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전력산업의 논의 지형에 가칭 한국통합발전공사 혹은 '한전홀딩스'라는 이름이 다시 등장했다. 일부 관계자들이 ㈜한국전력(이하 한전)을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해, 한전과 발전 자회사의 역할을 재배열하자는 주장을 내놓은 것이다. 남동·중부·서부·남부·동서발전 등 발전 자회사들 사이의 역할 중복, 100% 모회사로서 한전이 행사해온 수직적 지배구조, 중복된 연구개발(R&D) 투자가 비효율의 원인으로 지적되며, 이를 지주회사라는 새로운 틀 아래서 단번에 정리해야 한다는 논리가 뒷받침되고 있다. 얼핏 보면 시대 변화에 부응하는 구조개편처럼 들린다. 조직을 다시 배열해 기능을 명확히 하고, 한전은 전력공급이라는 본연의 역할에 집중하며, 발전 자회사들은 지주회사 산하에서 보다 자율적인 체계로 움직일 것이라는 기대도 덧붙는다. 2001년 전력산업 구조개편은 한전의 수직적 독점 체제를 해체하고, 발전·송전·소매 기능을 분리해 경쟁과 중립성을 도입하려는 미완의 개혁의 첫걸음이었다. 발전부문을 6개 자회사로 나누고, 계통 운영을 한전으로부터 떼어내 전력거래소를 설립한 조치는 장기적으로 송전망 운영의 독립성과 소매시장 경쟁 도입까지 바라본 분권·경쟁 지향의 로드맵이었다. 그러나 최근 제기되는 한전홀딩스 구상은 이러한 개혁의 방향성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발전·송전·판매·신재생을 다시 지주회사라는 단일한 우산 아래 묶으려는 시도는, 기능을 분리해 전력시장을 시장답게 만들고자 했던 과거 개혁의 취지를 되돌리는 조치다. 그럼에도 '지배구조 개편'이라는 그럴듯한 표현을 앞세우니, 전력시장이나 지주회사 제도 중 하나라도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쉽게 호도되고 만다. 한국을 비롯해 일본, 이탈리아, 라틴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재벌의 역사적 궤적을 살펴보면, 순환출자와 복잡하게 얽힌 지배고리는 오랫동안 비판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불투명한 지배 구조를 끊어내기 위해 도입된 장치가 바로 지주회사 제도다. 소유와 지배의 흐름을 드러내고, 얽힌 고리를 정리해 책임의 방향을 명확히 하겠다는 취지가 그 출발점이었다. 지주회사 체제는 얼핏 보면 구조개편의 강한 신호처럼 보인다. 조직을 다시 묶고 역할을 재조정하며 새로운 지도를 그린다는 상징적 제스처는 언제나 '개혁'이라는 단어와 결합해 대중의 눈길을 끌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빛은 얕고 표면적이다. 조금만 들여다보면, 지주회사라는 장치는 구조개편의 본질적 문제를 피해가며, 기존 질서에 다시 성벽을 세우는 일종의 복고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개별 대기업이나 금융지주회사에서는 지주회사 체제가 나름의 설득력을 갖는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업 영역을 명확히 구분하고, 지배구조를 정비하며, 자본을 효율적으로 재배분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성패가 끊임없이 갈리는 그들에게 지주회사는 일종의 생존 전략이다. 위험을 분산하고 성장동력을 재조정하기 위한 조직적 도구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그 명분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전은 다르다. 공익성을 본질로 삼는 국가 단위의 독점 기업에 지주회사 모델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전력산업의 현실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외형적 논리만 빌려오는 셈이다. 한전이 직면한 문제는 재벌기업의 지배구조 문제와는 전혀 다른 층위에 있다. 지금 필요한 개혁은 지배구조를 하나로 묶는 일이 아니라, 운영의 독립성, 시장 참여의 다양성, 계통과 가격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이 세 가지가 전력체계의 미래를 결정짓는 핵심이며, 지주회사 모델은 그 어떤 부분도 해결하지 못한다. 지주회사는 흔히 '컨트롤타워'로 불린다. 거대한 기업집단을 하나의 유기체로 묶어 세밀하게 조정하는 브레인 같은 존재다. 이 체제 아래에서 인사권, 특히 CEO와 임원 선임권은 지주 본사에 집중되고, 중장기 전략도 각 회사의 판단을 넘어 결국 하나의 중심으로 모인다. 자회사들은 성과평가와 자본 배분, 투자 승인이라는 문턱을 넘어야 비로소 움직일 수 있으며, 리스크 관리와 준법감시 역시 지주사가 설정한 틀 속에서만 가능하다. 기업집단 전체를 하나의 유기적 몸체로 바라보는 사고에서 나온 체계로, 목표는 언제나 부분의 성과가 아니라 전체의 최적화에 맞춰져 있다. 금융권도 마찬가지다. 국민, 신한, 하나, 우리, 농협금융지주— 모두 지주회사는 지배와 감독을 맡고, 자회사는 은행과 보험, 증권을 각자 전문적으로 운영한다. 하지만 예산과 인사, 전략이라는 조직의 심장부가 모두 지주 본사에 소재한다. CEO 및 임원 인선, 중장기 경영전략, 리스크 관리 모두 통합된 지주의 계획대로 운영된다. 이런 구조에서 자회사 간에 '경쟁'이라는 개념은 애초에 성립하지 않는다. 그들은 시장에서 겨루는 독립된 기업이 아니라, 그룹 전략이라는 큰 지붕 아래서 역할을 분점받은 단위에 가깝다. 지주사가 본래 추구하는 가치 역시 혁신보다 건전성 확보에 더 무게가 실린다. 위험을 분산하고 비용을 통제하며 중복투자를 제거하는 데 주력하다 보면, 자연스레 공격적 혁신이나 시장을 흔드는 모험은 위축된다. 그 결과 지주회사는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명분 아래 권력의 중심을 더 단단히 고정하는 장치가 되곤 한다. 분권의 외양을 갖추고 있지만, 실제로는 더욱 정교한 중앙집권의 기술에 가깝다. 2011년 후쿠시마 사고 이후, 일본 역시 전력산업의 근본적 개편을 요구받았다. 그 흐름 속에서 도쿄전력은 2016년, 개혁의 깃발을 들고 지주회사 체제인 Tepco Holdings로 전환했다. 경영 효율화와 사업 부문별 책임 강화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막상 내부의 작동 원리는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일본 국민들이 원래 의도했던 건 독점화된 제국을 공고화하는게 아니라, 시장을 시장답게 만들자는 것인데 말이다. 전력산업이 마주한 진짜 개혁은 송전망의 중립성, 계통 운영의 독립, 소매시장 개방, 분권적 에너지 시스템 구축 같은 구조적 변화에 있다. 그러나 지주회사로의 전환은 이러한 본질적 질문을 비껴간 채, 변화하는 듯한 제스처만 취하는 데 그친다. 이름을 바꾸고 조직도를 고쳐 그럴듯한 외형을 갖추지만, 실상은 두꺼운 메이크업으로 문제를 가리는 방식에 가깝다. 그 결과는 명백하다. 개혁을 가장한 포장의 두께만큼, 현상유지는 오히려 더 단단히 고착될 것이다. 유종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