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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수 기자

안녕하세요 에너지경제 신문 강찬수 기자 입니다.
  • 기후에너지부
  • kcs25@ekn.kr
“여름철 월평균 기온 1℃ 상승하면 청년 자살률 2.97% 증가”

기후변화로 인한 폭염이 이제는 열사병이나 심혈관 질환을 넘어 청년들의 정신 건강까지 위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여름철 월평균 기온이 평년보다 1℃ 높아질 경우 15~24세 청년의 자살률이 약 3% 증가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연구진은 폭염이 뇌 기능과 수면, 사회적 환경을 동시에 악화시키는 '생물사회적(biosocial) 메커니즘'을 통해 청년층의 자살 위험을 높인다고 분석했다. 미국 텍사스테크대학교 보건과학센터와 브라운대학교 등의 연구진은 이같은 연구 결과를 지난달 정신의학 분야의 권위 있는 학술지 '미국 정신의학 저널(American Journal of Psychiatry)'에 논문으로 발표했다. 이번 연구는 기후변화가 정신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연구 가운데 청소년과 청년층을 가장 집중적으로 분석한 사례로 평가된다. 연구진은 1980~2004년 미국 본토 48개 주와 워싱턴 D.C.를 대상으로 카운티별 월평균 기온과 자살 자료를 결합해 분석했다. 기온은 미국 오리건주립대 PRISM 기후자료를, 자살 통계는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와 인구조사국 자료를 활용했다. 분석 대상은 5~24세 청소년과 청년층으로 모두 9만7401건의 자살 사례가 포함됐다. 단순히 기온과 자살 건수를 비교한 것이 아니라 지역 특성, 연도별 변화, 강수량, 계절 효과 등을 통제하는 '고정효과 회귀모형'을 적용해 기온 변화가 자살률에 미치는 영향을 추정했다. ◇5~24세 자살 위험 여름철에 집중돼 연구 결과는 예상보다 훨씬 뚜렷했다. 연간 전체로 보면 월평균 기온이 1℃ 상승할 때 5~24세 자살률은 평균 0.75% 증가했다. 그러나 계절별로 분석하면 위험은 여름에 집중됐다. 연구에서 말하는 '1℃ 상승'은 하루 최고기온이 아니라 여름철(7~9월) 월평균 기온이 평년보다 1℃ 높은 상태를 의미한다. 이 경우 5~24세 전체 자살률은 2.68% 증가했고, 특히 15~24세에서는 2.97% 증가해 모든 연령 가운데 가장 높은 민감도를 보였다. 연구진은 여름철 기온 상승이 미국 전체 15~24세 인구를 기준으로 매달 약 12명의 추가 자살과 관련될 것으로 추정했다. 여성의 경우 자살률 자체가 남성보다 높지는 않았지만, 기온 상승에 따른 증가 폭이 더 크게 나타났다. 여름철 월평균 기온이 1℃ 상승하면 여성은 5.20%, 남성은 2.37% 증가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연구진은 여성들이 빈곤이나 주거 불안정을 겪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고, 냉방시설 접근성이 낮거나 가족 돌봄 부담으로 폭염을 피하기 어려운 사회경제적 요인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농촌 지역도 도시보다 기온 상승에 더 민감했다. 야외 활동과 농업 노동 시간이 길고 냉방시설 접근성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청년층, 생물사회학적으로 더 취약해 연구진은 청년층의 높은 위험을 단순히 “더위를 많이 타기 때문"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핵심은 '생물사회적' 취약성이다. 생물학적 취약성과 사회적 취약성이 동시에 작용한다는 의미다. 연구진은 이러한 사회적 취약성이 생물학적 취약성과 결합하면서 위험을 더욱 증폭시킨다고 설명했다. 청년층이 취약한 것은 첫째, 체온조절 능력이 아직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청소년은 성인보다 체중 대비 체표면적이 넓어 외부 열을 더 많이 흡수한다. 반면 땀을 통한 냉각 능력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여름철 고온에 적응하는 '열 순응(heat acclimatization)' 능력도 성인보다 낮아 같은 폭염에서도 더 큰 생리적 스트레스를 받는다. 둘째, 폭염은 뇌의 감정조절 회로를 흔든다. 연구진은 기존 신경과학 연구를 근거로, 고온에 노출되면 뇌에서 우선순위 결정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는 '살리언스 네트워크(salience network)'와 자기 성찰과 감정 처리에 간여하는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의 기능적 연결성을 감소시킨다고 설명했다. 이들 네트워크의 연결성이 떨어지면 우울감과 절망감, 충동성이 증가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여기에 세로토닌 신호 전달에도 변화가 생기면서 감정 조절 능력이 더욱 약해질 수 있다. 결국 폭염은 단순한 불쾌감을 넘어 뇌의 정서 조절 시스템 자체를 흔드는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셋째, 열대야가 수면을 무너뜨린다. 폭염은 수면에도 큰 영향을 준다. 더운 밤에는 깊은 잠을 자기 어려워지고, 반복적인 각성과 수면 부족이 이어진다. 연구진은 기존 연구를 인용해 불면증을 겪는 청소년의 66%가 우울증을 경험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밤에 잠들지 못하고 깨어 있는 '야간 각성(nighttime wakefulness)' 상태에서는 자살 위험이 하루 평균보다 약 5배 높다는 연구 결과도 소개했다. 넷째, 청년은 환경을 스스로 바꾸기 어렵다. 청소년들은 냉방이 충분하지 않은 학교에서 생활하고, 운동부 활동이나 야외 체육수업, 아르바이트 등으로 폭염에 장시간 노출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스스로 환경을 바꾸거나 작업을 중단할 권한은 제한적이다. ◇기존 연구와 무엇이 달랐나 사실 기온과 자살의 관계는 이번에 처음 밝혀진 것은 아니다. 지난 2018년 미국 스탠퍼드대학교의 마셜 버크 교수 연구팀은 '네이처 기후 변화 (Nature Climate Change)' 저널에 발표한 연구에서 미국과 멕시코 자료를 분석해 월평균 기온이 1℃ 상승하면 미국 전체 자살률이 약 0.7% 증가한다는 사실을 처음 대규모로 입증했다. 이 연구는 기후변화가 정신 건강에도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세계적으로 알린 대표적인 연구로 평가받는다. 이후 일본·호주·한국 등에서도 폭염이 우울증·불안장애·자살충동·정신질환 응급실 방문 증가 등과 관련이 있다는 연구가 이어졌다. 2019년 '환경 보건 전망 (Environmental Health Perspectives)' 저널에 발표된 논문에서는 한국을 포함한 12개국 341개 지역, 모두 132만148건의 자살 사례를 분석한 결과, 기온이 높아질수록 자살 위험도 함께 증가하는 사실을 확인했다. 특히 한국·일본·대만 등 동북아시아 국가에서 기온의 영향이 서구 국가보다 더 뚜렷하게 나타났다. 지난해에는 부산대 연구팀이 '플로스원(PLoS ONE)'에 발표한 연구에서 2015~2019년 국내 자살 사망자 6만5645명을 분석, 기온이 높을수록 자살 위험이 증가했다고 보고했다. 위험 정도는 지역 특성에 따라 달랐는데, 대도시와 농촌 지역은 중소도시보다 폭염의 영향이 더 크게 나타났다. 또 2023년 '랜싯 지구 보건(Lancet Planetary Health)'에 발표된 메타분석은 세계 각국의 연구를 종합해 기온 상승이 정신질환과 자살 위험을 높인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대부분의 연구는 전체 인구를 대상으로 했고, 청소년과 청년만을 집중 분석한 연구는 거의 없었다. 이번 논문은 청소년과 청년층만을 대상으로 25년간의 자료를 분석해 여름철이 가장 위험한 시기이며, 특히 15~24세가 폭염에 가장 취약한 연령층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폭염 대응은 정신건강 정책이어야" 연구진은 기후위기 시대의 폭염 대응은 더 이상 온열질환 예방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청년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냉방시설을 확충하고, 학교와 사업장의 폭염 안전기준을 강화해야 하며, 도시 녹지 확대를 통해 열섬현상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폭염 예보가 발령되는 기간에는 정신건강 상담과 위기 모니터링을 강화하는 등 기후를 고려한 정신건강 정책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연구진은 “기후변화가 계속되는 시대에는 폭염을 단순한 기상재난이 아니라 청년 정신건강을 위협하는 사회적 위험요인으로 인식해야 한다"며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대응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반도체 물 공급 호언장담한 정부… 정작 ‘농업용수’ 데이터는 깜깜이[환경포커스]

최근 정부가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을 추진하자 일각에서는 물 부족 문제를 들어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이재명 대통령과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하루 100만 톤 이상의 용수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고 반박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지난달 30일 기후부에서 반도체 관련 공장에 필요한 하루 65만톤의 물을 어떻게 공급할 것인지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하면서 물 부족에 대한 우려는 잦아들었다. 하지만 정작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가 내놓는 수자원 통계와 물 수급 전망이 불과 몇 년 사이 크게 달라지면서 국가 물관리의 기초 데이터 자체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수치 변화의 배경으로 농업용수 등 실제 물 사용량조차 정확히 계측하지 못하는 국가 수자원 통계 체계를 지목한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수자원하천연구본부의 김원 선임연구위원은 “우리나라는 강수량에 따른 전체 수자원 총량은 비교적 잘 파악하고 있지만, 실제 얼마나 물을 사용하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불과 몇 년 사이 '2700톤'에서 '36만8000톤 부족'으로 정부의 물 수요-공급 전망은 시기마다 큰 폭으로 달라졌다. 지난 2016년에 수립된 국토교통부 수자원장기종합계획(2001~2020)의 3차 수정계획에서는 과거 최대 가뭄 상황을 적용하더라도 영산강·섬진강 권역의 생활·공업용수 부족량은 연간 약 100만 톤 수준에 불과하다고 분석했다. 365일로 나누면 하루 2700톤 수준이다. 특히 영산강 권역은 물 부족이 발생하지 않는 것으로 전망했다. 2022년 12월 한국수자원학회가 영산강·섬진강 유역관리위원회에 제출한 연구보고서에서는 같은 권역의 물 부족량이 과거 최대가뭄 기준으로 하루 1만2822톤, 연간으로는 400만톤 안팎에 이를 것으로 제시됐다. 6년 사이에 부족량이 4배로 늘어난 것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불과 4개월 뒤인 2023년 4월 환경부와 국가물관리위원회는 영산강과 섬진강의 장래 물 부족량이 과거 최대 가뭄 기준으로 하루 36만8000톤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을 발표했다. 국가물관리위원회는 이를 근거로 하루 61만톤 규모의 신규 용수 확보 대책을 발표했다. 같은 영산강·섬진강 권역을 대상으로 과거 최대 가뭄을 기준으로 산정했음에도 물 부족 규모는 불과 4개월 만에 30배 가까이 늘어났다. 정부는 이러한 차이가 발생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있다. ◇이번에는 “하루 100만 톤 공급 가능" 2026년 6월 정부는 다시 새로운 숫자를 내놓았다. 영산강, 섬진강 유역의 수자원이 하루 100만톤 이상의 여유가 있어서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에 필요한 용수를 공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후부는 동복댐·주암댐·장흥댐 등의 공급 여유분 20만톤, 동복댐의 댐 증고로 추가로 확보할 수 있는 25만톤, 농업용수와 발전용수 전환 31만톤, 하수처리수 재이용 30만톤 등을 합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를 모두 합하면 하루 100만톤을 웃도는 공급 여력이 산출된다. 이번에 제시한 공급 여력이 2023년 당시에도 활용 가능한 물량이었는지, 아니면 이후 새롭게 확보된(혹은 파악된) 물량인지 정부의 설명이 필요하다. 2023년 당시 환경부는 과거 최대 가뭄을 지나서 향후 기후변화까지 고려했을 때 수자원이 하루 57만톤이 부족해진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61만톤을 추가 개발하는 대책을 세웠다. 이번에 발표한 자료로는 공급 여유분 20만톤과 농업용수와 발전용수 전환 31만톤만 더해도 51만톤을 곧바로 확보할 수 있는 양이다. 동복댐 증고와 하수 재이용 등은 신규 사업인 만큼 제외하더라도 그렇다. 일각에서는 물 절약이나 수요 관리까지 함께 고려한다면 2023년에 61만톤 규모의 추가 개발 계획을 수립할 필요가 있었는지 설명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얼마나 공급 가능한지" 정부도 답하지 못했다 실제 2023년 당시 가뭄 대책의 타당성을 취재하는 과정에서도 이러한 한계는 확인됐다. 당시 환경부와 한국수자원공사에 영산강·섬진강 권역의 총 공급 가능 용수량, 실제 공급량, 여유량 등을 문의했지만 어느 기관도 명확한 수치를 제시하지 못했다. 서로 담당 기관을 지목하며 답변을 미루는 경우도 있었다. 가뭄 대책을 최종 심의한 국가물관리위원회 역시 환경부가 제출한 수치를 중심으로 심의·의결했으며, 세부 산정 과정에 대한 공개 검증은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결국 국가 물관리 정책의 출발점이 되는 기본 데이터에 대해서조차 정부 내부에서 충분한 검증과 공유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농업용수부터 제대로 모른다" 전문가들은 문제의 근본 원인을 농업용수 통계의 부실에서 찾는다. 김원 박사는 “전체 물 사용량의 약 3분의 2를 차지하는 농업용수는 계량 체계가 충분히 갖춰져 있지 않다"고 말한다. 현재 상당수 농업용수는 양수장 가동시간이나 전력 사용량 등을 이용해 사용량을 추정하는 방식이 활용되고 있어 실제 사용량과 차이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허가된 취수량 대비 실제 사용량이 30~40% 수준에 그치는 사례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23년 4월 국회에서 열린 '영산강·섬진강 유역 중·장기 가뭄대책 정책 토론회'에서 농림축산식품부 관계자는 “2030년 기준으로 영산강·섬진강 유역 농업용수 수요는 연간 19억4000만톤이고, 공급량은 17억8100만톤이어서 1억5900만톤이 부족하다"고 밝히기도 했다. 결국 물이 부족한 것인지, 남는 것인지조차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수자원 수급 전망이 작성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필요한 것은 신뢰할 수 있는 통계 반도체 클러스터의 용수 공급 여부는 앞으로도 추가적인 취수원 확보와 재이용 확대 등을 통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 수자원 통계의 신뢰성이다. 정부 발표가 몇 년 사이 크게 달라지고, 그 산정 근거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면 산업계는 물론 국민도 정부의 물관리 정책을 신뢰하기 어렵다. 수자원 정책은 댐 건설 여부나 산업 입지 결정, 기후변화 적응 전략까지 좌우하는 국가 기반 정책이다. 그 출발점은 정확한 계측과 투명한 데이터여야 한다. 댐을 더 지을지, 재이용수를 늘릴지, 산업단지를 조성할지는 모두 그 다음 문제다. 국가 물 정책의 출발점은 새로운 시설이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다. 반도체 클러스터를 둘러싼 논란이 던지는 진짜 질문은 “호남에 물이 충분한가"가 아니다. 정부는 우리나라의 물이 얼마나 있고, 얼마나 사용되고 있으며, 얼마나 더 공급할 수 있는지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라는 점이다. 이 질문에 명확히 답하지 못한다면, 댐 건설을 포함한 어떤 수자원 정책도 국민적 신뢰를 얻기 어려울 것이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기온 계속 오르면…말라리아 모기 줄고 일본뇌염 모기는 늘어나”

기후변화로 기온이 오르면 말라리아도 함께 늘어날 것이라는 통념과 달리, 한반도에서는 오히려 말라리아를 옮기는 모기가 크게 줄어들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대신 일본뇌염과 뎅기열, 지카바이러스 등을 매개하는 모기는 빠르게 북상하면서 모기가 옮기는 감염병 자체가 바뀔 가능성이 제기됐다. 류지훈 경북대 생명과학부 BK21 FOUR 창의바이오연구단 연구원(농림축산검역본부 소속)과 최광식 경북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이러한 내용을 담은 논문 '기후변화 시나리오에 따른 대한민국 18종 모기의 미래 분포'를 국제학술지 '기생충과 매개체 (Parasites & Vectors)'에 발표했다. 연구진은 국내에서 의학적으로 중요한 모기 18종에 대해 모두 1969개의 출현 기록을 수집한 뒤, 종분포모델(MaxEnt)을 이용해 2030년대, 2050년대, 2070년대의 서식지 변화를 예측했다. 특히 기후뿐 아니라 지형, 토지피복까지 함께 고려해 미래의 모기 분포를 분석한 것이 특징이다. ◇기온보다 중요한 것은 '물과 지형'이었다 분석 결과는 기존의 상식을 뒤집었다. 모기의 분포를 가장 크게 결정하는 것은 기온이나 강수량보다 지형습윤지수(TWI)였다. TWI는 빗물이 얼마나 잘 모이고 오래 머무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다. 여기에 고도와 토지피복 역시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결국 모기가 살기 위해서는 단순히 따뜻한 날씨보다 물이 고이기 쉬운 지형, 논과 습지, 숲과 도시 녹지 같은 실제 서식 환경이 더욱 중요하다는 의미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결과는 말라리아 매개 모기의 미래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삼일열 말라리아를 매개하는 주요 모기는 중국얼룩날개모기(Anopheles sinensis), 벨렌라에얼룩날개모기(Anopheles belenrae), 클라이니얼룩날개모기(Anopheles kleini), 레스테리얼룩날개모기(Anopheles lesteri), 풀루스얼룩날개모기(Anopheles pullus) 등 얼룩날개모기류(Anopheles hyrcanus group)이다. ◇국내 말라리아 모기, 기후변화에 가장 취약 연구진은 말라리아를 매개하는 이들 얼룩날개모기류 5종을 기후변화에 매우 취약한 종으로 평가했다. 고탄소 배출 시나리오(SSP5-8.5)에서는 2070년대 An. pullus와 An. belenrae의 적합 서식지가 사실상 100% 사라질 것으로 예측됐다. 국내에서 가장 흔한 말라리아 매개종인 An. sinensis 역시 적합 서식지가 약 80%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얼핏 이해하기 어려운 결과다. 기온이 올라가면 모기가 더 많아질 것 같지만, 이들 모기는 오히려 더위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얼룩날개모기류는 북위 37도 이상을 선호하는 대표적인 '북부 선호형' 모기로, 현재 기후에서도 생리적으로 가장 적합한 온도 범위에 가까운 환경에서 살아간다. 앞으로 기온이 4~5℃ 정도 더 오르면 생존과 번식에 적합한 온도 범위를 벗어나면서 서식지가 급격히 축소될 것으로 연구진은 분석했다. 이는 국내 말라리아의 특성과도 연결된다.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말라리아는 대부분 삼일열 말라리아(원충 학명은 Plasmodium vivax)다. 흔히 아프리카에서 치명적인 사망을 일으키는 열대열 말라리아(원충은 Plasmodium falciparum)와는 전혀 다른 질병이다. 병원체가 다를 뿐 아니라 이를 옮기는 모기 역시 다르다. ◇휴전선 말라리아는 '열대 말라리아'가 아니다 국내 삼일열 말라리아는 얼룩날개모기류가 매개하지만, 열대 말라리아는 주로 아프리카의 감비아얼룩날개모기(Anopheles gambiae)와 같은 다른 얼룩날개모기가 전파한다. 따라서 국내 말라리아 매개 모기가 감소한다고 해서 열대 말라리아 모기가 그 자리를 자동으로 대신하는 것은 아니다. 1993년 이후 국내 말라리아 환자가 경기 북부와 강원 북부, 휴전선(DMZ) 인근에 집중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들 얼룩날개모기는 원래 서늘한 북부 지방을 선호하는 생태적 특성을 지녔다. 여기에 군사적 특성 때문에 DMZ 일대는 광범위한 방역이 쉽지 않았고, 북한과 생태계가 사실상 연결돼 있어 모기 개체군이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그 결과 삼일열 말라리아도 휴전선을 중심으로 발생하는 독특한 양상을 보였다. 일각에서는 기후변화가 계속되면 열대 말라리아가 국내에 퍼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하지만 이번 연구는 이를 뒷받침하지 않는다. 연구진은 국내 토착 말라리아 매개 모기가 줄어드는 것으로 분석했을 뿐, 감비아얼룩날개모기와 같은 열대 말라리아 매개종이 한반도에 정착할 것으로 예측하지 않았다. 새로운 모기가 정착하려면 기온뿐 아니라 월동 능력, 번식 환경, 먹이, 생태계 경쟁, 해외 유입 등 여러 조건이 동시에 충족돼야 하기 때문이다. ◇일본뇌염·뎅기열 모기는 오히려 북상한다 반대로 크게 늘어나는 모기도 있다. 일본뇌염의 주요 매개체인 작은빨간집모기(Culex tritaeniorhynchus)는 현재 한반도 적합 서식지가 국토의 약 15% 수준이지만, 2070년대에는 약 50%까지 확대될 것으로 예측됐다. 증가율로는 236.5%에 달한다. 논을 주요 번식지로 하는 이 모기는 기온 상승과 함께 북쪽 지역까지 서식지를 넓힐 가능성이 크다. 뎅기열과 지카바이러스, 치쿤구니야열 등을 옮기는 흰줄숲모기(Aedes albopictus)도 적합 서식지가 약 183% 확대될 것으로 분석됐다. 연구진은 이러한 북상 현상이 남한에만 그치지 않고 북한 지역까지 이어질 가능성도 시사했다. 연구진은 “기후변화 시대에는 기온만으로 감염병 위험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며 “기후와 함께 지형, 토지 이용, 습지 분포 등을 함께 고려한 적응형 감시체계와 방역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번 연구는 기후변화가 한반도의 감염병 지도를 근본적으로 다시 그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제주·남부지방, 30일 밤 장마 시작…다음 주 전국 확대 전망

북태평양고기압이 세력을 확장하고 정체전선이 북상하면서 제주도와 남부지방이 지난달 30일 밤부터 올해 장마에 접어들었다. 이번 장마는 평년보다 다소 늦게 시작됐지만, 초반부터 제주도와 전남 해안을 중심으로 강한 비를 뿌리며 곧장 '우기'로 접어드는 상황이다. ◇제주·남해안 중심으로 강한 비 기상청에 따르면 지난달 30일 늦은 밤부터 시작된 비로 1일 오전 현재 제주도와 일부 전남 해안에는 호우특보가 발효 중이다. 제주도 산지에는 시간당 30~50㎜의 매우 강한 비가 내렸고, 한라산 진달래밭의 누적 강수량은 155.5㎜를 기록했다. 전남 신안 가거도와 진도 서거차도 등에도 70~90㎜ 이상의 비가 내리는 등 제주와 남해안을 중심으로 많은 강수량이 관측됐다. 1일 낮에는 충청권 남부에서, 저녁에는 전라권과 경북권 남부, 경남권에서, 밤에는 제주도에 비가 내릴 것으로 기상청은 예보했다. 예상 강수량은 △대전·세종·충남남부·충북남부 5㎜ 미만 △ 전남 남부: 20~60mm(많은 곳: 전남 남부서해안, 남해안 80㎜ 이상) △광주전남북부 5~40㎜ △전북 남부 5~20㎜ △전북 북부 5㎜ 안팎 △부산.경남 남해안 20~60㎜ △울산·경남내륙 5~30㎜ △대구·경북남부 5~10㎜ △제주도 30~80㎜(많은 곳 산지 120㎜ 이상) △제주도 북부 20~60㎜ 등이다. 이번 장맛비를 뿌린 정체전선(장마전선)은 2일 오후부터 약화됐다가 3일 이후 다시 활성화될 전망이다. 3일에는 제주도와 전남권에 다시 비가 시작되고, 4일부터는 충청권과 남부지방으로 강수 구역이 확대될 것으로 기상청은 전망했다. 이어 다음 주 초에는 정체전선이 더욱 북상하면서 전국 대부분 지역이 장마 영향권에 들 가능성이 크다. 기상청 관계자는 “정체전선과 기압골의 위치, 북태평양고기압의 확장 정도에 따라 비가 내리는 지역과 강수량은 달라질 수 있어 최신 기상정보를 지속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남부와 제주에 장맛비가 내리는 동안 수도권을 비롯한 중부지방은 당분간 폭염이 이어질 전망이다. 서울과 경기 등 수도권에는 폭염특보가 발효된 가운데 체감온도가 33℃ 안팎까지 오르겠다. 낮 동안 기온이 크게 오르면서 대기가 불안정해져 수도권 북부와 강원 중북부내륙 등에서는 곳에 따라 강한 소나기가 내릴 수 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천둥·번개와 우박을 동반할 가능성도 있다. ◇장마가 늦어진 이유는 평년을 기준으로 하면, 제주도는 6월 19일, 남부지방은 6월 23일, 중부지방은 6월 25일에 장마가 시작된다. 올해 장마가 평년보다 늦어진 것은 장마전선을 형성하는 대기 흐름이 예년보다 늦게 갖춰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장마는 북쪽의 차고 건조한 공기와 남쪽의 덥고 습한 공기가 맞부딪치면서 형성되는 정체전선의 영향을 받는다. 일반적으로 여름이 시작되면 북태평양고기압이 북서쪽으로 확장하고, 상층에서는 티베트고기압이 발달하면서 정체전선이 한반도 부근까지 올라온다. 하지만 올해는 북태평양고기압의 북상과 확장이 다소 늦어지면서 정체전선도 제주도 남쪽 해상에 머무는 기간이 길었다. 최근 들어 북태평양고기압이 점차 세력을 넓히면서 정체전선이 북상했고, 이에 따라 지난달 30일 밤 제주도와 남부지방부터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됐다. 기상청은 앞으로도 북태평양고기압의 확장 정도와 상층 기압계의 변화에 따라 장마전선의 위치가 수시로 변동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기상청은 장마철에는 짧은 시간에 많은 비가 집중될 수 있는 만큼 하천과 계곡의 수위가 급격히 상승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기상청 관계자는 “저지대 침수와 하수도 역류, 산사태, 축대 붕괴 등에 대비해 시설물을 사전에 점검하고, 하천과 계곡 주변 출입은 자제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또한 빗길에서는 가시거리가 짧아지고 노면이 미끄러워지는 만큼 교통안전에도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AI 데이터센터 18GW 시대… ‘재생에너지’로 돌릴 수 있을까?

정부는 지난 29일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를 통해 2029년 8.4GW(기가와트), 2035년까지 18.4GW 규모의 인공지능 데이터센터(AIDC)를 구축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 녹색전환연구소는 “정부는 전력·용수·부지·규제완화를 모두 선제적으로 제공하겠다고 했지만, 빅테크 기업들이 재생에너지를 얼마나 어떻게 확보할지, 막대한 냉각수 소비를 어떻게 줄일지에 대한 원칙은 없다"고 비판했다. 연구소 측은 “낙관적인 전력배출계수를 적용해도 2029년 8.4GW 데이터센터가 가동될 경우 2035년까지 누적 온실가스 배출량은 무려 8500만 톤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면서 “유럽연합(EU)은 전력·물 사용 공개를 의무화했고, 독일은 재생에너지 100% 충당 조항을 도입했다"고 지적했다. 녹색전환연구소 등은 △재생에너지 사용 의무화 △전력·물 효율 규제 △엄격한 인허가 및 공적 관리 체계 도입을 촉구했다. 이와 관련 최근 발표된 한 학술 논문은 “대한민국의 AI 산업 육성과 관련해 재생에너지와 전력망 대책은 지금보다 훨씬 정교해져야 한다"는 충고를 내놓아 주목을 끌고 있다. 성균관대학교 유선빈 교수와 미국 미네소타대학교 최성진 교수(교신저자), 일본 규슈대학교 김도형 교수 연구팀은 최근 에너지 분야 국제학술지인 '재생 및 지속가능 에너지 리뷰(Renewable and Sustainable Energy Reviews)'에 게재된 논문에서 AI와 전력, 재생에너지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검토했다. 논문 제목은 '재생에너지가 인공지능의 급증하는 전력 수요를 충당할 수 있는가? 체계적 문헌고찰(Can Renewable Energy Meet the Surging Power Demand of Artificial Intelligence? A Systematic Review)'으로, 2019~2025년 발표된 88편의 국제 학술논문을 분석했다. 연구팀은 AI 산업이 앞으로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핵심 산업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지만, AIDC 확대와 재생에너지 전환을 동시에 달성하려면 현재의 정책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AI 데이터센터 확대는 맞는 방향" 논문은 정부가 AIDC를 국가 성장동력으로 육성하려는 방향 자체는 타당하다고 평가한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30년 전 세계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가 약 945TWh(테라와트시, 9450억kWh)까지 증가할 것으로 전망한다. 이는 일본의 연간 전력 소비량과 맞먹는 규모다. AI가 산업 전반의 생산성을 좌우하는 핵심 인프라가 되는 만큼 한국 역시 데이터센터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메모리 반도체 경쟁력을 갖춘 한국은 AIDC 허브로 성장할 잠재력이 충분하다고 연구진은 평가했다. 하지만 문제는 데이터센터를 얼마나 많이 짓느냐가 아니라 그 막대한 전력을 얼마나 안정적이고 친환경적으로 공급할 수 있느냐에 있다고 강조했다. 연구진이 가장 먼저 지적한 문제는 전력망이다. AI 서버는 2~3년 안에도 대규모 증설이 가능하지만 초고압 송전망 구축은 계획 수립부터 준공까지 통상 5~10년 이상이 걸린다. 즉 AI 산업은 매우 빠르게 성장하는 반면, 전력망은 훨씬 느리게 확충된다. 29일 국민보고회 자료는 대규모 AIDC 건설 계획을 제시하지만, 논문은 향후 데이터센터보다 송전망이 먼저 병목현상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연구진은 AI 산업 경쟁력이 결국 발전설비뿐 아니라 송전망과 계통 운영 능력에 의해 좌우될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재생에너지 100%"가 실제 탄소 감축은 아니다 논문은 기업들이 주장하는 '재생에너지 100%'도 실제 탄소 감축과는 다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많은 기업은 재생에너지 공급인증서(REC)를 구매하거나 연간 단위 전력구매계약(PPA)을 통해 RE100을 달성한다. 그러나 낮에 생산된 태양광 전력을 구매했다고 하더라도 밤에는 화석연료 발전 전기를 사용할 수 있다. 이처럼 기업의 재생에너지 사용 주장과 실제 전력 사용 사이에 발생하는 차이를 논문은 '추가성 격차(additionality gap)'라고 설명한다. 연구진은 단순히 재생에너지 인증서를 거래하는 방식만으로는 실질적인 탄소 감축 효과가 제한적이라고 평가했다. 논문은 앞으로 AIDC의 기준이 단순한 RE100을 넘어 '24시간 무탄소 전력(24/7 carbon-free energy)'으로 이동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데이터센터가 사용하는 전력이 매시간 실제로 무탄소 전원에서 공급돼야 한다는 개념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를 달성하기가 쉽지 않다. 태양광은 밤에 발전하지 않고, 풍력 역시 바람이 불지 않으면 전력을 생산할 수 없다. 여기에 장시간 에너지저장장치(LDES)는 아직 비용 부담이 크다. 따라서 연구진은 태양광과 풍력 확대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장시간 저장장치와 함께 원전, 지열, 양수발전 등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확정적(firm) 무탄소 전원'을 함께 활용해야 24시간 무탄소 전력 공급이 가능하다고 분석했다. ◇재생에너지 전환 제도적 기반 마련은 긍정적 논문은 한국이 AIDC의 급증하는 전력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제도 정비를 시작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정부는 제3차 에너지기본계획과 2024 AI 마스터플랜에서 AIDC를 새로운 전력 수요이자 미래 성장 산업으로 규정했다. 또한 분산에너지 활성화 특별법과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통해 AIDC와 같은 대규모 전력 소비자가 재생에너지 발전사업자와 직접 전력구매계약(PPA)을 체결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했다. 연구진은 이러한 직접 PPA 제도가 데이터센터의 재생에너지 사용을 선언적인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신규 재생에너지 발전소 건설을 촉진하는 '추가성(additionality)'을 높일 수 있는 정책적 기반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다만 연구진은 제도 마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논문은 한국 특유의 전기요금 체계가 재생에너지 확대의 가장 큰 제약 가운데 하나라고 분석했다. 현재 산업용 전기요금은 한국전력의 규제 요금 체계 아래 운영되고 있어 미국이나 유럽처럼 전력시장 가격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는다. 이처럼 가격 신호가 약하면 기업들은 비용이 더 드는 재생에너지 전력구매계약(PPA)이나 자체 재생에너지 발전설비 구축에 적극적으로 투자할 유인이 크지 않다. 특히 데이터센터가 매시간 사용하는 전력을 무탄소 전원으로 맞추는 '24시간 탄소 없는 전력' 체계를 구축하려면 장기 계약과 에너지저장장치 등에 상당한 추가 비용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의 전기요금 체계에서는 이러한 투자를 뒷받침할 경제적 동기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연구진의 분석이다. 연구진은 결국 AIDC의 전력 수요를 재생에너지 확대와 실질적으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직접 PPA 제도의 확대와 함께 전기요금 체계 개선, 장기 재생에너지 투자에 대한 정책 지원, 시간 단위 무탄소 전력 사용을 유도하는 시장 제도 등이 함께 마련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한국형 해법 필요… 프로젝트 고정형 PPA 확대해야" 연구진은 한국 현실에 맞는 해결책도 제시했다. 가장 현실적인 방안으로는 '프로젝트 고정형(project-anchored) PPA' 확대를 제안했다. 이는 기존 발전소에서 생산되는 재생에너지를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태양광이나 풍력 발전소 건설을 전제로 장기 계약을 체결하는 방식이다. 이 경우 실제 재생에너지 설비가 새로 늘어나기 때문에 추가성 격차를 줄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아울러 AI 모델 학습과 같은 비실시간 작업을 태양광 발전량이 많은 시간대로 옮기는 '탄소 인식형(carbon-aware) 스케줄링', 송전망 여유와 재생에너지 공급 능력을 함께 고려한 데이터센터 입지 선정, 데이터센터의 시간대별 전력 사용량과 탄소배출량을 공개하는 제도 도입도 함께 추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연구진은 “AIDC를 재생에너지로 운영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가능하지만, 발전설비만 늘린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라며 “전력망 확충과 시장제도 개선, 장기 저장기술, 무탄소 기저전원, 그리고 국가별 여건에 맞는 정책이 함께 작동해야 지속가능한 AI 산업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결국 이번 논문이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AI 경쟁은 곧 전력 경쟁이며, 앞으로 국가 경쟁력은 얼마나 많은 전기를 생산하느냐보다 얼마나 안정적이고 탄소 없이 공급할 수 있는 전력 시스템을 구축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풍년인데 영양실조? 기후변화가 빼앗아 간 콩·밀·우유의 영양분

기후변화가 농업에 미치는 영향이라고 하면 대부분 가뭄과 폭염으로 농작물이 말라 죽거나 수확량이 감소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그러나 최근 국제 학술지에 발표된 연구들은 또 다른 위험을 경고한다. 앞으로 인류가 맞게 될 위기는 식량이 부족해지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는 풍성해 보여도 영양은 줄어드는 '속 빈 강정' 같은 식량이 늘어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콩은 여전히 열리고, 밀은 여전히 자라고, 젖소도 우유를 계속 생산한다. 하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단백질과 비타민, 미네랄, 유지방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즉 양은 유지되거나 늘어나도 질이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식량안보의 개념이 '얼마나 많이 생산하느냐'에서 '얼마나 영양가 있는, 건강한 식품을 생산하느냐'로 바뀌어야 함을 보여주는 중요한 신호다. 과학자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숨겨진 굶주림(hidden hunger)'이다. 이는 칼로리는 충분히 섭취하지만 비타민과 미네랄, 단백질 등 필수 영양소가 부족한 상태를 의미한다. 현재도 세계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이러한 미량 영양소 부족을 겪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후변화로 식품의 영양 밀도까지 낮아지면 빈혈, 면역력 저하, 성장장애, 인지기능 저하 등이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 특히 철분과 아연, 비타민 B군 부족은 임산부와 어린이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비만과 영양결핍이 동시에 나타나는 이른바 '이중 부담(double burden)' 현상도 더욱 심해질 것으로 우려된다. ◇밀, 수확은 괜찮아도 비타민은 최대 30% 감소 가장 충격적인 결과 가운데 하나는 밀(유럽 겨울밀)에서 나왔다. 겨울밀은 가을에 파종해서 이듬해 초여름 수확하는 밀을 말한다. 벨기에 겐트대학교 연구팀은 최근 국제학술지 '어드밴스드 사이언스(Advanced Science)'에 발표한 논문에서 미래 기후 조건을 재현한 실험을 실시했다. 연구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밀 생산량은 오히려 증가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영양가는 크게 떨어졌다. 비타민 B5(판토텐산)와 비타민 B6(피리독신)는 약 25~30% 감소했고, 필수 미네랄인 몰리브덴은 20% 이상 감소했다. 연구진은 이러한 현상을 '성장 관련 희석 효과(growth-associated dilution effect)'라고 설명했다. 기후변화와 높은 이산화탄소 농도에서는 식물이 더 빨리 자라고 생체량(biomass)도 늘어난다. 그러나 비타민과 미네랄이 축적되는 속도는 성장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알곡이 더 크고 풍성해 보여도 영양소는 오히려 희석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밀이 '속 빈 강정'처럼 변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셈이다. 비타민 B6는 식물의 키와 광합성 효율이 높아질수록 오히려 감소하는 경향까지 확인됐다. ◇콩, 생산량은 늘어도 단백질은 줄어든다 콩(대두)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 브라질 상파울루대학교 연구팀은 최근 '국제 식량 연구(Food Research International)' 저널에 발표한 논문에서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아질 경우 콩의 영양 성분이 크게 변한다고 밝혔다. 흥미롭게도 이산화탄소 증가는 광합성을 촉진해 생산량을 크게 늘릴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양의 질이다. 연구에서는 콩의 단백질 함량이 약 6% 감소하고 전분은 20% 감소할 것으로 예측됐다. 그 이유는 '탄소-질소 희석 효과(carbon-nitrogen dilution effect)' 때문이다. 이산화탄소가 많아지면 식물은 당분과 전분 같은 탄소 화합물을 빠르게 만들어낸다. 하지만 단백질의 핵심 원료인 질소를 흡수하고 동화하는 속도는 이를 따라가지 못한다. 결국 탄수화물은 늘어나지만 단백질 농도는 희석된다. 겉으로는 알찬 콩처럼 보여도 실제 영양은 줄어드는, '속 빈 강정'과 같은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우유도 예외 아니다…생산량보다 성분이 먼저 변한다 기후변화의 영향은 축산물에서도 확인된다. 미국 코넬대학교 연구팀은 최근 '환경 연구 회보(Environmental Research Letters)' 저널에 발표한 논문에서 650만 마리 이상의 젖소 데이터를 분석했다. 연구 결과는 기존 상식을 뒤집었다. 폭염이 오면 우유 생산량부터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우유 성분이 먼저 나빠진다는 것이다. 젖소가 더위를 느끼기 시작하는 비교적 낮은 온습도지수 55(THI)부터 유지방과 유단백 함량이 서서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생산량 감소는 THI 70 이상에서 나타났지만, 성분 변화는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시작됐다. 폭염 환경에서는 유지방은 3.2%, 유단백은 5.9% 감소했다. 그 이유는 소의 생리적 적응 과정에 있다. 열 스트레스를 받은 소는 사료 섭취량이 감소하고 에너지 부족 상태에 빠진다. 그러면 몸은 우유의 지방과 단백질을 만드는 대신 체온 유지와 생존에 에너지를 우선 사용하도록 대사 체계를 바꾼다. 결국 우유의 양보다 영양 성분이 먼저 희생되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성분 저하가 여름철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연중 지속될 수 있다. 우유 가격이 지방과 단백질 함량에 따라 결정되는 만큼 생산량 감소만 고려하면 실제 경제적 손실을 최소 두 배 이상 과소평가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겉으로는 우유가 계속 생산되지만, 그 속은 조금씩 비어가는 '속 빈 강정' 현상이 축산물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이제는 '생산량 경쟁'이 아니라 '영양 경쟁' 과거 인류는 녹색혁명을 통해 굶주림을 상당 부분 극복했다. 하지만 기후위기 시대에는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고 있다. 앞으로의 문제는 곡물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곡물 속 영양이 부족해지는 것일 수 있다. 이에 따라 기후위기가 심화할수록 농업 정책도 새로운 방향을 고민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벨기에 겐트대학교 연구팀은 최근 '네이처(Nature)'에 발표한 논문에서 기후변화가 인류의 영양소 공급 자체를 위협하고 있으며, 단순한 증산 정책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연구진이 제시하는 대안은 '바이오포티피케이션(biofortification·생물강화)'이다. 이는 육종이나 유전자 교정(CRISPR), 대사공학 등을 활용해 작물 자체의 비타민과 미네랄, 단백질 함량을 높이는 기술이다. 이미 철분과 아연이 풍부한 품종, 비타민 A가 강화된 황금쌀(golden rice), 엽산 강화 쌀, 비타민이 강화된 카사바 등이 개발되고 있다. 이처럼 기후위기가 현실이 되면 기후 적응성과 높은 영양가를 동시에 갖춘 품종 개발이 중요한 과제가 될 전망이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사람 살리는 에어컨, 지구는 죽인다…‘냉방 딜레마’에 빠진 인류 [기후신호등]

2026년 여름 유럽이 다시 뜨거워지고 있다. 프랑스와 영국,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는 40℃를 넘나드는 폭염이 이어지고 있다. 냉방 시설이 부족한 학교와 병원, 노인 요양시설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한때 유럽에서 에어컨은 '미국식 사치품' 혹은 '에너지 낭비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기후변화로 폭염이 일상이 되면서 에어컨은 더 이상 사치품이 아니라 생존 장비가 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심각한 역설이 숨어 있다. 에어컨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지만, 에어컨 사용이 늘어날수록 전력 소비가 증가하고 온실가스 배출도 늘어난다. 그리고 그 결과 기후변화가 더욱 심화돼 미래의 폭염은 더욱 강해진다. 인간은 더위를 피하기 위해 에어컨을 켜지만, 그 행동 자체가 더 뜨거운 미래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에어컨의 역설(Air Conditioning Paradox)' 또는 '냉방 딜레마'라고 부른다. 인간의 건강과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냉방이 기후위기를 악화시키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현대 사회가 직면한 대표적인 환경·사회적 딜레마다. ◇폭염은 왜 '침묵의 살인자'인가 폭염은 흔히 태풍이나 홍수보다 덜 극적인 재난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장 많은 사망자를 발생시키는 기상재해 가운데 하나다. 폭염이 무서운 이유는 인체의 체온조절 시스템 자체를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인간은 정상적으로 36~37℃의 체온을 유지한다. 뇌의 시상하부는 일종의 체온 조절 장치 역할을 하며 땀 분비와 혈관 확장을 통해 열을 배출한다. 그러나 기온이 피부 온도 수준인 35℃ 안팎을 넘어가면 신체는 더 이상 열을 효과적으로 방출하지 못하고 오히려 외부의 열을 흡수하게 된다. 가장 위험한 질환은 열사병이다. 체온이 40℃ 이상으로 상승하면 피부 냉각을 위해 혈액이 피부 쪽으로 집중된다. 그 결과 간과 신장, 위장관 같은 주요 장기에 충분한 산소와 혈액이 공급되지 못한다. 치료가 늦어질 경우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이어져 사망할 수 있다. 심혈관계도 큰 타격을 받는다. 더운 날씨에는 체내 열을 배출하기 위해 심장이 평소보다 훨씬 많은 혈액을 순환시켜야 한다. 이는 심근경색과 뇌졸중 위험을 높인다. 일부 연구에서는 최고기온이 1℃ 상승할 때 심혈관 질환 관련 사망 위험이 2% 이상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폭염은 신장질환과 정신건강에도 영향을 준다. 심한 탈수는 급성 신손상을 유발할 수 있으며,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악화시키고 자살률 증가와도 관련이 있다는 연구 결과들이 보고되고 있다. 그래서 세계보건기구(WHO)는 폭염을 '침묵의 살인자(silent killer)'라고 부른다. 홍수나 태풍처럼 눈에 띄는 파괴를 일으키지는 않지만 훨씬 많은 생명을 서서히 앗아가기 때문이다. ◇누가 폭염에 가장 취약한가 폭염은 모든 사람을 괴롭히지만,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위험하지는 않다. 가장 취약한 집단은 고령자다. 노인은 젊은 사람보다 땀 분비 능력이 감소하고 체온 조절 기능이 떨어진다. 갈증을 느끼는 감각도 둔화돼 탈수를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독거노인의 경우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없어 위험이 더욱 커진다. 만성질환자도 위험군이다. 심장병, 당뇨병, 신장질환 환자는 더위에 대한 신체 적응력이 낮다. 혈압약과 이뇨제, 일부 항우울제와 항히스타민제는 체온 조절 능력을 떨어뜨리거나 탈수를 촉진할 수 있다. 저소득층 역시 폭염의 대표적 피해자다. 에어컨을 구매할 수 없거나 전기요금을 감당하기 어려워 냉방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냉방 빈곤(cooling poverty)'이라고 불린다. 이탈리아 유로-지중해 기후변화센터(CMCC)의 지아코모 팔케타(Giacomo Falchetta) 박사 연구팀은 지난 2024년 9월 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Nature Communications)'에 발표한 논문에서 2050년에도 약 40억 명이 적절한 냉방 없이 폭염에 노출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야외 노동자도 취약하다. 건설노동자, 농업 종사자, 택배기사, 군인 등은 폭염 속에서 장시간 활동해야 하기 때문에 열사병 위험이 높다. ◇유럽의 비극, 2003년 폭염이 남긴 교훈 오늘날 유럽에서 에어컨 논쟁이 뜨거운 이유는 2003년의 아픈 기억 때문이다. 2003년 여름, 유럽은 관측 사상 최악의 폭염을 겪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페인 등에서 수 주 동안 기록적인 고온이 지속됐고, 약 7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프랑스에서만 약 1만5000명이 사망했다. 당시 사망자의 상당수는 혼자 거주하던 노인이었다. 유럽의 많은 가정에는 에어컨이 설치돼 있지 않았고, 병원과 요양시설도 폭염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다. 이 사건은 유럽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 이후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페인 등은 폭염 경보 체계를 정비하고 냉방 대책을 강화했다. 그러나 동시에 “에어컨을 대폭 늘려야 하는가"라는 새로운 논쟁도 시작됐다. ◇에어컨이 만드는 새로운 기후위기 문제는 에어컨이 결코 공짜 해결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전 세계 전력 사용량의 약 10%가 냉방에 쓰이고 있다. 냉방 부문은 이미 세계 온실가스 배출의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다. 더 심각한 것은 앞으로의 증가 속도다. 중국 베이징공과대학교의 장홍즈(Hongzhi Zhang) 박사와 영국 버밍엄대학교의 샨위리(Yuli Shan) 교수 등이 참여한 국제 연구팀은 지난 2월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에 발표한 논문에서 에어컨 사용 증가만으로도 2050년까지 지구 평균기온이 추가로 0.03~0.07℃ 상승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연구진은 냉방 수요 증가에 따른 전력 소비와 냉매 배출을 함께 고려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같은 연구는 2050년 냉방용 전력 수요가 4493 TWh(테라와트시, 1TWh=10억 kWh)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현재 세계 주요 국가들의 전력 소비량과 비교해도 엄청난 규모다. 이탈리아 CMCC 재단 연구팀은 2024년 논문에서 2050년까지 전 세계 주거용 에어컨 보급률이 41%로 증가하고, 에어컨 보유 가구 수가 9억 가구에 이르러 주거용 냉방 전력 수요만 1,940TWh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또 다른 문제는 냉매다. 현재 널리 사용되는 수소불화탄소(HFC)는 이산화탄소보다 수천 배에서 최대 1만4800배 강력한 온실효과를 낸다. 에어컨이 폐기되거나 누출될 경우 상당한 기후 영향을 미친다. ◇유럽을 갈라놓은 '에어컨 논쟁' 유럽에서 논쟁이 치열한 이유는 두 가치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한쪽에서는 “에어컨은 생명을 구한다"고 주장한다. 학교와 병원, 노인요양시설에 냉방시설을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한다는 목소리다. 특히 우파 정당들은 냉방 부족을 정부의 무능 문제로 규정하고 있다. 반대편에서는 “에어컨은 환경적 괴물"이라고 주장한다. 녹색당과 환경단체들은 에어컨 보급 확대보다 도시 녹화와 단열 강화, 건축 개선이 우선돼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양측 모두 틀리지 않다. 폭염으로부터 생명을 지키려면 냉방은 필수다. 그러나 무분별한 냉방 확대는 기후위기를 악화시킨다. 인류는 지금 '사람을 살리기 위해 에어컨을 늘려야 하지만, 지구를 살리기 위해서는 에어컨 의존도를 줄여야 하는' 역사상 유례없는 딜레마와 마주하고 있다. 사실 2003년의 비극이 단순히 에어컨이 없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주장도 많다. 오히려 많은 연구자들이 더 중요하게 보는 것은 사회적 고립(social isolation)이다. 유럽에서는 8월이 대표적인 여름 휴가철이고, 프랑스에서는 가족들이 장기간 휴가를 떠나는 문화가 강하다. 당시 많은 노인들이 도시의 아파트에 홀로 남겨졌고, 더위에 쓰러져도 발견해 줄 가족이나 이웃이 없었다. 실제로 사망자 상당수는 혼자 살던 고령층이었다.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폭염 경보 체계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고, 독거노인 관리 체계나 냉방센터(무더위 쉼터), 폭염 대응 의료 시스템 등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2003년 폭염은 흔히 '기후 재난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고립의 재난'으로 평가된다. ◇해법은 에어컨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해법이 “에어컨 사용 금지"가 아니라 “지속가능한 냉방"이라고 말한다. 첫째는 무더위 쉼터 확대다. 경로당, 주민센터, 도서관, 체육관, 호텔 등을 냉방센터로 활용하면 취약계층이 가구마다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아도 폭염을 피할 수 있다. 실제로 서울시는 호텔을 야간 무더위 쉼터로 운영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둘째는 도시 자체를 시원하게 만드는 것이다. 공원과 가로수, 녹지 확대는 '도시의 에어컨' 역할을 한다. 연구에 따르면 큰 가로수 한 그루는 여러 대의 에어컨에 해당하는 냉각 효과를 낼 수 있다. 셋째는 패시브 쿨링이다. 차양막, 단열재, 반사 지붕, 쿨루프 등을 활용하면 에어컨 없이도 실내 온도를 상당히 낮출 수 있다. UCL의 오스카 브루스 교수 연구팀은 '지구물리학 연구 회보(Geophysical Research Letters)'에 발표한 논문에서 쿨루프가 도시 온도를 낮추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고 보고했다. 넷째는 고효율 냉방기술과 재생에너지 확대다. 태양광과 풍력으로 생산한 전기를 사용하고, 고효율 히트펌프와 저온난화 냉매를 보급하면 냉방에 따른 탄소 배출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생명을 지키면서 지구도 지켜야 한다 21세기 들어 폭염은 더 이상 예외적인 재난이 아니다. 기후변화가 계속되는 한 폭염은 더욱 길고 강해질 가능성이 높다. 이런 시대에 에어컨은 분명 생명줄이다. 특히 노인과 어린이, 만성질환자에게 에어컨은 단순한 편의시설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 인프라가 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인류는 냉방을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그 결과 더 뜨거운 지구를 만드는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해답은 “에어컨이냐, 환경이냐"의 선택이 아니다. 필요한 사람은 안전하게 냉방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면서도, 도시 설계와 건축, 에너지 시스템, 사회복지 정책을 함께 바꾸는 것이다. 무더위 쉼터와 녹지 확대, 패시브 쿨링, 고효율 냉방기기, 재생에너지 전환은 모두 그 해법의 일부다. 폭염 시대의 진정한 과제는 에어컨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에어컨에만 의존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데 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사람의 생명과 지구의 미래를 동시에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원유 끓이지 않고 막으로 걸러내 정제한다… KAIST, 혁신 기술 개발

정유 공장에서 원유를 정제하려면 거대한 증류탑에서 수백℃까지 끓여야 한다. 정유 산업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산업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이유다. 그런데 한국 연구진이 원유를 가열하지 않고도 값싼 고분자 막을 이용해 휘발유와 등유에 해당하는 가벼운 성분을 골라내는 기술을 개발했다. 정유 산업의 에너지 소비와 탄소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연구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번 연구는 KAIST 생명화학공학과의 고동연 교수와 이재우 교수 연구팀, 한국화학연구원, HD현대오일뱅크, 미국 조지아 공과대학의 공동연구진이 수행했고, 24일 세계적 학술지 '네이처(Nature)'에 발표됐다. ◇정유공장의 가장 큰 에너지 낭비는 '끓이는 과정' 현재 정유공장은 원유를 거대한 증류탑에 넣고 가열한 뒤 끓는점 차이를 이용해 휘발유·등유·경유 등을 분리한다. 이 과정은 기술적으로는 단순하지만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연구진에 따르면 전 세계 원유 정제 과정에서 사용되는 대기압 증류와 감압 증류는 매년 1,100TWh(테라와트시, 1TWh=10억 kWh) 이상의 에너지를 소비하고, 1억6000만 톤 이상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연구진은 “원유를 굳이 끓이지 않고도 분리할 수 있다면 에너지 사용량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발상에서 출발했다. 연구진이 사용한 재료는 폴리아크릴로니트릴(PAN)이라는 흔한 고분자 막이다. 원래는 분리막을 지지하는 보조 재료로 사용되던 물질이다. 연구진은 이 막에 별도의 특수 코팅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실험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원유가 막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막 내부에 존재하는 약 15나노미터(nm, 1nm=100만분의 1㎜) 크기의 구멍들이 스스로 초미세 분리통로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연구진은 이를 '자발적 기공 수축(Self-limiting pore constriction)' 메커니즘이라고 설명했다. ◇원유가 스스로 만드는 '나노 체'의 비밀 이 현상을 이해하려면 원유의 복잡한 구성을 알아야 한다. 원유 속에는 가벼운 탄화수소뿐 아니라 아스팔텐, 레진 같은 무거운 성분도 들어 있다. 먼저 이 무거운 성분들이 막 벽면에 달라붙어 일종의 뼈대를 만든다. 이어 원유 속의 직선형 탄화수소(n-알칸, 탄소 원자가 17~33개가 직선으로 연결된 구조)가 그 위에 쌓이며 양초가 굳듯 결정화된다. 그 결과 원래 약 15nm였던 통로는 2nm 이하 수준까지 좁아진다. 쉽게 말하면 넓은 배수관 안쪽에 기름 성분이 자연스럽게 들러붙으면서 점점 더 촘촘한 체를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흥미로운 점은 이 체가 완전히 막혀 버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구멍이 너무 좁아지면 나노 공간에 갇힌 분자들의 녹는점이 낮아지는 '깁스-톰슨 효과(Gibbs-Thomson effect)'가 발생한다. 그러면 일부 결정이 다시 녹으면서 통로를 넓힌다. 결국 '굳어지는 힘'과 '녹는 힘'이 균형을 이루며 약 2nm 이하의 최적 상태가 유지된다. 연구진은 이를 “원유가 자기 자신을 걸러낼 맞춤형 나노 체를 스스로 만드는 현상"으로 해석했다. ◇5분 만에 만들어지는 분자 정유 공장 이 나노 통로는 생각보다 매우 빠르게 형성된다. 실험 결과 원유를 흘려보낸 지 5분 이내에 분리 기능이 형성됐고, 10분 이내에 검은색 원유가 밝은 갈색 투과액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후 20분 정도에 걸쳐 가장 무거운 성분에 대한 차단 능력이 더욱 정교해졌다. 즉, 별도의 제작 공정 없이 원유가 흐르기만 해도 스스로 필터를 완성하는 셈이다. 성능도 뛰어났다. 연구진이 개발한 PAN 분리막은 최대 0.591 L/m²·h·bar의 투과도를 기록했다. 이는 기존 최고 수준 원유 분리막 성능보다 23배 이상 높은 수치다. 분리된 액체에서는 휘발유와 나프타에 해당하는 가벼운 성분 비중이 크게 증가했다. 예를 들어 아라비안 라이트 원유의 경우 200℃ 이하 성분 비율이 원유에서는 25.1%였지만, 분리막을 통과한 뒤에는 52.0%까지 늘어났다. ◇원유 종류가 달라도 스스로 적응 연구진은 아라비안 엑스트라 라이트(AXL)와 아라비안 라이트(AL) 원유를 모두 시험했다. 흥미롭게도 분리 기준점은 원유 종류에 따라 달라졌다. AXL에서는 탄소수 20개(C20) 이상 분자를 주로 걸러냈고, AL에서는 탄소수 24개(C24) 이상 분자를 차단했다. 이는 나노 통로가 고정된 구조가 아니라 원유 조성에 맞춰 스스로 최적화된다는 의미다. 상용화 가능성을 높이는 또 다른 발견도 있었다. 연구진은 PAN과 화학구조가 다른 가교 폴리에테르이미드(x-Ultem) 막에서도 유사한 현상을 확인했다. 즉 특정 소재만의 특수 현상이 아니라 적절한 기공 구조를 가진 여러 고분자 재료로 확장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에너지 31.6%, 탄소배출 37.6% 감소 연구진은 실제 정유공정을 가정한 시뮬레이션도 수행했다. 기존 공정은 원유 전체를 가열해 증류하지만, 새 공정은 먼저 상온에서 분리막으로 가벼운 성분을 걸러낸 뒤 남은 부분만 증류한다. 그 결과 에너지 소비량은 31.6%, 냉각수 사용량은 20.7%,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37.6%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성도 상당했다. 연구진의 기술경제성 분석 결과 연간 운영비는 기존 공정보다 36% 낮아지는 것으로 계산됐다. 특히 이 기술은 새로운 정유공장을 지을 필요 없이 기존 증류탑 앞단에 모듈 형태로 설치할 수 있어 초기 투자 부담도 크지 않다. 연구진은 3~5년 내 산업 적용 가능성을 전망하고 있다. 그 이유는 △실제 정유사인 HD현대오일뱅크와 공동 검증을 수행했고 △실제 상업용 원유를 사용했으며 △28일 연속 운전에서도 성능 저하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대면적 모듈 제작과 장기 내구성 검증 필요 다만 넘어야 할 과제도 있다. 현재 실험은 소형 막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실제 정유공장은 하루 수만㎥ 규모의 원유를 처리해야 하므로 대면적 모듈 제작과 장기 내구성 검증이 필요하다. 또한 중동산 원유 외에 미국 셰일오일, 캐나다 오일샌드 원유, 남미 중질유 등 다양한 원유에서도 동일한 성능이 나오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연구는 “원유는 반드시 끓여서 분리해야 한다"는 정유 산업의 100년 상식을 뒤흔드는 성과로 평가된다. 연구진은 향후 여러 단계의 분리막을 연속 연결해 궁극적으로는 증류탑 자체를 대체하는 '완전 분리막 정유 공정'까지 연구를 확대할 계획이다. 최종적으로 연구가 실용화된다면 정유 산업은 '열(熱)의 시대'에서 '분자의 시대'로 넘어갈 수도 있을 전망이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40도 더위가 일상이라고?”… 유럽 달구는 거대한 뚜껑 ‘열돔’의 공포

현재 유럽을 뒤덮고 있는 폭염은 단순한 여름 더위가 아니다. 기상학자들은 이번 사태를 '열돔(Heat Dome)'이 만들어낸 대규모 대기 재난으로 보고 있다. 프랑스와 스페인 일부 지역의 기온이 44℃에 육박하고, 영국에서도 40℃ 안팎의 기온이 예보되면서 학교가 휴교하고 철도 운행이 중단되는 등 사회 시스템 전반이 흔들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극단적 폭염이 앞으로 더 자주, 더 오래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한다. ◇유럽을 덮은 거대한 솥뚜껑, 열돔이란 열돔은 말 그대로 뜨거운 공기를 거대한 돔(dome) 형태로 가둬두는 대기 현상이다. 기상학적으로는 상층 대기에서 강한 고기압이 장기간 정체할 때 발생한다. 열돔이 형성되는 과정은 비교적 단순하다. 먼저 상층 대기에 강력한 고기압이 자리 잡으면 공기가 아래로 내려오는 '침강(sinking)' 현상이 발생한다. 내려오는 공기는 압축되면서 온도가 상승하는데, 이를 단열 압축(adiabatic compression)이라고 한다. 공기가 내려올수록 더 뜨거워지는 것이다. 이렇게 가열된 공기는 지표면을 달구고, 지표면은 다시 대기를 가열한다. 원래라면 뜨거워진 공기가 위로 올라가면서 열을 분산시켜야 하지만 강한 고기압이 마치 솥뚜껑처럼 상공을 덮고 있어 대류가 억제된다. 또한 하강 기류는 구름 형성까지 억제해 태양 복사에너지가 지표를 직접 가열하도록 만든다. 열돔은 △공기를 압축해 가열하고 △뜨거운 공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 △구름 형성을 억제해 햇빛이 지표면에 쏟아지도록 하는 등 세 가지 과정을 동시에 작동시킨다. 이로 인해 극심한 폭염이 며칠이 아니라 수주 동안 지속될 수도 있다. ◇오메가 블록, 대기의 교통체증 이번 유럽 폭염의 배경에는 '오메가 블록(Omega Block)'이라는 대기 패턴이 있다. 유럽중기예보센터(ECMWF)의 전략 책임자 사만다 버지스는 AF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제트기류가 그리스 문자 Ω(오메가) 형태로 크게 굽어지면서 대기 중에 '교통정체'가 발생한 것과 같다"고 설명했다. 제트기류는 보통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며 날씨 시스템을 움직인다. 그러나 오메가 블록이 형성되면 제트기류가 고기압을 한 자리에 묶어두게 된다. 결과적으로 열돔이 며칠 만에 사라지지 않고 장기간 정체하면서 지표면의 열이 계속 축적된다. 프랑스 기상청(Météo-France)의 예보관 세바스티앙 레아는 AFP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현상을 “진공청소기"에 비유했다. 그는 “북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의 뜨거운 공기를 빨아들여 유럽으로 계속 공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유럽은 지금 얼마나 뜨거운가 올해 유럽 폭염은 단순한 기록 경신 수준을 넘어선다. 프랑스에서는 전국 평균 기온 지표가 1947년 관측 이래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일부 도시에서는 역대 최고 기온 기록이 경신됐고, 보르도는 41.9℃까지 치솟았다.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서는 기온이 41℃까지 오르며 관광객들이 백화점과 미술관 등 냉방 시설로 피신하는 모습이 목격됐다. 일부 시민들은 지하철역 통풍구 위에 모여 냉기를 쐬며 더위를 견뎠다. 폭염은 사회 인프라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1300개가 넘는 학교가 휴교했고 열차 운행도 중단됐다. 영국은 최고 수준의 적색 폭염 경보를 발령했고, 일부 지역은 38~40℃로 오를 것으로 예보됐다. 병원 응급실은 환자 급증으로 비상 대응에 들어갔다. 스페인 역시 일부 지역에서 44℃ 안팎의 기온이 예상되면서 월드컵 거리 응원전까지 취소됐다. 인명 피해도 발생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폭염 기간 물놀이 중 익사 사고가 잇따랐고, 보르도 지역에서는 고령자 사망 사례가 보고됐다. 주차된 차량에서 2세와 4세 어린이가 숨진 채 발견되는 비극도 발생했다. 원전 운영에도 비상이 걸렸다. 강과 하천 수온이 상승하면서 원전 냉각수 사용에 제약이 생겨 일부 발전소의 출력 제한 조치가 시행되고 있다. ◇기후변화는 열돔을 어떻게 강화하는가 열돔 자체는 오래전부터 존재해온 자연현상이다. 문제는 지구 온난화가 그 위력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2024년 국제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 지구와 환경 (Nature Communications Earth & Environment)'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2021년 북미 북서부 태평양 연안의 열돔은 인간이 초래한 기후변화 때문에 원래보다 34% 더 넓어지고 지속 기간은 약 59% 길어졌던 것으로 분석됐다. 당시 열돔은 27일 동안 지속됐고,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의 리턴 지역은 49.6℃에 달하는 역대 최고 기온을 기록했다. 수백 명이 사망했고 도로와 철도 시설이 파손됐으며 대형 산불이 잇따랐다. 또 다른 연구는 최근 70년 동안 대기 정체 현상을 만드는 '행성파 공명(planetary wave resonance)' 발생 빈도가 약 3배 증가했다고 보고했다. 행성파 공명이란 지구 대기에서 발생하는 거대한 규모의 파동인 행성파(planetary waves, 또는 로스비파 Rossby waves)가 특정 조건에서 증폭되어 거의 움직이지 않고 정체하는 현상을 말한다. 전문가들은 북극의 급격한 온난화가 제트기류의 흐름을 변화시키고 열돔과 같은 정체성 기상현상을 늘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유럽중기기후예측센터(ECMWF)의 기후 과학자 레베카 에머턴은 AFP와의 인터뷰에서 “(열돔현상 빈발 등으로 인해) 1970년대와 비교할 때 극심한 열 스트레스에 노출되는 인구가 전 세계적으로 약 10억 명 증가했다"고 밝혔다. ◇유럽만의 문제가 아니다 영국 기상청 수석 과학자인 스티븐 벨처는 최근 폭염과 관련해 “40℃라는 숫자가 이제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엄중하게 다가온다"고 말했다. 한때 수십 년에 한 번 나타나던 기록적 폭염은 이제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열돔은 유럽에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2021년 북미 북서부 태평양 연안에서는 열돔이 형성되면서 캐나다 리턴 외에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도 47℃를 기록하기도 했다. 2024년과 2025년에도 미국 중서부와 동부에서는 대규모 열돔이 형성돼 수천만 명이 폭염 경보 아래 놓였다. 일부 지역은 체감온도가 40℃를 넘었고 수십 년 만의 최고 기온 기록이 깨졌다. 아시아도 예외가 아니다. 중국 북부와 몽골, 중앙아시아, 인도 북부, 한국과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최근 수년간 강한 아열대 고기압과 열돔형 정체 고기압이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동아시아의 경우 북태평양고기압이 비정상적으로 확장될 때 유사한 메커니즘으로 장기 폭염이 발생한다. 열돔은 자연현상이지만, 온난화된 지구는 그 열돔을 더 크고, 더 오래 지속되며, 더 치명적으로 만들고 있다. 지금 유럽을 덮고 있는 거대한 '열의 뚜껑'은 단순한 기상 이변이 아니라 기후변화 시대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인 셈이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물 흐름 막히니 녹조 창궐”… 낙동강, 세계 녹조 연구의 ‘거대 실험실’ 됐다

지난 17~18일 경남 창원에서는 칠서정수장이 수돗물을 공급하는 성산·의창지역 등을 중심으로 수돗물에서 냄새가 난다는 민원이 집중적으로 접수됐다. 이는 최근 날씨가 더워지면서 상수원을 취수하는 낙동강에서 남세균(시아노박테리아)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창원시 수돗물에서도 남세균이 만든 냄새 유발 물질 '지오스민'이 검출된 탓이다. 지오스민은 인체에 독성은 없지만 흙·곰팡이 냄새 등 악취를 풍긴다. 이처럼 매년 녹조가 창궐하는 낙동강이 세계에서 녹조 연구가 가장 많이 된 강인 것으로 나타났다. 호수가 아닌 강에서 발생하는 녹조 연구가 가장 활발하다는 얘기다. 국내외 연구자들이 낙동강에 주목하는 이유는 아름다운 생태계나 우수한 수질 때문이 아니라, 대규모 토목공사 이후 녹조가 어떻게 발생하고 변화하는지를 보여주는, 잘못된 개발이 환경을 얼마나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낙동강은 오늘날 세계 녹조 연구의 중심 무대가 됐고, 과학 연구 결과가 축적될수록 결론은 하나로 모이고 있다. 낙동강 녹조의 핵심 원인 가운데 하나는 보 건설로 인한 물 흐름의 정체라는 것이다. ◇하천 녹조 연구자들이 낙동강을 찾는 이유 최근 국제 학술지 '워터 리서치 (Water Research)'에는 독특한 내용의 논문이 발표됐다. 미국 지질조사국(USGS) 소속 연구진은 1975년 이후 50년 동안 주요 학술 데이터베이스에서 4000편 이상의 논문을 찾아내고, 엄격한 심사를 거쳐 최종적으로 하천 녹조 모델링 연구 162편을 선정해 그 내용을 분석했다. 연구진은 인공지능, 머신러닝, 수리모형 등 다양한 기법을 활용한 하천 녹조 연구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했다. 162편 가운데 한국 강과 관련된 내용이 26%(42편)를 차지해 가장 많았고, 유럽이 25%, 미국이 21%, 중국이 12%를 각각 차지했다. 한국의 강을 다룬 논문의 상당수는 낙동강에 관한 논문(29편, 전체 162편의 18%)이었다. 사실상 낙동강이 녹조에 관한 한 세계에서 가장 연구가 많이 된 강이 됐다. 국내외 연구자들이 낙동강을 주목한 이유는 명확하다. 대형 보가 연속적으로 설치된 이후 강의 흐름과 녹조 발생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장기간 관측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환경학자들에게 낙동강은 거대한 자연 실험실이 된 셈이다. 여기에다 환경부·국립환경과학원·한국수자원공사(K-water)가 장기간 모니터링 자료를 축적했기 때문이다. ◇미국 연구진이 꼽은 녹조 핵심 변수는 '체류시간' USGS 연구진이 검토한 162편의 논문에서 가장 자주 등장한 녹조 발생 요인은 영양염류와 수온, 유량, 유속이었다. 특히, 연구진은 하천에서 물이 얼마나 오래 머무르는지를 뜻하는 체류시간이 녹조 발생의 핵심 변수라는 결론을 내렸다. USGS 연구진은 논문에서 “유속 감소와 체류시간 증가가 녹조 예측 모델의 핵심 변수로 반복적으로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체류시간이 녹조 발생의 핵심 원인이라는 점은 낙동강만의 특수한 현상이 아니라 전 세계 하천 녹조 연구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됐다는 것이다. 다만 낙동강은 보 건설 이후 체류시간이 크게 증가한 대표 사례로, 이러한 과학적 원리가 실제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주는 세계적인 연구 현장이 됐다. 강물이 빠르게 흐르면 녹조 원인 생물인 남세균은 충분히 증식하기 전에 떠내려간다. 그러나 물이 정체되면 남세균은 안정적으로 번식할 수 있다. 쉽게 말해 강이 강처럼 흐를 때보다 호수처럼 고여 있을 때 녹조가 훨씬 잘 발생한다는 의미다. ◇낙동강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나 2009년부터 추진된 4대강 사업으로 낙동강에는 8개의 대형 보가 설치됐다. 그 결과 강의 흐름은 크게 느려졌다. 실제로 연세대 박준홍 교수팀이 최근 국제 학술지 '환경 공학 연구 (Environmental Engineering Research)'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낙동강 주요 구간의 유속은 보 건설 이후 과거보다 최대 8배 가까이 감소한 것으로 분석됐다. 또, 머신러닝 기법을 이용해 녹조 발생 요인을 분석한 결과 유속이 감소할수록 남세균이 증가하는 뚜렷한 상관관계를 확인했다. 이 논문은 보 건설로 인한 유속 감소가 녹조 증가에 기여했다고 결론 내렸다. 또한 보를 철거하거나 수문을 상시 개방할 경우 유속이 회복되면서 녹조 발생도 감소할 것으로 예측했다. 사실 이런 결과는 처음 나온 것이 아니다. 2017년 국제학술지 '워터 리서치'에 발표된 서울시립대 연구는 한강·낙동강·금강·영산강의 유량 조절하천을 분석한 결과, 체류시간과 수온이 남세균 발생의 핵심 변수이며, 특히 체류시간이 녹조를 설명하는 중요한 요인이라고 밝혔다. 이어 2021년 국제학술지 '종합 환경과학(Science of the Total Environment)'에 발표된 연구는 낙동강 8개 보 구간에서 보 설치 이후 유해 남세균 녹조 발생 기간이 점차 길어졌음을 확인했다. 두 연구는 공통적으로 강의 흐름을 바꾸는 수리학적 조건이 녹조 발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보여준다. ◇해외 연구자들의 객관적 분석 결과도 같은 방향 최근의 인공지능 모델 연구들도 같은 결과를 보여준다. 사용한 방법은 서로 다르지만 결론은 놀라울 만큼 일관된다. 물이 느려질수록 녹조가 늘어난다. 물이 오래 머물수록 녹조가 심해진다. 보가 만들어낸 정체 수역은 남세균 번성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한다. 특히 의미 있는 점은 최근의 연구들이 한국 내부 논쟁이 아닌, 해외 연구자들의 객관적 분석에서도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 연구진이 전 세계 하천 녹조 연구를 종합 분석한 결과, 체류시간과 유속이 핵심 변수로 나타났고, 낙동강을 대상으로 한 다수의 실증 연구 역시 보 건설 이후 유속 감소와 녹조 증가의 관계를 확인했다. 정치적 평가와 별개로, 환경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강의 흐름을 늦추는 구조물이 녹조 발생 위험을 높인다는 사실은 점점 더 강한 과학적 근거를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세계가 낙동강을 연구하는 슬픈 이유 낙동강은 이제 세계 녹조 연구의 대표 사례가 됐다. 미국의 환경과학자들, 유럽의 수생태학자들, 중국과 호주의 모델링 전문가들이 모두 낙동강 연구를 인용한다. 낙동강이 가장 건강한 강이어서가 아니다. 대규모 하천을 인위적으로 느리게 만들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낙동강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연구된 '아픈 강'인 셈이다. 그리고 50년 가까이 축적된 국내외 연구들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다. 강이 흐르지 못하면 녹조는 늘어난다. 세계 연구자들이 정치적 논쟁과 무관하게 오랜 시간 축적된 과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얻어낸 교훈이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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