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동안 전력시장을 정부의 영향력으로부터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의결·인사·예산 독립성을 확보하여 정치적 영향을 차단하고, 원칙에 따라 요금을 산정하며 시장을 감독할 수 있는 독립적 결정기구, 예컨데 새로운 형태의 '전기위원회'나 '전력감독원'을 설립해 시장의 합리적 운영을 보장하자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독립된 한국은행의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를 비교하기도 한다. 독립규제기관 논의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정치와 정부 개입을 배제해야 한다는 필요성은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지만, 물가 안정과 정치적 통제 필요성 등이 우선시 되면서 제도화되지 못했다. 최근 이 논의가 다시 주목받는 배경에는 정부조직법 개편이 있다. 산업부가 쥐고 있던 권한이 기후에너지환경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독립 위원회 모델이 대안으로 다시 부상한 것이다. 초대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 또한 이러한 전력부문 자율기구의 설립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고 실제로 급물살을 타는 듯하다. 하지만 명분에 앞서 현실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시장의 성숙도가 충분히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자율기구를 도입하는 것이 마치, 아이에게 칼을 쥐여주는 일처럼 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주요 선진국들 역시 자율적인 전력 규제기구를 두고 있다는 점이 단골로 주장된다. 그러나 성숙한 전력시장이 형성되기 전에 자율기구가 먼저 등장한 사례가 과연 있었는가? 혹은 시장 자체가 부재한 상태에서 자율기구가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나 주도적으로 그럴듯한 시장을 만들어낸 경우가 있었는가? 예컨데 한국은행 금통위의 독립성이 제도적으로 가능했던 배경에는 탄탄한 민간 은행업권과 금융시장이 존재했다. 중앙은행이 통화정책의 방향을 제시하더라도, 그 뒤에는 이를 수용·반영하는 상업은행, 자본시장, 민간 금융업자가 뒷받침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민간 은행 연합의 이해관계 속에서 태동했으며, 한국은행 역시 은행권과 금융시장을 대표하는 성격을 지닌다. 이런 구조 덕분에 금통위는 정부의 정책적 수요와 민간 금융시장의 기능 사이에서 균형자이자 심판자로 작동하며, 독립성이 실질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반면 한국 전력시장은 시장 참여자라 할 민간 기반이 부족하다. 규모 있는 발전사 대부분이 한전 자회사 계열이고, 소매 전력시장은 아예 독점적 구조로 한전이 사실상 단일 판매자다. 민간 발전사가 일부 존재하긴 하지만, SMP(System Marginal Price)는 CBP(Cost-Based Pool) 체제에서 수요·공급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제출된 원가 자료를 기반으로 산정될 뿐이다. 신재생에너지 관련 비용 부담 역시 사후 정산 구조로 운영되며, 전가되는 과정도 시장의 경쟁을 통해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시장 가격 형성 메커니즘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따라서 전력 가격은 온전히 시장이 만들어낸 결과와는 거리가 멀다. 바로 이러한 제도적 특성 때문에 전기요금은 시장에서 형성되는 가격이라기보다 준조세적 성격을 띠며, 민간 이해관계자가 제도적으로 대표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즉 이런 현실 때문에 전기위를 금통위 혹은 여타 선진국들의 자율규제기구와 비교하는데 현실적 배경적 간극이 크게 존재한다. 금통위 독립성은 정부와 민간 금융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제도로 설계된 반면, 현재 전기위 독립성 논의는 정부 내 권한 조정과 소수의 폐쇄적 이해관계자들의 영향력 유지를 위한 레토릭으로 기능할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다. 독립성이 명실상부하게 작동하려면 단순히 제도만 가져올 것이 아니라, 민간 전력시장 개방과 소매 다변화 같은 구조적 개혁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금통위 모델을 껍데기만 흉내 내는 결과에 그칠 수밖에 없다. 실은 한국 전력시장의 구조를 고려할 때, 전력부문 자율규제기구 독립화는 제도적 명분은 있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독점자에 의한 규제 포획(regulatory capture), 즉 독점자에 의해 자율규제기구가 좌지우지될 위험을 키울 수 있다. 금통위는 은행권 등 민간 금융 주체가 존재하고, 그 이해관계가 제도적으로 반영되는 구조 속에서 정부와 민간 사이의 균형자로 기능한다. 그러나 전력시장은 소매 부문이 부재하고 발전 분야 역시 대부분 한전 자회사로 채워져 있어, 독립위원회가 설립되더라도 견제와 균형을 뒷받침할 민간 기반이 부족하다. 결국 이러한 구조적 한계는 새로운 자율규제기구 설립이 시장의 기대와는 다르게 일부 극소수 이해관계자들을 위한 자리 만들기 식 위인설관(爲人設官)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낳는다. 규제 포획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현실화될 수 있다. 전기요금 산정에 필요한 핵심 비용·수급 정보는 한전이 독점적으로 보유하고 있어, 위원회는 이를 의존할 수밖에 없다. 전문가 풀 역시 간택된 호위무사들이 주축을 이루어, 독립성보다는 기존 구조를 재생산할 가능성이 크다. 더 나아가 정부는 정치적 부담을 회피하기 위해 요금 인상 등 책임을 위원회에 전가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시장 독점자는 로비와 정보 제공을 통해 제도를 자사에 유리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이 과정은 오히려 전력시장 관리에 있어 현행 제도와 비교해 민주적 통제 가능성만 훼손시킬 수 있다. 전기요금은 국민 생활비와 직결되는 준조세적 성격을 지녀 왔으며, 이러한 특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일정 수준의 국민적 통제가 필요하다는 인식은 적어도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짙다. 그러나 독립위원회 체제에서는 정치 개입을 차단한다는 명분 아래 오히려 국민 통제력이 줄어들고, 주식시장에 상장된 준상업 기관으로서의 ㈜한국전력과 폐쇄된 일부 네트워크의 영향력만 강화될 수밖에 없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요컨대 전력 도·소매 시장이 성숙하기 전 현 시점에서 전기위원회 독립화는 제도적 상징성은 있을지 몰라도 의도했던 실질적 효과를 담보하기 어렵다. 오히려 한전의 독점력이 강화되는 역효과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자율규제기구라는 배를 띄우기에 앞서 소매시장 개방, 민간 경쟁 촉진, 정보 공개 강화 등 시장 기반을 다지는 넓은 바다부터 조성해야 한다. 우리는 그 필요조건 하나하나조차 충족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지 않던가? 선행조건도 충족하지 못한 채 무리하게 추진한다면, 그것은 정부의 민주적 통제가 약화되는 동시에 기존의 독점자만 간접적으로 강화되는 부작용만 남길 것이다. 정권과 무관한 자생력을 독점에 선물하면서 독립이라 부르는 순간, 속칭 개혁이 양두구육(羊頭狗肉)으로 전락할까 걱정된다. 유종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