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한국 최고 갑부인 삼성가(家) 사람들이 대출을 받고, 정부가 게임사 대주주로 올라섰다. 상속세 때문이다. 상속·증여세의 틀은 23년째 요지부동이다. 손볼 때가 됐다. 일본은 경기 진작 차원에서 생전증여를 활성화할 계획이다. 일본을 반면교사로 삼아 우리가 갈 길을 찾아보자. 세상 쓸데없는 일이 재벌 걱정이라지만, 그래도 약간 걱정이 된다.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의 유족이 세금 낼 돈이 없어 주식담보대출을 받았다. 유족이 내야 할 상속세가 모두 12조원에 이른다. 아무리 재벌이라도 작은 돈이 아니다.게임 대기업 넥슨의 유족은 아예 주식으로 세금을 냈다. 이를 물납(物納)이라 한다. 넥슨 유족이 낼 세금은 6조원 규모다. 그 바람에 기획재정부가 덜컥 넥슨 모기업인 NXC의 2대 주주(지분율 29.3%)에 등극했다. 한국 최고 갑부인 삼성가(家) 사람들이 대출을 받고, 기재부가 게임사 대주주로 올라섰다. 누가 봐도 자연스럽지 않다. 오너 대기업들은 벌벌 떨게 생겼다. 이러다 본사를 해외로 옮긴다는 말이 나올까 걱정이다. 재벌은 그렇다 치고, 아파트 한 채에 약간의 여윳돈을 가진 장삼이사들은 상속세, 증여세를 잘 내고 있을까? 고민의 크기만 다를 뿐 중산층에게도 이들 세금은 골칫거리다. 국세청은 요 몇 년 새 상속·증여세 납부 대상 건수가 급격히 늘어나자 지난 4월 웹사이트에 ‘상속·증여 세금 상식’ 안내문을 올렸다. 20~30대 MZ세대는 부모세대보다 못사는 첫 세대가 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일본은 뒤늦게 장롱에 잠긴 천문학적인 금융자산을 밖으로 끌어내려 안간힘을 쓴다. 고령화 시대에 원활한 부의 대물림을 진지하게 고려할 때가 됐다. 일본을 반면교사 삼아 우리가 갈 길을 찾아보자.◇ 삼성, 넥슨의 경우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은 최근 주식담보대출을 받았다. 재벌도 조 단위 세금을 내려면 어쩔 도리가 없는 모양이다. 전에도 대출을 받은 적이 있다. 세 사람이 지금껏 받은 대출을 합하면 4조원을 약간 웃돈다. 이건희 전 회장은 2020년 10월에 별세했다. 유족은 상속세 총 12조원을 2021년부터 5년 간 연부연납(年賦延納) 방식으로 납부하는 중이다.넥슨 김정주 창업주는 2022년 2월에 별세했다. 넥슨의 모기업인 NXC는 비상장사로 창업주와 아내, 두 딸이 소유했다. NXC는 일본 도쿄증시에 상장된 계열사 넥슨의 최대주주이기도 하다. 창업주의 지분은 고스란히 가족에게 유산으로 넘어왔다. 거기에 상속세 6조원 딱지가 붙었다. NXC는 비상장사인데다 가족 지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주식으로 물납을 해도, 곧 일부 지분을 내놔도 경영권에 별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 ◇ 23년째 같은 세율 한국 상속·증여세는 구간과 세율이 2000년 개편 이후 23년째 변동이 없다. 소득세, 법인세, 종합부동산세 등이 시대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바뀐 것과는 대조적이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의 ‘상속·증여세제 개선방안’(권성오 부연구위원·2022년 6월)에 따르면 "상속·증여세의 국세 대비 비중은 2010년 1.7%에서 2020년 3.7%로 증가"했다. 상속·증여세 최고세율은 50%(과세표준 30억원 초과)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일본(55%)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 그러나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은 "최대주주 할증과세를 적용하면 최대 60%의 세율을 적용받기 때문에 사실상 가장 높은 수준"이라고 분석한다(‘현행 기업승계 상속세제의 문제점 및 개선방향’·2023년 5월).과세표준 30억원 이하는 구간별로 10∼40% 세율을 적용한다. 대도시 아파트를 유산으로 물려받으면 당장 세금 걱정이 앞선다. 한경연은 가업상속 공제 역시 실효성이 떨어진다고 비판한다. 정부는 중소기업의 원활한 가업 승계를 위해 이런저런 공제 혜택을 부여한다. 그러나 요건이 까다롭고 공제 금액도 크지 않아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한경연은 "한국은 가업상속공제 적용 건수가 독일의 100분의 1수준"이라고 말했다. ◇ 윤석열 정부는 다를까기재부는 지난해 10월 ‘상속세 유산취득 과세체계 도입을 위한 법제화 방안 연구’를 용역 의뢰했다. 당초 올 5월 말 종료 예정이었으나 지금도 연구가 진행 중이다. 상속세는 과세 방식에 따라 유산세와 유산취득세로 나뉜다. 유산세는 몇 명이 상속을 받든 상속재산 전체에 대해 세금을 물린다. 자연 세율이 높아질 공산이 크다. 지금 우리가 채택한 방식이다. 반면 유산취득세는 각자 상속한 재산을 놓고 따로 세금을 매긴다. 상속인(상속을 받은 사람) 입장에선 세율이 낮은 유산취득세가 한결 유리하다. 기재부는 "상속세를 운영 중인 OECD 23개국 중 유산세 방식은 4개국(한국, 미국, 영국, 덴마크)에 불과하고, 나머지 19개국(일본, 독일, 프랑스 등)은 유산취득세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만약 유산취득세 방식으로 바뀌면 1950년 상속세법 제정 이후 73년만의 대수술이 된다. 이와 함께 정부는 무상 증여 한도도 손을 볼 가능성이 있다. 현재 증여세 인적공제는 배우자 6억원, 아들·딸·손자는 5000만원까지 허용된다. 배우자 6억원은 2008년, 아들·딸·손자 5000만원은 2016년에 상향조정됐으니 한번 더 손을 볼 때가 됐다. 다만 기재부는 증여세 인적공제 상향에 대해 "검토된 바 없다"는 입장이다. ◇ 일본이 주는 교훈2021년 가을에 취임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새로운 자본주의’를 기치로 내걸었다. 일본 경제를 잃어버린 30년의 터널에서 탈출시키는 전략이다. 그 가운데 저축과잉을 해소해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내용이 있다. 일본 개인 금융자산은, 놀라지 마시라, 무려 2000조엔(약 1경8700조원)으로 추산된다. 이중 절반 이상이 예금과 현금이다. 또 60%가량은 고령층이 갖고 있다. 돈은 돌아야 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고령층은 소비성향이 낮다. 이들이 돈을 그냥 장롱에 처박아 두는 바람에 일본이 장기불황에 빠졌다는 분석도 있다. 기시다 내각은 부의 이전을 촉진하기 위해 생전증여 제도를 확대할 계획이다. 일본은 부모가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면 매년 110만엔까지 비과세다. 다만 부모가 사망하기 3년 전에 증여한 것은 모아서 상속세를 물린다. 이 기간을 7년으로 늘리는 게 기시다 내각의 복안이다. 다시 말해 증여세를 아끼려면 적어도 사망 7년 전에는 증여를 마치라는 얘기다. 지금은 80대 노인이 60대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형편이다. 그래봤자 돈은 돌지 않는다. 그러나 60대 부모가 씀씀이가 큰 40대 자식에게 증여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사망 7년 전 생전증여’ 계획은 2024년부터 2031년까지 단계적으로 실시된다. ◇ 한국이 가야 할 길일본은 긴 불황을 겪고 나서야 매끄러운 재산 대물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일본이 간 길을 우리가 되밟을 이유가 없다. 한국은 일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인구도 줄고 동시에 늙어가는 중이다. 증여세 인적공제 확대나 생전증여 활성화가 경기 진작에 도움이 된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재벌이든 장삼이사든 상속세는 유산취득세 방식으로 바꾸는 게 바람직하다. 실제 자기 손에 들어온 유산만큼 세금을 내는 게 상식에 부합한다. 한경연은 가업승계를 촉진하려면 "최고 상속세율(50%)을 OECD 회원국 평균 수준보다 조금 높은 30%까지 낮추고, 최대주주 할증과세는 폐지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가업상속 공제만으론 부족하다는 얘기다. 정부는 올해 세수 펑크를 겪고 있다. 한 푼이 아쉬운 마당에 상속·증여세에 손을 대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조세 정책은 긴 시야에서 접근하는 게 옳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달 기자간담회에서 "한국 경제는 이미 장기 저성장 구조에 와 있다"고 말했다. 당장 상속·증여세로 들어오는 세금이 줄더라도 두고두고 경기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면 밑지는 장사가 아니다. <경제칼럼니스트>사진=연합뉴스상속증여세 세율체계. 출처=한국조세재정연구원 ‘상속증여세 개선방안’, 상속증여세제 개편방안 공청회 주제발표(2022년6월).출처=국세청 웹사이트(nts.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