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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기후는 생존 문제…차기 정권은 전담부처 만들어야

기후위기 대응이 더 이상 '선의의 정책'으로 남아 있을 수 없는 시대다. 대통령이 누구냐에 따라 기후 정책의 방향이 크게 바뀌는 현실은 이제 제도적 기반부터 다시 설계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탄녹위)의 사례가 그렇다. 문재인 정부 말기, 국가 탄소정책의 핵심 기구로 출범했지만 초기부터 실질적인 조정 권한이나 실행력을 갖추지 못한 채 형식적인 역할에 그쳤고, 윤석열 정부 3년 동안에도 유명무실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제 대한민국의 기후정책은 분기점에 서 있다. 윤 전 대통령 탄핵으로 6월 3일 조기대선이 실시되면서 한국 사회가 기후위기 대응의 컨트롤타워를 어떻게 다시 세울 것인지가 본격적인 핵심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환경부 한 부처만으로는 역부족인 시대다. 산업·에너지·재정·복지를 아우르는 '기후에너지부' 또는 '기후경제부' 신설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이미 미국, 독일, 영국 등은 기후와 에너지 정책을 포괄하는 정부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 중국은 청정에너지에만 1000조원 넘는 투자를 쏟아붓고 있으며, 탄소중립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삼고 있다. 반면 한국은 2030년까지 온실가스를 40% 감축하겠다고 국제사회에 약속했지만, 2022년 기준 2018년 대비 7.6% 줄이는 데 그쳤다. 지금처럼 가면 국제적 신뢰를 잃는 것은 물론 경제 전반의 전환도 늦어질 수밖에 없다. 최근 국회 세미나에서는 탄녹위를 독립성과 대표성이 보장된 행정기구로 개편하고, 기후시민의회 같은 참여형 거버넌스를 신설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정권이 바뀐다면 탄녹위의 기능과 위상을 되살리고 기후위기 대응을 뒷받침할 정책 시스템을 다시 세울 수 있는 중요한 기회가 될 수 있다. 기후 전담부처 신설은 단순히 정부 조직 하나 늘리는 게 아니다. 산업계에는 명확한 탄소중립 로드맵을 제공하고, 국민에게는 에너지비용 절감과 기후재난 대응이라는 실질적인 대책을 제공한다. 지금처럼 환경·산업·재정 부처가 따로 움직이는 구조로는 총체적인 대응이 어렵다. 기후위기를 단지 환경 이슈로만 보지 않고, 산업·경제·복지 전반과 연결된 문제로 접근하는 '정부의 역할 재정의'가 필요한 때다. 기후는 이제 과학의 영역을 넘어 정치의 영역이 됐다. 기후정책은 생존의 문제이자 권력의 문제다. 어떤 정치세력이 권한을 가지느냐에 따라 정책의 방향과 실행력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탄소중립이라는 목표가 공허한 구호로 남지 않으려면 이를 뒷받침할 정부 조직과 제도부터 새롭게 정비해야 한다. 윤수현 기자 ysh@ekn.kr

[기자의 눈] AI 가전의 시대, 소비자 마음은 어디에 있나

결혼 준비로 최근 가전제품에 유독 관심이 많아졌다. 냉장고, 에어컨, 세탁기, 식기세척기, 로봇청소기까지 신혼집 곳곳을 어떻게 꾸밀지 상상하며 다양한 제품을 비교해봤다. 제조사별 스펙과 디자인, 가격을 꼼꼼히 따져가며 고르던 중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수십 가지 모델을 살펴봤지만, 제품 선택 기준에 '인공지능(AI)'은 단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전자업계를 취재하는 기자로서 AI는 빠지지 않는 핵심 키워드다. 국내 주요 가전기업들은 AI를 제품 곳곳에 탑재해 혁신을 이루고 있다고 강조하고, 그 흐름은 해마다 업계 전략의 중심이 된다. 기자 시선으로 보면 'AI는 필수'처럼 보인다. 하지만 막상 소비자로 돌아서니 이야기는 달랐다. 현실에서는 AI보다 디자인, 가격, 브랜드 신뢰도 같은 요소가 더 중요했다. 기자일 땐 보이지 않던 간극이, 소비자가 되어보니 오히려 더 뚜렷하게 다가왔다. 물론 AI 기능이 무용하다는 뜻은 아니다. 예컨대 세탁기의 '자동 세제 투입', 에어컨의 '사용자 맞춤 온도 조절' 같은 기능은 분명 편리하다. 하지만 'AI를 넣었으니 혁신'이라는 전제는 소비자에게는 그리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소비자 입장에서 AI는 여전히 '체감하기 어려운 기술'인 경우가 많다. 일상에서 크게 느껴지지 않다 보니, 구매 결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기업들은 AI가 잘 팔린다고 항변한다. 전년 대비 AI 가전 판매가 몇 % 늘었다는 식의 자료를 앞다퉈 내놓는다. 하지만 현장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한 가전매장 관계자는 “어찌 보면 눈속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요즘엔 대부분 제품에 AI가 기본처럼 들어가 있어서, 소비자 입장에선 결국 이름만 다른 AI 가전들 사이에서 고를 수밖에 없다"며 “이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반 가전보다 AI 제품의 판매 비중이 높아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디자인, 성능 등 전통적인 요소가 여전히 중요하다는 점은 글로벌 히트 제품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다이슨의 무선청소기, 발뮤다의 토스터 등은 복잡한 AI 없이도 소비자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강력한 흡입력, 직관적인 사용성, 감성적인 디자인 등 본질적인 가치를 얼마나 정교하게 구현했는지가 성공 요인이었다. AI는 분명 하나의 차별화 포인트다. 그러나 그것이 만능은 아니다. 기능을 추가하는 데 집중하기보다, 그 기능이 어떤 '가치'를 주는지가 더 중요하다. 기술을 소비자 삶과 연결시키는 진정성, 그리고 제품 본질에 대한 꾸준한 고민. 그것이 지금 가전 브랜드들이 되새겨야 할 지점이다. 김윤호 기자 kyh81@ekn.kr

[이슈&인사이트] 이상한 나라, 이해할 수 없는 국민

이상한 나라, 이해할 수 없는 국민. 외국에서 심심치 않게 우리나라와 우리 국민을 평가하는 말이다. 남들은 수백 년 걸린 경제발전을 불과 30년 만에 해치운 나라, 그것도 가진 것이라곤 먹여 살릴 국민밖에 없는 나라, 전 국토가 잿더미로 변한 참혹한 전쟁을 겪어 아무 희망이 없던 나라. 그런 나라가 5.16 군사쿠데타 이후 갑자기 꿈틀거리더니 조선, 자동차, 반도체 등 제조업과 첨단산업에 도전했고, 1990년대에는 정보통신산업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통해 세계에 우뚝 섰다. 그것만으로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시민의 힘으로 군사독재를 무너뜨리더니 마침내 세계가 부러워하는 정치적 민주화를 일구어냈다. 이제 세계인은 대한민국을 알고 싶어하고, 이 나라를 방문하고 싶어 한다. 즉석 라면의 매운 맛에 반해 눈물을 쥐어짜며 불닭볶음면과 신라면을 먹는다. 한글을 공부하고 한국의 대학에서 공부하고 싶어 유학을 온다. 입으론 BTS나 블랙핑크 등 아이돌 그룹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몸으론 그들의 춤을 따라 둠칫거린다.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의 발달과 유튜브 등 SNS의 보편화에 올라탄 우리의 문화예술가와 창작가들은 세계인을 대한민국의 문화영토에 초대하고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우리의 국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게 80년을 살아온 우리가 자해를 통해 스스로 무너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재명 대통령 만들기에 빠져 30여 차례 탄핵으로 윤석열 정부를 흔들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정치 초년생 윤석열의 잘못된 선택이었다. 윤석열은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딱 맞는 다혈질의 고집쟁이였다. 불과 0.73% 차이로 당선된 대통령이라면 야당과의 협치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고 운명이었다. 더욱이 그 야당이 압도적 다수의석을 차지한 여소야대 국회에 지방권력까지 쥐고 있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첫 시험은 인수위 시절 맞은 지방선거였다. 대선 승리에 박원순 서울시장과 오거돈 부산시장의 성 추문으로 치러진 보궐선거에서의 승리로 분위기가 매우 좋았다. 인구 1,430만 명의 최대 지방자치단체인 경기도지사 선거에 국민의힘에서는 유승민 전 의원이 출사표를 던졌다. 국힘 후보 중 가장 중도와 청년세대 확장성이 큰 유 후보는 그대로 두면 국힘 후보로 확정될 가능성이 높았다. 여기에 용산이 개입해 인수위 대변인이었던 김은혜를 억지로 밀어 후보로 만들었고, 결국 민주당 김동연 후보에 패했다. 누구 말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유 후보에 씌워진 배신자 프레임으로 윤석열은 대통령 임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치명상을 입었다. 만일 유승민 후보를 선택했다면 수도권을 모두 국힘이 가져올 수 있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유 후보가 경기도지사가 됐다면 이재명 대표의 비리가 백일하에 드러날 경기도의 모든 자료가 모두 쉽게 공개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후 국힘 내부의 파워 게임에 어설픈 개입으로 용산은 점점 더 진흙탕 속에 빠져들었다. 이준석 전 대표를 몰아내는 과정이나 당 대표 경선에서 나경원 의원을 주저앉히는 과정, 김기현 대표의 사퇴와 연이은 비대위 체제의 불안정성, 한동훈의 비대위원장 차출과 그와의 끝없는 갈등 등. 윤석열의 선택은 항상 갈등을 잉태했고, 결국 22대 총선은 민주당에 패배하기 전에 이미 내부가 스스로 무너진 결과였다. 국내정치가 혼란에 빠져 있는 동안, 세계는 급변하고 있다. 제2기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를 활용한 국제정치경제체제의 변화 시도는 무역으로 먹고사는 우리에게는 사느냐 죽느냐의 위기다. 세계 일류로 성장한 기업들의 노력만으로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오직 단합된 힘이 필요하지만, 내부는 또 헌법재판소를 제 편으로 만들기 위한 진흙탕 싸움을 시작했다. 정치인들은 이 나라가 만신창이가 되어도 그저 권력만 잡으면 그만이다. 쓰레기라면 일거에 쓸어버렸을 버러지만도 못한 사람들에게 언제까지 이 나라를 맡겨 둘 것인가. 우리가 무너진다면 세계인들은 또다시 생각할 것이다. 그토록 잘살던 대한민국이 어떻게 그렇게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을까. 정말 이상한 나라고 이해할 수 없는 국민이라고. 홍성걸

[EE칼럼] 우리나라에는 아직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이 없다.

지난 3월 18일,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에 관한 특별법(이하 '특별법')」이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지만 아직 확보하지 못한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장 부지를 찾기 위한 첫걸음을 제대로 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이 특별법은 처분장 부지 선정 절차, 처분장 유치 지역에 대한 지원, 전담 조직과 관리사업자 등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특별법 시행에 앞서 한 가지 걸림돌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이 없다는 점이다. 처분장에 처분할 대상이 없는 것이다. 「원자력안전법」제2조제18호에 따르면, '원자력진흥위원회'의 심의․의결을 거쳐 폐기하기로 결정된 사용후핵연료만이 고준위 방사성폐기물로 분류된다. 특별법도 이 정의를 따르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원자력진흥위원회'가 폐기를 결정한 사용후핵연료는 단 한 다발도 없다.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의 또 다른 발생원은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후 폐기물도 없다. 이제라도 처분 대상 폐기물을 분명히 정해야 한다. 이는 사용후핵연료 정책과 직결돼 있다. 여기에는 사용후핵연료 관리 단계에 따른 정부의 구체적 결정이 포함돼 있어야 한다. 원전에 보관 중인 것 이외에 현재 개발 중인 선진원자로에서 배출될 사용후핵연료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핵심 결정 중 하나가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여부다. 재처리한다면, 국내에서 할 것인지 또는 해외에 위탁할 것인지 등을 결정해야 한다. 이에 따라, 향후 확보해야 할 기반 시설, 처분 대상 폐기물 형태와 처분 시점 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반면 직접 처분한다면, 사용후핵연료를 고준위 방사성폐기물로 분류하는 절차부터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아직 범정부 차원의 사용후핵연료 정책은 마련돼 있지 않다. 지금까지 사용후핵연료와 관련한 범정부 차원의 결정으로는 2004년 12월 17일 열린 제253차 '원자력위원회'(현 '원자력진흥위원회') 회의에서 “사용후핵연료 관리 방침에 대해서는 국가 정책 방향, 국내외 기술개발 추이 등을 감안하여 중장기적으로 충분한 논의를 거쳐 국민적 공감대하에서 추진한다"는 내용이 유일하다. 그 이후 범정부 차원의 사용후핵연료 정책은 나오지 않았다. 이제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산업통상자원부가 나설 때다. 「원자력안전법」 제35조제4항에 따르면, 두 부처 장관은 사용후핵연료의 처리․처분에 관한 사항을 원자력안전위원회 및 관계 부처와 협의하고, '원자력진흥위원회'의 심의․의결을 거쳐 결정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해당 위원회에 상정된 안건은 각 부처의 기술개발 계획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일례로 2021년 12월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사용후핵연료 처리기술 연구개발 현황 및 방향'을, 2024년 2월 산업자원통상부는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R&D 로드맵'을 보고했지만, 이들은 각 부처 소관 업무에 대한 계획일 뿐, 범정부 차원의 통합적 정책이라 보기는 어렵다. 한편, 최근 국제 우라늄 시장 상황은 재처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요구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원전 수요가 늘어나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불안한 국제 정세가 시장의 불안정성을 키우면서 우라늄 자원 가격이 급등하고 있다. 시장조사 기관 UxC에 따르면, 2025년 1월 기준 우라늄 농축 서비스 가격은 SWU당 190달러로, 2022년의 약 56달러에 비해 3배 이상 상승했다. 문제는 가격만이 아니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거라는 장기 전망이 우세하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시장이 안정적이어서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필요성과 경제성이 낮았지만, 지금은 자원 안보 차원에서 핵비확산을 전제로 재처리 여부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사용후핵연료 정책 결정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마냥 미룰 문제도 아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이 커지는 가운데, 에너지 대부분을 수입하는 우리로서는 준국산 에너지원인 원자력의 이용 확대는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선 안정적인 핵연료 확보가 필요하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용후핵연료 정책도 필요하다. 특별법 시행을 앞둔 지금이 바로 사용후핵연료 정책 수립의 적기다. 정책 공백이 장기화할수록 사회적 갈등과 비용은 커지기 마련이다. 이제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산업통상자원부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국가 에너지 주권 차원에서 전략적 선택이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문주현

[특별 기고]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의 독립을 이야기하자

최근 연이어 발생한 두 건의 항공기 사고로 인해 대한민국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이하 사조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사조위는 항공과 철도 사고 원인을 조사하고 재발을 방지하며 안전 개선책을 마련하는 핵심 기관이다. 현재 사조위는 조직 구조상 국토교통부 산하 기관으로 운영돼 사고 조사 과정에서 이해 충돌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는 국민 신뢰 확보는 물론 대외적인 신인도 측면에서도 구조적 한계를 초래하고 있는 것으로, 공정하고 객관적 조사의 진행을 위해 시급한 보완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항공 산업의 급속한 양적 팽창과 더불어 다양한 항공 사고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이 가운데 전문적인 조사와 대응을 위해 이제는 독립적인 사고 조사 기관의 필요성과 기대 효과를 해외 선진 사례를 통해 고찰하고 변화의 방향을 모색해 봐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선진국을 중심으로 많은 국가들은 독립적 사고 조사 기관을 운영하고 있어 높은 신뢰도를 확보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1967년 설립된 미국의 국가교통안전위원회(NTSB)는 연방 정부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기관으로, 업계의 영향에서도 벗어나 공정한 항공·철도·도로·해양 사고 조사 역할을 진행해 왔다. 이곳은 연방항공청(FAA) 등 정책 집행 기관과의 이해 충돌을 방지함으로써 객관적인 사고 원인 분석과 안전 권고를 수행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체계 덕분에 NTSB는 전 세계 항공 사고 조사 조직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영국의 항공사고조사위원회(AAIB)는 교통부(DfT) 산하에 있지만 법적으로 독립된 권한을 보장받고 있다.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부속서 13에 따라 사고 조사의 목적이 책임 추궁이 아닌 안전 개선에 있음이 명확히 규정돼 있어 정부나 기업 등 외부의 개입을 불허한다. 또한 조사 보고서와 권고 사항은 AAIB 외의 어떤 기관도 수정할 수 없고, 사고 조사 방법과 범위를 자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이 같은 독립성 보장 체계 덕분에 AAIB는 사고 조사 과정에서 완전한 자율성을 유지하고 있다. 독일의 항공사고조사국(BfU)과 호주의 교통안전국(ATSB) 역시 정부로부터 독립된 사고 조사 기관으로 운영된다. 특히 ATSB는 조종사가 직접 사고 조사에 참여하는 구조를 채택해 사고 분석 과정에서 현장 경험을 지닌 전문가의 시각이 반영될 수 있도록 한다. 위의 사례와 같이 사고 조사 기관이 정책 집행 기관과 분리되면 이해 관계에 따른 유착을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 있고, 이를 통해 객관성이 보장된다는 장점이 있다. 만일 사조위가 국토부로부터 독립할 경우 사고 조사 과정의 공정성과 객관성이 한층 강화될 것이다. 또한 사고 원인 분석의 신뢰도가 향상될 뿐만 아니라 각종 논란으로부터 자유로워져 국민 모두가 납득할만한 조사 결과를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독립성을 갖춘 사조위는 조사 결과를 근거로 국토부와 관련 기관에 좀 더 강력하고 실질적인 안전 개선 권고를 내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또 정책 집행 기관이 조사 결과를 수정하거나 개입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안전 대책의 실효성을 높일 수 있다. 이 외에도 조종사와 항공 전문가가 직접 사고 조사에 참여하면 실제 비행 중에 발생하는 문제와 조종사의 의사결정 과정을 심층적이고 실질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 더불어 조종사의 심리·생리적 상태를 고려한 선진적인 조사 방식을 도입함으로써 사고 예방을 위한 더욱 실효성 있는 조치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ICAO와 국제철도연맹(UIC) 또한 독립적인 사고 조사 기구의 운영을 강력히 권고한다. 사조위의 독립은 우리나라가 국제 기준을 준수하는 국가로서의 신뢰도를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다. 또한 해외 사례를 참고할 때 독립 기관을 운영하는 국가일수록 사고 발생 후 개선 조치의 효과가 높게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항공 사고 조사는 단순한 원인 규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유사한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핵심적인 과정이다. 사조위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강화하는 것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필수적인 조치이기 때문에 더 미뤄져서는 안 된다. 정부와 항공 관계 당국이 이러한 측면을 고려한 즉각적인 조직 개편을 단행해 국민이 신뢰하고 안심하는 선진화된 안전한 운항 환경이 구축될 날을 기대해 본다. 박규빈 기자 kevinpark@ekn.kr

[기자의 눈] 대형마트 영업규제, 강화-완화 이분법 벗어나야

지난 4일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대통령 파면선고 직후 유통업계 한 관계자는 향후 유통업계 이슈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형마트 영업규제'를 제일 먼저 꼽았다. 대형마트 규제는 윤석열 정부와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의 견해 차가 가장 뚜렷한 이슈인 만큼 향후 대선 결과에 따라 향방이 크게 달라질 사안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 당시부터 대형마트 업계의 숙원인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을 규제개혁 1호로 선정하고 관련 내용으로 의무휴업 평일 선택, 의무휴업일 온라인영업 허용 등을 적극 추진해 왔다. 그러나, 지난해 5월 제22대 국회 출범 이후 현재까지 발의된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 중 대형마트 영업규제 관련 내용을 골자로 하는 발의 건수만 총 13건에 이른다. 국민의힘이 발의한 6건은 모두 대형마트 영업시간 완화, 의무휴업일 공휴일 지정 완화, 의무휴업일 온라인영업 허용, 자영업자인 프랜차이즈 가맹점 의무휴업 완화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반면에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이 발의한 7건은 모두 평일 의무휴업 금지, 상권영향평가 강화, 준대규모점포 규제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들 13개 발의안은 현재 모두 소관상임위 계류 중이다. 대형마트 영업규제가 실제로 주변 소상공인·전통시장 보호에 효과가 있는 지도 여전히 논란거리다. 지난 2월 산업연구원(KIET)이 발표한 보고서에서 대형마트 의무휴업일을 평일로 전환한 대구시와 충북 청주시는 평일 전환 이후 대형마트 주변상권 매출액이 평균 3.1%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대형마트나 전통시장의 경쟁상대는 서로가 아니라 온라인 업체"라고 지적하면서 “대형마트와 전통상권이 공존하는 복합상권으로 소비자가 찾아오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최근 기업회생을 진행 중인 홈플러스는 월 2회 의무휴업에 따른 매출 감소 효과가 연간 1조원에 이른다고 추산하고 있다. 홈플러스의 위기가 의무휴업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홈플러스 기업회생으로 2만명에 이르는 근로자들이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입점 소상공인들도 위기에 직면했다는 점은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의 시사점을 제시해 준다. 6월 대통령선거에서 어느 당이 집권하든 대형마트 규제 방향이 이분법적 잣대가 아닌 전통시장 소상공인은 물론 대형마트 근로자, 소비자 모두 아우르는 통합 방향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김철훈 기자 kch0054@ekn.kr

[EE칼럼] 멈춰진 진실: 대한민국의 123일과 AI의 교훈

김한성 굿프롬프트 대표 2024년 12월초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와 뒤이은 국회의 대통령 탄핵 소추 발의, 그리고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다다르는 123일 동안 대한민국은 극도의 혼란과 법적 불확실성에 휩싸였다. 대중의 불안과 추측이 난무하는 사회적 긴장과 금융 및 경제의 침체속에 정치적 분위기는 극도로 얼어 붙었다, 한국 현대사의 이 모호한 시기에, 하나의 질문이 조용히 그러나 강력하게 사회 곳곳에서 메아리쳤다. “나는 멈추어 있다. 그럼에도 세상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I am stopped, but what shall happen around us?)" 한국이 민주주의 제도의 역할과 법적 해석을 둘러싼 내부 논쟁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글로벌 인공지능(AI)은 역사적이고 획기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OpenAI가 다중모달 기능을 크게 개선한 언어모델을 발표했고, 유럽은 'AI법(AI Act)'을 제정하며 글로벌 규제를 선도했으며, 중국 등 여러 나라는 국가 차원의 AI 거버넌스 체계를 빠르게 구축해 나갔다. 이미 많은 국가들이 산업 자동화와 정책 수립에서 AI 시스템을 적극 활용하며 혁신을 이어갔지만, 한국은 내부 논쟁과 사회적 양극화에 휩싸여 한발짝도 꼼짝 못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멈춰진 상황은 우리 사회가 가졌던 기존 제도에 대한 믿음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나아가 우리 모두가 진실을 회복하고 우리의 미래를 되찾기 위하여 시민적인 시스템을 어떻게 설계할 수 있을지를 모색하게 하였다. 모든 AI 연구자들이 알고 있듯이, 대형 언어모델은 '환각(hallucination)' 현상을 일으킨다. 이 모델들은 사실과 다른 정보를 거침없이 자신있게 생성한다. 이는 모델이 의도적으로 사람을 속이려는 것이 아니라, 학습 데이터에 기반하여 개연성 높은 다음 단어들을 예측한 결과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 역시 스트레스 상황에서 비슷한 현상을 보인다. 이를 '기억의 혼동(confabulation)'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외상, 불확실성, 상충되는 정보에 직면했을 때, 심리적으로 이해 가능한 형태로 기억을 재구성한다. 이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의 123일 동안 양극화된 해석들이 급속히 퍼져나갔다. 어떤 이들은 탄핵 절차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했고, 또 다른 이들은 대통령직의 법적 근거 자체를 문제 삼았다. 소셜미디어는 이러한 긴장을 더욱 증폭시켰으며, 결국 헌법재판소는 판결을 내렸지만, 그 시점에는 이미 여론이 확고하게 양분된 상태였다. 객관적 사실(facts)은 감정적으로 더 설득력 있는 이야기(narratives)들과 경쟁해야 했다. AI의 환각과 인간의 기억 혼동은 발생 원인은 서로 다르지만 공통된 위험을 갖는다. 둘 다 진실 그 자체보다 더 진짜처럼 느껴지는 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AI 연구 공동체는 '환각' 현상을 줄이는 데 의미있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러한 노력들은 사회적 진실 관리 측면에서도 유용한 통찰을 제공한다. 예컨대, 모델이 문제를 단계별로 사고하도록 유도하면 정확성과 일관성이 향상된다(Chain-of-Thought Prompting)든가, 검증된 외부 데이터베이스와 모델의 출력을 연결하면 사실 기반의 정보를 더욱 견고히 확보할 수 있다(Retrieval-Augmented Generation). 또한 모델이 지나친 확신을 피하고 불확실성을 명확히 표현하도록 훈련시키면 신뢰성을 높일 수 있다(Calibration). 이외에도 극단적이고 의도적인 스트레스 테스트를 통해 모델의 취약점을 찾아내고, 전체 시스템의 강인성을 개선할 수 있다(Adversarial Testing) 등이 그것이다. 이들 접근법은 단순한 기술적 기법을 넘어, 하나의 철학을 나타낸다. 즉, 지능의 목표는 단순히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검증 가능한 추론'(verifiable reasoning)에 기반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기계의 오류가 설계를 통해 줄어들 수 있다면, 인간의 인지적 편향도 유사한 방식으로 관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 집단적 추론을 강화할 수 있는 제도적 설계를 통해 '시민적 기억(civic memory)'을 개선할 수 있다. AI 연구에서 얻은 영감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원칙을 생각할 수 있다. 우선, 공공기관은 의사 결정 과정을 투명하게 설명해야 한다. 판결, 정책 변화, 제도 개편 등은 결과뿐 아니라 과정도 가능한 한 공개해야 하며(시민 사고의 연쇄 유도),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디지털 아카이브와 공개 증언, 연대표, 멀티미디어 자료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아야 한다(기억 검색 시스템 구축). 또한 교육을 통해 인식론적 겸손을 장려해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얼마나 확신해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것이다(확신 조절 교육). 나아가 공공 담론에서 대중의 서사를 구조적으로 검토하고 비판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민주주의는 조직된 반론을 통해 성장하기 때문이다(집단 레드 팀 운영). 이러한 원칙들은 추상적 개념에 머무르지 않고, 시민적 인식 회복을 위한 실천적 설계도가 될 수 있다. 한국은 AI 기술을 선도할 역량이 충분하다. 그러나 진정한 선도국이 되기 위해서는 불확실성 속에서도 공동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사회적·제도적 기반이 절실하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비전을 제안한다. (1) 국가 기억 관측소 구축: AI를 활용해 허위 정보의 유통 경로와 집단 기억 왜곡을 추적하는 공공 플랫폼 마련 (2) 인지 건강 지표 도입: 경제적 사회적 지표와 함께 대중의 신뢰도, 믿음의 정확성, 사회적 양극화 정도 등을 정기적으로 측정하여 관리한다. (3) 대화형 시민 AI 시스템 운영: 국가의 사법·역사·행정 데이터에 기반한 대형 언어모델을 활용하여 시민 교육과 공공 담론을 강화한다. (4) 기억의 성찰을 위한 국가적 의례: 역사적 사건에 대해 비판적으로 참여 할 수 있도록 AI 도구를 활용한 인터랙티브 행사와 다중 관점의 디지털 플랫폼을 운영한다. 이러한 노력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디지털 시대에 “기억"은 곧 국가 기반 시설(epistemic infrastructure)이다. 김한성

[신연수 칼럼] 대한국민, 폭싹 속았수다

기우였다. 헌법재판소가 5대 3으로 갈려 탄핵 선고를 하지 못한다는 우려, 4대 4로 기각되리라는 예상, 모두 빗나갔다. 재판관 8명의 성향은 각기 달랐지만, 윤석열이 헌법과 법률을 중대하게 위반해 파면해야 한다는 결론은 전원일치였다. 돌아보면 헌재의 선고가 늦어지면서 재판관들이 진영으로 갈렸다는 비판이 높아지고 헌재 폐지론까지 나왔었다. 그러나 재판관들은 개인적 정치 성향보다 공적 책임과 법리를 우선했고, 사법체계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다. 다행스런 일이다. 작년 12월 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우리 사회의 아픈 부분들이 많이 드러났다. 그 중 가장 걱정스러운 문제가 사법체계에 대한 조롱과 불신이었다. 대한민국 검찰총장 출신인 대통령 윤석열의 헌법 무시와 아전인수식 법 해석은 심각했다. 법치주의를 제일 중시해야 할 보수정당 국민의힘은 대놓고 법원과 판사를 공격했다. 민주당의 이재명 대표는 재판을 지연시키고, '정치 검찰'이란 비판 뒤에 숨어 여러 가지 범죄 혐의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했다. 정치인들의 이런 행동은 국민들에게까지 사법체계에 대한 불신을 확산시켰다. 헌재의 이번 선고로 가장 첨예했던 불신이 해소됐다고 해서, 모든 걸 그냥 없었던 일로 덮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의 근간인 법치주의를 흔들었던 정치인들에게는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논란이 많은 헌재 재판관 임명 제도나, 문재인 정부 시절 졸속한 공수처 입법으로 대통령 수사와 기소에 혼란을 일으킨 사법체계도 세심하게 손봐야 할 것이다. 123일간 드러난 우리 사회의 아픔 두 번째는 극단적인 사회 분열이다. 헌재 근처와 용산, 광화문 일대는 날마다 찬반 집회로 몸살을 앓았고, 부모 자식 간에도 정치적 견해 차이로 등을 지는 일들이 벌어졌다. 당시엔 회복하기 어려워 보이던 극심한 갈등도 다행히 선고 이후엔 잦아들고 있다. 아직 일부 극단층이 현실을 부정하지만 대부분은 일상으로 돌아가는 분위기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조사한 “헌재의 결정을 수용하겠느냐"는 질문에 국민의 77% 라는 압도적 다수가 “수용하겠다"고 답했다. 그동안 불거진 분열과 갈등을 긍정적 참여의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일만 남았다. 세 번째로 아픈 부분은 정당 민주주의와 자유언론에 대한 깊은 회의다. 정당 민주주의와 자유언론은 법치주의와 함께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삼각대다. 그러나 여야 정치인들이 서로를 비난하며 발목을 잡는 지옥도를 우리는 3년 가까이 지켜봤다. 민주당과 국힘은 내가 잘해서 표를 얻기보다 상대방의 잘못에서 이득을 얻는 '적대적 공생'의 끝판왕을 보여줬다. 관용과 자제, 타협이 없는 양당 대립이 줄탄핵과 줄거부권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계엄과 대통령 탄핵이라는 어이없는 파국으로 끝났다. 그 과정에서 부정선거론 같은 가짜뉴스들이 언론자유의 틈새를 비집고 독버섯처럼 기생했다. 얻은 것도 있었다. 정치에는 무관심한 줄 알았던 젊은이들이 광장 전면으로 나왔다. 계엄령 시행에 소극적이었던 군인들, 그리고 촛불혁명을 '빛의 혁명'으로 이어받은 청년들은 생활 속에서 민주주의를 체득한 MZ세대의 저력을 확인시켰다. 청년들의 참여를 좋은 정치 문화로 이어갈 책임이 기성세대에게 있다. 유튜버나 언론이라는 이름으로 사회를 어지럽히고 단물만 빼먹는 가짜뉴스에는 책임을 묻도록 제도를 정비할 필요도 있다. 탄핵 전과 후는 달라야 한다. 정책이 아니라 정당과 인물에 대한 호감도로 뽑는 미인대회 식 선거제도와 정치체제를 보완해야 한다. 잘 알지도 못하고 뽑았다가 다시 파면시키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는가. 아픔을 도약의 기회로 전환할 가장 큰 책임은 정치권에 있다. 지난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다론 아제모을루 미국 MIT 교수는 저서 에서 독재 국가와 무정부 상태 사이에 '자유로 가는 좁은 회랑'이 있다고 했다. 안전하고 자유로운 삶을 위해서는 강력한 국가가 필요하지만, 강력한 국가를 통제하려면 강력한 시민사회 또한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1987년 민주화를 이루고도 계속 고단한 길을 가야 하는 이유, 그리고 한국의 민주주의가 강한 회복력을 가진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동안 동네 식당들은 텅텅 비고 직장인들은 불안감에 일손을 놓았을 만큼 힘든 시기를 보냈다. 고통과 갈등, 눈물과 환호를 거치며 우리는 다시 신발 끈을 조여 맬 힘을 얻었다. 최근 인기 드라마에 나오는 '폭싹 속았수다'(제주도 사투리로 '매우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뜻)는 우리 모두가 들어야 할 위로다. 신연수 기자 ysshin@ekn.kr

[이슈&인사이트]트럼프 관세 드라이브, 미국에 부메랑 될 것

전통적으로 미국은 '위대하고 특별한 나라'라는 신념에 입각하여 자유와 민주주의 신장을 위해 이타적인 정책을 전개해 왔다. 이것은 미국이 세계를 지도하는 국가로서 역할을 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우선주의에 입각하여 관세 드라이브를 거칠게 밀어붙이고 있다. 우방국에도 예외를 두지 않은 공세적인 정책을 전개해고 있는데, 먼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위반하면서까지 캐나다와 멕시코에 대해 관세를 부과했다. 더구나, 불법이민자 축소 등 특정 정책목표와 연계하는 경향까지 보이고 있는데, 콜롬비아에 대한 관세부과는 대표적인 예다. 철강·알루미늄 관세 부과에 이어 자동차에 25% 관세를 부과한 미국은 드디어 2일(미국시간)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전 세계를 상대로 상호관세 부과 방침을 발표했다. 발효일인 9일부터 실질적인 협상을 시작했다. 국가별 상호 관세율은 한국 25%, 중국 34%, 유럽연합(EU) 20%, 일본 24%, 인도 26%, 베트남 46%, 대만 32%이다. 또 태국에는 36%, 스위스 31%, 인도네시아 32%, 말레이시아 24%, 캄보디아 49%, 영국 10%, 남아프리카공화국 30% 등이 적용된다. 중국, EU 등이 맞대응을 예고하면서 자유무역을 기반으로 했던 글로벌 통상 질서가 급변할 전망이다. 관세 부과는 미국에 이득이 되는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 부담이 소비자에게 전가되는데, 필연적으로 물가 상승을 부채질하고 인플레이션을 야기한다. 선거 운동 중 '임기 첫날'에 물가를 잡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약속이 공염불이 될 것이다. 그리고 관세를 매기는 목적은 제조업·첨단산업 등을 육성하고 관세를 통해 증가된 세수는 법인세 인하 등 경제 활력 제고를 위해 사용하여 궁극적으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MAGA, Make America Great Again)는 것이라고 하나, 벌써 경제 침체 조짐이 보이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그리고 상대 국가들이 맞대응하게 되면서 수출 타격을 불러오게 된다. 결국, 트럼프의 관세 드라이브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미국 경제는 나쁘지 않다. 외국인 투자가 크게 늘어나고 고용지수도 좋으며, 주가는 매우 높다. 무리하게 관세라는 구닥다리 무기를 휘두를 필요가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하는가? 그것은 경제적인 이득을 추구하는 싸구려 부동산 업자 출신 트럼프의 보여주기식 과시욕 때문이다. 우방국을 비롯한 전 세계 국가를 상대로 관세 전쟁을 벌이는 것은 미국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전 세계에 반미 정서가 드리워지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미국으로 가는 여행객이 감소하고 있어, 여행수지가 악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미국의 지도적 위치가 흔들릴 것이다. 그로 이로 인한 빈자리를 중국이 노릴 것이다. 지난 3일 세종연구소 개최 포럼에 참석한 찰슨 플린 전 미대평양육군사령관이 트럼프 정책으로 “America is not alone."(미국이 외토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세계 지도 국가에게 이러한 우려가 제기된 것만 해도 심각한 것이다. 우리가 더 걱정이다. '트럼프발 관세 전쟁'이 글로벌 수준으로 확대되고 국제 교역은 '빙하기'에 진입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수출 중심의 경제체제인 한국으로서는 부정적인 영향이 불가피할 것이다. 가장 직접적 영향으로는 대미 수출 타격이 우려된다. 주요 대미 수출 품목은 자동차, 반도체, 석유제품, 배터리 등인데, 특히 자동차 수출이 직격탄을 맞게 되었다. 그리고 멕시코·캐나다·베트남 등 한국기업이 다수 진출한 지역에 고관세가 부과되어 한국 기업 수출에 영향을 받음은 물론, 중간재 수요 감소에 따른 한국산 중간재 수출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 더구나 국가적 리더십 공백인 상황에서 미국의 상호관세 부과로 인해 한미자유무역협정(FTA)까지 사실상 백지화되면서 미국과의 새로운 통상 규칙을 수립해야 하는 동시에, 글로벌 관세전쟁 격화 대응에 비상이 걸리게 됐다. 상호관세율이 일본은 24%인 데 비해 한국은 25%로서 1% 더 높다. 관세전쟁 상황에서 리더십 부재는 뼈아프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정부, 업계, 노동계 모두가 비상한 노력을 경주해야 하며, 야당 등 정계도 적극 협조해야 할 것이다. 이강국

[EE칼럼] 기본에 투자 없는 국가는 미래가 없다

우리가 좋아하건 싫어하건 현대사회는 모든 분야에서 경쟁이 치열하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제한된 재화를 많은 사람이 동시에 원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국가 예산도 마찬가지이다. 국가에서는 긴급성과 파급효과 등 다양한 요소를 반영해서 일의 우선순위와 예산 투입의 규모를 정한다. 선정의 객관성을 높이기 위해 정량화 지표를 사용하여 결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중요하고 긴급하다고 평가되는 분야인 상위 1~3등에만 선택과 집중이라는 미명아래 넘치는 지원을 받는 경우가 많다. 문제점의 시작은 여기서부터 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매년 반복되면 4등 이하는 수십년이 지나도 선정되지 못해 예산 배정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숫자로 평가되어 우리가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정량화 지표를 믿는다고 치다. 그럼 4등을 하면 4년 뒤에 예산을 받을 수 있는 것인가? 매년 4등에 해당하는 예산을 받는 것이 공정한 것인가? 과연 어떻게 소중한 국가 예산을 할당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 인지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처럼 선택과 집중으로 1~3등에게만 예산과 관심을 주면 항상 일정한 비율의 필요성은 인정되지만 당장 급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분야는 10년이 지나도 예산과 관심은 받을 수 없다. 여기엔 공평하다고 생각하는 획일주의도 한몫한다. 10가지 분야와 주제가 정해지면 1/N 나누어 배분하는 식이다. 사안의 중요도에 따라 배분하면 된다. 이렇다 보니 장기적으론 꼭 필요한 일이지만 매번 같은 중요도로 낮은 순위로 평가되는 분야는 수십 년이 지나도 관심과 지원을 받을 기회가 없을 수 있다. 이런 분야가 바로 국가 에너지자원 분야이다. 당장은 지원이나 관심이 없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서 그 결과가 쌓이고 싸이면 훗날에 큰 문제가 되는 분야이다. 이런 평가 때문에 일의 본질이 왜곡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한다. 정치적인 곳에는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과학기술 연구 분야에까지 확장되어 있다. 과거보다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정권에 따라 각광받는 연구 분야가 다르고 이에 따라 연구비 쏠림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 같다. 어느 조사에 따르면 연구과제 제목도 정권의 입맛에 맟춰 선호하는 주제어가 많다는 분석도 있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녹색이라는 단어가, 박근혜 정부에서는 창조라는 말이 들어가고, 문재인 정부에서는 신재생이라는 말이, 윤석열 정부에서는 원자력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10년 이상의 긴 기간이 필요한 연구분야에서 조차도 정권교체에 따라 연구 분야별로 부침이 있으니 씁쑬한 일이다. 그렇다 보니 모든 사람이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만 하지 끝맺을 줄 모르고, 시작한 것을 잘 가꾸어 지속적인 성과를 내는 것에 인색하게 되는 현상이 고착화 되고 있다. 연구 분야와 유사하게 오랜 시간 동안 꾸준한 지원이 필요한 분야가 인력양성과 에너지자원 분야이다. 국가의 모든 산업의 근간이 되는 에너지자원 문제는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민간기업은 손실에 오랜 기간 노출되면 기업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기 때문에 단기적인 이익에 초점을 맞춰 투자할 수밖에 없다. 잘 알려진 대로 석유가스 및 각종 광물을 포함한 자원가격은 15년 내외의 긴 가격변동 주기를 갖고 있다. 이런 특성 때문에 대부분의 자원빈국은 민간기업보다는 공기업을 내세워 에너지자원의 확보에 지속적인 투자를 하고 있다. 우리와 그들의 차이점은 단기적 성과에 집착한 보여주기식 성과와 인내심 부족인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의 해외자원개발 실패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공기업의 실력도 외부 요인도 아닌 정부의 보여주기식 성과주의에 있다. 앞으로의 성패도 이런 유혹을 어떻게 없애느냐에 달려있다. 기본에 투자 없이는 국가의 밝은 미래는 없다. 신현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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