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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김승연 시대’…한화그룹 3세 경영 본격화, 김동관 수석부회장·김동원 부회장·김동선 사장 동반 승진

한화그룹이 김동관 부회장을 수석부회장으로 승진시키는 등 오너가 3세들을 전면 배치하고 주요 계열사 5곳의 수장을 교체하는 대규모 인사를 단행했다. 그룹의 핵심 미래 동력인 방산·우주항공·반도체 등 첨단 산업과 글로벌 시장 확장에 가속도를 내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한화그룹은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는 주요 경영진 및 대표이사 내정 인사를 오는 8월 1일 자로 시행한다고 30일 발표했다. ◇김동관·동원·동선 삼형제 동반 승진…책임 경영 강화 이번 인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김승연 회장의 세 아들이 나란히 승진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는 점이다. 그룹 내 '3세 경영' 체제가 한층 공고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장남인 김동관 부회장은 수석부회장으로 직급을 올렸다. 김 수석부회장은 그동안 방산·해양·우주항공·에너지 사업 등을 총괄하며 그룹의 글로벌 비약적 성장을 주도하고 굵직한 전략적 대형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금융 부문을 이끌어온 차남 김동원 한화생명 사장은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금융 사업의 디지털 혁신과 글로벌 사업 확장을 선도하며 미래 성장 기반을 단단히 다졌다는 평가다. 삼남인 김동선 한화비전 부사장 역시 사장으로 승진했다. 기존 유통·레저·식음료 부문에서의 사업 확장뿐만 아니라 최근 반도체 장비 시장 진출 등 첨단 산업 분야에서도 가시적인 성과를 낸 것이 주효했다. 한화그룹 관계자는 “이번 주요 경영진 승진을 계기로 각 분야의 사업 역량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리고, 사업 영역 확장 등 미래 성장 동력 확보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 계획"이라고 밝혔다. ◇에어로·시스템 등 5개 계열사 신임 대표 내정…'글로벌·현장' 방점 한화그룹은 경영 안정화와 중장기 전략 과제 수행에 최적화된 인재를 발탁해 5개 계열사의 신임 대표이사도 새롭게 내정했다. 특히 미래 먹거리인 방산과 우주항공 부문의 리더십 변화가 돋보인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사업부문 신임 대표이사에는 이부환 현 PGM사업부장(부사장)이 내정됐다. 1995년 입사한 이 내정자는 지상 무기체계 R&D와 유럽 법인장 등을 두루 거친 해외 사업 전문가로, 향후 한화의 해외 방산 거점 구축을 진두지휘할 예정이다. 한화시스템 신임 대표이사로는 신규 사업 모델 전문가인 양기원 현 한화임팩트 대표(부사장)가 이동한다. ㈜한화 글로벌부문과 한화임팩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양 내정자는 우주·방산 분야의 글로벌 확장을 이끌 적임자로 낙점됐다. 석유화학 분야에서는 현장 경험이 풍부한 강정훈 현 한화토탈에너지스 대산공장장(전무)이 한화임팩트 사업부문 신임 대표이사로 내정됐다. 강 내정자는 1995년부터 현장에서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회사의 원가 혁신과 수익 구조 개선에 집중할 계획이다. 한화자산운용 신임 대표이사에는 임동준 현 전략사업유닛장(부사장)이 이름을 올렸다. 미주 법인장을 지낸 바 있는 임 내정자는 글로벌 감각을 바탕으로 유가 증권 운용 경쟁력 강화와 대체 투자 확대를 이끌어갈 전망이다. 첨단 장비 분야의 시너지 창출을 위한 인사도 단행됐다. 한화세미텍 신임 대표이사에는 김기철 현 한화비전 대표(부사장)가 내정됐다. 김 내정자는 해외 중심의 사업 재편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역량을 살려 한화비전 대표이사와 한화세미텍 대표이사를 겸직하고 그룹의 반도체 장비 사업 확대와 시장 선점이라는 중책을 수행하게 된다. 한편 이번에 내정된 신임 대표이사들은 향후 각 사별 주주총회와 이사회 결의를 거쳐 최종 선임될 예정이다. 박규빈 기자 kevinpark@ekn.kr

[이슈&인사이트] 1주택은 무슨 잘못을 했나?

지난 7월 23일 대통령 주재 부동산 대토론회가 있었다. 필자도 참석 운 좋게 발언권까지 얻어 대통령께 이런 질문을 했다. “초고가 1주택에 대해 보유세를 더 올리면 서울 집값이 안정이 됩니까?" 지금 서울 집값 상승을 주도하는 구간은 대출이 최대 6억원까지 나오는 15억원 이하 중저가(서울 기준) 아파트이다. 최악의 전월세 난에 내 몰린 30대 신혼부부들이 어쩔 수 없이 주거안정을 위해 사자로 돌아서면서 서울 외곽과 역세권, 학교 등 주거 인프라가 좋은 경기도 아파트로 수요가 몰리면서 아파트 가격이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공시가격 30억원이 유력한 초고가주택의 보유세를 올린다고 15억원 이하 중저가 아파트 가격이 안정이 된다? 인과관계가 없다. 물론 논리는 이런 것이다.초고가 1주택을 때려 가격이 내려가면 외곽과 수도권 아파트 가격도 같이 내려갈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는다. 초고가 1주택 보유세를 더 올리면 세입자에게 전가해서 전세와 월세 가격이 더 올라간다. 초고가 아파트를 사려는 분들이 부담스러우니 수요가 이동하면서 초고가 아래 구간 아파트 가격이 추가 상승할 가능성도 있다. 정부는 초고가 1주택과 더불어 비 거주 1주택도 세제혜택을 축소하겠다고 한다.아마 거주를 하지 않는 1주택자에 대해서는 장기간 보유하더라도 양도세 장기보유특별공제 혜택을 축소하거나 종부세 공제금액을 축소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 1주택자는 집을 팔까? 주식과 달리 집 특히 아파트는 한번 사기가 너무 어렵다. 종자돈도 많이 필요하고 대출도 받아야 하며 직장과 자녀 교육 등 한 가정의 모든 운명을 걸어야 하는 중대사인 집을 세제혜택이 축소된다고 보유세 부담이 늘어난다고 쉽게 팔지 못한다. 지금 현실은 토지거래허가로 전세를 끼고 살 수 없고, 대출한도를 줄여 25억원 넘어가는 아파트는 2억원만 대출이 나온다. 보유한 1주택을 팔고 다시 똑 같은 그 집을 살 수가 없는 실정이다. 은퇴를 하고 나이가 많아 집 팔고 고향으로 내려가거나 주택 다운사이징해서 남은 여생을 편하게 살 고 싶다는 실버 세대가 아니면 매물이 잘 나오지 않을 것이다.실버 세대도 어지간하면 팔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집 하나가 전 재산이나 다름이 없는데 자녀 생각도 해야 하고, 평균수명이 길어진 상황에서 서울의 똘똘한 집 한 채를 팔았다가 혹시나 말년에 고생하지 않을까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비 거주 1주택을 팔기 보다 본인이 거주하는 방법을 선택할 것이다. 당연히 세입자는 정부 정책으로 쫓겨나가는 신세가 된다. 집주인도 세입자도 누구 하나 잘못하지 않았다. 임광현 국세청장까지 장기보유특별공제가 똘똘한 한 채를 권유하고 있다며 제도를 손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2024년 양도세 신고 통계를 분석한 결과 5조320억원의 장특공제를 받았는데 서울이 4조5,000억원, 공제 혜택의 90%를 받았고 강남3구와 용산구가 3조5,000억원으로 78.6%를 차지했다. 장기보유특별공제를 도입한 취지는 단타(단기보유 매매)를 하지 말고 장기간 보유해서 주택시장을 안정시키려는 목적이다. 솔직히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할 만큼 매우 긴 시간이다. 30년을 보유한 대통령처럼 대부분 장기보유자들은 10년이 넘어도 계속 보유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데 정부가 장기보유를 부정하는 순간 이제 2년 보유, 2년 거주해서 12억원까지 양도세 비과세 받고 팔고 또 사서 2년 보유, 2년 거주해서 팔고 단타 거래가 성행할 것이다. 살 때 취득세 내고, 매년 재산세와 종합부동산세 내는데 양도세 혜택을 줄이면 장기 보유하는 것이 손해가 되는셈이다. 2013년 박근혜 정부시절 집값이 폭락하면서 경제가 침체되자 정부는 세제혜택을 줄 테니 제발 집 좀 사달라 해서 집을 사서 다주택자들이 늘었다. 2017년 문재인 정부에서는 세입자에게 임대료를 올리지 않는 조건으로 세제혜택을 준다며 주택임대사업자 제도를 장려했다. 그러다 집값이 오르자 다주택자를 악마화하고 양도세와 종합부동산세, 취득세까지 중과를 했으며 2020년에는 자신들이 만든 주택임대사업자 제도를 폐지했다. 장기보유특별공제 역시 10년 보유 80% 혜택을 주던 것이 과하다며 문재인 정부에서 10년 보유 40%+10년 거주 40%로 바꾸었습니다.그래서 국민들은 집을 여러 채 사지 않고 보유한 집을 줄여 1채 이른바 똘똘한 한 채로 갔다. 이재명 정부는 집값이 오르자 이제는 똘똘한 한 채가 또 문제라 한다. 거주하지 않는 집은 투기라는 것인데 그럼에도 집값이 오르면 나중에는 거주하는 1주택도 문제라며 세금을 올릴 기세다. 퇴임 후 국가가 사저도 주고 경호도 해주고 생활비도 주는 대통령도 손해보기 싫어 근저당을 설정해 주면서까지 집을 팔았는데 집 하나가 전 재산인 국민은 공정과 정의라는 잣대로 손해를 봐도 괜찮다는 것인가? 먹고 살기 힘든 국민들이 가진 소중한 집 한 채에 집값 못 잡은 실패의 책임을 넘기면 안된다. 김인만

[EE칼럼] 상용차 친환경 의무화 필요성: 지금 팔리는 트럭이 2040년의 배출이다

2035년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 논의에서 수송부문 이야기는 대체로 한 가지로 수렴한다. 전기차 보급률이다. 승용차를 몇 대 더 팔 것인가. 충전기를 몇 기 더 놓을 것인가 등이다. 물론 틀린 논의는 아니지만 필자가 보기엔 이거론 너무 부족하다. 감축은 대수가 아니라 주행거리가 결정한다. 사업용 대형화물차 한 대가 일 년에 달리는 거리는 승용차의 대충 잡아도 다섯 배에서 열 배에 이른다. 즉 트럭 한 대를 바꾸는 일이 승용차 수십 대를 바꾸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그래서 더욱이 감축 단가, 즉 온실가스 1톤을 줄이는 데 드는 돈으로 따지면 상용차(商用車) 전환만큼 효율적인 수단이 도로부문에 없다. 그런데도 정책 자원은 승용차에 쏠려 있다. 승용 전기차는 들어가는 정책 비용에 비해 효과도 미미하다. 행정집행의 자원 배분이 거꾸로 되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시간도 우리 편이 아니다. 상용차의 교체주기는 십 년에서 십오 년이다. 올해 출고된 디젤 트럭은 2040년까지 도로에 남는다. 다시 말해 지금 팔리는 트럭이 2040년의 배출이다. 2035년 목표를 이야기하면서 그때 도로를 채울 차량의 판매를 오늘 방치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래서 의무화가 필요하다. 시장에 맡기면 되지 않느냐는 반문이 나올 법하지만 맡길 수가 없다. 수송부문은 배출권거래제 밖에 있다. 탄소에 값이 붙지 않는다. 유류세가 있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유류세는 세수 확보를 목적으로 설계된 세금이다. 탄소가격 신호로서는 왜곡되어 있고, 그나마도 화물차에는 유가보조금이 붙어 상당 부분 상쇄된다. 게다가 화물 수송은 화주와 운송사와 차주로 비용과 편익의 주체가 갈라져 있다. 차량 구입비는 차주가 내고, 배출의 책임은 아무도 지지 않는다. 그동안의 처방은 보조금 일변도였다. 보조금은 나쁜 수단이 아니지만 예산의 제약을 받는다. 예산이 끊기면 전환도 멈춘다. 무엇보다 제조사에게 장기 신호를 주지 못한다. 몇 년 뒤에 무공해 트럭을 몇 대나 팔아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기업은 생산라인을 바꾸지 않는다. 수량을 정해 놓고 그 안에서 어떻게 달성할지를 시장에 맡기는 것, 그것이 의무화 제도다. 정부가 보조금이든 세금이든 인센티브를 가해봤자 여러 이해관계자들의 주머니를 거쳐 소비자 전가로 끝날 뿐이지 정작 큰 변화는 없다. 유럽연합은 2024년 대형차 이산화탄소 기준을 개정해 2030년까지 2019년 대비 45퍼센트, 2040년까지 90퍼센트를 줄이도록 했다. 도시버스는 2035년부터 신차 전량이 무배출이어야 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첨단청정트럭 규정은 2035년까지 대형 트럭 신차의 75퍼센트를 무공해차로 팔도록 했다. 최근 연방 차원의 제동으로 소송이 진행 중이지만, 제도의 방향 자체는 이미 국제 표준에 가깝다. 상용차 의무화는 더 이상 실험이 아니다. 우리만 논의를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뿐이다. 물론 남의 제도를 그대로 옮겨오면 곤란하다. 통상적인 처방은 제조사에게 판매 의무를 지우는 방식인데,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이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역내 시장이 커서 벤츠/볼보/다임러/스카니아/이베코도 도망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은 조건이 다르다. 국내 트랙터 시장의 68.7퍼센트가 수입 브랜드다. 그런데 현행 저공해자동차 보급목표제는 일정 “판매"규모 이상인 업체에만 적용된다. 이들은 각각 연 수백 대 규모라 어떤 기준선을 그어도 규제망 밖으로 빠진다. 이 상태로는 국내 제조사에만 의무를 가지게 되고 정작 수요는 규제 밖 수입 디젤로 옮겨간다. 배출은 그대로이고 국내 산업만 잃는다. 유럽에서 팔지 못하게 된 디젤 트럭의 배출구가 한국이 되고 있다. 기존 보급목표제처럼 공급자를 압박하는 방식은 성과 달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사실 열등하다. 수요층 타겟인 무공해차 전환 의무는 지금 극히 작은 비중을 차지하는 공공부문에만 걸려 있기에, 민간으로 넓히지 않는 한 이 제도는 흉내만 내는 수준이다. 시장은 언제나 수요가 공급을 끌어당길 때 가장 잘 작동했기에 정부가 공급을 밀어붙여 성공한 적은 별로 없다. 사 줄 사람이 정해지면 만들 사람은 알아서 나타나거늘, 항상 표를 의식해 순서를 거꾸로 놓았기에 우리는 늘 정부만 믿다 쪽박차는 사업자들을 수없이 보아 왔다. bienns@ekn.kr

[기자의 눈] 반도체로 쏠린 돈, 동전주는 기업만의 책임일까

상장폐지 제도는 경쟁력을 잃은 기업을 자본시장에서 내보내 시장 전체 신뢰도를 높이기 위한 장치다. 최근 시장에서는 제도의 취지와 어긋나는 듯한 장면이 나타나고 있다. 금융당국이 동전주 퇴출 등 상장폐지 요건을 강화한 가운데, 급격한 주가 변동이 생존 여부를 좌우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어서다. 시장 변동성까지 겹치며 '억울한 동전주'를 호소하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다. 현장에서는 이미 이 같은 문제의식이 터져나온다. 최근 한 세미나에서는 코스닥 상장 기업 관계자들이 “기업 기초체력(펀더멘털) 외에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와 같은 외부적 요인이 주가를 결정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도체 등 일부 업종으로 자금이 쏠리면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기업들은 경쟁력과 무관하게 주가가 하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업 자체의 문제보다 시장의 자금 흐름이 바뀌었다는 이유만으로 퇴출을 걱정해야 하는 현실을 호소한 셈이다. 물론 시장의 자금 이동이나 특정 투자 상품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투자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업종으로 자금을 옮길 자유가 있고, 레버리지 ETF 역시 다양한 투자 수단을 제공하는 순기능이 있다. 강화된 상장폐지 제도 역시 시장의 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장치다. 문제는 시장의 자금 쏠림과 강화된 상장폐지 제도가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맞물리고 있다는 점이다. 특정 업종이 수급 대부분을 가져가며 기업 경쟁력과 주가가 괴리되는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 주가는 기업 가치를 반영하는 중요한 잣대다. 그렇지만 언제나 기업의 본질적 경쟁력을 담아내는 것은 아니다. 특히 특정 업종과 상품의 영향력이 커지고 변동성이 확대되는 국면에서는 수급이 가격을 좌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러한 일시적 시장 환경까지 상장폐지 심사의 결과로 이어진다면, 자본시장은 경쟁력 있는 기업을 가려내는 기능보다 시장 변동성을 재생산하는 기능에 가까워질 수 있다. 상장폐지는 시장의 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한 제도이지 시장의 변동성을 기업에 전가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경쟁력을 잃은 기업은 시장에서 퇴출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시장 구조가 만들어낸 주가 하락까지 기업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다른 문제다. 시장은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제도의 목적은 변해서는 안 된다. 상장폐지가 기업의 펀더멘털이 아닌 일시적인 변동성에 좌우되는 순간, 투자자로부터 신뢰받는 시장을 만들겠다는 취지가 퇴색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김태환 기자 kth@ekn.kr

[이슈&인사이트] 정부가 안전문화 조성에 걸림돌이 되어서야

세계적인 안전학자 제임스 리즌은 안전문화 요소로 공정한 문화, 보고문화, 학습문화, 유연한 문화를 꼽았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피규제자의 안전문화 조성을 위해선 규제자의 안전문화 조성이 필수적이다."라고 하면서 기업의 안전문화 구축을 위해선 정부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우리 정부는 기업의 안전문화 조성에 올바른 역할을 하고 있을까. 리즌이 제시한 기준으로 볼 때 기대치와는 거리가 멀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공정한 문화를 위해선 허용할 수 있는 행동과 그렇지 않은 행동 간의 경계를 설정하고 구성원이 이를 명확히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경계가 불명확하거나 구성원에게 주지하지 않은 채 규칙을 지키지 않았다고 제재하는 건 불공정한 처사다. 그런데 산업안전관계법에선 주무부처조차도 답변하지 못할 정도로 의무주체 간의 역할과 책임이 착종되어 있고 예컨대 도급인(원청), 수급인(하청) 간] 모호한 부분이 많아 기업은 행동의 경계를 설정하기 매우 어려운 상태다.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귀책사유를 따지지 않고 처벌할 구실을 뭐라도 찾아 어떻게든 처벌하는 수사 관행이 고착화되어 있다. 이는 안전정보를 보고하는 문화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다. 기업에선 처벌의 빌미가 될 걸 우려해 자율적으로 문제를 찾으려 하지 않고 찾거나 알아도 보고·공유하려 하지 않는다. 진실이 덮일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특히 중대재해처벌법 이후 중대재해 원인을 기업 자체적으로 면밀히 분석·규명하고 그 결과를 공유하는 활동이 크게 위축됐다. 재해조사 위축은 재해로부터 학습하고 개선할 기회의 약화로 이어져 사회적으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처벌이 정의롭기 위해선 죄질과 책임에 비례해야 하는 것이 근대형법의 철칙이다. 중대재해 발생을 이유로 사고원인을 따지지 않고 강한 처벌을 당연시하는 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을지언정 공정한 문화에는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기업 전체가 경영책임자 처벌을 회피하고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데 여념이 없다. 처벌과 직결되지 않은 문제에 대해선 개선할 여유와 생각을 갖지 못한다. 법을 준수하고 있다는 증빙자료를 작성하는 일에 매몰돼 실질적이고 근본적인 개선은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다. 중대재해처벌법 전과 비교하여 안전 개선을 위한 학습 의지가 약화되고 안전정보의 보고와 공개에 대한 방어적 자세, 비밀주의가 부쩍 강화된 모습이다. 규제기관의 전문성이 낮아 안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항을 지적하거나 적발을 위한 적발을 하는 행태는 유연한 문화 조성에 큰 걸림돌이다. 기업은 안전 자체보다 적발을 피하는 데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이런 소모적 공방으론 기업의 안전역량 향상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처럼 우리나라 기업은 안전문화를 조성하기에 녹록지 않은 환경에 놓여 있다. 안전문화 수준을 4단계로 전제하고 평가할 때 초대기업조차 겨우 2단계와 3단계에 걸쳐 있는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 문제는 안전에 엄청난 자원을 투입하고도 안전문화 수준이 향상은커녕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되레 후퇴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 다른 영역에선 일류기업이 많이 발견되는데 유독 안전 영역에서만 일류기업이 보이지 않는 것이 과연 기업만의 탓일까. 안전이 법규제의 영향을 크게 받는 점을 고려할 때 정부의 제재 일변도의 거친 행정과 전문성 태부족에 많은 원인과 책임이 있다고 봐야 한다. 안전문화를 저해하는 법정책이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법정책에 일대 혁신이 없으면 앞으로도 우리나라에서 안전문화 우수기업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안전 선진국 정부처럼 우리 정부도 기업 안전문화 조성에 걸림돌이 아닌 마중물이 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bienns@ekn.kr

[EE칼럼] 메가프로젝트와 탄소중립 2.0, 지역발전의 새로운 모멘텀

최근 환경단체들이 이재명 정부의 3대 메가프로젝트를 향해 강한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개발 폭주를 멈춰라." 반도체와 피지컬 AI, AI 데이터센터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산업개발이 막대한 전력과 용수를 소비하고 환경과 사회적 숙의보다 경제성장을 앞세우고 있다는 주장이다. 귀 기울일 부분도 있다. 국가의 미래를 좌우할 대규모 산업정책일수록 충분한 정보 공개와 사회적 숙의가 필요하다. 정부가 기업들과 먼저 투자 방향을 정하고 국가 전략으로 발표한 뒤 지역사회와 국민이 논의에 참여하는 방식은 절차적 측면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국가가 방향을 정하고 기업이 투자하며 지역은 뒤따르는 과거 개발국가 방식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통용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환경단체가 무조건 개발을 하지 말자는 주장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번에도 대규모 개발을 추진하려면 재생에너지 중심의 에너지 공급체계를 갖추고 에너지 수요 자체를 줄여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문제는 그 조건이 현실의 산업과 에너지 시스템이 요구하는 속도와 규모를 실제로 감당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AI와 반도체는 세계 각국이 국가의 미래를 걸고 경쟁하는 산업이다. 재생에너지 확대라는 방향에는 동의하더라도 급증하는 전력수요를 필요한 시점에 안정적으로 공급하면서 산업의 시간표까지 맞출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대규모 첨단산업의 전력수요를 재생에너지 중심의 체계로 어떻게 안정적으로 충당할 것인지는 유럽에서도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다. 아직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에너지 시스템을 미래산업 추진의 선행조건으로 요구한다면 자칫 탄소중립이 산업전환을 이끄는 동력이 아니라 산업의 진입장벽으로 작동할 수도 있다. 환경운동이 기후위기와 탄소중립을 사회적 의제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탄소중립은 어느새 감축과 규제, 재생에너지 중심의 환경 의제로 인식돼 왔다. 유럽에서 형성된 에너지전환 모델을 우리가 따라가야 할 모범답안처럼 받아들이는 경향도 있었다. 하지만 제조업 비중이 높고 에너지 다소비 산업이 경제의 중요한 축인 대한민국은 산업경쟁력과 에너지 안보, 탄소감축을 함께 고려한 우리 여건에 맞는 전환의 로드맵을 설계해야 한다. 탄소중립은 완성된 정답을 따라가는 일이 아니라 기술과 시장의 변화에 맞춰 단계적으로 진화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정부의 메가프로젝트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 전혀 없던 사업을 새로 만든 것이라기보다 지역과 기업이 추진해 왔지만 전력·용수·인허가 등의 문제로 지지부진했던 사업에 국가가 실행력을 불어넣었다. AI와 반도체라는 미래산업을 지역발전의 새로운 모멘텀으로 연결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공장과 데이터센터를 지방에 유치하는 것만으로 균형발전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균형발전은 지방에 권한과 책임을 나누고, 지역이 자신의 자원과 강점을 바탕으로 스스로 먹고살 길을 설계할 수 있도록 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 시점에서 탄소중립 정책도 '탄소중립 2.0'으로 한 단계 진화해야 한다. 탄소중립 1.0이 감축목표와 규제에 무게중심을 두고 무엇을 줄일 것인가를 고민했다면, 탄소중립 2.0은 탄소를 줄이면서 무엇을 새롭게 만들고 어떤 산업을 성장시킬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 두 축은 미래산업과 지방분권이다. 탄소중립의 실제 실행 공간은 결국 지역이다. 에너지와 건물, 교통, 폐기물과 산업의 전환도 지역에서 일어난다. 기초지방정부까지 탄소중립 계획을 수립하는 만큼 이제 지방정부는 중앙정부의 감축목표를 이행하는 역할을 넘어 탄소중립을 자신의 경제발전 전략으로 활용해야 한다.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이 지역에 들어온다면 지방정부도 사업의 '지분'을 가져야 한다. 단순한 소유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업의 설계와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지역의 토지와 전력, 용수와 기반시설을 사용하는 만큼 성장의 이익을 지역과 공유하도록 협상할 권리다. 지역기업 참여, 지역인재 고용, 에너지산업 육성, 폐열 활용과 같은 조건도 지역이 함께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 미래산업을 지역에 가져다주는 것과 지역이 미래산업을 자신의 발전전략으로 선택하는 것은 다르다. 중앙정부는 큰 방향과 실행력을 제공하되 지역이 스스로 선택하고 계획할 수 있는 권한을 줘야 한다. 지방정부 역시 기업 유치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미래산업과 탄소중립을 연결해 지역의 새로운 성장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탄소중립은 환경단체의 전유물도 아니며, 기후환경 정책에 국한되어 다루어져서도 안 된다. 산업정책이고 에너지정책이며 지역발전 전략이다. 이제 얼마나 강하게 규제할 것인가를 넘어, 탄소중립이라는 거대한 변화 속에서 어떤 산업과 시장을 만들고 그 성장의 과실을 지역이 어떻게 공유할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지역이 성장하면서도 지구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설계하는 것, 그것이 탄소중립 2.0이다. bienns@ekn.kr

◇ 본사 ▲ 감사실장 이희재 ▲ 방사선환경처장 한승혁 ▲ 기획처장 안형준 ▲ 상생협력처장 이한용 ▲ 조직평가실장 강태윤 ▲ 인사처장 남영규 ▲ 조달처장 최훈 ▲ 홍보실장 이진 ▲ 안전경영단장 하경석 ▲ 원전통합경영실장 최준녕 ▲ 발전처장 김덕헌 ▲ 규제협력처장 양승태 ▲ 원전사후관리처장 김병직 ▲ 연료실장 정윤창 ▲ 엔지니어링처장 조정래 ▲ 설비개선처장 최진혁 ▲ 구조기술처장 송창국 ▲ 원전건설처장 전광옥 ▲ 원전건설기술처장 김장곤 ▲ 양수건설처장 서용관 ▲ 수력처장 김시영 ◇ 고리원자력본부 ▲ 대외협력처장 전혜수 ▲ 제1발전소장 최동철 ◇ 한빛원자력본부 ▲ 대외협력처장 박천중 ▲ 제1발전소장 황승호 ▲ 제2발전소장 박정서 ▲ 제3발전소장 정운영 ◇ 월성원자력본부 ▲ 제2발전소장 조철 ▲ 제3발전소장 박승후 ◇ 한울원자력본부 ▲ 대외협력처장 임형진 ▲ 제1발전소장 이창희 ▲ 신한울제1발전소장 민성목 ▲ 신한울제2발전소장 황교 ▲ 신한울제2건설소장 강휘 ◇ 새울원자력본부 ▲ 대외협력처장 이제호 ▲ 제2발전소장 김낙상 ▲ 제2건설소장 채명식 ◇ 한강수력본부 ▲ 본부장 맹승원 ◇ 산청양수발전소 ▲ 산청양수발전소장 진현태 ◇ 양양양수발전소 ▲ 양양양수발전소장 김철기 ◇ 청송양수발전소 ▲ 청송양수발전소장 안준연 ◇ 영동양수건설소 ▲ 영동양수건설소장 김선신 ◇ 홍천양수건설소 ▲ 홍천양수건설소장 김광섭 ◇ 중앙연구원 ▲ 중앙연구원장 이돈국 ◇ 인재개발원 ▲ 인재개발원장 윤승호 ◇ 체르나보다TRF건설소 ▲ 체르나보다TRF건설소장 손명호 윤병효 기자 chyybh@ekn.kr

[기자의 눈] 침묵을 입법하다

개정 정보통신망법이 시행된 지 보름 남짓이 지났다. 정부는 '허위조작정보 근절'이라고 말하고, 현장에선 이 법을 '입틀막법'이라고 부른다. 법 시행 이후 플랫폼과 언론계에서는 콘텐츠 차단과 소송 위험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잇따르고 있다. 개정법은 대규모 플랫폼에 불법·허위조작정보 신고를 접수하고 조치할 의무를 부과한다. 이에 따라 플랫폼은 삭제와 접근 차단뿐 아니라 노출 제한, 계정 정지, 수익화 제한 등 여러 조치를 선택할 수 있다. 사실관계가 법원에서 최종 확정되기 전에도 민간 사업자의 판단만으로 표현의 유통 범위가 크게 달라질 수 있는 구조다. 플랫폼 업계도 난색을 표한다. 현장의 한 플랫폼 관계자는 “우리가 법원도 아닌데 기준조차 애매해 판단할 권한도 명분도 없다"며 “어차피 다 KISO(한국인터넷자율정책기구)로 넘겨버린다"고 털어놓는다. 리스크를 피하려는 민간 기업이 일단 막고 보는 보수적 대응을 선택함에 따라, 공론장의 검증 기능과 시민의 알 권리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 언론이 느끼는 부담은 더 직접적이다. 공적 인물에 대한 의혹 보도는 취재 시점의 팩트를 기반으로 하더라도 향후 재판 과정에서 평가가 달라질 여지가 존재한다. 기자들 사이에서 “징벌적 손배 소송이 남발될 테니 당분간 몸을 사리라"는 경고가 나오는 이유도, 취재보다 분쟁 리스크를 먼저 계산해야 하는 구조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법 시행 첫날엔 '1호 차단' 사례로 방송인 김어준 씨가 지목되는 웃지 못할 장면도 연출됐다. 이동재 매일신문 객원편집위원의 신고 접수 이후 김 씨의 유튜브 영상이 국내에서 접속 차단 처리된 것이다. 민주 진영이 주도한 법의 첫 적용 대상이 자당의 대표적 스피커였고, 차단 기준 역시 외부에 확인되지 않으면서 시행 초기부터 적지 않은 논란이 이어졌다. 표현의 자유를 지키는 일은 허위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자기 교정 능력을 지키는 일이다. 미국 연방대법원 루이스 브랜다이스 대법관은 “허위에 대한 해답은 강요된 침묵이 아니라 더 많은 말(More speech)"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민간 플랫폼의 차단 절차로 표현을 통제하는 지금의 방식은, 공론장의 자율적 검증을 행정적 규제로 대체하려는 구조적 한계를 보여준다. 김나현 기자 knh@ekn.kr

[김한성의 AI시대] 더 큰 AI보다 더 나은 판단

김한성 투비유니콘 최고철학책임자(CPO) 지난 7월 14일, 인공지능 시장에서는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뉴스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미국의 데이터센터 개발·운영사들은 수백억 달러 규모의 지분 매각을 추진했다. 허깅페이스 통계에서는 가중치를 공개한 중국계 AI 모델, 이른바 오픈웨이트 모델이 올봄 다운로드의 41%를 차지했다. 반면 IBM은 이례적인 실적 경고를 내놓은 뒤 주가가 25% 급락했다. 한쪽에서는 AI 인프라를 향한 투자가 이어지고, 다른 쪽에서는 비용이 낮고 통제하기 쉬운 모델이 확산되는 동안 전통적인 기업용 기술의 강자는 시장의 혹독한 질문을 받았다. 세 뉴스가 가리키는 방향은 하나다. AI 경쟁의 질문이 바뀌고 있다. 지금까지는 “얼마나 크고 똑똑한 모델을 만들 수 있는가"를 물었다. 이제는 “어떤 문제에 어떤 모델을 적용해, 얼마의 비용으로 어떤 성과를 낼 것인가"를 묻는다. 최첨단 모델은 고난도 업무에 쓰이는 프리미엄 수단으로 남겠지만, 일상적인 서비스는 더 작고 저렴하며 맞춤화하기 쉬운 모델로 이동할 가능성이 크다. 기업이 선택해야 할 것은 가장 뛰어난 모델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와 비용 구조에 가장 적합한 조합이다. 양자컴퓨터 경쟁조차 개별 큐비트 수보다 반도체·광통신·냉각·제어 소프트웨어를 하나로 묶는 시스템 엔지니어링의 문제로 옮겨가고 있다. 여기에 더 근본적인 경고도 나왔다. 케임브리지대와 캘리포니아대 샌타바버라 연구진은 특정 동적 시스템에서는 데이터가 무한히 주어져도 어떤 알고리즘도 안정적으로 학습할 수 없는 문제가 있음을 보였다. AI가 무용하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실패를 데이터 부족이나 모델 규모의 문제로 돌려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풀 수 있는 문제라도 과도한 메모리와 전력, 냉각을 요구한다면 비용과 사회적 부담을 다시 계산해야 한다.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이 곧 실제로 해야 한다는 결론은 아니다. 이 대목에서 19세기 철학자 찰스 샌더스 퍼스의 통찰은 놀랍도록 현재적이다. 퍼스에게 의미는 말 속에 고정된 내용이 아니라, 그 말이 실제 경험과 행동에서 만들어내는 차이를 통해 분명해진다. 탐구는 이미 아는 답에서가 아니라 예상과 현실이 어긋나는 '놀라움'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그 어긋남을 설명할 가설을 세우고, 예상되는 결과를 추론한 뒤, 현실과 다시 대조해 믿음을 고친다. 이 관점에서 AI의 답은 완성된 지식이 아니라 하나의 '해석 후보'다. 생성형 AI는 그럴듯한 문장과 관계를 풍부하게 만들지만, 현실은 그 문장에 저항한다. 따라서 좋은 AI는 오류가 전혀 없는 AI가 아니다. 출처와 현장 데이터, 실행 결과와 반례에 연결되고, 인간의 비판을 받아 판단을 고칠 수 있는 AI다. 검증할 수 없는 확신보다 수정할 수 있는 추론이 더 높은 지능이다. 기업과 공공기관은 AI 도입 전에 세 가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첫째, 이 문제는 AI가 학습하고 풀 수 있는가. 둘째, 기대 성과가 비용과 위험을 넘어서는가. 셋째, 그 결과는 어떤 업무 습관과 제도를 남기는가. 그다음에야 어떤 모델을 쓸지 결정해야 한다. 화려한 성능 시연보다 시간 단축, 오류 감소, 위험 통제와 서비스 품질을 측정해야 한다. 중단 조건과 인간의 판단 권한을 정하고, 검증된 결과를 표준 절차와 정책, 조직의 기억으로 남겨야 한다. 성과를 내지 못한 시도도 원인을 기록해야 같은 오류에 다시 비용을 쓰지 않는다. 이때 필요한 것은 단순한 모델 연결기가 아니라 '판단 체계'다. 사실과 가설을 구분하고, AI가 생성할 것과 도구가 계산할 것, 사람이 결정할 것을 나누는 운영 구조다. 개인의 학습도 마찬가지다. AI가 핵심을 요약해 주면 낯선 분야에 빠르게 들어갈 수 있지만, 요약은 이해의 입구일 뿐이다. 반례를 찾고 실제 문제에 적용하며 자신의 질문을 고칠 때 비로소 지식은 판단 능력이 된다. 한국의 기회도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 최고 모델 순위와 데이터센터 규모만 좇기보다 오픈웨이트 모델과 최첨단 모델, 현장 데이터와 규칙, 인간의 판단과 감사 기록을 연결하는 '판단 인프라'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모델이 더 우수한지를 넘어, 어떤 조건에서 누구의 판단을 얼마나 개선했는지를 축적하는 국가적 학습 체계가 필요하다. 이는 기술 경쟁에서 물러나는 길이 아니라 기술의 가능성을 실제 가치로 전환하는 길이다. AI 시대의 수준은 얼마나 큰 모델을 가졌는가보다, 그 모델이 틀렸을 때 얼마나 빨리 현실로 돌아와 판단과 제도를 고칠 수 있는가에서 드러날 것이다. AI의 다음 경쟁은 더 많은 답을 생산하는 경쟁이 아니다. 현실의 저항 앞에서 답을 수정하고, 그 경험을 더 나은 습관과 제도로 축적하는 능력의 경쟁이다. bienns@ekn.kr

[EE칼럼] ‘원가’ 빼고 전기요금 이야기하는 정부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3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물가 부담이나 국민 소득 문제가 없다면 가정용 전기요금을 조정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비록 '인상'이 아니라 '조정'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이 발언은 주목할 만했다. 우리 사회에는 '주택용(가정용) 전기요금이 산업용보다 비싸고, 그 차액으로 산업용을 보조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런데 대통령이 주재한 공개석상에서 산업용 평균 판매단가가 주택용보다 높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한 것이다. 그러나 이날 대통령과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의 문답에서 나온 장관의 설명은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김 장관은 “보통은 산업용 전기요금이 더 싸고 주택용 전기요금이 비싼 게 세계적 추세"라며 “기업들은 국제 경쟁을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산업용 평균 판매단가는 kWh당 180원, 주택용은 150~160원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판매단가는 맞지만 핵심을 빠뜨렸다. 산업용 요금이 주택용보다 낮은 국제적 현상은 기업 경쟁력 지원 정책의 결과가 아니라 고압 수전, 높은 부하율, 상대적으로 적은 배전망 이용 등 용도별 공급원가의 차이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장관의 설명만 들으면 각국이 기업 경쟁력을 위해 산업용 요금을 의도적으로 낮추고 그 부담을 일반 국민에 떠넘기는 것처럼 받아들일 수 있다. 요금을 제대로 비교하려면 표면적인 판매단가가 아니라 용도별 공급원가와 '원가회수율'을 함께 봐야 한다. 원가회수율은 용도별 평균 판매가격을 해당 용도에 전기를 공급하는 데 들어간 원가로 나눈 비율이다. 산업용은 대체로 주택용보다 공급원가가 낮다. 왜 그런가. 전기는 어떤 상황에서도 365일 24시간 안정적으로 공급돼야 한다. 전력 당국이 가장 민감하게 관리하는 것이 피크(Peak) 수요다. 연중 최대 수요에 대비해 발전소와 송배전망을 갖춰야 하므로 그만큼 비용이 든다. 주택용은 계절과 시간대에 따른 수요 변동이 크다. 반면 산업용은 업종별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부하율이 높고 수요 패턴도 상대적으로 일정하다. 따라서 주택용에는 피크 수요 대비 설비 비용이 더 많이 배분될 수 있다. 또 대규모 산업용 고객은 고압 또는 초고압으로 수전해 배전 단계가 짧고 전력 손실이 적다. 소수의 대량 고객이어서 관리비도 낮다. 반면 주택용은 저압 배전망을 광범위하게 이용하고 소규모 고객이 분산돼 고객당 설비·관리 비용이 높다. 전기요금은 원가주의, 공평주의, 공정보수주의라는 세 원칙에 따라 결정돼야 한다. 원가주의는 공급에 든 비용을 요금에 반영하는 것이고, 공평주의는 특정 집단의 지원 비용을 다른 소비자에게 부당하게 떠넘기지 않는 것이다. 공정보수주의는 전기사업자가 설비 유지와 투자에 필요한 적정 보수를 확보하도록 하는 원칙이다. 문제는 세 원칙 모두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원가주의'는 물가 관리라는 명분 앞에서 번번이 후퇴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분쟁으로 에너지 가격이 급등했지만 요금에 제때 반영하지 못했다. 그 결과 한전은 대규모 적자가 발생했고 전력망 투자 여력도 약화됐다. '공평주의'도 무너졌다. 원가 이하 요금을 적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부 특례요금까지 시행되고 있다. 한전 자료에 따르면 그 규모가 연간 1조원에 달한다. 복지와 취약산업 지원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비용은 전기요금이 아니라 정부 예산으로 투명하게 집행해야 한다. '공정보수주의'도 작동하지 않았다. 한전은 흑자로 전환했지만 부채는 여전히 206조원 안팎이다. 국가재정전략회의는 사전에 의제와 자료가 준비되는 자리다. 그런 회의에서 전기요금을 담당하는 장관이 평균 판매단가만 말하고 공급원가와 원가회수율을 짚고 넘어가지 않은 것은 아쉽다. 산업용 요금을 무조건 내리자는 말이 아니다. 정부는 2013년부터 전기 용도별 원가회수율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산업용과 주택용 전기가 원가보다 비싼지 싼지도 공개하지 않은 채 정치적 필요에 따라 특정 용도의 요금만 올리고 내리는 관행을 끝내자는 것이다. 지금 정부는 호남권 반도체 산단을 포함한 반도체·AI 데이터센터·피지컬 AI의 3대 메가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막대한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려면 전력망과 전원 투자가 불가피하다. 국민이 전기요금의 원가와 부담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면 필요한 투자도 합리적인 요금 개편도 어렵다. 장관의 정교하고 책임 있는 설명이 필요한 이유다. bienns@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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