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유가족들의 시간은 여전히 2022년 10월 29일에 멈춰 있습니다." 2022년 10월 29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서 발생한 압사 참사가 4주기를 맞았다.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낸 유가족들의 슬픔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참사의 진상을 밝히고 책임을 규명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다시 울려 퍼졌다. 24일 저녁 서울광장에서는 '10·29 이태원 참사 4주기 시민추모대회'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희생자 유가족과 생존 피해자,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정부 및 정치권 인사 등이 참석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이번 추모대회는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 행정안전부, 서울특별시가 공동으로 마련했다. 참석자들은 참사 현장에서 시작된 추모 기도회와 서울광장[까지 이어진 행진을 통해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뜻을 모았다. 이날 추모대회는 희생자 160명의 이름을 한 명씩 부르는 호명식으로 시작됐다. 뮤지컬 배우들이 무대에 올라 희생자들의 이름을 차례로 읽었고, 이름이 불릴 때마다 “기억하겠습니다"라는 말이 이어졌다. 특히 올해는 참사 당시 구조 활동에 나섰던 이태원 상인 1명이 지난 4월 세상을 떠나면서 추모 대상이 160명으로 늘었다. 행사에서는 직접적인 참사 희생자뿐 아니라 구조 활동 이후 고통을 겪은 이들의 삶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전해졌다. 호명식에 이어 참석자들은 희생자와 생존 피해자, 구조자들을 기리는 묵념을 올렸다. 이날 유가족 대표로 연단에 오른 이정민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은 참사 이후 4년 동안 이어진 가족들의 고통과 진상규명에 대한 절박한 심정을 전했다. 이 위원장은 “그날의 비극이 우리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지 어느덧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며 “네 번의 계절이 네 번 바뀌는 동안 우리 아이들의 빈자리는 단 하루도 익숙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많은 이들이 4년이면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갈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묻기도 한다"며 “하지만 저희 유가족들의 시간은 여전히 2022년 10월 29일에 멈춰 있다"고 토로했다. 그는 참사 원인과 당시 대응 과정에 대한 의문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 위원장은 “참사가 왜 일어났는지, 왜 막을 수 없었는지, 왜 구조되지 못했는지에 대한 온전한 진실은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며 “책임져야 할 이들은 여전히 책임을 회피하고 진상규명을 향한 길은 험란하기만 하다"고 주장했다. 지난 4년 동안 유가족들의 곁을 지킨 시민들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손을 잡아주던 따뜻한 온기와 잊지 않겠노라 약속하며 건네준 한마디가 저희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진실이 밝혀지고 책임자가 합당한 책임을 지며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는 사회가 만들어질 때까지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며 “우리 아이들의 이름을 기억해 주시고 진실을 향한 걸음에 끝까지 함께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 위원장은 “저희 유가족들은 결코 멈추지 않겠다"며 “우리 사회의 다음 세대가 더 안전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끝까지 걸어가겠다"고 강조했다. 정부를 대표해 추모사에 나선 한성숙 국무총리는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고 유가족과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과했다. 한 총리는 “지난해 이 자리에서 우리는 159분을 기억했다"며 “그러나 참사가 남긴 희생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참사 당시 구조에 나섰던 상인 한 분께서 그날 이후 힘겨운 시간을 보내시다 올해 4월 우리 곁을 떠나셨다"며 희생자 160명의 명복을 빌었다. 한 총리는 “참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진실을 온전히 밝히고 남은 책임을 다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국가는 국민의 소중한 생명과 일상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며 “정부를 대표해 유가족과 피해자 여러분께 다시 한번 깊이 사과드리겠다"고 밝혔다. 정부 차원의 후속 조치도 약속했다. 한 총리는 지난해 정부 합동감사를 통해 당시 대응체계의 문제점과 책임자 징계의 미흡함을 확인했다고 설명하면서도 유가족들이 요구하는 진상규명과 책임 이행에는 충분히 답하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그는 “참사에 대한 수사와 특별조사위원회 조사가 철저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필요한 지원과 협조를 다하겠다"며 “유가족과 피해자들이 상처를 치유하고 일상을 회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아울러 지방정부와 시민사회가 함께하는 추모시설 조성, 희생자 추모재단 설립 지원, 재난 예방 및 대응체계 개선 등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한 총리는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은 과거에 머무는 일이 아니다"라며 “우리 모두와 가족의 내일과 미래를 지키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추모대회에는 해외에 거주하는 외국인 희생자 유가족들도 참석했다. 행사 주최 측에 따르면 이태원 참사 희생자 160명 가운데 외국인은 14개국 26명이다. 이날 추모대회에는 이란과 러시아, 중국, 일본, 스리랑카,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노르웨이, 호주, 프랑스 등 10개국에서 온 외국인 희생자 유가족 35명이 함께했다. 이란 국적 희생자 아파그 라스트마네시 씨의 어머니 자라 레자에 씨도 연단에 올라 가족을 잃은 슬픔과 진상규명에 대한 바람을 전했다. 그는 이란 시인 사디의 시를 인용하며 한 사람의 고통이 인류 전체의 아픔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이어 참사에 대한 투명하고 정확한 조사, 책임 소재 규명, 공공장소의 안전관리 강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우리가 원하는 것은 복수가 아니라 정의"라는 취지로 발언하며 법적 절차에 따른 공정한 책임 규명을 촉구했다. 외국인 유가족들은 지난 4년 동안 가족을 잃은 슬픔뿐 아니라 언어 장벽과 정보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어왔다. 이날 추모대회에서는 국적과 언어를 넘어 희생자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진상규명 과정에서 외국인 유가족들이 소외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유가족들과 아픔을 나누기 위해 다른 사회적 재난참사 피해자들도 추모대회에 참석했다. 1999년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참사로 일곱 살 딸을 잃은 이상학 재난참사피해자연대 부대표는 추모사를 통해 참사 피해자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촉구했다. 이 부대표는 “시간과 세월이 흘렀다는 이유만으로 그날의 아픈 기억과 슬픔이 사라지지는 않는다"며 “남겨진 이들의 일상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으며 우리가 함께 짊어져야 할 기억도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기억은 슬픔에만 머물지 않고 책임 있는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며 “참사의 철저한 진상규명과 피해 구제, 일상 회복을 위한 지원은 유가족만의 요구가 아니라 우리 공동체 모두가 응답해야 할 과제"라고 강조했다. 특히 희생자와 유가족을 향한 조롱과 혐오를 중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부대표는 “2차 피해 역시 참사의 연장선"이라며 “피해 사실을 드러내는 일이 또 다른 부담이 되지 않도록 경청하고 보호하며 함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는 광주 학동 참사,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참사, 씨랜드 화재 참사, 아리셀 참사 등 다른 재난참사 유가족과 관계자들도 참석해 연대의 뜻을 전했다. 추모대회 후반부에는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 관계자들이 공동선언문을 낭독하며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피해자 지원을 요구했다. 참석자들은 공동선언문에서 “지난 4년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캄캄한 시간이었다"며 “그러나 4년이 흐른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그날의 진실을 기다리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참사 당시 대규모 인파가 예상됐음에도 충분한 예방조치가 이뤄지지 않은 이유와 신고·구조 요청에 대한 대응이 지연된 경위, 참사 이후 유가족들이 겪은 어려움 등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왜 막지 못했는지, 왜 구하지 못했는지, 왜 유가족들마저 고립시켰는지 참사 4년이 지나도록 이 물음에 답하지 못하는 현실을 납득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특별조사위원회 조사 기간이 1년 연장된 가운데 시민대책회의는 독립적이고 철저한 조사를 통해 참사의 구조적 원인과 관계기관의 책임을 규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생존 피해자와 구조자들에 대한 지원 확대도 촉구했다. 참사 이후 심리적 고통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피해자들이 고립되지 않도록 지속적인 치료와 회복 지원, 생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참석자들은 “참사의 진실이 온전히 밝혀지고 유가족과 생존자들이 일상을 되찾는 날까지 함께하겠다"며 “다시는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끝까지 힘을 모으겠다"고 다짐했다. 이날 추모대회는 가수 김사월과 이한철의 추모 공연, 평화의나무 합창단 공연에 이어 참석자들이 휴대전화 불빛을 밝히고 이태원 참사 추모곡 '별에게'를 함께 부르며 마무리됐다. 한편 참사 발생일인 오는 29일 오전 10시 29분에는 서울 광화문 북광장에서 4주기 공식 기억식이 열릴 예정이다. 유가족과 시민대책회의, 정부가 함께 준비하는 이번 기억식에서는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참사의 교훈을 되새길 계획이다. 참사 발생 4년. 유가족들은 여전히 2022년 10월 29일의 진실을 기다리고 있다. 이날 서울광장에서 울려 퍼진 160명의 이름은 희생자를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다시는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회적 약속으로 남았다. 장혜원 기자 dalgu@ek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