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유 최고가격제가 9차로 이어지면서 정부는 물가 안정과 재정 부담 사이 딜레마에 빠진 형국이다. 최고가격제 종료 시 국제유가 불안이 여전한 상황에서 지금까지 눌러왔던 유가 상승분이 국내 기름값에 반영되면 물가가 다시 들썩일 수 있다. 제도를 지속하자니 정유사 손실 보전액이 커져 추가 재정 부담이 생긴다. 정부가 제도의 출구시점을 찾지 못하면서 지난 3월 13일 도입된 석유 최고가격제는 9월 이후에도 유지돼 당초 예상했던 6개월을 넘어서게 됐다. 지난 22일 9차 석유 최고가격제가 또 다시 동결됐다. 정유사 공급가 상한은 이전 7~8차 때와 같이 리터(ℓ)당 휘발유 1784원, 경유 1773원, 등유 1380원으로 4주간 적용된다. 산업통상부는 9차 동결 이유로 국제유가 추가 상승 가능성에 폭염에 따른 물가 부담 등을 꼽았다. 미국과 이란 간 종전 양해각서(MOU) 60일 기한이 지났지만 호르무즈 해협 재봉쇄 조치 등 중동 정세 불안이 지속되면서 최고가격제 유지로 결정했다는 게 정부 설명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당초 종전 상황과 호르무즈 해협 통항 정상화 여부, 국제유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최고가격제 종료 시점을 결정할 예정이었다"며 “아직 불확실성이 여전한데다 국제유가도 언제 오를지 몰라 변동성이 커 당분간 유지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실제 국제유가는 8월 초 종전에 대한 기대감으로 배럴당 70달러 선까지 떨어졌다 최근 90달러대로 반등했다. 지난 20일 브렌트유 가격은 93.8달러, 두바이유는 95.6달러로 올랐다. 정부는 정유사 공급가 상한선을 정한 최고가격제로 국제유가의 높은 변동성에 따른 국내 기름값 상승 폭을 억제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산업부에 따르면 8차 최고가 동결로 휘발유는 리터당 100원, 경유는 300원 가량 낮아지는 효과를 봤다. 국내유가는 6월 27일 이후 지속 하락해 8월 20일 기준 전국 평균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1862원, 경유는 1845원으로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 정부는 석유 최고가격제 시행 초기에도 석유류 가격 억제로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최대 0.8%포인트(p) 낮추는 데 기여했다고 봤다. 다만, 정부가 정유사 공급가를 통제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정유사 손실은 정부 재정으로 보전해 주는 구조다. 중동 정세가 장기화되고, 유가와 최고가격 간 격차가 커질수록 정부로서는 추가 재정 부담이 커지게 된다. 이달 말부터 정유사들의 원가, 적정 마진 등 손실 보상액 관련 정산 절차가 시작된다. 산업부는 이달 말까지 관련 자료를 제출받아 연말까지 손실보전 규모를 확정할 예정이다. 정부는 최고가격제 6개월 유지를 전제로 정유사 손실 보전을 위한 목적예비비 4조2000억원을 편성해 둔 상태다. 하지만, 정유 업계는 최고가격제 시행 이후 누적 판매 손실이 4~5조원 가량으로 추산하고 있다. 6개월을 넘긴 최고가격제가 지속될수록 손실액 규모는 커질 수밖에 없어 정부의 추가 재정 부담도 불가피해진다. 언제 끝날지 모를 중동 정세 불안이 지속되면서 물가 부담과 함께 재정 부담을 동시에 지게 된 정부로서는 제도 출구 시점을 두고 고심이 큰 상황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민생안정과 국제유가를 고려, 6개월을 넘기더라도 최고가격제를 유지한다는 방침을 분명히 했다. 앞서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유가 불안이 확실하게 해소될 시점까지 석유 최고 가격제를 지속하고, 유류세 인하 같은 정책 수단도 최대한 유지해주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김정관 산업부 장관도 이달 12일 열린 국회 전체회의에서 “최고가격제는 취약계층, 서민 생활의 최소한 방파제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며 “기업들은 지금 원유 가져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라 전쟁 상황에서는 불가피하다"고 강조했다. 최고가격제를 유지하되 단계적 가격 인상을 통해 시장 가격을 안정화하는 방식으로 출구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유승훈 서울과기대 교수는 “국제유가가 국내 원유가에 미치는 시차가 있어 최고가격제를 유지하더라도 2~3회 걸쳐 가격을 올린 뒤 연착륙할 수 있도록 종료 시점을 설정해야 한다"며 “경유는 생계와 밀접한 만큼 휘발유 최고가를 먼저 정상화한 뒤 종료하는 단계적 접근과 함께, 손실보전 재정에 한도를 두는 제도적 장치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는 중동 정세와 석유 수급, 물가 그리고 손실 보전 등 종합적 상황을 보고, 안정화되는 추세에 따라 4주의 최고가격제 적용을 단축하는 등 탄력적으로 운영할 방침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현재까지 손실 보전액은 예산 편성 범위에서 감당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며 “국내외 상황을 실시간으로 살피면서 유연하게 최고가격제를 운영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원승일 기자 won@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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