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공지능(AI)이 세계 산업 지형을 빠르게 바꾸는 가운데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도 이를 활용해 개발도상국의 교육·보건·에너지 등 난제를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다. AI 기술과 인프라가 일부 국가와 기업에 집중된 만큼 기술 격차가 새로운 개발 격차로 이어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코이카(KOICA·한국국제협력단)는 외교부와 18일 서울 여의도 콘래드 서울에서 '제19회 서울 ODA 국제회의'를 공동 개최했다. 올해 행사는 '포용적이고 지속 가능한 개발을 위한 AI'를 주제로 국내외 개발협력 관계자와 국제기구, 학계, 기업, 중앙아시아 정부 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 “AI 자체보다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중요" 서울 ODA 국제회의는 2007년 시작돼 올해 19회를 맞은 국내 개발협력 분야 대표 연례 국제행사다. 전문가와 정책 입안자, 현장 실무자들이 모여 국제개발협력의 주요 현안을 논의하고 정책적 해법을 모색하는 역할을 해왔다. 지난해 제18회 회의에서는 '개발재원 파트너십: 미래를 위한 논의'를 주제로 혼합·기후금융, 디지털 전환과 기술혁신, 민간 협력 등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올해는 AI로 논의의 초점을 좁혔다. AI가 개발협력의 방식과 성과를 빠르게 변화시키는 상황에서 기술을 단순히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개발도상국이 이를 스스로 활용할 수 있도록 인프라와 데이터, 인재, 제도적 역량을 함께 구축하는 방안을 찾는 데 무게를 뒀다. 16~17일 열린 제1차 한-중앙아시아 정상회의와 연계해 중앙아시아 5개국과 AI·디지털 분야 협력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도 마련됐다. 김진아 외교부 제2차관은 환영사에서 AI가 생산성과 혁신, 개발의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는 동시에 그 혜택이 고르게 돌아가지 않을 경우 기존 격차를 키울 수 있다고 진단했다. 김 차관은 “개발협력의 과제는 단순히 기술에 대한 접근성을 넓혀나가는 데 그치지 않고 각 협력국이 자국의 여건에 맞게 AI를 활용·발전시켜 나갈 수 있도록 역량 강화와 오너십 함양을 돕는 것"이라며 “AI 시대에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도록 대한민국이 책임 있는 파트너로서 함께 노력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김동호 코이카 이사장 직무대행은 논의를 '원칙'에서 '실행'으로 옮겨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김 직무대행은 “이번 회의는 AI 시대 개발협력의 원칙적 구상에 머물지 않고 기업, 시민사회, 협력국 정부와 함께 이를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라고 밝혔다. 그는 이날 회의가 AI 시대 협력의 설계부터 기업·시민사회·공여기관의 현장 실천, 중앙아시아 5개국 정부와의 협력 방안까지 연결하는 자리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이날 기조연설은 랜드리 시녜 썬더버드 국제경영대학원 상임이사 겸 교수이자 브루킹스연구소 국제경제개발분야 선임연구위원이 맡았다. 연설 주제는 'AI 시대 개발협력을 어떻게 전환할 것인가: 원칙에서 확산 가능한 실행으로'였다. 시녜 교수는 AI를 개발의 강력한 '발판(enabler)'이자 '가속기(accelerator)'로 평가했다. 나이지리아·가나·시에라리온의 AI 기반 교육도구, 르완다·케냐의 의료 진단, 케냐 농업 현장에서의 AI 활용 등을 사례로 들며 기술이 교육과 의료, 농업 등 다양한 분야의 개발 성과를 높일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AI가 개발협력 자체의 효율성을 높일 가능성도 제시했다. 사업 대상을 보다 정밀하게 설정하고 모니터링·평가(M&E), 프로그램 관리, 자원 배분 등에 AI를 활용하면 한정된 개발재원을 보다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AI가 모든 문제를 자동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낙관론에는 선을 그었다. 시녜 교수는 AI의 혜택이 자연스럽게 모든 국가와 사람에게 확산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개발도상국 사이에서도 에너지와 디지털 인프라뿐 아니라 데이터 역량과 컴퓨팅 파워의 격차가 크다는 이유에서다. 국가 차원의 AI 전략과 규제 역량에서도 상당한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시녜 교수는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지능을 필요로 하며 그것이 인간의 지능이든 인공지능이든 마찬가지"라면서도 AI의 잠재력을 실제 개발 성과로 연결하려면 효과적인 관리와 신뢰, 책임성, 실행 역량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 AI 인프라부터 현장 적용까지···중앙亞 5개국과 협력 논의 본행사는 AI 개발협력의 설계와 현장 적용, 중앙아시아 협력이라는 흐름에 맞춰 3개 세션으로 진행됐다. 첫 번째 세션 'AI 시대, 개발협력의 설계'에서는 AI를 개발협력에 활용하기 위한 기반과 원칙을 논의했다. 이규호 외교부 개발협력국장이 한국 정부의 AI·과학기술 무상원조 추진 전략을 소개했고 하니 에스칸다르 국제전기통신연합(ITU) 수석 전문관과 박경렬 KAIST 교수가 각각 AI 인프라와 포용적 AI 거버넌스를 주제로 발표했다. 논의의 핵심은 AI를 활용하기 위해 단순한 인터넷 연결 이상의 기반이 필요하다는 데 모였다. 클라우드와 데이터, 디지털 공공 인프라, 전문 인력 등을 함께 구축하고 각 협력국의 언어와 제도, 데이터 환경에 맞게 기술을 설계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협력국을 완성된 기술을 전달받는 '수혜자'가 아니라 설계와 활용에 참여하는 주체로 바라봐야 한다는 점도 강조됐다. AI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더라도 개발협력의 설계 중심에는 사람과 각 국가의 상황이 놓여야 한다는 취지다. 두 번째 세션 '현장에서 만나는 AI 개발협력의 실재'에서는 실제 적용 사례가 소개됐다. 코이카 기업협력 프로그램 CTS-TIPS에 참여하는 식스티헤르츠는 베트남에서 AI를 활용해 재생에너지 유통을 확대하는 모델을 발표했다. 인도 와드와니 AI는 모바일 AI 기술을 활용해 공공보건 시스템의 사각지대를 줄인 사례를 공유했다. 노르웨이개발협력청(Norad)은 AI를 원조 행정과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에 활용하면서 얻은 경험을 소개했다. 마지막 세션에서는 '한-중앙아시아 AI ODA를 위한 전략적 파트너십'을 주제로 중앙아시아 지역에 초점을 맞췄다. 코이카와 세계은행, 아시아개발은행(ADB), 타지키스탄 AI 분야 관계자들이 중앙아시아의 AI·디지털 협력 현황과 전략을 공유했다. 이어 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투르크메니스탄·우즈베키스탄 정부 관계자들이 패널토론에 참여해 각국의 AI 인재 양성과 컴퓨팅 인프라, 현지 언어 기반 기술 개발 등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국가마다 AI·디지털 전환의 출발점과 인프라, 전문인력 수준이 다른 만큼 일률적인 기술 이전보다 각국의 국가전략과 수요를 반영해야 한다는 데 논의의 무게가 실렸다. 사업 우선순위 설정과 설계 단계부터 협력국이 직접 참여하는 방식도 주요 과제로 거론됐다. 행사장 밖에서는 '코이카 AI 파트너스 페어'도 열렸다. 데이터메이커, 태그하이브, 위플랫, 에이아이웍스, 비상교육, 식스티헤르츠, 라이브케어, 메디사피엔스, 파이프트리, 에이아이엠디 등 국내 기업 10곳이 참여해 교육·보건의료·에너지·농업 분야에서 활용할 수 있는 AI·디지털 기술과 개발협력 사례를 선보였다. 이윤영 코이카 이사는 폐회사에서 “AI가 이미 개발협력의 현장에서 구체적인 성과와 과제를 동시에 만들어내고 있는 현실을 확인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AI가 혁신적인 만큼 그 AI를 다루는 파트너십 역시 혁신적이어야 한다. 코이카도 오늘의 논의를 밑거름 삼아 협력국과 국제사회의 파트너들과 함께 이 여정을 계속 이어가겠다"고 덧붙였다. 여헌우 기자 yes@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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