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반도체 최강자 엔비디아가 내년 초 출하분부터 서버 가격을 15% 이상 올리기로 하면서 메모리 반도체를 둘러싼 힘의 균형이 뒤바뀌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품귀 현상을 겪고 있는 고대역폭메모리(HBM)와 서버용 D램 가격이 치솟은 여파로, 그동안 그래픽처리장치(GPU) 하나로 시장을 좌우해온 엔비디아마저 삼성전자·SK하이닉스(삼전닉스) 눈치를 봐야 하는 '슈퍼 을'의 처지가 되면서다. 뒤에서는 중국 메모리 업체들이 잇단 기업공개(IPO)로 실탄을 채우며 추격에 속도를 내고 있고, 안에서는 정부발 산업정책 변수까지 겹치면서 셈법이 복잡해지고 있다. ◇ 메모리 협상력은 세졌지만…'양날의 검' 우려 26일 외신과 업계 등에 따르면, 엔비디아는 내년 초 출하분부터 AI 반도체 탑재 서버 가격을 15% 넘게 인상할 예정이다. 차세대 '베라 루빈'과 현재 주력인 '그레이스 블랙웰' 탑재 시스템이 모두 대상이다. 가격 인상의 배경은 메모리 품귀다. 엔비디아 AI 가속기가 제 성능을 내려면 D램을 여러 층 쌓아 대량의 데이터를 빠르게 주고받는 HBM이 필수인데, AI 데이터센터 건설 경쟁으로 수요가 폭증하면서 공급이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서버용 D램 계약가격은 올해 2분기 전분기 대비 53~58% 뛴 데 이어 3분기에도 13~18% 추가 상승할 전망이다. 매출총이익률이 75%에 달할 정도로 수익성이 높은 엔비디아조차 이 비용을 가격에 반영했다는 것은, 그만큼 메모리 업체의 협상력이 강해졌다는 방증이라는 게 블룸버그의 분석이다. 앞서 애플과 퀄컴도 메모리 품귀를 이유로 제품 가격을 이미 올린 바 있다. 빅테크들이 엔비디아 의존도를 낮추려 자체 AI 칩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이 역시 HBM과 D램이 대량으로 필요한 만큼 메모리 업체의 위상은 당분간 흔들리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문제는 이 가격 상승이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점이다. 미 IT매체 디인포메이션에 따르면, 일부 서버 업체는 고객사에 최대 17%까지 가격이 오를 수 있다고 통보했고, 이 경우 1기가와트(GW)급 데이터센터 구축 비용이 최소 50억달러(6조9000억원) 늘어난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달 15일 제주 대한상의 포럼에서 “반도체 가격은 떨어져야 한다. 지금 가격은 비정상"이라며 “마진율을 낮춰서라도 공급을 늘리고 시장을 같이 키워나가야 한다"고 말한 것도 이런 위기감의 연장선이다. 업계 관계자는 “메모리 가격이 지나치게 오르면 AI 인프라 투자 자체가 위축될 수 있어 장기적으로 메모리 업체에도 부담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 돈 몰리는 中반도체, 갈라지는 해외 투자처 바깥에서는 중국 업체들의 추격도 매섭다. 상하이증권거래소는 22일 중국 최대 낸드플래시 업체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 모회사 창장춘추홀딩스의 과창판(중국판 나스닥) IPO 신청서를 수리했다. YMTC는 이번 상장으로 330억 위안(6조8000억원)을 조달해 생산라인 증설과 연구개발에 투입할 계획이며, 상장 후 기업가치는 최대 3300억 위안(68조1000억원)으로 평가된다. 이는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 중신궈지(SMIC)에 이어 과창판 역대 세 번째 규모다. 독자 기술 '엑스태킹'과 232단 3D 낸드를 앞세운 YMTC는 올 1분기 매출이 470억 위안으로 지난해 연간 매출을 한 분기 만에 넘어섰고, 카운터포인트리서치 집계 기준 세계 낸드 시장 점유율도 14%까지 올라 일본 키옥시아를 제치고 3위에 올랐다(1위 삼성전자 25%, 2위 SK하이닉스 22%). 앞서 상장한 CXMT는 첫날 공모가 대비 465.82% 급등하며 중국 증시 시가총액 1위로 뛰어오른 바 있어, 후발 업체들의 자금력 확보를 통한 기술 추격이 본격화하는 모양새다. 해외 투자처를 놓고는 미국과 일본 사이 계산도 복잡해지고 있다. 이미 대만 TSMC가 용수 확보에 강점을 지닌 규슈 구마모토에서 공장을 가동 중이고, 메모리 3위 마이크론도 총 1조5000억엔 규모(정부 지원 최대 5360억엔 포함) 투자로 혼슈 히로시마에 신규 팹을 짓고 있다. SK하이닉스가 혼슈 도호쿠 지방 미야기현에 팹을 지을 경우 TSMC·마이크론에 이은 세 번째 외국계 반도체 생산거점이 되는 셈이다. 해당 부지는 일본 금융사 SBI와 대만 파운드리 PSMC의 합작 팹 계획이 백지화되면서 그대로 남은 곳으로, 용수·전력·물류·주거 등 인프라가 이미 갖춰져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야기현은 일본 정부가 규슈·홋카이도와 함께 육성 중인 반도체 3대 거점 중 하나로, 도쿄일렉트론 등 장비 기업의 생산거점이자 도호쿠대의 인력 양성 기반이 맞물려 있다. 최태원 회장은 지난 6월 니혼게이자이신문 인터뷰에서 “일본은 전력·재료 등 필요한 생태계가 모두 갖춰진 훌륭한 후보지"라며 도쿄일렉트론 등 일본 소부장 기업과의 상시 협력이 한일 반도체 생태계를 넘어 양국 경제안보 차원의 의미를 지닌다고 언급한 바 있다. 반면 미국은 자국 유치를 노골화하고 있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지난달 마이크론 팹 착공식에서 삼성전자·SK하이닉스도 결국 미국 투자에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압박성 발언을 내놨다. 다만 업계에서는 확실한 인센티브와 전문 인력, 공급망이 부족한 미국에 곧바로 팹을 짓기는 쉽지 않다는 반응이 우세하다. 여기에 국내 변수도 겹친다. 20일 최태원 회장에 이어 26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도 이재명 대통령과 회동할 예정으로, 호남 클러스터를 포함한 메가프로젝트와 해외 투자가 주요 의제로 거론된다. 당초 2기로 계획됐던 SK하이닉스의 호남 클러스터 팹이 4기로 늘어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정부도 지난 11일 국무회의에서 광주 군공항 부지의 반도체 국가산단 확장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국내 증설 부담이 커질수록 해외 투자 여력은 줄어드는 만큼, 업계에서는 국내외 투자 배분을 둘러싼 삼전닉스의 고민이 한층 깊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은 빅테크 고객사와의 접근성이, 일본은 소재·부품·장비 공급망이 강점"이라며 “수십조원이 투입되는 팹의 입지는 정치적 요구보다 전력·용수·인력 등 사업 경쟁력을 기준으로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하나 기자 uno@ek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