 특히 한국처럼 제조업이 발달한 국가 입장에서, 제철·석유화학·정유 공정 등에서 부산물로 함께 발생하는 부생가스(by-product gas)는 정말 보물이나 다름없다. 화석연료를 대체할 수 있는 수소가 각광받는 시대에서, 한국을 산유국 같은 자원 부국으로 만들어줄 유일한 수단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다. 수소경제를 향한 마중물로서의 블루수소는 탄소배출을 크게 줄이면서도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안정적인 공급이 가능해 인프라 가동률을 높이는 가장 현실적 수단이다. 실제로 과거 정부도 2030년까지 국내외 탄소저장소 확보를 전제로 연간 75만 톤의 블루수소 생산을 목표로 제시한 바 있고, 주요 기업들은 정부를 믿고 대규모 플랜트를 추진해왔다. 물론 최종 목표는 온실가스를 전혀 배출하지 않는 수소 생산 방식이 좋지만, 지금 단계에서 그린수소만을 고집하는 것은 경제성을 맞추지 못해 국내 수소 연관산업 생태계의 싹을 잘라버릴 위험이 크다. 아직 생산 단가가 높은 그린수소에만 정책이 집중된다면 자연히 관련 민간 투자는 움츠러들고, 인프라 확장은 지체될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국제 경쟁이다. 중국은 이미 막대한 재생에너지 설비를 바탕으로 값싼 그린수소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만약 한국이 과도기를 버티지 못한 채 성급히 정책적으로 그린수소만을 고집한다면, 결국 값싼 중국산 수소에 전면적으로 의존하게 될 것이고, 이는 단순한 가격 문제가 아니라 에너지 안보와 산업 주권을 위협하는 심각한 위험으로 다가올 수 있다. 수소경제의 뿌리를 키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값싸고 안정적인 공급망 확보가 절실하다. 이전 정부는 이러한 과제를 인식하고, 초기에는 석유화학 공정의 부생수소와 천연가스 개질 수소에 의존하되 민간의 대규모 참여를 끌어내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노력이라도 했었다. 주요 기업들로부터 2030년까지 43조 원 규모의 투자 약속을 이끌어냈고, 정부는 연구개발 지원과 세제 혜택, 정책금융을 결합한 인센티브 패키지로 화답했다. 수소 기술을 신성장 산업으로 지정해 세액공제를 확대하고, 저리 융자와 보증을 제공했으며, 액화수소 플랜트 건설 지원과 안전기준 정비에도 나섰다. 하지만 아직은 갈 길이 먼 상황이다. 정부가 공언한 수소충전소 구축 목표는 절반 수준에 그쳤고, 도심은 규제와 주민 반발로 설치가 거의 불가능했으며, 낮은 수요로 인한 만성 적자를 겪고 있다. 정부가 설치보조금과 운송 지원책을 내놨지만 아직은 역부족이다. 2019년부터 추진한 개질 기반 생산기지 10곳 중 2021년까지 완공된 곳은 단 한 곳뿐이었고, 그마저도 후속 생태계 조성 미비로 기업들의 기존 투자가 모두 매몰비용으로 취착될 위기에 봉착했다. 정부가 발표한 대규모 투자 계획도 상당 부분은 선언적 수준에 머물렀으며, 산업 생태계는 자생력을 키우기보다 보조금에 연명하는 구조만 남겼다. 궁극적으로 에너지 산업의 실무자 관점에서 수소 인프라 투자는 철저히 정책 리스크와 경제성에 의해 좌우된다. 과거 정부의 경험은 분명하다. 초기 판을 정부가 깔아줄 수는 있지만, 민간이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를 만들지 못하면 투자의 지속성은 담보되지 않는다. 앞으로 정부는 일관된 정책 신호와 보조금의 효율적 운용으로 민간의 불확실성을 최소화해야 한다. 우선은 블루수소를 사용할 인프라 구축에 집중하고, 운영비 지원 제도를 확충하며, 중국 의존 최소화를 위한 국내 자급률 목표 설정 등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수소경제가 단순한 구호를 넘어 지속 가능한 산업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유종민

[기자의 눈] 임대료에 등골 휘는 면세점, 공항·정부 모르쇠가 답일까

“지금 인천공항 면세점 임대료 체제라면 입점 사업자 입장에서 유커(중국인 단체 관광객)가 돌아와도 임대료 폭탄 우려가 더 크죠." 최근 기획기사 취재 차 연락한 면세업계 취재원이 내놓은 씁쓸한 진단이다. 면세 소비는 줄어든 마당에 '인두세' 기반의 임차료 부과 탓에 수익이 없다시피 하니, 그는 오죽하면 “차라리 하루하루 출국객이 적으면 다행일 것"이라고 얘기할 정도였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최근 거액의 위약금을 감수하고 일부 사업권을 포기한 신라면세점 심정도 이해가 간다. 기껏 희망퇴직·임원 임금 삭감 등 짜낼 만큼 짜냈더니, 곧 대규모 객수 유입으로 수수료 폭증이 예상돼 오히려 '사업 청산'이 본전인 셈이다. 신라면세점과 마찬가지로 공항 면세점 탓에 매월 수십억 원의 적자를 본 신세계면세점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올 1·2분기 연속 영업적자를 기록해 법적 공방 등 장기전을 치룰 여력이 없는 만큼 사업 철수를 택할 공산이 크다는 게 업계 분석이다. 물론 '조정 불가' 입장을 견지하는 인천공항공사도 나름의 사정이 있다. 사후 임대료 조정 시 4기 입찰 탈락 업체들이 제시한 임대료보다 낮아져 특혜 시비에 휘말릴 가능성이 커지고, 신규 입찰 때 부정적인 영향도 미칠 수 있어서다. 시장이 고루 성장한다면 공항과 입점업체 양쪽 모두 수수료가 올라도 크게 문제될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공항 임대료를 차치하더라도 면세업계 업황이 예전만 못하다. 과거에는 공항 면세점 손실을 시내 점포 수익으로 메울 수 있었지만, 중국인 관광객의 소비 흐름 변화와 소비력 하락으로 이마저도 불가능한 실정이다. 공항과 입점업체의 실적만 봐도 온도차가 극명하다. 적자 늪에 허우적대는 입점 사업자들과 달리 올 상반기(1~6월) 인천공항의 영업이익은 3398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3% 올랐다. 인천공항 전체 수익에서 면세점 등 비(非)항공 수익 기여도가 60%로 높은 편이지만, 수익 구조는 다소 불균형해 보인다. 일각에서는 임대료 감면에 나선 해외 공항들과 비교해 인천공항공사 측이 다소 유연함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업계 현실에 지나치게 둔감하며 '원칙 고수'에 치중한다는 것이 주된 비판이다. 여기에 주관부처인 국토교통부마저 “법적 절차에 따라 할 일"이라며 선 긋기에 나서 면세 사업자 입장에선 사면초가나 다름없다. 면세점 매출과 상관없이 여객 머릿수 기준으로 수익을 벌어들이는 가운데, 인천공항은 면세점의 열악한 상황을 모르쇠하기보다 함께 공생할 수 있는 상생안을 모색해야 한다. 과거와 면세산업 구조·소비 트렌드가 확연히 바뀐 만큼 정부 차원의 근본적인 제도 개선 및 지원 움직임도 필요한 때다. 조하니 기자 inahohc@ekn.kr

[장박원 칼럼] ‘녹색 사기’라는 거짓 선동이 초래할 파국

현자들은 더 이상 나무를 베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이 섬에서 가장 큰 부족을 이끌고 있는 추장은 막무가내였다. 벌목으로 세상이 망할 것이라는 주장을 '사기'라며 목청을 높였다. 그는 부족 연합회의가 열린 자리에서도 열변을 토했다. “나무가 이렇게 많은데 무슨 소리를 하고 있나. 아무리 많은 나무를 베도 숲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과거에도 나무가 곧 없어질 것이라고 했으나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게 드러났다. 저 숲을 보라. 우리 조상 때보다는 덜 하지만 여전히 울창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이 섬을 살리기 위해 벌목을 자제해야 한다는 건 나무 가격을 높이려는 자들의 음흉한 음모일 뿐이다. 누구나 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쓰고 배를 만들게 해야 한다. 그래야 풍요로운 삶을 이어갈 수 있다. 벌목을 막는 모든 논리와 주장은 사기다. 베는 나무 수를 줄였다가 다시 늘린 몇몇 부족을 보라. 그들의 생활이 다시 풍요로워지지 않았나." 그는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연설했으나 실상은 전혀 달랐다. 섬 한 쪽에서는 이미 과도한 벌목으로 이상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숲이 사막화하면서 주변 토양도 메말라갔다. 예전에 비해 작물 수확량이 확 줄었다. 식량 부족으로 기존에 살던 곳에서 이주해야 하는 주민도 나타났다. 마구잡이 벌목으로 숲과 농경지가 사라지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이런 현상을 주의 깊게 관찰해온 현자들은 나무 베는 양을 줄이지 않으면 숲이 사라져 섬 전체가 사막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모든 주민이 소멸하는 끔찍한 미래를 피하려면 지금 당장 벌목을 자제하고 숲을 살려야 한다고 권고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관행과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거대한 석상을 세우는 일도 멈추지 않았다. 석상을 세우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통나무가 필요했다. 통나무를 이용해 큰 돌을 옮겼기 때문이다. 석상은 각 부족의 명예를 드높이는 목적 외에 실용성은 없었다. 현자들은 이런 이유로 나무를 베어서는 안 된다고 말렸다. 하지만 이들의 충고는 무기력하기만 했다. 각 부족의 지도자는 석상을 세워야만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주민들은 석상 크기가 부족의 자존심을 상징한다고 생각했다. 부족 연합회의에서 벌목 규제를 사기라고 외친 추장도 섬에서 가장 큰 석상을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새 숲은 사라졌고 나무도 몇 구루 남지 않았다. 사막화한 땅에서는 농작물이 자라지 않았다. 양식이 부족하자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서로 잡아먹기 시작했다. 식인 관습이 생긴 것이다. 이제 소멸은 시간 문제였다. 섬은 서서히 폐허가 됐다. 숲은커녕 나무 한 구루 남지 않았다. 섬에서는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이방인이 우연히 이 섬을 발견했을 때는 인간은 사라지고 해변에 거대한 석상들만 나란히 서 있었다. '총, 균, 쇠'의 저자 재러드 다이아몬드가 또 다른 명저 '문명의 붕괴'에 소개한 이스트 섬의 비극을 상상력을 가미해 묘사해봤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23일(현지시간)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기후변화가 대사기극이라고 했는데 이런 거짓 선동이 초래할 파국을 좀 더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다. 남태평양에 있는 이스터 섬은 주민들이 삶의 터전인 숲을 스스로 파괴한 탓에 멸종한 대표적 사례다. 지금의 탄소 배출과 기후 위기는 똑같은 오류를 반복할 수 있다. 그런데도 트럼프 대통령은 억지 논리로 기후변화라는 명백한 사실을 부정한다. “기온이 올라가든 내려가든 무슨 일이 벌어지든 기후변화가 되는 것이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지구 냉각이 세상을 멸망시킬 것이라고 했다. 탄소 발자국(온실가스 배출량)은 악의적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꾸며낸 사기다. 이 '녹색 사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실패할 것이다." 그의 주장을 반박할 자료는 차고 넘친다.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가파르게 증가했다. 산업화로 화석연료 사용이 급증한 결과다. 과다한 탄소 배출로 인한 이상 기후 현상은 몇 권의 책으로 써도 모자랄 만큼 많다. 올 여름 우리가 겪은 폭염도 기후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알고도 거짓말을 했다면 정치·경제적 의도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기후변화를 사기로 몰고 간 그의 거짓 선동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지금 당장 기후 위기에 대응하지 않으면 미래 세대는 엄청난 고통을 받게 된다. '녹색 사기'라는 거짓말은 지구촌을 또 다른 이스터 섬으로 만드는 악마의 속삭임이다. 장박원 기자 jangbak@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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