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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새로울 것 없는 유통 트렌드 ‘도긴개긴’

유통업계 기사를 쓸 때 지겹도록 마주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트렌드'이다. 유행에 민감한 업계인 만큼 시류를 잘 포착해야 하는 것이 불가피하지만, 비슷한 사례가 반복돼 진부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팝업이 대표 사례다. 짧은 시간 내 브랜드 이미지를 각인시킬 수 있어 팝업은 갈수록 유통가의 주요 마케팅 수단으로 자리 잡는 추세다. 팝업스토어 전문 업체 스위트스팟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1~6월) 운영된 팝업 스토어 수는 1488건으로 전년동기 680건 대비 2배 이상 증가했다. 그만큼 식상하다는 평도 많다. 천편일률적 구성으로 새로운 느낌을 주는 척하는 팝업들이 쏟아져서다. 공간 전환이 용이한 백화점업계만 봐도 팬덤이 두터운 인기 IP(지적 재산권) 위주로 팝업 경쟁을 벌이고 있다. IP 관련 굿즈 전시·판매, 포토존 구성의 팝업 수준이지만, 팬덤 충성도를 발판으로 '행사 기간 기대치 이상의 모객 효과를 거뒀다'는 소식이 흔하게 들린다. 상품 판매 전략도 닮음꼴이 많다. 앞서 다이소가 저가 뷰티·건강기능식품 시장을 개척한 이래 올 들어 일부 편의점·대형마트도 관련 사업을 본격화했다. 가격대마저 5000원 이하 균일가를 앞세운 다이소를 벤치마킹한 듯 비슷한 수준으로 책정하며 견제에 나섰다. 전통적으로 식품에 강점을 보였던 이들 유통업체가 '다이소 따라잡기'라는 수식어를 불사하고 유사한 전략을 밀어붙이는 이유는 돈이 돼서다. 특정 제품군에 집중하는 '카테고리 킬러' 전략을 벗어나 사업성 높은 품목으로 상품 다각화에 나선 것이다. 장기화된 경기침체로 가성비를 중시하는 소비 트렌드가 짙어지면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는 업계 중론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대내외 경영 환경이 악화일로로 치닫으면서 유통업계도 사업 불확실성을 줄이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립할 수밖에 없다는 평가가 뒤따른다. 시간 대비 인지도 제고 효과가 높은 팝업을 택하거나, 공들인 제품 연구개발보다 박리다매형 초저가 건기식·뷰티에 눈을 돌린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트렌드를 빌미로 흥행 보증된 것만 시도하는 속사정을 모르지 않는다. 다만, 그만큼 특색 있는 콘텐츠가 주목받을 가능성도 높다. 갈수록 트렌드 수명이 짧아짐에 따라 독창적인 콘텐츠를 적극 육성하고, 이를 지속가능한 성장 열쇠로 연결짓는 노력이 필요한 때다. 조하니 기자 inahohc@ekn.kr

[이슈&인사이트] 러-우 휴전과 미국과 중국 사이 한국의 고민

우크라이나 전쟁의 휴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지난 8월 15일에 미국 트럼프와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알래스카에서 회담한 이후 휴전 조건의 윤곽이 잡히고 있다. 푸틴은 현재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 지역 전역을 러시아 영토로 인정하면 즉시 휴전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우크라이나에 전혀 좋지 않은 조건이다. 도네츠크는 첨단 산업 단지가 조성되어 있고 지하자원이 많이 나오는 지역이다. 이미 크림반도를 상실한 우크라이나가 이 조건 그대로 수용하기는 어렵다. 더군다나 이는 국토 완전 수복을 전제로 많은 희생을 초래하며 긴 전쟁을 지휘해 온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전쟁 지속 당위성을 약화하고 정치지도자로서 입지를 무력화할 수 있는 어려운 선택이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휴전을 성사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와 경제 지원 단절을 압박할 수 있다. 미국의 지원이 끊기면 우크라이나는 전쟁을 계속하기 어렵다. 미국이 미래 안전보장 없이 휴전을 수용하라고 우크라이나를 윽박지를 가능성도 있다. 이는 우크라이나에 가장 안 좋은 시나리오다. 안전보장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한 휴전은 전후 우크라이나 재건도 어렵게 할 수 있다. 더군다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러시아 땅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어 양국 간 항구적인 평화 구축은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정신을 차렸다고 하지만 중장기적으로 유럽의 태도 변화와 대응도 불확실하다. 유럽이 전쟁 기간 우크라이나를 재정적·군사적으로 지원했다지만 부족했다. 유럽 일부 국가가 우크라이나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고 했지만, 그럴 능력이 없다고 보는 게 냉정한 판단이다. 미국은 유럽에 러시아의 도발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 방위비를 5%로 인상하라고 했지만, 유럽은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지도 않았다. 스페인 등 일부 국가는 이런 미국의 주장에 반대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유럽의 안보 위기가 현실이 되었지만, 유럽의 결속력은 여전히 느슨하다. 지금까지 전개 상황을 보면 결국 압박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우크라이나가 영토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휴전에 동의할 것으로 예상한다. 어떤 형태로든 미국 또는 유럽이 안전보장을 하겠지만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닐 것이다. 이 경우 우크라이나는 정상적인 국가로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유럽과 러시아 사이 완충지대 역할을 하는 반쪽 국가로 남을 것이다. 이런 현실은 한국에 큰 교훈이다. 한국은 우크라이나와 달리 한국전쟁 이후 한미동맹이라는 확실한 안전보장 장치를 확보했다. 그동안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한미동맹이 지금의 부강한 한국을 만든 여러 배경 중 하나다. 주한미군의 핵심 기능은 북한 도발 억제다. 최근 이런 원칙이 흔들리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대결이 고조되고 중국, 러시아, 북한 등 세력이 동북아와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급성장한 중국의 경제·군사력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은 한국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과 역할 변경을 수용할 것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앞으로 대북 억제와 한국의 방위는 한국이 전담하고 미국과 중국이 대결하면 한국이 미국을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중국의 대만 침공 등 만약 동북아 지역에서 전쟁이 발생하면 한반도는 미국과 중국 대결의 최전선이 된다. 북한도 참전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은 강력한 재래식 전력을 보유하고 있어 우크라이나같이 군사적 열세에 놓이지는 않겠지만, 엄청난 인명과 재산 피해를 볼 것이다. 한국을 지탱하는 제조업과 무역 기반은 타격을 받을 것이고 한국 경제와 사회는 파탄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블룸버그 이코노믹스(Bloomberg Economics)는 중국이 대만과 전쟁을 하면 한국의 GDP가 23% 이상 감소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한국 경제를 파괴할 수 있는 치명적인 수준의 피해다. 이런 난감한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한국의 새 정부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고 애쓸 것이다. 그러나 현 트럼프 행정부의 행보를 보면 미국이 한국의 미국과 중국 사이 줄타기 시도를 용인하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북한과 중국에 유화적인 한국이 이런 외통수 상황에서 대안을 찾아보려고 무리수를 두게 되면 미국과 중국 모두에 외면당하고 고립되는 치명적인 전략적 실수를 초래할 수 있다. 정말 어려운 상황이다. 한국 정부의 선택은 언제나 한국의 안전이어야 한다. 한국의 체급 및 지정학적 한계 때문에 선택의 폭이 제한적이다. 그래도 이번 정부는 한국을 위한 최고의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상호

[장박원 칼럼] MAGA의 역설

기원전 454년 아테네 몰락의 시발점이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지도자 페리클레스가 델로스 동맹의 공동 금고를 아테네로 옮기도록 한 것이다. 금고를 좀 더 안전한 곳에 보호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진짜 목적은 동맹의 자산을 독점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그 이후 금고 자금은 파르테논 신전 건설을 비롯한 아테네 공공사업에 유용됐다. 동맹국 기여금이 본래 목적인 페르시아 제국 방어가 아닌 아테네 정부의 쌈짓돈으로 전락한 셈이다. 더 나아가 아테네는 공납금을 증액했다. 기원전 431년부터 30년 가까이 이어진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재정난에 처하자 동맹국의 팔을 비틀었다. 그렇게 전쟁으로 구멍 난 재정을 충당하려고 했다. 아테네의 갑질에 동맹국들의 분노와 불만은 쌓여갈 수밖에 없었다. 아테네 주도의 델로스 동맹은 공동 안보와 협력을 위해 결정됐다. 공동 금고를 중립 지대인 델로스 섬에 놓기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제국을 물리친 아테네가 강력한 해군력으로 지역 안보를 책임지는 대신 동맹국들은 함선이나 공납금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아테네가 '제국의 본성'을 드러내기 전까지 델로스 동맹은 굳건했다. 하지만 '아테네를 위대하게' 만들려는 페리클레스 등장 이후 균열이 생겼다. 아테네와 동맹국들은 파트너십에서 예속 관계로 바뀌었다. 그 결과 자발적 참여와 협력이 강점이었던 델로스 동맹의 경쟁력이 사라졌다. 권위주의 체제인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다를 바 없었다. 동맹의 붕괴는 아테네 민주주의가 쇠퇴한 결과이기도 했다. 기득권 세력과 사익만을 추구하는 선동가들이 정치판을 쥐락펴락하며 아테네 민주주의는 길을 잃었다. 국가와 시민에 대한 지도자들의 애국심과 책임은 실종됐다. 동맹국에 대한 예의도 사라졌다. 아테네 유력 가문 출신인 알키비아데스는 개인의 영달을 위해 적국인 스파르타로 망명했다. 그의 배신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패배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기도 한다. 아테네의 역사를 길게 소개한 이유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이 비슷한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과 중국의 권위주의 체제에 맞서 시장과 자유 무역을 근간으로 하는 민주국가 동맹을 이끌었다. 미국이 손해를 보더라도 동맹국을 위한 공동 안보와 협력에 희생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이런 전통을 무너뜨리고 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라는 구호 아래 동맹국에게도 무리한 요구서를 내민다. 모든 국가를 거래상대로 여기며 미국에 손해를 끼치면 보복하고 이익이 돼야 상대를 해주는 식이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동맹국인데도 관세폭탄을 퍼붓고 과도한 방위비 분담을 압박하고 있다. 26일 열린 한미 정상회담 역시 분위기는 좋았으나 주한미군 부지 소유권을 넘기라는 등 수용하기 힘든 청구서를 내밀었다. 한미 정상회담 이후 이어질 실무 협상에서 어떤 돌발 변수가 나올지 알 수 없다. 한국 기업들도 트럼프 대통령의 터무니없는 요구에 좌불안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기업들에게 정부 보조금을 받는 대가로 지분을 내놓으라는 기상천외한 제안도 서슴지 않고 있다. 트럼프의 폭주에 미국 민주주의도 흔들린다. 언론사와 대학, 사법부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표현의 자유 같은 민주주의 핵심 가치가 도전받고 있다. 불법 이민자를 단속하겠다며 여러 지역에 주 방위군을 투입하겠다고 한다. 야당 지지율이 높은 도시들이 주요 표적이다. 심지어 통화정책의 독립성을 보장해야 할 연방준비제도 의장까지 기준금리를 내리라고 겁박하고 있다. 몽테스키외는 로마 제국의 번영이 몰락을 불렀다고 주장했다. 그의 탁견은 지금의 미국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미국의 번영을 외치는 트럼프의 'MAGA' 역시 미국의 쇠락을 재촉하는 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경고는 빗나가는 법이 없다. 동맹국에게까지 무리한 청구서를 내밀면서 말을 듣지 않으면 관세폭탄을 퍼붓는 갑질의 최대 피해자는 결국 미국일 가능성이 높다. 아테네와 로마가 그랬듯이 그 고통은 고스란히 미국의 미래 세대가 받게 될 것이다. 'MAGA의 역설'이 뻔히 보이는데도 트럼프의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 현 상황이 당혹스러울 뿐이다. 장박원 기자 jangbak@ekn.kr

[기자의 눈] 갈 길 잃은 주식 양도소득세 대주주 기준…정책 신뢰 회복하려면

'자본시장 활성화'라는 정책 목표를 위해 '소득 있는 곳에 세금 있다'는 원칙은 뒤로 미뤄야 할까? 대주주 양도소득세 보유 기준을 두고 정부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지난달 31일 기획재정부가 대주주 양도소득세 기준을 현행 50억원에서 기존 10억원으로 되돌리는 세제개편안을 발표했다. 기획재정부는 '원칙'을 강조했다. 대주주 양도소득세 기준 관련 보도자료 소제목은 '응능부담의 원칙에 따른 세 부담 정상화'다. 응능부담(應能負擔)은 모든 납세자가 능력에 맞게 세금을 내야 한다는 뜻이다. 소득세가 대표적이다. 모든 직장인은 소득 수준에 따라 세금을 달리 낸다. 조세 정의와 과세 형평성 관점에서 바람직하다. 주식 투자자들은 크게 반발했다. 국회에 올라온 '대주주 양도소득세 기준 하향 반대에 관한 청원'에 15만명이 동의했다. 연말에 대주주가 양도소득세를 회피하기 위해 주식을 팔아 물량을 내놓으면 주가가 하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연말에 대주주가 주식을 대거 내다 팔면서 주가가 왜곡되는 경향은 있는 듯하다. 다만 전체 지수의 상승과 하락에도 영향을 주는지 분명하진 않다고 기획재정부는 설명했다. 여론에 민감한 여당은 한발 물러섰다.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지난 11일 “양도소득세 부과 대주주 기준을 현행 50억원으로 유지하는 안을 정부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이어 “대주주의 매도로 시장이 출렁거리면, 종목당 10억원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작은 개미들의 주식 가치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가뜩이나 변동성이 큰 우리 주식시장에는 좋지 않은 신호"라고 말했다. 세금 문제는 과세 그 자체보다 세제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지가 더 중요하다. 다른 말로, 예측 가능성과 일관성을 지켜야 세제에 관한 신뢰가 만들어진다. 주식 양도소득세 대주주 기준은 1999년 도입됐다. 지난 20여 년간 계속 대주주 기준을 확대했다. 1999년 100억원에서 시작해 50억, 25억, 10억원으로 금액 기준을 낮췄다. 2020년에는 이를 모든 개인 투자자에게 적용하는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 도입 논의까지 이르렀다. 결국 문제는 '원칙'과 '현실' 사이의 균형이다. 조세 정의라는 대의명분과 자본시장 활성화라는 정책 목표가 충돌할 때, 정부는 어느 한쪽만 붙잡을 수 없다. 투자자들의 신뢰는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에서 비롯된다. 대주주 기준을 어디에 두든지, 더 중요한 것은 '일관된 룰'을 세우고 그 룰을 존중하는 자세다. 오락가락하는 기준 속에서 잃어버린 것은 세수가 아니라 시장의 신뢰다. 최태현 기자 cth@ekn.kr

[김성우 시평] 해상 탄소배출의 유료화

김성우 김앤장 법률사무소 환경에너지연구소장/기후대응기금 운용심의위원 전세계 바다를 누비는 배가 배출하는 이산화탄소의 양은 무려 일년에 10억톤에 달한다. 이는 하늘을 누비는 비행기가 배출하는 이산화탄소의 양보다 많고, 한국이 배출하는 배출량의 약 1.5배에 달하는 엄청난 양이다. 그렇다면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가면서 배출하는 이산화탄소는 한국의 책임일까? 미국의 책임일까? 아니면 선주나 화주의 책임일까? 국제 사회가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정하는 기후변화협약(UNFCCC)의 부속 의정서(교토의정서)에 따르면, 국제 해운 및 항공 부문의 온실가스 배출은 타 부문과 달리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International Civil Aviation Organization)와 국제해사기구(IMO, International Maritime Organization)를 통해 별도로 제한 또는 감축을 추진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는 해상 탄소배출량의 국가별 할당이 기술적, 정치적으로 복잡하기 때문이다. 또한, UN 산하의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로서 배출량 산정방법을 가이드하는 IPCC(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도 국제 해운 및 항공 연료로 인한 탄소배출량을 국가별 배출총량에서 제외하고 별도로 보고하도록 권고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에 따라 국제 해운 부문에서는 IMO가 해상 탄소배출에 대한 규제 주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으며, 이는 해운사들이 정해진 기한 내에 특정 목표를 달성하도록 기준을 강화하고 경제적 페널티를 부과하는 제도를 포함한다. 대표적으로, 2022년 국제해상환경보호협약(MARPOL, International Convention for the Prevention of Pollution from Ships) 부속서 VI 수정안이 발효됨에 따라, 에너지 효율 기존선 지수(EEXI, Energy Efficiency Existing Ship Index)와 탄소집약도 지수(CII, carbon intensity indicator)를 통해 기술적·운영적 효율 향상을 유도하는 제도의 도입을 꼽을 수 있다. 이는 출력제한/바람활용/프로펠러최적화 등을 통해 에너지효율 향상을 도모하거나, 속도최적화/생물부착관리/대체연료사용 등을 통해 탄소집약도 향상을 촉진하는 승인 및 등급 제도이다. 더욱이, 지난 4월 제83차 해양환경보호위원회(MEPC 83)에서 국제해운 탄소중립(Net Zero)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총톤수 5천톤 이상의 선박을 대상으로 선박연료온실가스집약도(GHG Fuel Intensity) 신설을 합의했을 뿐만 아니라 CII의 감축률 상향 등을 결정해, 규정 강화의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이로 인해 2028년부터는 충분한 감축이 되지 않으면 이산화탄소톤당 50만원이 넘는 개선금을(Remedial Unit) 지불해야 한다. 전세계에서 가장 비싼 유럽연합(EU)의 탄소배출권 가격이 약 톤당 10만원이고, 우리나라의 탄소배출권 가격은 약 톤당 1만원인 점을 고려하면 부담이 큰 금액이다. 글로벌 규제만 강화되는 것이 아니고 지역 규제도 강화된다. 유럽연합(EU)의 경우, 아예 EU내 항구간 이동은 물론이고 해외 항구와 EU 항구를 오가는 대형 선박에 대해서도 일정 배출량만큼 EU 배출권거래제의 배출권을 구입하도록 2024년부터 강제하고 있다. 또한, 올해부터 발효된 FuelEU Maritime Regulation에 의해 대형 선박이 EU항구에 들르는 경우, 온실가스집약도(GHG intensity)를 2020년 대비 2025년 2프로 감축으로 시작해 2050년 80프로까지 감축해야 한다. 해운사는 효율기술적용, 저탄소연료변경, 사업모델개선 등을 선택해 규제에 대응해야 한다. 해운업계의 탄소중립 달성위한 감축수단의 기여도는 암모니아(32%), 에너지효율(20%), 수소(14%), 바이오연료(12%) 등의 순이다. 다만, 비중이 높은 연료전환은 해운사가 독자적으로 대응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특히, 대체 연료 수급의 경우, 해운업계의 친환경 연료 수요는 연간 4800만톤 규모인데 반해, 현재 전체 부문에 대한 공급량은 6300만톤 수준이고, 대체 수단이 더 부족한 항공업계의 수요에 밀릴 가능성도 있다. 중장기적으로 조선 및 정유업계와의 협력은 물론 정부의 지원도 필수적인 이유다. 그러나, 규제가 이미 시행되었고 강화가 임박했으니, 연료전환 노력과 더불어 다양한 기술을 활용한 효율성 제고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DNV 2024년 Maritime Forecast 보고서에 따르면, 운영 및 기술적 에너지 효율성 조치를 통해 2030년까지 연료 소비를 16%까지 줄일 수 있다고 한다. 이는 1억톤이 넘는 이산화탄소 배출 감축을 의미한다. 바야흐로 해상 탄소배출의 유료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경제 불확실성 하에서 저가 경쟁과 시황 등락으로 경영난에 시달리는 해운업계는 비상이다. 하지만, 조선업계가 친환경 규제를 LNG선박 수주 등 경쟁력 강화에 역으로 활용했듯, 해운업계도 기술과 협력으로 오히려 비용을 절감하고 경쟁력을 강화할 부분은 없을지 면밀히 따져봐야 할 타이밍이다. 김성우

[기자의 눈] 반기업 입법 폭주와 여권의 인식 수준

지난 24일 국회 본회의에서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노동조합법 2·3조 개정안(속칭 '노란봉투법')이 통과됐다. 노란봉투법은 사용(使用)자의 범위와 노동쟁의 대상을 확대하고 기업이 파업 근로자에 대해 손해배상 청구를 하지 못하게 함을 골자로 하는 법안으로,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재임 당시 거부권을 행사해 폐기된 바 있다. 그러나, 이재명 정권이 출범하자마자 여당인 민주당은 압도적인 의석수를 앞세워 기어코 재발의했고, 입법에 성공했다. 재계는 즉각 강한 유감을 표시하고, 향후 노사간 법적 분쟁이 빈발할 것을 우려했다. 이런 가운데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지난 20일 출입기자 간담회에서 “노란봉투법 때문에 기업들이 해외로 나가면 그때 법을 고치면 된다"고 말했다. 정말 그렇게 한가한 소리를 할 때인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재계는 국내외 투자기업들의 한국 탈출이 현실화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실제로 당장 주한유럽상공회의소(ECCK)는 노란봉투법이 시행될 경우 한국 시장에서 철수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표명했고, 주한미국상공회의소(AMCHAM) 역시 마찬가지 입장이다. 심지어 철수 카드를 꺼내든 한국GM이 이를 현실화 할 수 있도록 하는 구조도 만들어지는 판이다. 가뜩이나 국내 기업들은 설비 폐쇄, 희망퇴직 등을 단행하며 구조조정을 해왔고, 삼성전자·현대자동차·포스코·HD현대·한화오션 등은 관세 문제로 해외 생산 거점을 확대하는 형국이다. 그런데도 입법 후 사후효과를 보고 법 개정을 하면 떠난 기업들이 쉽게 돌아와 일자리를 다시 창출해줄 것이라고 믿는 것인지 대통령실의 상황 인식 수준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수술 후 환자가 죽으면 의사가 살려내면 된다는 궤변과 다를 바 없다. 거여(巨與)의 폭주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국증권시장의 오랜 문제인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와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명분으로 한 상법 개정안으로도 이어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코스피 5000 시대'를 열겠다고 공언했지만 이 같은 움직임은 '경영권 불안정→해외 투기 자본의 단기 이익 추구 확대→기업 경쟁력 약화→소송 남발·비용 부담 증가'의 메커니즘에 의해 기업 가치 훼손과 투자자 손실 우려를 낳고 있다. 정권의 당초 의도와는 다르게 시장 참여자들에게 '강력한 국장 포기 시그널(신호)'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정부·여당의 경제법안 행보가 신중해지기를 바란다. 박규빈 기자 kevinpark@ekn.kr

[이슈&인사이트]지속 가능한 대한민국의  미래를 여는 길’

비물질문화는 눈에 보이는 건물, 자동차, 의복과 같은 물질문화와 달리, 예술·전통·가치관·공동체적 신뢰·도덕·약자를 배려하는 마음과 같은 무형의 자산을 뜻한다. 전남 나주의 한 벽돌 공장에서 이주 노동자를 지게차에 묶어 들어 올리는 가혹 행위가 뉴스에 보도되면서 우리나라 비물질문화의 수준과 대안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필자는 우리나라 물질문화의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를 살펴본 후, 우리나라 비물질문화의 수준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차와 사는 집, 입고 다니는 의류 수준은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먼저, 2024년 한국의 명목 GDP는 약 2조 달러(세계 10위권) 수준이고, 1인당 GDP는 약 3만 3천 달러(2023년 기준)로 OECD 평균보다는 약간 낮지만, 동아시아 신흥국보다는 높은 편이다. 그리고 한국은 세계 7위권 수출국이다. 특히 반도체, 자동차, 조선, 배터리, 철강, 디스플레이 등 첨단 제조업에 강점이 있다. 자동차는 현대·기아차를 중심으로 세계 5위권 생산국이자 수출국이다. 2025년 현재, 한국은 1가구 1차량 보유가 보편화되었고, 등록 차량은 약 2,600만 대에 달하고 있다(인구 2명당 자동차 1대꼴). 둘째, 우리나라 대표적인 주거 형태는 아파트이다.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도 아파트 거주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나라이다. 1970년대 급격한 도시화와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공급되면서 형성된 독특한 주거 문화이다. 대한민국에서 아파트에 거주하는 가구의 비율은 약 52%이다. 즉, 2020년 기준 일반 가구 2,093만 중 1,078만 가구가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고, 단독주택에는 30%인 635만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셋째, 우리나라의 패션·화장품 소비는 세계 상위권을 달리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패션·화장품·의류는 'K-패션'이라는 이름으로 아시아 주요 시장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다. 우리나라의 비물질문화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공동체 간 신뢰, 도덕 수준, 약자를 배려하는 마음 등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의 척도로 그 나라 정신문화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한국의 대인 신뢰 수준은 OECD 평균보다 낮은 편이다. OECD(2023)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다른 사람을 신뢰한다"라는 응답은 약 53%로, 스웨덴·덴마크 등 북유럽 국가(70~80%대)에 비해 유의미하게 낮게 나타났다. 신뢰가 낮다는 것은 곧 공동체 의식이 제도적·정서적으로 약화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2024년 국제투명성기구(TI)의 부패지수(CPI)에서 한국은 64점(100점 척도)으로, 아시아·태평양 지역 평균(44점)보다 높은 수준이며, 세계 180개국 중 30위를 기록했다. 세계 정의 프로젝트(WJP)의 법치 지수에서 한국은 0.73점(1척도)을 꾸준히 유지해 왔으나, 부패 관련 평가는 0.67점으로, 상대적으로 높지 않다. 즉, 제도적 규범과 도덕적 원칙이 어느 정도 자리 잡고 있지만, 경제 규모에 비하면 도덕 지수는 매우 낮은 편이다. 우리나라 비물질문화 수준을 짐작할 수 있는 두 사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2011년 1월 석해균 삼호주얼리호 선장을 살린 일을 계기로 우리나라에 닥터헬기가 도입되었다. 이 일을 주도적으로 했던 아주대 이국종 교수는 어느 언론 매체와 인터뷰하면서 닥터헬기 발전을 위한 고견을 나누었다. 기존 아파트 단지에 더해 광교 신도시까지 개발되면서 유명 건설사 아파트들이 밀려들어 오자, 입주민들이 헬리콥터 소음을 문제 삼아 외상센터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상욕을 쏟아내는 일이 잦아졌다. 헬리콥터의 로터 소리는 생사의 기로에 선 환자를 이승으로 끌고 오는 소리였으나, 주민들에게는 정적을 깨뜨리는 소음에 불과했다. 생사의 기로에 선 환자가 우리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는 것은 사회 구성원 간의 연대 의식에서 비롯된다. 연대와 상생, 공존의식이 있는 유럽사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다. 화려한 고층 빌딩에 살면서 주변 사람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전형적인 '문화 지체 현상'에 속한다. 물질문화의 속도(아파트 수준)는 시속 300km이지만, 비물질문화의 속도(공동체 의식)는 시속 30km에 불과하다. 아울러 서두에서 언급했던 전남 나주에서 발생한 이주 노동자 지게차 사건이다. 나주의 벽돌 공장에서 근무하는 스리랑카 국적의 30대 근로자는 지게차에 실린 벽돌 더미에 비닐로 몸이 칭칭 감긴 채 결박되어 끌려다니다가, 급기야 리프트를 올려 공중에 들어 올려졌다. 많은 언론 보도를 통해 정부가 심각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대책을 모색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와 나그네를 무례하고 함부로 대하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의 국격에 어울리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세계적 수준의 물질문화를 이룩한 나라다. 아파트, 자동차, 의복과 같은 생활 수준은 선진국과 견줄 만큼 빠르게 성장했다. 그러나 그 화려한 외양 속에 숨겨진 비물질문화의 빈약함은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문제를 드러낸다. 공동체적 신뢰 부족, 도덕성 약화, 약자 배려의 결핍은 닥터헬기 소음 민원과 이주 노동자 학대 사건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이런 비물질문화의 발전 속도와 물질문화의 발전 속도의 불균형은 단순한 문화적 차이를 넘어 사회적 갈등과 신뢰의 붕괴를 낳는다. 이제 한국 사회는 눈부신 경제 규모와 생활 수준에 걸맞은 정신적 성숙과 공동체적 연대를 확보해야 한다. 제도적 규범을 강화하고, 일상 속에서 신뢰와 배려를 실천하며, 공동체 의식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지속 가능한 대한민국의 바람직한 미래를 여는 길이다.

[데스크 칼럼] 체코 원전 수주 논란의 진짜 교훈

한국수력원자력 등 '팀코리아'가 지난 6월 4일 최종 계약한 체코 원전 수주를 둘러 싸고 논란이 일고 있다. 50년간 1기당 1조원대의 로열티 지급, 차세대 소형모듈형원자로(SMR)의 기술 자립 검증 실시, 원전 수출 지역 제한 등 2015년 개정된 한미 원자력협정보다 내용상 후퇴했다. '노예·매국 계약'이라는 비판과 백지화 요구까지 나온다. 반대 쪽에선 전형적인 정권 교체 후 정치 공세라고 반박한다. 감정적 대응은 금물이다. 철저한 상황 분석과 현실 인식, 냉철한 대차대조표 작성과 구조적인 해법 모색이 필요하다. 먼저 원자력 기술이 국가 안보와 직결된다는 점과 미국 우위의 기술 패권 구도를 인식해야 한다. 원자력 기술은 미국이 2차대전을 종결시키기 위해 총력을 다한 것으로, 대부분의 국가에서 에너지 공급의 핵심이다. 핵폭탄·원자력 잠수함 등 군사적 활용, 의료·산업용 기술 등까지 국가 안보와 직결된다. 미국은 그래서 1950년대부터 법과 제도를 정비해 원천기술을 국가 안보의 명분으로 철저히 관리해왔다. 이번 계약에서 웨스팅하우스의 배후로 미국 에너지부(DOE)가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배경이다. 현재로선 한국이 아무리 독자 기술 개발을 주장해도 미국의 허락이 없다면 수출이 사실상 불가능한 구조다. 반도체 산업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은 기술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원천 기술 통제 체제를 철저히 유지하고 있다. 첨단 극자외선 노광 장비(EUV 리소그래피)가 대표이다. 네덜란드의 ASML사가 만들지만, 미국은 포토리소그래피의 개념, 레이저, 광학계까지 대부분의 원천 기술 지식재산권(IP)을 갖고 있다. 미국은 “우리 기술이 쓰였으니 수출하지 마라"고 한마디만 하면 된다. 미국은 미래 핵심 기술인 인공지능(AI) 시장에서도 원천 기술을 이용한 '알박기'를 본격화하고 있다. 올해초부터 전 세계 국가를 3등급으로 나눠 핵심 장비인 그래픽 처리 장치(GPU)의 수출을 통제했다. 학습데이터 관리, 모델 학습 서비스 규제 등에도 나서고 있다. 원자력, 반도체, AI는 모두 미국이 기술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문제는 우리나라다. 지난 50년간 원전을 건설해 최고의 시공 능력을 갖췄다. 반도체 생산 기술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미국 기술에 종속된 구조를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그나마 AI는 시장·기술 공백이 있어 우리나라에게도 아직 기술 주권을 가질 기회가 남아 있긴 하다. 원전의 경우 미국의 허락없이는 수출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기가 어렵다는 게 밝혀졌다. 이번 체코 원전 수주 논란은 막대한 로열티를 내는 대신 시장에서의 생존을 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2015년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 당시 '원전 수출 자율권'을 따냈다며 기세 등등했던 국내 원전 관련자들은 부끄러워 해야 한다. 특히 한미 원자력협정 내용보다도 후퇴한 계약을 체결해 사실상 기술 주권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소송으로 갔어야 한다는 지적도 타당성이 있다. 이번 체코 원전 수주 논란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진정한 교훈은 이같은 글로벌 기술 패권 구조를 냉철히 인식하고 진짜 국익을 취하는 것이다. 또 미래 산업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계획을 짜고 실행해야 한다. 김봉수 기자 bskim2019@ekn.kr

[기자의 눈] 중대재해 잡겠다는 정부, 돌연 리스크 떠안은 은행

정부가 최근 이슈가 된 기업 중대재해사고의 해결책으로 '자금 옥죄기'를 이용하겠다고 선언한 뒤 은행권의 짐이 늘어난 모양새다. 최근 정부는 금융권에서 한 단계 구체화 된 심사 반영안을 꺼냈다. 대출의 신규 취급과 만기 연장 과정에서 기업의 안전관리 수준을 따져 금리와 한도를 조정하는가 하면 기존 대출도 약정 변경 시 한도 축소나 인출 제한에 처해질 수 있도록 했다. 중대재해 이력이나 안전 관리 수준에 따라 정책금융 평가도 달라진다. 공시나 ESG평가에 반영함으로써 투자자 판단에도 영향을 주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은행권은 최근 신용평가 체계 확립을 위해 구체화 단계에 돌입했다. 그러나 일각에선 정부의 '중대재해 뿌리뽑기'라는 짐을 돌연 은행권이 떠안게 된 게 아니냐는 시각이 존재한다. 아무래도 대출과 관련된 변화가 이번 제도의 핵심축이므로 은행에서 직접 수행할 일이 많아지기 때문일 것이다. 은행권 내부에선 무엇보다 새로운 리스크를 떠안아야 하는 데 대한 불만과 우려가 높다. 기업에겐 목숨과도 같은 대출 문제를 은행이 평가하고 판단하게 되면서 기업과의 첨예한 갈등 문제가 따라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특정 산업군에 집중된 문제를 갑작스레 금융권이 뛰어들어 해결하는 모양새기에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며 “그 과정에서 안전문제라는 비재무적 요소를 두고 기업의 책임을 가려내야하고, 법적 공방으로 이어질 수 있는 점까지 모두 은행이 갑작스레 떠안은 리스크"라고 말했다. 정부가 여러 방향에서 정책을 밀어붙이는 통에 정부의 또 다른 기조와 부딪히는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은행은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산재가 많은 업종이나 기업에 대출을 꺼리게 된 현실이지만, 이는 정부가 기업에 자금을 흘려보내라는 기조와 반대되는 행보다. 은행은 비슷한 문제로 상생금융 지원 규모를 다방면으로 늘려야하는 분위기 속에 밸류업 정책도 이뤄내야 하는 이슈에서 고민이 많다고 토로한다. 기업의 생명줄인 자금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면 기업들이 안전 관리에 있어 확실하고 빠른 변화를 보이게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를 빠르고 확실하게 해결하기 위해 목표만 바라보면 필연 다른 곳에서 탈이 나기 마련이다. 속도와 강도도 중요하지만 조화와 균형을 고려한 정책도 병행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박경현 기자 pearl@ekn.kr

[EE칼럼] LNG 트레이딩 역량 강화가 시급하다

미국과의 관세 협상이, 상호관세 15%, 미국 투자 펀드 3,500억 달러 조성, 미국산 에너지 4년간 1,000억 달러 구매를 골자로, 우여곡절 끝에 일단락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추진하는 미국의 무역적자 개선, 재정수입 확보, 제조업 부활, 에너지 패권에 거의 부합하는 맞춤형 협상 타결로 보여 뒷맛이 개운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협상 결과 우리나라는 향후 4년 동안 매년 250억 달러 상당의 미국산 에너지를 수입해야 한다. 미국산 에너지 수입액이 이미 2024년 기준으로 약 232억 달러에 이르고 있어, 매년 20억 달러 내외의 추가 수입은 큰 부담이 아닐 수도 있다. 게다가 추가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는 미국산 LNG 수입 비중은 현재 12% 정도에 지나지 않고, 상당수의 가스공사 장기 도입 계약이 만료 시점을 앞두고 있어, 미국산 LNG 수입 증가는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LNG 수입을 최전방에서 책임지고 있는 가스공사의 속내는 매우 복잡해 보인다. 국내 LNG 수요의 급격한 감소를 전망하고 있는 비현실적인 법정 수급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작년 말 확정된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르면, LNG 발전량은 2022년 157.7TWh에서 2038년 74.3TWHh로 약 53% 감소한다. 재생에너지와 원자력 비중을 각각 29.2%, 35.2%까지 늘려 잡은 반작용이다. 계획이 실현될 경우, 발전용 LNG 수요량은 덩달아 약 1,200만 톤가량 줄어들게 된다. 가스공사의 장기계약 물량 중 2024년부터 2026년 사이 만료되는 1,300만 톤에 거의 육박하는 엄청난 물량이다. 장기계약 기간은 주로 20년이다. 가스공사가, 향후 15년 이내에 발전용 LNG 수요가 반 토막 나는 법정 수급계획을 무시하고, 20년 기간의 대규모 도입 계약에 선뜻 나서기 어려워 전전긍긍하고 있는 이유다. 실제로 현재 가스공사는 카타르 및 BP와의 신규 계약을 통해 358만 톤 물량을 대체했을 뿐, 나머지 물량에 대해서는 미국산 LNG로 대체하는 안 등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계획의 수립과 실현은 다르다. 계획은 의지의 표현이라면, 실현은 의지와 현실적 제약 간 타협의 결과다. 정부는 계획을 통해 재생에너지, 원자력 등 무탄소전원 중심의 에너지전환 의지를 밝히고 있지만, 현실적 제약으로 가득 찬 세상이 정부의 의지대로 움직여 줄지는 미지수다. 오히려 신규원전 완공 지연, 계속 운전 기간 단축, 재생에너지 확대 한계 등과 같은 현실적 제약을 감안하면, 무탄소전원은 계획 대비 턱없이 부족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LNG 도입 계약을 계획에만 입각해 체결할 경우,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 국가적 에너지 부족 사태에 직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에너지안보의 직접적인 위협 요인이다. 가스공사는 에너지안보 차원에서 법정계획의 수요 전망을 사뭇 초과하여 LNG 도입 계약을 체결할 필요가 있다. 잉여 물량 해소보다 에너지부족이 초래하는 손실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부는 법정 에너지수급계획의 경직성을 완화해 법적 리스크를 줄여 주어야 한다. 미국 에너지정보청이 정부의 정책 의지와 별도로 다양한 현실적 가능성에 입각하여 발표하는 에너지아웃룩과 같은 형태면 충분해 보인다. 전체 물량의 과부족만 문제가 아니다. LNG 수요의 변동성 확대가 더 큰 문제다. 자연 조건에 따라 들쭉날쭉한 재생에너지의 간헐성 확대를 에너지저장장치(ESS)만으로 대응하기 어려워 LNG 발전의 병용이 필수다. 따라서 재생에너지의 변동성은 LNG 수요의 변동성으로 곧바로 이식되어, LNG 수급의 단기적 불일치가 수시로 일어날 가능성을 높인다. 이래저래 LNG 과부족의 빈번한 발생은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이처럼 수급의 불확실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가장 효율적인 수급 안정화 방안은 트레이딩 역량 강화다. 가스공사는 단순한 수입공급사를 넘어 고도의 트레이딩 기업으로 거듭나야 한다. 가스공사는 연간 약 3,600만 톤의 LNG를 수입하는 세계 최대 수입사일 뿐만 아니라, 1,216만㎘에 달하는 단일 기업 최대 저장시설과 전국 단일 천연가스 환상망을 보유하고 있다. 트레이딩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물류, 운송, 저장시설과 같은 하드웨어 조건을 이미 구비하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시장 정보 분석, 금융 리스크 관리, 시장 참여자 간 네트워크 등 소프트웨어 능력은 한참 뒤져있는 것이 현실이다. 향후 에너지 수급의 불확실성이 심화될수록, LNG의 전략적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가스공사의 수급 조절 능력은 곧 국가 에너지 안보의 핵심이다. 가스공사의 트레이딩 역량 강화는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다. 박주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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