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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성 기자

안녕하세요 에너지경제 신문 전지성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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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금vs주식’ SK최태원 재상고 쟁점, 9440억 ‘지급 방식’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이혼소송 재상고 배경에는 파기환송심의 법리 판단뿐 아니라 9440억원에 달하는 재산분할액의 지급 방식을 둘러싼 양측의 이견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최 회장 측이 판결 수용까지 검토했지만 현금과 주식을 섞어 지급하는 방안을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 측이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다시 대법원의 판단을 구하게 됐다는 것이다. 법조계에 따르면 최 회장 측은 지난달 24일 파기환송심 판결 직후 이를 수용해 9년여간 이어진 소송을 마무리하는 방안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재상고 기한까지 약 3주 안에 9440억원의 현금을 마련하는 문제가 걸림돌이 됐다. ◇ SK㈜ 지분은 팔기도, 담보 잡기도 부담 최 회장의 핵심 자산은 SK㈜ 지분이다. 문제는 이 지분이 단순한 금융자산이 아니라 그룹 지배력과 직결돼 있다는 점이다. 최대주주가 단기간에 대량 매각에 나서면 주가 충격은 물론 지분율 하락에 따른 지배구조 변화 가능성까지 고려해야 한다. 파기환송심 역시 SK㈜ 주식을 직접 나누는 대신 최 회장이 노 관장에게 현금을 지급하는 '대상분할' 방식을 택했다. SK㈜ 지분이 그룹 지배권의 근거라는 점을 고려한 판단이다. 이에 최 회장 측은 현금과 주식을 함께 지급하는 절충안을 제안한 것으로 전해졌다. 주가가 하락하면 차액을 보전하되 상승하더라도 추가 이익을 요구하지 않는 조건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노 관장 측은 판결 주문대로 전액 현금 지급을 요구했고 협의는 성사되지 않았다. 최 회장 대리인단이 재상고 기한을 불과 1분가량 남긴 지난 14일 오후 11시59분께 입장문을 낸 것도 막판까지 양측의 협의가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재상고 자체에도 적지 않은 비용이 든다. 9440억원 전액을 다툴 경우 인지대만 수십억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에도 재상고를 택한 데는 자금 조달에 필요한 시간을 확보하려는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판결이 확정되면 최 회장은 완제 시까지 연 5%의 지연이자를 부담해야 한다. 9440억원을 기준으로 단순 계산하면 하루 약 1억3000만원이다. 재상고에 상당한 비용이 들더라도 당장 수천억원의 현금을 마련해야 하는 부담을 피하면서 조달 방안을 짤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셈이다. ◇ 주가 하락, 법리 다툼엔 유리해도 자금 마련엔 악재 재상고심에서는 파기환송심의 재산분할 비율 산정 방식이 핵심 쟁점으로 다뤄질 전망이다.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주식 가액 기준일을 환송 전 항소심 변론 종결일인 2024년 4월16일로 정하면서 이후 SK㈜ 주가 상승을 재산분할 비율 산정 과정에서 고려했다. 노 관장의 기여도를 일부 인정하면서 최종 분할 비율은 최 회장 66.6%, 노 관장 33.3%로 정했다. 환송 전 항소심이 인정한 노 관장의 몫 35%보다는 1.7%포인트 낮아졌다. 최 회장 측은 특정 시점을 주식 가치 산정 기준일로 정하고도 이후 주가 변동을 분할 비율에 반영한 것은 일관되지 않은 판단이라는 논리를 펼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SK㈜ 주가가 파기환송심 변론 종결 당시보다 크게 하락한 점도 이런 주장에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 다만 주가 하락은 자금 조달 측면에서는 부담이다. 보유 지분의 담보가치와 처분가치가 함께 낮아지기 때문이다. 법리 다툼에서는 활용할 수 있는 변수가 현금 마련 과정에서는 오히려 악재가 되는 구조다. 관심은 재상고 기간 최 회장이 어떤 방식으로 재원을 마련하느냐에 쏠린다. SK실트론 지분 29.4% 활용, SK㈜ 주식담보대출 등 여러 방안이 거론된다. 배당을 통한 현금 확보 가능성도 있지만 어느 방안이든 지배구조와 주주가치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 최 회장 측이 재상고 입장문에서 “개인적 문제로 주주와 구성원에게 심려를 끼쳐 송구하다"며 그룹 경영과 주주를 언급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 나온다. SK그룹이 AI·반도체를 중심으로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총수 개인의 9440억원 조달 문제가 그룹 지배구조나 재무전략에 영향을 미칠지도 관심사다. 재계 관계자는 “SK㈜ 지분은 최 회장의 가장 큰 자산인 동시에 그룹 지배력의 핵심이어서 단순히 시장에서 처분해 현금을 만드는 문제로 보기 어렵다"며 “재상고 기간 동안 지분 훼손을 최소화하면서 현금을 확보할 수 있는 조달 구조를 찾는 것이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지성 기자 jjs@ekn.kr

[재계와 친일 논란 下] 일제 때 돈 벌면…‘기업인과 친일의 경계선’

일제강점기에 회사를 운영해 돈을 벌었다면 '친일 기업인'일까. 일본 회사에 취직했다면 어떨까. 광복 81주년을 맞아 당시를 살았던 기업인들의 행적을 들여다보면 답은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사람들은 장사를 하고 회사에 다니며 공장을 운영했다. 훗날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을 세운 창업 1세대 상당수도 일제강점기에 처음 경제활동을 시작했다. 반면 같은 시기 기업을 경영하면서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원하거나 식민통치 기구와 친일단체에서 활동한 기업인도 있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해방 이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 대상이 됐고, 수십년 뒤 정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나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이 올랐다. 두 부류를 가른 것은 무엇이었을까. 앞선 1편이 일본인이 남긴 귀속재산이 해방 이후 한국 기업에 어떻게 넘어갔는지를 추적했다면 이번에는 '일제강점기의 경제활동은 어디까지 생업이고, 어디서부터 친일행위로 평가됐는가'를 들여다봤다. ◇ 기업인도 친일인명사전에…박흥식·김연수 등 이름 올라 2009년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는 정치인과 관료, 군인, 경찰뿐 아니라 경제인도 포함됐다. 경제 분야 수록자 가운데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인물이 박흥식과 김연수다. 박흥식은 일제강점기 화신백화점을 중심으로 사업을 키워 '조선 최고의 부자' 가운데 한 명으로 불렸다. 문제는 사업가였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었다. 태평양전쟁 말기 박흥식은 일제의 전쟁 수행과 관련된 군수산업에 참여했다. 해방 후인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하면서 기업인 가운데 처음으로 체포된 인물도 박흥식이었다. 당시 반민특위가 기업인을 바라본 기준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반민족행위처벌법은 단순한 사업활동이 아니라 군수공업을 책임경영한 행위 등을 처벌 대상으로 규정했다. 실제로 반민특위의 조사·송치 자료를 보면 '군수산업'은 별도의 조사 분야였다. 확인된 조사 건수 20건 가운데 17건이 특별검찰부로 송치되고 5건이 기소됐다. 김연수 경성방직 사장의 사례는 더욱 복잡하다. 경성방직은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조선인 기업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김연수는 기업 경영 외에도 일제 말 각종 친일·전시협력 활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훗날 친일반민족행위 조사 대상이 됐다. 흥미로운 점은 그의 역사적 평가가 처음부터 하나로 정리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1949년 반민특위 재판에서는 김연수에게 무죄가 선고됐지만, 수십년 뒤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과정에서는 일부 행위가 친일반민족행위로 판단됐다.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에도 경제 분야 인물로 수록됐다. 친일 문제를 둘러싼 판단 기준 자체가 시대에 따라 논쟁의 대상이 돼왔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 회사를 다녔느냐보다 '무엇을 했느냐' 친일인명사전의 선정 기준을 보면 경제인이라는 직업 자체가 친일 여부를 가르는 기준은 아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선정기준은 일제의 국권침탈과 식민통치, 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는지를 핵심으로 삼았다. 경제 분야에서는 국책 경제기관·단체의 간부로 활동하며 일제의 경제정책에 적극 협력했는지, 침략전쟁 수행을 위해 거액의 금품을 헌납했는지, 군수산업 책임자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등이 판단 대상이 됐다. 개인의 구체적인 행위와 지위, 지속성과 적극성 등을 함께 고려한 것이다.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역시 2005년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협력해 이뤄진 반민족행위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국가기구로 설치됐다. 이는 '일제 때 일본 회사에 다녔다'거나 '일제 때 사업으로 돈을 벌었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 친일 여부를 판단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 같은 시대 살았던 재계 창업주들은 이 기준을 현재 주요 그룹의 창업 1세대에게 대입하면 차이가 더 분명해진다.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은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열어 일제강점기부터 사업가로 활동했다. 정주영 현대 창업회장 역시 쌀가게를 운영하고 자동차 정비사업에 뛰어들었다. 김종희 한화 창업회장은 일제가 전시경제를 강화하던 시기 화약 유통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조선화약공판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이 일제강점기에 경제활동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박흥식 등의 전시협력 행위와 동일선상에 놓을 수는 없다. 앞서 살펴본 친일 조사와 사전의 기준 자체가 '어디에서 일했느냐'보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했느냐'를 따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편 사례도 있다. 효성 창업주 조홍제는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1926년 6·10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일제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훗날 모두 '기업인'이 됐지만 식민지 시대의 행적은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 없었던 것이다. ◇ '친일인명사전에 없다=친일 아니다'도 아니다 여기서 또 하나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다. 특정 인물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자체가 '친일행위가 전혀 없었다'는 인증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친일인명사전은 민간 연구기관인 민족문제연구소가 자체 기준과 사료 검증을 거쳐 편찬한 결과물이다.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역시 별도의 법률과 조사 범위에 따라 활동했다. 실제로 친일 문제를 둘러싼 판단은 해방 직후 반민특위, 정부 조사위원회, 민간 연구기관 사이에서도 조사 목적과 적용 범위가 완전히 동일하지 않았다. 따라서 명단에 이름이 있느냐 없느냐만으로 역사적 평가를 끝내기보다 구체적인 행적과 사료를 확인해야 한다는 게 관련 연구의 기본적인 접근법이다. ◇ 81년 지나도 어려운 질문…'생업'과 '협력'의 경계 기업인의 친일 문제는 다른 분야보다 판단하기 까다로운 측면이 있다. 식민지 경제 자체가 일본 제국의 통제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기업을 운영하려면 당시의 행정·금융·유통체제 안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태평양전쟁으로 갈수록 원료와 생산량, 물자 배급까지 국가 통제가 강화됐다. 그러나 그런 구조 안에서 사업을 했다는 사실과 식민통치나 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행위를 동일하게 평가할 수도 없다. 해방 직후 반민특위가 '군수산업'을 별도의 조사 대상으로 삼고, 훗날 친일인명사전 역시 경제인의 구체적인 지위와 전쟁협력 행위를 따진 것도 이런 경계선을 설정하려는 시도였다. 한국 근현대 경제사를 연구한 한 전문가는 “일제강점기에 기업을 운영했다거나 일본계 기업에서 근무했다는 사실만으로 친일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적절하지 않다"며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협력했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지위와 역할을 맡았는지 등 구체적인 행위를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반대로 기업활동이라는 이유만으로 당시의 전쟁협력이나 식민통치 지원 행위까지 단순한 생업으로 설명해서도 안 된다"며 “개별 인물에 대한 평가는 당시 자료를 토대로 각각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광복 81년이 지난 지금도 '친일 기업인'의 경계선을 한 문장으로 긋기는 쉽지 않다. 다만 과거의 조사와 연구가 보여주는 기준은 비교적 분명하다. 일제강점기에 돈을 벌었느냐가 아니라, 그 돈과 지위로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무엇을 했느냐는 것이다. 전지성 기자 jjs@ekn.kr

[재계와 친일 논란 上] 재벌은 정말 ‘적산’에서 태어났나…대기업의 출발 추적해보니

광복 81주년을 맞아 본지는 독립운동과 기업가, 주요 그룹의 탄생, 산업 국산화의 역사를 살펴봤다. 하지만 한국 재계의 성장사는 산업보국이라는 한 단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일본인이 남긴 귀속재산은 누구에게 넘어갔고,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창업주들은 그 시대를 어떻게 통과했을까. 일본에서 부를 일군 기업가는 왜 다시 한국에 투자했을까. 광복 이후 오늘날 재계가 만들어진 과정의 이면을 짚어본다. [편집자주] “한국의 대기업들은 광복 후 일본인들이 남겨놓고 간 기업과 공장을 넘겨받아 성장했다." 한국 재벌의 기원을 이야기할 때 종종 등장하는 주장이다. 실제로 광복 이후 일본인 소유 기업과 토지, 건물 등 막대한 재산이 미군정과 한국 정부에 귀속됐고 상당수가 이후 민간에 불하됐다. 이 과정에서 오늘날 대기업의 모태가 된 기업을 인수한 창업주도 있었다. 그렇다면 삼성과 SK, 현대자동차, LG, 한화 등 지금의 주요 그룹은 정말 모두 이른바 '적산(敵産)'에서 출발했을까. 국가기록원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각 그룹의 공식 사료 등을 토대로 주요 그룹의 출발점을 추적해보면 답은 '그렇지 않다'에 가깝다. SK와 한화처럼 일본인 또는 일본계 기업의 귀속재산을 인수한 것이 그룹 성장의 직접적인 출발점이 된 사례가 있는 반면 삼성·LG·현대처럼 창업자가 독자적으로 시작한 사업이 그룹의 모태가 된 경우도 있다. 한국 재벌의 탄생을 '적산 불하'라는 하나의 공식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다. ◇ 일본인이 떠나며 남긴 29만건…누가 가져갔나 '적산'은 적국의 재산이라는 의미다. 광복 이후에는 일본 정부와 일본인, 일본계 기업 등이 한반도에 남긴 재산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널리 사용됐다. 미군정은 일본인 소유 재산을 접수해 관리했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남아 있던 귀속재산을 한국 정부에 넘겼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이때 한국 정부에 이관된 귀속재산은 사업체 2203건, 부동산 28만7555건, 기타 2151건 등 모두 29만1909건에 달했다. 정부는 1949년 12월 귀속재산처리법을 제정하고 민간 매각에 나섰다. 한국전쟁으로 처분이 한때 지연됐지만 1950년대 들어 불하는 다시 빠르게 진행됐다. 특히 1953~1959년 귀속재산 불하가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국가기록원은 이 기간 이뤄진 불하가 전체 건수의 86%, 계약금액의 68%를 차지했다고 설명한다. 당시 정부 입장에서 귀속기업의 민영화는 단순히 일본인의 재산을 나눠주는 문제가 아니었다. 전쟁으로 파괴된 생산시설을 다시 돌리고 산업을 복구하는 동시에 민간 중심의 경제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누가 어떤 기업을 넘겨받았고, 그것이 이후 한국의 재벌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다. ◇ SK의 시작 '선경직물'…일본계 공장에서 한국 대기업으로 현재 주요 그룹 가운데 귀속재산과의 연결이 비교적 선명한 곳이 SK다. SK의 모태인 선경직물은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회사였다. 최종건 SK 창업회장은 경성직업학교를 나온 뒤 선경직물 수원공장에 견습기사로 입사해 제직조장 등을 맡았다. 광복을 맞자 최 창업회장은 한국인 소주주들과 함께 공장 가동에 참여했다. 이후 선경직물은 귀속재산이 됐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공장이 폐허에 가까울 정도로 파괴됐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최 창업회장은 전쟁 중 폐허가 된 공장을 정부로부터 매수했다. 남아 있던 부품을 모아 직기를 복구했고 1953년 선경직물주식회사를 다시 일으켰다. 현재 SK도 1953년 한국전쟁 직후 폐허 속에서 선경직물을 창업한 것을 그룹 역사의 출발점으로 설명한다. 오늘날 반도체·통신·에너지·바이오를 아우르는 SK그룹의 모태에 일본계 기업에서 출발해 정부 귀속을 거친 선경직물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인 셈이다. 다만 이를 단순히 '멀쩡한 일본 기업을 넘겨받았다'고 표현하는 것도 당시 상황과는 거리가 있다. 최 창업회장이 인수한 시점의 선경직물은 한국전쟁으로 상당 부분 파괴된 상태였고 이를 복구해 사업을 다시 일으키는 과정이 뒤따랐다. ◇ 한화도 귀속재산과 직접 연결…화약 독점기업 인수 한화 역시 귀속재산과 그룹의 출발이 직접 연결되는 사례다. 김종희 한화 창업회장은 1942년 조선화약공판에 입사했다. 조선화약공판은 일제가 여러 화약업체의 판매 조직을 통합해 만든 국내 화약 유통업체였다. 광복 직후 김 창업회장은 조선화약공판 지배인에 임명됐고 이후 관리인을 맡았다. 회사는 미군정의 귀속기업으로 관리됐다. 전환점은 1952년이었다. 김 창업회장은 조선화약공판 운영권을 획득한 뒤 같은 해 한국화약을 설립했다. 현재 ㈜한화의 출발이다. 한화가 공개한 그룹 연혁에도 이 과정이 명확하게 남아 있다. 1952년 한국화약 설립에 이어 1953년 '조선화약공판 불하 인수', 1955년 '조선유지 인천 화약공장 불하 매수'가 기록돼 있다. 일본이 구축했던 화약 생산·유통시설이 광복 후 귀속재산이 되고 다시 한국인 기업가에게 넘어가 오늘날 한화의 사업 기반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한화의 성장 역시 자산을 넘겨받는 데서 끝나지는 않았다. 한국화약은 이후 다이너마이트 국산화에 나서 1957년 국내 최초로 다이너마이트 생산에 성공했고, 화약 사업을 기반으로 기계·석유화학을 거쳐 현재 방산·우주항공·에너지·금융 등으로 영역을 확대했다. ◇ 그렇다면 삼성도 '적산기업'?…출발은 달랐다 SK와 한화의 사례를 모든 대기업에 적용하면 문제가 생긴다. 삼성의 출발은 광복 이전인 1938년 이병철 창업회장이 대구에서 세운 삼성상회다. 이후 사업 영역을 넓히며 해방 전부터 독자적인 사업 기반을 형성했다. 이 창업회장이 일본인이 운영하던 조선양조를 인수하는 등 일제강점기 일본인 소유 사업체와 거래하거나 이를 인수한 사례는 존재한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삼성그룹 자체가 광복 후 정부의 귀속기업을 불하받아 출발했다고 규정하기는 어렵다. 삼성이라는 기업의 모태가 이미 광복 이전부터 존재했기 때문이다. LG도 비슷하다. 구인회 창업회장은 일제강점기 진주에서 포목상 등 자신의 사업을 운영했다. 광복을 맞은 1945년 부산으로 사업 무대를 옮겨 조선흥업사를 설립했고 이후 화장품 사업을 거쳐 1947년 락희화학공업사를 세웠다. LG 공식 사료에 따르면, 조선흥업사는 당시 군정청으로부터 무역업 허가 제1호를 받아 설립됐다. 이후 화장품과 플라스틱, 전자산업 등으로 사업을 확대했다. 즉 LG 역시 일본인 소유 귀속기업 하나를 불하받은 것이 그룹의 직접적인 출발점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현대도 정주영 창업회장이 일제강점기 자동차 정비업을 시작하고 광복 이듬해인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한 뒤 1947년 현대토건을 세우면서 성장한 경우다. 이처럼 현재 주요 그룹들의 출발 경로부터 서로 달랐다. ◇ '적산 수혜'냐 '맨손 신화'냐…전문가 “기업별로 따져봐야" 귀속재산 불하가 해방 이후 산업자본 형성의 한 축을 담당했다는 평가가 있지만, 이를 하나의 잣대로 현재 대기업의 기원과 성장까지 설명하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경제사 전문가들은 귀속재산 불하가 광복 직후 부족했던 생산설비와 자본을 민간으로 이전하는 중요한 통로였다는 점과, 이후 개별 기업의 성장 과정을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고 설명한다. 한 경제사학계 관계자는 “귀속재산 불하가 해방 이후 한국의 초기 산업자본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면서도 “그렇다고 오늘날 대기업의 성장을 모두 귀속재산 불하의 결과로 설명하는 것도 역사적 과정을 지나치게 단순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기업마다 출발 조건이 달랐고 한국전쟁 이후의 복구와 산업화, 수출 확대 과정에서 기업 간 성패도 크게 갈렸다"며 “귀속재산을 어떤 조건으로 인수했고 이후 어떤 투자와 경영을 통해 사업을 확대했는지 개별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재계에서도 비슷한 반응이 나온다. 한 관계자는 “일본계 기업의 자산을 인수한 것이 현재 그룹의 모태가 된 기업도 있지만 창업자가 광복 이전부터 독자적인 사업을 운영했거나 해방 이후 새롭게 회사를 세운 사례도 있다"며 “현재의 대기업들을 일괄적으로 '적산기업'이라고 규정하기에는 각 그룹의 성장 과정에 차이가 크다"고 말했다. 광복 81년 뒤 주요 그룹의 출발점을 따라가면 서로 다른 경로가 확인된다. 일본계 공장을 인수해 다시 일으킨 기업이 있는가 하면 식민지 시대부터 자신의 사업을 하다 해방 이후 제조업으로 넘어간 기업도 있었다. '적산의 수혜'와 '맨손의 창업 신화'라는 상반된 평가 사이에서 한국 재계의 탄생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결국 개별 기업의 출발과 성장 과정을 각각 들여다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전지성 기자 jjs@ekn.kr

[광복절과 재계 ③] 라디오부터 자동차·철강까지…한국 산업의 ‘국산화 81년’

1959년 11월 국내 최초의 국산 라디오가 세상에 나왔다. 금성사, 현재 LG전자가 만든 진공관식 라디오 'A-501'이었다. 지금은 평범한 전자제품처럼 보이지만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 사용하는 라디오 대부분을 외국 제품에 의존하던 시절이었다. A-501은 현재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국가유산청은 이 제품의 제작 시기를 1959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광복 이후 한국 산업의 역사는 어쩌면 이런 '처음'들의 연속이었다. ◇ 1959년 라디오, 1973년 쇳물, 1975년 자동차 금성사는 라디오에서 멈추지 않았다. 1960년 국내 최초 국산 선풍기를 생산했고 1966년에는 국내 최초 흑백TV를 개발·생산했다. 전자제품을 수입해서 쓰던 나라가 직접 만들어 쓰는 나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철강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1968년 포항종합제철이 출범했다. 자본도 기술도 부족한 상황에서 일관제철소 건설에 나선 지 5년 만인 1973년 6월9일 포항 1고로에서 첫 쇳물이 쏟아졌다. 포스코는 당시의 창업정신을 '제철보국'으로 설명한다. 철강을 직접 생산해 자동차·조선·건설 등 다른 산업이 성장할 기반을 만들겠다는 의미였다. 2년 뒤에는 한국 자동차 산업의 상징적인 제품이 등장했다. 1975년 12월 생산을 시작한 현대자동차 '포니'다. 현대차가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고유모델 승용차'라고 소개하는 차량이다. 디자인은 이탈리아의 조르제토 주지아로에게 맡기고 일부 핵심 부품과 기술은 해외에서 들여왔지만 국산화율을 크게 높였다. 처음부터 모든 기술을 국내에서 개발한 자동차라기보다 해외 기술을 흡수하면서 독자적인 자동차 산업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였던 셈이다. ◇ '못 만들던 나라'에서 세계시장 경쟁자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국산화의 의미도 달라졌다. 처음에는 해외에서 완제품을 들여오지 않고 국내에서 직접 생산하는 것 자체가 목표였다. 이후에는 부품과 소재, 생산설비를 자체 개발하는 단계로 넘어갔다. 조선도 마찬가지다. HD현대중공업은 1972년 조선사업을 시작했다. 조선소가 완공되기도 전에 초대형 유조선을 수주해 건조하는 이른바 '현대중공업 신화'를 만들었고, 설립 10년 만에 세계 1위 조선소로 올라섰다. 현재도 HD현대중공업은 조선·대형엔진 부문 세계 1위 기업이라고 밝히고 있다. 한화의 역사도 국산화와 맞닿아 있다. 1952년 한국화약으로 출발해 산업 인프라 건설에 필요한 화약 국산화에 나섰고 1957년 국내 최초로 다이너마이트를 국산화했다. 1959년에는 공업용 화약 자체생산 체제를 갖췄다. 이렇게 쌓인 제조업 기반 위에서 한국은 이후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 배터리 등으로 산업 영역을 확대했다. ◇ 81년 뒤 '기술독립'의 대상이 바뀌었다 2026년 한국 기업들이 고민하는 국산화는 1950~1970년대와 성격이 다르다. 라디오나 자동차 같은 완제품을 국내에서 만들 수 있느냐는 단계는 이미 지났다. 이제 경쟁은 인공지능(AI), 첨단 반도체 장비·소재, 차세대 배터리, 로봇, 소형모듈원자로(SMR) 등으로 이동하고 있다. 반도체 하나만 해도 완제품 생산능력만으로 기술자립을 말하기 어렵다. 설계 소프트웨어부터 제조장비와 소재, 첨단 패키징까지 세계 각국의 기업이 하나의 공급망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기술독립'은 모든 것을 국내에서 만드는 과거식 국산화와도 거리가 있다. 핵심 기술을 확보하면서도 글로벌 공급망에서 다른 국가와 기업이 쉽게 대체할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1959년 국산 라디오 한 대에서 시작한 도전은 1970년대 쇳물과 자동차, 조선소를 거쳐 반도체와 배터리로 이어졌다. 광복 81년을 맞은 한국 산업의 질문도 달라졌다. 과거의 질문이 '우리 손으로 만들 수 있는가'였다면 이제는 '세계가 필요로 하는 기술을 우리가 갖고 있는가'다. 전지성 기자 jjs@ekn.kr

[광복절과 재계 ②] 1945년에도 삼성은 있었을까…지금의 대기업들 찾아보니

삼성은 1945년 8월15일 광복 당시에도 존재했을까. 현대와 LG, SK는 어땠을까. 지금은 한국 경제를 대표하는 대기업들이지만 시계를 81년 전으로 돌리면 모습은 전혀 달라진다. 어떤 기업은 이미 장사를 하고 있었고, 상당수 그룹은 이름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현재 주요 그룹의 역사를 광복 당시로 되돌려봤다. ◇ 삼성은 있었다…반도체 아닌 식품 팔던 '삼성상회' 삼성의 역사는 광복보다 7년 빠르다. 이병철 창업회장은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설립했다. 오늘날 삼성그룹의 출발점이다. 삼성에 따르면 삼성상회는 대구에서 식품 등을 중국 만주와 베이징 등에 수출하는 사업을 했다. 따라서 1945년 8월15일 당시 삼성은 창업 7년차였다. 다만 지금의 삼성전자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삼성전자가 만들어진 것은 1969년이다. 반도체와 스마트폰은커녕 전자산업 진출 자체가 광복 이후 20여년이 지나서야 이뤄졌다. ◇ 현대의 뿌리는 자동차 정비소 정주영 현대 창업회장의 사업 역사는 광복 이전부터 시작됐다. 정 창업회장은 1940년 자동차 정비소 '아도서비스'를 설립했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로 이름을 바꾸면서 사업에 처음 '현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듬해에는 현대토건을 설립했다. 현재의 현대자동차는 1967년 출범했고, HD현대의 뿌리인 현대중공업의 조선사업은 1972년 시작됐다. ◇ LG·SK·한화는 모두 광복 이후 태어났다 LG의 출발은 광복 2년 뒤다. 구인회 창업회장이 1947년 락희화학공업사를 설립했다. 첫 사업 가운데 하나가 화장품이었다. 1958년에는 금성사를 세우면서 전자산업에 뛰어들었다. 오늘날 LG화학과 LG전자의 모태다. SK의 출발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이다. 최종건 창업회장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선경직물 공장을 복구하면서 그룹의 역사가 시작됐다. 한화 역시 전쟁 이후 탄생했다. 김종희 창업회장이 1952년 한국화약을 설립했다. 당시 국가 인프라 건설에 필요한 산업용 화약을 국산화했고, 1957년 국내 최초로 다이너마이트 국산화에 성공했다. ◇ 롯데도 없었다…신격호는 일본에 롯데 역시 광복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신격호 창업회장은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와 일을 병행했다. 광복 이후에도 일본에 남아 사업을 시작했고 1948년 일본 롯데를 세웠다. 한국에서 롯데제과를 설립한 것은 1967년이다. 포스코는 더 늦다. 포항종합제철은 1968년 창립됐다. 자본도 기술도 부족했던 상황에서 일관제철소 건설에 나섰고, 1973년 6월9일 포항 1고로에서 처음 쇳물을 뽑았다. ◇ 81년 뒤 세계 산업의 한복판으로 광복 당시 존재했던 기업도, 이후 태어난 기업도 출발점은 지금과 크게 달랐다. 삼성은 식품 무역에서 반도체·스마트폰으로, 현대는 자동차 정비에서 자동차·건설·조선으로 영역을 넓혔다. LG는 화장품과 플라스틱에서 전자·배터리·AI로, SK는 직물에서 반도체·통신·에너지로 성장했다. 한화의 산업용 화약은 방산·우주항공으로 이어졌고, 1972년 울산의 작은 어촌에서 시작한 HD현대의 조선사업은 세계 최대 규모의 조선업체로 성장했다. 81년 전 광복 당시의 기업 지도를 현재와 겹쳐놓으면 한국 산업이 얼마나 짧은 시간에 바뀌었는지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1945년에는 이름조차 없었던 기업 상당수가 이제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 배터리, 방산 등 세계 산업의 중심에서 경쟁하고 있다. 전지성 기자 jjs@ekn.kr

[광복절과 재계 ①] 감옥 가고 독립자금 대고…기업가들의 또 다른 얼굴

오늘날 대한민국 굴지의 기업을 일군 창업주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얼굴이 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르거나 독립운동가에게 자금을 지원한 이들이다. 광복 81주년을 맞아 국내 기업 창업주와 그 가문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기업을 일으키기 전부터 독립운동과 인연을 맺은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이들이 해방 이후 기업을 세우면서 독립과 산업 발전이라는 시대적 과제도 '산업보국'이라는 기업가 정신으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인물이 효성그룹 창업주인 고(故) 조홍제 회장이다. 조 회장은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6년 6·10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순종 인산일을 계기로 학생들이 중심이 돼 일으킨 항일독립운동이다. 조 회장은 이 과정에서 일제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이후 사업가의 길로 들어서 효성을 창업하고 섬유와 화학, 중공업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혔다. 효성은 올해 6·10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서울 종로구 천도교 중앙대교당에 세워진 기념비 건립을 후원하기도 했다. 회사 측은 조 창업회장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교보생명의 뿌리에도 독립운동과의 인연이 있다. 창업주 신용호 회장은 독립 사상가 신갑범의 소개로 항일시인 이육사와 교류했고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 신 회장의 부친 신예범과 큰형 신용국 역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교보생명에 따르면, 이육사는 신 회장에게 훗날 큰 사업가가 돼 동포를 돕는 민족자본가가 되라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 신 회장은 이후 1958년 대한교육보험을 창립했다. 현재 교보생명의 출발이다. 독립운동과 기업 경영은 시대적으로는 다른 영역이지만 두 세대 사이에는 공통된 단어도 등장한다. 바로 '나라'다. 해방 직후 한국에는 자본도 기술도 부족했다. 기업인들에게 물건 하나를 국내에서 직접 생산하는 것 자체가 외화를 아끼고 산업 기반을 만드는 일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삼성은 '사업보국', 포스코는 '제철보국', 한화와 효성 등도 산업을 통한 국가 발전을 창업 정신의 중요한 부분으로 내세웠다. 독립운동이 나라를 되찾는 일이었다면 해방 이후 기업가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과제는 나라의 산업을 세우는 일이었던 셈이다. 81번째 광복절을 맞은 2026년 한국 기업들은 이제 세계시장에서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 배터리, 방산 등을 놓고 경쟁하고 있다. 기업의 규모도, 경영환경도 100년 전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달라졌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거리에서 만세를 외쳤던 학생이 훗날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의 창업주가 됐다는 사실은 한국 재계의 역사에도 광복의 흔적이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전지성 기자 jjs@ekn.kr

최태원, 9440억 재산분할 재상고…“주주·그룹경영 영향 최소화”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에게 재산분할금 9440억원을 지급하라는 파기환송심 판결에 불복해 재상고했다. 이로써 15일 0시 확정될 예정이던 판결은 효력이 유보되고, 사건은 다시 대법원 판단을 받게 됐다. SK수펙스추구협의회는 14일 최 회장 법률대리인단의 입장문을 통해 “최태원 회장은 여러 사정을 고려하여 고심 끝에 상고장을 제출하였다"며 “주주들과 그룹경영에 대한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겠다는 자세로 향후 절차에 임하겠다"고 밝혔다. 재상고로 판결 확정이 미뤄지면서 당장의 현금 부담도 뒤로 밀리게 됐다. 판결이 확정될 경우 최 회장은 완제 시까지 연 5%의 지연이자를 부담해야 한다. 9440억원 기준 연 472억원, 하루 약 1억3000만원 수준이다. 법조계에서는 최 회장 측이 재원 마련에 필요한 시간을 확보하려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으로 본다. 다만 지급 의무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대법원에서 원심이 유지되면 확정 시점만 늦춰질 뿐 부담은 그대로 남는다. 이번 재상고심의 성격은 1차 상고심과 다르다. 대법원은 이미 지난해 10월 노태우 전 대통령 측 자금을 노 관장의 기여로 참작할 수 없다며 재산분할 부분을 파기환송한 바 있다. 따라서 이번에는 파기환송심이 그 취지를 제대로 반영했는지가 핵심 심리 대상이 된다.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대법원 판단을 수용하면서도 최 회장 보유 SK㈜ 주식은 재산분할 대상이 맞는다고 봤다. 분할 비율은 최 회장 3분의 2, 노 관장 3분의 1로 정했고, 주식 가액 산정 기준일은 환송 전 항소심 변론 종결일인 2024년 4월 16일로 잡되 이후 주가 상승분은 분할 비율에 반영했다. 이 판단들이 환송 취지의 범위 안에 있는지가 다퉈질 전망이다. 한편 노 관장 측의 재상고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위자료 20억원은 1차 상고심에서 이미 확정돼 이번 다툼의 대상이 아니다. 입장문에서 주주와 그룹경영을 앞세운 대목은 재원 조달 방식과 맞물려 읽힌다. 파기환송심은 최 회장 명의 SK㈜ 주식을 그대로 두고 현금으로 지급하는 '대상분할' 방식을 택했다. 해당 지분이 그룹 지배권의 근거라는 점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재계에서는 최 회장이 보유한 SK실트론 지분 29.4% 활용과 SK㈜ 지분 담보 차입이 유력한 선택지로 거론돼 왔다. 어느 쪽이든 지주사 지배력과 주가에 미치는 파장을 최소화하는 구조를 짜야 한다는 과제가 남는다. 법적 불확실성이 길어지는 점은 그룹 입장에서 부담 요인이다. SK그룹은 인공지능(AI)·반도체 분야에서 대규모 투자를 이어가고 있어, 총수 개인의 자금 조달 문제가 그룹 재무 전략과 어떻게 맞물릴지가 계속 관전 포인트로 남게 됐다. 전지성 기자 jjs@ekn.kr

최태원 “美 생태계만 갖춰지면 어디든 팹 짓겠다”…내년 메모리 공급난 정점 경고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미국 내 메모리 반도체 전(前)공정 생산시설 신설 가능성을 처음으로 공개 언급했다. 동시에 내년 글로벌 메모리 시장이 사상 최악 수준의 수급 불균형을 겪을 것이라는 경고도 내놨다. 최 회장은 13일(현지시간) CNBC와 가진 인터뷰에서 미국 내 웨이퍼 가공(전공정) 라인 추가 건설 여부를 묻는 질문에 “의향은 충분하지만, 조건에 맞는 부지 찾기가 만만치 않다"고 답했다. SK그룹 총수가 미국 전공정 팹 신설 의사를 공식 석상에서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관건은 물·전력·부지 같은 물리적 조건이 아니라 '생태계'라는 게 최 회장의 설명이다. 그는 “반도체 공장 하나를 돌리려면 소재·화학물질을 대는 협력사가 600~700곳은 뒷받침해줘야 한다"며 “이런 생태계를 갖출 수만 있다면 어디든 공장을 짓겠다는 게 원칙이고, 지금 미국을 포함해 여러 지역을 함께 저울질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주에서 약 40억달러 규모의 첨단 패키징 공장을 짓고 있는데, 이는 후공정 투자로 이번에 언급된 전공정 팹과는 별개다. 최 회장이 신규 팹 카드를 꺼낸 배경에는 내년으로 예고된 공급난이 있다. 그는 빅테크를 비롯한 주요 고객사 대부분이 SK하이닉스에 기존 대비 두 배 물량을 요구하고 있지만 현재 생산능력으로는 이를 감당할 수 없다고 밝혔다. “모두가 더 많은 메모리를 원하는, 전쟁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라는 게 그의 표현이다. 팹 증설에 통상 4~5년이 걸리는 점을 고려하면, 당장 내년이 공급 부족의 정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도 내다봤다. 최 회장이 특히 신경 쓰는 대목은 메모리 가격 급등이 완제품 물가로 옮겨붙는 이른바 '칩플레이션'이다. PC·스마트폰·가전은 물론 완성차 업체들까지 반도체 수급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물가 전반이 밀려 올라가는 흐름을 우려스럽게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역할 중 하나를 “메모리 시장을 지키는 일"로 규정하면서, 대규모 투자를 통해 5년 내 웨이퍼 생산능력을 두 배로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을 재확인했다. 최 회장은 이번 수요 급증을 일시적 호황이 아니라 구조적 변화로 봤다. 과거 스마트폰 같은 하드웨어는 한 사람이 한 대씩 구매하는 데 그쳤지만, AI 시대에는 한 사람이 여러 AI 모델을 동시에 쓸 수 있고 그 각각이 더 많은 메모리를 필요로 한다는 논리다. 수요의 성격 자체가 달라진 만큼 과거처럼 호황과 불황이 반복되는 사이클도 예전과 같은 패턴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게 그의 시각이다. 다만 훗날 공급과잉으로 돌아설 리스크에 대해서는 안전장치를 마련해두고 있다고 덧붙였다. SK하이닉스는 고객사와의 장기공급계약(LTA) 비중을 늘리는 한편, 메모리와 운영 솔루션을 묶어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서비스형 메모리(MaaS)' 모델 도입도 검토 중이다. 최 회장은 “팹 합작법인(JV) 설립도 선택지 중 하나"라며 “장기공급계약은 매년 갱신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전지성 기자 jjs@ekn.kr

최태원, SK㈜서 상반기 17억5000만원…윤풍영은 주식보상 포함 77억원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올해 상반기 지주회사 SK㈜에서 17억5000만원의 보수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SK㈜ 경영진 가운데서는 3년 전 부여받은 주식보상이 반영된 윤풍영 SK수펙스추구협의회 사장의 보수가 77억원을 넘어 가장 많았다. 14일 SK㈜ 반기보고서에 따르면 최 회장은 올해 1∼6월 급여로 17억5000만원을 수령했다. 상여와 주식보상 등은 별도로 공시되지 않았다. 최 회장은 SK하이닉스에서도 보수를 받고 있다. 다만 5억원 이상을 받은 임직원 가운데 보수 상위 5명만 공개하는 공시 기준에 포함되지 않아 정확한 액수는 공개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SK㈜에서 받은 17억5000만원이 최 회장의 상반기 전체 보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최재원 SK그룹 수석부회장은 SK㈜에서 급여 15억원을 받았다. 장용호 SK 사장은 급여 10억원과 상여 8억원을 합해 총 18억원을 수령했다. 윤풍영 SK수펙스추구협의회 사장의 상반기 보수는 총 77억1500만원으로 집계됐다. 급여 5억원과 상여 8억원 외에 3년 전 부여받은 성과조건부주식(PSU) 1만2103주에 대한 보상 64억1500만원이 반영됐다. PSU는 일정 기간 회사의 경영성과와 주가 등 사전에 정한 조건을 충족하면 주식이나 이에 상응하는 금액을 지급하는 장기성과보상 제도다. 윤 사장의 경우 전체 상반기 보수 가운데 약 83%가 PSU 보상에서 발생했다. SK㈜의 보수 현황에서도 기본급보다 주식과 연계한 장기성과보상이 임원 간 보수 격차를 좌우했다. 윤 사장의 급여는 최 회장의 3분의 1에도 못 미쳤지만, 과거 부여된 PSU 보상이 반영되면서 공시 보수 총액은 최 회장이 SK㈜에서 받은 금액의 4배를 넘었다. 전지성 기자 jjs@ekn.kr

두산 주가 13배 뛰자 박정원 보수 455억…재계 총수 1위

올해 상반기 재계 보수 순위는 경영자들이 받은 월급보다 주가가 좌우했다.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이 주요 그룹 총수 가운데 가장 많은 455억8000만원을 수령했지만, 이 가운데 80% 이상은 3년 전 부여받은 주식의 가치가 급등하면서 반영된 금액이다. 전통적인 급여와 상여 중심이던 경영진 보상체계가 양도제한조건부주식(RSU), 주가연계현금, 장기성과보상 등으로 다변화하면서 공시된 보수 총액만으로 실질적인 '연봉'을 비교하기도 어려워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14일 주요 기업이 공시한 반기보고서에 따르면 박 회장의 상반기 보수는 급여 18억2000만원, 단기성과급 61억7000만원, RSU 375억9000만원 등 총 455억8000만원으로 집계됐다. 보수 급증의 핵심은 급여나 단기성과급이 아닌 RSU였다. 이번에 지급된 RSU는 박 회장이 2023년 부여받은 ㈜두산 주식 3만2266주다. 당시 기준 주가는 주당 8만8016원이었지만 올해 2월 실제 지급 시점에는 116만4000원으로 13.2배 뛰었다. 부여 당시 약 28억4000만원이던 주식 가치가 지급 시점에는 375억9000만원으로 불어난 것이다. RSU를 제외한 박 회장의 급여와 단기성과급은 79억9000만원이다. 보수 공시상 455억원을 받았지만, 이를 모두 일반적인 현금 연봉으로 해석하기는 어려운 이유다. 두산은 2022년 기존 현금 중심의 장기성과급 제도를 개편해 일정 기간 양도가 제한되는 주식을 지급하는 RSU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구자은 LS그룹 회장은 총 133억300만원을 받아 주요 총수 가운데 두 번째로 보수가 많았다. 구 회장의 보수 역시 급여 14억9600만원, 상여 44억4700만원에 주식가치연계현금 73억5900만원이 더해진 구조다. 전체 보수의 55%가량이 주가와 연결돼 있다. LS는 2023년 4월 구 회장에게 RSU 2만7340주를 부여했다. 다만 실제 주식 대신 올해 4월 지급일 직전 1개월간의 평균 종가와 3년간 적립된 배당상당액을 반영해 현금으로 지급했다. 구자균 LS일렉트릭 회장도 급여 14억4100만원과 상여 91억4400만원 등 총 105억8900만원을 받았다. 구자열 LS 이사회 의장의 상반기 보수는 72억7000만원이었다. 구 의장은 급여 14억9600만원과 상여 57억7400만원을 수령했다. 주가연계 보상을 제외하고 여러 계열사에서 받은 보수를 합산하면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115억8000만원으로 가장 많았다. 김 회장은 ㈜한화와 한화에어로스페이스, 한화시스템에서 각각 25억2000만원을 받았다. 한화비전에서는 23억4000만원, 한화솔루션에서는 16억8000만원을 수령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주요 계열사에서 총 112억2700만원을 받았다. 롯데쇼핑에서 받은 보수가 33억3000만원으로 지난해 상반기보다 100.6% 증가했고, 롯데지주에서는 32억5700만원을 받았다.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은 대한항공에서 53억8300만원, 한진칼에서 36억7000만원 등 총 90억5300만원을 수령했다. 대한항공 보수는 주식 가치와 연계한 중장기 성과급이 추가되면서 지난해 상반기보다 40.8% 증가했다. 이어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이 ㈜효성과 효성중공업, 효성티앤씨에서 총 66억2500만원을 받았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LG에서 급여와 상여를 합해 48억3000만원,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현대차·기아·현대모비스에서 총 45억원을 수령했다. 한화그룹 3세 경영진 가운데 김동선 부사장은 퇴직소득을 포함해 45억4000만원, 김동관 부회장은 ㈜한화·한화에어로스페이스·한화솔루션에서 총 35억원을 받았다. 조현상 HS효성 부회장의 보수는 24억5100만원이었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과 정유경 ㈜신세계 회장은 각각 22억500만원,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SK㈜에서 급여 17억5000만원을 수령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2017년부터 이어온 무보수 경영을 올해도 유지했다. 전문경영인 가운데서는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 사장이 260억9500만원으로 두드러졌다. 곽 사장의 급여는 12억5000만원이지만 상여가 204억5500만원, 주식매수선택권 행사이익이 43억7900만원에 달했다. 상여에는 반도체 호황과 주가 상승에 따라 가치가 커진 과거의 장기성과보상이 반영됐다. 기본급보다 주가 및 장기성과와 연계된 보상이 전체 보수를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박 회장 사례와 닮았다. 삼성전자에서는 이원진 사장이 74억7900만원으로 가장 많은 보수를 받았다. 노태문 사장은 74억4500만원, 전영현 부회장은 23억9300만원을 각각 수령했다. 지난해 말 퇴임한 조주완 전 LG전자 사장은 퇴직소득 41억200만원을 포함해 총 52억8500만원을 받았다. 네이버 최수연 대표의 상반기 보수는 26억6700만원이었다. 게임업계에서는 'PUBG: 배틀그라운드' 시리즈를 총괄하는 장태석 크래프톤 총괄이 39억3000만원을 수령했다. 올해 공시는 같은 '보수 총액'이라도 성격이 서로 크게 다르다는 점을 보여준다. 매달 지급되는 급여와 단기성과급뿐 아니라 수년 전 부여된 주식보상, 주가연계현금, 스톡옵션 행사이익, 퇴직금이 한꺼번에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여러 계열사에서 받는 보수를 합산한 총수와 한 회사에서 장기성과보상을 받은 전문경영인을 같은 기준으로 줄 세우기도 어렵다. 재계의 보상체계가 주주가치와 장기성과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바뀌면서 앞으로 경영진 보수는 단순 총액뿐 아니라 급여·단기성과급·주식보상을 분리해서 살펴볼 필요성이 커질 전망이다. 전지성 기자 jjs@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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