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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히메를 걷다 ②] 흙벽 골목에서 강변 다실까지…우치코·오즈의 ‘오래된 하루’

우치코의 옛 거리는 벽부터 천천히 보게 한다. 흰색 사이로 황토빛이 섞이고 창문 위와 지붕 아래에는 작은 장식이 남아 있다. 고개를 들어 건물의 모양을 살피다가 다시 문턱과 계단으로 시선을 내린다. 지난 10월 21일 오전 찾은 일본 에히메현 요카이치·고코쿠 거리는 그렇게 걸음보다 눈이 바쁜 곳이었다. 그러다 이발소 앞에서 일행의 질문이 이어졌다. 옛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남겨 놓은 곳인지 묻자 가이드는 “실제로 운영하고 있는 이발소"라고 답했다. 얼마나 오래 영업했는지 확인하니 40년이라는 설명이 돌아왔다. 지나온 건물들이 조금 달라 보였다. 여행자에게는 사진으로 남길 풍경이지만 이곳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일을 하고 손님을 맞는 오늘의 거리였다. 우치코를 살찌운 것은 목랍이다. 옻나무과 나무의 열매에서 얻는 식물성 왁스로 양초 등을 만드는 데 쓰였다. 그 생산과 거래로 번성한 마을에는 상가와 부유한 상인들의 저택이 남았다. 약 600m에 이르는 요카이치·고코쿠 거리는 1982년 중요 전통적 건조물군 보존 지구로 선정됐다. 천천히 걸으면 건물의 크기뿐 아니라 부를 표현하던 방식까지 눈에 들어온다. 가이드는 위아래로 움직이는 문을 보여주고 흙벽의 색을 짚었다. 건물 안에서는 벽이 만들어지는 과정도 살폈다. 대나무를 바탕으로 흙과 짚을 섞어 여러 번 바르고, 안쪽의 거친 재료 위에 바깥의 고운 표면을 만든다. 조금 전 거리에서 보았던 벽 한 면에 생각보다 많은 층이 들어 있었다. 계단에는 또 다른 궁리가 숨어 있었다. 발을 딛는 자리 아래로 수납 공간이 이어지는 상자 형태였다. 위층으로 오르는 길과 살림을 넣는 가구가 한 몸이다. 가이드는 옮길 수도 있다고 했다. 옛집의 재미는 이런 곳에 있다. 처음에는 익숙해 보이던 물건이 설명을 듣고 나면 새롭게 보인다. 거리로 나오자 이번에는 벽면의 장식이 발길을 잡았다. 회반죽을 흙손으로 다뤄 만든 '고테에'다. 벽을 마무리하는 도구로 그림까지 만드는 장인의 솜씨가 집주인의 취향을 드러낸다. 낮게 눌린 듯한 2층과 상대적으로 높아진 층고를 비교하며 걸으면 에도 시대에서 메이지 시대로 이어지는 건물의 차이도 만날 수 있다. 하가 가문의 흔적을 따라 가미하가 저택으로 향했다. 들어가기 전 가이드는 지붕의 무게를 받치는 기둥과 넓은 부엌을 눈여겨보라고 했다. 물과 관련된 지붕 장식에는 화재를 피하려는 바람이 담겼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크게 지은 집에 살던 사람들도 불이 나지 않기를 빌었다. 화려한 장식의 의미를 알고 나면 오래전 집주인의 마음이 조금 가까워진다. 오후에는 오즈로 옮겨 갔다. 히지카와 강 가까이, 오하나한 거리의 수로에서 잉어가 움직였다. 가이드는 주변 주민들이 먹이를 주며 돌본다고 설명했다. 물고기를 따라 잠시 시선을 낮췄다가 다시 옛집들이 이어진 길로 향했다. 이곳에서는 마을에 머무는 방식도 특별했다. '니포니아 호텔 오즈 조카마치'는 골목 곳곳에 흩어진 옛 건물을 고쳐 만든 호텔이다. 객실과 라운지 등을 나눠 놓아 한 건물 안에서 모든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길을 걷다가 방으로 돌아가고, 다시 나와 주변 가게와 음식점을 찾는 여행을 그려볼 수 있다. 마을을 구경하는 시간과 호텔에 머무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방식이다. 먼저 둘러본 라운지는 목랍을 만들던 공장이었다. 숙박객이 커피와 감귤 주스, 주류 등을 이용하며 쉬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우치코에서 들었던 목랍 이야기가 이곳에서도 따라왔다. 옛 산업의 흔적을 보고 곧바로 지나치는 대신, 그 안에 앉아 잠시 쉬도록 만든 공간이었다. 이어서 본 객실은 공장 직원들의 기숙사를 손본 곳이었다. 2층에 침실이 있고 아래층에 욕실이 놓였다. 일행은 층을 오르내리며 구조를 살피고, 몇 명까지 묵을 수 있는지 물었다. 안내받은 방의 정원은 두 명. 더 많은 인원이 함께 온다면 정원이 다른 객실을 선택해야 한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오래된 벽을 남겨 둔 이유를 묻자 가이드는 “최대한 지킬 수 있는 것은 지키는 것이 이곳의 콘셉트"라고 말했다. 원래 건물이 달라 객실의 모습도 제각각이다. 반듯하게 같은 모양을 반복하는 호텔에 익숙한 여행자라면 어떤 집에서 하룻밤을 보낼지 고르는 일부터 여행의 즐거움이 될 듯했다. 거리의 다른 건물은 위층을 객실로, 아래층을 상업 공간으로 쓰고 있었다. 숙박객이 골목을 오가며 가게에 들르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우치코에서는 오래된 이발소가 계속 손님을 맞고, 오즈에서는 옛집이 새로운 여행자를 맞는다. 두 마을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건물의 다음 시간을 이어가고 있었다. 히지카와 강변의 가류산장에서는 보는 속도를 한 번 더 늦춰야 했다. 목랍 무역으로 부를 쌓은 고치 도라지로가 조성한 별장이다. 산장에 들어서자 안내자는 돌을 쌓은 담부터 짚었다. 강의 흐름과 배, 달을 떠올리게 하는 구성이라는 이야기였다. 건물에 닿기도 전에 살펴볼 것이 생겼다. 본채 가류인의 '세이스이노마'는 여름을 생각하며 만든 방이다. 북쪽을 향해 바람이 통하게 하고 천장을 다른 방보다 높였다. 방의 방향과 높이에 계절을 견디는 궁리가 담겼다. 장식과 창문을 하나씩 살피는 동안, 이곳에 사는 사람은 여름에 어디에 앉아 쉬었을지 상상하게 됐다. '잇시노마'에서는 발밑에 이야기가 있었다. 다다미를 걷으면 전통 공연인 노의 무대로 쓸 수 있고, 바닥 아래에는 소리가 울리도록 도자기 항아리를 놓았다고 한다. 눈앞의 목재와 창만으로 방의 쓰임을 다 알 수는 없었다. 안내를 따라가며 보이지 않는 구조까지 떠올리는 것이 이 산장을 둘러보는 재미다. 정원을 지나 만나는 후로안은 강을 내려다보는 벼랑의 다실이다. 건물을 배에 비유하고 대나무를 엮은 천장을 배 밑바닥 같은 형태로 만든 공간이다. 공식 해설에는 달빛을 받아들이는 장치에 관한 이야기도 담겨 있다. 한낮에 찾은 다실에서 밤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창밖의 풍경뿐 아니라 다른 시간에 찾아올 빛까지 건물에 담으려 했던 셈이다. 가류산장에서는 풍경을 보는 일과 집을 보는 일이 자꾸 겹친다. 강을 바라보다가 창의 모양을 살피고, 방을 둘러보다가 바깥에서 들어올 바람을 생각한다. 안내 없이 지나쳤다면 알기 어려웠을 작은 장치들이 머무는 시간을 늘린다. 우치코의 흙벽에서 시작해 오즈의 다실에 이르기까지 이날의 여행은 오래된 집들을 따라 이어졌다. 그 가운데에는 여전히 손님을 받는 이발소도, 이제 여행자를 재우는 기숙사도 있었다. 돌아보고 나니 기억에 남는 것은 건물의 연대만이 아니었다. 문을 여닫고, 벽을 고치고, 다음 손님을 맞으며 그 집의 시간을 이어 가는 사람들의 생활이었다. 취재 지원: 일본국 에히메현청(日本国 愛媛県庁) 일본 에히메현 키타군 우치코·오즈시=박규빈 기자 kevinpark@ekn.kr

[에히메를 걷다 ①] 성문을 지나 온천으로…청주에서 만난 마쓰야마의 ‘느린 시간’

마쓰야마에서는 성문 앞에서 걸음을 늦추고 온천에 들어서서는 시계를 잠시 잊어도 좋다. 높은 돌담을 따라 읽는 옛이야기와 목조 건물의 복도를 돌아 만나는 작은 방들이 하루를 채운다. 유명 관광지를 바삐 오가는 여행에 익숙해졌다면 성과 온천을 번갈아 들여다보는 이 도시의 하루가 제법 다르게 다가온다. 지난 10월 18일부터 21일까지 일본 에히메현을 찾았다. 출발지는 청주국제공항. 이곳을 거점으로 하는 에어로케이의 마쓰야마행 부정기편은 만석에 가까운 탑승률을 보이며 이번 여행의 길을 열었다. 도쿄와 오사카를 지나 조금 다른 일본을 만나고 싶은 사람들에게 에히메는 오래된 건물과 그 안에 남은 생활을 천천히 펼쳐 보였다. 첫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만난 에히메현 관계자도 그 점을 이야기했다. 대도시들을 여행한 뒤 새로운 목적지를 찾는 한국인들이 비교적 한적한 마쓰야마에 관심을 보인다는 설명이었다. 노면 전차와 온천, 공항에서 멀지 않은 시내를 이 도시의 매력으로 꼽았다. 그는 전용 차량으로 공항에서 시내까지 약 25~30분이 걸린다며 “짧은 시간에 콤팩트하게 도시를 즐길 수 있다"고 말했다. 청주 노선을 향한 기대도 컸다. 앞서 운항한 전세기의 호응이 추가 운항을 검토하는 바탕이 됐다는 설명과 함께 목표 탑승률로 80%를 제시했다. 처음 온 손님에게 에히메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 그 손님이 다시 찾아올 이유는 무엇인지. 식탁 위에서 오간 질문을 품고 이튿날 도시를 둘러봤다. 19일 오전 찾은 마쓰야마성은 시내 중심부 가쓰야마에 자리한다. 1602년 가토 요시아키가 축성을 시작했고, 화재와 재건을 거친 현재의 천수각은 에도시대 말기에 세워졌다. 일본에 남아 있는 '현존 12천수' 가운데 하나다. 400년을 넘긴 성의 역사에는 건물을 세우고, 잃고, 다시 일으킨 시간이 함께 들어 있다. 마쓰야마성을 보는 재미는 천수각에만 있지 않다. 문 하나를 지날 때마다 옛 성을 지키던 이들의 계산을 떠올릴 수 있다. 문짝이 없는 도나시몬은 적을 안쪽으로 유도하고, 돌담 뒤에 숨은 가쿠레몬은 쓰쓰이몬으로 다가온 적의 옆과 뒤를 노리는 구조다. 오늘의 여행자가 사진 속에 담는 성문은 한때 낯선 사람의 발걸음을 경계하던 시설이었다. 성의 윤곽을 크게 바라보다가 문과 문 사이를 살피면 보이지 않던 것이 드러난다. 길이 꺾이는 곳, 돌담에 가려지는 공간, 쉽게 지나칠 만한 작은 문에도 이유가 있다. 천수각 내부에 전시된 갑옷과 칼, 고문서는 그 공간을 오갔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탠다. 오후에는 도고온천으로 향했다. 먼저 들른 아스카노유는 2017년 문을 연 시설이다. 오래된 본관과 함께 둘러보면 도고온천을 즐기는 서로 다른 방법이 보인다. 현장에서 들은 설명에 따르면 본관과 쓰바키노유, 아스카노유는 같은 온천수를 사용한다. 어떤 건물에서, 어떤 방식으로 쉬고 싶은지가 선택의 기준이 된다. 아스카노유 2층 휴게 공간에서는 일행의 시선이 발밑으로 향했다. 다다미의 감촉과 나무 향을 두고 감탄이 오갔다. 차와 다과를 즐기며 쉴 수 있다는 설명이 이어지자 목욕을 마친 뒤 이곳에 앉아 있을 시간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방마다 놓인 에히메의 전통 공예품도 둘러볼 거리다. 온천 여행의 즐거움에는 물에 몸을 담그는 시간뿐 아니라 그 뒤에 느긋하게 쉬는 시간도 포함된다. 이동이 불편한 여행자를 위한 배려도 소개됐다. 입구의 단차를 줄이고 엘리베이터를 갖췄고 욕실용 휠체어도 빌릴 수 있다는 안내였다. 가족이나 일행끼리 이용하는 특별 욕실은 본관의 황실 전용 욕실인 유신덴을 본떠 꾸몄다. 본관에서 관람하는 공간의 모습을 이곳에서는 목욕을 하며 경험할 수 있다. 방문 전에는 이용 코스를 구분해 두는 편이 좋다. 취재 당시 배부된 무료 쿠폰은 아스카노유 1층 실내탕과 노천탕에 사용할 수 있었지만 차와 다과를 곁들이는 2층 휴게 코스나 특별 욕실까지 포함하지는 않았다. 온천욕만 할지, 휴식까지 즐길지에 따라 머무는 방식이 달라진다. 본관 앞에서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겹겹의 지붕 위에는 백로 장식이 있다. 다리를 다친 백로가 온천물에 발을 담갔다가 나았다는 전설을 듣고 나면 작은 새 한 마리도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안내자가 지붕 위의 북과 백로를 설명하던 중 비를 피해 일행을 안으로 이끌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서자 바깥에서 보던 건물의 모습이 복도와 계단, 여러 방으로 나뉘어 다가왔다. 1894년 지어진 목조 3층 본관은 올해로 132년을 맞았다. 1994년 국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에서 지금도 온천을 즐길 수 있다. 관람객에게는 오래된 건축이고, 목욕하러 온 사람에게는 오늘 이용하는 온천이라는 점이 이곳을 특별하게 만든다. 유신덴에서는 돌로 만든 욕조와 황실을 위해 꾸민 공간을 살폈다. 일반 관람객이 이곳에서 목욕할 수는 없다. 앞서 아스카노유에서 본 특별 욕실이 어떤 모습을 본뜬 것인지, 두 곳을 함께 둘러보니 한층 분명해졌다. 복도를 따라가다 보면 문학의 흔적도 만난다. 마쓰야마에서 교사로 지냈던 나쓰메 소세키와 소설 '도련님'을 떠올리게 하는 '봇짱노마'다. 성의 역사에서 시작한 하루가 온천의 전설을 지나 소설가의 기억으로 이어졌다. 안내자는 세 시설의 온천수가 같더라도 역사적 의미를 생각하면 본관을 한번 둘러볼 것을 권했다. 마쓰야마에서는 이렇게 건물 하나를 보고 나오는 데도 이야기가 여럿 따라온다. 성문의 생김새를 다시 떠올리게 되고, 온천 지붕 위 백로의 의미를 알게 된다. 여행의 기억은 방문지의 개수보다 그런 작은 발견으로 오래 남기도 한다. 도심이 선사하던 고즈넉한 여유는 정작 관문인 마쓰야마 공항 문턱을 넘지 못했다. 여행자가 온천수에 몸을 담그며 자발적으로 누리는 느긋함과 좁은 터미널에 갇혀 허비하는 대기 시간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시내와 공항이 지척이라는 지리적 이점조차 입·출국장을 빠져나가는 데 걸리는 긴 시간 앞에서는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특히 귀국길에 마주한 출국 절차는 인천국제공항의 신속한 시스템에 익숙한 여행객에게 적잖은 답답함을 안겼다. 체크인 카운터 바로 앞에 놓인 검색 기계에 위탁 수하물을 한 사람씩 일일이 통과시켜야만 수속을 밟을 수 있는 구조 탓에 짐을 부치는 단계부터 심한 병목 현상이 빚어졌다. 탑승 게이트로 향하는 보안 검색대의 경직된 운영 방식 역시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다. 대다수 국제공항에서는 100㎖ 이하의 향수나 화장품 등 소량 액체류의 경우 기내 반입 가방에 넣어도 비교적 유연하게 통과시켜 주는 편이다. 반면 마쓰야마 공항은 허용 용량 이하의 액체류라도 예외 없이 단 하나의 지퍼백에 모두 모아 담지 않으면 현장에서 강제로 폐기 처분했다. 글로벌 공항들의 보편적인 눈높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융통성 없는 일처리가 마쓰야마를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 씁쓸한 뒷맛을 남긴 셈이다. 마쓰야마가 한국을 비롯한 외국인 관광객들이 거듭 찾고 싶은 매력적인 도시로 거듭나려면 이처럼 더디고 불편한 출입국 체계부터 대대적으로 손질해야 한다. 공항 운영 주체와 관계 당국은 수하물 위탁과 보안검색 등 과도하게 시간이 지체되는 절차를 재점검하고 여객이 몰리는 시간대의 처리 역량 확충과 동선 효율화, 외국어 안내 강화에 나설 필요가 있다. 고성과 온천에서 차곡차곡 쌓은 좋은 기억이 공항에서의 피로감과 실망으로 퇴색되지 않도록 살피는 것 또한 손님맞이의 중요한 일부다. 모든 여행의 설레는 첫인상과 여운이 남는 마지막 인상은 결국 공항에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취재 지원: 일본국 에히메현청(日本国 愛媛県庁) 일본 에히메현 마쓰야마시=박규빈 기자 kevinpark@ekn.kr

3500억원 투자에 日이 절반 이상 지원…이재용이 요코하마로 간 이유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삼성전자 창립 57주년인 1일 국내 사업장이 아닌 일본 요코하마의 첨단 반도체 패키징 연구거점을 찾은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삼성전자가 3500억원을 투자하는 연구시설이지만 투자액의 절반 이상을 일본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지원하고, 주변에는 세계적인 반도체 소재·부품·장비기업이 밀집해 있다. 이 회장의 일본행은 단순한 해외 현장경영을 넘어 글로벌 반도체기업을 끌어들이는 일본의 투자환경을 보여준다는 평가가 나온다. 인공지능(AI) 반도체 경쟁의 무게중심이 미세공정에서 첨단 패키징으로 확장되는 가운데 보조금과 소부장 생태계, 기술 검증 속도가 기업의 연구개발 거점을 결정하는 핵심 조건으로 떠오르고 있다. ◇ 日 공공자금, 삼성 투자액의 최대 56% 2일 삼성전자에 따르면 이 회장은 일본 요코하마의 '어드밴스드 패키지 랩(APL)'을 방문해 차세대 패키징 소재·공정 기술 개발 현황을 점검했다. 일본 소부장기업과의 협력 확대 방안도 논의했다. APL은 지난 9월 공식 개소한 삼성전자의 일본 내 첨단 패키징 연구거점이다. 삼성전자는 2024년부터 2028년까지 5년 동안 400억엔, 약 3500억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이곳에서는 웨이퍼 본딩과 유리기판 등 차세대 소재·공정뿐 아니라 저전력·고성능 AI 반도체를 구현하기 위한 새로운 패키징 구조를 연구한다. 주목되는 부분은 일본의 지원 규모다. 일본 정부는 삼성전자 APL에 최대 200억엔을 지원하고 요코하마시도 25억엔을 별도로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원 한도를 모두 적용하면 공공자금은 총 225억엔으로, 삼성전자 전체 투자액의 56.3%에 해당한다. 원화로 환산하면 약 2000억원 규모다. 삼성전자가 실제로 받는 최종 금액은 투자 집행과 지원 조건 충족 여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연구개발 거점 투자비의 절반 이상을 정부와 지자체가 부담하는 구조다. 공장뿐 아니라 연구시설까지 대규모 보조금으로 유치하려는 일본의 반도체 산업정책이 반영됐다. ◇ 소부장 옆에서 바로 시험…두 달 걸리던 검증 단축 삼성전자가 요코하마를 선택한 또 다른 이유는 소부장 생태계다. 일본에는 고성능 반도체 기판을 생산하는 이비덴을 비롯해 반도체 장비업체 도쿄일렉트론, 웨이퍼 절단·연마장비 분야의 디스코 등 첨단 패키징 관련 기업이 밀집해 있다. 삼성전자는 일본 기업 약 50곳과 협력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APL은 이들 기업이 개발한 소재와 장비를 현장에서 곧바로 시험하고 시제품까지 제작하는 역할을 맡는다. 일본에서 개발한 소재를 한국으로 가져와 화학물질 승인과 수출입 절차를 거쳐 평가하던 방식과 비교하면 최대 두 달가량 검증기간을 줄일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첨단 패키징은 그래픽처리장치(GPU)와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서로 다른 반도체를 하나로 연결하는 기술이다. 칩 간 데이터 전송속도뿐 아니라 전력 소비와 발열을 좌우한다. 삼성전자가 메모리와 파운드리, 패키징을 묶은 '원스톱 솔루션'을 강화하려면 소재·장비업체와의 공동개발 및 검증시간 단축이 필수적이다. 경쟁사인 대만 TSMC도 일본의 소부장 생태계를 활용하고 있다. TSMC는 2022년 이바라키현 쓰쿠바에 3D 반도체 패키징 연구센터를 열었다. 일본 정부는 총사업비 약 370억엔 가운데 약 190억엔을 지원했고, 이비덴·아사히카세이·디스코 등 일본 기업 20여곳이 사업에 참여했다. 삼성전자와 TSMC 모두 투자비 절반가량을 지원받아 일본에 패키징 연구거점을 마련한 것이다. ◇ 국내 생산 이전 아닌 한·일 연구 분업 삼성전자의 일본 투자를 국내 패키징 기능의 이전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다. 삼성전자는 APL이 국내 반도체연구소 산하 패키징 조직과 서로 다른 분야를 연구하며 양측의 협업을 통해 기술개발 속도를 높이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국내에서는 천안·온양사업장이 HBM 후공정과 첨단 패키징 양산을 담당하고, 일본 APL은 소재·장비업체와의 요소기술 공동개발과 사전 검증에 집중하는 방식이다. 이 회장도 지난 6월 천안사업장을 찾아 HBM 후공정과 패키징 경쟁력을 점검한 바 있다. 다만 삼성전자의 요코하마 투자는 반도체기업의 투자 결정을 끌어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보여준다. 부지 제공이나 대규모 투자계획 발표만으로는 부족하고, 보조금과 전문인력, 소부장기업의 집적, 신기술을 빠르게 시험할 수 있는 규제·행정환경이 함께 갖춰져야 한다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현지 연구인력을 100명 이상으로 확대하고 APL을 일본 소부장기업과 삼성의 반도체 역량을 연결하는 글로벌 연구협력 거점으로 육성할 방침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요코하마의 인력과 산·학·연 인프라를 활용해 APL을 연구협력 허브로 발전시킬 계획"이라고 말했다. 전지성 기자 jjs@ekn.kr

한화오션, 수입 의존 잠수함 ‘수평 발사 장치’ 국산화…ADD와 10년 협력 결실

한화오션이 수입에 의존해 온 잠수함용 수평 발사 장치를 국내 기술로 개발했다. 국방과학연구소(ADD)와 10년간 협력한 성과로, 핵심 무장 장비의 조달 비용과 납기를 줄이고 차세대 잠수함에 적용할 기술 기반을 확보했다. 한화오션은 ADD와 함께 '워터램(Water Ram) 방식 수평 발사 장치'의 독자 개발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이는 잠수함 내부에 실린 어뢰 등 주요 무장을 함 밖의 바다로 밀어내는 장비다. 이번에 개발한 장치는 수압으로 발사체를 밀어내는 워터램 방식을 적용했다. 개발의 핵심은 무장을 밀어내는 힘을 정밀하게 조절하는 데 있다. 한화오션은 발사 과정에서 발생하는 힘을 제어해 어뢰 등이 정해진 속도로 안정적으로 발사되도록 하는 기술을 확보했다. 수중 작전 환경을 고려한 안전성과 내구성도 설계에 반영했다. 깊은 바닷속에서 발사관 외부 문을 열고 무장을 발사할 때 가해지는 높은 수압을 견디도록 구조적 안전성을 확보하고, 강한 충격에 버티는 내충격 성능을 갖추도록 개발했다. 오작동을 방지하기 위한 여러 단계의 안전 장치를 복합적으로 적용했고 구조를 단순화해 유지·보수와 운용 편의성도 높였다. 한화오션은 이번 국산화로 해외 장비 도입에 들어가는 비용을 절감하고 조달 기간을 단축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잠수함 형태에 맞춰 발사 장치를 설계하는 데 필요한 발사력 해석 기술도 확보했다. 이를 토대로 다양한 잠수함에 대응하는 관련 장비 개발을 이어갈 계획이다. 향후 차세대 잠수함 탑재와 해외 수출도 추진 방향으로 제시했다. 핵심 무장 장비를 국내 기술로 설계·제작할 수 있게 된 만큼 잠수함 전력 강화와 수출 경쟁력 향상에 기여할 것이라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김건호 한화오션 방산기술연구센터장(상무)은 “이번 개발을 통해 축적한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잠수함 핵심장비의 완성도를 높이고, 차세대 잠수함에 필요한 관련 기술을 지속적으로 고도화해 대한민국 해군력 강화에 기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박규빈 기자 kevinpark@ekn.kr

한화그룹, 美 해군 함정 첫 수주…3575억원 상륙함 계약에 추가 3척 옵션

한화그룹이 미국 필리 조선소 인수 이후 처음으로 미 해군 함정 건조 사업을 따냈다. 약 3575억원 규모의 중형 상륙함(LSM) 1척을 건조하는 계약으로 추가 3척에 대한 옵션도 포함됐다. 미국 현지 조선소 확보와 인력·기술 투자를 바탕으로 상선 중심의 사업 영역을 해군 함정으로 넓히며 후속 수주를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한화그룹은 한화디펜스USA가 지난달 29일(현지시간) 미 해군 선박 건조·관리 업체(VCM)인 TOTE 서비시스(Services)와 LSM 1척 건조 계약을 체결했다고 1일 밝혔다. 계약 금액은 약 2억6900만 달러(약 3575억원)이며, 실제 건조는 한화 필리 조선소가 맡는다. 데이브 매코믹 미국 연방 상원의원(공화당·펜실베이니아주)이 지난달 30일 배포한 별도 자료에 따르면 이번 계약에는 추가 함정 3척에 대한 옵션이 담겼다. 현재 확정된 건조 물량은 1척이고 옵션이 행사되면 물량이 늘어나는 구조다. 착공은 2027년 4분기로 예정돼 있다. 이번 계약은 미 해군의 위임을 받은 TOTE 서비시스가 건조 업체를 선정하고 사업을 관리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VCM은 발주처를 대신해 선박 건조 계약과 관리 전반을 수행한다. TOTE 서비시스는 지난 7월 LSM 사업의 VCM으로 선정돼 22억 달러 규모의 계약을 맺었다. LSM은 인도·태평양 등 분쟁 가능성이 있는 연안에서 미 해군과 해병대의 분산작전을 지원하는 원정작전용 상륙함이다. 병력과 장비, 보급품을 연안 지역으로 수송하고 전개하는 임무를 맡는다. 길이 100m, 폭 16m에 경하 중량은 약 2687톤이며, 항속 거리는 약 7400㎞다. 미 해군은 네덜란드 다멘(Damen)의 LST-100 설계를 토대로 LSM 확보를 추진하고 있다. 기존 상용 설계를 활용하고 여러 조선소에서 동시에 건조해 초기 전력화 시점을 앞당기겠다는 구상이다. 전체 도입 계획은 35척으로 한화그룹에는 이번 계약의 이행 실적이 향후 추가 물량 확보를 위한 중요한 기반이 될 전망이다. 한화 필리 조선소의 기존 건조 이력도 이번 사업과 맞닿아 있다. TOTE 서비시스는 경쟁 절차를 통해 안전과 품질, 납기 준수 실적 등을 종합 평가해 건조 업체를 선정했다. 한화 필리 조선소는 미 해사청의 국가 안보 다목적선(NSMV) 사업에서 TOTE 서비시스와 같은 VCM 방식으로 협업해 4척을 건조·인도했다. 한화디펜스USA 역시 올해 초부터 필라델피아 현지에 인력을 투입해 조선소의 해군 사업 준비를 지원했다. 한화그룹은 2024년 12월 필리 조선소를 인수한 뒤 미국 연방 정부를 고객으로 하는 선박 사업을 확대해 왔다. 올해 3월에는 한화 필리 조선소와 한화디펜스USA가 미 해군 차세대 군수 지원함(NGLS) 개념설계 사업에 참여했다. 7월에는 미국의 '골든돔' 미사일 방어체계와 연계된 해상 미사일 시험 계측선(MRIV) 건조 사업자로 선정됐다. 이번 LSM 계약으로 해군 함정 분야에서도 설계 참여에 이어 실제 건조 실적을 쌓을 기회를 확보했다. 마이클 쿨터 한화디펜스USA 대표는 “2024년 필리 조선소를 인수한 이후 한화그룹은 미 해군 등 연방 정부 고객을 위한 선박 건조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인력과 기술에 대규모 투자를 해 왔다"며 “일정과 예산에 맞춰 함정을 인도할 수 있도록 TOTE 서비시스와 협력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미국 정치권은 이번 계약을 자국 조선업과 제조업 기반을 되살리는 투자 성과로 평가했다. 필리 조선소가 있는 펜실베이니아주를 지역구로 둔 매코믹 의원은 한화디펜스USA와 한화 필리 조선소의 사업 선정을 환영하며 현지 일자리와 산업 역량 확대에 의미를 부여했다. 매코믹 의원은 “펜실베이니아주는 미국 조선업 재건을 선도하며 일자리·제조업·새로운 기회를 우리 주에 다시 가져오고 있다"며 “한화그룹이 필라델피아에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투자 의지는 미국 노동자와 미국 산업에 투자할 때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달 한국을 방문해 한화오션 거제사업장의 조선 인프라와 생산 역량을 살펴봤다. 방한 기간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과 만나 미국 조선업에 대한 추가 투자 기회를 논의했고 한국 정부 관계자들과도 조선·방위산업 제조·기술 분야의 한미 협력과 대미 투자 확대 방안을 협의했다. 매코믹 의원은 특히 한화그룹이 지난해 발표한 필리 조선소의 50억 달러 규모 인프라 투자 계획을 언급했다. 동맹국과의 협력이 미국의 선박 건조 역량을 회복하고 방위산업 기반을 강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한화그룹은 조선소 인수 이후 투자를 이어가며 생산 능력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한화그룹은 이번 수주를 계기로 미 해군 함정 시장 공략을 본격화할 계획이다. 추가 3척 옵션과 향후 발주에 대응할 수 있도록 인력을 양성하고 설비 투자를 이어가는 한편, 첫 계약 함정을 일정과 예산에 맞춰 인도하는 데 역량을 집중할 방침이다. 박규빈 기자 kevinpark@ekn.kr

글로벌 AI 허브 유치 나선 경기도…31개 시군 묶는 산업 생태계 승부수

고양 킨텍스서 전문가 200여 명 참여 유치전략 포럼 개최 산업·연구 인프라와 국제협력 연계…중소기업 AI 전환 지원 구상 정부 입지 공모 앞두고 대응 본격화…지역 간 성과 공유가 관건 경기=에너지경제신문 이성재 기자 경기도가 정부의 '글로벌 AI 허브' 유치를 위해 산업과 연구개발, 국제협력을 하나로 연결하는 전략 마련에 나섰다. 단순히 국제기구 협력시설을 유치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도내 기업의 인공지능(AI) 전환과 31개 시군의 산업 경쟁력을 높이는 성장 기반으로 활용하겠다는 구상이다. 1일 경기도에 따르면 도는 지난달 30일 고양 킨텍스에서 열린 '지페어 코리아(G-FAIR KOREA) 2026' 현장에서 '경기도 글로벌 AI 허브 유치전략 포럼'을 개최했다. 'AI 대전환, 경기와 세계를 잇다'를 주제로 열린 포럼에는 주형철 경기도 경제부지사와 김태형 경기도의회 미래과학협력위원장, AI 전문가와 기업인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글로벌 AI 허브는 정부가 유엔 산하 국제기구와 다자개발은행 등과 협력해 국내 구축을 추진하는 국제 AI 다자협력 플랫폼이다. 정부는 지난달 14일 입지 선정 공청회를 열었으며 후보지 공모와 평가, 현장실사 등을 거쳐 최종 입지를 선정할 예정이다. 경기도는 지난달 12일 유치 추진 지원단을 출범시키고 시군 및 공공기관과 공동 대응에 나섰다. 이번 포럼의 핵심은 경기도의 산업적 강점을 국제협력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에 맞춰졌다. 글로벌 AI 허브가 정책 연구와 국제교류에 머무르지 않고 제조업과 중소기업의 생산성 향상, 신산업 창출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김선우 세종대 교수는 지속 가능한 AI 대전환을 위한 경기도의 역할을, 김용호 성균관대 교수는 AI와 과학기술혁신을 연계한 글로벌 과제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 이어진 정책대담에서는 연구개발 인프라와 기업 집적도, 산업 현장의 AI 수요를 활용해 국제협력 기반을 확대하는 방안이 논의됐다. 경기도가 가진 강점은 다양한 산업과 연구기관, 기업들이 집적돼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시설 유치 자체가 곧 산업 경쟁력 강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국제협력 성과를 중소기업의 기술 개발과 현장 적용으로 연결할 구체적인 실행체계가 필요하다. 특히 허브가 특정 지역에 들어서더라도 도내 다른 시군과 기업들이 공동으로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하는 것이 과제로 꼽힌다. 주형철 경제부지사는 “글로벌 AI 허브가 도내 어느 곳에 자리 잡더라도 31개 시군과 도내 기업이 함께 참여하고 성과를 나눌 수 있는 협력체계를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경기도는 포럼에서 제시된 의견을 유치 전략에 반영하고 정부 공모와 평가에 대응할 방침이다. 글로벌 AI 허브 유치의 성패는 입지 경쟁력뿐 아니라 국제협력을 실제 산업 현장의 변화로 연결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경기도가 제시할 구체적인 산업 연계 전략과 시군 협력 방안이 향후 평가의 중요한 과제가 될 전망이다. 이성재 기자 gado444@ekn.kr

[현장] “공항서 써볼 기회 제공을”…항공 보안 장비 국산화, 실증 문턱부터 ‘높은 장벽’

“국산 장비를 구매하기 전에 공항 안에서 충분히 실증할 기회부터 주셨으면 합니다." 30일 경북 구미코에서 열린 '2026년 항공 보안 포럼'에서 이장원 SST 랩스 연구소장은 이와 같이 말하며 국산 보안 검색 장비의 시장 진입을 가로막는 장벽을 거론했다. 국제 인증을 확보해도 실제 운영 실적이 없으면 선택받기 어렵고, 도입되지 않아 트랙 레코드를 갖지 못하면 실적을 쌓을 수 없는 악순환이다. 현장에서는 장비 개발 외에도 실증·데이터 확보·인공 지능(AI) 성능 검증을 함께 지원해야 한다는 요구가 이어졌다. 한국항공보안학회와 경운대학교·한서대학교가 공동 주관한 이날 행사의 주제는 'K-항공 보안 장비 국산화 가속화 방안'이었고, 공항 운영·보안 기관·장비 기업·대학 관계자들이 대거 참석했다. 개회식 사회를 맡은 신승균 영산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국내 개발 현황과 기술적 과제를 살피고 유통 장비까지 공유하는 자리라고 소개했다. 소대섭 한국항공보안학회장(한서대 항공정책센터장·항공보안학과장 교수)은 “국산 장비 기업에서 차세대 인재들이 항공 보안 발전을 이끌어 달라"고 당부했다. 이어 “자체적인 기술 자립과 첨단 보안 장비 국산화는 국가 항공 보안의 핵심 과제"라며 국내 기술의 공항 안착과 해외 진출을 위한 산·학·연·관 협력 강화를 강조했다. 추진 보고와 주제 발표 진행을 맡은 이용강 한국항공보안학회 편집위원장(한서대 항공보안학과 교수)는 학회 산하 연구위원회를 통해 기업 전문가들의 경험을 공유하고 연구 성과를 확장하겠다고 언급했다. 그는 이번 포럼이 국내 항공 보안 장비가 세계 수준으로 도약하는 디딤돌이 되길 기대했다. 가경환 경운대 인재개발처장은 과거 보안 장비 개발·인력 양성 과제를 수행한 경험을 언급하며 현장의 목소리를 정책에 반영하고 혁신 기술을 실무에 도입하는 협력의 장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순석 한국민간경비학회장은 신라대학교 항공 보안 검색 교육 센터 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학술·교육 기관과 기업이 결합한 토론의 의미를 평가하고 양 학회의 협력을 통한 시너지 창출을 제안했다. 기업 발표의 공통 화두는 '현장에서 쓸 수 있는 국산화'였다. 김명수 딥노이드 차장은 외산 장비 의존이 유지·보수뿐 아니라 데이터와 알고리즘의 종속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기존 검색기에 국산 AI를 연결해 경쟁력을 높이고 장기적으로 장비와 소프트웨어를 묶어 수출하자는 구상이다. 김 차장은 AI의 역할을 숙련 판독 요원의 완전한 대체보다 피로와 집중력 저하를 보완하는 데서 찾았다. 공항·항만·세관에서 실제 운영 데이터를 축적하도록 실증 기회를 확대하고 AI 자체의 판독 성능을 평가·인증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외산을 일괄 교체하기보다 함께 활용하며 국내 기술의 강점을 키우자는 설명이다. 이장원 소장은 고정된 9개 엑스선으로 3차원 영상을 만드는 휴대 수하물 검색장비와 유럽민간항공회의(ECAC) C3 인증 성과를 소개했다. 다음 과제로는 제조사와 장비별로 분리된 검색 데이터를 연결하는 개방형 판독 체계를 제시했다. 수하물 CT와 전신 검색기 등의 결과를 함께 분석하려면 데이터 표준인 DICOS에 기반한 연동과 개인정보 관련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신명원 뉴원에스엔티 연구소장은 보안 검색선을 넘어 주차장과 로비 등 일반 구역의 초동 대응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폭발물·마약 흔적 탐지기 'IONAB'에 이어 개발한 비접촉식 'IONAB_에어'는 의심 물체를 건드리지 않고 탐지하도록 설계됐다. 그는 폭발물 처리반 도착 전 현장 요원의 판단을 지원하고 공항 시설 전체로 대응 범위를 넓히는 기술이라고 설명했다. 외산 장비를 공급하는 기업들은 국내 기술과 운영 경험의 결합을 강조했다. 김기태 인씨스 전무는 “원 영상이 고해상도로 제공되지 않으면 AI 프로그램이 아무리 좋아도 탐지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라피스캔 검색기에 자체 AI를 접목해 재검색 대상 물품을 자동 분류하고 통합 상황실에서 장비 상태와 비상 상황을 관리하는 사례를 제시했다. 신동인 동곡기정 연구팀장은 보안 검색장의 성능을 단일 장비만으로 평가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CT·신체 검색기·통합 판독에 장비 배치와 교육, 유지·보수, 장애 대응이 결합돼야 승객 편의·업무 효율·보안 수준을 함께 높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사람과 수하물을 통합 검색하는 기술이 국내에서 개발되길 바란다며 구축 경험과 노하우를 공유하겠다고 밝혔다. 오창환 카티스 수석은 CT 검색기·전신 검색기·바구니 자동 회송 장치·원격 통합 판독으로 구성되는 '스마트 시큐리티'의 실제 운영을 설명했다. 검색 결과에 따라 재검사 대상을 분리하고 여객 수요에 맞춰 판독 인력을 탄력적으로 배치하는 방식이다. 외산 장비를 취급하지만 국산 장비의 개발과 성과를 기대한다고도 말했다. 박형남 에이리스 기술이사는 작은 저장매체와 비정형 마약 등 새로운 위협에 대응하려면 영상 해상도뿐 아니라 물질 특성을 담은 원본 데이터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해외 제조사에서 원천 데이터를 확보하기 어려워 자체 검색기 제작에 나섰다는 그는 “보안 검색 영상은 우리나라의 자산"이라며 데이터 주권을 부각했다. AI가 판단 근거를 제시하고 신규 위협을 학습한 뒤 재검증받도록 인증체계도 갖춰야 한다고 제언했다. 화물 보안도 논의됐다. 유병철 경운대 항공관제물류학부 교수는 등록 대리점(RA) 도입을 중심으로 공항에 집중된 검색 부담을 분산하고 화물의 운송 전 과정에서 보안 상태를 유지하는 체계의 필요성을 다뤘다. 본지는 항공 보안 장비의 △국산화의 범위 △부품 공급망 △국내 소재·부품·장비의 경쟁력 △도입 실적 확보 방안을 물었다. 이 소장은 전체 제어체계는 국산화하고 있지만 엑스선 발생 장치와 검출기까지 확대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 부품은 품질보다 가격 측면의 과제가 있다며 구매에 앞서 실제 현장에서의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이민규 교수는 대형 화물의 탐지 기술과 발전 방향을 질문했다. 김 차장은 탐지 대상별 학습과 장비 결합을 통해 AI의 적용 범위를 넓힐 수 있다고 답했다. 김 전무는 중형 엑스선 장비와 컨테이너 검색기의 활용 가능성을 설명하면서 공항의 대형 화물 검색 기반 시설이 부족하다는 점을 짚었다. 박규빈 기자 kevinpark@ekn.kr

[EE칼럼] 늘 거기서 사달이 난다

허은녕 서울대학교 에너지시스템공학부 교수/ 전 세계에너지경제학회(IAEE) 부회장 가을은 천고마비의 계절이다. 식욕이 크게 높아진다. 전문가에 따르면 세로토닌(serotonin)이 일조량 감소에 따라서 같이 감소하는 것이 가을철 식욕 증가의 원인 중 하나라고 한다. 가을에는 또 다른 계절에 비하여 맛있는 음식이 많다. 입맛대로 먹다가 보면 '이렇게 먹다가는 사달이 나지'라는 생각이 든다. 사달은 사고나 탈을 의미하는 우리말이다. 무언가 본래부터 잘못 진행되고 있거나 아니면 위기의 순간을 모면하기 위하여 과장하거나 숨기다가 결국 문제가 터질 때 사용한다. 욕심을 부리다가 문제가 터질 때도 '사달이 난다'고 한다. 논어에 나오는 사자성어인 과유불급(過猶不及)과도 상통하고, 유명한 버나드 쇼의 묘비명인'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와도 짐짓 연결된다. 자율주행 기술이 아직 초창기였던 10여 년 전에는 주로 정해진 트랙을 달리는 버스나 전차에 먼저 적용되었었다. 2018년 파리 국제 모터쇼 때 프랑스는 자국의 모빌리티 기업을 소개하기 위하여 자율주행 버스를 행사장에 선보였다. 그런데 기자들을 태운 버스 앞을 그만 길거리를 청소하던 청소부가 가로막았고, 버스는 급정거와 함께 크게 경적을 울렸다. 이 장면을 목격한 국내 기자가 귀국한 후 이 사건을 두고 적은 신문 만평의 제목도 '늘 거기서 사달이 난다'였다. 인류가 살아온 내내 기술은 지속적으로 발전해 왔는데, 기술을 개발한 사람들과 사회와의 소통이 부족한 것을 이야기한 것이었다. 자율주행 자동차가 청소부를 장애물로 보지 않고 사람으로 제대로 인식하고 프로그램을 개발하였다면 청소부에게 급정거와 경적을 울려 쫒기보다는 정중하게 비켜달라고 부탁의 말을 전하였을 것이라는 거다. 기자는 만평에 그때 영국 기자가 전했다는 내용도 전한다. '기계 따위가 사람에게...'. 하지만 기자는 미래를 예측하는 데는 실패한다. 자율주행이 이렇게 빨리 상용화되지는 못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제 AI, 즉 인공지능이 자율주행의 자리에 등판한 것 같다. 환호성을 지르며 곧 인공지능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 하는 이들도 많고 인류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라고 경고의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도 많다.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지금까지 경험한 적이 없는 엄청난 규모의 매출과 수익을 내고 있으며, 덩달아 우리나라의 올해 경제성장률 역시 3.0 퍼센트를 훌쩍 넘어설 것으로 전망한다. 여기저기서 장밋빛 미래를 이야기하지만 동시에 비관론도 그 힘을 기르고 있다. 인공지능 호황이 일시적이라면서 네덜란드병(Dutch disease)을 걱정하며 노르웨이의 국부펀드와 같은 대책을 요구하기도 하고, 국내 인공지능 인프라를 선도적으로 건설할 필요성을 설파하면서 필요한 전력과 물 부족 이야기를 함께 말하고 있다. 한편 국내 정유산업도 엄청난 이익을 내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유는 호르무즈 해협 사태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원유 수급에서의 큰불을 끄는 데 성공한 반면 그렇지 못한 나라들이 석유제품 수출을 막아버리자 우리나라가 정제하여 수출하는 경유와 항공유가 엄청난 프리미엄 가격에 팔리고 있기 떄문이다. 얼나마 급한지 EU조차도 공급망와 안보를 들먹이며 정유시설의 추가 건설을 이야기 하고 있다. 사실 우리 정부도 석유제품의 수출을 제한하고 있기에 정유사들은 수출 제한을 일정 정도 풀어달라고 하고 있다. 이런 상황인데도 정부는 국내 석유제품의 최고가격고시제를 계속 유지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에너지 관련 모든 가격을 정부가 통제하는 현상이 오래 지속되자 국내 석유제품의 수요가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위급한 시기에 단기적으로 사용하여야 할 정책을 1년 가까이 끌고 가면서 여기저기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국제적으로는 심각한 에너지 위기인 지금, 에너지 절약 정책을 적극적으로 이행하기는커녕 가격 안정 정책만을 고집하고 있는 것은 국민의 눈을 가리는 것과 같으니 결국에는 사달이 날 수 있는 원인이 되고 만다. AI로 인한 반도체 호황에 모두 넋이 나가도 안 되겠지만 또 그렇다고 인공지능의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사회적 수용과 합의만을 이야기한다면 기술이 바꿀 미래에 대한 예측에 실패할 확률이 높다. 정유산업은 호황인데도 시장가격과 크게 차이가 나는 가격 제도들을 유지한다면 시장 제도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장점을 모두 놓치는 것이 된다. 늘 거기서 사달이 나지만 또 늘 거기서 새로운 기회가 온다. 비만만 걱정하면 가을이 가져다 주는 자연의 혜택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 걱정만 하고 막으려고만 하기보다는 미래를 제대로 준비하기 위한 인프라에의 투자와 기술 혁신을 위한 투자를 크게 높일 기회로 삼기를 바란다. bienns@ekn.kr

같은 시황, 엇갈린 성장…정유업계 3분기 온도차, 왜?

국내 정유업계가 올해 3분기 중동발(發) 전쟁 특수에 힘입어 호실적을 이어갔지만, SK에너지와 HD현대오일뱅크 양사의 수익성 개선 추이에서는 뚜렷한 온도차가 나타났다. 개별 경영 여건에 따라 영업이익 증감 방향이 엇갈린 가운데, 업체 간 수익성 격차는 오히려 크게 좁혀진 모양새다. 1일 업계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의 정유사업 자회사 SK에너지는 올 3분기 매출 15조9276억원과 영업이익 1조2058억원을 기록했다. 매출은 직전 분기 대비 20.6%, 영업이익은 같은 기간 85.2% 급증했다. HD현대오일뱅크 정유부문 역시 올 3분기 매출 9조234억원을 기록해 직전 분기 대비 매출이 9.3% 증가했으나, 영업이익은 8216억원으로 같은 기간 36% 감소했다. 국제유가·제품가 변동 등 거시적 관점에서 유사한 경영 환경을 누렸음에도 내실 측면에서 양사가 정반대 양상을 보였다는 설명이다. 이 같은 정반대 흐름이 주목받는 이유는 양사의 생산설비 가동 환경 역시 유사했기 때문이다. SK에너지와 HD현대오일뱅크는 모두 지난 2분기 정기보수를 진행하면서 일시적으로 생산량이 감소했다. 실제 HD현대오일뱅크는 지난 3월 말부터 5월 초까지 40일간 대산 1공장에서 26개 공정의 정기보수를 진행했고, SK에너지 역시 5월 중순께 정기보수로 한 달여간 일부 공정의 가동을 중단했다. 이후 3분기 들어 정기보수를 마친 양사는 설비의 가동률을 높이면서 석유제품 생산·판매량을 확대했다. 다만 이 같은 환경에도 양사는 이번 3분기 실적에 대해 서로 다른 원인을 지목했다. SK에너지의 경우, 중동지역 정유설비 가동 차질과 러시아의 석유제품 수출 제한 등에 따른 글로벌 공급 부족이 수익성 개선으로 이어졌고, 특히 경유를 중심으로 석유제품 수출마진이 강세를 보이면서 가동량 확대 효과를 극대화했다고 분석했다. 반면 HD현대오일뱅크는 원화 강세와 석유제품 가격 하락에 따른 손익 부담이 상대적으로 크게 작용했다고 봤다. 이에 대해 업계 일각에선 지난 2분기 HD현대오일뱅크를 중심으로 이례적인 수준을 보였던 정유사업 수익성이 '정상화 국면'에 진입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정유업계 한 관계자는 “양사 모두 3분기 원유 수급이나 설비 가동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었고, 2분기 대비 가동률도 높아진 것으로 안다"며 “다만 HD현대오일뱅크의 경우 직전 분기에 정유부문이 영업이익률 두 자릿수까지 치솟았는데, 평시 업계 이익률이 1~2% 수준임을 감안하면 당시 수치는 대외 여건을 고려해도 이례적인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중동정세를 비롯한 글로벌 불확실성이 장기화하는 가운데, 국제유가 변동에 따른 재고 효과 등 지난 2분기 실적에 반영됐던 일시적인 이익 요인이 일부 축소되면서 양사 간 수익성 격차도 상당 부분 완화되는 흐름에 진입했다는 분석이다. 실제 SK에너지 영업이익률은 지난 2분기 4.9% 수준에서 올 3분기 7.6%로 확대됐고, HD현대오일뱅크 정유부문 영업이익률은 같은 기간 15.5%에서 9.1%로 축소됐다. 양사 간 정유사업 영업이익률 격차는 이 기간 10.6%포인트(p)에서 1.5%p로 크게 줄었다. 이처럼 업계 간 수익성 격차가 대폭 축소되는 양상을 보이는 가운데, 업계의 4분기 성적표에 대한 시장의 관심도 높아지는 분위기다. 시장을 둘러싼 대내외 여건이 일부 완화되는 흐름을 보이며 업계 성장에 힘을 보탤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특히 정부의 경유 수출제한 완화 조치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원유 공식판매가격(OSP) 할인 기조가 긍정적인 변수로 지목된다. 앞서 산업통상부는 지난달 29일 국내 수급 안정 등을 전제로 경유 수출한도를 전년 동월 대비 100%에서 110%로 확대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달 수출 물량부터 적용되는 만큼, 업계가 글로벌 경유 공급 부족에 따른 수출마진 강세를 활용할 여지가 커질 전망이다. 사우디의 원유 OSP 할인 기조 역시 원가 부담 완화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는 요인이다. 중동산 원유의 도입 가격이 낮아질 경우 정유사들이 확보할 수 있는 실질 정제마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업계에서는 이러한 요인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이익 개선 폭을 예단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원유 도입 계약과 운임, 제품별 생산 비중 등 개별 기업의 영업 여건이 서로 다른 데다 국제유가 변동성도 여전히 높기 때문이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업계가 비중동산 원유 도입 비중 확대 압력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에쓰오일을 제외한 국내 정유업체 다수가 해당 원유의 비중을 50% 수준으로 맞추고 있다"며 “원유마다 성상과 가격, 운송거리가 다르고 장기 용선계약을 활용할 수 있는지도 차이가 있는 만큼, 향후 수익성 전망은 다양한 여건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중동산 원유의 OSP가 하락하면 추가 도입 매력도가 높아지는 것은 맞지만, 기존 장기계약과 공급망 다변화 전략 등을 고려하면 도입 비중을 단기간에 크게 바꾸기는 어렵다"며 “경유 수출제한 완화 역시 수익성에 도움이 되겠지만 실제 효과는 향후 시장 상황을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했다. 박주성 기자 wn107@ekn.kr

[오너 경영능력 평가-구광모 ②] 전장서 증명한 ‘원LG’…AI·로봇도 돈 벌 수 있을까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취임 후 보여준 첫 번째 경영 판단은 적자사업을 정리하는 '선택'이었다. 두 번째 시험은 그 자리에 인공지능(AI)과 전장, 로봇, 바이오 등 새로운 성장축을 세우는 '집중'이다. 1편에서 살펴본 구 회장 체제의 재무 성적은 계열사마다 달랐다. LG전자는 수익성이 개선됐지만 LG화학과 LG디스플레이는 취임 전보다 부진했다. 스마트폰과 태양광 패널 등 한계사업에서 철수한 결정은 성과로 볼 수 있지만, 그룹 전체가 고수익 사업구조로 전환했다고 평가하기에는 이르다. 구 회장의 다음 성적표는 철수로 확보한 자본과 인력을 어디에 배치했고, 그 투자가 실제 매출과 현금으로 돌아오고 있는지를 통해 확인해야 한다. ◇ 챗GPT보다 먼저 만든 AI연구원…비용 절감은 시작됐다 LG가 미래 성장 분야로 제시한 'ABC'는 AI와 바이오, 클린테크를 의미한다. 이 가운데 사업 적용이 가장 빠르게 진행되는 분야는 AI다. LG는 생성형 AI가 대중화되기 전인 2020년 LG AI연구원을 설립했다. 이듬해에는 국내 최초의 멀티모달 초거대 AI 모델인 '엑사원'을 공개했다. 외부의 범용 모델에만 의존하지 않고 그룹 자체 AI 기반을 선제적으로 구축한 것은 구 회장 체제의 장기투자로 평가할 만하다. 최근에는 엑사원을 연구용 모델에서 제조·금융·바이오 등에 적용하는 단계로 옮기고 있다. LG디스플레이는 패널 설계에 AI를 활용해 약 한 달 걸리던 작업을 8시간으로 줄였다. OLED 제조공정에서는 이상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AI 생산체계를 구축해 품질 개선 기간을 평균 3주에서 이틀로 단축했다고 밝혔다. 회사가 추산한 비용 개선 효과는 연간 2000억원 이상이다. 바이오 분야에서는 병리 이미지를 분석해 유전자 변이 가능성을 예측하는 '엑사원 패스'를 개발했다. 신약 후보 물질 탐색과 임상 개발에 AI를 활용해 시간과 비용을 줄이는 것이 목표다. 구 회장은 올해 사장단 회의에서 AI를 단순한 생산성 향상 도구가 아니라 산업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기술로 규정했다. 계열사별로 분산된 AI 활용을 그룹 차원의 사업모델로 발전시키라는 주문이다. 다만 내부 비용 절감과 외부 수익 창출은 구분해서 봐야 한다. 엑사원이 LG 계열사의 생산성을 높이는 데서 나아가 외부 기업의 선택을 받고 반복 매출을 만들어야 독립적인 성장사업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한 AI업계 관계자는 “LG가 생성형 AI 열풍 이전부터 자체 연구역량을 축적한 것은 장기적인 경영 판단으로 볼 수 있다"며 “앞으로는 모델의 기술적 우수성보다 제조·바이오·가전에서 얼마나 생산성과 외부 매출을 만들어내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 전장 매출 11조원…'원LG'가 먼저 돈 번 곳 구 회장 체제에서 수익화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미래 사업은 자동차 전장이다. LG전자의 전장사업을 담당하는 VS사업본부는 2025년 매출 11조원을 넘어섰다. 전장 수주잔고는 약 100조원으로 추산된다. 휴대전화 사업에서 철수한 대신 자동차 안의 디스플레이와 통신, 소프트웨어, 전기차 구동장치에서 새로운 시장을 확보한 것이다. LG전자는 차량용 인포테인먼트와 텔레매틱스, 전기차 구동부품을 담당한다. LG디스플레이는 차량용 OLED, LG이노텍은 카메라와 센싱 모듈, LG에너지솔루션은 배터리를 공급한다. 각 계열사의 제품을 묶어 완성차업체에 통합 솔루션으로 제안하는 것이 '원LG' 전략이다. LG 계열사 경영진은 글로벌 완성차업체를 대상으로 공동 기술행사를 열며 인포테인먼트부터 디스플레이, 센서, 배터리까지 함께 소개하고 있다. LG전자는 글로벌 완성차 판매량 상위 10개 업체 가운데 도요타와 폭스바겐, 현대자동차·기아, GM, 스텔란티스, 포드, 혼다, 닛산 등 8곳과 거래 관계를 구축했다고 밝혔다. 전장사업이 개별 부품 공급을 넘어 세계 주요 완성차업체의 공급망에 진입했다는 의미다. 다만 수주잔고가 곧바로 이익을 뜻하지는 않는다. 자동차 부품은 수주부터 양산과 매출 인식까지 장기간이 걸리고 완성차업체의 가격 인하 요구도 강하다. 구 회장의 투자 성과를 평가하려면 수주 규모뿐 아니라 전장사업의 영업이익률과 현금흐름, 투자자본수익률이 안정적으로 높아지는지 확인해야 한다. ◇ 로봇 두뇌부터 관절·배터리까지…두 번째 '원LG' LG가 전장 다음으로 계열사 역량을 결집하는 분야는 피지컬 AI와 로봇이다. LG는 로봇 완제품 한 종류에 승부를 걸기보다 두뇌와 센서, 관절 구동장치, 배터리, 운영시스템을 함께 공급하는 전략을 택했다. LG전자는 가전사업에서 축적한 모터 기술을 활용해 휴머노이드 로봇의 관절을 움직이는 액추에이터 사업에 진출했다. 가정용 로봇 '클로이드'에는 엔비디아의 칩과 로봇 훈련 플랫폼, 구글의 생성형 AI를 적용해 집 안 상황과 사용자의 지시를 이해하도록 했다. LG이노텍은 보스턴다이내믹스와 로봇의 눈 역할을 하는 비전센싱 시스템을 공동 개발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휴머노이드에 적용할 수 있는 원통형·전고체 배터리를 준비 중이다. LG CNS는 제조·물류 현장에 투입될 로봇의 훈련과 운영을 맡는다. 미국 로봇 AI 기업 스킬드AI 등에 투자하고, HD현대로보틱스와는 조선소 품질검사에 휴머노이드를 적용하는 실증을 진행하고 있다. LG AI연구원은 엑사원을 기반으로 로봇이 사람의 언어와 주변 상황을 이해하도록 하는 두뇌 개발에 참여한다. 가전에서 확보한 생활 데이터와 국내외 공장에서 쌓은 제조 데이터는 LG만의 강점이 될 수 있다. 계열사별 기술이 실제로 결합된다면 로봇 부품부터 AI와 운영서비스까지 공급하는 수직계열화가 가능하다. 그러나 현재 상당수 사업은 투자와 공동개발, 개념검증 단계다. 어느 계열사가 사업을 총괄하고 투자비와 수익을 어떻게 나눌지도 명확해져야 한다. 여러 기술을 보유했다는 사실만으로 '원LG'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 냉각·전력·운영 묶은 AIDC…해외 수주로 확장 AI 데이터센터(AIDC)도 계열사 간 결합이 가능한 시장이다. 데이터센터가 늘어나면 서버의 열을 낮추는 냉각설비와 안정적인 전력공급, 에너지저장장치, 구축·운영 시스템의 수요가 함께 증가한다. LG는 LG전자의 냉각시스템, LG유플러스와 LG CNS의 설계·구축·운영 역량, LG에너지솔루션의 전력저장장치를 묶어 통합 솔루션으로 제공하고 있다. 개별 제품을 납품하는 데서 벗어나 데이터센터 구축부터 운영까지 참여하겠다는 전략이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사업화도 시작됐다. LG전자와 LG에너지솔루션, LG CNS 등은 인도네시아에서 약 1000억원 규모의 하이퍼스케일 AI 데이터센터 사업을 수주했다. 수도권에서는 2027년 완공을 목표로 200MW 규모의 파주 AI 데이터센터 구축이 추진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를 상대로 계열사 공동 AIDC 기술행사를 열었다. 전장 분야에서 활용한 공동 영업 방식을 데이터센터 시장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AI 데이터센터는 글로벌 장비·클라우드 기업과 냉각·전력 전문업체가 동시에 경쟁하는 시장이다. 국내 계열사끼리 기술을 묶는 데 그치지 않고 글로벌 빅테크로부터 대규모 수주를 반복적으로 확보해야 경쟁력이 입증된다. ◇ 'ABC' 가운데 성적표 나온 것은 전장뿐 구 회장이 추진한 미래 사업 가운데 현재까지 가장 분명한 숫자를 보여준 분야는 전장이다. AI는 계열사의 생산성과 비용 개선으로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로봇과 AI 데이터센터는 외부 기업과의 협력 및 초기 수주 단계에 진입했다. 바이오는 신약 개발 특성상 투자 회수까지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 배터리 역시 LG의 핵심 성장축이지만 전기차 수요 둔화와 대규모 설비투자 부담을 함께 안고 있다. LG화학의 석유화학 부진과 LG디스플레이의 수익성 회복도 미래 사업에 투입할 자금 여력을 좌우할 변수다. 따라서 계열사별 기술을 모두 나열하는 것보다 실제 매출과 이익, 현금흐름으로 연결되는지를 공통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 협약 체결이나 시제품 공개, 투자 발표를 사업 성과와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다. 구 회장 체제의 LG는 스마트폰과 태양광에서 철수한 뒤 전장과 AI, 로봇, 데이터센터로 사업의 무게중심을 옮겼다. 전장에서는 계열사 기술을 묶어 고객과 매출을 확보하는 '원LG' 방식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전장에서 먼저 나타난 성과를 AI와 로봇, 데이터센터에서도 재현하는 것이다. 적자사업을 정리한 '선택'이 구 회장 경영의 첫 번째 성과였다면, 선택한 사업을 독립적인 수익원으로 키우는 '집중'이 두 번째 평가 기준이다. 전지성 기자 jjs@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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