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홍종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
최근 몇 년 사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은 전 세계 기업과 투자자들의 핵심 화두가 되었지만, 이제는 그 이면을 냉정하게 들여다볼 시점이 되었다. ESG는 한때 “지속가능성에 대한 약속"처럼 여겨졌지만, 이제는 상황에 따라 취사선택되는 조건부 전략으로 변질되고 있다. 시장성과 수익성, 그리고 효율성이 ESG 원칙을 압도하는 순간, 기업과 금융기관은 주저 없이 기존의 입장을 철회하거나 후퇴한다. 최근 미국에서 벌어지는 사례들은 ESG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명확히 보여준다.
첫째, 미국의 주요 은행들이 탄소 감축 목표에서 급속히 후퇴하고 있다. JP모건, 뱅크오브아메리카, 골드만삭스, 시티, 모건스탠리 등은 2025년 들어 Net-Zero Banking Alliance(NZBA)에서 잇달아 탈퇴하거나, 기후 목표를 1.5℃에서 “파리협정 이하" 수준으로 완화하는 등 ESG 약속을 대폭 후퇴시켰다. 이들은 “정책 변화"와 “고객 전환의 어려움", “지정학적 리스크" 등을 이유로 들며, 사실상 수익성과 실현 가능성을 ESG보다 우선시한 것이다.
둘째, ESG를 앞세운 펀드가 실제로는 탄소 집약적 기업에 투자하는 사례도 있다. JP모건의 '지속가능' 펀드가 약 2억 파운드(약 3000억 원)를 전 세계의 에너지 및 실물 자산 거래 1 등기업인 글렌코어(Glencore)에 투자한 것이 대표적이다. 글렌코어(Glencore)는 환경 규제 위반 이력까지 있는 기업으로, 이는 '지속가능성'이라는 이름 아래 실질적 ESG 원칙은 무시된 사례다.
캘리포니아 공무원연금(CalPERS)는 ESG 전략에 따라 사우디의 아람코(Saudi Aramco)와 셰브론(Chevron) 같은 고탄소 기업을 '기후 솔루션' 투자처로 분류하고 있다. 이들 기업은 탈석유·탈가스의 흐름과는 명백히 반대되는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CalPERS는 “전환기 투자"라는 프레임을 적용해 정당화하고 있다. 이는 ESG를 투자 수익과 리스크 헤지 수단으로 재정의한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더 중요한 흐름은 정부 차원에서도 ESG에 대한 유연한 조정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연방 및 주 정부는 에너지 비용 상승이 경제성과 국가 안보를 위협한다고 판단하며, 최근 에너지 관련 규제들을 적극 재검토하고 있다. 여러 주는 기후변화, ESG, 환경정의, 탄소세 및 벌금 등과 관련한 각종 규제 중 이념 중심의 비현실적 정책들을 식별하고, 위헌적이거나 과도한 조치들에 대해 시정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미국이 ESG를 무조건 지키는 이상적 규범이 아닌, 경제·안보 현실과 조화되는 실용적 정책 프레임으로 재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친환경을 주도적으로 외치던 EU도 옴니버스 패키지를 통하여 지속가능실사 지침을 연기하거나 유예하고 있으며 탄소국경조정 대상 기업을 대폭 면제해주는 등 실사구시의 자세로 경제가 우선임을 새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정부와 기업은 어떤 전략을 선택해야 하는가? ESG를 우선하면서 기업의 활동을 제약하고 비용을 높이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환경규제 위주의 탄소중립 정책의 결말은 제조업 경쟁력 하락과 국민 비용 증가만이 남을 것이다. 물론 탄소중립과 녹색 전환은 시대적 과제이며 이를 외면할 수는 없다.
하지만 기술적·지리적 제약, 불리한 자연조건, 높은 전환 비용을 고려할 때, 무리한 선언보다는 실현 가능성과 경쟁력을 고려한 전략이 필요하다. 정부는 에너지 안보와 산업 기반을 위협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점진적이고 유연한 정책 조정을 검토해야 하며, 기업은 실효성 있는 ESG 실행 방안을 스스로 설계해 나가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영리하고 현실적인 전략을 통해 ESG와 생존을 동시에 추구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