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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박원 기자

안녕하세요 에너지경제 신문 장박원 기자 입니다.
  • 편집국장
  • jangbak@ekn.kr
화려한 듯 초라한 이재명 정부 1년 경제 성적

이재명 대통령의 지지율이 5주 연속 하락하며 취임 이후 처음으로 긍정보다 부정이 앞서는 '데드크로스'가 나타났다.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리얼미터가 이달 15일부터 19일까지 5일간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251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국정 수행 긍정 평가는 전주 대비 4.8%포인트 하락하며 46.7%, 부정 평가는 5.5% 포인트 상승해 49.7%를 기록했다. 오차 범위 내지만 추세를 되돌리지 못하면 이재명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주요 정책의 동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지지율 하락의 표면적 이유는 6·3 지방선거 관리 부실과 여당 내 당권 싸움이 거론된다. 하지만 출범 1년이 지났는데도 고용 악화와 부동산 시장 불안, 자산 양극화, 내수 침체 등 먹고 사는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게 더 근본적인 원인이다. 역대 정부가 하지 않았던 상법 개정을 추진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한 건 평가할 만하다. 그 결과 코스피 지수는 3000선 아래에서 1년 만에 9000선을 돌파하기도 했다. 반도체 시장 활황이 상승세를 이끌고 있으나 상법 개정 등을 통해 자본시장을 주주친화적으로 개혁한 요인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화려한 증시 뒤에는 너무나도 초라한 한국 경제의 민낯이 있다. 먼저 고용 참사다.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지난달 상용 근로자 수가 1년 전보다 7000명 줄었다. 정규직을 포함해 고용 안정성이 높은 상용 근로자 수가 감소한 건 외환위기 영향을 받았던 1999년 12월 이후 처음이다. 무엇보다 고용 악화로 청년들이 가장 큰 타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뼈아프다. 지난달에만 20, 30대 청년 20만 명 가까이 상용직을 잃었다. 기업들이 경력자 위주로 채용하면서 취업 활동을 포기하는 사회 초년생이 계속 늘고 있다. 부동산 정책 약발도 떨어지고 있다. 규제 지역을 확대하고 대출을 조이면서 초고가 주택 상승세는 다소 꺾였으나 중저가 아파트로 수요가 몰리면서 서울 아파트값이 1년 새 13% 가까이 올랐다. 특히 15억 원 이하 아파트 가격이 상승하며 청년과 서민의 내 집 마련의 꿈은 더 멀어졌다. 정부는 보유세 등 부동산 세금을 인상해 집값에 대한 불안을 잠재우겠다는 의지를 밝혔으나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다. 과거 진보 정부에서도 비슷한 정책을 썼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실질적인 주택 공급이 뒷받침돼 시장 신뢰를 쌓지 못하면 어떤 부동산 정책도 백약이 무효라는 사실을 국민은 이미 잘 알고 있다. 주식과 부동산 가격 급등은 양극화를 심화한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반도체 종목과 그 외 종목, 서울 강남 주택과 지방 부동산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는 등 자산시장 자체의 쏠림 현상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의 구조적 불평등까지 우리 사회의 양극화는 그야말로 심각한 수준이다. 양극화를 방치하면 민주주의 토대가 무너질 수 있다. 양극화는 극단주의자들의 자양분이 되기 때문이다. 고물가와 고금리, 고환율(3고)의 역습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3고는 내수 산업을 황폐화한다는 측면에서 신속한 처방이 필요하다. 내수 침체가 얼마나 심한지는 몇 가지 통계만 봐도 알 수 있다. 올해 1~4월 개인파산 신청이 급증하며 코로나19 영향이 있었던 2021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고환율로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고 높은 금리를 버티지 못해 문을 닫는 중소 제조업체와 소상공인들이 늘고 있다. 장사를 할수록 적자만 쌓인다고 푸념하는 골목상권 사장님이 한둘이 아니다. 사업 자금으로 빌린 돈을 갚지 못해 금융권 연체율도 치솟고 있다. 수출 실적과 코스피만 보면 폭죽이 터지듯 화려하지만 실물 경제는 살얼음판처럼 불안하기만 하다. 실상이 이런데도 정부는 위기를 인식하지 못하는 듯 태평하기만 하다. 우리 경제를 지탱하는 반도체 호황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는 없다. 반도체 경기가 꺾이면 수출과 증시가 동시에 내리막길을 타게 될 것이다. 지금은 수출과 증시의 화려함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다. 노동 개혁과 양극화 해소 등 진짜 중요한 과제를 방치하면 이재명 정부의 경제 성적표는 더 초라해질 것이다. 장박원 편집국장 jangbak@ekn.kr

삼성전자 파업 피해 100조로 끝날까

삼성전자 노조는 파업 피해액 100조 원이 과장됐다고 주장한다. 노조를 겁박하려는 목적에 피해액을 부풀렸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삼성전자가 우리나라 경제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차지하는 비중, 삼성전자를 추격하는 경쟁국들의 기민한 움직임 등을 생각하면 100조 원은 오히려 과소 책정된 것으로 보인다. 법원은 18일 삼성전자가 노조를 상대로 제기한 위법 쟁의행위 금지 가처분 신청을 일부 인용하며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초정밀 미세장비에 해당하는 반도체 시설의 경우 설비가 한번 손상되면 수리를 거쳐 재가동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므로 쟁의행위 기간 중이라 해도 시설 손상 방지를 위한 작업은 평상시와 같은 정도로 수행될 필요가 있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내에서 채권자(삼성전자)가 차지하는 비중 등을 고려할 때 시설 손상 및 원료·제품의 변질 내지 부패로 인한 생산 차질은 자동차·가전·정보통신 등 관련 산업의 생산 지연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 같은 손해나 위험은 사후적인 금전 배상 등을 통해 회복될 수 없는 현저한 손해 내지 급박한 위험에 해당한다." 김민석 국무총리가 지난 17일 발표한 대국민 담화를 봐도 파업으로 인해 반도체 생산이 중단됐을 때 그 피해 규모가 어느 정도일지 가늠할 수 있다. 담화에 따르면 반도체 공장은 단 하루만 정지돼도 최대 1조 원에 달하는 직접적인 손실이 발생한다. 법원 설명대로 잠시만 멈춰도 수개월의 생산 마비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매출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매출 비중이 12.5%에 달한다. 삼성전자는 우리나라 수출의 22.8%, 전체 시가총액의 26%를 차지한다. 삼성전자 주주는 460만 명이고 임직원은 12만 명, 협력사는 1700개가 넘는다. 하지만 가장 두려운 사실은 김 총리 지적대로 파업으로 인해 글로벌 인공지능(AI) 반도체 전쟁에서 어렵게 확보한 전략적 우위를 경쟁국들에 내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피해액이 100조 원을 넘어 수백조 원이 될 수도 있다. 아니, 금액으로 추산할 수 없을 정도로 국가적 손실이 심각할 수 있다. 불과 7만 여명에 불과한 고소득 노동자의 노동권을 보장하느라 희생하기에는 국가적 손실이 너무 크다. 정부가 노동권을 침해한다는 비판이 나올 것을 뻔히 알면서 파업을 막기 위한 긴급조정권 발동을 시사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재명 대통령도 18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글에서 “현행 헌법상 모든 국민의 기본권은 보장되지만,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공공복리 등을 위해 제한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삼성전자 파업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의지를 거듭 밝힌 것이다. 대통령을 비롯한 대다수 국민이 파업을 반대하고 있고, 정부의 긴급조정권 발동 가능성에 이어 법원도 파업의 위법성을 일부 인정한 만큼 최악의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현시점에서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는 중앙노동위원회의 2차 사후 조성 회의를 통해 노사가 타협점을 찾는 것이다. 합의점을 찾지 못해도 파업은 유보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노조가 공언한 대로 오는 21일 파업에 들어가면 국가적 손실은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법원이 인용한 위법성을 피해 연성 파업을 한다고 해도 피해액은 눈덩이처럼 커질 게 분명하다. 파업은 회사와 주주, 협력사만 치명상을 입는 게 아니다. 가장 큰 타격은 노조가 받게 될 것이다. 파업으로 영업이익이 줄면 노조가 요구한 만큼 성과급을 받을 수 없다. 이런 경우를 두고 '소탐대실'이라는 말을 쓴다. 그런데도 파업을 강행한다면 이솝우화의 '욕심 많은 개'와 호리병 안에 든 먹이를 포기하지 못해 사냥감이 되는 원숭이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우화와 다른 점은 본인만 당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피해를 준다는 사실이다. 헌법상 국민의 기본 권리인 노동권을 행사하는 것은 자유다. 하지만 국가와 국민 전체를 몰보로 하는 파업은 단순 파업이 아니라 민폐일 뿐이다. 삼성전자 노조를 보며 가스통을 들고 모두 죽자고 위협하는 조폭이 연상되는 것은 나만의 과도한 상상일까. 장박원 편집국장 jangbak@ekn.kr

삼성전자 노조는 왜 ‘국민 밉상’ 됐나

“적당히들 좀 해라." “그냥 노조가 징글징글하다." “이기주의자들!" 삼성전자 노조의 파업 관련 기사에 붙은 댓글을 보면 노조에 부정적인 의견이 지배적이다. 에너지경제신문이 최근 리얼미터에 의뢰해 조사한 여론조사에서도 국민 10명 중 7명은 파업을 반대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대한민국 경제를 든든하게 지탱하고 있는 대표 기업인데 이 회사 노조는 칭찬받기는커녕 '국민 밉상'이 됐다. 왜 이런 서글픈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우리나라 노동운동은 국민으로부터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전두환 군사 정권을 끌어내린 1987년 6월 항쟁에서 노동자들의 참여는 결정적 힘으로 작용했다. 그해 7월 이후 많은 기업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됐고, 연대를 통해 노동계는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태동과 성장도 민주화 운동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측면을 고려했을 때 영업이익의 15%를, 그것도 상한선 없는 성과급을 고집하는 초기업노동조합 삼성전자 지부(초기업노조)의 행태는 이해하기 어렵다. 노동 약자를 위한 배려와 연대라는 한국 노동운동의 핵심 가치는 뒷전이고 이기적인 목표에만 매달리고 있어서다. 기업이 이익을 노동자와 나누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삼성전자 같은 한국 대표 기업은 성과급을 책정할 때도 국민 수용성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고 460만 명 이상이 투자하는 국민기업이기 때문이다. 노조가 요구하는 '성과급 6억'은 반도체 사업부에 속한 7만 여명의 조합원을 제외하고 모든 국민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준다. 영업이익이 아무리 많아도 일반 국민이 수긍하기 어려운 거액이다. 삼성전자 협력업체 중에 평균 연봉이 1억 원 넘는 곳은 많지 않을 것이다. 협력업체 직원들도 반도체 최대 실적의 공로자들이다. 협력업체 외에도 성과를 공유해야 할 기여자는 많다. 노조의 요구는 이들의 몫까지 챙기겠다는 심보로 보일 수밖에 없다. 과도한 이익 배분은 반도체 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 일회성 비용인 성과급에 너무 많은 재원을 쓰면 투자 여력이 줄게 마련이다. 삼성전자가 기술 초격차를 유지하려면 천문학적인 투자가 필요하다. 반도체 같은 첨단 분야는 기술 경쟁에서 한 번 밀리기 시작하면 회복하기 어렵다. 그 사례는 멀리 갈 것도 없다. 몇 년 전 삼성전자는 고대역메모리(HBM) 반도체 투자 시기를 놓친 탓에 SK하이닉스에 선두 자리를 내줬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삼성전자 주주들이 노조의 성과급 요구를 우려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제때 투자하지 못해 기술력이 떨어지면 기업가치와 주가 추락은 불가피하다. 초기업노조의 더 한심한 작태는 같은 회사의 다른 노조의 목소리를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삼성전자 2대 노조는 전국삼성전자노조이고, 3대 노조는 삼성전자노조동행이다. 두 노조는 반도체 사업부 성과급에만 집중하는 초기업노조에 반발하고 있다. 이미 많은 조합원이 초기업노조가 주도하는 공동 투쟁에서 이탈하고 있다. 자기 밥그릇만 챙기겠다며 노조끼리 이렇게 반목하고 갈등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결국 삼성전자 노조가 '국민 밉상'이 된 이유는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요구는 이익 단체의 지대 추구이자 기득권 지키기와 다를 바 없다. 연대와 약자 존중이라는 노동운동의 핵심 가치를 외면한 채 파업이라는 물리력만으로 뜻을 관철하겠다는 전략은 결코 국민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삼성전자 실적은 반도체 사업부 직원들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다른 사업부 동료들과 협력업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주주 등 수많은 이해관계자가 협력해 이룬 결실이다. 이를 노조가 독차지하려는 것은 과욕이며 정의롭지 못하다. 박승흡 전태일재단 이사장은 한 언론 기고문에서 이런 노조를 향해 따끔한 일침을 놓았다. “성과를 사유화하는 구조를 넘어서지 못하면 노동운동은 고립될 수밖에 없다." '성과급 6억'을 고집할수록 삼성전자 노조는 국민으로부터 외면받고 고립될 수밖에 없다. 지금이라도 무리한 요구와 파업 위협을 접고 협력업체 노동자 등 약자에 대한 배려와 연대로 투쟁 방향을 틀어야 한다. 장박원 편집국장 jangbak@ekn.kr

트럼프의 착각과 역사의 경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26일(현지시간) 미국 CBS 방송과 인터뷰하며 “우리는 미친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이틀 전 백악관 출입기자협회 주최 만찬 도중 발생한 총격 사건을 언급하며 한 말이다. 하지만 다른 맥락에서 '미친 세상'을 만들고 있는 장본인은 바로 트럼프다. 이란과 명분 없는 전쟁을 두 달 이상 끌면서 전 세계를 고통 속에 몰아넣고 있다. 특히 원유의 70%를 중동에서 수입하는 한국의 피해는 극심하다. 우리 경제는 고유가로 인한 고물가와 고환율, 고금리의 3고(高)의 늪에 빠질 위험이 점점 커지고 있다. 트럼프가 촉발한 '미친 전쟁'에 이해관계가 없는 한국이 '짱돌'을 맞고 있는 셈이다. 트럼프의 기이한 언행은 집권 1기 때부터 나타났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2017년 뉴욕타임스에 로마제국 폭군의 대명사인 칼리굴라와 트럼프를 비유하는 세간의 평가가 부당하다는 기고문을 올려 화제가 됐다. 칼리굴라는 최소한 제국의 기본 질서를 유지했으나 트럼프는 그렇지 않다는 게 근거였다. 칼리굴라가 아니라도 트럼프와 비슷한 유형의 폭군은 적지 않다. 그중에서 중국 전국시대 송나라 마지막 군주였던 강왕은 트럼프와 많이 닮았다. 명분 없는 전쟁과 자기 과시, 망상, 부도덕하고 안하무인인 성격까지 복사판이다. 강왕 재위 당시 송나라에는 호접몽과 대붕의 비유로 유명한 장자가 살았다. 장자는 정치에 극도의 혐오를 보였는데 아마도 강왕 탓이 클 것이다. 트럼프처럼 강왕은 과대망상 증세가 심했다. 그는 패자를 자임하며 느닷없이 제나라와 초나라, 위나라 등 주변국을 침략했다. 작은 나라들은 아예 멸망시켰다. 백성의 삶은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재원을 침략 전쟁을 위해 썼다. 몇 차례 승리는 강왕의 자만심과 망상을 더욱 부풀렸다. 그는 자신의 강한 면모를 보이기 위해 온갖 기행과 악행을 저질렀다. 가장 잘 알려진 일화가 '사천(射天)'이다. 그는 소의 피를 넣은 주머니를 긴 장대에 매달아 화살을 쏘게 했다. 주머니가 터져 피가 흩어져 떨어질 때 사람들로 하여금 “대왕께서 하늘에 화살을 쏘아 승리하셨다"고 외치게 했다. 이처럼 삼척동자도 알만한 뻔한 거짓으로 과시욕을 발산했다. 음흉한 꼼수를 쓰는 행태도 트럼프를 연상하게 만든다. 신하들에게는 술을 주고, 자신은 꿀물을 마시고는 주량을 뽐냈다. 신하 중에는 이를 알았던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진실을 말하는 순간 화살을 맞을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강왕의 잔인성은 반인륜적 폭거로 이어졌다. 그는 지방을 돌던 중에 우연히 뽕을 따는 미인을 발견했다. 그 지방 관리의 아내였다. 강왕은 강제로 여인을 끌고 갔다. 아내를 빼앗긴 관리는 화를 참지 못하고 자결했고 그의 아내도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높은 누대에서 몸을 던졌다. 간언을 올리는 신하들도 무사하지 못했다.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한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화살을 맞고 죽었다. 결국 옳은 말을 하는 신하는 자취를 감추고 아부꾼만 남게 됐다. 나라 안팎에서 원망과 원성은 커지는데 이런 현실을 직언할 참모가 없었던 지도자의 끝이 좋을 리 없다. 침략을 받은 나라들이 연합해 송나라를 공격했고 백성도 등을 돌렸다. 전쟁에서 패한 강왕은 도주하다가 제나라 군사들에게 잡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의 죽음과 함께 춘추전국시대 500년 넘게 명맥을 이어온 송나라도 멸망했다. 트럼프는 강왕과 비교되는 게 불편할지 모른다. 그러나 자기 과시와 망상, 아무 거리낌 없이 하는 거짓말, 직언하는 측근을 즉각 제거하는 모습은 두 사람이 정확하게 일치한다. 무엇보다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고 세계 경제를 멍들게 만드는 전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그의 태도가 미국에 대한 불신을 키우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트럼프는 자신을 영웅화하기에 바쁘다. 기자 회견에서 암살 시도가 반복되는 질문이 나오자 트럼프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암살을 연구해 봤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 가장 많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대상이 된다. 에이브러햄 링컨 같은 사람을 보라." 헛웃음을 자아내는 그의 망상적 답변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미국의 어두운 미래를 본다. 훗날 역사는 이번 중동 전쟁이 패권국 미국과 트럼프의 몰락을 가속하는 시발점이 됐다는 평가를 내릴 가능성이 크다. 장박원 편집국장 jangbak@ekn.kr

4월 위기설

사월이 되면 종종 인용되는 영시가 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로 시작되는 T.S 엘리엇의 '황무지'다. 이 시가 출간된 해는 1922년. 100년 넘는 긴 세월이 흘렀는데도 '잔인한 사월'은 여전히 현재성을 잃지 않았다. 특히 올해는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전쟁으로 은유가 아니라 사실이 됐다. 미국과 이란은 파괴해서는 안 될 에너지 시설에도 폭격을 가하는 등 전선을 넓히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3일 군사적 공격을 5일간 유예하겠다고 했으나 현재로서는 전쟁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그는 지난달 28일 이란 공습 직후에도 이번 전쟁을 '짧은 여행(excursion)'에 비유하며 곧 끝날 것이라고 장담했으나 결국 빈말이 되고 말았다. 미국과 이란의 '자해극'에 가까운 파괴 탓에 글로벌 경제는 벼랑 끝에 몰렸다. 전 세계 원유의 20%가 지나는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봉쇄되며 국제 유가는 급등락세를 반복하고 있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갑작스러운 원유 공급 중단으로 세계 경제는 벌써부터 몸살을 앓고 있다. 파티 비롤 국제에너지기구(IEA) 사무총장은 23일 호주에 열린 한 행사에 참석해 “이번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위기가 1970년대 두 차례 오일 쇼크와 2022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충격을 합쳐놓은 수준"이라고 경고했다. 우리는 수입 원유의 70%가 중동산이고 대부분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다. 이번 전쟁으로 다른 어느 나라보다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두 달 정도는 비축유와 긴급 조달한 대체 원유로 버틴다지만 전쟁이 길어지면 그 충격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직접 영향을 받는 석유와 화학 분야는 물론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 등 주력 산업이 셧다운될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다. 화장품과 라면 등 소비재 생산도 차질을 빚는다. 금융시장은 이미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휩싸였다. 주가는 급등락을 거듭하고 원-달러 환율도 정상 궤도를 이탈했다. 달러당 원화 가격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저 수준으로 하락했다. 고유가와 고환율은 시차를 두고 고물가로 이어진다. 한국은행이 물가를 잡기 위해 경기침체를 감수하고 금리를 올려야 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고물가·고환율·고금리(3고)'라는 유령이 다시 한국 경제를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전쟁이 끝나도 회복이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풀린다고 해도 당장 원유 수급이 원활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많은 에너지 시설이 파괴된 데다 중동 산유국이 생산량을 줄일 수 있다. 에너지 위기에 대비해 각국이 비축유를 다시 채우려는 수요까지 더해지면 에너지 가격의 고공 행진은 상당 기간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4월 위기설을 '설'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유다. 정부는 석유 최고가격제 도입과 유류세 인하, 25조 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 차량 5부제 같은 에너지 절약 캠페인 등 다각적인 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대부분 응급 처방에 해당한다. 긴급한 상황인 만큼 시간이 걸리는 정공법보다 임기응변이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정책도 공짜는 없는 법이다. 가격 통제나 세금 감면은 시장 왜곡과 재정 부담을 초래할 수 있다. 에너지 절약 캠페인이 원유 부족을 얼마나 해결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편성되는 추경의 활용 방안을 둘러싼 논란도 불 보듯 뻔하다. '4월 위기설'에 대해 정부는 비축유를 풀고 대체 물량을 확보했으니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안이한 태도는 '회색코뿔소'를 불러들일 수 있다. 경고 신호가 있고 얼마든지 예측할 수 있는데도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해서 입는 치명상은 전적으로 정부 책임이다. 우리의 통제 범위 밖에 있는 대외 변수에 대해서는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일 잘하는 정부'를 표방하고 있다. 지금의 위기는 이를 증명할 절호의 기회다. 정책의 우선순위와 실효성, 부작용까지 꼼꼼하게 살펴 위기를 넘겨야 한다. '사월은 잔인한 달'의 다음 구절은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다. 언제나 위기 속에는 기회가 있다. 장박원 편집국장 jangbak@ekn.kr

남대문시장 닮아가는 한국 경제

1990년대 말 유통 분야 담당 기자로 남대문시장을 취재했던 적이 있다. 이때만 해도 남대문시장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쇼핑객들이 찾았던 곳이었다. 기사 발굴을 위해 아동복과 숙녀복 등 품목별 상인 회장들을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눴고, 관리 회사인 남대문시장주식회사에 친한 취재원을 두기도 했다. 설이나 추석 명절을 앞두고는 의례처럼 남대문시장 르포 기사를 썼다. 이곳이야말로 밑바닥 경기를 가장 잘 알려주는 상징적 장소였기 때문이다. 명절 무렵 남대문시장은 '대목'이라는 말이 실감 날 만큼 인산인해를 이루곤 했다. 상점들 사이 좁을 통로를 걷다보면 어깨가 부딪치고 주변 사람의 발이 밟힐 정도였다. 하지만 남대문시장은 쇠락하고 있다. 얼마 전 한 일간지의 보도에 따르면 남대문시장 공실률은 20%에 육박한다. 비인기 상가는 10곳 중 7곳 넘게 비워져있다고 한다. 한때 수억 원에 달했던 권리금은 사라진지 오래고, 보증금을 받지 못할까 걱정하는 상인들도 적지 않다니 격세지감이 든다. 남대문시장은 여러 측면에서 성장률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한국 경제를 떠오르게 한다. 쇠락의 원인이 변화해야 할 때 변화를 거부한 사실에 있다는 점이 특히 그렇다. 남대문시장은 그때나 지금이나 재개발이 절실했다. 2만 개가 넘는 점포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물리적 환경은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 온라인 쇼핑이 대세가 된 상황에 맞춰 '전통시장'만의 장점을 살리는 전략을 찾아야 할 필요도 있었다. 그러나 남대문시장의 변화는 느리기만 했다. 1970년대부터 재개발 논의가 있었으나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변화는 거의 없었다. 건물주와 임차인, 상인들이 각자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여기에 더해 노점상들의 생계 문제도 걸려 있다. 조선시대 초기에 조성됐으니 600년의 역사를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과 공사 중에 유물이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발목을 잡았다. 국보인 숭례문이 인접해 고층 개발이 힘들고 공사비가 천정부지로 오르고 것도 걸림돌로 작용했다. 한국 경제도 남대문시장처럼 외통수에 걸려있다. 모든 분야에서 기득권 세력이 이무기처럼 똬리를 틀고 변화와 개혁을 막고 있다. 정치권만 해도 그렇다. 오는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는데 주요 정당은 참신한 인재보다는 권력자에 가까운 사람을 공천하려고 한다. 경제 정책도 말로는 중소벤처기업이 중요하다면서도 실제로는 대기업에 유리하게 설계돼 있다. 혁신과 성장의 원천이 될 모험 자본은 구색용일 뿐이고 대규모 정부 지원은 대기업에 쏠려있다. 노동 시장도 마찬가지다. 대기업 정규직 목소리만 크고 중소기업 노동자와 비정규직, 대리기사와 프리랜서 같은 특수고용형태근로종사자(특고) 등 근로 환경과 조건이 개선돼야 할 노동자들의 외침은 잘 들리지 않는다. 변화를 외면한 대가는 처참한 경제 지표로 나타난다. 잠재성장률은 0%대로 수렴 중이며 청년 일자리는 점점 말라간다. 원하는 일자리를 찾지 못해 그냥 쉴 수밖에 없는 청년이 70만 명이 넘는다. 코스피 지수가 5000을 넘어 6000으로 향하고 있으나 국민이 체감하는 경기는 썰렁하기만 하다. 내수 침체가 길어지며 폐업하는 소상공인이 연간 100만 명을 훌쩍 넘었다. 주식과 부동산 등 자산 가격이 오르는 것 역시 성장을 견인하기 보다는 부와 소득 양극화를 심화하는 부작용이 더 크다. 이재명 대통령은 설 명절을 앞둔 17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이런 글을 올렸다. “이제 대한민국을 바꿀 기회가 왔다. 부동산 공화국을 극복하는 것이든, 안전하고 평화로운 나라를 만드는 것이든, 공정하고 합리적인 세상을 만드는 것이든, 성장·발전하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든 두려움을 모두 떨쳐내고 촌음까지 아껴 사력을 다하겠다." 이런 간절함이 결실을 맺으려면 가장 먼저 우리 사회 곳곳에 뿌리 내린 기득권 세력의 교묘하면서도 굳건한 벽을 해체해야 한다. 이들을 보호하는 제도와 규제를 혁파하고 '창조적 파괴'에 인재와 자본이 몰리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 그래야 혁신의 불씨가 살아나고 일할 곳이 없어 절망의 늪에 빠진 청년들을 구할 수 있다. 장박원 편집국장 jangbak@ekn.kr

‘오천피’에 가려진 진실

연초부터 '국장'(국내 주식시장)이 불타오르고 있다. 하지만 주식 투자로 돈을 버는 사람보다 '불장'에도 자산 증식에서 소외된 이들이 더 많다. 서민들은 높은 물가에 생활비도 빠듯하다. 이들에게 주식 투자를 하라고 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뻔하다. “지금 당장 먹고살기도 힘든데 주식에 투자할 돈이 어디 있냐!" 이재명 정부는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를 '코리아 프리미엄(한국 증시 고평가)'으로 바꿔 오천피 시대를 열겠다고 한다. 새해 들어 코스피 지수는 파죽지세로 오르고 있다. 6일에는 4500을 돌파하며 다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런 상승세라면 '오천피' 달성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국장'에 대한 기대감은 작년 말부터 형성됐다. 본지가 리얼미터에 의뢰해 지난달 29~30일 실시한 현안 여론조사를 보면 국민의 절반 가까이(48.7%)가 올해 안에 코스피 지수의 5000 돌파 가능성에 대해 “그럴 것"이라고 답했다. 증권사들도 올해 코스피 상단을 5000선 위로 열어놓고 있다. 주요 상장사 실적 전망이 괜찮은 데다 정부의 증시 부양책이 상승 작용을 일으키며 지수를 끌어올릴 것이란 분석이 우세하다. 국내 주식시장으로 투자금이 들어오는 건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정부가 명심해야 할 점이 있다. 주가 상승이 궁극적으로 빈부 격차를 심화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경제학자인 모리구치 지아키 히토쓰바시대 교수가 발표한 자료를 인용해 최근 보도한 바에 따르면 일본 정부의 증시 부양책으로 상위 0.01%의 소득 점유율이 10년 만에 2배 이상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012년 1.19%에서 2023년 2.28%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1만~2만대였던 닛케이225 평균 주가(닛케이지수)도 5만대로 급등했다. 주식을 포함한 자산 소득을 빼면 2023년 상위 0.01%의 소득 점유율은 0.82%로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는 주가 상승이 빈부 격차를 확대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국내 증시는 장밋빛이지만 실물 경제는 살얼음판이다. 작년 수출액이 사상 처음으로 7000억 달러를 돌파했으나 그 온기가 경제 전반으로 확산하지 않고 있다. 수출 증가와 '불장' 모두 반도체가 이끌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극소소 대기업을 제외한 대부분의 제조업체는 혹한기를 겪고 있다. 기업들은 올해 실적 전망도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지정학적 리스크에 관세율 상승, 고환율 등 곳곳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급격하게 오른 물가는 서민들의 삶을 더욱 옥죄고 있다. 외식은 언감생심이고 마트나 시장에 나가기가 무서울 정도다. 지갑은 갈수록 얇아지고 있다. 물가 오른만큼 임금이 인상되지 않은 측면도 있지만 실직자가 많아지고 있다는 게 더 심각한 문제다. 고용 통계가 발표될 때마다 늘어나는 건 고령층을 위한 임시 일자리 뿐이다. 사회에 첫발을 떼야 하는 20대와 우리 사회의 허리 역할을 하는 30~40대를 위한 좋은 일자리는 사실상 줄고 있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현재 경기가 좋지 않고 전망도 불투명하다 보니 기업들이 사람을 뽑지 않기 때문이다. 내수 침체 장기화로 소상공인 폐업이 늘고 있는 것 역시 고용 한파의 원인이다. 작년 한 해 문을 닫은 소상공인은 100만 명이 넘는다. 그 결과 고용 시장엔 찬바람만 불고 있다. 원하는 일자리를 찾지 못해 그냥 쉬는 청년은 계속 늘고 있다. 구직 활동을 포기한 20대와 30대는 지난해 11월 기준으로 각각 41만 명과 33만 명에 달했다. 한창 일해야 할 청년 74만 명이 취업을 포기했다는 건 우리 경제 전체로 봐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이재명 정부와 여당은 코스피 지수 5000 달성 가능성에 환호할 때가 아니다. '오천피'에 가려진 현실을 냉정하게 봐야 한다. '불장'에 집착하다가는 더 큰 것을 놓칠 수 있다. 지금은 증시 부양책에 앞서 주식 투자는커녕 하루하루 살기 바쁜 서민들과 가난한 청년들이 좌절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할 때다. 장박원 편집국장 jangbak@ekn.kr

AI 시대, 에너지가 경제다

병오년 새해가 밝았다. 올해는 6월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있고, 11월엔 미국 중간 선거가 있다. 정치적으로 작년 못지 않은 격동의 한 해가 될 것이다. 하지만 최대 관심사는 역시 경제이다. 올해가 '붉은 말'의 해인 만큼 우리 경제가 역동성을 회복하며 뜨겁게 타오르기를 모든 국민이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내수 침체의 장기화와 높아진 관세 장벽에 고환율까지 악재만 쌓이고 있다. 하지만 위기를 타개할 해법이 없는 건 아니다. 급성장하는 인공지능(AI)에 올라타는 것도 그 중 하나다. AI는 우리 경제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활로가 될 수 있다. 그래픽처리장치(GUP) 등 핵심 AI 기술은 주로 미국이 보유하고 있지만 활용 분야는 무궁무진하다. 우리가 강점을 가진 산업에 AI를 성공적으로 접목한다면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글로벌 AI 시장 규모는 2024년 2500억 달러를 넘어섰다. 5년 뒤인 2030년 세계 AI 시장은 지금보다 적게는 수배, 많게는 수십 배 팽창할 것으로 전망된다. AI 거품론도 투자액 대비 수익 실현 시기가 늦어지고 있어 나온 것이지, AI 시장의 성장 자체를 의심하는 건 아니다. 거대한 AI 시장에서 어느 한 분야에서만 주도권을 잡는다면 한국 경제는 다시 비상할 수 있을 것이다. 고대역폭 메모리반도체(HBM) 시장에서는 이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선두를 달리고 있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되는 문제가 있다. AI 강국으로 발돋움하려면 값싼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거대한 양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처리해야 하는 AI 컴퓨팅에는 엄청난 양의 전력이 필요하다. 낮은 비용으로 전력을 생산하지 못하면 AI를 성장동력으로 삼기 힘들다는 뜻이다. AI 경제에서는 '에너지 집약'이 경쟁력의 핵심 요소가 될 게 분명하다. 챗GPT와 제미나이 등 생성형 AI 모델은 기존 포털 검색할 때와 비교해 최대 30배 많은 전력을 소비한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전 세계 AI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량은 2022년 약 460TWh(테라와트시)에서 올해 1000TWh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국제통화기금(IMF)도 2023년 약 300TWh였던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량이 2030년에는 1500TWh로 5배가량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은 지난해 12월 5일 이재명 대통령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한국은 AI 기술과 반도체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췄지만 이를 구현하는 데 필수적인 전력이 '약한 고리'라고 조언했다. 옳은 지적이다. 한국은 석유와 액화천연가스(LNG) 등 에너지 자원을 대부분 수입한다. 글로벌 물류가 마비되면 곧바로 에너지 위기에 직면할 위험이 있다. 원전과 신재생에너지가 있지만 이것만으로 급증하는 AI 전력 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 초고압 직류송전(HVDC) 등 전력망이 턱없이 부족한 데다 계통의 불균형도 너무 심하다.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은 전국 전력의 40%를 소비하면서도 전력 자급률은 60%대에 불과하다. 반면 원전과 재생에너지로 전기를 생산하는 해안 지역은 전기가 남아돌아 발전을 중단해야 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전력망을 더 촘촘하게 구축해야 한다. 하지만 주민 반발과 보상을 둘러싼 갈등으로 전력망 건설은 장기간 지연되기 일쑤다. 한국전력의 누적 적자와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것도 걸림돌로 작용한다. 이재명 정부는 '에너지 고속도로'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막대한 투자비와 주민 반발 등을 극복하지 못하면 공염불에 그칠 수 있다. 미국 등 주요국은 에너지 안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화석 연료를 포함해 모든 에너지 자원 개발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싼값의 전력을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해서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도 데이터 센터에 공급할 전력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예컨대 마이크로소프트(MS)는 영구 폐쇄됐던 쓰리마일 섬 원전을 재가동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각국 정부와 기업이 이렇게 까지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AI시대에는 에너지가 경제를 지탱하는 근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값싼 에너지 확보와 전력망 구축에 더 속도를 내야 한다. 가격 경쟁력과 공급의 안정성, 탄소 감축 등 상충하는 목표를 모두 충족하는 에너지 믹스의 '황금 분할선'을 찾는 게 관건이다. 이를 위해선 신재생에너지 뿐 아니라 원전을 포함해 모든 자원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올해는 비상하는 AI의 날개를 달고 우리 경제가 붉은 말처럼 다시 도약하는 원년이 되기를 기대한다. 장박원 편집국장 jangbak@ekn.kr

아직도 요원한 윤석열 청산

'12·3 비상계엄' 관련 내란·외환 의혹을 수사하는 특검이 오는 14일 종료를 앞두고 있다. 윤석열이 느닷없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상식적 차원에서 너무나도 명백한 위헌, 위법적인 범죄다. 그런데 내란 재판은 1년 넘게 어이지고 있다. 이러다가 윤석열이 다시 풀려날 수도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 책임이 막중한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에 대해 공식적인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반성과 사과는커녕 모든 잘못이 민주당에 있다고 강변한다. '친윤'이 말려도 막무가내다. 국민의힘 당원 중에는 불법 계엄을 옹호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런 모습은 대다수 국민에게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윤석열 정부의 실정이 남긴 폐단은 한둘이 아니다. 부자 감세로 세수 부족 사태를 유발했고, 연구개발(R&D) 예산을 깎는 바람에 인재가 이탈하며 과학기술 경쟁력이 크게 떨어졌다. 하지만 가장 심각한 후유증은 국가 공동체를 위협하는 극우 세력의 발호다. 예전엔 거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극우주의자들은 제1야당인 국민의힘에서 주류 행세를 하고 있다. 무자격자가 권력을 잡아 국가 위기를 초래한 사례는 수없이 많다. 이런 점에서 윤석열은 주나라(서주) 말기 여왕, 유왕과 많이 닮았다. 여왕은 '입틀막'의 고사를 남겼고 유왕은 애첩을 위해 국가의 근간을 무너뜨렸다. 여왕은 비밀경찰을 대거 풀어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을 마구 잡아들여 죽였다. 그래서 백성들은 길에서도 입을 열지 않고 눈으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도로이목(道路以目)'이라는 고사가 나온 연유다. 지난해 2월 한국과학기술원 학위 수여식에서 윤석열이 축사하는 도중에 한 졸업생이 연구개발 예산 삭감에 항의했다. 경호원은 그의 입을 손으로 막고 팔다리를 들어 행사장 밖으로 끌고 나갔다. 이 '입틀막' 장면은 윤석열의 불통과 언론 탄압의 상징이 됐다. 김건희 방탄을 위한 '권력 사유화'는 더 심각한 문제다. 이는 서주를 망하게 한 유왕을 연상케 한다. 유왕은 후궁인 포사를 위해 차마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질렀다. 웃지 않는 포사를 웃기려고 봉화를 올렸다. 당시 봉화는 국가 존립의 최후 보루였다. 이민족이 침입했을 때 지방에 있는 제후국 군대를 즉시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이처럼 귀중한 공적 자산을 연인의 미소를 보려고 남용한 것이다. 윤석열은 구치소에 갇혀 있으면서도 변호인에게 김건희를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특검은 불법 계엄의 동기가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과 뇌물 수수 등으로 처벌 위기에 처한 김건희를 구하기 위한 것으로 의심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비상계엄은 유왕이 포사를 웃게 하려고 봉화를 올린 것과 다름없다. 유왕은 또 후궁인 포사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고 적장자를 제거하려 했다. 이는 윤석열이 정권 초기에 국민의힘 대표였던 이준석을 몰아내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인물로 당대표를 바꾼 상황을 떠오르게 한다. 여왕과 유왕의 말로는 비참했다. 여왕의 폭정에 백성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주나라판 '빛의 혁명'이었다. 여왕은 수도에서 탈출해 '체'라는 지역으로 도주했고 그곳에서 여생을 마감했다. 유왕은 전쟁 중에 비명횡사했다. 급히 봉화를 올렸으나 제후의 군대는 오지 않았다. 포사를 위해 봉화를 올린 장난이 부메랑이 됐다. 주나라판 '양치기 소년'이 된 셈이다. 윤석열의 끝도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지도자의 몰락이 개인 차원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왕이 권좌에서 쫓겨난 이후 주나라는 14년 동안 군주가 없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한다. 중국 역사에서 이 시기를 '공화'라고 한다. 이때 주나라의 정통성과 국력은 급격히 추락했다. 그 이후 여왕의 아들 선왕이 쇠락한 국가를 다시 살리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가 죽고 권력을 잡은 이가 바로 유왕이다. 우리 국민은 목숨을 걸고 불법 계엄을 막았다. 하지만 내란의 후유증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다. 두고두고 국가를 쇠락시키는 독소가 될 게 분명하다. 윤석열 청산은 사법적 심판으로 끝나지 않는다. 정치와 경제, 사회, 교육 등 전 분야에 걸친 개혁으로 국가 시스템을 바꿔놓아야 가능하다. 정파적 이익을 앞세워 극단적 갈등을 부추기는 정치, 낡은 규제와 제도에 포획된 경제 체제를 극복하는 게 시급한 과제다. 장박원 편집국장 jangbak@ekn.kr

고환율의 묵시록

환율이 달러당 1500원을 향해 질주 중이다. 21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환율은 7개월 만에 1470원을 돌파했다. 이런 추세라면 올해 환율은 역대 최고치를 기록할 가능성이 높다. 세계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은 물론 달러가 완전히 고갈되며 외환위기를 겪었던 1998년에도 연평균 환율은 1400원을 넘지 않았다. 경제 위기가 아닌데도 환율이 고공 행진하는 건 분명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앞으로 고환율이 '뉴노멀'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우리 경제는 보호무역주의 바람이 거센 와중에도 양호한 수출 실적을 올리고 있다. 반도체 등 주력 산업이 선방하며 올해도 경상수지 흑자를 견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증시도 변동성이 크기는 하지만 이재명 정부의 주가 부양책에 힘입어 많이 올랐다. 시중 유동성 역시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각국이 돈줄을 조이던 때와 비교하면 좋아졌다. 원화 가치가 이렇게까지 떨어질 상황은 아닌 것이다. 물론 수급 측면에서 고환율 흐름을 설명할 수는 있다. 기업과 연기금, 개인이 모두 해외 투자를 급속히 늘리며 달러 수요가 폭증한 건 분명하다. 특히 엔비디아 같은 미국 주식에 투자하는 서학개미는 갈수록 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최근 10년 순대외자산은 100배가량 증가했다. 달러 수요가 늘어나니 환율이 높아지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 고환율로 우리 경제가 당장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 외환보유고 대비 단기 외채 비율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다. 재정 적자와 가계부채 증가 속도가 빠르기는 하지만 국가 신용등급 역시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환율 문제는 수급 측면에서만 볼 사안이 아니다. 가파른 환율 상승을 방치하면 실물 경제에 멍이 든다. 고환율이 고물가와 고금리, 저성장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다. 한 나라의 통화 가치는 해당 국가의 경제력을 보여주는 척도 중 하나다. 선진국 돈은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 화폐보다 비싸다. 그 비율이 환율이다. 원화 가격의 달러 대비 하락 폭은 다른 나라보다 과도하게 큰 편이다. 이는 달러 수요가 늘어난 현상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다. 한국 경제의 기초 체력이 약해졌고 앞으로 더 약해질 것이라는 시장 컨센서스도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저출생 고령화로 노동력이 줄고 자본 투입과 혁신성이 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갈수록 뚜렷해지는 성장률 둔화는 우리 경제가 앓고 있는 중병을 그대로 보여준다. 한국은 이미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보다도 경제 성장률이 낮아졌다. 잠재성장률이 0%대로 추락하는 것도 시간문제다. 성장하지 못하는 국가에서는 기업 뿐 아니라 개인도 투자 수익을 올릴 기회를 찾기 어렵다. 투자 매력도가 떨어진다. 기업이든 개인이든 투자 수익률을 높이려면 어쩔 수 없이 해외로 나가야 한다. 이런 한국 경제의 앞날은 불 보듯 뻔하다. 국가와 국민은 빈곤해질 것이다. '눈 떠보니 선진국'이었던 대한민국이 '눈 떠보니 후진국'으로 전락할 수 있다. 고환율이 던지는 경고를 가볍게 봐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갑자기 치솟은 환율은 이미 실물 경제에 큰 부담이 되고 있다. 기업들은 해외에서 원자재를 들여와야 하기에 비용이 엄청나게 증가했다. 높은 환율은 수입품 가격을 밀어 올려 국내 물가를 불안하게 만든다. 고환율 고물가는 경기 부양을 위한 금리 인하의 걸림돌로 작용한다. 금융당국은 가파른 환율 상승을 방관해서는 안 된다. 외환시장에 직접 개입하기는 어렵겠지만 뒷북 대응이 되지 않도록 적절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 눈덩이처럼 커지는 기업 부담을 덜어주고 투자 자금의 국외 유출도 줄일 수 있다. 장기적으로는 각 분야의 구조 개편을 통해 효율적인 사회 경제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기득권을 보호하는 시대착오적인 제도와 규제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데 이것부터 제거해야 한다. 규제 개혁 외에도 노동 개혁과 대기업 쏠림 완화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있도록 교육 분야의 대개혁도 시급하다. 경제 성장의 핵심 동력인 혁신의 화수분은 교육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고환율은 이런 도전에 제대로 응전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미래가 어두울 것이라는 묵시록일 수 있다. 장박원 편집국장 jangbak@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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