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헌의 체인지] APEC, 한국의 외교적 주도권과 실질 성과

무대 위의 조명이 한곳에 모였다. 순간 공기의 밀도가 달라졌다. 경주, 그 낯익은 도시가 세계의 중심이 된 밤이었다. APEC 정상회의가 막이 오르자 시선은 곧 하나의 장면으로 빨려 들어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이재명 대통령이 마주 앉은 그 순간이었다. 짧은 악수 뒤, 회담은 단숨에 본론으로 치달았다. 곧이어 발표된 3,500억 달러 규모의 투자 패키지. 숫자만 봐도 숨이 막히는 금액이지만, 의미는 따로 있었다. 연간 200억 달러 이하로 분할 투자한다는 방식이었다. 단기적 이벤트가 아닌, 장기적 파트너십의 신호였다. 한국을 '일시적 거래상대'가 아니라 '미래의 시장이자 기술 동맹'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상징이었다. 한국은 미국에 “우리는 당신의 시장이 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고, 미국은 “그렇다면 당신은 신뢰할 만한 동맹이다"라고 답한 것이다. 한 문장의 교환이 이번 회담의 핵심이었다. 한미 협상의 진짜 성과였다. 이어진 안보 회담에서 미국은 한국의 숙원 사업인 '핵연료 추진 잠수함' 개발을 사실상 승인했다.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단순한 무기체계의 확보가 아니라, 미국이 핵심 군사기술을 공유하는 협력선에 한국을 올려놓았다는 의미였다. 이제 한국은 공조의 중심으로 이동한 것이다. '따라가는 안보'에서 '주도하는 안보'로의 변환점, 이번 승인에 담긴 진짜 의미였다. 거대 투자와 핵잠 승인은 APEC의 본회의보다 훨씬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세계가 주목한 건 회담장안 공동선언문이 아니고 회담장 밖에서 이어진 한국과 미·중·일의 연쇄 회담이었다. 실질적 약속, 구체적 행동, 한국이 그 중심에 있었다. 과거 APEC이나 ASEAN 회의가 열릴 때마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는 늘 미국과 중국, 혹은 일본의 움직임에 쏠렸다. 의장국은 진행자에 머물렀고, 회담의 무게중심은 늘 '외부'에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라도 많이 달랐다. 경주는 외교의 지리적 무대가 아니라 외교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한국이 의장국으로서만이 아니라 실질적 조정자이자 협상가로 무대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는 드물다. ASEAN이나 G20에서도 의장국이 일정한 존재감을 드러내긴 하지만, 양자·삼자 회담을 동시에 주재하며 경제와 안보의 양축을 모두 흔든 경우는 손에 꼽힌다. 그러나 한국은 이번에 전례 없는 방식을 만들어 다자와 양자를 동시에 이끄는 '무대의 연출자'로 바뀐 것이다. 물론 남은 과제가 없진않다. 먼저 이번에 발표된 3,500억 달러 규모의 투자 약속이 단순한 선언에 머물지 않게 하는 일이다. 한국 정부는 거대한 합의를 구체적 산업 전략으로 연결해야 하고, 기업들은 이를 실행 가능한 사업계획으로 세분화해야 한다. 이번 협상은 단순한 유치 실적이 아니라, 향후 10년 한국 산업의 지형을 다시 그릴 '구조적 약속'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이제 투자라는 숫자가 아니라 내용의 시간이 필요하다. 반도체, 인공지능, 방산, 청정에너지 같은 전략산업에 어떤 방식으로 그 자금이 흘러들지, 어떤 기업이 주도하고 어떤 지역이 중심이 될지가 중요하다. 외교가 현실경제로 연결될 때, 그것이 비로소 '국익'이 된다. 핵연료 추진 잠수함 사업도 그렇다. 미국의 승인 선언은 시작일 뿐이다. 진짜 성과는 기술협력과 연료공급, 그리고 제작역량 확보로 이어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한국이 자주적 안보 역량을 갖추려면, 단순한 첨단 무기 도입을 넘어 자체 제작 체계를 세워야 한다. 이를 위해선 국내 방위산업 생태계를 새로 짜고, 연구·인력·제조 라인을 전면적으로 개편해야 한다. 동시에 국제사회의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한 투명성 확보도 필수적이다. 핵 관련 기술은 언제나 국제 규범과 감시의 대상이다. 한국은 '평화적 이용'이라는 원칙 위에서 신뢰를 증명해야 한다. 미국과의 동맹은 투명성 위에서만 단단해진다.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번 성과들을 APEC 틀 안에서 제도화하는 일이다. 지금의 외교적 존재감이 일회성 이벤트로 소모된다면, 어떤 성과도 오래가지 못한다. 미국, 중국, 일본을 포함한 핵심국을 하나의 협력 구조로 묶어내는 경제·안보 플랫폼을 구축해야 한다. 외교의 무게중심은 '이벤트'가 아니라 '시스템'에 있을 때 유지된다. 외교는 말보다 결과로 평가된다. 이번 회담은 '말'이 아니라 '실행'을 예고한 자리였다. 이제 남은 일은 분명하다. 합의를 현실로, 약속을 구조로 바꾸는 일이다. 그것이 한국에게 남긴 진짜 과제이자, 앞으로의 도전이다.

서울시, 내년 51조5060억 원 역대 최대 예산…‘시민 체감·성과 중심’ 강화

서울시가 내년도 예산을 역대 최대 규모인 51조5060억 원으로 편성했다. 복지·미래산업·안전 등 시민 체감도가 높은 분야 투자를 늘리며 재정 기조를 '성과 중심'으로 전환한 모습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30일 오전 서울시청 브리핑룸에서 열린 '2026년 예산안' 설명회에서 “서울의 진정한 경쟁력은 시민의 행복에서 나온다"며 “성과가 검증된 정책을 더 키우고, 시민이 체감할 변화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이번 예산안은 오 시장 임기 반환점을 지난 뒤 처음으로 편성된 정기 예산으로, 시정 비전인 '동행·매력특별시 2.0'을 구체화한 성과 예산의 성격이 짙다. 시는 오는 31일 예산안을 시의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총규모는 올해보다 3조4000억 원(7%) 늘어난 51조5060억 원이며, 이 중 순계예산은 46조547억 원으로 전년 대비 5.4% 증가했다. 시는 지난해(2025년) 소비진작 쿠폰 등 일시적 민생지원으로 채무가 증가했으나, 내년에는 채무 규모를 11조6518억 원 수준으로 동결하기로 했다. 오 시장은 “확대 재정을 유지하되 미래 세대의 부담은 늘리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시 예산은 최근 3년간 뚜렷한 변화를 보여왔다. 2024년도 예산은 45조7230억 원으로 전년보다 3.1% 줄며 13년 만의 축소를 기록했다. 이후 2025년 예산이 48조1144억 원(5.4% 증가)으로 확대되면서 기조가 반등했고, 내년도 예산은 다시 7% 늘어나며 역대 최대 규모로 편성됐다. 앞서 시는 2023~2024년 세입 감소와 경기 침체로 긴축 운영을 이어왔으나, 올해는 저출생·미래산업·도시경쟁력 강화 등 체감형 분야에 대한 투자 요구가 커지면서 재정 기조를 '확대·성과 중심'으로 전환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번 예산에서 시는 '동행·안전·매력' 3대 투자 중점을 제시했다. 정책사업비는 28조7683억 원으로 전년보다 5.7% 늘었다. '약자와의 동행' 예산은 8600억 원 늘어난 15조6000억 원으로, 장애인 일자리·어르신 돌봄·아동 급식·청년 장학 등 생애주기별 복지 지원이 강화됐다. 공공일자리 규모도 22만5000개로 역대 최대치다. 미래산업·인공지능(AI)·연구개발(R&D) 투자도 확대됐다. 서울형 AI산단 조성, 청년취업사관학교 확대, 서울 장학사업(93억 원 증액) 등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발표된 2025년 예산이 저출생·안전·민생경제 중심의 '회복형 예산'이었다면, 올해 발표된 2026년 예산은 복지·미래산업·도시경쟁력 중심의 '확장형 예산'으로 무게가 옮겨졌다. 특히 시민 체감도가 높은 '밀리언셀러 정책'(기후동행카드·손목닥터9988·청년문화패스 등)에는 지원이 대폭 확대됐다. 오 시장은 “서울의 대표 정책이 시민의 생활 속에서 지속될 수 있도록 더 열심히 키워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날 설명회에서는 부동산 정책과 세입 전망을 둘러싼 지적도 나왔다. 오 시장은 정부의 '10·15 부동산 대책'에 대해 “정부 대책이 공급을 촉진하기보다 거래를 위축시키는 측면이 있다"며 “서울시는 국토부와 협업해 시민 부담을 덜고 주택 공급을 촉진하는 데 초점을 두겠다"고 밝혔다. 이어 “부동산 경기가 어려운 시기에는 과거와 같은 임대주택 비율을 유지하기 어렵다"며 “법과 제도 범위 내에서 융통성 있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부동산 거래 감소로 인한 세입 둔화 우려에 대해서는 “거래가 줄면 취득세가 줄어드는 것은 맞지만, 상속·증여 등 다른 형태의 거래가 완충 역할을 하고 있다"며 “세입 감소를 전제로 매우 보수적으로 예산을 편성했다"고 설명했다. 서예온 기자 pr9028@ekn.kr

정부세종청사 보안시스템 허술…테러 등 범죄에 무방비 노출

정부세종청사의 보안 체계가 허술해 테러 등 범죄에 무방비 노출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최근 발생한 '인화물질 난동 사건'을 비롯해 가스총 소지자와 마약 투약자 침입 등 유사 사례가 반복되면서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지난달 25일 고용노동부 청사 6층에서 인화물질을 들고 장관실을 침입해 불을 붙이려 했으나, 직원들의 제지로 실제 화재로 이어지지는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인화물질을 넣은 페트병을 담은 가방을 들고 고용부 청사에 설치된 유리문을 뛰어넘어 청사에 진입한 것으로 조사됐다.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던 직원 A씨는 “유리막을 뛰어넘어 들어온 남성이 휘발유를 그대로 뿌려버렸다"며 “불을 붙였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고 긴박했던 상황을 전했다. 이어 그는 “세종청사는 1급 보안시설로 절대 뚫려서는 안 되는 곳인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져 많이 놀랐다"고 말했다. 가스총을 들고 보안 게이트를 통과한 사례도 있었다. 지난 2023년 한 남성이 가스총을 허리춤에 지닌 채 세종청사 5동 보안 게이트를 통과해 내부로 들어왔는데 보안 검색 과정에서 가스총 소지 사실이 즉각 인지되지 않았고, 나가는 과정에서 방호관이 수상함을 느껴 적발했다. 마약을 투약하고 세종청사를 장시간 돌아다닌 사례도 있었다. 지난 2021년에 한 남성이 필로폰을 투약한 상태로 세종청사 보건복지부 건물에 몰래 침입해 복지부 장관 집무실 근처까지 접근하고 약 3시간 동안 건물 내를 돌아다닌 뒤 빠져나와 서울로 도주했다가 붙잡혔다. 청사에 근무하는 공무원들은 신분증만으로 출입이 가능한 구조를 문제로 지적한다. 현재 세종청사는 방문객이 주민등록증 등 신분증만 제시하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다. 출입하는 과정에서 방문 목적이나 이동 경로를 확인하지 않고 있다. 누구나 1층 내부까지 접근이 가능한 만큼 마음만 먹으면 범죄에 노출되어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공무원들은 “신분증만 보여주면 들어올 수 있는 사실상 개방된 청사나 다름없다"며 “출입 목적과 동선을 확인하는 절차가 없어 불안하다"고 입을 모은다. 청사 자체의 설계 구조도 문제다. 세종청사는 애초 '공유와 개방'을 기조로 한 '열린 청사' 개념으로 설계됐다. 청사 완공 이후 국가정보원의 보안 강화 요구에 따라 담장을 추가로 설치했지만 이번 사건에서 보듯 누구나 손쉽게 뛰어넘을 수 있는 낮은 높이다. 특히 청사 옥상에 조성된 3.5km 길이의 녹지공원이 일반인에게 개방돼 있고 주요 주변 도로가 집회·시위 장소로 자주 이용되는 점도 보안 위협 요인이다. 공무원들은 “청사 자체가 외부인 접근이 너무 쉽고, 주변에서 집회·시위가 자주 발생하면 불안할 때가 많다"며 “보안시설이라기보다 일반 공공건물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고 말했다. 보안 인력 부족도 문제로 지적된다. 지난 2021년 정부세종청사 경비를 담당하던 세종경찰청 청사경비대 의무경찰이 병역자원 부족으로 철수하면서 현재는 청사관리본부 소속 청원경찰 기동대가 보안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인력 운영이 빡빡해지면서 현장에서는 불편이 커지고 있다. 공무원노동조합도 청사관리본부와 주기적으로 만나 보안 문제를 건의하고 있다. 노조 관계자는“세종청사 방호 인력들이 전반적으로 축소되는 기조로 운영되다 보니 게이트별 보안 수준이 다소 약화되는 측면이 있다"며 “특히 인력이 줄어들면서 야간이나 특정 시간대에 출입 가능한 게이트 수를 줄이고 있다"고 밝혔다. 방호 전문가들도 허술하고 느슨한 보안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한 방호전문가는 “청사 내 CCTV 관제 등 기본적인 방호 시스템은 갖춰져 있지만 출입 절차가 신분증 확인 수준에 머물러 실제 보안은 허술한 편"이라며 “문제가 생기면 일시적으로 강화됐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시 느슨해지는 '반복 구조'가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예전에도 항만이나 공항 등 주요 시설에서조차 카트칼 같은 위험 물품을 소지한 채 통과하는 사례가 있었고, 이를 걸러내지 못해 문제가 된 적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보안 강화를 위해 제도나 인력 확충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지만, 방문객 편의성과 예산 부담을 이유로 실제 반영이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청사 출입 동선 관리 강화와 소지품 검색 강화, 접견 공간 분리 운영 등 실질적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청사관리본부 관계자는 “고용노동부 사건을 계기로 별도의 출입 절차 없이 청사 로비까지 민원인이 출입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건물 외부에 안내동을 마련해 출입 동선 관리를 추진하는 방안 등 다각적인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재발 방지를 위해 안내데스크 주변 불필요한 적치물를 제거하고 사각지대 해소를 위해 안내데스크와 키오스크 위치를 조정할 것"이라면서 “스피드게이트 주변 유리 차단벽 높이 보강하고 방호 인력 대상으로는 보안 강화 교육 실시 등 조치를 완료했다"고 전했다. 김종환 기자 axkjh@ekn.kr

[2025 국감] “공급절벽은 윤 정부 3년 결과” vs “잃어버린 10년은 박원순 탓”

20일 국토교통위원회의 서울시 국정감사는 오후로 접어들며 부동산 정책 책임론을 둘러싼 여야 공방으로 달아올랐다. 더불어민주당이 윤석열 전 정부와 오세훈 시장의 주택정책 부진을 추궁하자, 국민의힘은 “공급절벽의 원인은 박원순 시정에 있다"며 오 시장을 엄호하고 맞불을 놨다. 더불어민주당은 윤석열 정부와 서울시의 부동산 정책을 싸잡아 비판했다. 이연희 의원은 “윤석열 정부가 280만 호 공급을 약속했지만 실제 공급은 반토막 났다"며 “공급절벽이 심화되는 동안 강남 3구 집값은 연일 최고가를 경신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의 집값 불안은 전 정부의 공급 실패와 서울시의 미온적 대응이 겹친 결과"라고 덧붙였다 송기헌 의원은 “시장 취임 4년이 지났는데 인허가와 착공 실적이 모두 줄었다"며 “신속통합기획으로 공급 혁신을 외쳤지만 실제 사업 속도는 정체돼 있다"고 비판했다. 송 의원은 여의도 대교아파트 재건축 사례를 들어 “인접 단지와 교통계획 협의조차 안 돼 사업이 멈춰 있는 상태에서 시행인가가 난 건 이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복기왕 의원은 서울시의 토지거래허가제(토허제) 해제 결정을 비판했다. 그는 “잠실·삼성·대치·청담 지역 토허제 해제가 강남 집값 불쏘시개가 됐다"며 “대선을 앞두고 지지층 눈치를 본 정치적 결정이었다"고 주장했다. 앞서 서울시는 지난 2월 이들 지역을 허가구역에서 해제했다가, 집값 불안이 확산되자 한 달 만에 다시 재지정한 바 있다. 민주당의 공세가 이어지자 오세훈 시장은 “사실관계부터 바로잡겠다"며 조목조목 반박에 나섰다. 그는 “재건축·재개발은 이해관계 조정이 본질이라 속도를 단순 비교하는 건 맞지 않다"며 “평균 5년 걸리던 구역 지정 절차를 2년 6개월로 단축했다"고 강조했다. 또 “사업시행인가나 착공까지는 통상 10년 이상 걸린다"며 “착공 실적이 줄었다고 공급이 멈췄다고 보는 건 구조를 오해한 것"이라고 말했다. 토허제 해제 비판에 대해서도 “그때 시장은 하락·위축 국면이었다. 거래량이 급감하고 외곽 지역 아파트값은 떨어지던 시기였다"며 “토지거래허가제는 평시엔 해제하고 급등 시 재지정하는 게 제도의 취지"라고 반박했다. 오 시장은 이어 “해제는 1년 전부터 검토해온 사안으로 정치 일정과는 무관하다"며 “그때 해제를 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시장 불안이 더 커졌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민주당이 윤석열 정부와 오 시장을 동시에 비판하자, 국민의힘은 박원순 전 시장의 부동산 정책을 정조준하며 반박에 나섰다. 김정재 의원은 “2011년부터 2020년까지 박원순 시정 10년 동안 정비구역 697곳 중 393곳이 해제됐다"며 “그 결과 주택공급이 최소 20만 호 줄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당시 뉴타운 해제 비율이 56%에 달했다. 추진 중이던 사업을 멈춰 세운 것이 오늘의 공급절벽을 불렀다"며 “이게 바로 '잃어버린 10년'의 실체"라고 말했다. 김 의원은 또 “오세훈 시장의 신속통합기획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과정"이라며 “여당이 정치공세로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배준영 의원도 “서울의 주택공급 문제를 착공 실적으로만 평가하는 건 단견"이라며 “착공은 정비구역 지정 이후 10년 이상 걸리는 과정의 끝단이다. 지금의 인허가와 지정이 향후 공급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서예온 기자 pr9028@ekn.kr

[2025 국감]“오세훈 한강버스 부실 vs 이재명 부동산 失政”

20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의 서울시 국정감사에서 여야가 '한강버스'와 '부동산 대책'을 두고 정면충돌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오세훈 시장의 역점 사업인 '한강버스'를 “세금 낭비·특혜 사업"으로 몰아붙였고, 국민의힘은 이재명 정부의 10·15 부동산 대책을 “서민 추방형 규제"라며 정면 비판했다. 먼저 이건태 민주당 의원은 “서울시가 실패한 수상택시를 '수상버스'로 이름만 바꿔 세금을 퍼붓고 있다"며 “담보도 없이 876억 원을 대출해 준 것은 SH공사(서울주택개발공사)의 설립 목적을 벗어난 행위"라고 지적했다. 그는 “서울시 재정과 SH 자금이 전체의 70% 이상을 부담하면서 민간업체 이크루즈는 49억원만 투자했다"며 “시민 세금으로 민간업체의 빚보증을 서준 꼴"이라고 질타했다. 다른 민주당 의원들도 한강버스 사업의 구조적 불투명성과 안전관리 부실 문제를 잇따라 제기했다. 천준호 의원은 “정식 운항 열흘 만에 방향타 고장이 세 차례 발생했는데 시범운항 때 고장기록조차 확인하지 않았다"며 “시민 안전을 민간기업에 떠넘긴 무책임한 행정"이라고 비판했다. 오 시장은 “SH공사는 조례상 각종 개발사업에 참여할 수 있다"며 “법령 위반이 아니고 상환 가능한 구조로 설계돼 있다"고 반박했다. 다만 담보 여부를 묻는 질의에는 “담보는 없지만 상환받을 수 있는 구조"라고 답했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이재명 정부의 10·15 부동산 대책을 집중 공략했다. 김정재 의원은 “이재명 정부의 10·15 부동산 대책은 서민을 서울 밖으로 내쫓는 추방형 정책"이라며 “서울 전역을 규제지역으로 묶어 실수요자 대출을 봉쇄했다"고 비판했다. 또 “이번 대책으로 신혼부부의 대출 한도가 7억 원에서 4억 원으로 줄었다"며 “사실상 '집 사지 말라'는 정책"이라고 주장했다. 배준영 국민의힘 의원은 “10·15 대책은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정책"이라며 “전세 시장을 말려버리고 월세만 폭등시켰다"고 맹공을 퍼부었다. 이어 “집값만 잡겠다고 서민을 거리로 내모는 게 부동산 안정이냐"며 “정부는 실수요자 대책을 외면한 채 규제의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서울시 의견조차 제대로 듣지 않고 대책을 발표한 건 지방정부를 무시한 처사"라며 “이런 식의 중앙집권식 정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김희정 의원도 “문재인 정부가 28차례 대책을 내고도 집값을 못 잡았듯, 이번 대책도 단기효과에 그칠 것"이라며 “규제 중심의 부동산정책은 시장 안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오 시장은 “정부가 발표 이틀 전에야 의견을 요청했고, 신중한 검토를 요청했지만 일방적으로 발표됐다"며 “지방정부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점이 아쉽다"고 밝혔다. 김규철 국토교통부 주택토지실장은 “단기적으로 수요 억제 효과가 있겠지만 공급 대책과 병행해 시장 안정을 추진하겠다"고 답했다. 서예온 기자 pr9028@ekn.kr

[김병헌의 체인지] 캄보디아 사태···기회의 문이 닫히면, 청년은 국경 밖으로 떠난다

서울 강남의 밤은 여전히 환하다. 하지만 그 불빛 속에 앉은 청년의 얼굴엔 그림자가 짙다. 편의점 앞 의자에 앉아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그의 눈에 '월수입 1000만 원 가능'이라는 문장이 반짝인다. 마지막 희망을 거는 손끝이 '지원하기'를 눌렀다. 그 선택이 인생의 경계선을 바꾸어 놓았다. 몇 달 뒤, 그는 캄보디아의 범죄단지에서 구조 요청 메일을 보냈다.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어디 있습니까." 그 짧은 문장이 지금 이 나라 청년들이 보내는 구조 신호이자, 한 사회의 무관심이 낳은 기록이었다. 캄보디아 사태는 단순한 외교 실패가 아니다. 그건 국가가 청년의 절박함을 외면해온 세월의 결과다. 정부는 “현지 경찰에 신고하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 말에는 한국 사회의 무책임과 체념이 응축돼 있다. 외교의 실패는 사건으로 남지만, 청년의 방치는 구조로 남는다. 우리는 이 사건을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흘려보내고 있지만, 그들의 절규는 오래전부터 이 땅에서도 들려오고 있었다. 청년 취업자는 1년 새 10만 명 넘게 줄었고, 비정규직 비율은 38%를 넘어섰다. 제조업 일자리는 14개월 연속 감소했다. 청년 네 명 중 한 명이 계약직으로 사회에 들어선다. 면접장은 점점 좁아지고, 합격 통보는 희귀해졌다. “경험이 없어서 탈락했습니다." 같은 문장이 반복된다. 경험할 기회를 얻지 못한 건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기회를 막아온 사회의 책임이다. 우리는 청년에게 언제까지 '스스로의 무능'을 증명하라 강요할 것인가. 대학은 여전히 이론의 섬 위에 있고, 기업은 즉시 쓸 수 있는 인재만 원한다. 정규직은 과보호되고, 비정규직은 버려진다. 청년이 정규직 문을 두드릴수록 그 문틈은 더 좁아진다. 정부는 매년 '청년 일자리 종합대책'을 발표하지만, 정권이 바뀌면 이름만 달라질 뿐 본질은 늘 제자리다. 정책은 소리만 요란하고, 현장은 변하지 않는다. 정년 연장과 주4.5일제는 이미 자리를 가진 세대의 안락을 위한 제도일 뿐, 아직 자리를 얻지 못한 세대의 구명줄이 아니다. 캄보디아로 떠난 청년들이 그토록 위험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돈 때문만이 아니다. 이 땅에 남아 있을 이유를 잃었기 때문이다. 더는 기다릴 수 없었던 사람들, 더 이상 시도할 여력이 없는 사람들. 그들이 떠난 자리엔 불안이 남고, 그 불안은 다시 누군가의 절망으로 이어진다. 이런 순환이 몇 번이고 반복되면 한 세대 전체가 '패배의 감정'에 익숙해진다. 독일은 대학과 기업이 함께 설계한 도제 시스템으로 청년이 졸업과 동시에 '현장 경험자'로 사회에 들어설 수 있도록 만들었다. 스위스는 청년 인턴의 임금을 정부가 일정 부분 보조하고, 정규직 전환 시 세제 혜택을 준다. 일본은 지방 중소도시에 청년 고용과 창업 클러스터를 만들어 수도권 집중을 완화했다. 그들은 청년을 '보호의 대상'이 아닌 '경제의 주체'로 다뤘다. 청년이 사회와 연결될 수 있는 길을 국가가 설계해준 것이다. 반면 우리는 여전히 단기 알바성 대책과 공허한 구호만 되풀이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돈이 아니라 구조다. 청년이 졸업과 동시에 사회와 이어지는 통로, 기업이 청년을 채용할 이유가 생기는 인센티브, 지역이 청년을 품을 수 있는 생태계, 무엇보다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을 일자리 정책의 일관성이다. 기회의 문을 여는 일은 거창한 혁신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상식을 실행으로 옮기는 용기다. 캄보디아에서 죽어간 청년의 메일은 외교부의 스팸함에 묻혔다. 지금 이 땅에서도 수많은 청년이 매일 이력서라는 이름의 구조 요청을 보내고 있다. 그들의 절박한 신호에 국가는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직접 신고하라"는 말로 책임을 미루고 있는가. 청년의 절망은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사회의 무능이 낳은 결과다. 기회의 문이 닫히면 청년은 국경 밖으로 떠난다. 그리고 그곳엔 언제나 위험이 기다린다.우리가 외면한 청년의 메일이 캄보디아의 비극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그 메일을 읽을 시간이다. 그리고 응답할 시간이다. 청년을 구조하지 못하는 사회는 스스로의 미래를 구조할 수 없다. 변화는 제도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타인의 절망을 읽어내는 감각에서 출발한다.

경북도, AI·인구정책 선도 의지 천명··· APEC D-30 앞두고 현안 브리핑

APEC 성공 개최와 추석 대비 종합 대책 발표 경주=에너지경제신문 정재우 기자 경상북도는 10월 1일 경주엑스포공원 대회의장에서 추석을 앞두고 도정 주요 현안을 종합적으로 설명하는 언론인 간담회를 열었다. 이번 간담회는 2025 APEC 정상회의 개막이 30일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 도민들에게 준비 상황을 알리고 협조를 당부하는 자리였다. 아울러 추석 명절 대비 민생 대책, 최근 국회를 통과한 산불특별법 추진 방향, 지역공약 및 국정과제 대응 계획 등도 함께 공개됐다. ▲'경북형 AI 협력 비전' 제안 이철우 도지사는 APEC 핵심 의제 중 하나인 'AI 협력'에 대응하기 위해 '경북형 AI 협력 비전'을 새롭게 제시했다. 인구 돌봄 AI, 재난 대응 AI, 문화·관광 AI, 마을 공동체 AI, 새마을 글로벌 AI 등 5대 모델을 기반으로 'AI 새마을형 미래공동체'를 조성하겠다는 구상이다. 그동안 경북도는 '메타버스수도 선포', '메타AI과학국 신설' 등으로 AI 정책을 선도해왔으며, 첨단 연구개발과 인프라 확충에 힘써왔다. 이번 발표는 단순한 기술 도입을 넘어 돌봄·재난·관광 등 도민 생활과 밀접한 분야를 AI와 접목시켜 공동체 행복을 실현하는 데 방점을 찍고 있다. ▲대한민국 인구정책 새 규범 제안 인구구조 변화 대응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제안이 나왔다. 경북도는 지난해 전국 최초로 '저출생과 전쟁'을 선포하며 인구 문제 해결에 선제적으로 나선 바 있다. 이날 간담회에서 이 지사는 이를 전국적 모델로 발전시켜 '대한민국 인구 변화 대응 규범'을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주요 내용은 △저출생 극복을 위한 구조개혁과 인식 전환 △체감 가능한 지원정책 마련 △국립 인구정책 연구원 경북 설치 △APEC 글로벌 인구협력위원회 설립 등이다. 특히 저출산·고령화는 APEC 회원국 모두가 직면한 과제인 만큼, 경북의 경험과 정책 모델을 아시아·태평양 국가들과 공유해 국제 협력의 장을 열겠다는 구상이다. ▲APEC 정상회의 개최지·의제 제안 정상회의와 관련해 이 지사는 한·미·중 정상 간 주요 회담 장소로 국립경주박물관을 제안했다. 그는 “루브르박물관에서 국제 경제질서 합의가 이뤄졌던 것처럼 경주박물관에서 새로운 자유무역 질서가 태동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또한 미국과 북한 정상이 경주에서 만나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는 '경주 빅딜'에 대한 기대도 언급했다. 더불어 DMZ 골프장 조성, 원산 조선소 건설 등을 제안하며 한반도 긴장 완화와 남북 협력의 계기를 만들자는 의견도 내놓았다. ▲추석맞이 민생안정 대책 추석을 앞두고 도민 생활 안정을 위한 종합 대책도 함께 발표됐다. 경북도는 산불 피해 지역 주민, 저소득층, 위기가구를 위한 '온기나눔 릴레이'와 이동 클리닉을 확대하고, 물가 관리와 비상진료체계 가동, 교통 편의 대책 등을 마련했다. 이 지사는 “귀성객과 도민 모두가 따뜻하고 안전한 명절을 보낼 수 있도록 세심한 준비를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산불특별법 통과에 대한 감사와 비전 지난 9월 25일 국회를 통과한 '산불특별법'과 관련해 이 지사는 “추석을 앞두고 도민께 큰 선물을 드리게 되어 기쁘다"며 국민과 공직자에게 감사를 전했다. 이어 “피해지원 및 재건위원회, 산림투자선도지구, 산림경영특구를 통해 사라지는 마을을 살아나는 마을로, 바라보는 산을 돈이 되는 산으로 바꾸겠다"고 혁신적 재창조 의지를 밝혔다. ▲지역공약·국정과제 추진 계획 경북도는 정부의 지역공약과 국정과제를 차질 없이 추진하기 위해 도·시군·연구원·민간전문가가 참여하는 체계적 관리체계를 마련했다. 또한 정부의 균형성장 전략인 '5극3특' 구상에 발맞춰 대구·경북 공동 협력사업을 지속 추진하며, 지역 발전과 국가 성장에 기여한다는 방침이다. 이철우 지사는 “APEC 성공 개최를 위해 빈틈없는 준비로 경북의 역량을 세계에 알리겠다"며 “경북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이 초일류 국가로 도약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아울러 “도민과 귀성객 모두가 가족, 친지와 함께 넉넉한 한가위를 보내기를 바란다"고 전하며 추석 인사도 전했다. 정재우 기자 jjw5802@ekn.kr

1급서비스 60% 재개…국정자원 화재 닷새째, 복구 본격화

지난 26일 대전 국가정보자원관리원(국정자원) 화재로 마비됐던 1급 정부 전산 서비스 36개 중 21개(58.3%)가 복구됐다. 윤호중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장은 30일 오전 중대본 회의 모두 발언에서 이같이 밝혔다. 이번 사고로 운영 중단된 정부 시스템은 총 647개로 지금까지 85개(13.1%)가 복구됐다. 정부는 인터넷 우체국과 우편물류 시스템을 먼저 복구했고, 복지로, 사회보장정보 포털 등 사회복지 관련 서비스도 우선적으로 운영을 재개했다. 아직 복구가 안 된 서비스와 관련해선 대체 수단 제공, 납부기한 연기, 수수료 면제 등 혼선과 피해를 줄이기 위한 대책을 실시하고 있다. 또 이번 사고로 운영이 중단된 시스템 목록과 복구 계획·현황도 네이버·다음 등 포털을 통해 공지할 예정이다. 특히 이번 사태를 계기로 극성을 부릴 것으로 예상되는 정부 기관 사칭 스미싱·피싱 등을 예방하기 위해 경찰청·금융당국 등과 함께 예방 활동에 나선다. 윤 장관은 “무엇보다도 투명한 복구 작업을 진행해 나가겠다"면서 “이번 화재와 관련해 정부 기관을 사칭한 스미싱, 피싱 범죄 가능성이 있는 만큼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해달라"고 말했다. 김봉수 기자 bskim2019@ekn.kr

정부24·우체국금융 정상화…647개 중 47개 서비스 복구

지난 26일 발생한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로 멈췄던 정부 전산망들이 속속 복구되고 있다. 행정안전부는 정부 행정정보시스템 647개 중 정부24와 우체국금융서비스 등 47개 서비스가 복구됐다고 29일 밝혔다. 전체의 7.3%가 복구된 셈이다. 윤호중 행안부 장관은 이날 오전 중대본 회의에서 “이번 장애로 인해 국민 여러분께 큰 불편을 끼쳐드린 점 깊이 사과드린다"며 이같이 밝혔다. 다만 이번 화재로 다 타버린 7-1 전산실에 설치돼 있던 96개 시스템은 곧바로 재가동되기가 어려운 상태인 것으로 전해졌다. 행안부는 해당 시스템들을 국가정보자원관리원 대구 센터의 민관협력형 클라우두로 이전해 복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윤 장관은 “주말이 지난 오늘부터 민원 행정수요가 늘어나고, 국민 불편이 확대될 수 있을 것"이라며 “오늘 회의에서 각 부처 지자체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국민 불편을 최소화할 수 있는 대책을 논의해달라"고 말했다. 김봉수 기자 bskim2019@ekn.kr

‘제시간 운행’ K-철도 명성…노·사·정 책임 떠넘기기에 깨진다

지난 8월 선로 사고 후 시작된 KTX 지연 운행 사태가 장기화 되고 있다. 고용노동청이 안전 관련 인력 확충 등 노사 합의를 조건으로 주간 선로 공사를 못하도록 막았기 때문인데, 코레일 노·사, 국토교통부 등이 서로 책임을 미루고 있다. 29일 코레일 등에 따르면 지난 8월 19일 남성현역~청도 구간 작업 근로자 사망 사고 이후 한 달 간 경부선 KTX 정시율은 62.56%에 그쳤다. 고속열차 열 대 가운데 네 대가 지연되고 있는 셈이다. 이같은 지연 사태는 사고 후 대구지방고용노동청이 코레일 대구본부 관할 전체 선로에서 열차가 운행 중인 시간의 주간 작업을 중지시켰기 때문이다. 근로자 2명이 선로 작업 중 사망한 만큼, 안전 확보 전까지는 코레일 대구본부 관할 구역 선로 전체에서 작업을 하지 말라는 얘기다. 선로 보강 공사가 완료된 구간에 한해 고속 운행이 가능한데, 주간 공사가 불가능해지면서 작업이 이뤄지지 않은 구간에선 시속 40~60㎞로 낮춰 저속 운행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문제는 코레일이 안전 확보를 전제로 한 노사 합의를 통해 작업 중지 해제 요청을 해야 철로 작업이 정상화되는데, 사고 이후 한 달이 지나도록 협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청 관계자는 “안전이 확보되기 전까지 철로 작업을 수행할 수 없다는 노조에 대해 코레일이 노조를 설득시킬 수 있는 명확한 방법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 아니겠냐"며 “열차 지연 사태를 해소하기 위해선 코레일이 노사 간 합의를 통해 선로 작업 시 안전을 확보해 작업 중지 해제 신청을 하는 것이 우선되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코레일 노조는 주간 선로 작업 시 열차가 다가오는 상황을 감지할 수 있는 근로자를 추가 배치해 근로자 안전이 완전 확보되기 전까지는 작업 중지 해제에 합의해 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코레일 노조 관계자는 “주간 작업 완전 확보를 위해선 300명 이상 추가 인력 확충이 필요한 상황"이라며 “사측은 260명 정도로 안전 확보가 가능하다면서 의견 차이를 보이는데다, 이마저도 상위 기관인 국토부 눈치를 보느라 확충 요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코레일 사측은 국토부에 책임을 미루고 있다. 사측 한 관계자는 “국토부에 인력 확보를 위한 요청을 하고 있다"며 “다만 노조와 안전 확보를 위한 인력 규모에 대해선 차이가 있는데 의견 일치를 보기 위해 소통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국토부는 코레일 노사 합의가 먼저라는 입장이다. 국토부 관계자는 “인력 충원을 위해선 기재부에 예산 조정을 해야 하는데 노조에서 요구하는 수준으로 인력을 확충하면 안전이 확보된다는 근거가 없다"며 “코레일이 먼저 노사 합의를 통해 안전 확보를 위한 근거를 마련해 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노·사·정이 KTX 지연 운행 사태의 책임 소재를 둘러 싸고 '떠넘기기'에 급급하면서 국민들의 불편만 가중되고 있다. 이에 대해 코레일 관계자는 “열차가 다니지 않는 야간 시간대에 최대한 선로 작업을 진행해 저속 운행 구간을 없애려고 노력 중"이라며 “야간 작업 확대를 통해 명절을 앞둔 다음 주부터는 지연 시간이 3분 정도 줄어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다만 야간 작업은 물리적으로 작업 시간이 부족해 지연 사태를 해소하려면 열차 운행 횟수를 감축하거나 열차 운행 시간을 줄여야 하는데 이는 국토부에 결정권이 있다"고 덧붙였다. 반면 국토부 관계자는 “열차편 및 운행 시간 감축 문제는 국민적인 설득이 필요한 사안"이라며 “단기간에 해소하기는 어려운 문제"라고 일축했다. 명절 기간 국민 불편은 가중될 전망이다. 코레일 관계자는 “노조에서 요청하는 사안들의 합의를 이뤄내기 위해선 시일이 걸린다"며 “바로 추석이라 이번 명절까지는 현재의 지연 사태가 해소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고, 경주 APEC 행사 전까지 야간 작업 확대를 통해 지연 사태를 최소화 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임진영 기자 ijy@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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