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계 주요 기업들이 '내실 경영' 모드에 돌입했다. 차량 5부제 등 에너지 절약 캠페인을 자체적으로 실시하는가 하면 '비상 경영 체제'를 선포하고 영업 전략을 전면 수정하고 있다. 중동 사태 여파로 원유 등 원자재 수급에 큰 차질이 생기자 위기 대응책을 모색하는 차원이다. 일부 기업들은 이런 상황에 '노조 리스크'라는 암초까지 만나 골머리를 앓고 있다. 29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SK·현대차·LG·롯데 등 국내 주요 대기업들은 최근 자체적인 에너지 절감 정책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전 계열사 사업장에 고지했다. 유가 급등으로 이동·물류비 같은 부담이 커지자 허리띠를 졸라매기 시작한 것이다. 삼성그룹은 모든 사업장에서 차량 10부제를 실시하고 미사용 조명은 소등하기로 했다. SK·현대차·롯데그룹은 이보다 강력한 차량 5부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LG그룹은 자동 소등 시스템 등을 적용해 불필요한 전력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 전쟁 직격탄을 맞은 일부 업종은 아예 '비상 경영'에 돌입했다. 티웨이항공이 지난 16일, 아시아나항공이 25일 각각 사내 공지를 통해 이를 공식화했다. 티웨이항공은 투자 계획과 비용 구조를 전반적으로 점검하기로 했다. 불요불급한 지출과 투자에 대해서는 일정 조정 또는 집행 보류에 나설 예정이다. 아시아나항공 역시 재무 건전성 안정화를 위해 비용 절감 과제를 적극 발굴할 방침이다. 진에어, 에어부산, 이스타항공, 에어프레미아, 에어로케이 등은 다음달부터 일부 노선에 여객기를 띄우지 않기로 결정했다. 유가가 급격하게 오르면서 유류할증료로 운임 부담을 상쇄하기에 힘든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저비용항공사(LCC)들의 경우 고객들의 가격 저항이 높아 이를 티켓 가격으로 고스란히 반영하기도 힘든 형국이다. 대외 환경도 녹록지 않다. 베트남을 비롯한 현지 항공유 공급사들이 우리나라 국적기에 가격 인상을 통보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항공유는 휘발유·경유 등 다른 정유 제품보다 품질 기준이 까다롭고 변질 위험이 큰 특징이 있다. 장기 비축이 어려워 갑작스러운 유가 급등에 시장 혼란이 가중되는 모습이다. 석유화학 업계 표정도 어둡다. 중국발 공급 과잉으로 자발적인 구조조정을 시행 중인 상황에서 원료 급등이라는 복병까지 만나게 됐다. 석유산업 기초 원료인 나프타(납사)가 귀해지면서 내수 시장에도 상당한 혼란이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나프타는 원유를 정제해 만들어진다. 나프타를 기반으로 에틸렌·프로필렌 등을 생산하면 이는 플라스틱, 섬유, 고무, 포장재, 비닐 등의 원료가 된다. 이미 일각에서 종량제 봉투 사재기 움직임이 나타나는 등 소비자들의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 정부는 일단 모든 나프타 수출을 금지하고 기존 수출 예정 물량은 모두 국내 수요처로 전환하기로 했다. 반도체 업계는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중동 전쟁이 장기화하면 헬륨 등 원자재 공급에 차질이 생기면서 반도체 생산에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이란이 카타르의 액화천연가스(LNG) 생산시설을 공격하면서 가스와 함께 추출되는 헬륨 생산도 차질을 빚고 있다. 유통·식품사 등도 내실 경영에 돌입하며 위기에 대응하고 있다. 환율이 급등(원화가치 하락)하면서 원료 수급비가 오르고 비닐 등 생산에도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걱정에서다.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우리 국민들의 소비심리가 위축되는 것도 기업들이 걱정하고 있는 요소다. '복합위기'에 처한 재계 입장에서 더 큰 고민거리는 최근 '노조리스크'가 부각되고 있다는 점이다. 삼성전자에서는 창사 이래 두 번째 파업이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임금협상이 난항을 겪는 가운데 노조 측이 합법적으로 파업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고 사측을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동 사태로 인한 원료 수급 문제까지 더해질 경우 삼성전자가 파업으로 입는 경제적 손해는 10조원대를 넘어갈 수도 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삼성전자 노조는 '초과이익성과급 상한 폐지'나 '영업이익의 20% 성과급 지급' 같은 요구를 하며 쟁의 행위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단순 계산하면 1인당 최대 3억원 이상씩 받겠다는 의미다. 올해 경영 실적에 따라 회사의 성과급 지출액이 작년 연구개발 투자액(37조7404억원)보다 많아질 수도 있다. 사측이 노조의 요구를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라는 게 재계 중론이다. '노동조합법 제2·3조 개정안'(노란봉투법)도 압박 요소다. 이달부터 이 제도가 본격 시행되면서 원·하청 구조가 복잡한 대기업들은 벌써부터 올해 협상을 걱정하고 있다. 현대차·기아, 현대제철, 한화오션, 포스코 등 하청 노조들은 법이 시행되자마자 원청에 교섭을 요구하며 단체 행동에 나서고 있다. 여헌우 기자 yes@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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