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성 굿프롬프트 대표 2025년, 글로벌 기술 생태계를 가장 크게 뒤흔든 변화는 단순히 성능이 향상된 AI가 아니었다. 인간의 의도를 이해하고 목표를 재구성하며 상황에 따라 절차를 스스로 설계하는 새로운 유형의 '에이전트형 AI(Agentic AI)'가 등장한 것이다. 이는 AI가 더 이상 우리가 묻고 이에 대한 응답을 수행하는 도구가 아니라, 맥락을 파악하고 판단하는 협력적 존재로 이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기술의 위상이 바뀌면, 인간이 AI와 관계 맺는 방식, 그리고 국가가 AI를 사회에 통합하는 전략 역시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한다. 각국은 저마다의 여건에 맞춘 AI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중이다. 미국은 초거대 모델 경쟁을 기반으로 명령형(Command-Based) AI 전략을 강화한다. 우수한 모델을 만들고, 사람이 명령을 내리면 AI가 수행하는 구조다. 한편 중국은 방대한 데이터와 통합적 국가 시스템을 기반으로 관리형(Manager-Based) AI를 구축시킨다. 도시 운영, 사회관리, 산업 정책까지 AI가 집단적 효율성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방식이다. 두 모델 모두 강력하지만, 공통점으로 인간과 AI가 함께 사고를 확장하는 구조를 중심에 두지 않는다. 한국은 이 두 모델과 다른 길을 선택해야만 하는 환경에 놓여 있다. 미국처럼 막대한 원천기술 투자를 지속하기 어렵고, 중국처럼 국가 단위로 데이터를 일원화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는 동시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AI 기술이 고도화된 지금, 경쟁의 중심은 “누가 더 큰 기술을 만들었는가"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기술을 사회와 결합시키는가"로 이동하고 있다. 즉, 서열 경쟁이 아니라 문명적 선택의 경쟁, 다시 말해 새로운 형태인 제3의 길이 열리고 있다. 한국이 선택할 전략적 방향은 협력형(Cooperative) AI 패러다임이다. 한국 사회는 높은 문해력, 빠른 적응력, 촘촘한 소통 구조 등 협업 중심의 문제 해결 방식에 익숙하다. 이는 인간과 AI가 판단을 나누고 서로를 보완하는 Agentic AI의 작동 원리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또한 디지털 행정, 의료보험, 교육 인프라 등 한국의 전 국민적 표준화 경험은 AI 협업 체계를 빠르게 도입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된다. 즉, 한국은 초거대 모델 경쟁보다 기술을 사회운영 방식과 결합해 구조를 재설계하는 데 강점을 가진 몇 안 되는 나라다. 이 협력형 패러다임을 국가 전략으로 실체화하려면 개인 → 조직 → 데이터 → 신뢰로 이어지는 단계적 전환이 필요하다. 이를 위한 첫 정책과제는 전 국민 AI 협업역량 표준(K-AI Collaboration Standard)을 마련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코딩 교육의 확장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AI와 어떻게 대화하고 판단하며 공동 작업을 수행할 것인지에 대한 국가적 기준이다. 예컨대 공공기관은 문서작성 과정에 AI 협업 절차를 도입하고, 교육 현장은 'AI와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핵심 역량으로 채택할 수 있다. 이는 AI 리터러시를 단순한 교육 과제가 아니라 국가 인적자본 전략의 중심 축으로 재정의하는 일이다. 이러한 협업 역량의 기반이 마련되어야 비로소, 산업·행정·의료·교육 등 각 분야의 업무 구조를 AI 중심으로 재설계하는 다음 단계가 가능해진다. 둘째 정책과제는 산업·행정·의료·교육 등 주요 영역의 업무 구조를 AI 협업 프로세스 중심으로 재설계해야 한다. 이는 기존 업무에 AI를 단순히 덧붙이는 방식에서 벗어나 업무 자체를 근본적으로 다시 정의해야 한다는 의미다. 각 부문마다 역할·책임·안전장치를 함께 설계하는 일은 점차 복잡해지고 있으며, 이를 조정할 상시적·전문적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 현재 존재하는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가 국가 AI의 비전과 원칙을 정하는 전략·심의 기능을 담당한다면, 실제 행정·산업 현장에서 AI 협업 프로세스를 구현·조정할 풀타임 전담 실행조직—'AI 활용 전략본부(가칭)'—이 별도로 필요하다. 부처 단위의 분절된 정책 체계만으로는 협력형 AI 패러다임의 구조적 확장을 감당하기 어렵다. 셋째 정책과제는 데이터 신뢰 프레임워크(K-Data Trust Framework)를 구축해야 한다. 이는 국가가 데이터를 일원적으로 통제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개인·기관·기업이 데이터를 안전하게 공유하고 교환할 수 있는 신뢰 기반의 인프라를 만드는 것이다. 협력형 AI는 정답형 데이터보다 맥락형 데이터를 필요로 하고, 이 데이터가 안전하고 투명하게 흐르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필수다. 넷째 정책과제는 AI 자율성 증가에 대응하는 책임성·투명성 체계(Algorithm Accountability System)를 구축해야 한다. 알고리즘 감사, 설명 가능한 AI 기준, 시민 참여형 평가 시스템 등은 한국형 협력 패러다임을 국제적 신뢰 기준으로 발전시키는 핵심 토대가 될 것이다. 이렇게 정책들이 결합되면 한국은 원천기술 경쟁에서 1·2위를 다투지 않더라도, AI 활용의 질과 사회적 수용성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즉, 기술을 가장 잘 '만드는' 나라가 아니라, 기술을 가장 잘 '활용하는' 나라라는 새로운 국가 모델을 정립할 수 있게 된다. AI는 이제 자율적 존재로 진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국가가 해야 할 일은 단순한 기술 도입이 아니라, 인간과 기술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사회적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다. 한국은 그 구조를 실현할 사회적 기반과 정책적 의지를 모두 갖춘 드문 나라다. 제3의 길은 선택지가 아니라, 한국이 갖춘 조건을 현실로 전환하는 전략적 방향이다. AI 시대의 경쟁은 서열이 아니라 설계의 문제이며, 한국은 그 설계를 통해 미래 문명의 새로운 기준을 세울 수 있다. 김한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