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 반도체와 전기차 산업을 강타했던 강력한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의 파도가 이제 전 세계 바다를 덮쳤다. 도널드 트럼프 제47대 행정부가 무너진 자국 조선·해운업을 부활시키고 글로벌 해양 패권을 쥐기 위한 초강력 범정부 마스터 플랜을 전격 발표했다. 이는 한국 조선업계에 국한하지 않고 전 세계 물동량을 쥐락펴락하는 글로벌 해운 동맹과 이를 뒷받침하는 아시아 중심의 조선 생태계를 송두리째 뒤흔들 '메가톤급 지각변동'의 서막이라는 평가다. 14일 미국 백악관은 42페이지 분량의 '미국의 해양 행동 계획(America's Maritime Action Plan, 이하 MAP)'을 발표했다. 미국 정부는 전 세계 상선 건조량의 1% 미만으로 전락한 미국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외국산 선박에 천문학적인 수수료를 물리고 자국산 선박 이용을 강제하는 전례 없는 보호무역 조치를 쏟아냈다. 동시에 동맹국의 자본과 기술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기 위해 1500억 달러(약 200조 원) 규모의 당근책을 제시하며 글로벌 해양 산업의 새 판 짜기에 돌입했다. ◇글로벌 해운업계를 덮친 '퍼펙트 스톰' MAP의 내용 중 글로벌 해운업계를 가장 경악하게 만든 대목은 '해양 산업 기반 보호'에 명시된 노골적인 무역 장벽이다. 가장 파괴적인 조치는 '보편적 수수료(Universal Fee)' 신설이다. 백악관은 미국 항구에 입항하는 모든 '외국 건조 상선(Foreign-Built Vessels)'에 실린 수입 화물 중량(kg)당 최소 1센트에서 최대 25센트의 수수료를 부과할 계획이다. 최대치인 25센트 적용 시 향후 10년간 최대 1조5000억 달러(약 2000조 원)라는 천문학적인 징수액이 발생하고, 미 정부는 이를 신설되는 '해양 안보 신탁 기금(MSTF)'으로 전용해 자국 조선소 및 인프라 재건에 쏟아붓는다. 현재 전 세계 바다를 누비는 상선의 99%가 한국·일본·중국 등 미국 외 지역에서 건조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대미(對美) 수출입에 동원되는 전 세계 모든 선사와 화주에게 매기는 '징벌적 통행세'다. 여기에 '미국 해양 우선 요건(USMPR)'이 쐐기를 박는다. 대미 수출 물량이 많은 한국·중국·유럽 등 주요국은 자국발 컨테이너 화물의 일정 비율을 반드시 '미국에서 건조되고 미국 국기가 게양된 선박'으로 운송하도록 강제한다. 육상 국경을 통한 꼼수 우회 수입을 막기 위해 캐나다·멕시코 국경을 통과하는 화물에도 0.125%의 '육상 항만 유지보수세(Land Port Maintenance Tax)'를 신설한다. 이는 머스크(Maersk)·MSC·CMA-CGM은 물론 국내 최대 선사인 HMM 등 글로벌 해운사들에게 치명타다. 수수료 폭탄을 피하고 세계 최대 소비 시장인 대미 화물을 유치하기 위해 해운사들은 기존의 저렴한 아시아산 선박 대신 건조 비용이 수배 비싼 '미국산 선박'을 울며 겨자 먹기로 발주하거나 용선해야만 한다. 때문에 미국 시장을 포기할 수 없는 이상 글로벌 해운사들의 선대 포트폴리오 재편과 태평양 노선의 해상 운임 폭등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맞춰 선박 발주의 패러다임도 '가성비'에서 '메이드 인 USA(Made in USA)'로 바뀔 것으로 전망된다. ◇韓·日·유럽에 손 내민 200조원 러브콜…글로벌 조선업 강제 재편 글로벌 1위 조선 강국인 중국은 철저한 배제의 대상이다. 미 무역대표부(USTR)가 무역법 301조를 근거로 조사해 온 중국 조선·물류업에 대한 제재 의지가 MAP 곳곳에 반영돼 있다. 하지만 백악관은 길이 120m 이상 대형 상선을 건조할 수 있는 자국 내 조선소가 8곳에 불과한 붕괴된 인프라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 독자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미국은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의 자본과 기술을 자국 본토로 유치하는 것을 유일한 타개책으로 공식화했다. 미 정부가 꺼낸 핵심 유인책은 '징검다리 전략(Bridge Strategy)'이다. 한국이나 일본 파트너사가 미국 내 조선소를 인수하거나 합작(JV) 투자를 단행할 경우 다수 선박 건조 계약 중 '초기 물량(초도함)'은 파트너의 본국 조선소에서 건조하도록 예외를 인정한다. 그 사이 파트너사의 자본과 기술로 미국 조선소를 현대화하고 후속 물량부터 미국 현지에서 건조하도록 연착륙을 돕는 파격적 제안이다. 이를 위해 미 상무부는 이미 1500억 달러(약 200조 원) 규모의 천문학적인 조선업 투자 기금을 확보했다. 미 전역 항만 100곳을 '해양 번영 구역(MPZs)'으로 지정해 대규모 세제 혜택을 주고, 연방 선박 금융(Title XI) 대출 문턱을 대폭 낮춰 진출 리스크를 줄여준다. 이로 인해 한국과 일본의 대형 야드뿐만 아니라, 선박 엔진과 친환경 핵심 기자재 시장을 주도하는 유럽연합(EU) 국가의 장비 업체들 역시 막대한 보조금을 받기 위해 생산 라인을 미국 본토로 옮겨야 하는 거센 압박에 직면하게 됐다. ◇K-조선 빅3, 위기를 기회로…'미 본토 상륙 작전' 닻 올랐다 글로벌 조선 시장을 이끌어 온 국내 조선 '빅3'인 HD현대중공업·한화오션·삼성중공업에 이번 조치는 큰 기회로 작용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국내 야드에서 배를 뚝딱 만들어 수출하던 공식은 폐기됐다. 3사는 MAP에 명시된 미국의 국가 핵심 안보 과제에 맞춰 각 사의 강점을 살린 맞춤형 '미 본토 현지화' 수주전에 사활을 걸고 있다. ①한화오션, '필리 야드' 선점 효과 극대화…MRO·전략 상선대(SCF) 정조준 미국 연안 선박 건조 의무를 명시한 '존스법'을 충족하는 펜실베이니아주 필리 조선소(Philly Shipyard)를 선제적으로 인수한 한화오션은 MAP의 '1호 수혜자'로 꼽힌다. MAP에는 전시 물류 수송 역량 강화를 위해 막대한 건조·운영 보조금을 지원하는 '전략 상선대(SCF, Strategic Commercial Fleet)'를 창설한다고 명시돼 있다. 완벽한 현지 거점을 확보한 한화오션은 향후 MPZ 지정에 따른 연방 자금을 싹쓸이하며, 미 전쟁부(DOW)의 노후 함정 유지·보수·정비(MRO) 사업은 물론 SCF 신조 물량까지 독식할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②HD현대, 압도적 기술력으로 '로봇·자율 운항' 표준 선도·스마트 야드 이식 세계 1위 조선사 HD현대는 압도적인 융합 기술력으로 미국의 고질적인 인력난을 타개할 구원투수로 나선다. MAP는 저비용 대량 생산이 가능한 '로봇·자율 운항 시스템(RAS)' 전면 도입과 오대호 등지의 규제 면제 테스트 구역 설정을 지시했다.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자율 운항 자회사 '아비커스(Avikus)'를 앞세워 미 해군 함정 정비 협약(MSRA)을 체결한 HD현대는 노후화된 미국 조선소에 AI 기반 '스마트 야드 솔루션'을 통째로 이식하고, 미래 무인 자율 운항 모듈의 현지 표준화를 주도하는 '안보·기술 혈맹'의 중추로 활약할 전망이다. ③삼성중공업, 기후 변화가 부른 '북극 수로 안보 전략'의 독보적 파트너 MAP는 기후 변화로 접근성이 높아진 북극 항로의 패권을 쥐기 위해 극지용 쇄빙선 확충과 알래스카 해저 인프라 투자를 핵심 과제인 '북극 수로 안보 전략'으로 채택했다. 과거 러시아 극지용 쇄빙 셔틀탱커와 쇄빙 LNG선 등을 세계 최초로 건조하며 이 분야에서 독보적 레퍼런스를 쌓은 삼성중공업은 숨은 잭팟을 노린다. 삼성중공업은 노후화된 미 해안경비대(USCG)의 쇄빙선 대규모 교체 사업과 북극 해저 자원 개발 프로젝트에서 미국 현지 파트너와 합작(JV)을 맺고 고부가가치 설계 및 핵심 기술을 공급할 1순위 파트너로 부상하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 빅뱅 임박…범정부 총력 외교 절실 백악관이 발표한 MAP는 글로벌 조선·해운 생태계의 주도권을 미국이 완전히 쥐겠다는 선전포고로 해석된다. 막대한 보조금을 지렛대 삼아 자본과 기술을 들고 미국 본토에 진출해 '미국 노동자와 함께 배를 만드는' 글로벌 현지화인 'Make with Korea' 체제로의 전환이 우리 조선업계의 필수 생존 조건이 됐다. 트럼프 행정부는 MAP를 항구적으로 법제화하기 위해 2027 회계연도 예산안과 함께 '조선 및 항만 인프라 번영·안보법(SHIPS Act)' 등 강력한 입법 패키지를 조만간 미 의회에 전격 제출할 예정이다. 이처럼 거대한 글로벌 지각 변동 속에서 산업통상부·해양수산부·외교부는 미 의회 입법 과정에 촉각을 세워야 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K-조선이 미국 현지에 야드를 구축하고 정상 가동하기까지 최소 수년의 물리적 시간이 필요한 만큼, 과도기 중에 한국산 선박과 우리 국적 선사들의 대미 수출 화물에 대한 '수수료 부과 한시적 유예(Waiver)' 조항을 반드시 관철해 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아울러 현지 공정에 대거 투입될 한국 핵심 엔지니어 및 숙련공들의 취업 비자(H-1B 등) 쿼터를 획기적으로 늘리는 등 '아메리카 퍼스트'의 파고를 넘기 위한 범정부 차원의 공격적인 통상 외교 노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어 당국의 움직임에 귀추가 주목된다. 박규빈 기자 kevinpark@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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