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에경 초대석] 서인원 교수 “드라기 리포트, 혁신 발목 잡은 EU의 자성…韓, ‘규제 합리화’ 거울 삼아야”

2024년 9월, 이탈리아 총리를 역임한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 중앙은행(ECB) 총재가 유럽연합(EU)의 전반적인 산업 경쟁력 하락과 위기를 진단한 '드라기 리포트(The Future of European Competitiveness)'를 발간해 글로벌 정책·첨단 산업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동안 이른바 '브뤼셀 효과'를 내세워 전 세계 규제 표준을 선도해 온 EU가 오히려 자국의 비합리적이고 획일적인 규제로 인해 미국과 중국에 혁신 주도권을 내주었다며 자성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역시 인공 지능(AI) 기본법·플랫폼 독과점 규제·망 이용 대가 등을 두고 신 산업 진흥과 이용자 보호라는 딜레마를 겪고 있다. 혁신의 발목을 잡는 '규제의 덫'을 경계하고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해야 할 지금, 선진 규제 국가였던 EU의 태도 변화는 우리 정책 당국과 산업계에 중대한 시사점을 던진다. 이에 본지는 드라기 리포트가 지닌 의미와 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묻기 위해 서인원 한국항공대학교 항공우주정책대학원 항공우주법 전공 주임 교수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 드라기 리포트 총론·EU 경쟁력 위기 진단 -드라기 리포트가 글로벌 정책 동향에서 어떤 상징성과 무게감을 가지는 보고서인지 간략한 소개를 부탁한다. A.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로스쿨의 에이누 브래드포드 교수는 2012년 '브뤼셀 효과'를 주창하며 EU의 산업 입법 정책이 전 세계의 표준이 돼가고 있음을 지적했다. 시장적 관점에서 EU는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경제권역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법학자로서 브뤼셀 효과의 규범적 추동력은 EU의 입법 정책이 전 세계 입법자들이 참고할만한 보편적 가치를 가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2024년 9월 9일 발표된 드라기 리포트는 합리성이 결여된 EU 입법 정책에의 자기 비판적 시각을 담고 있다는 측면에서 남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이러한 드라기 리포트의 자성적 태도는 EU의 입법 정책을 참고해왔던 전 세계 정책 입안자·입법자들에게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아울러 드라기 리포트는 시장적 관점에서 우리나라 언론에 다뤄진 적은 있지만 규범적·입법 정책적 관점에서 조명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한 측면에서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다. -리포트 전반에 미국과 중국과의 '혁신 격차'를 우려하는 절박함이 묻어난다. EU가 첨단 기술과 디지털 산업 패권 경쟁에서 두 국가에 이토록 밀리게 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이라고 분석하는가. A. 드라기 리포트는 '전문성'과 '잠재력'의 측면에서 혁신 기술 기업 육성 문제를 진단한다. 첫째로 EU 기업이 확보한 컴퓨팅·소프트웨어 관련 기술력은 최신 기술보다 보편화된 응용 기술에 집중된 경향을 보인다. 둘째로 EU 기업의 연구·개발(R&D) 예산 비중은 미국·중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다. 드라기 리포트는 소프트웨어·인터넷 분야에 종사하는 EU 기업의 R&D 예산 비중은 단 7%에 불과하다고 제시한다. 동일 산업에 있는 R&D 예산 비중은 미국·중국 기업들은 각각 71%, 15%다. -전 세계 주요 디지털 플랫폼 중 EU 기업의 비중이 0에 가깝고, 역내 클라우드 시장의 65%를 미국 빅테크가 장악했다. 이런 '디지털 생태계 종속'이 장기적으로 EU 경제와 사회에 미칠 가장 치명적인 위협은 무엇인가. A. 드라기 리포트는 EU 역내 시장의 60%를 알파벳·아마존·메타·애플·마이크로소프트·X 등 미국 빅테크가, 40%를 텐센트·알리바바·바이트댄스·바이두와 같은 중국 빅테크가 장악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시장적 관점에서는 점유율의 문제로만 보일 수 있으나 규범적 관점에서 이들 빅테크 상당수는 디지털 시장법상 '게이트 키퍼' 기업에 해당한다. 즉, 미국·중국의 빅테크 모두가 '막대한 플랫폼 영향력을 바탕으로 공정한 시장 경쟁 질서를 저해할 가능성을 가진 기업'인 것이다. 아울러 미국·중국 빅테크의 주요 인적·물적 조직이 역외에 위치하기 때문에 이들을 EU법으로 규율하려는 경우 속지주의적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를 뛰어넘기 위한 역외적용 조항 또한 주권 충돌과 집행력의 한계를 드러내며 유명무실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우수한 이공계 인적 자원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타국으로의 '두뇌 유출'이 심각하다는 점을 짚었다. 뺏기기만 하는 EU가 고급 인재들을 역내에 잡아두기 위해 리포트는 어떤 유인책을 고민하고 있는가. A. 드라기 리포트는 AI·클라우드·양자 컴퓨팅 산업 전반을 관통하는 공통의 문제를 투자·규제·인적 자원 이 세 가지로 바라보고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드라기 리포트가 투자와 규제에 대해서는 시장과 규범이 가진 한계와 정책적 대안을 균형 있게 제시하고 있지만 인적 자원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드라기 리포트는 EU가 세계 경쟁력을 갖춘 인적 자원을 확보하고 있고 이 절대량이 미국보다 상대적으로 열세일 뿐이라는 분석에 그치고 있다. 물론 드라기 리포트 또한 미국·중국으로 EU의 인적 자원이 유출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긴 하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적 대안에 대해서는 언급을 아끼고 있다. ◇ 컴퓨팅·AI 산업 현황과 틈새 돌파 전략 -암울한 지표 속에서도 유독 '고성능 컴퓨팅(HPC)' 분야에서는 EU가 엑사스케일 슈퍼 컴퓨터 등을 확보하며 긍정적인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 인프라의 우위가 무너진 EU의 AI 생태계를 재건하는 데 어떤 시너지를 낼 수 있을까. A. EU는 2018년 유로-HPC 공동 사업을 발족한 이후 여섯 개 EU 회원국이 대규모 공공 컴퓨팅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 드라기 리포트는 EU가 핀란드 '루미'·이탈리아 '레오나르도'·스페인 '마레 노스트룸 5' 등 세계 10위권 수준의 슈퍼 컴퓨터를 보유하고 있고 엑사스케일 컴퓨터의 추가 출시를 통해 EU의 HPC 산업 경쟁력이 꾸준히 유지될 것이라 전망한다. 특히 드라기 리포트는 HPC가 AI의 대규모 모델 학습·추론·시뮬레이션·데이터 처리에 고성능 연산 자원을 제공하고 클라우드는 이것을 탄력적으로 수요자에게 공급할 것이라고 분석한다. 아울러 이들의 연계성을 고려한 정책 입안이 필요하다고도 강조한다. 규범적 측면에서 이러한 유기적 접근은 현행법의 체계적 해석·적용을 돕고 제도 개선 시 중복·모순·저촉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한다. -클라우드 시장 탈환의 대안으로 '협력적 주권 모델(SCS, Sovereign Cloud Solution)'이 언급됐다. 미국의 뛰어난 기술은 의존하되 데이터 통제권은 EU가 쥐겠다는 이 '줄타기 전략'이 현실적으로 빅테크 기업들의 호응을 얻고 잘 작동할 수 있을까. A. 규범적 측면에서 협력적 주권 모델은 줄타기 전략이라기보다 '현실적 공생 관계' 에 가깝다. 드라기 리포트는 대규모 투자·사업자 간 서비스 결합·규모의 경제 실현이라는 클라우드 서비스 세 가지 전제조건이 EU 기업에 의해 역내 시장에 실현되는 것에 회의적이다. EU 기업이 미국의 하이퍼 스케일러의 호스팅·재판매 그 이상의 역할을 하기 어렵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드라기 리포트가 EU 역내 시장 자체를 '비관'하는 것은 아니다. 드라기 리포트는 클라우드 서비스의 핵심을 '독자적인 클라우드 주권 확보'가 아니라 'EU법에 따라 역내 클라우드 서비스 사용자를 충분히 보호하는 것'으로 본다. 미국의 하이퍼 스케일러와 EU 기업이 합작사를 설립해 미국 기업은 클라우드 기술을 지원하고 EU 기업은 역내에서 생산되는 데이터의 저장·처리·보안·암호화 업무를 관할하는 것이다. 구글 클라우드와 프랑스 방산 기업 탈레스가 합작해 S3NS를 설립·운영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드라기 리포트 또한 해당 모델을 EU 역내에서 이미 실현·검증됐다고 평가하며 활용 가능한 정책 대안으로 제시한다. -범용 AI 모델은 이미 미·중에 선점당한 상황에서 EU가 국방·제약·에너지 등 10개 전략 산업에 특화된 '전용 AI 모델(Vertical Model)'을 집중 육성하겠다는 전략은 틈새 시장 공략으로서 타당하다고 보는가. A. 드라기 리포트는 AI 개발에 초기 R&D 투자가 절대적이고 자금력이 풍부한 미국이 주도권을 갖고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2023년 미국의 AI 관련 벤처 캐피탈은 680억 달러로 80억 달러인 EU의 8.5배에 달하고 범용 AI 모델의 약 73%가 미국 기업에 의해 개발됐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한편 전용 AI 모델은 특정 분야에 최적화된 것으로, AI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에 탑재돼 일체로 기능하는 경우 기존 제조업 경쟁력이 전용 AI의 경쟁력과 시너지를 낼 수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드라기 리포트는 전용 AI 모델이 활용되는 전략 산업의 지원을 표방하고 있고, 선택과 집중의 차원에서 타당성이 충분하다고 본다. -양자 컴퓨팅 분야에서 EU의 공공 투자는 세계 2위 수준인데 상용화의 핵심인 민간 투자는 전 세계의 5% 유치에 불과하다. 자본 집약적인 양자 산업에서 유독 민간 자본이 모이지 않는 제도적 한계는 무엇인가. A. 드라기 리포트는 2000년~2023년 양자 컴퓨팅 분야 특허 출원 수를 기준으로 EU의 세계 경쟁력이 미국에 이어 2위로 일본·중국에 앞서 있다고 본다. 절대 수치(10만명 이상), 밀도 수치(100만명 당 231명)를 기준으로 파악한 인적 자원 또한 풍부한 편이다. 70억 달러 상당의 양자 컴퓨팅 관련 공공 투자 또한 이뤄졌다. 현재까지는 순항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드라기 리포트는 EU 역내에 양자 컴퓨팅 민간 투자가 제한적이라며 규범적 억제 요인으로서 EU의 건전성 규제를 들고 있다. 특히 이러한 규제가 향후 양자 컴퓨팅 상용화의 선결 조건인 민간 투자를 제한할 여지가 있다고 지적한다. 드라기 리포트는 EU의 양자 컴퓨팅 산업이 현재보다 미래가 더 불투명하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 과도한 규제와 산업 혁신 저해 현상 -미국의 '혁신 중심'과 대비되는 프라이버시나 인권 등 EU의 '권리 중심' 규제 접근을 지적했다. EU 일반 데이터 보호 규정(GDPR)이나 AI 법 등 엄격한 입법 철학이 도리어 자국 산업의 발목을 잡는 '규제의 덫'으로 작용했다고 보는가. A. 거기에 대해서는 신중한 평가가 필요하다. 드라기 리포트가 미국의 혁신 중심 접근 방식과 EU의 권리 중심 접근 방식을 비교·대조한 것은 법역(jurisdiction)마다 규제의 접근 방식이 상이해 수범자의 실제 규제 부담을 측정하기 쉽지 않다는 주장을 하기 위함이었다. 드라기 리포트가 EU가 취했던 권리중심 접근 방식 자체를 두고 자국 산업의 발목을 잡는 규제의 덫이라고 단정한 바는 없다. 다만 합리성을 결여한 규제가 산업 전반을 관통하는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드라기 리포트가 비합리적 규제의 문제를 투자·인적 자원의 문제와 동등한 수준의 쟁점으로 파악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수많은 법안이 누적되면서 발생하는 문제가 심각하다. 신기술을 개발하고 인허가를 받아야 하는 기업 입장에서 이러한 법적 모순은 구체적으로 어떤 행정적 비용과 리스크를 초래하는가. A. 드라기 리포트는 AI 법·제조물 책임 지침·AI 책임 지침에서 중복 규제, 모순·저촉 규제가 나타날 수 있다고 분석하고 GDPR·디지털 시장법·디지털 서비스법의 경우 회원국 간의 해석·적용·집행의 괴리가 나타날 수 있다고 진단한다. 물론 이들 법제의 입법 목적은 빅테크의 독점을 막고 EU 역내 이용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드라기 리포트도 해당 입법의 취지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비합리적 규제의 문제는 분명 수범자에게 높은 불확실성·규제 준수 비용을 촉발시키고 궁극적으로 산업 경쟁력을 저해할 것임에는 분명하다. 드라기 리포트는 이 부분을 짚고 있는 것이다. -규제가 기업 규모를 따지지 않고 획일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특히 대기업을 겨냥한 ESG 지속 가능성 의무가 공급망을 타고 하청 중소기업에게 전가되는 이른바 '가치 사슬 효과'의 부작용을 멈출 수단이 논의되고 있는가. A. 드라기 리포트는 GDPR이 기업 규모·매출액 등 수범자의 규제 준수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획일적인 규제를 부과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비례성을 결여한 규제가 이뤄지고 있다는 비판이다. 이러한 문제는 원칙적으로 개별화된 규제를 통해 해결이 가능하다. 하지만 드라기 리포트는 매우 흥미로운 문제 하나를 추가로 언급한다. 대기업 공급망 내 중소기업이 ESG 관련 자료 제출을 요구받는 것이 바로 가치 사슬 효과의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드라기 리포트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범자의 규제준수 능력을 고려한 개별화된 규제의 필요성을 지적한 부분은 여전히 유의미하다. -회원국들이 EU 지침을 자국법으로 도입할 때, 본래 지침보다 과도하게 규제를 덧붙이는 '규제 배가(도금 현상, gold plating)'를 강하게 비판했다. 회원국들이 굳이 이런 과잉 입법을 하는 정치적·사회적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A. 규제 배가는 지침과 같이 EU법을 내국법으로 제정·시행해야 하거나 규정과 같이 EU법을 속지주의 범주 내에서 집행하는 경우 회원국이 EU법의 규제 수준을 초과하는 부담을 창출하는 사회 현상이다. 이와 같은 것들이 발생하는 본질적 이유는 EU법의 규범적 성질에 기인한다. 지침의 경우 구체적 입법은 회원국의 몫이므로 지침의 면제 규정을 제거한다거나 지침보다 더 넓은 범위에 내국법을 적용하는 등의 규제 배가가 이뤄질 수 있다. 규정이 하한선·상한선을 명시하지 않은 경우에도 회원국의 입법권이 극대화됨으로써 규제 배가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규범적 성질 외에도 EU 회원국이 규제 배가를 하게 되는 정치적·사회적 유인은 소비자 관련 입법과 같이 회원국 스스로가 더 높은 규제 수준을 필요로 할 때 발생한다. 물론 규제 배가에 항상 긍정적 유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드라기 리포트는 회원국의 국익과 배치되는 EU법의 제정·시행을 방해하려는 목적으로 규제 배가를 악용할 여지가 있다고도 지적한다. 규제 배가는 그 유인이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합리성을 결여한 규제의 일 유형이다. 당연히 개선이 필요할 텐데 드라기 리포트는 회원국의 규제 배가를 제재할 수 있는 방안이 마땅치 않다고 부연한다. ◇ 규제 합리화를 위한 정책 대안과 비판 -규제 합리화 방안으로 주기적인 '규제 스트레스 테스트'가 제안됐다. A. 드라기 리포트는 EU 집행위원회가 주기적인 규제 스트레스 테스트를 실행해 규제 합리화를 위한 후속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거대 언어 모델(LLM)을 통해 신속하게 방대한 법률 문서에서 중복·모순·저촉 규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첨단 행정 시스템의 실효성을 섣불리 예측하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다. 다만 비합리적 규제를 발견하는 데 시간과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는 드라기 리포트의 기대에는 상당 부분 동의한다. -혁신 실험을 위해 'AI 샌드박스 제도'와 'EU 혁신 허브' 구축이 언급됐다. 이 제도가 전시 행정식 면제나 일회성 실험에 그치지 않고, 실제 GDPR과 같은 EU의 강경한 본 법안들을 개정하는 촉매제가 되려면 어떤 사후 평가 체계가 수반돼야 할까. A. 규제 샌드박스는 신기술을 활용한 재화·서비스에 대해 기간·장소·규모 등 일정 조건 하에서 현행 규제의 전부·일부를 면제·유예하는 제도다. 드라기 리포트는 전용 AI 모델이 활용되는 △첨단 모빌리티 플랫폼 △첨단 제조물 △에너지 △통신·네트워크 △농업, 항공·우주 △국방 △환경 예측△제약 △헬스 케어 등 10가지 전략 산업에서 샌드박스 제도가 활발히 마련·운영될 것을 주장한다. 드라기 리포트는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신기술로 인한 안전성 문제를 검증하고, 그 과정에서 수집된 데이터를 토대로 규제가 합리화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사후적 정책 평가의 주기성·체계성·책임성이 확보돼야 할 것이다. 사후적 정책 평가의 목표 또한 구체화될 필요가 있다. 드라기 리포트는 중소기업을 위한 개별화 규제 입안과 EU 역내 GDPR 해석·적용의 일관성 확보, GDPR과 AI 관련 규범 간 모순·저촉·중복의 제거를 정책 평가의 목표로 예시하고 있다. -중소기업 등을 배려해 규제를 '개별화'하다 보면 오히려 경우의 수가 늘어나 '규제 자체가 기하급수적으로 복잡해지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고 비판했는데 정책 입안자들은 이 딜레마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A. 비례성을 갖춘 개별화된 규제를 갖추는 것은 규제 합리화의 중핵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경우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경우 수범자는 규제의 인식 그 자체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의 문제는 규제 당국에도 나타날 수 있다. 고도의 합리성을 갖춘 법 규범이 역설적으로 수범자에게 인식의 문제를 발생시키는 경우 정책 입안자·입법자들은 이러한 규제의 상세가 계약법화·자율 규제화 돼야 하는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규정 중심 규제 체계에 한계가 온 것이 아닌지 입법 정책적 관점에서 재검토 할 여지가 있다는 의미다. -또한 보고서가 규제 비용을 돈으로 환산하는 '정량적 평가 모델'에만 치중하고 '정성적 평가' 대안이 없다고 지적했다. 규제가 가져다주는 개인 정보 보호나 환경 개선 같은 '사회적 순기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려면 어떤 지표가 보완돼야 하는가. A. 주어진 질문을 보다 정확히 바로잡고자 한다. 드라기 리포트는 일원화된 정량적 평가 모델을 지향하고 있지만 이것이 완벽하다고 비약하지 않는다. 정량적 평가 모델은 관련 데이터·결과 값이 부재하거나 유의미하지 않은 경우 한계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드라기 리포트는 이러한 한계를 균형적으로 바라보고 있고 정성적 평가 모델을 통해 정량적 평가 모델의 맹점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도 기술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드라기 리포트가 규제를 비용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순기능으로서도 평가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어떠한 지표가 보완돼야 할지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지 않지만 규제를 바라보는 드라기 리포트의 관점은 창의적이고 아울러 타당하다. ◇ 대한민국 정책에 던지는 시사점과 미래 전망 -우리나라 역시 복잡한 플랫폼 규제·망 이용 대가·AI 기본법 등을 두고 진흥과 규제 사이에서 딜레마를 겪고 있다. 비록 EU 거버넌스의 특수성이 있더라도 드라기 리포트의 자성에서 한국 규제 당국이 반드시 벤치마킹해야 할 교훈은 무엇인가. A. EU 거버넌스·법의 특수성 때문에 발생하는 규제 배가와 EU법 집행의 파편화, EU 혁신 허브 등의 쟁점은 우리나라 정책 입안자·입법자가 참고하기 어려울 수 있다. '회원국 간 주권의 일부를 공유한 초국가적 정치·경제 공동체인 EU 고유의 사회 문제'를 단일 민족 국가인 우리나라가 참고하는 것은 입법정책적 차원에서 정합성이 떨어질 수 있겠다. 하지만 법학자로서 드라기 리포트를 구성하는 네 가지 기둥 중 하나가 '규제 합리화'라는 사실은 재차, 삼차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또한 EU 못지않은 선진국으로, 올해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10대 강대국 6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나라 정책 입안자와 입법자들이 무비판적으로 해외 사례를 벤치마킹하려는 시도는 옳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러나 '비합리적 규제가 과도한 규제 준수 비용을 발생시켜 궁극적으로 국가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음'을 자성한 드라기 리포트의 문제 의식은 우리나라 당국자에게도 큰 시사점을 안겨준다. -한국 기업들도 빅테크의 공세 속에서 자체 AI 생태계를 지키려 사투를 벌이고 있다. EU가 추진하는 'SCS 모델' 전략을 한국의 공공·금융 클라우드 시장이나 독자적 데이터 주권 확보 정책에 응용해 볼 수 있을까. A. 드라기 리포트의 가장 큰 특징은 현실 지향적 입법 정책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독자적 기술 주권을 확보할 수 있다면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겠다. 하지만 우리나라 클라우드 서비스 시장이 대규모 투자·사업자 간 서비스 결합·규모의 경제 실현에 구조적 한계를 갖고 있다면 '우리법으로 우리나라 클라우드 서비스 사용자를 충분히 보호하는 것'을 현실 지향적 정책 대안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EU의 협력적 주권 모델은 우리나라 정책 당국자들도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리포트에서도 항공·우주와 국방이 AI 특화 전략 산업으로 꼽혔다. 이러한 첨단 컴퓨팅 기술력과 규제 혁신이 향후 해당 산업의 지형을 어떻게 뒤바꿔놓을 것으로 전망하는가. A. 드라기 리포트는 전용 AI 모델이 활용되는 전략 산업을 정책적으로 지원한다는 목표를 수립하고 있다. 그리고 항공·우주, 국방은 전용 AI 모델이 활용되는 10가지 전략 산업의 일부다. 하드웨어와 여기에 탑재될 AI 소프트웨어의 시너지는 관련 산업의 경쟁력 확보에 큰 기여할 것이다. 드라기 리포트 또한 자율 주행 자동차 등 EU의 첨단 모빌리티 플랫폼이나 산업 로봇 등 첨단 제조물 산업에 이같은 시너지를 기대하고 있다. 다만 법학자로서 합리적인 규제가 항공·우주·국방(A&D) 산업의 지형을 뒤바꿀 순 없더라도, 우리나라의 산업 진흥에 '비교 우위'를 가져다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합리적 규제는 기업 친화적 경영 환경의 조성과 직접적 관련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집행을 포함한 규제 수준을 비교·분석해 190개국의 경영 환경을 순위화한 세계은행 경영 환경 데이터 베이스는 합리적 규제와 기업 친화적 경영 환경과의 관련성을 전제로 한다. 유럽 투자 은행 기업 투자 설문과 비즈니스 유럽 설문 또한 동일한 전제를 갖고 있다. -마지막으로 만약 드라기 리포트가 제안한 파격적인 규제 합리화가 성공적으로 이행된다면 EU가 다시 혁신 주도권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보는지, 그리고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려는 한국의 IT 기업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조언 한 말씀 부탁한다. A. 주도권은 상대적인 것이다. 파격적인 규제 합리화라는 표현 또한 신중할 필요가 있다. 법학자로서 규범이 혁신에 기여하는 방식은 '신기술의 사회적 수용성을 진단하고 시대에 부합하는 규범적 변화를 달성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드라기 리포트 또한 AI 샌드박스 제도를 통해 '신기술로 인한 안전성 등의 문제를 검증하고, 그 과정에서 수집된 데이터를 토대로 규제를 더욱 합리적으로 가다듬을 수 있다'고 전망한다. 우리 IT 기업들에게도 EU의 브뤼셀 효과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규제 합리화에 대한 드라기 리포트의 자성적 태도와 이를 반영한 실효적 입법 또한 브뤼셀 효과를 통해 전 세계에 확산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규빈 기자 kevinpark@ekn.kr

[기자의 눈] 인국공 새 수장, 필수 덕목은 ‘항공 전문성·글로벌 역량’ 리더십

대한민국 관문이자 글로벌 항공·물류의 핵심 축인 인천국제공항공사가 7개월이 넘는 긴 경영 공백을 끝내고 제11대 사장 선임을 위한 막바지 절차에 진입했다. 최근 임원추천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최종 후보는 박남춘 전 인천시장·김상도 전 국토교통부 항공정책실장·김문권 전 이스타항공 대표 등 3명으로 압축된 것으로 알려졌다. 격변하는 글로벌 항공 시장에서 전문성과 정무 능력을 바탕으로 인천공항의 미래를 이끌어갈 적임자가 누구로 결정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이 높다. 공기업 수장 인사는 정치적 보은(報恩)이나 세력 안배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 지난 업무 보고 과정에서 불거진 전임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과의 논쟁 사례는 적재적소 인사 원칙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소관 업무의 세부 현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정무적인 선문답식 답변으로 일관하는 수장의 모습은 조직 전체의 신뢰를 실추시키고 정책 추진 동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 365일 24시간 멈추지 않는 초대형 복합 인프라인 인천공항의 최고 경영자는 현장의 실무 현안을 명확히 꿰뚫어 보고 정부 부처·유관기관과의 유기적 공조를 이끌어낼 수 있는 '실무형 문제 해결사'여야 한다.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등과 긴밀히 협력할 수 있는 글로벌 리더십을 바탕으로 인천국제공항이 맞닥뜨린 4가지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첫째, 동아시아 초대형 공항 간 주도권 경쟁 격화에서 이겨야 한다. 동아시아에서는 △중국 베이징·상해 푸동 △싱가포르 창이공항 △홍콩 첵랍콕공항 △일본 하네다·나리타 등 주변국 허브 공항들이 코로나19 이후 공격적인 인프라 투자를 감행하며 지역 항공 물류 주도권을 쥐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인천공항 역시 4단계 공항 확장 사업과 제1여객터미널 리뉴얼 사업을 통해 스마트 국제 공항으로 글로벌 공항 산업을 선도해야 한다. 이는 토목·건설 공사만으로 달성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니다. 다양한 항공 노선 유치와 인공 지능(AI)을 접목한 첨단 IT기술 적용, 글로벌 물류 기업 유치 등 항공 산업 전반에 대한 전문성이 뒷받침 돼야 가능한 과제다. 둘째, 공항 보안·안전 시스템의 근본적 혁신과 유관 기관 간 강력한 공조체계 구축이다. 최근 공항 내 외화 밀반출·마약 밀수·보안 구역 내 위해 물품 반입·보조 배터리 화재 등 공항 안전을 위협하는 사건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항공 보안과 안전은 공항공사 독자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만큼 국토부·국가정보원·법무부·국방부·관세청·경찰청·항공 운송 사업자 등 관계 기관과 업체의 빈틈없는 공조가 필수적이다. 현장의 미세한 틈새를 파악하고 각 기관의 역할을 조율하는 세밀한 리더십이 절실한 이유다. 셋째, 미래 준비를 위한 신성장 동력 확보와 내부 조직의 통합이다. 인천공항은 고부가 가치 항공 산업인 MRO 생태계를 강화하고 신 모빌리티 상용 운항을 선도해 K-항공 산업의 글로벌 확장을 뒷받침해야 한다. 이를 이끌어갈 항공 전문 융합 인재 양성도 차질없이 추진해야 한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려면 내부 조직의 안정이 뒷받침 돼야 한다. 장기간 수장 공석으로 누적된 내부 구성원들의 피로감을 씻어내고 노사 간 상생 협력을 끌어낼 수 있는 실효적 소통 역량이 요구된다. 넷째, 공항 운영 체계 개편에 대응하고 지방 공항과의 상생 협력을 이끌어야 한다. 이재명 정부는 지난 9월 관계 부처 합동으로 발표한 '공공 기관 기능 개혁 추진 방안'에서 공항운영 효율화와 공공 기관 기능 조정 차원에서 검토해 온 인천국제공항공사와 한국공항공사의 통합을 유보했다. 지방 공항 활성화 방안을 먼저 마련하고 진행 상황을 점검한 뒤 다시 검토하기로 한 것이다. 또한 양 공항공사의 항공 보안 업무와 관련 보안 자회사를 통합하는 '항공 보안 전문 기관' 설립도 추진한다고 밝혔다. 새 수장은 이러한 조직 개편 논의에 대응하면서 보안 업무의 연속성을 확보해야 한다. 아울러 인천국제공항의 글로벌 허브 경쟁력과 지역 균형 발전을 함께 뒷받침할 수 있도록 지방 공항과의 구체적인 협력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이름보다 실력과 전문성을 갖춘 국가 대표가 필요하다. 축구 국가 대표를 선발할 때 최고의 실력자를 뽑듯, 대한민국 관문을 책임질 인천국제공항의 새 수장 역시 과제를 해결할 역량으로 평가해야 한다. 선임의 기준은 항공 산업 현장에 대한 이해와 국제적 협력 역량, 정부 정책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능력이어야 한다. 이러한 역량을 갖춘 수장이 조직의 힘을 모을 때 인천국제공항은 장기 공백의 흔적을 털어내고 세계 최고의 허브 공항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박규빈 기자 kevinpark@ekn.kr

[기자의 눈] 출구없는 뉴스테이…분양전환 혼란은 예견된 미래

제도나 법의 공백에서 생기는 혼란은 예견된 미래다. 8년 만에 뉴스테이 의무 임대 기간이 종료되는 가운데 분양전환을 두고 발생하는 문제가 그렇다. 뉴스테이는 2015년 박근혜 정부에서 도입한 기업형 임대주택 제도다. 8년 동안 장기 거주가 가능하고 임대료 상승률은 연 5% 이내로 제한된다. 소득수준 제한이 없어 유주택자여도 입주가 가능하다. 중산층 주거 안정을 위해 도입된 뉴스테이는 민간임대주택에 관한 특별법을 통해 입주 자격과 임대 조건 등 진입 요건을 구체적으로 정하고 있다. 문제는 의무 임대 기간이 종료된 이후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정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종료 이후 사업자가 분양전환을 해야 하는지, 분양전환을 한다면 기존 임차인에게 우선권을 부여하는게 맞는지, 분양가는 어떻게 산정할 것인지 등을 정하고 있지 않다. 제도의 공백이 생기니 이해관계자들은 각자 입장을 고수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나 리츠회사는 계약 당시 분양전환 대상이 아니었다는 입장이지만, 임차인들은 구체적으로 정하지 않았으므로 분양전환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법에서 분양전환에 대해 구체적으로 정하고 있지 않은 탓에, 주주 간 협약이나 리츠의 내부 의사결정 등 임차인이 열람하기 어려운 사적 계약에 의해 분양 전환 여부가 결정되는 한계도 있다. 현재 국토교통부와 HUG 등은 무주택 임차인을 대상으로 분양전환을 하고, 우선 매수 신청 기한 종료일까지 무주택 자격을 충족하면 현재 유주택자도 분양전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타협안을 내놨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이 모든 뉴스테이 사례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업장마다 임차인과 리츠 간에 얽힌 쟁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업장은 분양전환 여부 자체가 문제 되지만, 분양전환이 확정됐어도 분양가 산정을 두고 갈등이 이어지기도 한다. 결국은 계속해서 땜질식 처방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현재로서는 정례화된 합의 채널을 마련해 혼선을 줄이고, 분양전환 시기가 도래하기 이전에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합의를 도출해 불확실성을 줄이는 것이 최선이다. 근본적인 해법은 정책 구상 단계부터 제도의 시작과 끝을 함께 설계하는 것이다. 정부는 전월세 시장 안정화를 위해 공공지원 민간임대주택 공급을 활성화 의지를 보였다. 중요한 것은 주택을 얼마나 공급할지만이 아니라 임대 기간이 끝난 이후엔 어떻게 할 것인지까지 함께 설계하는 것이다. 송윤주 기자 syj@ekn.kr

[이슈&인사이트] 작은 기업의 경쟁력은 고객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된다

간편하게 한 끼를 해결하려고 만든 제품 앞에서 고객은 망설였다. 쌀은 씻어야 하는지, 나물은 헹궈야 하는지, 물은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한 간편식 기업 대표가 인터뷰에서 들려준 소비자 반응이다. 만드는 사람은 설명을 넣었으니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처음 포장을 뜯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어려운 제품이었다. '간편식'이라는 이름이 간편한 식사를 보장해주지는 않았다. 전자레인지 조리 안내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700W와 1000W라는 출력 수치를 제시했지만 낯설어하는 고객이 있었다. 이 기업은 '꼬들밥', '촉촉밥'처럼 고객이 원하는 식감을 기준으로 조리법을 안내했다. 기기의 수치와 조리 결과를 고객의 눈높이에서 연결하려는 시도였다. 제품을 개발한 사람이 익숙하게 쓰는 말과, 바쁜 일상에서 한 끼를 준비하는 사람이 이해하는 말 사이에는 거리가 있었다. 이 기업은 육아 가정의 먹거리 고민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간식 상품을 판매한 뒤에는 수많은 구매 후기를 읽으며 제품 구성을 바꿨다. 출산 후 몸 관리를 내세운 간식에서도 고객은 맛있는 것을 먹는 즐거움을 원했다. 판매자는 제품에 담은 기능과 의도를 설명하지만, 고객은 먹는 순간의 맛과 편리함까지 함께 평가한다. 후기는 그 차이를 알려주는 자료였다. 작은 기업은 제품 하나를 내놓기까지 많은 시간과 돈을 쓴다. 원료를 고르고 포장을 만들고 생산 조건을 맞춘다. 그 과정을 오래 거칠수록 자신의 제품을 잘 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제조법을 아는 것과 고객의 사용 경험을 아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왜 이 원료를 썼는지 자세히 설명하면서도, 정작 고객이 포장을 어디서 뜯어야 할지 망설이는 순간은 놓칠 수 있다. 수면용 속옷을 만드는 한 기업의 경험은 이 차이를 더 선명하게 보여준다. 초기 제품은 몸을 강하게 조이고 잡아주는 데 초점을 맞췄다. 대표 자신은 그 점을 장점으로 여겼지만 고객의 반응은 달랐다. “저는 처음에 그게 좋았어요. 그런데 안 팔려요." 인터뷰에서 나온 말이다. 잠잘 때 편하게 입고 싶은 사람에게 강한 압박은 오히려 불편함이었다. 이 기업은 압박을 줄이고 편안함을 높이는 방향으로 제품을 수정했다. 고객 의견을 반영해 큰 사이즈를 추가하고 색상도 늘렸다. 그렇다고 이 변화만으로 시장에서 성공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대표는 인터뷰 당시에도 제품을 필요로 하는 고객을 더 찾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사례에서 눈여겨볼 것은 성공담보다 제품을 고치는 태도다. 만든 사람의 만족을 잠시 내려놓아야 고객이 원하는 개선을 시작할 수 있다. 상품을 파는 중소기업이라면 누구나 판로를 넓히고 싶어 한다. 온라인몰에 입점하고 새로운 판매채널을 찾는 일은 중요하다. 그에 못지않게 살펴야 할 것은 고객이 상품을 만난 뒤의 과정이다. 상세페이지에서 용도를 이해하는지, 배송된 제품을 어렵지 않게 사용하는지, 기대했던 맛과 촉감이 실제 경험과 맞는지 확인해야 한다. 판매채널이 구매의 기회를 열어준다면, 재구매로 이어갈 이유는 상품을 쓰는 과정에서 생긴다. 고객 이해를 위해 처음부터 큰 조사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반복해서 들어오는 문의를 모으고, 반품 사유를 읽고, 처음 구매한 고객이 제품을 쓰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부터 시작할 수 있다. 이때 고객이 설명을 잘 읽지 않았다고 탓하기 전에 같은 질문이 왜 되풀이되는지 물어야 한다. 제조업체에는 당연한 보관법이나 사용 순서가 소비자에게도 당연한 것은 아니다. 기능을 하나 더 넣기 전에 사용 과정의 막힘을 줄이는 편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물론 모든 요구를 제품에 담을 수는 없다. 같은 불편이 여러 고객에게 반복되는지 확인하고,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먼저 바꿔봐야 한다. 안내 문구를 고치거나 포장을 손본 뒤에는 문의와 반품이 줄었는지, 재구매가 늘었는지 살펴봐야 한다. 원가와 품질을 함께 확인해야 개선도 지속할 수 있다. 작은 기업의 경쟁력은 제품을 출고하는 순간에 완성되지 않는다. 고객이 상자를 열고, 한 끼를 준비하고, 옷을 입고 생활하는 과정에서 평가받는다. 다음 상품을 기획하거나 광고비를 늘리기 전에 우리 제품이 고객의 하루에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살펴보자. 설명서 앞에서 멈추는 순간, 입었다가 다시 벗는 순간에 고쳐야 할 이유가 담겨 있다. 고객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순간을 찾아 제품에 반영하는 일이다. bienns@ekn.kr

[EE칼럼] RPS 제도 개편에 부쳐

지난 6일 국정감사장에서 김성환 기후에너지부 장관은 “내년부터 10GW 이상" 재생에너지 설비 용량이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2024년에 3.4GW, 2025년에 3.8GW 늘어난 태양광 발전 설비는 올해 상반기에 2.3GW가 증가했다. 연말까지는 약 5GW를 기대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김 장관의 답변대로 이루어지려면 내년에는 올해보다 두 배 이상의 신규 재생에너지 발전 설비가 설치되어야 한다. 이런 가운데 지난 9월 30일 기후에너지환경부는 재생에너지 보급 지원 제도인 공급의무화제도(RPS)의 개편을 위한 대국민 공청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밝힌 정부 개선안의 첫 번째 내용은 재생에너지로 발전한 전력은 별도의 입찰 시장을 개설하여 정부가 제시한 상한가 이내에서 한전이 사들인다는 것이다. 둘째는 현재 해마다 정해진 양의 재생에너지 전력 '공급' 의무를 지고 있는 대형 발전사들에게 '보급' 의무를 지게하여 대규모 설치를 촉진하겠다는 것이다. 우선 입찰 시장을 개설한 것은 어떠한가? 용량 1MW 이상의 대규모 태양광 발전소는 이미 어느 정도 다른 발전원과 경쟁할 수 있는 단계에 올라 입찰을 해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그러나 500kW 이하의 소규모 태양광은 입찰로 인한 수익 보장의 효과는 미미한 반면 생산 비용만 늘어날 뿐이다. 지금도 장기고정가격 입찰과 인증서 관리 등이 어려워 업체에 매월 수수료를 내고 대행하는 개인사업자들이 많다. 입찰 시장에서 정부가 상한가를 정한다는 것은 해마다 생산비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500kW 이하 소규모 태양광에 대해서는 기준가를 정해 한전에서 구매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소규모 사업자뿐만 아니라 전력시장과 한전을 비롯해 전력당국의 업무와 비용도 개선안보다 줄어든다. 태양에너지는 공짜로 주어지지만 매우 공평하고 적은 양이다. 지표면에 도달하는 태양의 복사에너지는 분당 약 1cal/㎠, 와트로 환산하면 1㎡당 700W 정도이다. 한전이 소유한 땅이라고 해서 더 많은 태양에너지를 받는 게 아니다. 하여 태양광 발전 산업은 많은 소생산자의 참여를 필요로 한다. 마치 벼농사와 같다. 전국에 산재한 무논에서 벼농사를 지어야 하니 더러 대농도 있지만 중소농의 참여가 절대적이다. 이는 지금까지의 태양광 보급에서도 나타난다. 신규 태양광 설비에서 1MW 이상의 대규모 태양광이 차지하는 비중은 2023년 23.1%, 2024년 26.7%, 2025년 19.4%, 올 상반기는 18%에 불과하다. 그나마 벼농사는 호남평야나 서산 간척지 같이 대규모 농지가 있지만 태양광 발전을 위한 대규모 부지를 마련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소형 태양광 발전 사업자의 참여를 용이하게 하고 생산비를 줄여주는 일이 태양광 발전 보급을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울러 소규모 태양광 만으로는 산업용 전력과 기술 발전에 따라 늘어나는 전력 수요를 충족할 수가 없으니 대규모 태양광 발전 부지를 개발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지금까지 대규모 태양광 발전의 보급이 지지부진했던 것은 부지가 없기 때문이다. 당장 내년부터 보급 의무를 지는 대형 발전사들은 어디에 태양광 발전소를 지을 것인가? 새만금 간척지와 휴전선 접경지역 등이 거론되지만 그 양은 한계가 있다. 정부나 지자체가 나서서 기획 입지를 개발하지 않는 한 개별 발전사가 대규모 부지를 개발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부지만 있다면 대형 발전사가 아니라도 대규모 재생에너지 사업에 투자할 민간의 여력은 충분하다. 과연 이런 제도 정비로 “내년부터 재생에너지 10GW 이상" 설치가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소규모 태양광까지 입찰을 유지하거나 태양광 발전 보급의 방점을 대규모 발전에 둔 것은 태양광 발전 산업이 가진 성격을 살리기 보다는 대형화한 설비와 관리 체계로 운영되는 화석연료와 원자력 에너지 체제의 관성을 추수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산업의 특성을 도외시한 정책은 성과를 내기가 쉽지 않고 예기치 못한 부작용을 불러온다. 유사한 산업의 경험을 가진 나라로서 현명한 정책 수립과 시행을 기대한다. bienns@ekn.kr

[김병헌의 체인지] 지지의 힘과 통치의 책임 사이

이재명 대통령의 SNS가 여권 내부 갈등의 한복판에 섰다. 극단주의를 경계하며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언을 소환했던 대통령은 지난 9일 한층 날 선 메시지를 내놨다. 능력도 없이 자리를 요구하고 뜻대로 되지 않자 개혁을 명분으로 내부를 공격한다는 취지였다. 조희연 전 서울시교육감의 기고문까지 공유하며 동지를 향한 공격의 위험성을 환기했다. 검찰개혁을 둘러싼 이견이 이제 개혁의 주도권과 대통령의 인사권을 둘러싼 충돌로 번진 셈이다.유시민 작가는 지지자들이 기대한 것은 개혁의 '증축'인데 대통령은 '재건축'을 추진한다고 비판했다. 추미애 경기지사는 김지용 중대범죄수사청장 후보자 인선에 거듭 반발했고, 조국혁신당도 수사·기소 분리의 방향을 놓고 이견을 드러냈다. 대통령은 개혁의 이름으로 인사와 수사에 개입하려는 움직임을 경계했다. 한때 같은 목표를 향해 손잡았던 이들이 이제 서로에게 개혁의 정당성을 묻는다. 이 갈등을 친명과 반명, 강경과 온건의 싸움으로만 보면 본질을 놓친다. 쟁점은 김 후보자 한 사람을 넘어선다. 새 수사기관에 어떤 권한을 주고, 누가 통제하며, 잘못된 수사에는 누가 책임질 것인가. 대통령이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사실과 그 인사가 적절하다는 판단은 별개다. 반대하는 쪽 역시 과거 경력에 대한 불신을 넘어 후보자의 구체적인 부적격 사유를 제시해야 한다. 미국의 링컨은 1860년 대선에서 경쟁했던 윌리엄 수어드를 국무장관으로 기용했다. 경쟁자를 제거하는 대신 국정의 동반자로 끌어들였다.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는 1995년 럭비 월드컵에서 과거 백인 지배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에 나타났다. 오랜 차별에 분노한 지지자들에게도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두 지도자는 지지층의 감정만 좇지 않고 국가가 나아갈 방향을 행동으로 보여줬다. 반면 닉슨 미국 대통령은 정적을 위협으로 여기며 권력 방어에 몰두하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물러났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당내 이견을 배신으로 몰아붙이는 정치가 내부 견제를 약화시켰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실패의 원인을 한 가지로 돌릴 수는 없지만, 반대 의견을 차단한 권력은 스스로 오류를 발견할 기회까지 잃기 쉽다. 이 대통령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지지층과의 결별도, 강경파에 대한 굴복도 아니다. 개혁을 요구하는 이들에게는 수사권 통제와 피해자 구제, 기관 간 책임 분담을 어떻게 설계했는지 설명해야 한다. 김 후보자를 적임자로 판단했다면 경력과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을 뒷받침할 검증 결과로 설득해야 한다. 임명 이후 문제가 드러나면 책임지겠다는 약속도 필요하다. 인사권은 물론 그 결과까지 대통령의 몫이다. 반발하는 지지 세력에도 책임이 따른다. 개혁의 후퇴를 비판할 자유는 있다. 그러나 인사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동지를 배신자로 몰거나 확인되지 않은 의혹을 확산시켜서는 안 된다. 대통령 역시 자신에게 불편한 목소리까지 극단주의로 단정해서는 곤란하다. 비판의 근거를 따지고 수용할 것은 받아들이되 최종 결정은 스스로 내려야 한다. 설득 없는 결단은 독선이 되고, 결단 없는 경청은 우유부단이 된다. SNS의 속도와 국정의 속도도 구별해야 한다. 대통령이 댓글마다 반박하고 논쟁마다 직접 나서면 장관과 여당이 감당해야 할 책임마저 대통령에게 쏠린다.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하루의 화제를 장악하는 것과 나라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다르다. 검찰개혁의 성적표는 SNS의 찬반 숫자가 아니라 수사 공백을 줄이고 국민의 권리를 얼마나 보호했는지로 작성돼야 한다. 여당도 대통령의 방패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지지층의 요구를 정책으로 다듬고 대통령의 판단에 이견이 있다면 공개적으로 토론해야 한다. 당이 침묵하면 갈등은 대통령에게 집중되고, 당이 강경파의 목소리만 대변하면 국정의 균형이 무너진다. 대통령과 여당의 건강한 긴장도 민주주의의 자산이다. 국민은 대통령에게 모든 갈등을 없애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지지자에게는 때로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반대자에게는 틀렸다는 증거보다 옳다는 근거를 먼저 제시하며, 잘못된 결정은 고칠 줄 아는 리더십을 기대한다. 민생과 경제, 외교와 안보의 성과로 신뢰를 쌓는 대통령을 바란다.지지자는 대통령을 당선시키나 대통령의 성공을 결정하는 것은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국민까지 책임지는 통치의 능력이다.

[기자의 눈] 공모주는 묶어도, 투자자의 마음은 못 묶는다

금융당국이 기업공개(IPO) 시장에서 기관투자자의 장기보유를 유도하고 있다. 일정 기간 공모주를 팔지 않겠다고 약속한 기관에 더 많은 물량을 배정하는 방식이다. 오는 11월에는 코너스톤 투자자 제도 시행도 예정돼 있다. 기관투자자는 공모주 일부를 사전에 배정받는 대신 해당 물량을 일정 기간 의무적으로 보유하게 된다. 상장 직후 매도 물량이 쏟아지는 것을 막고 중장기 투자자금을 유치하겠다는 취지다. 그런데 최근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기관투자자가 주식을 오래 보유하도록 만드는 것과 중장기 투자자로 만드는 것은 같은 일일까. 숫자만 보면 정책의 효과는 뚜렷하다. 지난해 7월 의무보유확약 우선배정제도가 도입된 이후 기관투자자의 확약 참여가 크게 늘었다. 올해 상반기 신규 상장기업의 평균 의무보유확약비율은 46.32%로 지난해 같은 기간 7.06%보다 6배 이상 높아졌다. 공모주 배정 과정에서 의무보유 여부가 기관투자자의 중요한 고려 사항으로 자리 잡은 셈이다. 하지만 확약 참여가 늘었다고 기관투자자의 투자전략까지 바뀌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최근 만난 한 자산운용업계 관계자는 일반 IPO 펀드의 운용 전략이 여전히 상장 초기 매도에 맞춰져 있다고 말했다. 공모주를 더 많이 배정받기 위해 의무보유를 약속하는 것과 기업의 성장 가능성을 보고 장기간 투자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기관투자자에게 무작정 장기보유를 요구할 수는 없다. IPO 펀드 역시 투자자에게 수익을 돌려줘야 한다. 상장 초기 주가가 크게 올랐다면 차익을 실현하는 것도 합리적인 투자 판단이다. 기업의 성장 전망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주식을 계속 보유할 이유도 줄어든다. 이처럼 기관투자자가 주식을 얼마나 오래 보유할지는 의무보유확약 여부만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확약에 참여할 때는 공모주 배정 혜택이 중요한 고려 사항이 될 수 있지만, 확약 기간이 끝난 뒤에는 기업의 실적과 성장 전망이 투자 판단의 기준이 된다. 의무보유확약 비율이 높아졌다는 사실과 장기투자자가 늘어났다는 평가는 구분해야 하는 이유다. 의무보유확약 확대와 코너스톤 투자자 도입은 IPO 시장의 단기 수급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필요한 시도다. 그러나 주식을 팔지 못하도록 하는 것과 계속 보유할 이유를 만드는 것은 다르다. 제도는 매도 시점을 늦출 수 있지만 투자자의 판단까지 바꿀 수는 없다. 확약이 끝난 뒤에도 투자자를 붙잡아두는 것은 결국 기업의 가치다. 김태환 기자 kth@ekn.kr

[데스크 칼럼] 강남 아파트 가격 하락, 부동산 정책 성공 아냐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18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최근 강남 3구 집값이 약세를 보이는 반면 강북 및 외곽 지역 집값이 오르는 현상에 대해 “강남은 내리고 외곽은 살짝 오르는 일종의 '평탄화 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단순하게 현 부동산 시장 상황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표현으로 읽힐 수 있지만 앞뒤 맥락은 전혀 다르다. 해당 이슈를 이 대통령에게 질의한 기자는 “강남 3구 등의 집값이 약세를 보이고 있지만, 강북 지역 집값은 빠르게 오르고 있어서 중산층과 서민들이 입는 타격이 크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정부는 그 원인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분명하게 대통령에게 따져 물었다. 여기에 이 대통령은 “강남은 내리고, 강북과 외곽은 오르는 평탄화 작업이 진행 중"이라면서 “과거엔 강남 집값이 높고, 다은 지역 집값은 싼 수직적 구조"였다고 부연했다. 부동산 시장의 '평탄화' 현상이 과거와는 다른, 긍정적인 현상이라는 의미로 해석되는 대통령의 언사다. 더군다나 이 대통령은 해당 질문의 가장 핵심 내용, 즉 강북 및 외곽 지역 집값 상승으로 인해 중산층과 서민들이 입는 타격이 크다는 기자의 비판에 대해선 그 어떠한 입장 표명이나 사과도 없이, “부동산 정책은 효과를 보기 어렵지만, 이 정부는 반드시 부동산 시장을 바로 잡겠다"고 답했다. 이전부터 자신에게 부동산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들어올 때마다 끊임없이 되풀이 했던 말을 이번에도 다시 내뱉었다. 무엇보다 '평탄화'라는 용어를 쓴 것 자체가 대통령이 부동산 시장 상황을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방증으로 들린다. 강남 집값이 주춤하고, 강북은 오르는 최근의 흐름에 대해 이 대통령이 직접 자기 입으로 '평탄화'라는 용어를 말하기 전까지 여론이나 시장 일각에선 그 누구도 이런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작금의 주택시장 상황은 '평탄화'라는 긍정적인 표현으로 정의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기자회견장에서 대통령은 강남의 집값 하락과 강북의 집값 상승 현상을 시장이 '평탄화' 되는 과정으로 설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날 간담회 후 각종 부동산 커뮤니티는 대통령의 '평탄화' 워딩에 대해 현실을 외면하고, 실정을 감추려는 실언이라는 비판으로 가득 찼다. 강남 아파트 시세가 5억원 하락하고, 강북 아파트 가격이 5억원 오르는 현재 시장 상황은 '평탄화'라는 나이브한 현실 인식으로 포장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다. 반포나 압구정의 50억짜리 아파트가 45억원에 팔린다고 해도 중산층과 서민 등 일반 시민들의 입장에서 느끼는 주택시장 안정 효과는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강북구나 노원구의 10억원 아파트가 15억에 실거래 되는 것은 대다수 국민들의 주거 안정을 크게 뒤흔드는 일이다. 강남구와 서초구, 송파구 등 서울 강남 3구의 아파트 세대 수는 총 30만호 정도로 전체 서울 세대 수의 450만호에 6%에 불과한 수준이고, 전국 2450만 세대의 1.2%에 불과한 극히 미미한 숫자다. 전체 가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채 1% 남짓한 강남 아파트 가격이 하락하는 것을 두고 '평탄화'라는 용어를 사용해가면서 마치 과거에 없던 현상이 생겼다고 단언하는 대통령의 현실 인식이 우려스럽다. 그리고 이렇게 부동산 시장을 잘못 바라보는 이 대통령의 태도는 결국 또 다시 부동산 정책의 실정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임진영 기자 ijy@ekn.kr

[인터뷰] 이광재 “정치인 평가할 ‘성적표’ 만들어 고성방가 정치 끝내야”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고 있다." 이광재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장은 7일 국회 본관 예결위원장실에서 진행된 에너지경제신문과 인터뷰에서 “기술혁명이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과 세계 질서 재편으로 이어지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인공지능(AI)과 데이터센터, 플랫폼을 새로운 '디지털 경제 영토'"로 규정한 그는 “여의도가 아직 충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위원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보기술(IT) 혁명 당시 빌 게이츠와 앨빈 토플러 등을 직접 만나며 변화에 대응했던 사례를 언급하면서 “지금은 젠슨 황(엔비디아 CEO) 같은 세계적인 기업 최고경영자(CEO)를 대통령과 장관, 국회로 초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 위원장은 당장 특정 분야부터 제로베이스 예산을 적용하기에는 이르다면서도 국가의 돈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시스템부터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가 제시한 '네 개의 돈주머니'는 △약 820조원의 예산 △1500조원 규모의 연기금 △3500조원 규모의 국공유 자산 △금융시장에서 움직이는 자금이다. 지금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각 부처가 서로의 장부를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예산을 편성하지만,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반드시 예산만 써야 하는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연기금이 해외 부동산을 사는 것과 국내 주거 문제 해결에 활용하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국가 목표에 더 도움이 되는지 함께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설명이다. 국공유 자산 역시 마찬가지다. 이 위원장은 “하남에만 800만평이 넘는 국공유 자산이 있다"며 “이를 제대로 활용하려면 국가자산기본법과 전자적 통합관리 체계가 필요하다"고 했다. “청년 자립기금과 아동 자립기금, 국민성장펀드, 국부펀드 등도 재정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금융 시스템을 활용해 국가 자금을 운용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게 이 위원장의 구상이다. 이 위원장이 그리고 있는 방향은 '돈을 쓰는 국가'에서 '돈을 벌어 국민의 삶을 안심시키는 국가'로의 전환이다. AI가 발전할수록 대기업과 자본이 AI를 통해 소득을 가져가고 노동소득의 비중은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에서다. 그는 출생한 아이에게 1억원을 국부펀드 형태로 지급하고 연 7% 수익률을 가정하면 20세에 3억8600만원으로 늘릴 수 있다는 구상을 제시했다. 이 가운데 1억원은 청년 시기의 도전 자금으로 활용하고 나머지를 장기 운용해 노후자금으로 연결하는 방식이다. “AI 시대에는 이런 자산 형성 구조가 필요하며 현재 약 25조원에 달하는 기초연금 지출과도 연결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설명이다. 다음은 주요 문답. ◇ 연평균 40조 불용액…투자심사부터 AI로 ―매년 반복되는 예산 불용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인가. “엄격한 투자심사가 필요하다. 이월금은 다음 해에 쓸 수 있지만 연평균 40조 원가량 발생하는 불용액이 심각한 문제다. 단년도 회계 방식의 구조적 한계도 있으나, 애초 사업 계획이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거나 급하게 추진된 사업에서 불용액이 발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중앙정부뿐 아니라 지방정부와 기초자치단체 단계부터 투자심사를 전면 강화해야 한다." ―투자심사에 인공지능(AI)을 도입하겠다고 밝혔는데. “AI가 투자심사와 사업평가에 큰 강점을 보일 수 있다. 국회가 자체 대규모언어모델(LLM)을 구축 중이지만 아직 성능에 한계가 있어 내부 데이터를 학습시키며 활용도를 높이는 중이다. 예산 심사와 투자심사에 AI를 적용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있으며, 올해 실제 예산 심사 과정에서 시범 활용하는 방안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 AI 산업 발전을 위한 정부의 역할은. “하드웨어와 반도체 산업 지원을 넘어 서비스 영역 등 다양한 분야를 살펴야 한다. 현재 AI 관련 예산이 36조 원에 이르지만 연구개발(R&D) 사업의 성공률이 지나치게 높게 잡혀 있다. 성공률이 98%인 R&D는 존재하기 어렵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수준의 성공률을 참고해 실패 가능성이 있는 미지의 영역에도 과감히 투자해야 한다." ―특별히 집중해서 주목하는 AI 분야가 있다면. “생활 속 AI 서비스 분야다. 반도체와 하드웨어는 대기업이 상당 부분 주도할 수 있으므로, 정부는 젊은 창업자들이 영상편집, 사진, 웹툰, 드라마 등 다양한 실생활 AI 서비스를 만들도록 집중 지원해야 한다. 의료와 교육 분야에서도 API를 개방해 AI 개인 주치의나 AI 교사 같은 혁신 서비스를 창출하도록 국가 차원의 선택과 투자가 시급하다. 세계적 핵심 기술을 확보함과 동시에 한국이 직접 경쟁력을 가지는 AI 서비스 생태계를 넓혀야 한다." ―AI와 클라우드 이용료를 '디지털 임대료'라고 표현했다. “기업이 클라우드 비용을 내고 개인도 AI 서비스 이용을 위해 지속해서 비용을 지불하는 구조가 점차 커지고 있다. 한국이 외국 플랫폼에 계속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는 상황을 그대로 방치해선 안 된다. 정부와 민간이 적극 협력해 핵심 기술을 확보하고, 우리가 세계 시장에서 주도할 수 있는 서비스를 직접 만들어야 한다." ◇ 정치인도 성적표 받아야…국민 삶의 질로 평가 ―4년 만에 국회로 돌아온 소감은. “정치가 과거보다 더 나빠졌다고 체감한다. 정치인들이 국가를 어떻게 바꿀지에 대한 뚜렷한 목표와 계획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정책 경쟁보다는 언론의 주목을 끌기 위한 자극적인 말과 행동에 치우치는 경향이 심해졌다." 이 위원장은 지난 6·3 보궐선거 당시 하남갑 공천을 받아 당선돼 국회에 다시 입성했다. 그는 “이전 지역구였던 태백·영월·평창·정선이 정겨운 시골이었고, 원주가 활력의 기업도시였다면 하남은 그 둘을 섞어놓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 위원장의 e메일 아이디는 'hanamkap'이다. ―정치를 바꿀 구체적인 해법이 있나. “정치인에게 국민 삶의 질 성적표를 매겨야 한다. 일자리·소득·주거·보육·교육·의료·문화·생활환경·공동체·불평등과 사회이동성 등을 객관적 지표로 만들어 광역단체와 234개 지방정부의 삶의 질을 매년 또는 6개월마다 낱낱이 평가하는 구상이다. 과거 지역별 대학 진학률을 투명하게 공개해 교육당국의 자발적 경쟁을 유도했던 경험처럼, 삶의 질 지표를 예산 배분과 정치인 평가에 직결시켜야 한다. 이젠 고성방가 정치를 끝내야 한다." ―국회의원 평가 기준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뜻인가. “법안 발의 수보다 지역 주민의 실제 삶이 얼마나 나아졌는지를 핵심 평가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지역구는 표를 얻는 공간을 넘어 정치인이 땀 흘려 성과를 내는 실무 현장이 되어야 한다. 기업 실적을 철저히 평가하듯 정치인도 지역 일자리·소득·주거·교육·의료 등에서 도출한 구체적인 결과물로 심판받아야 마땅하다." ◇ “검찰개혁 논쟁보다 일자리·주거에 집중을" ― 검찰개혁을 둘러싼 당내 강경파와 온건파 간 갈등을 어떻게 보나. “정치권 내부의 정쟁보다 정부 여당이 국민에게 보여줄 실질적 성과 창출에 집중해야 한다. 국민에겐 당내 옳고 그름의 논쟁보다 일자리·주거·노후 불안 같은 현실적인 민생 문제가 훨씬 더 절실하다." ―중대범죄수사청장 후보자를 둘러싼 논란도 이어지고 있다. “청문회를 통해 투명하게 판단하면 된다. 프랑스의 드골 전 대통령이 이념 성향이 확연히 다른 앙드레 말로를 문화부 장관으로 기용해 문화 전성기를 이끌었고, 사르트르를 품었던 역사적 용기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링컨의 사례처럼 정치에서 서로 다른 의견이 존재하는 것 자체는 나쁜 현상이 아니다. 상대를 비판하기는 무척 쉬우나 대안을 제시하려면 열 배 이상의 공부가 필요하다. 자신의 판단이 틀렸을 가능성을 인정하고 국민 삶을 최우선 기준으로 삼아 정치적 오류를 끊임없이 수정해 나가는 용기가 지금 정치권에 가장 필요한 덕목이다." ■ 이광재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장 프로필 △1965년 강원 평창 출생 △원주고-연세대 법학과 △노무현 국회의원 비서관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 기획팀장 △대통령비서실 국정상황실장 △17~18대 국회의원(강원 태백·영월·평창·정선) △제35대 강원도지사 △21대 국회의원(강원 원주시갑·민주당) △국회 외교통일위원장 △제35대 국회사무총장 △22대 국회의원(경기 하남갑·보궐선거) △제22대 국회 후반기 예산결산특별위원장 대담=최경호 정치경제부장 squeeze@ekn.kr 정리=이상무 기자 rokmc@ekn.kr

[기자의 눈] 18명 설문으로 만든 ‘이재명 정부 AI 실패론’

지난 4월 산업통상부에서 점심시간을 이용한 인공지능(AI) 활용 교육이 열렸다. 참석자는 20여 명. 교육 도중 설문을 돌렸고 18명이 답했다. 전원이 챗GPT와 제미나이 등 상용 AI를 사용한다고 했다. 산업부 직원 약 1250명 가운데 18명이 응답한 조사였다. 이 설문이 지난달 국민의힘 최수진 의원실의 보도자료에 등장했다. 제목부터 이재명 정부의 'AI 100조 투자·한국형 챗GPT' 공약을 겨냥했다. 산업부 공무원들이 164억원을 투입한 정부 AI를 외면하고 해외 AI에 의존한다는 내용이었다. 정부 AI를 자주 이용한다는 응답은 0%, 해외 AI를 사용한다는 응답은 100%라고 했다. 숫자는 틀리지 않았다. 문제는 그 숫자가 설명하는 범위다. 점심시간 교육에 참석한 직원들의 응답으로 산업부 전체의 AI 이용 실태를 판단할 수는 없다. 직급이나 연령 등을 고려한 표본조사도 아니었다. 의원실이 이런 한계를 몰랐던 것도 아니다. 응답자 수를 묻자 “18명이요"라고 답했다. “AI 쓰는 사람들을 샘플링해서 조사한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러나 원 보고서에는 그런 표본 추출 과정이 없다. 산업부 관계자는 이 설문을 두고 “한마디로 의미가 없는 설문"이라고 했다. 의원실 보도자료에는 정보 유출 우려도 담겼다. 해외 AI 사용이 국가 안보 측면에서 위험하다는 주장이었다. 실제 유출 사례를 확인했느냐고 묻자 의원실은 “일반적인 차원"의 지적이라고 했다. 164억원도 산업부에 별도로 투입된 예산이 아니라 범정부 AI 공통기반 전체 사업비다. 산업부의 책임도 있다. 대표성을 갖추지 못한 설문을 공식 연구용역 보고서에 싣고 '정량적 근거'라고 평가했다. 담당자가 뒤늦게 “구색 맞추기 식"이었다고 설명한들 달라질 것은 없다. 그러나 국회는 정부가 내놓은 자료의 허점을 검증하는 곳이다. 이번에는 정반대였다. 의원실은 조사 규모를 알고도 100%라는 비율을 앞세웠다. 여기에 범정부 사업비와 확인되지 않은 정보 유출 우려를 더해 이재명 정부의 AI 정책을 비판했다. 각각의 사실이 뒷받침하는 범위를 넘어선 결론이었다. 정부 AI의 활용도가 낮다면 원인을 조사하면 된다. 보안이 걱정된다면 실제 위반 사례와 관리 실태를 확인하면 된다. 국정감사에서 따져볼 사안도 적지 않다. 그런데 이번 보도자료는 확인된 사실보다 결론이 앞섰다. 산업부가 만든 부실한 자료를 국회가 걸러내지 못한 것이 아니다. 그 자료의 한계를 알고도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근거로 삼았다는 점이 더 심각하다. 김나현 기자 knh@ekn.kr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