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가 인공지능(AI) 인프라 투자에 필요한 천문학적인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월가와 손을 잡았다. 지금까지 빅테크(거대 기술기업)들이 회사채와 주식 발행, 자체 현금을 쏟아부어 AI 데이터센터를 구축했다면 앞으로는 AI 인프라 자체를 수익을 창출하는 자산으로 만들어 월가의 막대한 자금을 끌어들이겠다는 구상이다. 그러나 AI 자산을 담보로 투자자에게 판매하는 증권화까지 거론되자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촉발한 서브프라임 모기지(주택담보대출) 사태의 악몽이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도 고개를 들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영화 '빅쇼트'의 실제 주인공이자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예측했던 투자자 마이클 버리가 엔비디아에 대한 공매도 베팅을 확대했다. 12일 CNBC 등에 따르면 엔비디아는 최근 아폴로글로벌매니지먼트, 블랙록, 블랙스톤, 브룩필드, 골드만삭스, KKR 등 글로벌 금융사 6곳과 각각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5000억달러(약 700조원) 이상의 제3자 자본을 조달하기 위한 협력에 나섰다. 6개 금융사가 5000억달러의 자기자본을 직접 투입하는 방식이 아니라 보험사와 연기금 등 외부 투자자들로부터 자금을 끌어모아 엔비디아 고객사의 AI 인프라 구축에 대출·투자 형태로 공급하는 금융 플랫폼 역할을 맡는 구상이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CNBC 인터뷰에서 AI 인프라가 하나의 새로운 자산군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러한 시스템은 PC나 휴대전화와 같은 것이 아니다"며 “이제 수익을 창출하는 자산이다. 생산적이고 수명이 길며 대체 가능하고 유연하다"고 말했다. AI 투자 규모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기존 빅테크들의 자금조달 방식만으로 이를 감당하기 어려워지고 있다는 게 이번 구상의 배경이다. 글로벌 컨설팅 그룹 맥킨지는 전 세계 AI 관련 지출이 2030년 말까지 7조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올해 들어서만 알파벳, 아마존, 메타, 마이크로소프트(MS), 오라클은 데이터센터 건설과 새로운 AI 모델 개발, AI 에이전트 확산을 지원하기 위해 주식과 채권 발행을 통해 총 1500억달러가 훨씬 넘는 자금을 조달했다. 인텔 역시 최근 150억달러 규모의 주식 발행 계획을 발표한 뒤 이를 200억달러로 확대했다. 이런 상황에서 월가는 AI 인프라를 단순한 설비가 아닌 수익을 창출하는 금융자산으로 취급해 외부 투자자들의 자금을 끌어들이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CNBC에 따르면 데이비드 솔로몬 골드만삭스 CEO는 “이러한 인프라 구축을 담보로 한 자산 기반 파이낸싱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며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것들은 실제 자산이고 실제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발데마르 슐레자크 KKR 디지털 인프라 책임자는 “이를 하나의 수익원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이를 증권화하거나 사실상 위험을 분할해 해당 구조의 어느 단계에서든 참여하기 원하는 투자자들에게 판매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엔비디아는 각각의 대출에 대해 담보격인 AI 인프라의 잔존가치를 최대 25% 보증하기로 했다. 이러한 구조가 적용되면 그동안 자체 신용등급에 의존해 자금을 조달해야 했던 기업들이 보다 유리한 금리로 돈을 빌릴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CNBC는 설명했다. 대신 돈을 빌리는 기업들은 엔비디아가 지정한 시스템 아키텍처를 사용해야 한다. 황 CEO는 차입 기업에 “무슨 일이 발생할 경우" 다른 기업이 해당 시스템을 인수해 운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차입 기업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AI 인프라를 다른 사업자가 넘겨받아 계속 가동할 수 있도록 해 담보 가치를 유지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그러나 CNBC는 “월가가 실물자산을 증권화하는 데 본격적으로 열광하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며 “무엇이 잘못될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이어 2007~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촉발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언급했다. 당시 금융회사들은 신용도가 낮은 차주들의 주택담보대출을 하나로 묶어 증권화한 뒤 주택시장 호황에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금융상품으로 투자자들에게 판매했다. 그러나 주택 가격 상승을 전제로 만들어진 금융상품들은 모기지 연체와 채무불이행이 증가하자 연쇄적으로 무너졌다. 버리가 최근 AI 관련주 공매도에 나서기 시작한 점도 주목된다. 버리는 지난해 자신의 소셜미디어 엑스(X·옛 트위터)를 통해 “자산의 내용연수를 인위적으로 늘려 감가상각비를 과소계상하면 이익이 부풀려진다"며 “이는 현대에 가장 흔한 회계 부정 수법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했다. 빅테크들이 AI 반도체를 비롯한 컴퓨팅 장비의 내용연수를 실제보다 길게 책정해 감가상각 비용을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은 AI 시스템을 '수명이 긴 자산'으로 보고 이를 기반으로 대규모 금융을 일으키려는 엔비디아와 월가의 구상과 정면으로 대비된다. AI 인프라가 예상보다 빠르게 노후화하거나 경제적 가치가 떨어질 경우 이를 기반으로 한 금융상품들이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투자매체 스톡트윗츠에 따르면 버리는 11일(현지시간) 자신의 서브스택을 통해 현재 상황을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인 2005년 미국 주택시장과 비교하면서 “도매 전력을 투자 가능한 금융상품으로 만들려 했던 엔론의 시도와도 닮은 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엔론은 이후 대규모 회계부정이 드러나면서 2001년 파산했다. 버리는 이어 “내가 보유한 3대 공매도 포지션의 규모를 확대했다"며 행사가격이 100달러 초반대인 2026년 12월과 2027년 6월 만기 엔비디아 풋옵션을 추가로 매수했다고 밝혔다. 이와 동시에 팔란티어, 오라클, 캐터필러, 아이셰어즈 반도체 ETF(SOXX) 공매도 포지션도 늘렸다. 월가에서도 이같은 AI 투자에 일정 수준의 위험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했다고 CNBC는 전했다. 짐 젤터 아폴로글로벌 회장은 “과잉도 있을 것이고 후퇴도 있을 것"이라고 했고 솔로몬 CEO 역시 “승자가 되는 대기업들이 있고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결과를 내놓는 대기업들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래리 핑크 블랙록 CEO는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내가 1970년대 모기지담보부증권(MBS) 시장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와 마찬가지"라고 했다. 황 CEO는 버리가 제기한 AI 인프라 감가상각 논란을 일축했다. 그는 쿠다(CUDA·엔비디아 소프트웨어 플랫폼)를 통해 AI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개선하고 사용 수명도 연장할 수 있기 때문에 장기간 수익을 창출하는 투자자산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CNBC는 엔비디아가 과거 발표했던 대규모 투자 계획이 실제 투자로 이어지지 않은 전례가 있다는 점도 짚었다. 엔비디아는 약 11개월 전 오픈AI와 총 10기가와트(GW) 규모의 전력이 필요한 데이터센터 구축 계획의 일환으로 최대 1000억달러를 투자하는 파트너십을 발표했다. 그러나 해당 투자는 결국 현실화하지 않았다. 대신 엔비디아는 올해 초 오픈AI가 마감한 사상 최대 규모의 자금조달 라운드에 300억달러를 출자했다. 박성준 기자 mediapark@ek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