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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파업 피해 100조로 끝날까

삼성전자 노조는 파업 피해액 100조 원이 과장됐다고 주장한다. 노조를 겁박하려는 목적에 피해액을 부풀렸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삼성전자가 우리나라 경제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차지하는 비중, 삼성전자를 추격하는 경쟁국들의 기민한 움직임 등을 생각하면 100조 원은 오히려 과소 책정된 것으로 보인다. 법원은 18일 삼성전자가 노조를 상대로 제기한 위법 쟁의행위 금지 가처분 신청을 일부 인용하며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초정밀 미세장비에 해당하는 반도체 시설의 경우 설비가 한번 손상되면 수리를 거쳐 재가동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므로 쟁의행위 기간 중이라 해도 시설 손상 방지를 위한 작업은 평상시와 같은 정도로 수행될 필요가 있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내에서 채권자(삼성전자)가 차지하는 비중 등을 고려할 때 시설 손상 및 원료·제품의 변질 내지 부패로 인한 생산 차질은 자동차·가전·정보통신 등 관련 산업의 생산 지연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 같은 손해나 위험은 사후적인 금전 배상 등을 통해 회복될 수 없는 현저한 손해 내지 급박한 위험에 해당한다." 김민석 국무총리가 지난 17일 발표한 대국민 담화를 봐도 파업으로 인해 반도체 생산이 중단됐을 때 그 피해 규모가 어느 정도일지 가늠할 수 있다. 담화에 따르면 반도체 공장은 단 하루만 정지돼도 최대 1조 원에 달하는 직접적인 손실이 발생한다. 법원 설명대로 잠시만 멈춰도 수개월의 생산 마비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매출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매출 비중이 12.5%에 달한다. 삼성전자는 우리나라 수출의 22.8%, 전체 시가총액의 26%를 차지한다. 삼성전자 주주는 460만 명이고 임직원은 12만 명, 협력사는 1700개가 넘는다. 하지만 가장 두려운 사실은 김 총리 지적대로 파업으로 인해 글로벌 인공지능(AI) 반도체 전쟁에서 어렵게 확보한 전략적 우위를 경쟁국들에 내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피해액이 100조 원을 넘어 수백조 원이 될 수도 있다. 아니, 금액으로 추산할 수 없을 정도로 국가적 손실이 심각할 수 있다. 불과 7만 여명에 불과한 고소득 노동자의 노동권을 보장하느라 희생하기에는 국가적 손실이 너무 크다. 정부가 노동권을 침해한다는 비판이 나올 것을 뻔히 알면서 파업을 막기 위한 긴급조정권 발동을 시사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재명 대통령도 18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글에서 “현행 헌법상 모든 국민의 기본권은 보장되지만,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공공복리 등을 위해 제한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삼성전자 파업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의지를 거듭 밝힌 것이다. 대통령을 비롯한 대다수 국민이 파업을 반대하고 있고, 정부의 긴급조정권 발동 가능성에 이어 법원도 파업의 위법성을 일부 인정한 만큼 최악의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현시점에서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는 중앙노동위원회의 2차 사후 조성 회의를 통해 노사가 타협점을 찾는 것이다. 합의점을 찾지 못해도 파업은 유보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노조가 공언한 대로 오는 21일 파업에 들어가면 국가적 손실은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법원이 인용한 위법성을 피해 연성 파업을 한다고 해도 피해액은 눈덩이처럼 커질 게 분명하다. 파업은 회사와 주주, 협력사만 치명상을 입는 게 아니다. 가장 큰 타격은 노조가 받게 될 것이다. 파업으로 영업이익이 줄면 노조가 요구한 만큼 성과급을 받을 수 없다. 이런 경우를 두고 '소탐대실'이라는 말을 쓴다. 그런데도 파업을 강행한다면 이솝우화의 '욕심 많은 개'와 호리병 안에 든 먹이를 포기하지 못해 사냥감이 되는 원숭이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우화와 다른 점은 본인만 당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피해를 준다는 사실이다. 헌법상 국민의 기본 권리인 노동권을 행사하는 것은 자유다. 하지만 국가와 국민 전체를 몰보로 하는 파업은 단순 파업이 아니라 민폐일 뿐이다. 삼성전자 노조를 보며 가스통을 들고 모두 죽자고 위협하는 조폭이 연상되는 것은 나만의 과도한 상상일까. 장박원 편집국장 jangbak@ekn.kr

삼성전자 노조는 왜 ‘국민 밉상’ 됐나

“적당히들 좀 해라." “그냥 노조가 징글징글하다." “이기주의자들!" 삼성전자 노조의 파업 관련 기사에 붙은 댓글을 보면 노조에 부정적인 의견이 지배적이다. 에너지경제신문이 최근 리얼미터에 의뢰해 조사한 여론조사에서도 국민 10명 중 7명은 파업을 반대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대한민국 경제를 든든하게 지탱하고 있는 대표 기업인데 이 회사 노조는 칭찬받기는커녕 '국민 밉상'이 됐다. 왜 이런 서글픈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우리나라 노동운동은 국민으로부터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전두환 군사 정권을 끌어내린 1987년 6월 항쟁에서 노동자들의 참여는 결정적 힘으로 작용했다. 그해 7월 이후 많은 기업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됐고, 연대를 통해 노동계는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태동과 성장도 민주화 운동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측면을 고려했을 때 영업이익의 15%를, 그것도 상한선 없는 성과급을 고집하는 초기업노동조합 삼성전자 지부(초기업노조)의 행태는 이해하기 어렵다. 노동 약자를 위한 배려와 연대라는 한국 노동운동의 핵심 가치는 뒷전이고 이기적인 목표에만 매달리고 있어서다. 기업이 이익을 노동자와 나누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삼성전자 같은 한국 대표 기업은 성과급을 책정할 때도 국민 수용성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고 460만 명 이상이 투자하는 국민기업이기 때문이다. 노조가 요구하는 '성과급 6억'은 반도체 사업부에 속한 7만 여명의 조합원을 제외하고 모든 국민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준다. 영업이익이 아무리 많아도 일반 국민이 수긍하기 어려운 거액이다. 삼성전자 협력업체 중에 평균 연봉이 1억 원 넘는 곳은 많지 않을 것이다. 협력업체 직원들도 반도체 최대 실적의 공로자들이다. 협력업체 외에도 성과를 공유해야 할 기여자는 많다. 노조의 요구는 이들의 몫까지 챙기겠다는 심보로 보일 수밖에 없다. 과도한 이익 배분은 반도체 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 일회성 비용인 성과급에 너무 많은 재원을 쓰면 투자 여력이 줄게 마련이다. 삼성전자가 기술 초격차를 유지하려면 천문학적인 투자가 필요하다. 반도체 같은 첨단 분야는 기술 경쟁에서 한 번 밀리기 시작하면 회복하기 어렵다. 그 사례는 멀리 갈 것도 없다. 몇 년 전 삼성전자는 고대역메모리(HBM) 반도체 투자 시기를 놓친 탓에 SK하이닉스에 선두 자리를 내줬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삼성전자 주주들이 노조의 성과급 요구를 우려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제때 투자하지 못해 기술력이 떨어지면 기업가치와 주가 추락은 불가피하다. 초기업노조의 더 한심한 작태는 같은 회사의 다른 노조의 목소리를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삼성전자 2대 노조는 전국삼성전자노조이고, 3대 노조는 삼성전자노조동행이다. 두 노조는 반도체 사업부 성과급에만 집중하는 초기업노조에 반발하고 있다. 이미 많은 조합원이 초기업노조가 주도하는 공동 투쟁에서 이탈하고 있다. 자기 밥그릇만 챙기겠다며 노조끼리 이렇게 반목하고 갈등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결국 삼성전자 노조가 '국민 밉상'이 된 이유는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요구는 이익 단체의 지대 추구이자 기득권 지키기와 다를 바 없다. 연대와 약자 존중이라는 노동운동의 핵심 가치를 외면한 채 파업이라는 물리력만으로 뜻을 관철하겠다는 전략은 결코 국민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삼성전자 실적은 반도체 사업부 직원들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다른 사업부 동료들과 협력업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주주 등 수많은 이해관계자가 협력해 이룬 결실이다. 이를 노조가 독차지하려는 것은 과욕이며 정의롭지 못하다. 박승흡 전태일재단 이사장은 한 언론 기고문에서 이런 노조를 향해 따끔한 일침을 놓았다. “성과를 사유화하는 구조를 넘어서지 못하면 노동운동은 고립될 수밖에 없다." '성과급 6억'을 고집할수록 삼성전자 노조는 국민으로부터 외면받고 고립될 수밖에 없다. 지금이라도 무리한 요구와 파업 위협을 접고 협력업체 노동자 등 약자에 대한 배려와 연대로 투쟁 방향을 틀어야 한다. 장박원 편집국장 jangbak@ekn.kr

트럼프의 착각과 역사의 경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26일(현지시간) 미국 CBS 방송과 인터뷰하며 “우리는 미친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이틀 전 백악관 출입기자협회 주최 만찬 도중 발생한 총격 사건을 언급하며 한 말이다. 하지만 다른 맥락에서 '미친 세상'을 만들고 있는 장본인은 바로 트럼프다. 이란과 명분 없는 전쟁을 두 달 이상 끌면서 전 세계를 고통 속에 몰아넣고 있다. 특히 원유의 70%를 중동에서 수입하는 한국의 피해는 극심하다. 우리 경제는 고유가로 인한 고물가와 고환율, 고금리의 3고(高)의 늪에 빠질 위험이 점점 커지고 있다. 트럼프가 촉발한 '미친 전쟁'에 이해관계가 없는 한국이 '짱돌'을 맞고 있는 셈이다. 트럼프의 기이한 언행은 집권 1기 때부터 나타났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2017년 뉴욕타임스에 로마제국 폭군의 대명사인 칼리굴라와 트럼프를 비유하는 세간의 평가가 부당하다는 기고문을 올려 화제가 됐다. 칼리굴라는 최소한 제국의 기본 질서를 유지했으나 트럼프는 그렇지 않다는 게 근거였다. 칼리굴라가 아니라도 트럼프와 비슷한 유형의 폭군은 적지 않다. 그중에서 중국 전국시대 송나라 마지막 군주였던 강왕은 트럼프와 많이 닮았다. 명분 없는 전쟁과 자기 과시, 망상, 부도덕하고 안하무인인 성격까지 복사판이다. 강왕 재위 당시 송나라에는 호접몽과 대붕의 비유로 유명한 장자가 살았다. 장자는 정치에 극도의 혐오를 보였는데 아마도 강왕 탓이 클 것이다. 트럼프처럼 강왕은 과대망상 증세가 심했다. 그는 패자를 자임하며 느닷없이 제나라와 초나라, 위나라 등 주변국을 침략했다. 작은 나라들은 아예 멸망시켰다. 백성의 삶은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재원을 침략 전쟁을 위해 썼다. 몇 차례 승리는 강왕의 자만심과 망상을 더욱 부풀렸다. 그는 자신의 강한 면모를 보이기 위해 온갖 기행과 악행을 저질렀다. 가장 잘 알려진 일화가 '사천(射天)'이다. 그는 소의 피를 넣은 주머니를 긴 장대에 매달아 화살을 쏘게 했다. 주머니가 터져 피가 흩어져 떨어질 때 사람들로 하여금 “대왕께서 하늘에 화살을 쏘아 승리하셨다"고 외치게 했다. 이처럼 삼척동자도 알만한 뻔한 거짓으로 과시욕을 발산했다. 음흉한 꼼수를 쓰는 행태도 트럼프를 연상하게 만든다. 신하들에게는 술을 주고, 자신은 꿀물을 마시고는 주량을 뽐냈다. 신하 중에는 이를 알았던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진실을 말하는 순간 화살을 맞을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강왕의 잔인성은 반인륜적 폭거로 이어졌다. 그는 지방을 돌던 중에 우연히 뽕을 따는 미인을 발견했다. 그 지방 관리의 아내였다. 강왕은 강제로 여인을 끌고 갔다. 아내를 빼앗긴 관리는 화를 참지 못하고 자결했고 그의 아내도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높은 누대에서 몸을 던졌다. 간언을 올리는 신하들도 무사하지 못했다.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한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화살을 맞고 죽었다. 결국 옳은 말을 하는 신하는 자취를 감추고 아부꾼만 남게 됐다. 나라 안팎에서 원망과 원성은 커지는데 이런 현실을 직언할 참모가 없었던 지도자의 끝이 좋을 리 없다. 침략을 받은 나라들이 연합해 송나라를 공격했고 백성도 등을 돌렸다. 전쟁에서 패한 강왕은 도주하다가 제나라 군사들에게 잡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의 죽음과 함께 춘추전국시대 500년 넘게 명맥을 이어온 송나라도 멸망했다. 트럼프는 강왕과 비교되는 게 불편할지 모른다. 그러나 자기 과시와 망상, 아무 거리낌 없이 하는 거짓말, 직언하는 측근을 즉각 제거하는 모습은 두 사람이 정확하게 일치한다. 무엇보다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고 세계 경제를 멍들게 만드는 전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그의 태도가 미국에 대한 불신을 키우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트럼프는 자신을 영웅화하기에 바쁘다. 기자 회견에서 암살 시도가 반복되는 질문이 나오자 트럼프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암살을 연구해 봤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 가장 많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대상이 된다. 에이브러햄 링컨 같은 사람을 보라." 헛웃음을 자아내는 그의 망상적 답변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미국의 어두운 미래를 본다. 훗날 역사는 이번 중동 전쟁이 패권국 미국과 트럼프의 몰락을 가속하는 시발점이 됐다는 평가를 내릴 가능성이 크다. 장박원 편집국장 jangbak@ekn.kr

4월 위기설

사월이 되면 종종 인용되는 영시가 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로 시작되는 T.S 엘리엇의 '황무지'다. 이 시가 출간된 해는 1922년. 100년 넘는 긴 세월이 흘렀는데도 '잔인한 사월'은 여전히 현재성을 잃지 않았다. 특히 올해는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전쟁으로 은유가 아니라 사실이 됐다. 미국과 이란은 파괴해서는 안 될 에너지 시설에도 폭격을 가하는 등 전선을 넓히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3일 군사적 공격을 5일간 유예하겠다고 했으나 현재로서는 전쟁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그는 지난달 28일 이란 공습 직후에도 이번 전쟁을 '짧은 여행(excursion)'에 비유하며 곧 끝날 것이라고 장담했으나 결국 빈말이 되고 말았다. 미국과 이란의 '자해극'에 가까운 파괴 탓에 글로벌 경제는 벼랑 끝에 몰렸다. 전 세계 원유의 20%가 지나는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봉쇄되며 국제 유가는 급등락세를 반복하고 있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갑작스러운 원유 공급 중단으로 세계 경제는 벌써부터 몸살을 앓고 있다. 파티 비롤 국제에너지기구(IEA) 사무총장은 23일 호주에 열린 한 행사에 참석해 “이번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위기가 1970년대 두 차례 오일 쇼크와 2022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충격을 합쳐놓은 수준"이라고 경고했다. 우리는 수입 원유의 70%가 중동산이고 대부분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다. 이번 전쟁으로 다른 어느 나라보다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두 달 정도는 비축유와 긴급 조달한 대체 원유로 버틴다지만 전쟁이 길어지면 그 충격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직접 영향을 받는 석유와 화학 분야는 물론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 등 주력 산업이 셧다운될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다. 화장품과 라면 등 소비재 생산도 차질을 빚는다. 금융시장은 이미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휩싸였다. 주가는 급등락을 거듭하고 원-달러 환율도 정상 궤도를 이탈했다. 달러당 원화 가격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저 수준으로 하락했다. 고유가와 고환율은 시차를 두고 고물가로 이어진다. 한국은행이 물가를 잡기 위해 경기침체를 감수하고 금리를 올려야 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고물가·고환율·고금리(3고)'라는 유령이 다시 한국 경제를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전쟁이 끝나도 회복이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풀린다고 해도 당장 원유 수급이 원활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많은 에너지 시설이 파괴된 데다 중동 산유국이 생산량을 줄일 수 있다. 에너지 위기에 대비해 각국이 비축유를 다시 채우려는 수요까지 더해지면 에너지 가격의 고공 행진은 상당 기간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4월 위기설을 '설'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유다. 정부는 석유 최고가격제 도입과 유류세 인하, 25조 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 차량 5부제 같은 에너지 절약 캠페인 등 다각적인 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대부분 응급 처방에 해당한다. 긴급한 상황인 만큼 시간이 걸리는 정공법보다 임기응변이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정책도 공짜는 없는 법이다. 가격 통제나 세금 감면은 시장 왜곡과 재정 부담을 초래할 수 있다. 에너지 절약 캠페인이 원유 부족을 얼마나 해결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편성되는 추경의 활용 방안을 둘러싼 논란도 불 보듯 뻔하다. '4월 위기설'에 대해 정부는 비축유를 풀고 대체 물량을 확보했으니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안이한 태도는 '회색코뿔소'를 불러들일 수 있다. 경고 신호가 있고 얼마든지 예측할 수 있는데도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해서 입는 치명상은 전적으로 정부 책임이다. 우리의 통제 범위 밖에 있는 대외 변수에 대해서는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일 잘하는 정부'를 표방하고 있다. 지금의 위기는 이를 증명할 절호의 기회다. 정책의 우선순위와 실효성, 부작용까지 꼼꼼하게 살펴 위기를 넘겨야 한다. '사월은 잔인한 달'의 다음 구절은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다. 언제나 위기 속에는 기회가 있다. 장박원 편집국장 jangbak@ekn.kr

남대문시장 닮아가는 한국 경제

1990년대 말 유통 분야 담당 기자로 남대문시장을 취재했던 적이 있다. 이때만 해도 남대문시장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쇼핑객들이 찾았던 곳이었다. 기사 발굴을 위해 아동복과 숙녀복 등 품목별 상인 회장들을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눴고, 관리 회사인 남대문시장주식회사에 친한 취재원을 두기도 했다. 설이나 추석 명절을 앞두고는 의례처럼 남대문시장 르포 기사를 썼다. 이곳이야말로 밑바닥 경기를 가장 잘 알려주는 상징적 장소였기 때문이다. 명절 무렵 남대문시장은 '대목'이라는 말이 실감 날 만큼 인산인해를 이루곤 했다. 상점들 사이 좁을 통로를 걷다보면 어깨가 부딪치고 주변 사람의 발이 밟힐 정도였다. 하지만 남대문시장은 쇠락하고 있다. 얼마 전 한 일간지의 보도에 따르면 남대문시장 공실률은 20%에 육박한다. 비인기 상가는 10곳 중 7곳 넘게 비워져있다고 한다. 한때 수억 원에 달했던 권리금은 사라진지 오래고, 보증금을 받지 못할까 걱정하는 상인들도 적지 않다니 격세지감이 든다. 남대문시장은 여러 측면에서 성장률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한국 경제를 떠오르게 한다. 쇠락의 원인이 변화해야 할 때 변화를 거부한 사실에 있다는 점이 특히 그렇다. 남대문시장은 그때나 지금이나 재개발이 절실했다. 2만 개가 넘는 점포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물리적 환경은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 온라인 쇼핑이 대세가 된 상황에 맞춰 '전통시장'만의 장점을 살리는 전략을 찾아야 할 필요도 있었다. 그러나 남대문시장의 변화는 느리기만 했다. 1970년대부터 재개발 논의가 있었으나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변화는 거의 없었다. 건물주와 임차인, 상인들이 각자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여기에 더해 노점상들의 생계 문제도 걸려 있다. 조선시대 초기에 조성됐으니 600년의 역사를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과 공사 중에 유물이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발목을 잡았다. 국보인 숭례문이 인접해 고층 개발이 힘들고 공사비가 천정부지로 오르고 것도 걸림돌로 작용했다. 한국 경제도 남대문시장처럼 외통수에 걸려있다. 모든 분야에서 기득권 세력이 이무기처럼 똬리를 틀고 변화와 개혁을 막고 있다. 정치권만 해도 그렇다. 오는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는데 주요 정당은 참신한 인재보다는 권력자에 가까운 사람을 공천하려고 한다. 경제 정책도 말로는 중소벤처기업이 중요하다면서도 실제로는 대기업에 유리하게 설계돼 있다. 혁신과 성장의 원천이 될 모험 자본은 구색용일 뿐이고 대규모 정부 지원은 대기업에 쏠려있다. 노동 시장도 마찬가지다. 대기업 정규직 목소리만 크고 중소기업 노동자와 비정규직, 대리기사와 프리랜서 같은 특수고용형태근로종사자(특고) 등 근로 환경과 조건이 개선돼야 할 노동자들의 외침은 잘 들리지 않는다. 변화를 외면한 대가는 처참한 경제 지표로 나타난다. 잠재성장률은 0%대로 수렴 중이며 청년 일자리는 점점 말라간다. 원하는 일자리를 찾지 못해 그냥 쉴 수밖에 없는 청년이 70만 명이 넘는다. 코스피 지수가 5000을 넘어 6000으로 향하고 있으나 국민이 체감하는 경기는 썰렁하기만 하다. 내수 침체가 길어지며 폐업하는 소상공인이 연간 100만 명을 훌쩍 넘었다. 주식과 부동산 등 자산 가격이 오르는 것 역시 성장을 견인하기 보다는 부와 소득 양극화를 심화하는 부작용이 더 크다. 이재명 대통령은 설 명절을 앞둔 17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이런 글을 올렸다. “이제 대한민국을 바꿀 기회가 왔다. 부동산 공화국을 극복하는 것이든, 안전하고 평화로운 나라를 만드는 것이든, 공정하고 합리적인 세상을 만드는 것이든, 성장·발전하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든 두려움을 모두 떨쳐내고 촌음까지 아껴 사력을 다하겠다." 이런 간절함이 결실을 맺으려면 가장 먼저 우리 사회 곳곳에 뿌리 내린 기득권 세력의 교묘하면서도 굳건한 벽을 해체해야 한다. 이들을 보호하는 제도와 규제를 혁파하고 '창조적 파괴'에 인재와 자본이 몰리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 그래야 혁신의 불씨가 살아나고 일할 곳이 없어 절망의 늪에 빠진 청년들을 구할 수 있다. 장박원 편집국장 jangbak@ekn.kr

‘오천피’에 가려진 진실

연초부터 '국장'(국내 주식시장)이 불타오르고 있다. 하지만 주식 투자로 돈을 버는 사람보다 '불장'에도 자산 증식에서 소외된 이들이 더 많다. 서민들은 높은 물가에 생활비도 빠듯하다. 이들에게 주식 투자를 하라고 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뻔하다. “지금 당장 먹고살기도 힘든데 주식에 투자할 돈이 어디 있냐!" 이재명 정부는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를 '코리아 프리미엄(한국 증시 고평가)'으로 바꿔 오천피 시대를 열겠다고 한다. 새해 들어 코스피 지수는 파죽지세로 오르고 있다. 6일에는 4500을 돌파하며 다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런 상승세라면 '오천피' 달성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국장'에 대한 기대감은 작년 말부터 형성됐다. 본지가 리얼미터에 의뢰해 지난달 29~30일 실시한 현안 여론조사를 보면 국민의 절반 가까이(48.7%)가 올해 안에 코스피 지수의 5000 돌파 가능성에 대해 “그럴 것"이라고 답했다. 증권사들도 올해 코스피 상단을 5000선 위로 열어놓고 있다. 주요 상장사 실적 전망이 괜찮은 데다 정부의 증시 부양책이 상승 작용을 일으키며 지수를 끌어올릴 것이란 분석이 우세하다. 국내 주식시장으로 투자금이 들어오는 건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정부가 명심해야 할 점이 있다. 주가 상승이 궁극적으로 빈부 격차를 심화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경제학자인 모리구치 지아키 히토쓰바시대 교수가 발표한 자료를 인용해 최근 보도한 바에 따르면 일본 정부의 증시 부양책으로 상위 0.01%의 소득 점유율이 10년 만에 2배 이상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012년 1.19%에서 2023년 2.28%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1만~2만대였던 닛케이225 평균 주가(닛케이지수)도 5만대로 급등했다. 주식을 포함한 자산 소득을 빼면 2023년 상위 0.01%의 소득 점유율은 0.82%로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는 주가 상승이 빈부 격차를 확대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국내 증시는 장밋빛이지만 실물 경제는 살얼음판이다. 작년 수출액이 사상 처음으로 7000억 달러를 돌파했으나 그 온기가 경제 전반으로 확산하지 않고 있다. 수출 증가와 '불장' 모두 반도체가 이끌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극소소 대기업을 제외한 대부분의 제조업체는 혹한기를 겪고 있다. 기업들은 올해 실적 전망도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지정학적 리스크에 관세율 상승, 고환율 등 곳곳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급격하게 오른 물가는 서민들의 삶을 더욱 옥죄고 있다. 외식은 언감생심이고 마트나 시장에 나가기가 무서울 정도다. 지갑은 갈수록 얇아지고 있다. 물가 오른만큼 임금이 인상되지 않은 측면도 있지만 실직자가 많아지고 있다는 게 더 심각한 문제다. 고용 통계가 발표될 때마다 늘어나는 건 고령층을 위한 임시 일자리 뿐이다. 사회에 첫발을 떼야 하는 20대와 우리 사회의 허리 역할을 하는 30~40대를 위한 좋은 일자리는 사실상 줄고 있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현재 경기가 좋지 않고 전망도 불투명하다 보니 기업들이 사람을 뽑지 않기 때문이다. 내수 침체 장기화로 소상공인 폐업이 늘고 있는 것 역시 고용 한파의 원인이다. 작년 한 해 문을 닫은 소상공인은 100만 명이 넘는다. 그 결과 고용 시장엔 찬바람만 불고 있다. 원하는 일자리를 찾지 못해 그냥 쉬는 청년은 계속 늘고 있다. 구직 활동을 포기한 20대와 30대는 지난해 11월 기준으로 각각 41만 명과 33만 명에 달했다. 한창 일해야 할 청년 74만 명이 취업을 포기했다는 건 우리 경제 전체로 봐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이재명 정부와 여당은 코스피 지수 5000 달성 가능성에 환호할 때가 아니다. '오천피'에 가려진 현실을 냉정하게 봐야 한다. '불장'에 집착하다가는 더 큰 것을 놓칠 수 있다. 지금은 증시 부양책에 앞서 주식 투자는커녕 하루하루 살기 바쁜 서민들과 가난한 청년들이 좌절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할 때다. 장박원 편집국장 jangbak@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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