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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E칼럼] 시장원리 중시한 제주 전력시장 시범사업 전국으로 확산해야

전력거래소는 지난해 6월부터 시장원리에 기반을 둔 '전력시장 제도개선 제주 시범사업'을 운영해 왔다. 이 시범사업은 크게 실시간시장, 예비력시장 그리고 재생에너지 입찰제가 그 핵심이다. 실시간시장은 지금까지의 하루전시장을 하루전시장과 15분 단위 실시간시장의 이중시장으로 변경하는 것이다. 예비력시장은 계통유연성을 공급하는 피크자원에 대해 정당한 보조서비스 제공대가를 지급하는 형태로써 15분 단위의 예비력시장을 도입하여 예비력을 시장 상품화하여 실시간으로 거래한다. 재생에너지 입찰제는 재생에너지도 전력시장 입찰에 참여하여 발전량과 시장가격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하고 중앙급전발전기와 동일한 급전지시 이행의무를 부여하고 이에 따른 보상을 지급하도록 한 것이다. 한 마디로 실시간 시장에 가까운 가격입찰제를 시행하고 재생에너지와 예비력에 가격을 붙여 발전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자는 것이 그 목적이다. 금년 5월 말까지의 시범사업 운영에 대한 중간평가는 꽤 긍정적이다. 재생에너지 입찰제에 참여하는 참여사업자 수가 17개 → 21개 → 23개로 늘어났고, 참여 설비용량도 403.8MW → 426.7MW → 548.0MW로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무엇보다도 시장가격은 미도입을 가정했을 때보다 하루전 SMP는 6.86%, 실시간 SMP는 8.09% 하락하였다. 그 이유로는 시범사업 도입 후 전력수요가 감소하고 태양광 이용률이 높아지는 봄·가을철의 경부하기 낮 시간대 및 주말에 음(-)의 SMP가 발생하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무엇보다도 재생에너지의 중앙급전자원화를 실현할 수 있었고 강제적 출력제어가 97.7% 줄어들었다는 점이 돋보였다. 이에 더하여 시범사업 개시 후 중개사업자(VPP)가 증가하였고, 배전망 직접연계형 ESS 등 새로운 전력자원의 시장참여가 확대되었다는 것이 고무적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전력시장은 비용평가 방식을 25년간 고집하고 있다. 사실 원가규제에 가까운 비용평가 시장은 매우 경직적이다. 모든 발전기의 연료를 일일이 비용을 검증하기 위하여 샘플을 취해 실험한 열량 수치를 확인해서 전력거래소에 보고해야 한다. 이에 따른 인력과 자원의 낭비와 복잡한 관료적 절차는 그나마 눈에 보이는 명시적인 비용이다. 눈에 안 보이는 암묵적 기회비용은 가격입찰을 시행했었다면 얻어질 수 있었던 편익이다. 연료비와는 무관하게 발전기 가동을 높이고 싶어도 무조건 비용평가 순으로 발전기를 가동해야 해서 발전사업자간 경쟁을 유도할 수도 없다. 일례로 껐다 켰다를 반복할 때 생기는 기동비용을 줄이고 발전기 수명을 늘리기 위해 돈을 적게 받고서라도 발전기를 연속으로 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값싼 연료를 대량으로 빨리 도입하기 위해 기존 연료를 급속히 소모하는 유연한 발전방식도 현 체제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비용평가의 한계 때문에 시장원리에 가까운 가격입찰 방식으로 전력거래를 바꿔야 한다는 논의가 나온 지도 비용평가 시장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규제 당국은 요지부동이었다. 해외의 전력시장은 대부분 가격입찰 방식이라는 국제비교도 통하지 않았다. 한편, 제주도와 전남 등에서 인위적 출력제어가 빈번해지자 이 역시 강제로 하지 말고 재생에너지 입찰제도를 통해 효율적으로 줄일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이 시범사업의 목표였다. 가격입찰을 잘못 시행하면 발전사업자의 담합 등으로 오히려 전력 도매가격이 상승하여 전기요금 인상요인이 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제주 시범사업의 운영결과는 실시간시장의 도입으로 실제 수급에 따른 실시간가격을 실현하고, 전력 도매가격을 낮추고, 강제적인 출력제어도 자발적 조정으로 대체하고, 예비력에 대한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고, 다양한 전력자원을 발굴하게 된 점이다. 자원을 제값에 팔고 사는 것이 어떤 총명한 독재자의 눈부신 지휘보다도 우월하다는 평범한 시장원리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가격원리를 중시하는 전력시장 제도를 전국으로 확대해야 한다. 조성봉

[EE칼럼] 넷제로를 향한 CCUS, 지금이 골든 타임

한국이 2050년 탄소중립을 선언한 지 5년이 지났다. 그러나 산업 구조와 에너지 현실을 고려하면 선언에 그칠 위험이 크다. 철강, 시멘트, 석유화학 등 GDP와 수출을 지탱하는 핵심 산업은 동시에 탄소 다배출 업종이다. 재생에너지 잠재량은 제한적이어서 태양광과 풍력만으로는 25년 안에 산업 탈탄소화를 달성하기 어렵다. 이 격차를 메울 수 있는 현실적 수단이 탄소포집·활용·저장(CCUS)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50년 넷제로 시나리오에서 전 세계 감축량의 15%를 CCUS로 달성할 것으로 본다. 국내 연구들 역시 한국 산업 배출의 최소 30~40%는 CCUS 없이는 줄일 수 없다고 지적한다. CCUS는 단순한 땜질 기술이 아니다. 에너지 전환을 안정화하는 인프라이자, 한국 주력 산업을 연결하는 성장 가치사슬의 출발점이다. 천연가스 개질에 CCUS를 결합하면 블루수소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고, 포집된 CO₂와 재생에너지 기반 수소는 e-메탄올, e-암모니아, 합성연료로 전환된다. 이는 항공·해운·발전의 탈탄소 연료로 곧바로 활용 가능하다. 여수·울산·포항 같은 클러스터에서 CCUS–수소–합성연료–연료전지가 선순환 구조를 이루면 단순한 감축이 아니라 산업 체질 전환이 가능하다. 조선·해운업은 특히 주목해야 할 지점이다. 전 세계 조선 시장 점유율 40%를 가진 한국은 CCUS-수소-연료 체인에서 압도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 탄소 운반선(Carbon Carrier), 암모니아·메탄올 추진선, 그리고 이를 건조하는 조선업까지 하나의 시장을 형성하면 주력 산업의 재도약이 가능하다. 세계는 이미 속도를 내고 있다. 노르웨이는 북해 유전을 활용한 '롱십(Longship)' 프로젝트로 유럽의 탄소 허브를 선점했다. 미국은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통해 포집 탄소 1톤당 최대 85달러 세액공제를 제공하며 매년 수십억 달러 투자를 끌어들이고 있다. 일본은 아시아 해상저장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와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저장소 탐사, 수송망, 제도 설계에서 여전히 걸음마 단계다. 기업들 역시 비용과 리스크 부담 때문에 대규모 투자를 주저한다. 특히 현재 탄소 포집·저장 비용은 톤당 7만~12만 원 수준인데, 배출권거래제(K-ETS) 가격은 1만원 미만이다. 이 괴리 탓에 PF 구조가 성립하지 않고, 민간 투자만으로는 사업 추진이 불가능하다. 이제 필요한 것은 명확하다. 첫째, 동해 가스전 등 해양저장소를 조속히 확보해 2030년까지 최소 1억 톤 저장 용량을 국가 차원에서 준비해야 한다. 둘째, 미국 IRA 수준의 세액공제·투자지원 메커니즘을 도입해야 한다. 그래야만 민간 자본이 본격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셋째, CCUS를 환경정책이 아닌 조선·해운·수소를 아우르는 통합 산업 전략으로 격상해야 한다. 넷째, 일본·싱가포르와 함께 동북아 CCUS 수송·저장 네트워크 구축을 추진해야 한다. CCUS는 한국의 넷제로를 위한 보조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산업 재편과 신성장을 열어갈 핵심 전략이다. 한국이 기후위기 대응과 산업경쟁력을 동시에 잡을 수 있는 마지막 골든타임이 바로 지금이다. 유상희

[EE칼럼] 북극항로와 에너지 이슈

허은녕 서울대학교 에너지시스템공학부 교수/ 전 한국자원경제학회 회장/전 세계에너지경제학회(IAEE) 부회장 북극항로(NSR·Northern Sea Route)가 이번 새 정부 들어 에너지고속도로와 함께 에너지 분야의 주요 키워드로 떠올랐다. 북극항로는 북극해를 통과해 아시아(특히 동북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항로를 말한다. 우리나라가 속한 동북아시아를 중심으로 보면 미국/캐나다 위를 지나 유럽으로 가는 북서항로와 유라시아 대륙(주로 러시아) 북쪽을 지나 동쪽으로 베링 해협까지 가는 북동항로 등 2개로 나뉜다. 지난 문재인 정부 때 신북방정책의 추진을 위하여 러시아 위를 지나는 북동항로의 미래 가능성을 논의하였으며 여러 싱크탱크에서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러시아, 중국, 일본의 전문가를 초청하여 국제학술대회를 열기도 하였다. 이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발발로 북동항로의 가능성이 낮아지자 잠잠해지던 북극항로 논의는 올해 초 트럼프 대통령이 캐나다 및 그린랜드에 대한 소유권 주장으로 북서항로에 관심을 보이면서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이재명 정부는 북극항로 사업을 국정기획위원회가 발표한 국정과제 리스트에 올리고 추진하고 있다. 사실 러시아와의 협력은 우리나라의 여러 정부에서 추진해 왔으며, 이때 에너지, 특히 LNG 운반선을 통한 천연가스 무역은 언제나 한-러 협력의 중심에 있어 왔다. 그러나 북극항로는 단순히 LNG뿐만 아니라 무역의 새로운 항로이기 때문에 관심을 받은 것이다. 우리나라가 특히 러시아 위를 지나는 북동항로에 주목한 것은 짧은 수송시간 및 크게 낮아질 물류비용 때문이다. 북극항로가 열리면 한국이 유럽과 동북아시아를 잇는 물류허브 기지로 부상한다는 기대감이 높았다. 2013년 5월 한국은 북극이사회 옵서버 자격을 취득한 직후 상업 운항 테스트를 시행하였다. 또한 국내 조선사들은 북극항로를 지날 수 있는 천연가스로 운항하는 쇄빙선을 만들고 LNG 운반선을 만들어 러시아에 수출하였다. 우리나라와 함께 북극이사회 옵서버가 된 중국은 다롄항을 북극항로의 허브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역시 쇄빙선 및 LNG 운반선을 만들어 수출하고 있다. 일본은 홋카이도의 도마코마이항을 북극항로 중심 항구로 만들고자 하는 등 한․중․일 모두 북극항로 동북아 물류허브를 노리고 있다. 해양수산부 자료에 따르면 부산에서 네덜란드 로테르담까지의 해운 항로 중 현재 이용하고 있는 남방 항로(수에즈운하 통과)는 약 2만 2천 km인 반면 북극항로는 단 1만 5천 km밖에 되지 않는다. 즉, 기존 항로 보다 30% 이상의 해운물류 경쟁력이 강화되는 것이다. 북극항로가 관심을 받는 진짜 이유는 바로 지구온난화 때문이다. 북극의 얼음이 계속 녹아 2030년이면 북극항로를 최소 6개월 이상 사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북극항로를 통과하는 운송량은 해마다 늘어 COVID-19 직전에는 약 3,500만 톤까지 증가했다. 러시아는 2030년 해당 항로의 물동량이 1억 톤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으며 2035년까지 북극해 항로 구간에 액화천연가스 터미널과 석유/석탄 터미널 등을 건설한다고 한다. 한국, 중국, 일본 등 동북아시아 3국은 제조업이 중심인 비슷한 산업구조와 석탄 중심의 부존 에너지원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인구가 많아서 자체적인 에너지전환 노력만으로는 자국의 에너지 안보 확보는 물론 기후변화 협상을 위한 온실가스 감축이 쉽지 않다. 그러나 한․중․일과 러시아 및 몽골을 모두 아우르는 동북아시아 지역 간 협력체를 구성한다면 이야기가 매우 달라진다. 러시아와 몽골은 재생에너지 및 화석에너지 모두 풍부하여 한․중․일과 에너지 공급망을 연계한다면 이 지역의 에너지 안보 달성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다. 또한 러시아 시베리아지역은 인구가 적고 개발의 필요성이 높아 온실가스 감축 사업 가능성이 커서 기후변화협약 목표 달성에 크게 도움이 되어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의 에너지 부문 고민거리를 일거에 해결할 기회가 될 수도 있다. 한국이 다시 한번 앞서갈 수 있는 새로운 수출 인프라의 건설이자 동시에 에너지 이슈를 일거에 해결할 방법으로 거의 유일하기에 다들 북극항로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새 정부를 맞아 여러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북극항로 정책은 에너지가 국제적이고 지정학적이고 사회적인 이슈임을, 우리나라는 여전히 90% 이상의 에너지와 전략 광물을 수입에 의존하는 나라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북국항로 정책 추진에 기대가 크다. 허은녕

[EE칼럼] 알뜰폰처럼 ‘알뜰전기’? 전력시장 혁신이 열어갈 길

전력 구매시장이 흔들리고 있다. 독점적 공급 구조에 길들여져 있던 기업들이 더 이상 안주하지 않고, 직접 거래라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LG화학이 여수공장에서 도매시장을 통해 전기를 사들였고, SK어드밴스드가 제도 첫 신청자가 되면서 포문을 열었다. 세아베스틸은 한화큐셀과 20년 계약을 맺어 장기 직거래의 신호를 보냈다. 한화솔루션이 뒤를 따를 기세이고, 코레일 같은 공기업까지 눈길을 주니, 변화는 산업 전반으로 번질 태세다. 이는 단순히 거래 방식의 변주가 아니라, 전력시장 개혁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임을 웅변하는 장면이다. 지금 정부와 정치권의 시선은 여전히 '전기요금 인상 여부'라는 눈앞의 변수에만 매달려 있다. 그러나 요금은 어디까지나 결과일 뿐, 본질은 전력시장의 지배구조다. 독점 체제를 그대로 둔 채 요금만 억지로 눌러 놓는 방식은 손해 보는 집단과 이익을 챙기는 집단을 갈라치기 하는 단순한 제로섬 게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는 지속 가능한 해법이 나올 수 없다. 이제는 일반 소비자의 차례다. 통신시장을 떠올려보자. 한때 KT의 독점이 굳건했던 통신산업은 이동통신 도입과 함께 SKT·KT·LG의 경쟁 구도로 재편됐다. 알뜰폰 사업자들이 우후죽순 뛰어들면서 소비자는 요금을 스스로 고를 권리를 손에 넣었다. 그 결과는 자명하다. 요금은 내려갔고, 서비스는 개선됐으며, 시장은 혁신의 길로 들어섰다. 전력시장도 예외일 수 없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고, 소비자 선택권 확대라는 종착역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한국의 통신도 애초에 국영 독점에서 출발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KT가 사실상 전 영역을 지배했지만, 1990년대 들어 국제 압력과 국내 규제 완화의 흐름이 맞물리면서 균열이 생겼다. 1991년 다콤, 1997년 온세텔레콤 같은 신생 사업자들이 등장하며 국제전화 시장에 경쟁이 열렸고, 이어 장거리와 시내전화까지 개방이 확산됐다. 독점이 무너지고 다층적 경쟁이 형성되는 과정을 거치며, 통신시장은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되었다. 물론 경쟁 사업자의 진입이 곧장 효율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1997년 개인휴대통신 사업자들이 출범하면서 이동통신 시장은 단숨에 다섯 개 업체가 뒤엉켜 경쟁하는 구조가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기지국을 비롯한 인프라가 과도하게 증설되며 중복투자와 과잉투자 논란이 불거졌다. 고용 불안정 문제까지 뒤따르며 산업 전반이 흔들렸다. KT 역시 변화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1989년 민영화라는 길로 들어섰지만, 기존 지위를 지키려는 저항은 완강했고, 기득권을 지키려는 움직임은 곳곳에서 표출되었다. 그럼에도 한국 통신시장의 경쟁 체제는 이런 난관을 뚫고서야 비로소 뿌리를 내렸다. 전력시장 개방을 둘러싼 논의에서 늘 방어 논리로 제기되는 망 중복투자 문제, 기존 독점 사업자의 저항, 기술적·비용적 부담을 이미 통신산업은 고스란히 겪고 극복해낸 셈이다. 그 결과 소비자는 요금 선택권과 서비스 다양성이라는 실질적 혜택을 손에 넣었고, 산업은 경쟁을 통해 혁신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다. 특히 알뜰폰(MVNO: Mobile Virtual Network Operator) 제도는 통신시장의 진화를 잘 보여준다. MVNO는 자체 망을 보유하지 않고 기존 이동통신사의 망을 임대해 독자적인 요금제와 서비스를 설계해 제공한다. 막대한 망 투자 비용을 감당하지 않고도 서비스 혁신과 가격 경쟁을 촉진할 수 있었기에, 소비자는 SKT·KT·LGU+라는 3대 이동통신사의 망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수십 개 알뜰폰 사업자가 내놓는 다양한 요금제 가운데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소비자 권리를 확장하고 시장 효율성을 높인 대표적 성과였다. 전력망은 물리적으로 중복 구축이 불가능하다. 송전과 배전은 국가 차원에서 통합 운영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전형적인 자연독점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이 송배전망을 토대로 공급과 판매 주체를 다양화한다면, 통신시장의 MVNO 구조와 유사한 경쟁 원리를 전력시장에도 도입할 수 있다. 이를 구현할 수 있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전력중개사업자(aggregator)다. 다수의 발전사업자와 신재생에너지 설비, 가정용 태양광이나 에너지저장장치(ESS) 같은 분산형 전원을 하나의 '가상발전소(VPP)'로 묶어 전력시장에서 거래하거나 소매시장에 공급하는 구조다. 개별 소규모 전원이 시장에 직접 참여하기 어렵다는 한계를 중개사업자가 대신 메워주는 것이다. 둘째, 소매사업자(retailer)다. 이들은 송배전망을 그대로 이용하면서 전력 도매시장에서 확보한 전력을 소비자에게 판매한다. 이 과정에서 친환경 인증 전력 상품, 시간대별 차등 요금제, 맞춤형 요금제 등 차별화된 서비스를 설계해 소비자 선택권을 확대한다. 즉, 송배전망은 공공적 독점으로 두되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개방하고, 그 위에서 전력중개사업자와 소매사업자가 경쟁하는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소비자는 지금처럼 한전만 상대하는 획일적 구조에서 벗어나, 통신시장에서 알뜰폰을 고르듯 자신에게 맞는 전력 공급자와 요금제를 고를 수 있다. 이는 시장의 효율성을 높이고 혁신적 서비스의 도입을 촉진할 뿐 아니라, 소비자와 공급자 모두에게 이익을 돌려주는 새로운 전력시장 질서를 열게 될 것이다. 전력시장 거버넌스를 개혁하지 않는 한, 요금 논란은 끝없이 반복될 것이다. 정부는 전기료 조정이라는 미봉책에 머물 것이 아니라, 전력시장에 아예 공을 넘겨 스스로 그 책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면 소비자들도 더이상 '전기세'라며 인상 마다 정부를 탓할리도 없고, 원자재 가격 하락때는 전기료도 하락하는 난생 겪어보지도 못한 호사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야말로 에너지 위기와 요금 갈등을 동시에 풀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유종민

[김성우 시평] 해상 탄소배출의 유료화

김성우 김앤장 법률사무소 환경에너지연구소장/기후대응기금 운용심의위원 전세계 바다를 누비는 배가 배출하는 이산화탄소의 양은 무려 일년에 10억톤에 달한다. 이는 하늘을 누비는 비행기가 배출하는 이산화탄소의 양보다 많고, 한국이 배출하는 배출량의 약 1.5배에 달하는 엄청난 양이다. 그렇다면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가면서 배출하는 이산화탄소는 한국의 책임일까? 미국의 책임일까? 아니면 선주나 화주의 책임일까? 국제 사회가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정하는 기후변화협약(UNFCCC)의 부속 의정서(교토의정서)에 따르면, 국제 해운 및 항공 부문의 온실가스 배출은 타 부문과 달리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International Civil Aviation Organization)와 국제해사기구(IMO, International Maritime Organization)를 통해 별도로 제한 또는 감축을 추진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는 해상 탄소배출량의 국가별 할당이 기술적, 정치적으로 복잡하기 때문이다. 또한, UN 산하의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로서 배출량 산정방법을 가이드하는 IPCC(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도 국제 해운 및 항공 연료로 인한 탄소배출량을 국가별 배출총량에서 제외하고 별도로 보고하도록 권고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에 따라 국제 해운 부문에서는 IMO가 해상 탄소배출에 대한 규제 주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으며, 이는 해운사들이 정해진 기한 내에 특정 목표를 달성하도록 기준을 강화하고 경제적 페널티를 부과하는 제도를 포함한다. 대표적으로, 2022년 국제해상환경보호협약(MARPOL, International Convention for the Prevention of Pollution from Ships) 부속서 VI 수정안이 발효됨에 따라, 에너지 효율 기존선 지수(EEXI, Energy Efficiency Existing Ship Index)와 탄소집약도 지수(CII, carbon intensity indicator)를 통해 기술적·운영적 효율 향상을 유도하는 제도의 도입을 꼽을 수 있다. 이는 출력제한/바람활용/프로펠러최적화 등을 통해 에너지효율 향상을 도모하거나, 속도최적화/생물부착관리/대체연료사용 등을 통해 탄소집약도 향상을 촉진하는 승인 및 등급 제도이다. 더욱이, 지난 4월 제83차 해양환경보호위원회(MEPC 83)에서 국제해운 탄소중립(Net Zero)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총톤수 5천톤 이상의 선박을 대상으로 선박연료온실가스집약도(GHG Fuel Intensity) 신설을 합의했을 뿐만 아니라 CII의 감축률 상향 등을 결정해, 규정 강화의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이로 인해 2028년부터는 충분한 감축이 되지 않으면 이산화탄소톤당 50만원이 넘는 개선금을(Remedial Unit) 지불해야 한다. 전세계에서 가장 비싼 유럽연합(EU)의 탄소배출권 가격이 약 톤당 10만원이고, 우리나라의 탄소배출권 가격은 약 톤당 1만원인 점을 고려하면 부담이 큰 금액이다. 글로벌 규제만 강화되는 것이 아니고 지역 규제도 강화된다. 유럽연합(EU)의 경우, 아예 EU내 항구간 이동은 물론이고 해외 항구와 EU 항구를 오가는 대형 선박에 대해서도 일정 배출량만큼 EU 배출권거래제의 배출권을 구입하도록 2024년부터 강제하고 있다. 또한, 올해부터 발효된 FuelEU Maritime Regulation에 의해 대형 선박이 EU항구에 들르는 경우, 온실가스집약도(GHG intensity)를 2020년 대비 2025년 2프로 감축으로 시작해 2050년 80프로까지 감축해야 한다. 해운사는 효율기술적용, 저탄소연료변경, 사업모델개선 등을 선택해 규제에 대응해야 한다. 해운업계의 탄소중립 달성위한 감축수단의 기여도는 암모니아(32%), 에너지효율(20%), 수소(14%), 바이오연료(12%) 등의 순이다. 다만, 비중이 높은 연료전환은 해운사가 독자적으로 대응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특히, 대체 연료 수급의 경우, 해운업계의 친환경 연료 수요는 연간 4800만톤 규모인데 반해, 현재 전체 부문에 대한 공급량은 6300만톤 수준이고, 대체 수단이 더 부족한 항공업계의 수요에 밀릴 가능성도 있다. 중장기적으로 조선 및 정유업계와의 협력은 물론 정부의 지원도 필수적인 이유다. 그러나, 규제가 이미 시행되었고 강화가 임박했으니, 연료전환 노력과 더불어 다양한 기술을 활용한 효율성 제고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DNV 2024년 Maritime Forecast 보고서에 따르면, 운영 및 기술적 에너지 효율성 조치를 통해 2030년까지 연료 소비를 16%까지 줄일 수 있다고 한다. 이는 1억톤이 넘는 이산화탄소 배출 감축을 의미한다. 바야흐로 해상 탄소배출의 유료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경제 불확실성 하에서 저가 경쟁과 시황 등락으로 경영난에 시달리는 해운업계는 비상이다. 하지만, 조선업계가 친환경 규제를 LNG선박 수주 등 경쟁력 강화에 역으로 활용했듯, 해운업계도 기술과 협력으로 오히려 비용을 절감하고 경쟁력을 강화할 부분은 없을지 면밀히 따져봐야 할 타이밍이다. 김성우

[EE칼럼] LNG 트레이딩 역량 강화가 시급하다

미국과의 관세 협상이, 상호관세 15%, 미국 투자 펀드 3,500억 달러 조성, 미국산 에너지 4년간 1,000억 달러 구매를 골자로, 우여곡절 끝에 일단락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추진하는 미국의 무역적자 개선, 재정수입 확보, 제조업 부활, 에너지 패권에 거의 부합하는 맞춤형 협상 타결로 보여 뒷맛이 개운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협상 결과 우리나라는 향후 4년 동안 매년 250억 달러 상당의 미국산 에너지를 수입해야 한다. 미국산 에너지 수입액이 이미 2024년 기준으로 약 232억 달러에 이르고 있어, 매년 20억 달러 내외의 추가 수입은 큰 부담이 아닐 수도 있다. 게다가 추가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는 미국산 LNG 수입 비중은 현재 12% 정도에 지나지 않고, 상당수의 가스공사 장기 도입 계약이 만료 시점을 앞두고 있어, 미국산 LNG 수입 증가는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LNG 수입을 최전방에서 책임지고 있는 가스공사의 속내는 매우 복잡해 보인다. 국내 LNG 수요의 급격한 감소를 전망하고 있는 비현실적인 법정 수급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작년 말 확정된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르면, LNG 발전량은 2022년 157.7TWh에서 2038년 74.3TWHh로 약 53% 감소한다. 재생에너지와 원자력 비중을 각각 29.2%, 35.2%까지 늘려 잡은 반작용이다. 계획이 실현될 경우, 발전용 LNG 수요량은 덩달아 약 1,200만 톤가량 줄어들게 된다. 가스공사의 장기계약 물량 중 2024년부터 2026년 사이 만료되는 1,300만 톤에 거의 육박하는 엄청난 물량이다. 장기계약 기간은 주로 20년이다. 가스공사가, 향후 15년 이내에 발전용 LNG 수요가 반 토막 나는 법정 수급계획을 무시하고, 20년 기간의 대규모 도입 계약에 선뜻 나서기 어려워 전전긍긍하고 있는 이유다. 실제로 현재 가스공사는 카타르 및 BP와의 신규 계약을 통해 358만 톤 물량을 대체했을 뿐, 나머지 물량에 대해서는 미국산 LNG로 대체하는 안 등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계획의 수립과 실현은 다르다. 계획은 의지의 표현이라면, 실현은 의지와 현실적 제약 간 타협의 결과다. 정부는 계획을 통해 재생에너지, 원자력 등 무탄소전원 중심의 에너지전환 의지를 밝히고 있지만, 현실적 제약으로 가득 찬 세상이 정부의 의지대로 움직여 줄지는 미지수다. 오히려 신규원전 완공 지연, 계속 운전 기간 단축, 재생에너지 확대 한계 등과 같은 현실적 제약을 감안하면, 무탄소전원은 계획 대비 턱없이 부족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LNG 도입 계약을 계획에만 입각해 체결할 경우,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 국가적 에너지 부족 사태에 직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에너지안보의 직접적인 위협 요인이다. 가스공사는 에너지안보 차원에서 법정계획의 수요 전망을 사뭇 초과하여 LNG 도입 계약을 체결할 필요가 있다. 잉여 물량 해소보다 에너지부족이 초래하는 손실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부는 법정 에너지수급계획의 경직성을 완화해 법적 리스크를 줄여 주어야 한다. 미국 에너지정보청이 정부의 정책 의지와 별도로 다양한 현실적 가능성에 입각하여 발표하는 에너지아웃룩과 같은 형태면 충분해 보인다. 전체 물량의 과부족만 문제가 아니다. LNG 수요의 변동성 확대가 더 큰 문제다. 자연 조건에 따라 들쭉날쭉한 재생에너지의 간헐성 확대를 에너지저장장치(ESS)만으로 대응하기 어려워 LNG 발전의 병용이 필수다. 따라서 재생에너지의 변동성은 LNG 수요의 변동성으로 곧바로 이식되어, LNG 수급의 단기적 불일치가 수시로 일어날 가능성을 높인다. 이래저래 LNG 과부족의 빈번한 발생은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이처럼 수급의 불확실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가장 효율적인 수급 안정화 방안은 트레이딩 역량 강화다. 가스공사는 단순한 수입공급사를 넘어 고도의 트레이딩 기업으로 거듭나야 한다. 가스공사는 연간 약 3,600만 톤의 LNG를 수입하는 세계 최대 수입사일 뿐만 아니라, 1,216만㎘에 달하는 단일 기업 최대 저장시설과 전국 단일 천연가스 환상망을 보유하고 있다. 트레이딩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물류, 운송, 저장시설과 같은 하드웨어 조건을 이미 구비하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시장 정보 분석, 금융 리스크 관리, 시장 참여자 간 네트워크 등 소프트웨어 능력은 한참 뒤져있는 것이 현실이다. 향후 에너지 수급의 불확실성이 심화될수록, LNG의 전략적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가스공사의 수급 조절 능력은 곧 국가 에너지 안보의 핵심이다. 가스공사의 트레이딩 역량 강화는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다. 박주헌

[EE칼럼] 관세 압박을 기회로, 한미일 협력의 분수령

임은정 공주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이재명 대통령이 23-24일 일본을 방문해 이시바 시게루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진뒤 , 곧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25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과 첫 한미정상회담을 갖는다. 역대 대통령 중 취임 후 한미 정상회담보다 한일 정상회담을 먼저 하는 것은 처음이다.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 광복 80주년이라는 상징적인 해에 한일 협력의 의지를 드러내는 측면도 있지만, 일본과 미리 의견 교환을 하려는 전략적 포석으로도 읽힌다. 지난 7월 31일 한미 양국 간 관세 협상 결과 미국이 상호관세를 15%로 낮추는 대가로 한국은 3500억 달러 대미 투자와 1000억 달러 에너지 구매를 약속하는 내용의 구두 합의가 발표됐다. 문제는 이 약속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행하느냐이다. 이 대통령의 방일·방미에 앞서, 19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삼성·SK·현대차·LG 등 4대 그룹 총수와 경제단체장이 모여 투자 계획을 점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삼성은 텍사스주 테일러시 반도체 공장에 대한 투자(370억 달러)를 포함해 총 51조 원, SK는 인디애나주 HBM 패키징 공장에 18조 원, 현대차는 2028년까지 배터리 및 전기차 생산기지 확장을 위해 29조 원을 투자할 계획이라 전해진다. 4대 그룹의 미국 내 투자 합계만 126조 원을 넘어서는데, 한화와 HD현대가 참여할 이른바 'MASGA(미국 조선업 재건)'프로젝트도 보다 구체화될 전망이다. 그러나 이 거대한 투자가 단순히 '관세 압박 회피 비용'으로만 쓰인다면 오히려 한국 경제에는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다. 따라서 이 투자가 궁극적으로 한국의 국익, 즉 에너지 안보나 미래 성장 산업의 동력 강화에 마중물로 작동할 수 있도록 지혜로운 정책 제언을 할 필요가 절실하다. 이미 약속한 바 있는 1,000억 달러 규모의 에너지 구매도 상기 투자와 연계할 수 있는 묘안을 발굴하기 바란다. 예를 들어 미국산 LNG 구매는 단순 수입 보다는 터미널 지분 참여나 알래스카산 LNG 공동 개발 투자 등과 연계해 장기 계약을 맺는 방식으로 한다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릴 수도 있겠다. 에너지 안보 측면에서 원자력발전의 연료 문제도 시급하다. 한국이나 일본, 심지어 미국조차 원자력발전의 연료가 되는 농축우라늄 공급의 상당 부분을 러시아에 의존해 왔다. 그러나 AI 발전으로 인한 전기 수요 폭증, 기후변화 대응 등의 차원에서 원자력 발전 수요가 계속해서 증가 추세일 것을 고려한다면, 연료 공급의 안정성 확보는 세 나라에게 모두 매우 중대한 과제가 아니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소형모듈원자로(SMR: Small Module Reactor) 시대를 대비한 HALEU(고순도 저농축 우라늄) 생산 체제 구축도 세 나라 모두에게 절실한 과제이다. 한국은 현재 농축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농축우라늄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일본은 핵무장국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미국과의 합의를 거쳐 농축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일본의 자체 농축 능력은 자국의 원자력 발전 수요를 충족시키기에도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다. 미국의 농축 능력도 한일이 의지할 수준이 전혀 아니다. 따라서 원자력발전의 연료 공급 안정성 확보를 위한 구상은 한미일이 반드시 머리를 맞대고 풀어가야 할 사안이라 하겠다.이 밖에도 에너지저장장치(ESS) 확대나 수소 관련 공급망 구축 등도 장기적으로 한미일 협력을 통해 풀어간다면 상호 보완적인 분야일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기 전 이시바 총리를 먼저 만난 것은 한미일 삼각 협력에 분명 긍정적인 시그널이다. 3500억 달러는 한국 GDP의 약 20%에 달하는 막대한 금액이다. 일본도 5500억 달러를 미국에 투자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런 막대한 투자금액을 가지고 한일이 미국을 두고 서로 경쟁하기만 한다면 제로섬 게임의 함정에 빠지게 될 것이다. 한일 간에는 23일 도쿄에서의 정상회담뿐만 아니라, 정부 간 계속적인 대화를 통해 정책을 서로 조율하고 역할을 분담하는 노력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나아가 대미 투자도 한국의 국익은 물론 한미동맹, 한미일 협력에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임은정

[EE칼럼] 기후변화의 책임은 누가져야 하는가?

혹독한 여름을 지날 때마다 뉴스는 이상기후라고 한다. 홍수가 나고 가뭄이 닥치고 해일이 들고 쓰나미가 일어나도 인간이 화석연료를 과다 사용해서 지구온난화가 발생한 때문이라고 한다. 지구상의 이산화탄소 농도는 1750년대 산업혁명 전에 278ppm에서 꾸준히 올라서 2022년 422.8ppm으로 약 60% 가량 증가했다고 보고된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석탄을 연료로 사용한 증기기관을 통한 대량생산을 하면서부터 인류는 기아와 가난으로부터 구원되기 시작했다. 1859년 미국 사업가 에드윈 드레이크가 기계식 시추장비를 통하여 석유를 상업적으로 추출하면서 저렴한 에너지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미국에서 1821년 천연가스가 개발되고 1920년대 천연가스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파이프라인 네트워크가 구축되어 천연가스의 대량 운송과 도시 지역으로의 공급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미국을 중심으로 천연가스의 LNG 특허가 제출되면서 상업적으로 해상운송을 통하여 전 세계로 유통되기 시작하였다. 이렇듯 대부분의 화석연료는 유럽의 산업혁명으로 시작하여 미국을 거쳐 전 세계의 산업화를 이끌고 선박과 항공 운동 비용을 낮춰 무역을 가능하게 하고 인류의 삶을 윤택하게 하였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화석연료 사용이 지구온난화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화석연료 사용으로 선진국은 더욱 부유해졌는데 이제는 더러워진 지구를 지켜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화석연료를 더 많이 사용해서 부유해지고 오염물질을 많이 배출했던 국가들이 다른 나라들보다 기후변화에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기본이다. 1992년 체결된 최초의 국제기후협약은 국가마다 배출에 대한 역사적 책임이 다르다는 것과 함께 앞으로 배출량을 줄일 수 있는 능력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대한민국이 역사적으로 책임져야 할 양은 1%에 불과하다. 지구를 뜨겁게 만든 많은 책임은 화석연료를 대량 사용한 유럽과 미국이며 누적하면 거의 60%에 육박한다. 그들은 이미 세상을 더럽혔고 그 과정에서 제조업으로 융성했고 부유한 국가들이 되었다. 그러다가 더러워진 산업은 경쟁력이 떨어져서 인건비가 싸거나 기술이 더 좋은 나라로 이전하여 다시 제조업을 시작할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들은 생산기지가 없어서 계속해서 가난한 나라들이 생산한 것을 수입하고 소비하며 배출하고 있다. 중국은 자기네가 쓰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수출하기 때문에 최근 배출량이 늘어서 전체 배출량의 약 33%를 배출하지만 1인당 배출량은 여전히 미국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사하라 사막 이남에 살고 있는 10억 명은 미국 인구 평균의 1/20 정도를 배출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은 여전히 다른 국가들에 대해 “배출 빚"을 지고 있고 이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들 국가들이 욕망을 줄이고 소비를 줄여서 자국의 배출량을 줄이는 노력이 우선되어야 지구는 지켜질 것이다. 타국의 배출량을 줄이도록 압박할 것이 아니라 더 가난한 국가들이 탄소를 덜 배출하면서 경제를 발전할 수 있도록 금융과 기술을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럽과 미국이 오랜동안 배출한 결과로 가난해지거나 해수면에 잠기는 피해 국가들이 당면한 기후 문제에 대처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하는 것이 먼저이다. 선진국은 강자이고 그들은 선한 것처럼 얘기하며 지구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미 부유하고 윤택한 삶을 누리며 온실가스를 내뿜은 결과이고 못살고 이제 막 경제를 부흥하려고 하는 나라들의 경제발전 사다리를 걷어차고 희생을 강요할 뿐이다. 인도가 1인당 gdp가 약 2,600불에 불과한데 그들이 석탄을 쓴다고 지구를 지키지 않는 나쁜 나라라고 아무리 욕해봐야 소용없다. 선진국이 석탄을 안 쓸수록 석탄 가격은 하향 안정화되고 더 많은 석탄발전소를 지어 전기를 충분히 공급하여 산업을 일으키고 경제를 발전시키려고 할 것이다. 2024년도 석탄 사용량은 줄기는커녕 또 한 번의 피크를 찍고 말았다. 온실가스를 줄여 지구를 지키자는 담합은 책임유발자들이 충분한 역할을 하지 않으면 공염불에 불과하다. 조홍종

[EE칼럼] 이 산이 아닌가벼

나폴레옹이 대군을 이끌고 산에 올랐다. “이 산이 아닌가벼." 산 정상에서 외친 그의 한 마디에 절반의 병사가 허탈함에 쓰러졌다. 나폴레옹은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다른 산을 올랐다. “아까 그 산이 맞는가벼." 나머지 병사들마저 기가 막혀 쓰러졌다. 이 우스갯소리야 웃어넘길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연구개발 현장에서는 이런 웃지 못할 일들이 종종 벌어진다. 첫째, 등정할 산을 정하는 데 전략적 성찰이 부족하다. 왜 이 산을 올라야 하는지, 정상에 오르면 무엇을 얻는지 등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발을 들이는 경우가 많다. “남들이 다 오르니까"라는 이유만으로 등반을 시작한다. 선진국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활용도나 미래 수요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대형 연구시설을 짓거나, 경제성이 부족한 사업을 무리하게 강행하는 사례가 그렇다. 이는 예산 낭비를 넘어,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할 결정적 기회를 놓치는 더 큰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 둘째, 쉬운 산만 오르려 한다. 실패하면 안 된다는 압박 속에, 불확실하지만 잠재력이 큰 미지의 봉우리를 외면한다. 대신 먼저 간 사람의 발자국이 선명하여 안전한 등산로만 찾는다. 논문이나 특허와 같은 단기적인 성과에 매몰된 평가 제도가 이러한 풍토를 더욱 부추긴다. 이런 풍토에서는 '최초의 개척자(First Mover)'는 사라지고, 남을 따라 하는 데 급급한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만 남게 된다. 이는 결국 스스로 길을 낼 능력을 퇴화시켜 도전 정신이 거세된 '눈치꾼 연구자'만 양산하는 결과를 낳는다. 셋째, 정상까지 완주한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어떤 원자로는 1980년대부터 연구를 시작했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서류 속 개념으로만 존재한다. 완주(건설)를 해봐야만 위험 구간은 어디인지, 어떤 장비가 필수적인지, 체력 안배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전 과정을 파악할 수 있다. 설계도에 담을 수 없는 암묵지나 위기 대응 능력, 그리고 팀 전체에 축적되는 성공의 DNA는 오직 완주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무형의 자산이다. 성공과 실패를 막론하고 끝까지 수행해 본 경험의 축적 없이는, 경험 부족이라는 실패의 굴레를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고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우리의 연구개발 철학과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혁신해야 한다. 이는 곧 올라야 할 산을 제대로 정하고(전략), 과감하게 도전하며(도전), 기어코 정상에 도달하는(완주) 경험을 축적하는 것이다. 이 혁신의 핵심은 사람이다. 우리는 세 종류의 핵심 인재를 길러내는 데 집중할 필요가 있다. 먼저, 우리가 올라야 할 '보물산'을 알려주는 전략가를 키워야 한다. 이들은 기술 동향, 산업 구조와 사회적 요구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국가 차원의 연구개발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이다. 단순히 유행을 좇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잠재력과 우리의 기술 역량 등을 냉철하게 분석하여 '선택과 집중'의 묘를 발휘해야 한다. 이들이 “저 산에 우리가 찾던 금맥이 있다"라고 정확히 짚어줄 때, 우리의 노력은 비로소 올바른 방향을 잡고 낭비를 줄일 수 있다. 다음으로, 그 험준한 산을 직접 오를 용감한 개척자를 길러내야 한다. 개척자에게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용기가 필수적이다. 이러한 용기는 실패해도 괜찮다는 사회적 믿음과 재도전의 기회를 보장하는 제도에서 나온다. 성공 확률이 낮더라도 과감히 도전한 명예로운 실패를 격려하고, 그 과정에서 얻은 교훈을 다음 도전을 위한 자산으로 삼는 문화를 정착시키는 한편, 실패를 딛고 마침내 정상에 오른 이에게는 합당한 보상을 제공함으로써 더 큰 도전을 이끌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등반의 전 과정을 지휘하고 완주를 이끄는 시스템 디자이너가 필요하다. 이들은 전략가가 정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기술과 자원, 그리고 개척자들을 최적으로 조합하고 전 과정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원정대장과 같다. 개별 연구의 성과는 훌륭하지만, 이것들을 하나로 엮어서 우리 사회와 경제가 필요로 하는 종합적인 결과물로 만들어 내는 역량과 경험이 부족한 우리 현실에 꼭 필요한 존재다. 이제 우리는 시류에 휩쓸리는 연구를 버리고, 국가 미래를 여는 연구개발로 나아가야 한다. 전략가가 방향을 잡고, 개척자는 담대하게 도전하며, 시스템 디자이너가 이들의 완주를 이끌 때, 우리는 더 이상 “이 산이 아닌가벼"라며 방황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이 산이 맞는가벼!"라는 확신과 함께 과학기술 강국의 정상에 설 수 있다. 문주현

[EE칼럼]폭염과 폭우, 전력망을 시험하는 복합 기후 리스크

지난 4월,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해 장마는 한 달 가까이 지속될 것"이라는 예측이 올라와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그 예측은 빗나갔다. 장마는 기상관측 이래 최악의 '마른장마'로 기록되며 초단기에 끝났고, 한반도는 곧바로 폭염에 휩싸였다. 전년 대비 20일이나 빠른 폭염 특보가 전국에 발령되었고, 7월 7일에 최대전력수요가 90GW를 돌파한 데에 이어, 7월 8일에는 수요가 95GW까지 치솟으며 역대 7월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이는 평년 7월 말~8월 초 수준으로, 폭염이 전력망에 가하는 부담을 여실히 보여 준다. 그런데 폭염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한반도는 예기치 못한 또 하나의 기후 재난을 맞았다. 7월 16일부터 쏟아진 기록적 폭우는 19명의 사망자와 9명의 실종자를 발생시켰고, 1만 3천 명 이상이 긴급 대피했다. 41,000여 가구가 정전을 겪었으며, 일부 변전소와 배전망은 침수 피해로 기능이 마비됐다. 불과 며칠 사이에 폭염과 폭우가 번갈아 닥치며, 기후위기의 '급변성'이 전력계통의 복합 취약성을 드러낸 셈이다. 폭염은 변압기와 차단기의 과열로 절연물의 열화를 촉진해 고장 위험을 높인다. 송배전선로의 처짐 현상은 허용 전류를 감소시키고, 전압 강하나 출력 제한의 원인이 된다. 반면 폭우는 지중화된 배전망과 변전소를 침수시켜 설비를 정지시키고, 낙뢰·산사태 등으로 송전선로를 단절시킬 수 있다. 특히 장기간 침수된 변전소는 단순한 건조 작업만으로는 복구가 어렵고, 주요 설비를 교체해야 하므로 복구 기간이 수주 이상 길어질 수 있다. 최근 피해 지역에서는 일부 마을이 배전선로 단절로 수일간 고립되었고, 통신마저 끊기면서 복구 인력 투입이 지연됐다. 전력계통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회기반시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교통·통신·상하수도와 함께 복합 붕괴 위험이 크다. 이번 폭우는 전력계통이 단일 장애가 아닌 '복합 인프라 위기' 속에서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줬다. 해외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있다. 2021년 독일과 벨기에에서는 기록적 폭우로 하천이 범람해 변전소 수십 곳이 침수되었고, 20만 명 이상이 정전을 겪었다. 이 사건은 전력망이 '물리적 홍수 위험지도'와 연동해 재배치 및 보강 설계를 해야 한다는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지난 4월 스페인에서 발생한 대규모 정전 역시 복합 요인의 결과였다. 약 150만 가구의 전력 공급이 끊긴 원인은 “과전압에 의한 연쇄적 계통 불안정"이었다. 전압이 급격히 상승했음에도 이를 흡수하지 못해 발전기들이 연쇄 차단되었고, 태양광·풍력 비중이 60%에 달하는 상황에서 전압 안정성을 유지할 동기형 설비도 부족했다. 변동성 높은 재생에너지 출력 변화와 송전선로 과열 등 여러 요인이 겹쳐 계통이 붕괴한 것이다. 스페인의 사례와 이번 한국의 폭염·폭우 경험은, 전력계통이 기후위기의 '다중 스트레스'에 동시에 노출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기후가 예측 불가능한 속도로 변하면서, 계통은 열·수해·재생에너지 변동성 등 복합적인 위협을 받는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실시간 계통 안정성 모니터링 시스템 구축, ▲고온·침수 등 극한 환경에서도 견디는 전력기기 개발, ▲재생에너지 변동성을 제어할 수 있는 보조 장치(ESS·동기형 콘덴서 등) 확대, ▲변전소 방수·지반 보강 및 배전망 지중화, ▲재난 시 신속 복구가 가능한 예비 장비 확보가 필요하다. 또한 전력계통 계획 단계에서부터 폭염·폭우를 모두 반영한 '복합 기후 리스크 시나리오' 기반의 설계·운영이 필수다. 전력망은 단지 에너지를 전달하는 기술적 수단이 아니라, 국민의 일상과 국가 경제를 지탱하는 핵심 기반이다. 폭염이든 폭우든, 기후위기가 던지는 경고를 외면한다면 다음 대규모 정전은 스페인이 아닌 우리가 겪게 될지도 모른다. 손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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