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이 끝났다. 2024년 12월 계엄 사태 이후 반년 동안 이어온 국정과 경제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됐다. 우리가 아무것도 못하고 넘어지지 않으려 급급하는 동안 세계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국내 경제의 어려움 또한 가중되었다. 제대로 된 리더십이 있었다면, 국민의 어려움을 살피고 다가오는 위협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기민한 행동을 기대해 볼 수 있었을텐데, 앞바다에서 수십미터 높이로 들이닥치는 거대한 쓰나미를 맥없이 바라보는 어린아이처럼 우리는 아무 대책도 없이 이 중요한 시기를 허비했다.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절체절명의 사태 앞에서 민생과 국가 경제의 생존이라는 어젠다가 상대적으로 사소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계엄과 탄핵, 대선이라는 극단적인 광기와 혼란, 마찰과 분열의 시기를 막 끝낸 우리 앞에 놓인 계산서는 냉정하다. 악화된 경제지표와 서민의 현실은 일자리, 소상공인 매출과 폐업, 가계대출 등 대부분의 서민 관련 지표들이 악화된 현실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2022년 이후 임금근로자의 신규 일자리수는 11분기 연속해서 줄곧 줄어왔다. 특히 건설업과 제조업, 숙박업의 감소세가 두드러졌다. 경기침체 여파로 소상공인들의 매출도 작년에 비해 크게 줄고 있다. 개인사업자 대출이 있는 사업장 360여만개 중 50만개가 폐업이라는 통계도 보인다. 가계 대출 규모 또한 작년 2/4분기 이후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소비, 건설 투자 등 내수 경기 지표도 부진하다. 올 1-4월의 소매 판매 불변지수가 작년보다 줄었고, 건설 기성도 작년보다 큰 폭으로 줄어들었다. 제조 평균 가동률도 올 4월 73.8%로 작년보다 줄어들었다. 이에 더해 트럼프발 관세 전쟁의 여파가 현실화되면서 수출에도 주름이 잡히고 있다. 금년 5월에는 수출이 1.3% 감소했다. 석유 제품, 석유화학, 철강, 자동차 부품, 전기차, 디스플레이 등의 수출 감소세가 특히 두드러져 보인다. 앞으로 더 많은 제조업 분야가 수출 감소의 위기를 겪을 것으로 우려된다. 이재명대통령의 새 정부가 풀어야 할 과제는 이 외에도 무수히 많다. 비상계엄 사태로 촉발된 전 국민의 극단적인 대립과 분열을 해소하고 화해와 통합을 일구어야 한다. 양극화와 세대 갈등, 지역분열의 씨앗이 되어 공동체의 불안을 가속화시키고 있는 사회적 불평등을 완화시키고 복지와 사회안전망을 충실하게 만들어야 한다. 트럼프 2기의 관세전쟁과 가치동맹 소실에 대응하여 각자도생의 시기를 살아남을 수 있는 균형잡힌 외교안보와 국제협력, 자주국방의 길을 열어야 한다. 눈앞에 닥친 초고령화 사회가 제기하는 수많은 도전과제에 대해서도 대비해야 한다. 기후위기시대의 글로벌 공조체제에서 우리 몫을 다하고 그린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실행력과 지속가능성을 구비한 온실가스 감축의 새로운 로드맵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숙제들은 우리가 살아 남아야 할 수 있는 일들이다. 경제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특단의 전환 필요 당장 우리가 직면한 경제적 생존 환경은 척박하고도 암울하다. 서민이 살아야 내수가 살고, 내수가 살아야 중소기업이 살며, 중소기업의 경쟁력이 받쳐 주어야 대기업의 글로벌 도약이 가능하며, 대기업의 성과가 국내에서 양질의 일자리로 이어져야 서민경제가 살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 정반대의 악순환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형국이다. 흐름을 바꾸는 특단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첫날 바로 비상경제 대응TF를 가동하고 직접 회의를 주재했던 것은 그런 의미에서 너무나 필요했고 마음이 놓이는 일이었다. 3년전 전임자가 취임 일성으로 '자유'라는 이데올로기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편향외교와 정적 탄압에 국정의 방향타를 세웠던 것이 이번엔 반대 방향으로 되풀이되는 것이 아닌지 많은 국민들이 걱정스러워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실용주의와 중도의 기치 아래 국민의 삶을 가장 앞에 세우겠다는 것이 위정자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임에도 그러지 못할까 두려워할 만큼 우리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기대는 극도로 낮아져 있었던 것 같다. 이젠 그런 '사소한' 걱정을 뒤로 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다. 정치인이 풀어야 하는 최고의 숙제는 당연히 당면한 민생의 위기일 것이다. 이번 비상경제 운영의 핵심에도 추경 편성을 통해 민생의 어려움을 해소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비상경제가 우선이고 개혁 과제는 후순위의 일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공감한다. 그러나 놓쳐서는 안 되는 부분을 놓칠까 우려스럽다. 위기 극복의 조건은 고통감내와 혁신이다 흔히 위기는 기회라는 말을 한다. 지난 수십 년간 우리 경제의 궤적을 돌이켜보면 그 말이 대부분 맞았다. 그러나 위기가 당연히 기회가 된 것은 아니었다. 위기를 이겨내는 우리의 방법이 새로운 기회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방법이란 너무도 당연하게 고통과 인내를 동반하는 것이었다. 가깝게는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와 1997년의 IMF 외환위기가 그러했고 멀게는 1973년과 1979년에 일어난 2차례의 오일쇼크가 그러했다. 우리는 진통제와 마약으로 위기를 견디고 다시 일어선 것이 아니다. 이를 악물고 환부를 도려내고, 상처부위의 피를 지혈하고 소독약과 항생제를 뿌려가면서 질병의 원인을 찾아 뿌리 뽑는 독한 의지를 발휘했기 때문에 세계가 놀라는 '기적'들을 연달아 만들어 내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IMF가 강요한 처방은 시장개방과 개혁이었다. 그들은 과연 우리나라가 외화 지급불능의 위기를 이겨내고 선진국으로까지 도약하리라 기대했었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IMF의 처방은 폐쇄되어 있던 우리 경제를 세계적 투기자본들이 약탈적 히트앤런을 되풀이하는 난장판으로 만들거나 부진한 개혁이행과 고질적 정경불안, 경기침체로 채무불이행이 거듭되는 남미형 정체경제로 쇠락시켰을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이를 바꾸어 놓은 것이 DJ정부의 결기였다. 기업과 공공부문의 과감한 구조개혁을 통해 경제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국민들이 생활하고 사고하는 방식마저도 뒤집어 놓았다. 방만한 경영과 문어발식 경영 확장으로 외형의 거대화만을 추구했던 우리 기업 집단들은 사업 구조조정과 대량 정리해고 등 극단적인 경영개선 활동을 통해 생존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가장 기민하게 새로운 사업 영역을 개척할 수 있는 최적의 체력을 갖추게 되었다. 중소기업, 대기업 할 것 없이 도산이 줄을 이었고, 한창 일할 나이인 40대, 50대의 가장들이 직장을 잃고 거리로 나와야 했다. 이전 같았다면 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노동쟁의와 파업 등 극한 대립으로 치닫았을 노조들 또한 행동을 자제했다. 나라가 살아야 미래가 있다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신자유주의적 시장개혁이 있었던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진보정권이었던 DJ정부 때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다. 2025년의 위기, 과거와는 다른 해법 필요하다 2025년 우리가 직면한 비상경제 상황은 일견 1997년처럼 유혈이 낭자한 지경은 아니다. 새 대통령 취임이라는 낭보에 주가와 외환 등 일부 경제 지표가 크게 반등하는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 그러나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우리 경제는 당장 목숨이 위태로운 정도는 아니라지만 상황을 호전시킬 수단 또한 대부분 소진된 난감한 지경임을 알 수 있다. 예전처럼 고통을 참고 인내하고 더 부지런하게 노력하는 것만으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부적으로는 각종 규제가 중첩되고, 고령화가 심화되면서 노동시장과 기업운영의 경직성이 한계에 이르고 있다. 시장환경이 급변하면서 대기업들마저도 끊임없는 사업재편을 통해 살 길을 찾아나가야 하는데 이를 도와주어야 할 금융시스템은 아직까지도 '우물안 개구리/구멍가게'란 멸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대외적인 부분의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트럼프의 관세전쟁을 시발점으로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보호무역주의의 흐름, 중국 제조업의 무분별한 확장과 우크라이나 전쟁 등을 계기로 점점 그 폭과 빈도를 키워가고 있는 글로벌 공급망 교란, 챗GPT 등 AI 신기술을 필두로 우리 제조업의 비교우위에 근본적 위협이 될 수 있는 새로운 글로벌 기술혁명의 전개, 미중 대립구도를 매개로 확산되고 있는 자원 민족주의와 세계시장의 블록화, 온실가스 감축을 명분으로 하는 새로운 시장 규제의 보편화 등 우리 혼자 힘으로 풀 수 없는 난제들이 도처에 널려 있는 상황이다. 이에 더해, 코로나 19가 터진 이후 세계 경제에 누적된 군살은 어마어마했다. 일상으로의 복귀 이후 모든 나라들이 경제 정상화를 위해 매진했다. 그러나 건설부문의 PF 부실이 해소되지 않고 있고, 가계부채 잔고가 GDP를 넘어섰는데 시장에서는 소상공인의 줄폐업이 이어지고 있는 지금, 지난 3년간 우리나라가 누적된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충분히 노력했다고 믿기는 어렵다. 새 정부는 이처럼 지난 정부가 게을리했던 시급한 숙제까지 떠안게 되었다. 정부의 정책적 노력이 시장을 살린다 정부가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러나 기업과 개인들이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노력으로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까지는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이번 비상경제 운영의 핵심에는 민생안정과 더불어 시장경제 건전성을 제고하고 기업 경영의 활력을 제고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비상'이란 말을 빼는 순간, 우리 국민들은 고통과 인내를 떠올린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감언이설과 당장의 위로가 아니라 진실을 알리고 공감을 얻어 위기를 극복하는 노력이다. 하기 싫더라도 우리 미래를 위해 해야 하는 것, 그것이 당면한 비상경제 운영의 기본이다. 이는 모든 국민들에 있어 그러하고, 집권여당이 된 더불어민주당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박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