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증시가 반도체주를 중심으로 하락세를 이어가자 국내 투자자들의 불안이 커지고 있다. 중국 스타트업이 공개한 인공지능(AI) 모델을 계기로 반도체 투자 열풍이 한풀 꺾일 수 있다는 전망이 확산하는 가운데 메모리 반도체 업종의 고평가 논란과 기업들의 AI 투자 지속 가능성에 대한 의문도 다시 제기되고 있어서다. 한국 코스피가 연휴 이후 '블랙먼데이'를 맞을 수 있다는 경계감도 고개를 들고 있다. 17일(현지시간) 뉴욕증시에서 다우존스30산업평균지수는 전장보다 0.77% 내린 5만2146.42에 거래를 마쳤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는 1.01% 하락한 7457.69,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지수는 1.40% 내린 2만5520.24에 각각 마감했다. 주간 기준으로는 S&P500지수가 1.6%, 나스닥지수가 2.9% 하락했다. 이날 엔비디아는 2.21% 하락했고 마이크론(-0.50%), AMD(-1.03%), 인텔(-2.00%) 등 주요 반도체주도 일제히 약세를 나타냈다. 미국 상장 30개 주요 반도체 종목으로 구성된 필라델피아 반도체지수(SOX)는 1.63% 하락하며 지난달 22일 기록한 사상 최고치 대비 낙폭이 20%까지 확대돼 약세장에 진입했다. AI 열풍의 최대 수혜 업종으로 꼽히던 메모리 반도체는 올 2분기까지 글로벌 증시 상승을 이끌어왔다. 그러나 막대한 AI 설비투자가 실제 수익으로 이어질지에 대한 의문이 커지면서 투자자금이 다른 업종으로 이동하는 순환매가 본격화하는 모습이다. 실제 세계 최대 파운드리 업체인 TSMC는 AI 반도체 수요 증가에 힘입어 올해 2분기 시장 예상치를 크게 웃도는 '깜짝 실적'을 발표했지만, 17일 대만 증시에서 주가는 7% 넘게 급락해 대만 가권지수를 6.5% 끌어내렸다. 블룸버그통신이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외국인 투자자는 이날 대만 증시에서 58억달러어치를 순매도하며 사상 최대 순매도 기록을 세웠다. 일본 메모리 업체 키옥시아도 16.10% 급락하며 시가총액이 지난달 22일 고점 대비 절반 이하로 감소했다. 레오니드 미로노프 게이브칼캐피털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호실적에도 주가가 하락했다는 것은 적어도 당분간 시장이 반도체주에서 다른 업종으로 자금을 이동시키려 한다는 의미"라며 “밸류에이션 부담이 여전한 만큼 키옥시아 주가가 50% 가까이 떨어졌다고 해서 저평가됐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여기에 중국 AI 스타트업 문샷이 새롭게 공개한 모델 '키미 K3'가 오픈AI와 앤트로픽의 최첨단 모델과 비슷한 성능을 내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 것도 충격을 안겼다. 이에 따라 고성능 AI 모델 개발에 앞으로는 이전보다 적은 수의 반도체가 필요할 수 있다는 전망이 확산했다고 블룸버그는 설명했다. 키미 K3의 등장은 지난해 글로벌 AI 관련주들을 뒤흔들었던 '딥시크 사태'와 비슷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SK하이닉스의 미국주식예탁증서(ADR)도 연휴 기간 극심한 변동성을 나타냈다. SK하이닉스 ADR은 16일 뉴욕증시에서 13.69% 급락한 데 이어 17일에는 1.13% 반등했지만 장중 최고 167.37달러(9.89%), 최저 145.57달러(-4.43%)를 기록하는 등 큰 폭으로 흔들렸다. 코스피 향방을 가늠하는 선행지표로 여겨지는 아이셰어즈 MSCI 한국 ETF(EWY)도 지난 16일과 17일 각각 4.82%, 0.5% 하락했다. 이 ETF는 80여 개 국내 우량주로 구성돼 있으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비중이 40%를 웃돈다. 공휴일로 국내 증시가 마지막으로 휴장했던 6·3 지방선거 당시에도 EWY는 지난달 2일(-1.0%), 3일(-0.73%) 이틀 연속 하락했고, 이후 6월 4일 코스피는 1.84% 내렸다. 연휴 기간 SK하이닉스 ADR과 EWY의 약세가 오는 20일 코스피에 부담으로 작용할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반도체주 조정이 AI 산업의 펀더멘털 훼손보다는 차익실현과 업종 순환매 성격이 강하다고 진단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이날 S&P500 지수는 하락했지만 구성 종목의 절반 이상은 상승 마감했고, 동일가중 방식의 S&P500지수는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기술주 약세에도 시장폭은 전반적으로 견조하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트레이드네이션의 데이비드 모리슨 수석 시장분석가는 “기업 실적과 AI 수요는 여전히 견조하지만 일부 투자자들은 현재와 같은 성장세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하며 차익실현에 나서고 있다"며 “이번 조정이 또 다른 저가 매수 기회가 될지, 아니면 투자자들이 한꺼번에 출구로 몰리면서 매도세가 더욱 가속화될지는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씨티그룹 베아타 만테이 주식전략가는 “증시 상승세가 기술주를 넘어 다른 업종으로 확산하려면 순환매가 불가피하다"며 “시장은 오래전부터 상승세의 저변 확대를 기대해왔고, 이런 순환매는 때때로 매우 급격한 형태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이번 주부터 시작되는 미국 빅테크(거대 기술기업)의 실적 발표가 이번 반도체주 조정이 일시적인지 여부를 가를 최대 변수라는 분석도 나온다. 하그리브스 랜즈다운의 맷 브리츠먼 선임 주식 애널리스트는 “최근 고점 수준으로 다시 회복되기 위해서는 AI에 대규모 투자를 집행하고 있는 기업들이 기존 투자 계획을 유지하고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며 “그런 신호가 나온다면 관망하던 투자자들도 빠르게 시장으로 복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7대 기술기업인 '매그니피센트7'(M7, 애플·아마존·알파벳(구글)·마이크로소프트(MS)·엔비디아·테슬라·메타)은 다음주부터 잇따라 2분기 실적을 발표한다. 테슬라와 알파벳이 오는 22일 M7 중 가장 먼저 실적을 공개하고, MS·메타, 아마존·애플은 각각 29일, 30일 실적을 발표한다. 엔비디아는 8월 26일 2027회계연도 2분기(2026년 5월~7월) 실적을 공개할 예정이다. 박성준 기자 mediapark@ek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