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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분양가상한제 폐지, 내 집 마련 더 어려워진다

“공사비는 치솟는데 분양가는 묶여 있다." 최근 서울 용산구 재개발·재건축 조합 26곳이 분양가상한제 폐지를 촉구하고 나섰다. 원자재·인건비 상승분을 반영하지 못해 사업성이 떨어지고, 주택 품질까지 낮아지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조합 측은 이 제도를 공급자의 발목을 잡는 대표적 규제로 보고 있지만, 분양가상한제는 단순한 공급 제한 장치가 아니다. 실수요자의 내 집 마련을 지켜주는 안전장치이자 주택 시장 과열을 억제하는 완충장치다. 이 제도가 없으면 분양가는 시장 흐름에 따라 끝없이 치솟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무주택 실수요자에게 돌아간다. 실제로 분양가가 높아지면 청약 경쟁은 치열해지고 가격을 감당하지 못한 실수요자들이 청약을 포기하거나 전세시장으로 내몰릴 수 있다. 이는 전세난 심화로 이어진다. 공급 확대를 위한 규제 완화가 오히려 주거 불안을 키우는 역설이 발생하는 셈이다. 공사비 급등과 함께 분양가 규제가 일부 해제된 이후 실제 시장에서 벌어진 일도 이를 방증한다. 정부는 2023년 1·3 부동산 대책으로 서울 전역(강남 3구·용산 제외)을 제했다. 그러나 그 결과 서울 민간 아파트의 3.3㎡당 평균 분양가는 6년여 만에 두 배 가까이 치솟았다. 주택도시보증공사에 따르면 2023년 7월 서울 평균 분양가는 3.3㎡당 4401만7000원으로, 2018년 2월(2192만1000원)보다 두 배 이상 상승했다. 이 같은 분양가 급등은 청약통장 무용론으로 이어졌고, 실제 청약통장 가입자 수는 감소세로 돌아섰다. 물론 공급자 입장에서도 현실과 맞지 않는 점은 있다. 공사비는 급등했고, 층간소음 규제와 제로에너지 건축물 의무화 등 새로운 시공 기준도 잇따르고 있다. 대한건축학회에 따르면 제로에너지 기준 충족 시 공사비는 최대 35%까지 증가한다. 그러나 이런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곧바로 분양가 상한제 폐지로 연결돼선 안 된다. 이미 해제된 사례에서 드러났듯이 규제를 풀면 공급은 더디게 늘고, 분양가만 먼저 오르며 수요자 부담을 키운다. 정책은 공급자와 수요자 양쪽의 입장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분양가상한제 폐지 논의는 품질 개선과 공급 확대라는 기대도 있지만 실수요자의 비용 부담과 주거 불안이라는 대가도 따른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단순히 '폐지냐 유지냐'의 이분법이 아니라 가격 안정과 공급 활성화가 함께 갈 수 있는 정교한 정책 설계다. 무주택자들의 내 집 마련 꿈이 무너지지 않는 선에서 공급자도 지속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는 현실적인 해법이 절실하다. 서예온 기자 pr9028@ekn.kr

[이슈&인사이트] 트럼프, 중국과의 관세전쟁에서 얻은 것이 있는가?

미중 양국이 치킨게임 속에 서로 부과한 상호관세를 일단 90일간 대폭 낮추기로 했다. 미국은 지난달 2일 이후 중국 상품에 부과한 추가 관세 125% 중 91%는 취소하고 24%는 90일간 유예하기로 했다. 중국도 미국에 대한 보복관세율을 미국과 같은 폭으로 115%포인트 내려 기존 125%에서 10%로 조정했다. 보복 악순환 속에 관세율이 100% 넘게 치솟았던 점을 고려하면 파격적인 수준이다. 휴전 기간에 경제, 통상 현안에 대한 추가 협상을 하기로 하였다. 양국이 합의에 이르게 된 데는 강대강 대치가 지속될 경우 경제가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위기감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관세 폭탄으로 중국과의 무역이 사실상 스톱된 상황에서 물가가 크게 오르고 올해 1분기 GDP 성장률이 마이너스 수치를 기록하는 등 경고등이 켜졌다. 월마트, 타깃, 홈디포 등 미국의 주요 소매업체 대표들이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조만간 '매대가 텅 비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특히, 희토류 수출 규제와 보잉사에 대한 항공기 인도 중단 조치라는 미국의 아킬레스건을 노린 조치가 심각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중국도 대미 수출액이 급감하고 이에 따라 공장 가동에 어려움이 야기되는 등 무역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본격화하고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우호적이지만 건설적인 형태로, 전면적인 리셋(reset·재설정) 협상이 있었다며 큰 진전이 이뤄졌다고 평가했지만, 관세를 대폭 부과한 지 한 달여 만에 크게 인하키로 하면서도 중국으로부터 구체적인 양보를 얻어내지는 못했다. 트럼프가 손에 쥔 것이 보이지 않는다. '거래의 달인'으로서 협상 기술을 자랑해온 트럼프가 사실상 기싸움에서 시진핑에게 밀린 것 아니냐는 평가가 나온다. 중국에 대한 트럼프식 관세전쟁은 처음부터 실패가 예고되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 소비자들이 값싼 중국 제품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높은 관세를 부과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수입 제품 부족과 물가 상승을 초래하여 유권자들의 불만이 야기되기 때문에 정치적 압력을 견딜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중국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와 싸우기 위해서는 조직적으로 임해야 하는 데, 트럼프 개인의 임기응변에 의존하고 있다. 또한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는데, 중국과 무역전쟁을 선언하면서도 우방국 등 세계 각국에 대해서도 관세폭탄을 퍼부었다. 세계를 사실상 적으로 돌려세우면서 어떻게 중국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대단한 착각이자 오만이다. 섣부르고 무모한 '트럼프발 관세전쟁'이 미국의 발목을 잡아버렸다. 정치적 압박 속에서 서둘러 타협하는 방향으로 돌아섬으로써 강력한 사회주의 통치력에 기반한 지구전 전략으로 맞서는 중국에 대해 미국이 또다시 압박 전략을 구사할 수 있을 지 의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에서의 실패를 다른 국가들과의 협상에서 만회하려고 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한국, 일본 등이 타겟이 될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경제규모가 큰 EU는 대응수단이 있고 인도는 중국과의 관계에서 전략적 가치가 크기 때문에 압박이 용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특히 중간선가가 가까워질수록 트럼프 대통령은 초조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무디스가 미국의 국가신용등급을 최고 등급인 'Aaa'에서 'Aa1'으로 강등하여 뒤숭숭하다. 한국으로서는 조속한 관세 협상에 얽매이기 보다는 다른 나라들의 협상을 보고 진행하여야 한다. 상호관세 유예기간이 7.8 종료되어 그전에 관세부과 폐지를 목적으로 패키지(July Package)를 마련하기로 합의한 바 있지만, 이번 미중 합의로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안덕근 산업부 장관이 지난 16일 제주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통상장관회의 참석차 방한한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와 양자 회담을 갖고 기술협의를 통해 양국의 관세 협상을 본격화하기로 의견을 모았지만, 실제로 본격 협상은 차기 정부에서 하도록 협상기간 유예를 요청해야 한다. 그리고 특히, 패키지 합의에 매몰되어 한미간 기합의한 방위비분담특별협정(SMA)을 깨면서까지 협상을 서둘러서는 안 될 것이다. 이강국

[이슈&인사이트] 국힘의 신랑 바꿔치기와 음주운전

이강윤 정치평론가 요즘 국민의힘을 보면 '선거 치르는 정당 맞나?'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며칠 전 김문수 후보가 계엄에 대해 사과하자 윤석열 전 대통령측에서 “무슨 근거로 왜 사과하느냐"고 항의했다고 한다. 김 후보가 가타부타하지 않는 걸로 봐서 항의 비슷한 게 있긴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입장 하나 명료히 밝히지 못하면서 어떤 자세로 대선을 치르고 정당으로 기능하겠다는 것인지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최근 국힘을 요약하자면 이 두 단어가 떠오른다. 멀리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대선후보결정과 윤 전 대통령 탈당 문제가 극명하다. 비유컨대 이렇다. 결혼식에 신랑이 두 명이었다. 식 직전 신랑대기실에서 신랑을 급히 바꿔쳤다. 하객들이 “날치기 바꿔치기는 안된다"며 항의하자 부랴부랴 없던 일로 돌리고 처음 정했던 신랑을 입장시켰다. 참극도 이런 참극이 없다. 그 뿐인가. 선거운동이 시작된 지난 12일 이후 1주일이 지나도록 윤석열탈당 문제로 옥신각신 낮밤을 지샜다. 결국 탈당했지만 표심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어 보인다. 이게 과연 선거 치르는 정당의 모습인가. 그동안 국힘은 몇 차례 계엄에 대해 사과했다. '쌍권총'이라는 비대위원장과 원내대표는 물론 김 후보도 사과했다. 그런데도 탈당 우왕좌왕으로 이제는 사과했는지조차 가물가물하다. 그러니 그 사과의 진정성을 따지는 건 사치다. 필자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국힘을 보면 대선이 한 6개월 쯤 남은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고양이 손도 빌린다'는 선거 코앞에 이렇게 '세월아 네월아…'일 수 있는가. 당 따로 후보 따로 당직자 따로. 완전히 따로국밥이다. 국힘 걱정해서 하는 말이 결코 아니다. 명색 원내 2당이고, 직전 여당이기에 하는 얘기다. 이미 지도력을 상실한 지도부야 그렇다 치고, 김 후보도 이해 불가다. 김 후보는 계엄에 대해 사과하면서도 “윤 전 대통령의 탈당은 굳이 요구하지 않겠다"고 했다. 비유하자면 이렇다. 누가 음주운전을 했다. 그런데 음주 부분은 사과하면서 막상 범죄의 핵심인 운전에 대해서는 애매하다. 운전자 처벌이 당연하건만 “본인 뜻에 맡기겠"단다. 이게 올바른 대처인가. 이뿐만이 아니다. 김 후보는 1980년 광주항쟁 당시 살인진압으로 유죄판결 받고 형를 치른 정호용 전 특전사령관을 선거캠프 상임고문으로 임명했다. 항의가 거세자 취소했지만 그의 역사인식과 용인(用人)을 보니 말 그대로 어이상실이다. 오욕의 전 정치군인을 무슨 이유로 위촉했을까. 보수표 때문일까. 사법적 단죄는 물론이고 정치적 위상도 상실한지 오래인 5.18신군부세력이나 계엄내란세력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이럴까. 손 잡자고 와도 내쳐야 할 판에…. 극우강경집단과의 철저한 단절과 민주공화정의 재수립이 이번 대선의 시대정신임은 자명하다. 그런데도 김 후보가 그들과 절연하지 못하는 것은 후보 본인의 시대 인식에 심각한 결함이 있는 거 아닌가. 정책이나 공약이 문제가 아니다. '김문수정부'의 정체성과 지향점은 뭔가. 국힘과 김 후보에게 필요한 것은 이 텐트냐 저 텐트냐가 아니고 우선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무엇을 지켜내는 '보수'이고, 사회를 어떻게 만들겠다는 것인지부터 명확히 밝혀야 한다. 이런 게 지금 보수세력의 수준이자 민낯이라면 궤멸 수준의 참패가 당연하다. 최소한의 상식과 원칙조차 체화시키지 못하면서 무슨 염치로 표를 달라고 하는가. 진짜 문제는 이런 것일 게다. 실은 국힘 사람들도 이건 아니라는 것쯤은 다 알지만 선거 이후 '정치공학'을 생각해서 이러고들 있는 것은 아닌지…. 국힘 표 선거의제는 실종된 지 오래다. 아니, 아예 없었다. 한심하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다. 국힘은 계엄을 반성하기는 하는가. 이강윤

[EE칼럼] 가격규제와 고정 관념

정부는 공공사업에 대한 건설 입찰, 자연독점적 공익산업, 독과점 품목 등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가격을 규제한다. 가격규제에는 몇 가지 고정관념이 숨어 있다. 첫 번째는 같은 상품과 서비스는 그 가격이 동일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상품 및 서비스가 지역과 시간 그리고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불편해한다. 동일 제품이라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 가격이 다를 수 있다. 그런데 높은 가격을 사업자가 더 큰 이윤이나 폭리를 보려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정부는 사업자의 폭리를 제대로 규제하지 못한다는 소비자의 비난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전기요금은 전국이 동일하다. 그러나 전국 동일 전기요금이 얼마나 많은 문제를 가져왔는가? 발전설비의 분산화가 왜 실패하였고, 전력망을 보급하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우며, 수도권에 전력수요가 왜 몰려 있는지를 알려면 전국 동일 전기요금이 가져오는 폐해를 이해해야 한다. 전국 전기요금이 동일해야 한다는 것은 근거가 없는 논리이다. 우리가 지금은 너무도 당연히 여기는 전국 주유소의 상이한 기름값도 한때는 동일요금 규제에 묶여 있었다. 두 번째 고정관념은 공급자의 다른 비용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공급량이 많아질수록 비용은 점차 상승한다. 그것이 공급의 법칙이다. 보통 시장에 가장 먼저 진입하는 사업자(A)는 이를 가장 값싸게 공급할 수 있는 사업자이다. 그러나 두 번째(B), 세 번째(C)로 진입하는 사업자는 첫 번째 사업자보다 더 불리한 비용조건을 갖게 마련이다. 그래서 공급비용이 상승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A는 공급비용이 낮았는데, 왜 B와 C는 공급비용이 높은가라고 소비자와 정부는 반문한다. 그리고 형평성을 이유로 높은 공급비용에 맞춰 가격 올려주기를 꺼려한다. 최근 부산의 가덕도 신공항 건설이 높은 건설비로 계속 유찰되고 수의계약마저도 쉽지 않은 점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2011년 9·15 순환정전을 계기 정부는 급하게 전력설비를 확충하기 위해 민간 석탄발전사업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기존에 건설된 접안시설과 부두를 활용해 추가로 석탄발전기 기수를 늘릴 수 있는 한전 발전자회사와 달리 새로운 곳에서 부지를 확보하고 부두 및 접안시설을 건설하는 것은 높은 추가비용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른 석탄발전소와 비용격차가 크다는 이유로 높은 건설비용을 CP로 보전받는 것을 정부와 전력거래소에 설득하는 것은 쉽지 않다. 세 번째 고정관념은 사업자가 버는 수익을 용인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사업자가 돈을 벌게 되면 소비자 돈을 사업자가 가져갔다고 정부와 소비자는 생각하게 마련이다. 이런 이유로 기업과 소비자가 이윤이나 편익을 추구하는 것을 은근히 죄악시하는 풍토가 적지 않다. 체리피킹이라는 말로 사업자의 수익추구를 폄하하기도 하며 높은 산업용 전기요금으로 인해 직접구매나 자가발전을 추진하는 것을 '기업 이기주의'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돈을 벌려고 생긴 조직에 대하여 돈 벌었다고 흉보는 것이 옳은 시각인지 잘 모르겠다. 이런 현상은 이미 가격이 자유화된 경우에도 나타난다. 유가가 자율화된 지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요즘도 기름값이 높을 때면 정유사에 횡재세를 부과하여야 한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손해나면 보전해 주지도 않을 것이면서 이윤이 나면 뺏아가겠다는 것이다. 전력시장에서 SMP에 상한을 둔 적도 있고 한국지역난방공사의 열요금을 기준으로 규제하는 열시장에서도 사업자가 버는 이윤을 탐탁치 않게 여겨 산업부는 사실상의 원가규제를 도입하려 하기도 한다. 사업자는 돈을 벌려고 가스터빈도 국산화하고, 원료도 싸게 들여오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경쟁효과에 의해 다른 기업을 자극하여 결국은 소비자 편익으로 이어진다. 돈 버는 것을 죄악시하면 기업은 가격을 낮추고 품질을 개선할 유인을 잃게 된다. 가격규제에 잠재되어 있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할 이유다. 조성봉

[기자의 눈] 또 등장한 ‘코스피 5000’…주가지수가 공약의 도구인가?

“코스피 5000 시대를 열겠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내건 경제 공약 중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이다. 주주환원 확대, 자사주 소각 의무화, 저PBR 기업 정리까지 내세우며 '저평가 탈출'의 청사진을 펼쳐 보였다. 민주당은 아예 '코스피5000시대위원회'를 출범시켰다. 하지만 시장 반응은 생각보다 차갑다. 익숙해서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 후보는 지난 대선 때도 같은 이야기를 했고, 그보다 앞서 2007년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도 비슷한 공약을 꺼낸 바 있다. 매 대선마다 단골처럼 등장하는 지수 공약. 시간이 흘렀지만, 코스피는 아직도 2500 언저리를 맴돈다. 이 후보는 “한국 시장은 저평가 상태이며, 투명성만 확보돼도 5000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방향성은 공감된다. 주가조작 의혹, 물적분할 논란, 대주주 중심 지배구조 등 시장의 신뢰를 갉아먹는 고질병은 분명 존재한다. 상법 개정 등으로 주주 권익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도 긍정적이다. 문제는 '가능성'이다. 주식시장은 정책만으로 오르지 않는다. 구조개혁이 중요한 건 맞지만, 글로벌 금리, 환율, 지정학 리스크, 외국인 수급 같은 외생 변수 없이는 시장이 움직이지 않는다. 현재 시장은 오히려 '정책 기대감'보다 '정치 테마주'에 더 민감하다. 특정 정치인과 연결된 종목이 수백 퍼센트씩 오르고, 실적이 바닥인 기업이 주가 상승률 1위를 찍는 상황도 발생했다. 실적도, 수급도, 펀더멘털도 무시한 '천하제일 단타 대회'가 펼쳐지고 있다. 이런 장에서 '5000'을 논하는 건 무색하다. 더 큰 문제는 포퓰리즘의 그림자다. 기업 성장은 제쳐두고, 주주 친화 정책만 몰아붙일 경우 자칫 기업 투자 위축이나 소송 남발, 단기 투기자본 유입 등 부작용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실제로 상법 개정과 관련해 기업들의 우려가 심심찮게 흘러나오고 있다. 물론 주식시장 개혁은 반드시 필요한 과제다. 하지만 그 목표가 '선거용 지수'에 맞춰진다면 정작 시장은 더 멀어진다. '코스피 5000'은 수치가 아니다. 시장이 자생력으로 회복했을 때 따라오는 결과일 뿐이다. 이번에도 또 지수는 공약의 도구가 됐다. 다만 그 공약이 유권자 향한 구호가 아니라, 실제 시장에 신뢰를 회복시키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지난 20년간 수없이 반복된 '지수 공약'의 역사 속에서 이번이 마지막이기를 기대해본다. 윤수현 기자 ysh@ekn.kr

[EE칼럼] 공약의 자충

대선 국면에서 여러 가지 공약이 발표되면서 공약간에 충돌이 발생하기도 한다. 일종의 자충(自充)이 발생하는 것이다. 자충이라는 말은 바둑에서 자기 돌로 자기 수를 줄이는 것을 의미한다. 넓은 의미로는 자신에게 이익이 될 것으로 생각했던 행동이 오히려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기도 하다. 예컨대 'AI등 신산업 집중육성'이라는 공약은 '재생에너지 확대'와 양립되기 어렵다. AI 즉 인공지능 분야는 전기를 먹는 하마이다. 오픈AI(사)의 사장인 샘 올트만은 2025년 미국내에서 5GW(기가와트)를 사용하는 AI 데이터센터가 5개에서 7개 정도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2030년이 되면 미국은 AI 데이터센터의 전력수요가 80GW에 달한다고 하였다. 1GW는 원전1기라고 보면 된다. 즉 2025년 AI산업으로 인해 적어도 원전 25기분의 전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이만한 전력수요가 갑자기 발생했다는 사실과 트럼프 대통령이 '에너지 위기'를 선언한 것은 같은 맥락이다. 지난해 7월 미국에너지부는 AI 데이터센터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한 권고사항을 발표하였다. 요지는 딱 한 가지이다. '탄력적인 전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력수요의 증감에 민감하게 따라갈 수 있는 전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원자력발전의 전력생산단가는 킬로와트시(kW시)당 52원이다. 그런데 재생에너지는 270원이 넘는다. 5배가 넘는다. 엄청난 전기를 필요로 하는 산업의 경우 전기요금은 산업경쟁력에 직결된다. 5배 비싼 전력을 쓰면서 경쟁력있는 AI 산업을 육성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또한 재생에너지는 급전불응(給電 不應) 설비이다. 즉 급전지시가 내려와도 환경여건에 따라서 전력을 생산할 수 없기 떄문에 응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당연히 탄력적인 전원이 아니다. 물론 공약이라는 것이 대선 후보자 한 명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를 둘러싼 여러 사람과 집단의 생각과 요구를 담은 것이기 때문에 완벽한 일관성을 요구하기 어렵다. 경우에 따라서는 서로 맞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좌측통행을 할 것인지 혹은 우측통행을 할 것인지는 일관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그것을 병행하게 되면 교통사고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당선 후에 어떤 공약은 살아남을 것이고 어떤 공약은 득표하는 즉시 폐기될 것인지 궁금할 것이다. 흔히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지는 경향성에서 어떤 쪽의 경향을 가지고 있느냐가 이를 결정할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친노동 반기업 정서를 바탕에 둔 후보가 산업을 발전시키고 국부를 창출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했다면 그것은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민간에 맡겨두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일일이 개입해서 보조금을 주고 하는 방식으로 정부를 끌어가는 세력이라면 말로만 육성을 하는 것이고 규제를 만들고 보조금을 뿌려주는 재미만 누리려는 것으로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국가첨단전략산업에 대한 대규모 집중투자를 하겠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아무리 투자를 해도 값비싼 전기요금을 내고 유지될 수 있는 국가첨단전략산업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RE100 산단도 마찬가지다. 벤처투자도 마찬가지다. 그건 돈이 된다면 민간이 알아서 할 일이다. 정부가 나서서 벤처투자를 했던 시절은 김대중 정부였고 그때 투자해서 제대로 벤처로 자립한 기업은 거의 없다. 당시 벤처투자는 벤처기업을 육성하기 위한 것이었다기 보다는 외환위기 이후 국가적 불경기 상황에 고용을 늘리기 위한 임시적 방안으로 정부가 돈을 풀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스마트 데이터 농업, 푸드테크, 그린바이오산업도 굳이 정부가 나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부가 일하는 방식은 세금을 그 분야에 보조금으로 뿌려주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보조금이 있는 동안만 유지되는 산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보조금 산업은 당연히 정치화로 나설 수밖에 없다. 재생에너지를 확대하고 재생에너지를 중심으로 에너지 정책을 가져갈 수 있다. 그렇게 하려면 전력생산단가가 5배 비싸지고 관성전력의 부족에도 안정적인 전력망을 유지하기 위하여 전력망에 또한 그만큼의 투자를 해야 한다. 무엇보다 그 비용을 국민과 산업이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에너지고속도로를 만든다고 하지만 그 비용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그간 필요한 부분만 전력망을 건설했던 이유가 뭐겠는가? 비용이 너무 막대하게 들어가니까 그런 것이 아닌가? 햇빛/바람 연금과 농가태양광 설치로 주민소득을 증대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것을 누군가는 내야 할 것이다. 정범진

[기자의 눈] 작지만 강하다, 삼성 생활가전의 반격

삼성전자 안에서도 생활가전(DA) 사업부는 상대적으로 '작은 부문'이다. 반도체나 스마트폰에 비해 매출 규모는 작고, 언론의 주목도도 덜하다. 같은 완제품 사업이라 해도 TV를 맡은 영상디스플레이(VD) 사업부가 '글로벌 1위' 타이틀을 19년째 지켜온 데 비하면 생활가전은 존재감이 옅은 편이다. 내부에서도 “우리는 상대적으로 저평가받고 있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나온다. 한때는 '삼성 가전'이라는 말만으로도 경쟁력을 인정받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중국 브랜드들이 '가성비'를 무기로 치고 올라오고, 프리미엄 시장에는 강력한 글로벌 경쟁자들이 속속 진입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의 판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생활가전 사업은 흔히 VD 사업과 함께 'VD·DA 부문'으로 묶이지만, 실적 온도차는 뚜렷하다. TV가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해주는 동안 가전은 늘 '반전'을 꿈꿔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럼에도 생활가전 사업부는 최근 눈에 띄게 분주하다. '스크린 에브리웨어', 'AI 홈' 같은 혁신 전략을 통해 새로운 가전 생태계를 구상하고 있다. 오디오 전문 브랜드 인수에 이어, 최근에는 유럽 최대 공조기기 업체인 독일 플랙트그룹까지 품에 안으며 글로벌 공조 시장 진출을 선언했다. 겉으로 보기엔 작은 변화일 수 있지만, 가전 사업 체질 개선을 위한 중요한 밑그림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지금 팔릴 제품만 고민해선 미래가 없다. 5년, 10년 후를 내다보며 기술력과 포트폴리오를 다듬어야 진짜 반전을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생활가전 사업부 직원들도 누구보다 뜨거운 열정을 갖고 신기술과 제품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는 게 내부 전언이다. 삼성전자는 최근 디바이스경험(DX) 부문장 직무대행으로 노태문 사장을 선임했다. 노 사장은 삼성 스마트폰 사업을 일군 주역으로, '갤럭시 신화'를 이끈 인물이다. 한종희 부회장의 갑작스러운 리더십 공백을 메우기 위한 포석이지만, 동시에 완제품 전반의 경쟁력을 끌어올리려는 전략적 인사로도 해석된다. 특히 노 사장이 최근 생활가전 부문에 큰 관심을 보이며 현장 스터디를 반복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조직 내부에서는 “갤럭시의 혁신 DNA가 가전에도 이식되길 기대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작고 조용해 보일지 몰라도, 삼성 생활가전은 분명히 움직이고 있다. 상반기 신제품 출시를 시작으로, 연내에는 '볼리' 등 신개념 가전도 선보일 예정이다. 덩치가 작다고 열정까지 작은 건 아니다. 삼성 생활가전의 조용한 반격이 시작됐다. 김윤호 기자 kyh81@ekn.kr

[데스크칼럼]‘이재명표 빈집털기’의 나비 효과

역대 이런 대선은 없었다. 5년의 임기를 2년이나 단축한 '친위 쿠데타'로 예정에 없었던 대선이 3년 만에 치뤄지고 있다. '내란 진압'을 명분으로 똘똘 뭉친 범진보가 강하게 응집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우향우' 행보에도 아무런 반발이 없다. '독재자'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 참배에도 묵묵부답이다. “사실은 우리가 중도 보수"라면서 온갖 정책적 우클릭을 해도 그냥 넘어간다. 예전같았으면 난리가 날 일들이다. 집토끼를 지킬 필요가 없어진 이 후보는 '빈집털기'에 한창이다. 이 전술은 젊은 세대들에게도 스타크래프트 같은 실시간 전략시뮬레이션(RTS) 게임을 통해 익숙하다.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일꾼 유닛을 동원해 상대방 본진을 공격한다. 상대의 핵심 기반이 비어 있을 때, 그 틈을 기습적으로 파고들어 치명타를 입힌다. 이 후보도 선거 초반부터 '중도 보수' 선언, 우클릭 정책·공약, 보수 인재 영입, 영남 집중 유세로 상대방 본진을 공략하고 있다. 반면 범보수 진영은 와해 국면이다. 처음부터 조갑제, 정규재, 김진 같은 보수 논객들이 이탈해 이재명 후보를 지지하고 있다.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민주당을 '좌파'로 칭하며 싫어하고 자유시장주의 수호를 외쳐 온 사람들이다. 최근엔 김상욱, 김용남, 최삼화, 권오을, 이인기 등 보수 정치인들이 적진에 합류했다. 심지어 홍준표 전 대구시장마저 사실상 적과의 '연합전선'을 펴고 있다. 지역적 기반도 흔들린다. 부산, 경남은 이미 여론조사에서 '디비졌다'. 오차범위 내에서 이 후보가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를 앞선 결과가 속출하고 있다. 심지어 대구, 경북도 위험하다. 지난 대선에서 20%대에 그쳤던 이 후보 지지율이 지금 30%대를 넘었다. 한국 유권자 특유의 '싹쓸이 방지' 심리가 발동될 기미도 안 보인다. 2024년 총선 때만 해도 유시민 작가의 '200석 발언'이 계기가 돼 영남 위주로 막판 제동이 걸렸다. 지역 평균 40% 득표율에도 1석에 그친 부산이 대표적이다. 반면 이번 대선에선 유 작가가 “55% 돌파"를 언급했어도 반향은 없다. 국민의힘은 속수무책이다. 사상 초유 '후보 강제 교체' 소동 때문에 초반부터 지리멸렬하다. 김 후보와 경쟁했던 한덕수 전 총리과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이 선거운동에 나서지 않고 홍 전 시장이 미국으로 떠나는 등 내분이 여전하다. 12.3 비상계엄과 내란, 국정 실패·최악의 경제난에 대한 책임론도 해소하지 못했다. 지난 17일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탈당으로 겨우 반전의 계기가 마련될 지 주목되는 수준이다. 판세는 이 후보가 김 후보를 압도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민주당이 내년 지방선거까지 승리해 '중도 좌파+보수, 호남·수도권+영남'의 거대 여당이 될 가능성이 높다. 국민의힘은 지역 기반도 없는 소수당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 후보의 '빈집털기'가 단순 선거 전략이 아니라 이념·정치 구도를 확 바꿀 '태풍'이라는 얘기다. 기우지만 민주당은 승리하더라도 오만과 독선을 더욱 경계해야 한다. 국민의힘의 생로는 환골탈태 뿐이다. '기득권 연합'에서 벗어나 나라와 국민을 위하는 공당의 면모를 회복해야 한다. 김봉수 기자 bskim2019@ekn.kr

[박원주 칼럼]한국사회의 역동성을 지키기 위한 제언

2025년 4월 28일 현지 시간 낮 12시 33분경, 스페인에서 대규모 정전이 발생했다. 정전사태는 포르투갈 전역과 프랑스 남부 지역까지 확산되었고, 약 10시간 동안 전력 공급이 끊기면서 통신, 항공 및 교통망, 병원 등 대부분 공공 인프라의 작동이 마비되었다. 약 5,000만명 이상이 이 사태로 피해를 입었고 심지어는 사망자도 발생했다. 아직까지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사고 전후의 이상 현상들은 확인되고 있다. 정전 몇 분 전부터 송전망에 공급되는 전력량의 요동이 감지되었다. 풍력발전으로부터의 전력 공급이 순간적으로 급증했고, 프랑스가 스페인으로부터 전기를 공급받는 전력망이 자동적으로 끊겼다. 이 전력망 단절로 이베리아반도내 전력 수급 불균형이 더 악화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원전 몇기가 송전망 공급물량이 꽉 찼다는 시그널을 받고 자동적으로 운전정지에 들어갔다. 태양광 발전으로부터의 전력 공급도 18,000MW에서 순식간에 8,000MW로 급락하였다. 태양광 설비들을 자동적으로 셧다운하는 기능이 작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재생에너지 전력 공급이 줄어드는 경우 수력발전 등을 통해 이를 보완하는 것이 보편적인데 이번 사태에서는 그런 기능도 한계에 부딪혔던 것 같다. 대량의 발전설비들이 그리드에서 이탈하면서 결국 유례가 없는 대규모 정전이 터지고 말았다. 스페인 정전 사태는 재생에너지 탓? 사건 이후 유럽의 많은 언론들, 특히 재생에너지에 대해 비판적인 언론사들이 정전 사태의 원인을 재생에너지로 지목했다. 심지어는 미국 에너지부의 크리스 라이트장관마저도 TV에 나와 재생에너지에 사고 책임을 돌리는 발언을 했다. 아직까지 원인 조사가 지속되고 있고, 벌어졌던 현상으로부터 볼 때 송전망 운영시스템이 적절하게 작동하지 못했던 것으로 읽히는데도 기다렸다는 듯이 재생에너지에 대한 거센 공격이 벌어진 것이다. 라이트 장관이야 원래 석유회사 출신이고 트럼프 행정부 자체가 친화석연료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는 만큼 그의 발언에 공감은 못하지만 그렇게 말한 심정이 이해는 된다. 그러나,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각국 정부에서도 이번 사태를 재생 에너지 탓으로 돌려서는 안된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고, 이번 일을 계기로 21세기의 에너지 믹스에 걸맞는 송전망체계를 갖춰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미 세계적인 대세가 된 재생에너지의 확산이 이번 일로 주춤할 우려는 그다지 커 보이지 않는다. 이번 사태가 보여주는 더 우려스러운 시사점은 인류 사회가 새로운 혁신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이라는 사실이다. 혁신의 도입이 문제를 일으키면 이를 해결하는데 힘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혁신을 거부하는 명분으로 삼는 경우가 더 많아 보인다. 그리고 지금까지 혁신을 거름삼아 성장해 왔던 우리나라가 특히 더 그런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은 1997년 미국 하버드대학 교수인 클레이튼 크리스텐슨이 소개한 개념이다. 기존 시장의 작은 틈새에서 열악한 기술로 출발한 시도가 빠르게 발전하여 기존 시장 점유자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시장지배자로 자리잡는 형태의 혁신을 의미한다. 그래서 더욱 필요한 파괴적 혁신 파괴적 혁신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초기 시장에서 소비자들의 인내와 포용이 필수적이다. 흔히 얼리어댑터로 불리우는 호사가들이 혁신의 초기 시장을 제공해 주면, 그 기반에서 제품과 서비스를 지속적으로 개선하여 궁극적으로 기존 시장을 대체하는 것이다. 초창기에 음질이 너무 나빠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던 전화가, 대서양 너머까지 명확하게 메시지가 전달되는 전보를 이겨내고 통신 시장을 장악했던 것이나, 짧은 주행거리와 불편한 충전 인프라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들의 이타적 혹은 과시적 소비를 바탕으로 성능을 개선하고 점유율을 넓혀가고 있는 전기차, 저급한 기술이라고 퇴물 취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정부의 노골적인 비호하에 성능을 개선하고 시장 점유율을 늘려 지금 와서는 리튬이온 배터리의 아성을 함락시켜 버린 리튬인산철 배터리 등 성공적인 파괴적 혁신의 사례는 무수히 많다. 그리고, 자원도, 자본도, 인력도 빈약한 우리나라가 앞으로도 지속 성장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러한 파괴적 혁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혁신 환경은 우리 경쟁국들보다도 오히려 열악하다. 2017년 일본의 반도체부품 수출규제로 소부장분야의 경쟁력 확보가 절체절명의 과제가 되었을 때 가장 크게 문제 되었던 관행은 우리 기업들이 국내에서 개발된 새로운 소재나 부품의 사용을 꺼린다는 것이었다. 일본이 수출규제 대상으로 삼았던 고순도 불화수소의 경우, 이미 국내에 우리 기술로 제조할 수 있는 특허가 있는 상태였지만 반도체 업계는 신뢰성이 검증된 일본산 소재를 선호했고, 그 결과 공급망 충격을 피할 수 없었다. 새로운 혁신 시도는 매우 어려운 큰 모험이기에 지멘스 등 글로벌 업체들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첨단 발전용 터빈이나 풍력발전 설비 등의 경우도 국내 기술로 제품이 개발돼도 이를 적용해주는 현장을 찾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발전 설비의 국산화는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우리 시장 환경이 이처럼 글로벌 스탠다드 이상으로 파괴적 혁신에 대해 엄격한 것은 '실패하면 안 된다'는 문화적 성향에 뿌리를 두고 있다. 새로운 기술을 생산현장에 적용해서 실패하는 경우 이를 결정한 회사 임원은 그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해야 먹고 살수 있는 나라에서 새로운 시도 자체가 생각하기 어려운 큰 모험이 되고 있는 것이다. 간단한 계산을 해보자. 1961년 우리나라의 신생아 수는 약 105만명으로 추산된다. 이들이 성장하여 한국의 경제 성장을 견인해 왔고 65세가 되는 올해부터는 공식적으로 경제활동 인구 통계에서 벗어나게 된다. 2012년 신생아 수는 48만 5천명이다. 이들이 실제 일을 시작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14세가 되는 올해부터 우리나라의 경제활동인구 통계에 새로 잡히게 된다. 단순 비교로 경제활동인구에서 빠지는 사람이 신규 진입하는 이들의 2배가 넘는다. 우리 경제가 지금의 성취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제 14세가 된 친구들이 65세가 될 때까지 지금 65세 연령층이 해왔던 일의 2배 이상 일을 해줘야 한다. '혁신 장려하고, 실패 포용하는' 문화 만들어야 두 배의 노동을 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고, 그렇게 할 리도 없으니, 결국 2배 그 이상으로 창의적으로 새로운 부가가치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1961년생 선배들보다 2배나 더 혁신의 자질이 뛰어나기를 바랄 수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지금 14세 연령층의 혁신성을 소중히 여기고 몇 번이고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하는 것이다. 초고령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국가공동체 쇠퇴의 위기를 맞고 있는 우리나라가 앞으로도 지속성장의 궤도에서 탈선하지 않으려면 혁신을 장려하고 실패를 포용하는 너그러운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 모두에 소개했던 정전사태로 돌아가서, 이번의 재앙을 재생에너지로부터 발을 빼는 기회로 활용하려는 근시안적인 행태가 벌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전력공급시스템의 총체적 붕괴라는 전대미문의 사태로 오히려 새로운 시대의 에너지믹스에 부합하는 최첨단의 송전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빈약한 재생 에너지 자원으로 간헐성 문제의 해결이 더 시급한 우리나라가 이러한 과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할 수 있다면 K-Renewable이 우리의 새로운 미래 먹거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는 먼 과거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Dynamic Korea'라는 구호를 되살리려면 우리는 혁신을 혁신하는 창의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박원주

[기자의 눈] 면세점 위기 짓누르는 ‘인천공항 임대료’

국내 면세점업계가 불황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 올해 1분기 롯데·신라·신세계·현대 등 면세점 4사는 외견상 모두 영업흑자로 전환하거나 전분기(2024년 4분기)보다 영업손실을 대폭 줄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순수 영업활동에 따른 개선이라기보다는 대부분 희망퇴직, 매장 폐점·축소 같은 '고강도 비용절감'에 따른 결과로 풀이된다. 고환율에 따른 가격 경쟁력 약화, 백화점·쇼핑몰·균일가할인점 등 경쟁업태로 고객 이탈이 이어진 탓에 어려움을 겪는 면세점업계가 특히 어려움을 호소하는 부분은 '인천공항 면세점 임대료 부담'이다. 인천국제공항공사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지난 2023년 공항면세점 임대료를 기존 '고정 임대료제'에서 '객당 임대료제'(출국여객 1인당 임대료 산정)로 전환했다. 그러나, 엔데믹 일상회복 이후 고환율·쇼핑패턴 변화로 해외여행객은 늘었음에도 1인당 면세점 구매액은 감소하는 바람에 면세점업계에 '큰 짐'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인천공항 출국여객수는 3531만명으로 팬데믹 이전인 2019년(3556만명) 수준을 거의 회복했지만, 지난해 면세업계 매출액은 14조2249억원으로 같은 기간보다 42.8%나 줄었다. 이는 여행객의 쇼핑패턴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거나 낙찰받기 위해 높은 입찰가격을 제시하는 등 면세점업체 귀책사유가 클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인천공항공사의 비항공수익(면세점 임대료 등)이 전체 수익의 65%로 해외 주요 공항(40~45%)에 비해 높다는 점, 한국공항공사가 김포공항 면세점 등에서 '영업요율 임대료제'(면세점 매출에 연동해 임대료 부과)를 운영하고 있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인천공항 면세점 임대료 제도 개선을 바라는 면세점업계의 주장에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정부 특허사업인 면세사업은 온라인은 물론 오프라인 유통업종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더 시장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일전에 유통 전공 한 대학교수가 기자에게 “백화점, 대형마트, 편의점, 면세점 중 현재 소비침체 위기에서 가장 돌파구를 찾기 힘든 업종은 면세점"이라고 말한 이유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면세점의 위기 돌파는 면세점사업자의 자구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 아울러 인천공항공사도 면세점과 공항공사 간 지속적인 '공생관계'를 위해 면세점의 경영애로 개선에 손을 내밀어야 할 것이다. 김철훈 기자 kch0054@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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