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11차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들어있는 원전 2기의 도입 추진을 발표하는 기자 간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김장관은 “전체 약 30% 비중을 차지하는 석탄발전을 2040년까지 제로화해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재생에너지와 원전을 중심으로 전력을 운영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재생에너지를 대폭 늘려나가면서 에너지 저장장치(ESS)와 양수발전 등을 통해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원전의 안전성과 경직성 문제를 보완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장관은 원자력 발전과 관련해 “기존 원전도 안전 기준을 전제로 유연 운전 가능성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이 발언은 '원전 유연성'이라는 오래된 쟁점을 다시 수면 위로 부상시켰다. ◇전환 요구 받는 대한민국 에너지 시스템 대한민국의 에너지 전환은 이제 선언의 단계가 아니라 물리 법칙과 경제 구조가 동시에 작동하는 '시스템 전환'의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탄소중립을 목표로 한 재생에너지 확대, 전기화(electrification)에 따른 구조적인 전력 수요의 증가, 인공지능(AI) 산업 성장에 따른 '고품질' 전력 수요 증가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봄·가을 전력 수요는 줄고 태양광 발전량이 크게 상승했을 때 남아도는 전력을 어떻게 해소해 전력망의 안정성을 확보할 것이냐 하는 점이다. 이는 거대한 전환의 중심에 놓인 두 전원, 즉 원자력 발전과 재생에너지를 어떻게 조합할(혹은 조화시킬) 것인가로 이어진다. 이에 대해 정반대의 주장이 동시에 제기되고 있다. 한쪽에서는 원전과 재생에너지가 기술 발전과 운영 방식의 변화에 따라 충분히 조화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두 전원이 태생적으로 충돌하기 때문에 무리한 공존은 전력 시스템 전체의 안정성과 경제성을 훼손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 논쟁은 정치적 이념이나 가치 판단의 문제로만 치부할 수가 없다. 서로 다른 연구진이, 서로 다른 전력 시스템을 가정해 수행한 정량적 모델링과 실증 연구에서 출발한, 매우 구체적이고 기술적인 논쟁이 깔려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논쟁은 “원전이냐 재생에너지냐"라는 단순한 구호로 정리될 수 없고, 특히 한국과 같이 전력망 구조가 특수한 국가에서는 더욱 신중한 검토가 요구된다. 그렇다면 우리보다 재생에너지 보급이 앞선 해외에서는 이 논의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 “원전의 경직성은 오해"…유연 운전 기술의 진화와 재평가 원자력 발전은 오랫동안 '한 번 가동하면 멈출 수 없는 기저부하 전원'으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최근의 에너지 시스템 연구는 이 인식이 기술 그 자체라기보다 운영 전략과 제도 설계의 산물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에너지 이니셔티브 소속 연구팀은 2018년 3월 국제 학술지 '응용 에너지(Applied Energy)'에 발표한 논문에서 현대적인 3세대 원자로가 이미 상당한 수준의 부하 추종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실증적으로 정리했다. 부하 추종 능력이란 전력 수요나 다른 발전원의 출력 변화에 맞춰 발전기가 자신의 출력을 빠르고 안정적으로 올리고 내릴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 논문에 따르면 제어봉 조작과 냉각재 유량 조절을 통해 원전은 분당 정격 출력의 2~5% 수준까지 출력을 증감할 수 있는데, 이는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높은 유연성이다. 이 연구가 중요한 이유는 원전의 '경직성'이 물리적으로 불변의 속성인지, 아니면 경제성 극대화를 위해 의도적으로 선택된 운영 방식인지를 구분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원전이 항상 최대 출력으로 운전돼 온 이유는 그렇게 할 때 단위 전력당 비용이 가장 낮아지는 구조 때문이지, 기술적으로 출력 조절이 불가능해서는 아니라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한국이 보유한 APR1400 노형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재조명된다. APR1400은 설계 단계에서부터 일정 범위의 출력 조절을 고려해 개발됐으며, 실제로 해외 수출 노형에서는 부하 추종 운전에 대한 검토가 지속돼 왔다. 다만 국내에서는 재생에너지 비중이 낮았고, 전력시장 제도 역시 원전의 유연성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기능이 본격적으로 활용되지 않았을 뿐이라는 설명도 나온다. ◇ 제논 과도와 연료 주기…유연 운전의 물리적 한계와 '함대 운영' 논리 원전 유연성에 대한 낙관론에도 불구하고 물리적 제약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프랑스 첸트랄쉬펠레크공대 연구팀은 2022년 3월 '응용 에너지'에 발표한 논문에서 원전의 출력 조절을 가로막는 핵심 물리 현상으로 ▶제논(Xe)-135 과도 현상 ▶연료 주기 말기의 반응도 감소 등을 명확히 지적했다. 제논-135는 핵분열 과정에서 생성되는 강력한 중성자 흡수 물질로, 원자로 출력을 낮출 경우 농도가 급격히 증가한다. 이로 인해 출력을 다시 높이려 할 때 일정 시간 동안 반응도가 억제되며, 이는 재생에너지 출력 변동에 즉각 대응해야 하는 전력망 운영에서 치명적인 제약으로 작용할 수 있다. 연료 교체 시기가 가까워질수록 이 문제는 더욱 심화된다. 2018년 '응용 에너지'에 발표한 논문에서 MIT 연구팀은 원전 유연 운전이 단순한 기술 옵션이 아니라 운영 리스크를 동반하는 선택임을 분명히 했다. 제논 과도 현상으로 인한 출력 회복 지연은 재생에너지 출력이 급격히 감소하는 상황에서 계통 불안정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연료 주기 말기의 반응도 저하는 안전 여유를 감소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 연구팀 연구가 흥미로운 지점은 이러한 한계를 이유로 유연 운전을 포기해야 한다는 결론이 아니라, 운영 단위를 바꿔야 한다는 제안을 내놓았다는 점이다. 연구팀은 다수의 원전을 보유한 국가의 경우 개별 원자로가 아니라 '원전 함대(nuclear fleet)' 전체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보고, 연료 교체 주기를 전략적으로 엇갈리게 배치(staggering)함으로써 항상 유연 운전이 가능한 원전을 계통에 남겨둘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함대 운영 개념은 특히 한국처럼 원전 비중이 높고, 다수의 동일 노형을 운영하는 국가에서 정책적 의미가 크다.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아질수록 출력 제한(curtailment)이 증가하는 문제를, ESS만으로 해결하지 않고 기존 원전 자산의 운영 방식을 바꿔 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 회전 관성과 '에너지 섬' 한국…구조적 조건이 만드는 필연성 재생에너지 확대 논의에서 종종 간과되지만, 전력망 안정성의 핵심 요소 중 하나는 물리적 회전 관성(Inertia)이다. 발전기 터빈처럼 회전하는 질량이 갑작스러운 전력 수급 변화가 발생해도 관성에 의해 속도 변화를 늦추며 전력망 주파수를 버텨주는 성질을 말한다. 스페인 세비야대학교 연구팀은 2022년 1월 '응용 에너지'에 발표한 연구에서 재생에너지 비중이 약 39%를 넘어서는 전력 시스템에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관성상수를 가진 동기 발전기가 계통에 연결돼 있지 않으면 주파수 안정성이 급격히 저하된다고 분석했다. 이 연구는 원전과 화력 발전이 제공하는 회전 관성이 단순한 '부가 기능'이 아니라, 재생에너지 확대의 전제 조건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태양광과 풍력은 인버터 기반 전원으로 물리적 회전체를 갖지 않기 때문에, 사고나 수급 불균형 발생 시 주파수 변동을 완충할 수 있는 물리적 에너지를 직접 제공하지 못한다. 이 문제는 한국에서 더욱 심각하다. 한국은 이웃 나라와 전력망이 연결되지 않은 고립된 계통이며, 국토가 좁아 태양광 출력이 지역적으로 분산되지 않고 동시에 급증하거나 급감하는 특성을 가진다. 이러한 조건에서는 원전이 단순히 전력을 생산하는 설비가 아니라, 재생에너지가 '안전하게' 늘어날 수 있도록 전력망의 기초 체력을 유지하는 구조적 장치로 기능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 “기술은 가능해도, 경제는 다르다"…유연 원전에 대한 냉혹한 반론 그러나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반드시 경제적으로도 합리적인가?" 독일 베를린공대 연구팀은 지난해 7월 '에너지 전략 리뷰(Energy Strategy Reviews)'에 발표한 논문에서 이런 의문을 제기했다. 연구팀은 유럽 전력 시스템을 대상으로 한 모델링을 통해 재생에너지 변동성에 맞춰 원전 출력을 조절하는 방식이 원전 자체의 총비용을 크게 증가시킨다고 분석했다. 이 연구는 원전의 경우 건설비와 금융비가 원가의 80% 이상을 차지한다는 데 주목한다. 원전은 높은 가동률을 전제로 설계된 자본 집약적 설비이기 때문에 재생에너지에 맞춰 가동률을 낮추는 순간, 단위 전력당 비용이 급격히 상승한다. 연구팀은 이로 인해 원전과 재생에너지가 보완 관계라기보다 동일한 전력 시장에서 서로의 경제성을 잠식하는 대체 관계에 가까워진다고 결론지었다. 연구팀은 논문에서 “원전은 투자 비용을 회수하기 위해 90%에 가까운 가동률로 유연하게 운영해야 하므로, 기술적으로는 가능하더라도 운영 유연성은 경제적으로 실현 가능하지 않다"면서 “결과적으로 전력망 인프라, 다중 에너지 시스템의 유연한 수요, 그리고 에너지 저장 장치가 변동성이 큰 풍력 및 태양광 발전을 통합하는 데 더 효율적인 선택지"라고 지적했다. 중국 화베이전력대학교 연구팀은 2025년 12월 '프로세시스(Processes)' 저널에 발표한 논문에서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은 전력 시장에서 원전이 반복적으로 출력 제한을 받을 경우 연료비 절감 없이 매출만 감소하는 구조적 손실이 발생해 원전이 '마이너스 자산'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연구팀은 대신 고체 열 저장 장치가 원전의 유연성과 경제적 효율성을 향상시키는 데 효과적임을 입증했다. 시뮬레이션 결과는 세라믹·콘크리트·내화벽돌 같은 고체에 열에너지를 저장하는 장치를 도입하면 심층적인 피크 부하 감소 수요를 충족하면서 원전의 수익 구조를 크게 개선, 프로젝트의 정적 투자 회수 기간을 단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토론회에서 제기된 경고: “한국은 아직 검증하지 않았다" 지난해 12월과 지난달 기후부 주최로 열린 두 차례의 '바람직한 에너지 믹스' 공개 토론회에서 전력계통 전문가나 전력시장 관계자들은 공통된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그것은 “한국은 원전 유연성에 대해 찬반 논쟁은 치열하지만, 정작 한국 계통에서의 실증 데이터는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한 전력계통 전문가는 토론회에서 “논문에서 가능한 것과 실제 계통에서 허용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며 “출력 조정이 주파수 안정성, 예비력 운영, 사고 복구 능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한국 조건에서 직접 검증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토론자는 “유연 운전은 기술 문제가 아니라 안전 규제, 운전 인력, 시장 보상 체계까지 포함한 전력 시스템 전체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발언들은 원전 유연성 논쟁이 더 이상 추상적 담론이 아니라, 정책 결정 이전에 반드시 넘어야 할 실증의 문턱에 와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대한민국 에너지 정책의 핵심은 검증이다. 실제 원전에서, 실제 전력망 조건 하에서, 어느 정도의 출력 조절이 가능한지, 그 비용과 위험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재생에너지 출력 제한과 ESS 투자 규모를 얼마나 줄여주는지를 투명하게 확인해야 한다. 기후부에서도 '원전 탄력운전 기술개발' 관련 연구개발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수력원자력 등 다수기관이 참여하는 이 연구에는 모두 503억원이 투자될 예정이다. 한수원 측은 “오는 2032년이면 원전 출력을 시간당 10%씩 50%까지 줄이는, 1년에 100회 이상 적용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금 국내 전력 시스템 앞에 놓인 신호등은 아직 녹색도, 적색도 아니다. 그것은 과학적 실증을 요구하는 노란불이다. 이 노란불 앞에서 충분히 멈춰 서서 데이터를 쌓고, 가정이 아니라 현실 위에서 판단하는 것, 그것이 지금 대한민국이 가야 할 가장 합리적인 에너지 전환의 경로인 셈이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