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E칼럼] 가격이 신호가 될 때 행동이 바뀐다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26.02.19 10:58

박성우 한국에너지공단 기획조정실장

박성우 한국에너지공단 기획조정실장

▲박성우 한국에너지공단 기획조정실장

필자가 2019년에 덴마크 출장을 갔을 때의 일이다. 현지 교민 아주머니께서 가이드를 하는 중간에 스마트폰 앱으로 전기요금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전기요금이 낮거나 마이너스인 시간에 세탁기나 식기세척기를 돌린다고 하였다. 덴마크의 대부분 가정은 시간대별 가격을 기준으로 전기요금이 부과된다. 예를 들어, 2025년 7월에는 시간대별 최고가와 최저가의 차이가 3.56크로네(약 830원)에 달했다. 스마트폰 앱 알람이 울리면 주부는 세탁기를 돌리고, 직장인은 주차장에 세워둔 전기차의 충전 버튼을 누른다. 현재 북유럽의 재생에너지 강국 덴마크에서는 이런 풍경이 일상이 되었다.


그린파워 덴마크(Green Power Denmark)의 분석에 따르면, 가정에서 전기요금이 저렴한 시간대에 맞춰 사용량을 조절하면 요금을 최대 20%까지 절약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덴마크 중앙은행의 연구에서는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가구가 전기요금이 오를 때 소비량을 크게 줄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평균적으로 전기요금이 1크로네(약 233원) 인상될 때마다 소비는 2.6%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가격이 소비자에게 강력한 행동지침 역할을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재생에너지의 비중이 커질수록 전력망 강화나 에너지 저장 용량 확대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에너지 소비 행태의 현대화다. 이에 덴마크는 전력 수요의 유연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정책을 펴고 있다. 그 중심에는 에너지 데이터 서비스(Energi Data Service)와 같은 투명한 정보 공개가 있다. 국영 전력회사가 제공하는 실시간 도매가격 데이터는 안델(Andel), 노를리스(Norlys)와 같은 민간기업에 의해 세련된 앱으로 가공된다. 소비자들은 내일의 요금을 미리 확인하고, 요금이 비싼 피크 시간대는 피하고 재생에너지 생산이 많아 요금이 낮은 시간대에 전기 소비를 늘린다. 이는 전력 인프라에 대한 과잉 투자를 막고 재생에너지의 출력제어(curtailment)를 줄이는 결과로 이어진다.




한국의 상황은 어떤가. 우리는 세계 최고 수준의 ICT 인프라를 보유하고도 에너지 분야에서만큼은 아날로그식 접근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독점적 전력 공급 구조와 경직된 요금 체계는 소비자에게 아무런 가격 신호를 주지 못한다.


현재 한국의 주택용 요금제는 사용량에 따른 누진제에 머물러 있다. 전력 생산 단가가 비싼 저녁 시간대나, 태양광 발전이 많아 출력제어가 일어나는 낮 시간대나 소비자에게 적용되는 요금은 거의 동일하다. 가격이 시장의 수급 상황을 반영하지 못하니, 소비자들은 굳이 불편을 감수하며 사용 시간을 조절할 이유가 없다. 이는 결국 피크 시간대 발전을 위해 비용이 많이 드는 가스 발전을 돌리게 만들고, 재생에너지 발전을 멈추게 만드는 비효율을 초래한다.


덴마크의 사례를 우리 현실에 이식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 실시간 변동 요금제의 도입과 소비자 선택권 확대를 검토해야 한다. 제주도에서 시범적으로 시행 중인 계절별‧시간대별(계시별) 선택요금제의 본격 도입을 통해 소비자가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요금제를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한다. 특히 공급 과잉으로 출력제어가 빈번한 제주와 호남 지역에서는 가격 신호가 더욱 절실하다. 계시별 요금제는 가격 신호를 통해 소비자가 스스로 수요를 조정하게 함으로써 출력제어를 완화하기 때문이다.


에너지 전환은 단순히 발전원을 바꾸는 작업이 아니다. 공급 중심의 패러다임을 수요관리라는 현대적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거대한 흐름이다. 덴마크의 사례는 투명한 데이터와 유연한 요금제가 소비자에게 스마트한 절약의 동기를 부여하고, 전력 시스템 전체의 효율을 높일 수 있음을 증명한다. 가격 신호가 살아나고 소비자의 선택권이 보장될 때, 전력망의 효율성은 높아지고 재생에너지는 비로소 우리 일상의 지속 가능한 동력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이제는 경직된 요금 체계의 틀을 깨고 전력시장의 고도화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을 시작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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