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란 간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동맹국들을 향한 중동 파병 압박이 이어지자 한국 정부가 어떤 선택을 내릴지 관심이 쏠린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는 최근 미일 정상회담을 통해 자위대의 직접 개입에 선을 긋는 동시에, 대미(對美) 투자라는 '선물 보따리'를 제시하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압박을 피해 이번 회담에서 사실상 승리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반면 한국은 파병 반대 여론이 우세한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역할 확대를 재차 요구하자 이재명 대통령의 외교적 대응이 그 어느 때보다 주목받고 있다. ◇ 日, 파병 대신 '경제 카드'…정상외교로 압박 돌파 23일 블룸버그통신 등에 따르면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 19일(현지시간) 미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의 파병 요청으로 인해 “매우 어려운 회담"이라고 직접 언급할 정도로 상당한 부담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 회담에서는 일본의 대미 관계를 부각시키는 동시에 군사적 개입에는 선을 긋는 전략을 구사하며 외교적 기민함을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카이치 총리는 일본 평화헌법 9조의 제약을 근거로 자위대의 직접 파병이 어렵다는 입장을 설명했다. 대신 일본은 대규모 경제·에너지 협력안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이해를 얻고 양국 간 경제 협력을 확대하겠다는 의지를 강조했다. 실제로 미 백악관이 공개한 팩트시트에 따르면 미일 정상은 일본의 대미 투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총 730억달러(약 109조원) 규모의 투자를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구체적으로 미국 에너지기업 GE 버노바와 일본 히타치가 400억 달러(약 60조원)를 투입해 테네시주와 앨라배마주에 소형모듈원자로(SMR)를 건설하기로 했다. 아울러 일본은 펜실베이니아주와 텍사스주에 330억 달러(약 49조원)를 투자해 천연가스 발전소 건설에도 나설 계획이다. 이번 대미투자 규모는 지난달 발표된 1차 프로젝트 규모인 360억달러(약 54조원)의 두 배 이상이다. 일본은 트럼프 행정부가 관세를 낮추는 대신 미국에 5500억 달러(약 819조원)를 투자하기로 했다. 또 블룸버그에 따르면 일본은 이란 미사일·드론을 방어하기 위해 중동에서 수요가 많은 SM-3 요격미사일 생산량을 빠르게 4배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다카이치 총리는 또 회담 이후 미국의 에너지 생산 확대를 지원하고 원유 수입을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는 한편, 일본 내 미국산 원유 비축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미 국가안보회의(NSC) 출신 미라 랩 후퍼 아시아그룹 선임 고문은 “일본은 자국 안보를 강화하는 동시에 미국에도 더 많은 기여를 하고 있으며, 중동에서도 건설적인 역할을 수행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다카이치 총리 특유의 '스킨십 외교'도 부담 완화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다카이치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을 이름으로 부르며 친근감을 표시했고, 트럼프 대통령도 “많이 존경한다", “일본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선거"라고 화답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 도중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언급하며 다카이치 총리의 표정이 굳어지는 장면도 있었지만, 이는 곧 수습됐고 일본 언론 역시 전반적인 긍정적 분위기에 주목했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유라시아그룹의 제러미 챈 선임 애널리스트는 “이번 정상회담 이후 미일 동맹이 더욱 공고해졌다"며 “다카이치 총리 입장에서는 완전한 승리에 가까운 결과"라고 평가했다. ◇ “한국도 역할해야"…트럼프, 동맹국 참여 재차 압박 이렇듯 일본이 호르무즈 파병을 사실상 거부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초점을 한국으로 전환하면서 군사적 지원에 대한 기대를 드러났다. 그는 지난 20일 백악관에서 '여전히 한국이 미국을 지원하길 원하는가'라는 질문에 “나는 한국을 사랑한다. 우리는 한국과 훌륭한 관계다"며 “우리는 한국을 많이 도와주고 있다"고 답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해협을 이용하는 나라들이 관여한다면 좋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한국·일본 등 호르무즈 해협을 이용하는 국가들이 해협 통행 정상화에 직접 나서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정치권에선 서로 상반된 입장을 보이고 있다. 강득구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은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일본은) 군함 대신 외교를 택했고 이란은 일본 선박의 통과를 허용하겠다고 했다"며 “우리가 군함을 보낸다면 이란은 우리를 적국으로 분류하고 우리 선박의 호르무즈 통과를 막을 것"이라고 적었다. 이어 “파병이 오히려 에너지 수송로를 끊는 것"이라며 “외교로 에너지를 지키는 자가 이긴다. 서희의 외교담판이 필요한 시기"라고 강조했다. 반면 국민의힘은 트럼프 대통령의 파병 요구에 호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안철수 의원은 지난 19일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는 군사·경제·통상을 결합한 '패키지' 방식"이라며 “파병에 소극적으로 대응할 경우 이는 경제·통상 분야의 압박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수영 의원은 “대미 협상에서 주도권을 쥐고 목소리를 키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고 조정훈 의원은 “파병이 곧 국익"이라고 주장했다. ◇ 반대 여론 60% 넘어…정부, 동맹과 민심 사이 '고심' 국내 여론도 대립 양상을 보이고 있다. 파병에 반대해야 한다는 여론이 우세하지만 한미동맹이란 외교적 명분과 실익 등을 둘러싼 국민들의 인식 차이가 엇갈렸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19일 발표한 '미국의 해군 파병 요청 관련 긴급 현안 조사' 결과(표본오차 95%·신뢰수준 ±3.1%포인트)에 따르면 응답자 60.9%가 파병에 반대한다고 답했다. 연령별로는 20대(48.6%)와 30대(46.6%)에서 찬성 응답이 많았다. 반면 40대(66.3%), 50대(74.4%), 60대(64.7%) 등 40대 이상 중장년층에서는 반대 의견이 강했다. 또 파병 결정 후 에너지 및 수출입로 확보 등 경제적 실익에 대해서는 47%가 '도움될 것', 47.3%는 '도움 안 될 것'으로 답해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한국갤럽이 최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표본오차 95%·신뢰수준에 ±3.1%포인트)에서도 '파견하지 말아야 한다'는 응답이 55%, '파견해야 한다'는 응답은 30%였다. 정부는 일단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규탄하는 주요7개국(G7) 성명에 동참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군사적 지원 요구는 비껴가면서 상징적 차원에서 미국을 지지하고 안전과 평화를 촉구하는 취지로 풀이된다. 우리나라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함께 호르무즈 해협의 통항 재개를 위해 결집할 가능성도 제기됐다. 마르크 뤼터 NATO 사무총장은 22일(현지시간) 폭스뉴스에 출연해 “좋은 소식은 목요일(지난 19일) 이후 22개국의 그룹, 대부분 나토 회원국이지만 일본, 한국, 호주, 뉴질랜드, 아랍에미리트(UAE), 바레인 등"이 “호르무즈 해협이 가능한 한 즉시 자유롭고 개방되도록 만들겠다는 그(트럼프 대통령)의 비전을 실행하기 위해 함께 모인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 대통령은 이날 오후 청와대에서 제59차 중앙통합방위회의를 주재한다. 중앙통합방위회의는 매년 국가 방위 요소별 주요 직위자들이 모여 통합방위 태세를 평가하고 발전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다. 이 자리에서 이 대통령이 에너지 안보 위기 대응 방안과 함께 호르무즈 해협 파병 가능성에 언급할지 주목된다. 박성준 기자 mediapark@ek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