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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헌의 체인지] 캄보디아 사태···기회의 문이 닫히면, 청년은 국경 밖으로 떠난다

서울 강남의 밤은 여전히 환하다. 하지만 그 불빛 속에 앉은 청년의 얼굴엔 그림자가 짙다. 편의점 앞 의자에 앉아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그의 눈에 '월수입 1000만 원 가능'이라는 문장이 반짝인다. 마지막 희망을 거는 손끝이 '지원하기'를 눌렀다. 그 선택이 인생의 경계선을 바꾸어 놓았다. 몇 달 뒤, 그는 캄보디아의 범죄단지에서 구조 요청 메일을 보냈다.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어디 있습니까." 그 짧은 문장이 지금 이 나라 청년들이 보내는 구조 신호이자, 한 사회의 무관심이 낳은 기록이었다. 캄보디아 사태는 단순한 외교 실패가 아니다. 그건 국가가 청년의 절박함을 외면해온 세월의 결과다. 정부는 “현지 경찰에 신고하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 말에는 한국 사회의 무책임과 체념이 응축돼 있다. 외교의 실패는 사건으로 남지만, 청년의 방치는 구조로 남는다. 우리는 이 사건을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흘려보내고 있지만, 그들의 절규는 오래전부터 이 땅에서도 들려오고 있었다. 청년 취업자는 1년 새 10만 명 넘게 줄었고, 비정규직 비율은 38%를 넘어섰다. 제조업 일자리는 14개월 연속 감소했다. 청년 네 명 중 한 명이 계약직으로 사회에 들어선다. 면접장은 점점 좁아지고, 합격 통보는 희귀해졌다. “경험이 없어서 탈락했습니다." 같은 문장이 반복된다. 경험할 기회를 얻지 못한 건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기회를 막아온 사회의 책임이다. 우리는 청년에게 언제까지 '스스로의 무능'을 증명하라 강요할 것인가. 대학은 여전히 이론의 섬 위에 있고, 기업은 즉시 쓸 수 있는 인재만 원한다. 정규직은 과보호되고, 비정규직은 버려진다. 청년이 정규직 문을 두드릴수록 그 문틈은 더 좁아진다. 정부는 매년 '청년 일자리 종합대책'을 발표하지만, 정권이 바뀌면 이름만 달라질 뿐 본질은 늘 제자리다. 정책은 소리만 요란하고, 현장은 변하지 않는다. 정년 연장과 주4.5일제는 이미 자리를 가진 세대의 안락을 위한 제도일 뿐, 아직 자리를 얻지 못한 세대의 구명줄이 아니다. 캄보디아로 떠난 청년들이 그토록 위험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돈 때문만이 아니다. 이 땅에 남아 있을 이유를 잃었기 때문이다. 더는 기다릴 수 없었던 사람들, 더 이상 시도할 여력이 없는 사람들. 그들이 떠난 자리엔 불안이 남고, 그 불안은 다시 누군가의 절망으로 이어진다. 이런 순환이 몇 번이고 반복되면 한 세대 전체가 '패배의 감정'에 익숙해진다. 독일은 대학과 기업이 함께 설계한 도제 시스템으로 청년이 졸업과 동시에 '현장 경험자'로 사회에 들어설 수 있도록 만들었다. 스위스는 청년 인턴의 임금을 정부가 일정 부분 보조하고, 정규직 전환 시 세제 혜택을 준다. 일본은 지방 중소도시에 청년 고용과 창업 클러스터를 만들어 수도권 집중을 완화했다. 그들은 청년을 '보호의 대상'이 아닌 '경제의 주체'로 다뤘다. 청년이 사회와 연결될 수 있는 길을 국가가 설계해준 것이다. 반면 우리는 여전히 단기 알바성 대책과 공허한 구호만 되풀이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돈이 아니라 구조다. 청년이 졸업과 동시에 사회와 이어지는 통로, 기업이 청년을 채용할 이유가 생기는 인센티브, 지역이 청년을 품을 수 있는 생태계, 무엇보다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을 일자리 정책의 일관성이다. 기회의 문을 여는 일은 거창한 혁신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상식을 실행으로 옮기는 용기다. 캄보디아에서 죽어간 청년의 메일은 외교부의 스팸함에 묻혔다. 지금 이 땅에서도 수많은 청년이 매일 이력서라는 이름의 구조 요청을 보내고 있다. 그들의 절박한 신호에 국가는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직접 신고하라"는 말로 책임을 미루고 있는가. 청년의 절망은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사회의 무능이 낳은 결과다. 기회의 문이 닫히면 청년은 국경 밖으로 떠난다. 그리고 그곳엔 언제나 위험이 기다린다.우리가 외면한 청년의 메일이 캄보디아의 비극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그 메일을 읽을 시간이다. 그리고 응답할 시간이다. 청년을 구조하지 못하는 사회는 스스로의 미래를 구조할 수 없다. 변화는 제도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타인의 절망을 읽어내는 감각에서 출발한다.

[기자의 눈] 日관광객까지 위축시키는 ‘혐중 시위’ 이대로 괜찮나

“서울 어디에 숙소를 잡아야 안전해?" 내달 한국 여행을 앞두고 있는 일본인 친구에게서 지난 15일 받은 메시지다. 이 친구는 2010년대 일본 내 한류 열풍의 주역 걸그룹 카라를 통해 K-팝에 눈을 뜨고 현재 뉴진스에 푹 빠져 있다. K-컬처에 대한 오랜 애정으로 이제 우리나라 사회적 이슈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최근 서울 명동 일대와 대림동에서는 '혐중(중국인·중국 혐오)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극우 성향 단체가 중국인 관광객과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을 향해 비하 발언을 쏟아내고 과격한 행동을 보이고 있다. 급기야 대만 네티즌이 SNS에 “최근 한국에서 중국인에 대한 반감이 있다. 이런 배지를 달아야 할까?"라며 '대만 사람이에요'라고 한글과 영어로 적힌 배지 사진을 공개하는 등 방한 외국인 관광객 사이에서 '혐중' 정서에 대한 우려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고 있다. '혐중'과 '반중'은 철저히 구분돼야 한다. '반중'은 중국의 어떠한 사안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서 일어나는 감정이기에 '말'로써 서로의 의견을 주장할 수 있는 영역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혐중'은 인종주의적 차별이다. 모든 중국인에게 무차별적 혐오와 증오를 덮어씌웠다. 중국인 전체를 일반화해 비난하는 감정을 부추기는 데에는 10~20대의 이용률이 높은 X(구 트위터)나 인스타그램 등에서 '가짜뉴스'로도 퍼지고 있다. 친구에게 메시지를 받았던 전날로 돌아가면,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어떻게 이런 일까지 알고 있지?'였다. 그리고는 잠시 고민한 뒤 나름 '안전'하고 극우단체가 몰려들기 어려울 만한 장소를 알려줬다. 마지막으로는 “너는 중국인이 아니어서 괜찮아"라고 답장을 보냈다. 이 친구에게 이것밖에 해줄 말이 없었다. 딱히 떠오르지도 않았다. 2019년 도쿄 여행 당시 외교부로부터 받은 '일본 내 혐한 집회, 시위 장소 방문 자제 및 신변 안전 유의'라는 메시지가 생각나면서 순화한 표현으로 창피함이 몰려왔다. 비단 일본인뿐일까. 한국을 찾는 많은 외국인 관광객이 '혐중 시위'에 위축되는 상황을 배제할 수 없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보고 한국에 호기심을 품고 여행 온 외국인 눈에 '혐중 시위'는 어떻게 비쳐질까. 아찔하기만 하다. 백솔미 기자 bsm@ekn.kr

[신율의 정치 내시경] 획일성 강요하는 공천 기준, 정당 민주주의 위협한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달 말까지 지방선거 공천 기준을 확정할 계획이라고 한다. 핵심 기준은 '세 번 이상 탈당 전력자 공천 배제'인데, 범죄 경력이나 음주 운전 같은 기존의 부적격 사유에 더해 탈당과 복당을 반복한 정치인들까지 '예외 없는 부적격자'로 규정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논의되고 있다고 한다. 민주당 관계자는 “정권 재창출보다 자기 정치에만 몰두했던 인사들을 걸러내겠다는 뜻"이라며 “이제는 경력보다 책임, 성과보다 충성이 기준이 될 것"이라고 언급한 것으로 보도됐다. 당 충성도를 강조하는 이러한 방침은 표면적으로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우리 정치에는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철새 정치인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문제가 있다. '철새 정치인'이라는 표현은, 공정한 공천 규칙과 투명한 경쟁 절차가 보장된 상황에서도 단지 공천 탈락 우려만으로 당을 떠난 경우에 한정해 사용돼야 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우리 정치사를 되돌아보면 이러한 구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명확해진다. 민주당의 과거 사례만 살펴보더라도, 현재는 당을 떠났지만 다시 정치에 복귀하고자 하는 인사들 전체를 '철새'로 낙인찍고, 이들의 경선 참여를 원천 차단하거나 경선에서 중대한 불이익을 부과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지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22대 총선 당시 공천 과정을 돌이켜 보면, 이른바 '비명 횡사, 친명 횡재'라는 말이 공공연히 회자될 정도로 공정성 시비가 적지 않았다. 당시 이러한 불공정한 공천을 이유로 탈당한 비명계 인사들의 복당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 한다면, 이는 특정 계파를 겨냥한 불이익 조치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결국 이러한 공천 기준은 진정한 의미의 당 쇄신이 아니라 특정 세력을 배제하기 위한 '계파 정리 수단'으로 활용될 우려가 크다. 유사한 양상은 국민의힘에서도 확인된다. 국민의힘은 탈당 전력보다는 당에 대한 기여도와 충성도를 계량화하여 공천 기준으로 삼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언뜻 보면 합리적인 접근처럼 보일 수 있으나, 그 내용을 검토하면 상당한 문제점이 드러난다. 무엇보다 '당에 대한 기여도'라는 개념 자체가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모호하다는 점이 문제다. 보도에 따르면, 당원 모집 실적, 당론 행사 참석률, 정책 홍보 기여도, SNS 활동 등이 기여도 평가의 세부 지표로 고려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당론 행사 참석률'이나 '정책 홍보 기여도'는 객관적 측정이 어렵고 자의적 해석의 여지가 크다. 예컨대, 얼마 전 국민의힘 지도부가 제시한 '패널 인증제'는, 당의 입장에 부합하지 않는 발언을 하는 방송 패널의 출연을 제한시키겠다는 내용이었는데, 이런 입장을 내놓은 지도부가 당론 행사 참석률이나 정책 홍보 기여도를 공천 기준으로 제시할 경우, 이는 당 지도부의 노선에 비판적인 인사들을 공천에서 배제하려는 시도로 읽힐 수 있다. 민주적 정당이라면 당내 소수 의견과 비판적 목소리 역시 존중해야 한다. 그런데 이를 충성심 부족으로 규정하고 공천에서 불이익을 가한다면, 이는 민주적 정당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당내 다양성을 억압하는 이러한 방식이 과연 선거 승리를 위한 합리적 전략인지 근본적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에서는 정당 내 계파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지만, 민주적 정당에서 계파의 존재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계파는 억압해야 할 부정적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정당 내부의 다양성과 민주성을 보여주는 지표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여야 모두가 공천 제도를 통해 획일적이고 동질적인 정당을 구축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우려스럽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주적 정당 운영을 통해 구현되는 민주주의의 심화와 발전이다. 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권위주의가 강화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지만, 적어도 우리나라만큼은 건강하고 정상적인 민주주의의 경로를 견지해 나가기를 바란다. 신율

[EE칼럼] 에너지 전환의 성공방정식, ‘분수효과’

윤태환 루트에너지 대표 2008년 MB정부는 '저탄소 녹색성장' 전략 하에 풍력 산업을 '제2의 조선업'으로, 태양광을 '제2의 반도체'로 육성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당시 글로벌 시장에서 일부 선도 기업을 제외하면 기술 격차가 크지 않았고, 한국 기업의 빠른 추격 역량을 고려할 때 충분히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실제로 LG, 삼성, 현대 등 주요 대기업부터 웅진, OCI 등 중견기업, 그리고 다수의 벤처기업들이 신성장 동력으로 신재생에너지 분야에 전략적 투자를 했으며, 정부 역시 다양한 정책 인센티브를 확대하고 있었다. 필자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신용위기와 기업의 사회적 책임', 그리고 확산되는 기후변화협약 속에서 '기후위기와 지속가능성'이라는 화두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는 자연스럽게 2009년 기후에너지 전문 컨설턴트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후에너지 컨설턴트로서 주요 업무는 글로벌 성공·실패 사례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핵심 인사이트를 도출하여, 정부와 기업의 전략적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각국의 성공방정식은 무엇이었는가. 어떤 장애물이 있었고 어떤 솔루션으로 돌파했는가. 이해관계자 관리는 어떻게 이루어졌고 갈등 조정 메커니즘은 무엇이었는가. 정부·기업·지자체·시민사회의 역할 분담과 협력 구조는 어떠했는가. 이러한 전략적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분석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핵심 성공방정식이 있었다. 바로 '상향식(Bottom-up) 전환 모델'이었다. 전통적으로 정부와 기업은 '하향식(Top-down) 전환' 방식에 익숙하다. 중앙정부의 정책 결정이 지방정부와 최종 수혜자에게 순차적으로 파급되는 구조이며, 기업 생태계에서는 대기업의 성과가 협력사와 근로자에게 순차적으로 이전된다는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 논리다. 그러나 낙수효과는 근본적 한계로 인해 기대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핵심 문제는 구조적 전제의 오류에 있었다. 낙수효과는 시장 안정성과 정책 일관성을 전제로 하는데, 실제 비즈니스 환경에서 글로벌 정세, 경영 여건, 정치적 변수는 지속적으로 변동한다. 시장 불확실성이 높아질수록 기업들은 유동성 확보를 우선시하며 R&D, 설비투자, 신규 채용 등 장기 투자를 축소하는 것이 합리적 선택이다. 변화 없는 안정성이라는 전제 자체가 비현실적이기에, 낙수효과는 제한적 조건에서만 단기적으로 작동할 뿐이었다. 더 중요한 이슈는 정권 교체에 따른 정책 변동성이었다. 낙수효과가 실질적 성과를 내려면 최소 10~20년 이상의 정책 일관성이 확보되어야 기업들이 장기 투자를 결정할 수 있다. MB정부 시기 태양광·풍력 분야에 진출한 기업들의 현재 생존율을 보면, 정책 불확실성이 산업 생태계에 미친 영향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재생에너지 관련 스타트업에 대한 벤처캐피털의 투자 기피 현상도 같은 맥락이다. 문재인 정부 시절에는 충분한 사회적 합의 없이 탈원전이 핵심 에너지 정책으로 추진되면서, 이념적 대립이 심화되고 재생에너지 시장 전체가 타격을 받았다. 기후변화 대응과 환경 개선이라는 본질적 목표는 퇴색되고, 에너지 정책이 정치적 공방의 도구로 전락했다. 최종 손실은 산업 경쟁력 약화와 일자리 감소, 환경 악화라는 형태로 국민에게 전가되었다. 10여 년간 정치적 갈등이 지속되는 동안 민간 투자는 정체되었고, 중국이 글로벌 기술 리더십과 시장 지배력을 확보하며 한국 기업들의 경쟁 우위는 급격히 약화되었다. 기후·환경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고, 산업과 고용은 성장하지 못했으며, 저출생·지역소멸·경제성장률 하락이라는 복합 위기가 가속화되었다. 반면 필자가 발견한 상향식 성공모델은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보여주었다. 시민들에게 기후에너지 프로젝트 투자 기회를 개방하고, 참여자가 전체 인구의 5~10%를 넘어서자 결정적 '티핑포인트'가 형성되었다. 정치권은 이념을 초월하여 기후에너지 친화적 정책을 입안했고, 정권 변화에도 핵심 정책 기조는 유지되었다. 이는 시장에 명확한 정책 시그널을 제공했고, 안정적 내수 수요를 창출했다. 기업들은 장기 투자 전략을 수립하고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했으며, 신규 고용 창출과 GDP 성장, 지역 균형발전이라는 다층적 성과를 달성했다. 새로운 정부에서 에너지 전환이 성공하려면 과거처럼 낙수효과가 아니라 분수효과를 위한 정책을 추진하길 기대한다. 윤태환

[기자의 눈] 제4인뱅 예비인가 실패…끝이 아닌 시작

제4인터넷전문은행에 도전장을 낸 4개 컨소시엄이 예비인가에서 모두 탈락했다. 금융위원회는 지난달 17일 정례회의를 열고 소호은행, 소소은행, 포도뱅크, AMZ뱅크 컨소시엄의 예비인가를 불허했다. 자금조달과 사업계획 실현가능성 등이 미흡하다고 판단해서다. 제4인터넷은행을 준비하던 컨소시엄들은 실패의 좌절을 겪어야 했지만, 이번 결과가 제4인터넷은행의 필요성마저 부정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컨소시엄들이 내걸었던 소상공인 특화 은행이나 이재명 대통령이 대선 당시 내건 중금리대출 전문 인터넷은행 등 금융소외층을 위한 새로운 형태의 은행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는 여전하다. 소상공인이나 중저신용자들은 높은 대출 심사 문턱에 자금 조달이 쉽지 않고, 리스크 관리가 중요한 기존 은행들은 이들의 현실을 세밀하게 반영하지 못한다. 제4인터넷은행 컨소시엄들이 구상한 소상공인·취약층 전문은행은 은행 서비스를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포용한다는 취지에서 의미 있는 시도인 점은 분명하다. 다만 업계에서는 새로운 인터넷은행 탄생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며 실패 가능성을 높게 예상하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사업의 실현가능성과 리스크 관리 어려움 등에 컨소시엄들이 표방하는 은행이 성공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란 반응이 많았다. 하지만 처음 인터넷은행이 출범할 때도 분위기는 비슷했다. 영업점이 없는 100% 비대면 은행을 소비자들이 과연 믿고 찾을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존재했다. 지금 인터넷은행은 은행권의 메기로 역할을 하고 있다. 수신, 여신, 투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정통 시중은행이 하지 못한 서비스를 도입하며 현재는 시중은행을 앞설 정도로 혁신성을 인정받고 있다. 당초 시중은행 과점을 깨기 위해 출발한 제4인터넷은행이지만, 새 정부에서는 금융소외층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포용금융'을 위한 새로운 은행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예비인가 불발은 실패의 끝이 아닌 도전의 시작으로 봐야 한다. 컨소시엄들은 금융당국이 지적한 자금조달과 사업계획 실현가능성 등을 다시 정비하고 미비한 점은 보완해 은행 설립을 위한 안정성과 탄탄한 기반을 갖출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당국도 더 많은 도전자들이 등장할 수 있도록 시장을 독려하며, 새로운 인터넷은행 설립을 위한 제도적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시장에서도 회의보다는 기대감을, 비판보다는 응원을 보내며 금융의 변화 과정에 함께 하길 바란다. 송두리 기자 dsk@ekn.kr

[EE칼럼] 두산에너빌리티, 380MW급 가스터빈 美 수출…기계공업 새 역사 썼다

두산에너빌리티가 발전용 가스터빈 380MW급 2기를 미국에 수출하게 되었다. 가스터빈은 기계공업의 꽃이다. 가스터빈은 전 세계에서 미국, 독일, 일본, 이태리만 생산한다. 사실상 미국의 GE버노바, 독일의 지멘스에너지, 일본의 미쓰비시중공업이 세계 가스터빈 시장을 분점하고 있다. 가스터빈 기술의 종주국인 미국에 역수출하게 된 것은 한국 기계공업의 기념비적 사건이다. 발전용 가스터빈은 제트엔진을 더 크게 만들어서 발전용으로 사용하는 기계라고 보면 된다. 가스라는 말이 앞에 붙지만 경유도 연료로 사용할 수 있다. 제트엔진은 높은 고도에서 연료가 동결되므로 항공유(jet fuel)를 사용한다. 화력발전에 사용되는 터빈은 크게 스팀터빈과 가스터빈으로 나뉘는데 원자력발전소와 석탄발전소에서는 증기의 압력을 사용하는 스팀터빈을 사용하고 천연가스 발전소에서는 가스터빈을 사용한다. 가스터빈은 기계공업에서 가장 기술적으로 개발하기 어려운 분야이다. 스팀터빈은 증기의 온도가 550~600℃ 수준이어서 금속재료가 견딜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나 가스터빈은 압축된 공기와 천연가스가 폭발적으로 연소하면서 고온·고압의 배기가스로 터빈과 발전기를 돌리는데 그 온도가 무려 1,600℃ 이상 올라간다. 문제는 이 정도의 고열을 금속 소재가 견뎌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결국 고온을 견디는 가스터빈 블레이드의 소재와 블레이드 내부에 고온을 견딜 수 있도록 냉각장치를 어떻게 만드느냐가 관건이다. 두산에너빌리티가 제작한 가스터빈은 이와 같은 기술적 난관을 모두 돌파하고 여러 시험을 통과하여 검증된 결과이다. 기계공업의 최첨단 제품을 제작하는데 성공하였음을 이번의 수출계약이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두산에너빌리티의 가스터빈 제작은 한국 특유의 산학연 그리고 정부의 노력이 함께 이룬 결실이다. 정부는 2013년에 '발전용 고효율 대형가스터빈 개발'이라는 국책과제를 시작하였다. 이에는 두산에너빌리티를 비롯한 발전 기자재 업체들 그리고 서부발전이 참여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발전 기자재 업체들과 협력하여 고유 기술 확보에 성공했고 이를 토대로 만든 270MW급 한국형 가스터빈인 K-가스터빈을 서부발전의 김포열병합발전소에 2022년 4월에 설치했다. K-가스터빈은 무수한 정밀 시공과 여러 시험을 거쳐 2023년 3월 최초 점화에 성공했고 이후 연소조정시험과 출력변동시험, 비상정지시험 등 필수적인 운전시험과 법정 검사를 마쳤다. 그리고 마침내 시운전 최종 관문인 240시간 연속 자동운전시험을 통과해 상업운전을 개시했다. 두산에너빌리티와 기자재 업체들의 눈부신 노력을 높게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발전사업의 명운이 걸려있는 핵심 터빈과 발전기를 K-가스터빈으로 결정한 서부발전의 도움과 그 뒤에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을 정부의 노력은 한국의 산업발전사에 의미 있는 한 페이지로 기록될 것이다. 두산에너빌리티는 270MW에 이어 380MW급 가스터빈의 정격부하 성능시험을 마치고 출력과 효율은 물론 진동, 온도, 배기가스 등 각종 운전지표를 모두 만족하는 것을 확인하였고 이와 함께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보완하기 위한 급속 가동시험도 병행해서 이를 충족시켰다고 전해진다. 성공적인 380MW 가스터빈의 시험성적으로 서부발전을 비롯해 중부발전, 남부발전, 남동발전 등과 이미 주기기계약을 맺었다. 향후 두산에너빌리티는 415MW급 가스터빈 그리고 90MW급 소형 모델 나아가서 제트엔진까지 개발하여 굴지의 가스터빈 제작사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두산에너빌리티의 성공적인 가스터빈 수출은 AI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전력수요의 급증과 이를 위한 대형 발전기 주문 러쉬와 무관하지 않다. 이미 주요 가스터빈 제작사들에 대한 주문 물량은 4년 이후까지 밀려있다는 소식이다. 그러나 이때를 위해 그동안 노력해온 정부와 산학연의 협력이 없었으면 이와 같은 결실은 없었을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조성봉

[이슈&인사이트] ICAO 이사국 선출, 항공 선도국 도약의 기회로

우리나라는 지난 9월 30일 몬트리올에서 열린 제42차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총회에서 2026~2028년 임기의 이사국(파트 3)으로 다시 선출되었다. 이는 국제사회가 인정한 우리 항공 위상의 반영이자, 192개 회원국을 상대로 치밀하게 선거 외교를 펼쳐온 정부의 성과다. ICAO 이사회는 급변하는 국제 항공 질서를 조정하고 기술표준을 제정하는, 말 그대로 '항공 외교의 중심 무대'다. 우리나라는 1952년 ICAO 가입 이후 기술협력을 발판으로 항공산업을 키워 왔다. 지금은 ICAO 정규예산 분담금 7위, 항공운송량 8위, 인천공항 국제승객 처리능력 3위라는 성과를 기록하며 항공 강국으로 자리매김했다. 국제항공운송협회(IATA)에 따르면 2023년 우리 항공산업(연관 산업 포함) 규모는 780억 달러로 GDP의 4.6%를 차지하며, 약 120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팬데믹 이후 세계 항공수요는 빠르게 회복해 지난해 승객 수가 46억 명에 달했으며, 2050년에는 124억 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안전, 효율성, 지속가능성을 동시에 충족해야 하는 국제항공의 과제는 한층 무거워지고 있다. 우리가 진정한 항공선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인 기여와 전략적 대응이 필요하다. 첫째, ICAO 이사국 파트 승격을 추진해야 한다. 현재의 파트 3 지위는 지역 대표성에 머무르고 있어 우리의 항공 능력과 기여도를 온전히 반영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3년마다 치열한 선거운동을 반복하며 외교적 자원을 소모하고 있다. 다행히 시카고협약 개정안(2016년) 발효로 조만간 이사국 정원이 확대되어 파트 조정 논의가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사실상의 상임이사국인 파트 1 또는 파트 2로 승격하기 위한 전략을 선제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둘째, 정부 내 ICAO 전담조직을 강화해야 한다. ICAO가 채택한 19개 부속서와 1만 2천 개이상의 기술표준은 국민 안전과 직결된다. 그러나 이를 분석·시행할 전담 인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정부는 지난 4월 '항공안전혁신방안'을 발표하며 항공 거버넌스 개편을 핵심 과제로 제시했다. 이제는 항공 안전과 행정 역량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려 ICAO 활동을 효과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셋째, 개발도상국과의 항공 협력사업을 'K-항공' 브랜드로 발전시켜야 한다. 정부는 2001년 이후 140개국 3,500여 명의 항공청 공무원에게 교육·훈련을 제공해 왔다. 이는 ICAO의 핵심 가치인 “No Country Left Behind(모두를 위한 항공발전)"를 구현한 대표적 모범 사례다. 향후 급증하는 항공 인력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이 사업을 체계화하고, 지역·분야별 맞춤형 지원을 결합해 'K-항공'이라는 브랜드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넷째, ICAO 사무국 고위직 진출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 인재의 고위직 진출은 전무하다. 항공 전문가 풀을 체계적으로 육성·관리하고, 유능한 인재들이 국제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도록 지원해 우리의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이번 ICAO 이사국 선출은 단순한 지위 유지가 아니라 새로운 도약의 출발점이다. 2050년 항공 탄소중립 실현, 선진항공모빌리티(AAM) 도입, 인공지능(AI) 활용 등 미래 항공의 거대한 도전을 슬기롭게 대처하며, 책임 있는 항공 선도국으로 나아가길 기대한다.

[김병헌의 체인지] 국정감사와 권력분립의 충돌··· 헌정의 선을 그을 때

정치는 언제나 권력의 경계 위를 걷는다. 국정감사도 그중 하나다. 감사라는 이름 아래 감시와 견제는 민주주의의 필수 장치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것은 '개입'과 '간섭'의 경계로 흐려진다. 13일 시작된 법제사법위원회 국감에서 대법원장 국정감사 증인으로 출석을 놓고 충돌 논란을 빚는게 그 예다. 국회는 국민의 대표로서 사법부를 감시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하고, 법원은 사법의 독립이 흔들릴 수 있다고 반발한다. 어느 쪽도 완전히 틀리지 않지만, 헌법이 말하는 삼권분립의 정신은 어느 한쪽의 '승리'로 완결되지 않는다. 국정감사는 헌법 제61조가 규정한 국회의 권한이다. 국정 전반에 대한 감사와 조사, 국민을 대신한 통제의 기능을 수행한다. 여당은 이를 통해 “국민의 눈높이에서 권력을 감시한다"고 말하고, 야당은 “행정부뿐 아니라 사법부도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기관이기에 예외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특히 법원 내 인사 문제나 특정 판결의 배경이 정치적 이해와 얽혀 있다는 의혹이 불거질 때, 국회의 '확인권'은 더욱 강하게 작동한다. “사법부라고 해서 성역이 될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헌법이 규정한 권력분립은 단순히 권한의 분배가 아니라, 상호 간섭을 금지하는 질서의 합의다. 법원은 법률의 해석과 판결을 통해 최종적 판단을 내리는 기관이다. 입법부가 그 내부 판단 구조를 증인석에서 따지기 시작하면, 그 순간 사법부의 독립은 흔들린다. 비슷한 논쟁은 해외에서도 있었다. 1950년대 미국 의회는 연방대법관 몇 명을 증인으로 소환하려 했다. 특정 판결이 의회의 입장과 충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법무부와 법학자들은 한목소리로 “이는 사법권의 독립을 침해한다"고 반대했다. 결국 대법관들은 의회 출석을 거부했고, 이후 미국에서는 사법부 수장을 청문회나 감사 자리에 세운 전례가 사라졌다. 대신, 연방대법원은 '윤리 보고서'와 '행정 투명성 문건'을 매년 의회에 제출하면서, 제도적으로 설명 책임을 다하는 방식을 택했다. 직접 심문 대신 제도적 투명성으로 신뢰를 회복한 것이다. 독일도 마찬가지다. 연방헌법재판소의 소장이나 판사들은 국회 청문회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 사법평의회와 헌법위원회를 통해 간접적으로 법원 행정이 통제된다. 프랑스에서는 아예 사법부에 대한 국정감사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 국가는 모두 '견제는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통해 권력분립을 살아 있는 시스템으로 만든다. 우리의 경우, 국회가 대법원장을 증인으로 부르려는 시도는 헌법상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헌정의 역사에서 “할 수 있다"가 곧 “해야 한다"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민주주의는 절제가 있어야 지속된다. 여당은 “사법부가 정치적으로 편향돼 있다"는 국민 여론을 배경으로, 사법권을 '책임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반면 야당은 “정권이 사법부를 길들이려 한다"고 반발하며, 대법원장의 출석은 '정치적 압박'으로 본다. 결국 한쪽은 투명성을, 다른 한쪽은 독립성을 명분으로 내세운다. 문제는 이 논쟁의 밑바닥에 '사법 불신'이라는 공통된 뿌리가 있다는 대목이다. 정치가 법원을 신뢰하지 못하고, 국민이 판결을 믿지 못하는 상황에서 견제와 개입의 경계는 더욱 희미해진다. 국회가 대법원장을 불러 세워 질문을 던진다고 해서 신뢰가 복원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법부가 정치의 무대에 서는 순간, 재판의 권위는 정치적 해석에 잠식된다. 한국 현대사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1988년, 제5공화국 청문회 당시 사법부의 일부 인사들이 정치적 책임 논란에 휩싸였다. 하지만 당시 국회는 대법원장 출석 요구를 끝내 철회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사법부를 국회의 증인석에 세우는 순간, 권력분립의 마지막 선이 무너진다."그 선을 넘지 않음으로써, 한국 민주주의는 최소한의 헌정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재판의 투명성, 법원행정처의 권한 남용, 판사 인사제도의 폐쇄성 등은 꾸준히 비판받아왔다. 하지만 그것을 고치기 위한 방식이 '정치적 청문회'가 되어선 안 된다. 미국처럼, 사법부가 스스로 국민 앞에 행정 보고를 제출하고, 윤리 감시 제도를 강화하는 방식이 보다 지속 가능하다. 국정감사와 권력분립의 충돌은 정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국회가 사법부를 감시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사법부도 정치로부터 독립할 권리가 있다. 양쪽 모두 헌법의 일부를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헌법이 요구하는 것은 '모두의 권리'보다 '각자의 절제'다. 견제는 필요하지만, 신중해야 한다. 개입은 유혹적이지만, 헌정의 질서는 그것을 금한다. 민주주의의 품격은 힘을 어떻게 쓰느냐보다, 어디서 멈추느냐로 판가름난다. 국정감사는 감시의 눈이지만, 그 눈이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헌정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사법부가 독립을 잃는 순간,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도 함께 흔들린다. 오늘의 논란은 단지 대법원장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이 앞으로도 헌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느냐의 시험대다. 견제의 힘과 절제의 미학, 그 중용의 지점이 지금은 어딘지 정확히 알 수없지만 모두의 노력과 연구,시행착오를 통하면 적절한 지점은 반드시 나올것이다. 여기서부터 진짜 민주주의는 자란다.

[기자의 눈] 카카오 업데이트 대란, 금융사에 주는 교훈

카카오가 15년 만에 야심차게 카카오톡 개편을 단행했지만, 그 결과는 처참했다. 업데이트 이후 친구목록에는 별로 친하지 않은 지인들의 프로필 변동 내역이 크게 표시됐고, 화면에 광고가 표시되는 비중도 눈에 띄게 늘었다는 게 이용자들의 주된 반응이다. 카카오톡을 두고 이용자들의 비판과 원성이 시간이 지나도 사그라지지 않자 정신아 카카오 대표는 최근 주주서한에서 친구 목록을 재노출하고, 피드 형태는 사용자가 선택할 수 있도록 4분기 중 별도 메뉴로 선보이겠다며 한 발 물러섰다. 정 대표는 “사용자의 피드백을 더 면밀히 듣고 소통하며, 개선이 필요한 영역은 적극 대응하겠다"는 식의 반성문도 내놨다. 그러나 정 대표가 주주서한을 내놓는 현 시기에도 카카오톡 이용자들의 불편은 현재진행형이다. 홍민택 카카오 최고제품책임자(CPO)는 소셜 확장과 메신저 서비스를 강화하기 위해 카카오톡 업데이트를 진행했다고 밝혔지만, 이는 이용자들의 실제 니즈와 괴리가 상당하다. 카카오가 처음부터 소비자의 목소리를 들을 의지조차 없었던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주주들도 카톡 업데이트로 된서리를 맞았다. 카카오가 지난달 23일 카카오톡 개편안을 공개하기 직전 6만6400원이었던 주가는 이달 12일 6만100원까지 떨어졌다. 심지어 정 대표가 주주서한을 발표한 13일에도 카카오 주가는 3% 넘게 하락했다. 한때(2021년 7월 9일) 카카오 주가가 16만500원까지 올랐던 점을 고려하면 지금의 주가는 가히 처참한 수준이다. 카카오는 카톡에 따라붙던 '국민 메신저'라는 타이틀을 자만했고, 결국 이를 스스로 놓아버렸다. 카카오가 이번 업데이트를 이전 상태로 되돌린다고 해도, 고객과 주주들에게 남긴 상처는 결코 치유될 수 없다. 카카오톡 업데이트 발표 직전에는 롯데카드에 대규모 해킹 사고가 있었다. 롯데카드는 해킹사고로 무려 297만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됐다고 했다. 롯데카드는 조좌진 대표가 지난달 18일 대국민 사과를 한 지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카드 재발급, 비밀번호 변경, 카드 정지 및 해지 등 뒷수습에 곤혹을 치르고 있다. 두 회사의 흑역사는 금융사에도 큰 교훈을 남긴다. 금융소비자, 고객 보호가 곧 실적, 주주가치 제고와도 직결될 수 있다는 메시지다. 고객의 목소리를 외면한 채, 최고경영자(CEO)가 자신의 감에 따라 독단적으로 의사결정을 강행한다면, 금융사가 쌓아올린 주주가치가 무너지는 것도 한순간이다.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은 취임 이후 연일 금융소비자보호 강화를 주문하고 있다. 금융사는 이 원장의 메시지를 흔한 '잔소리'로 흘리지 말고, 금융소비자 보호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고객 불편사항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고객 목소리에 대한 피드백 시스템도 강화해야 한다. 해킹이나 보안 시스템도 계속해서 보완해야 한다. 국내 금융권에, 카카오의 흑역사는 부디 남의 일이어야만 한다. 나유라 기자 ys106@ekn.kr

[이슈&인사이트] 한미 관세협약은 트럼프 치적 과시용, 경제 을사늑약으로 귀결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이 미국에 투자하기로 한 3,500억 달러와 관련해 '선불'이라고 발언함으로써 양국 간 관세 협상 전망은 한층 어두워졌다. 특히, 미국측이 한국측 요구조건인 통화스와프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어 사실상 타결하기가 어려워졌는데, 이러한 상황에서는 타결해서는 결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한국 경제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 위성락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도 언론 인터뷰에서 미국 측 요구에 대해 “객관적이고 현실적으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범위"라고 선을 그었다. 3500억달러는 한국의 최근 5년 치 전 세계 해외직접투자(FDI) 금액보다 클 뿐만 아니라 한국 외화보유고의 84%가 넘는 금액이다. 이 정도로 막대한 금액을 보증, 대출 등을 거의 동원하지 않으면서 단기에 현금 투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트럼프는 한국은 부자 나라라고 하면서 일본처럼 빨리 합의서에 서명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5,500억 달러 투자에 합의한 일본은 기축통화국이고 외환보유고가 한국 보다 훨씬 많을 뿐더러 해외에 많은 자산을 가지고 있어 한국과는 확연히 다르다. 트럼프는 당초 중국에 대한 관세전쟁을 강조했다. 그러나 중국이 희토류를 무기로 강력 대응하자 관세부과 유예 조치를 취하면서 원래 공언했던 싸움을 벌이지 못하고 있다. 대신 EU, 일본, 한국 등 동맹국을 상대로 팔을 비틀고 소위 '삥땅'을 뜯어 정치적으로 활용하려고 한다. 사실 트럼프는 큰 위기에 봉착해 있다. 관세부과로 소비자물가는 오르고 있어 국민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그러자 관세 수입을 재원으로 활용해서 이른바 '배당금(Dividend)' 형태로 국민들에게 직접 현금을 지급하는 방안까지 고려하고 있다. 미국의 국가 부채는 사상 최대로서 37조 달러를 넘어선 상황이다. 연방정부 셧다운 사태가 지속되고 있고, 이민자 단속을 강행하면서 시위대와의 충돌도 격화되고 있다. 급기야 국경순찰대가 시위대 여성에게 총격을 가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시카고에 주방위군 병력 배치를 승인했다. 트럼프는 세계 최강대국 미국을 엉망진창 속으로 빠뜨리고 미국의 이미지를 심각하게 훼손시키고 있다. 트럼프의 관세폭탄 정책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국제사회의 반감을 불러일으키기만 하고 미국의 경제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트럼프가 압박을 가한다 해도 트럼프의 요구에 응해서는 안 된다. 한국에게는 죽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현재 환율이 1400원을 넘고 있는데, 만약 한국이 미국의 요구에 양보하면 막대한 현금이 단기간에 빠져나가 외환시장이 요동치고 실물 경제 전반에 타격을 주게 된다. IMF 위기 같은 외환위기가 올 것이 뻔하고, 한국 경제는 고꾸라진다. 한미 관세협정에 사인하는 것은 경제적인 을사늑약에 사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국이 합의하지 않으면 미국은 계속 압박할 것이나,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관세전쟁으로 미국내 소비자 물가가 크게 오르고 있어 불만이 커지고 있다. 연방순회항소법원이 '국제비상경제권법(IEEPA)'을 근거로 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부과가 불법이라고 판결하였다. 물론 연방대법원 판결이 남아 있지만 마구잡이식 관세폭탄 투하 모우멘텀은 상실했다. 중간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트럼프는 궁지에 몰릴 것이다. APEC 계기에 한미관세를 타결하려는 움직임도 있으나 여기에 연연하면 안 된다. 정부는 치열하게 협상하되 사인하는 것은 가능한 미루고, 사인안할 수도 있다는 각오로 임해야 한다. 그리고 언론과 시민단체, 그리고 국회는 트럼프 요구의 문제점과 부당성을 강하게 제기해야 한다. 물론 정부가 “가장 성공적인 협상이었다. 합의문을 작성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잘 되었다"고 자화자찬하였는데, 이것은 잘못되었지만, 그 후 태세 전환하여 다행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관세 협상 합의문에 사인했으면, 탄핵 당했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가지고 야당에서 반미선동 운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지금은 여야가릴 것이 없다. 오로지 국익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행동해야 한다. 이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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