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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박원 기자

안녕하세요 에너지경제 신문 장박원 기자 입니다.
  • 편집국장
  • jangbak@ekn.kr
‘오천피’에 가려진 진실

연초부터 '국장'(국내 주식시장)이 불타오르고 있다. 하지만 주식 투자로 돈을 버는 사람보다 '불장'에도 자산 증식에서 소외된 이들이 더 많다. 서민들은 높은 물가에 생활비도 빠듯하다. 이들에게 주식 투자를 하라고 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뻔하다. “지금 당장 먹고살기도 힘든데 주식에 투자할 돈이 어디 있냐!" 이재명 정부는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를 '코리아 프리미엄(한국 증시 고평가)'으로 바꿔 오천피 시대를 열겠다고 한다. 새해 들어 코스피 지수는 파죽지세로 오르고 있다. 6일에는 4500을 돌파하며 다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런 상승세라면 '오천피' 달성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국장'에 대한 기대감은 작년 말부터 형성됐다. 본지가 리얼미터에 의뢰해 지난달 29~30일 실시한 현안 여론조사를 보면 국민의 절반 가까이(48.7%)가 올해 안에 코스피 지수의 5000 돌파 가능성에 대해 “그럴 것"이라고 답했다. 증권사들도 올해 코스피 상단을 5000선 위로 열어놓고 있다. 주요 상장사 실적 전망이 괜찮은 데다 정부의 증시 부양책이 상승 작용을 일으키며 지수를 끌어올릴 것이란 분석이 우세하다. 국내 주식시장으로 투자금이 들어오는 건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정부가 명심해야 할 점이 있다. 주가 상승이 궁극적으로 빈부 격차를 심화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경제학자인 모리구치 지아키 히토쓰바시대 교수가 발표한 자료를 인용해 최근 보도한 바에 따르면 일본 정부의 증시 부양책으로 상위 0.01%의 소득 점유율이 10년 만에 2배 이상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012년 1.19%에서 2023년 2.28%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1만~2만대였던 닛케이225 평균 주가(닛케이지수)도 5만대로 급등했다. 주식을 포함한 자산 소득을 빼면 2023년 상위 0.01%의 소득 점유율은 0.82%로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는 주가 상승이 빈부 격차를 확대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국내 증시는 장밋빛이지만 실물 경제는 살얼음판이다. 작년 수출액이 사상 처음으로 7000억 달러를 돌파했으나 그 온기가 경제 전반으로 확산하지 않고 있다. 수출 증가와 '불장' 모두 반도체가 이끌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극소소 대기업을 제외한 대부분의 제조업체는 혹한기를 겪고 있다. 기업들은 올해 실적 전망도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지정학적 리스크에 관세율 상승, 고환율 등 곳곳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급격하게 오른 물가는 서민들의 삶을 더욱 옥죄고 있다. 외식은 언감생심이고 마트나 시장에 나가기가 무서울 정도다. 지갑은 갈수록 얇아지고 있다. 물가 오른만큼 임금이 인상되지 않은 측면도 있지만 실직자가 많아지고 있다는 게 더 심각한 문제다. 고용 통계가 발표될 때마다 늘어나는 건 고령층을 위한 임시 일자리 뿐이다. 사회에 첫발을 떼야 하는 20대와 우리 사회의 허리 역할을 하는 30~40대를 위한 좋은 일자리는 사실상 줄고 있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현재 경기가 좋지 않고 전망도 불투명하다 보니 기업들이 사람을 뽑지 않기 때문이다. 내수 침체 장기화로 소상공인 폐업이 늘고 있는 것 역시 고용 한파의 원인이다. 작년 한 해 문을 닫은 소상공인은 100만 명이 넘는다. 그 결과 고용 시장엔 찬바람만 불고 있다. 원하는 일자리를 찾지 못해 그냥 쉬는 청년은 계속 늘고 있다. 구직 활동을 포기한 20대와 30대는 지난해 11월 기준으로 각각 41만 명과 33만 명에 달했다. 한창 일해야 할 청년 74만 명이 취업을 포기했다는 건 우리 경제 전체로 봐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이재명 정부와 여당은 코스피 지수 5000 달성 가능성에 환호할 때가 아니다. '오천피'에 가려진 현실을 냉정하게 봐야 한다. '불장'에 집착하다가는 더 큰 것을 놓칠 수 있다. 지금은 증시 부양책에 앞서 주식 투자는커녕 하루하루 살기 바쁜 서민들과 가난한 청년들이 좌절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할 때다. 장박원 편집국장 jangbak@ekn.kr

AI 시대, 에너지가 경제다

병오년 새해가 밝았다. 올해는 6월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있고, 11월엔 미국 중간 선거가 있다. 정치적으로 작년 못지 않은 격동의 한 해가 될 것이다. 하지만 최대 관심사는 역시 경제이다. 올해가 '붉은 말'의 해인 만큼 우리 경제가 역동성을 회복하며 뜨겁게 타오르기를 모든 국민이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내수 침체의 장기화와 높아진 관세 장벽에 고환율까지 악재만 쌓이고 있다. 하지만 위기를 타개할 해법이 없는 건 아니다. 급성장하는 인공지능(AI)에 올라타는 것도 그 중 하나다. AI는 우리 경제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활로가 될 수 있다. 그래픽처리장치(GUP) 등 핵심 AI 기술은 주로 미국이 보유하고 있지만 활용 분야는 무궁무진하다. 우리가 강점을 가진 산업에 AI를 성공적으로 접목한다면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글로벌 AI 시장 규모는 2024년 2500억 달러를 넘어섰다. 5년 뒤인 2030년 세계 AI 시장은 지금보다 적게는 수배, 많게는 수십 배 팽창할 것으로 전망된다. AI 거품론도 투자액 대비 수익 실현 시기가 늦어지고 있어 나온 것이지, AI 시장의 성장 자체를 의심하는 건 아니다. 거대한 AI 시장에서 어느 한 분야에서만 주도권을 잡는다면 한국 경제는 다시 비상할 수 있을 것이다. 고대역폭 메모리반도체(HBM) 시장에서는 이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선두를 달리고 있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되는 문제가 있다. AI 강국으로 발돋움하려면 값싼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거대한 양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처리해야 하는 AI 컴퓨팅에는 엄청난 양의 전력이 필요하다. 낮은 비용으로 전력을 생산하지 못하면 AI를 성장동력으로 삼기 힘들다는 뜻이다. AI 경제에서는 '에너지 집약'이 경쟁력의 핵심 요소가 될 게 분명하다. 챗GPT와 제미나이 등 생성형 AI 모델은 기존 포털 검색할 때와 비교해 최대 30배 많은 전력을 소비한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전 세계 AI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량은 2022년 약 460TWh(테라와트시)에서 올해 1000TWh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국제통화기금(IMF)도 2023년 약 300TWh였던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량이 2030년에는 1500TWh로 5배가량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은 지난해 12월 5일 이재명 대통령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한국은 AI 기술과 반도체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췄지만 이를 구현하는 데 필수적인 전력이 '약한 고리'라고 조언했다. 옳은 지적이다. 한국은 석유와 액화천연가스(LNG) 등 에너지 자원을 대부분 수입한다. 글로벌 물류가 마비되면 곧바로 에너지 위기에 직면할 위험이 있다. 원전과 신재생에너지가 있지만 이것만으로 급증하는 AI 전력 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 초고압 직류송전(HVDC) 등 전력망이 턱없이 부족한 데다 계통의 불균형도 너무 심하다.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은 전국 전력의 40%를 소비하면서도 전력 자급률은 60%대에 불과하다. 반면 원전과 재생에너지로 전기를 생산하는 해안 지역은 전기가 남아돌아 발전을 중단해야 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전력망을 더 촘촘하게 구축해야 한다. 하지만 주민 반발과 보상을 둘러싼 갈등으로 전력망 건설은 장기간 지연되기 일쑤다. 한국전력의 누적 적자와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것도 걸림돌로 작용한다. 이재명 정부는 '에너지 고속도로'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막대한 투자비와 주민 반발 등을 극복하지 못하면 공염불에 그칠 수 있다. 미국 등 주요국은 에너지 안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화석 연료를 포함해 모든 에너지 자원 개발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싼값의 전력을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해서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도 데이터 센터에 공급할 전력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예컨대 마이크로소프트(MS)는 영구 폐쇄됐던 쓰리마일 섬 원전을 재가동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각국 정부와 기업이 이렇게 까지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AI시대에는 에너지가 경제를 지탱하는 근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값싼 에너지 확보와 전력망 구축에 더 속도를 내야 한다. 가격 경쟁력과 공급의 안정성, 탄소 감축 등 상충하는 목표를 모두 충족하는 에너지 믹스의 '황금 분할선'을 찾는 게 관건이다. 이를 위해선 신재생에너지 뿐 아니라 원전을 포함해 모든 자원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올해는 비상하는 AI의 날개를 달고 우리 경제가 붉은 말처럼 다시 도약하는 원년이 되기를 기대한다. 장박원 편집국장 jangbak@ekn.kr

아직도 요원한 윤석열 청산

'12·3 비상계엄' 관련 내란·외환 의혹을 수사하는 특검이 오는 14일 종료를 앞두고 있다. 윤석열이 느닷없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상식적 차원에서 너무나도 명백한 위헌, 위법적인 범죄다. 그런데 내란 재판은 1년 넘게 어이지고 있다. 이러다가 윤석열이 다시 풀려날 수도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 책임이 막중한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에 대해 공식적인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반성과 사과는커녕 모든 잘못이 민주당에 있다고 강변한다. '친윤'이 말려도 막무가내다. 국민의힘 당원 중에는 불법 계엄을 옹호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런 모습은 대다수 국민에게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윤석열 정부의 실정이 남긴 폐단은 한둘이 아니다. 부자 감세로 세수 부족 사태를 유발했고, 연구개발(R&D) 예산을 깎는 바람에 인재가 이탈하며 과학기술 경쟁력이 크게 떨어졌다. 하지만 가장 심각한 후유증은 국가 공동체를 위협하는 극우 세력의 발호다. 예전엔 거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극우주의자들은 제1야당인 국민의힘에서 주류 행세를 하고 있다. 무자격자가 권력을 잡아 국가 위기를 초래한 사례는 수없이 많다. 이런 점에서 윤석열은 주나라(서주) 말기 여왕, 유왕과 많이 닮았다. 여왕은 '입틀막'의 고사를 남겼고 유왕은 애첩을 위해 국가의 근간을 무너뜨렸다. 여왕은 비밀경찰을 대거 풀어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을 마구 잡아들여 죽였다. 그래서 백성들은 길에서도 입을 열지 않고 눈으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도로이목(道路以目)'이라는 고사가 나온 연유다. 지난해 2월 한국과학기술원 학위 수여식에서 윤석열이 축사하는 도중에 한 졸업생이 연구개발 예산 삭감에 항의했다. 경호원은 그의 입을 손으로 막고 팔다리를 들어 행사장 밖으로 끌고 나갔다. 이 '입틀막' 장면은 윤석열의 불통과 언론 탄압의 상징이 됐다. 김건희 방탄을 위한 '권력 사유화'는 더 심각한 문제다. 이는 서주를 망하게 한 유왕을 연상케 한다. 유왕은 후궁인 포사를 위해 차마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질렀다. 웃지 않는 포사를 웃기려고 봉화를 올렸다. 당시 봉화는 국가 존립의 최후 보루였다. 이민족이 침입했을 때 지방에 있는 제후국 군대를 즉시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이처럼 귀중한 공적 자산을 연인의 미소를 보려고 남용한 것이다. 윤석열은 구치소에 갇혀 있으면서도 변호인에게 김건희를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특검은 불법 계엄의 동기가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과 뇌물 수수 등으로 처벌 위기에 처한 김건희를 구하기 위한 것으로 의심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비상계엄은 유왕이 포사를 웃게 하려고 봉화를 올린 것과 다름없다. 유왕은 또 후궁인 포사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고 적장자를 제거하려 했다. 이는 윤석열이 정권 초기에 국민의힘 대표였던 이준석을 몰아내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인물로 당대표를 바꾼 상황을 떠오르게 한다. 여왕과 유왕의 말로는 비참했다. 여왕의 폭정에 백성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주나라판 '빛의 혁명'이었다. 여왕은 수도에서 탈출해 '체'라는 지역으로 도주했고 그곳에서 여생을 마감했다. 유왕은 전쟁 중에 비명횡사했다. 급히 봉화를 올렸으나 제후의 군대는 오지 않았다. 포사를 위해 봉화를 올린 장난이 부메랑이 됐다. 주나라판 '양치기 소년'이 된 셈이다. 윤석열의 끝도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지도자의 몰락이 개인 차원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왕이 권좌에서 쫓겨난 이후 주나라는 14년 동안 군주가 없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한다. 중국 역사에서 이 시기를 '공화'라고 한다. 이때 주나라의 정통성과 국력은 급격히 추락했다. 그 이후 여왕의 아들 선왕이 쇠락한 국가를 다시 살리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가 죽고 권력을 잡은 이가 바로 유왕이다. 우리 국민은 목숨을 걸고 불법 계엄을 막았다. 하지만 내란의 후유증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다. 두고두고 국가를 쇠락시키는 독소가 될 게 분명하다. 윤석열 청산은 사법적 심판으로 끝나지 않는다. 정치와 경제, 사회, 교육 등 전 분야에 걸친 개혁으로 국가 시스템을 바꿔놓아야 가능하다. 정파적 이익을 앞세워 극단적 갈등을 부추기는 정치, 낡은 규제와 제도에 포획된 경제 체제를 극복하는 게 시급한 과제다. 장박원 편집국장 jangbak@ekn.kr

고환율의 묵시록

환율이 달러당 1500원을 향해 질주 중이다. 21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환율은 7개월 만에 1470원을 돌파했다. 이런 추세라면 올해 환율은 역대 최고치를 기록할 가능성이 높다. 세계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은 물론 달러가 완전히 고갈되며 외환위기를 겪었던 1998년에도 연평균 환율은 1400원을 넘지 않았다. 경제 위기가 아닌데도 환율이 고공 행진하는 건 분명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앞으로 고환율이 '뉴노멀'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우리 경제는 보호무역주의 바람이 거센 와중에도 양호한 수출 실적을 올리고 있다. 반도체 등 주력 산업이 선방하며 올해도 경상수지 흑자를 견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증시도 변동성이 크기는 하지만 이재명 정부의 주가 부양책에 힘입어 많이 올랐다. 시중 유동성 역시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각국이 돈줄을 조이던 때와 비교하면 좋아졌다. 원화 가치가 이렇게까지 떨어질 상황은 아닌 것이다. 물론 수급 측면에서 고환율 흐름을 설명할 수는 있다. 기업과 연기금, 개인이 모두 해외 투자를 급속히 늘리며 달러 수요가 폭증한 건 분명하다. 특히 엔비디아 같은 미국 주식에 투자하는 서학개미는 갈수록 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최근 10년 순대외자산은 100배가량 증가했다. 달러 수요가 늘어나니 환율이 높아지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 고환율로 우리 경제가 당장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 외환보유고 대비 단기 외채 비율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다. 재정 적자와 가계부채 증가 속도가 빠르기는 하지만 국가 신용등급 역시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환율 문제는 수급 측면에서만 볼 사안이 아니다. 가파른 환율 상승을 방치하면 실물 경제에 멍이 든다. 고환율이 고물가와 고금리, 저성장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다. 한 나라의 통화 가치는 해당 국가의 경제력을 보여주는 척도 중 하나다. 선진국 돈은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 화폐보다 비싸다. 그 비율이 환율이다. 원화 가격의 달러 대비 하락 폭은 다른 나라보다 과도하게 큰 편이다. 이는 달러 수요가 늘어난 현상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다. 한국 경제의 기초 체력이 약해졌고 앞으로 더 약해질 것이라는 시장 컨센서스도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저출생 고령화로 노동력이 줄고 자본 투입과 혁신성이 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갈수록 뚜렷해지는 성장률 둔화는 우리 경제가 앓고 있는 중병을 그대로 보여준다. 한국은 이미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보다도 경제 성장률이 낮아졌다. 잠재성장률이 0%대로 추락하는 것도 시간문제다. 성장하지 못하는 국가에서는 기업 뿐 아니라 개인도 투자 수익을 올릴 기회를 찾기 어렵다. 투자 매력도가 떨어진다. 기업이든 개인이든 투자 수익률을 높이려면 어쩔 수 없이 해외로 나가야 한다. 이런 한국 경제의 앞날은 불 보듯 뻔하다. 국가와 국민은 빈곤해질 것이다. '눈 떠보니 선진국'이었던 대한민국이 '눈 떠보니 후진국'으로 전락할 수 있다. 고환율이 던지는 경고를 가볍게 봐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갑자기 치솟은 환율은 이미 실물 경제에 큰 부담이 되고 있다. 기업들은 해외에서 원자재를 들여와야 하기에 비용이 엄청나게 증가했다. 높은 환율은 수입품 가격을 밀어 올려 국내 물가를 불안하게 만든다. 고환율 고물가는 경기 부양을 위한 금리 인하의 걸림돌로 작용한다. 금융당국은 가파른 환율 상승을 방관해서는 안 된다. 외환시장에 직접 개입하기는 어렵겠지만 뒷북 대응이 되지 않도록 적절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 눈덩이처럼 커지는 기업 부담을 덜어주고 투자 자금의 국외 유출도 줄일 수 있다. 장기적으로는 각 분야의 구조 개편을 통해 효율적인 사회 경제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기득권을 보호하는 시대착오적인 제도와 규제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데 이것부터 제거해야 한다. 규제 개혁 외에도 노동 개혁과 대기업 쏠림 완화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있도록 교육 분야의 대개혁도 시급하다. 경제 성장의 핵심 동력인 혁신의 화수분은 교육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고환율은 이런 도전에 제대로 응전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미래가 어두울 것이라는 묵시록일 수 있다. 장박원 편집국장 jangbak@ekn.kr

대기업 역대급 투자 이행되려면

“국내에 1000조 원 이상 투자" 대기업 총수들은 지난 16일 이재명 대통령과 만나 한미 관세 협상 타결 후속 대책을 논의하며 우리 경제에 통 큰 선물을 선사했다. 천문학적 대미 투자로 국내 투자가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를 씻어내는 발표였다. 기업인들은 한미 관세 협상을 잘 마무리한 정부를 높이 평가했다. 미국의 막무가내 압박 속에서도 나름 선방했고, 그 결과 기업 부담을 줄여줬다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외환시장 충격을 차단하기 위해 연간 200억 달러로 현금 투자를 제한했으나 대미 투자 총액인 3500억 달러는 우리 정부와 기업이 감당하기에는 만만치 않은 금액이다. 만약 협상이 장기화하거나 결렬됐다면 우리 기업들이 받을 타격은 가늠하기 힘들 정도였다. 이런 불확실성이 제거됐으니 한시름 놓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대통령실에서 열린 대책 회의를 생중계한 동영상을 보면 국내 투자 계획을 발표하는 대기업 총수들의 표정이 밝았다. 하지만 기업들이 약속한 투자를 이행할지는 두고 볼 문제다. 양질의 일자리 창출 같은 효과를 국민이 체감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다. 본지를 포함해 거의 모든 매체는 '재계, 1000조 원 통 큰 투자'를 주요 기사로 다뤘다. 그러나 참신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적지 않은 사람은 기시감을 가졌을 것이다. 그동안 대기업들은 정권 초기 적게는 수조 원, 많게는 수백조 원대 투자 계획을 발표하곤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3년 6개월 전에도 똑같은 기사를 봤다. 주연은 그대로이고 조연만 바뀌었다. 윤석열 전 대통령에서 이재명 대통령으로. 주연은 이재용 삼성 회장, 정의성 현대차 회장, 최태원 SK 회장, 구광모 LG 회장 등 대기업 총수들이다. 투자 명분이 달라지기도 했다. 윤석열 정부 때는 '민간 주도 성장'에 부응한다는 점이 부각됐고, 지금은 한미 관세 협상 타결로 우려되는 국내 투자 위축을 막겠다는 점이 강조됐다. 대기업들이 국내 투자에 대한 약속을 지켰는지는 이재명 정부 후반이 돼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투자는 총수 의지만으로는 실행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기업의 중장기 전략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 국내도 해외 못지않은 투자 리스크가 상존한다. 무엇보다 기업 활동을 저해하는 낡은 규제와 비효율적인 사회 시스템이 가장 큰 위험 요인이다. 과거 정부는 대기업들이 투자와 고용 계획을 발표할 때마다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겠다고 외쳤다. 하지만 말뿐이었다. 그렇게 하려는 의지는 빈약했고 그럴 역량은 더 부족했다. 실용과 능력을 내세우는 이재명 정부는 다를까. 기업이 투자하면 수익을 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지금까지 내놓은 정책을 보면 회의적이다. 사적인 자리에서 기업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이재명 정부에서는 기업 하기 더 힘들어질 것이라고 하소연한다. 정부가 투자 여건을 만들지 못하면 결국 투자는 실행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과거 정부에서 있었던 일이 되풀이 될 것이다. 낡은 규제를 걷어내고 구조 개혁을 통해 기업들이 마음껏 사업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지 않는다면 투자 약속은 빈말이 되고 말 게 뻔하다. 다시 정권이 바뀌고 대기업 총수들이 또 통 큰 투자 계획을 발표하는 '도돌이표'는 무한반복될 것이다. 물론 정부 책임만 있는 건 아니다. 대기업들도 정부 눈치를 보며 투자 계획을 급조한 측면이 없지 않다. 전 정부에서 발표한 내용을 살짝 바꿔 재탕한 부분도 눈에 띈다. 전반적인 투자 내용만 밝혔을 뿐 구체적인 일정과 금액은 외부인이 알기 어렵다. 영업 비밀이 포함돼 불가피한 점도 있을 것이다. 결국 기업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확인할 방법은 없는 셈이다. 이제 '덤앤더머'를 연상하게 만드는 정부와 기업의 '투자 발표 쇼'는 끝나야 한다. 성장률이 뚝뚝 떨어지는 상황에서 우리 경제의 근간인 대기업의 국내 투자는 생존이 걸린 문제다. 기업은 투자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고, 정부도 수시로 투자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장박원 편집국장 jangbak@ekn.kr

‘창조적 파괴’ 사라진 한국 경제…이유는?

올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필리프 아기옹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와 피터 하윗 브라운대 명예교수는 조지프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 혁신 원리를 수리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을 제시했다. 아기옹-하윗 모형이 그것인데 핵심 메시지는 최적의 경쟁 환경에서 창조적 파괴를 통한 혁신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모형에 따르면 기업이 시장을 독점해 경쟁할 필요가 없거나 과도한 경쟁으로 혁신에 성공해도 초과 이윤을 장담할 수 없을 때는 공격적인 혁신에 나서지 않는다. 양 극단의 중간 지대에서 창조적 파괴의 동인을 얻는다. 가로축을 경쟁 정도, 세로축을 혁신 활동으로 놓고 봤을 때 역 U자의 비선형의 그림이 그려진다는 것이다. 이는 상식적으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기업이 시장을 독점 또는 과점하고 있으면 굳이 혁신할 이유가 없다. 수익성이 떨어지면 공급을 줄여 가격을 높이면 그만이다. 경쟁이 심해도 공격적 혁신을 꺼리게 된다. 기업이 '창조적 파괴'를 목표로 신기술이나 제품을 개발하려는 목적은 이윤 증대에 있다. 막대한 자금을 날릴 위험이 큰 데도 연구개발(R&D) 투자에 나서는 이유는 독보적인 기술로 미래 시장을 독점하기 위한 것이다. 문제는 너도나도 창조적 파괴를 기대하며 신기술에 투자하는 상황이다. 혁신 기술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면 기업들의 이윤 증대분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기업은 R&D 투자를 줄이면서 혁신 활동은 역 U자의 하강 구간에 접어든다. 아기옹-하윗 모형은 한국 경제에서 창조적 파괴 수준의 혁신이 왜 어려운지 설명해 준다. 창조적 파괴가 이루어지려면 시장에 새로운 플레이어가 진입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경제력이 대기업과 특정 산업에 집중된 상태라 경쟁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현대차 등 대기업이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경제를 주도 하는 산업도 반도체와 자동차 등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적다. 그러다 보니 대기업 한두 곳의 실적이 추락하면 경제 전체가 휘청한다. 이처럼 한국 경제는 소수의 지배적 기업들이 안정적으로 과점하는 구조가 고착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강자가 출현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물론 대기업도 혁신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삼성전자의 R&D 투자는 다른 세계적인 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하지만 대기업의 혁신은 '창조적 파괴'를 동반하지 않는다. 기존 질서를 뒤흔드는 창조적 파괴보다는 시장 지배력을 방어하고 유지하기 위한 '점진적 혁신'에 치중하기 때문이다. 범위를 국가 차원으로 넓혀도 그렇다. 한국은 어느 나라보다 R&D에 많은 예산을 쏟아붓고 있으나 이것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혁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우리도 1970년대 산업화 초기에는 많은 혁신이 이루어졌다. 기업들은 신기술에 과감하게 투자해 시장 지배력을 높이려 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창조적 파괴가 일어났다. 그때는 누가 최종 승자가 될지 알 수 없는 '백가쟁명'의 시대였다. 그러다 보니 아기옹-하윗 모형의 역 U자의 상위 구간을 유지할 수 있었다. 대기업들은 지금과 달리 창조적 파괴 수준의 혁신에 도전했고, 이는 대한민국이 10대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하는 기반이 됐다. 하윗 교수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발표 직후인 지난 13일 기자회견에서 한국 경제가 혁신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확고한 반독점 정책을 가지는 게 매우 중요하다. 혁신은 젊은 층에서 더 쉽게 일어난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혁신의 흐름이 개별 국가의 (고령화) 인구통계 변수에 의해 제한되지 않도록 다른 곳에서 오는 아이디어에 개방적이어야 한다." 소수 대기업이 아닌 청년 기업가들이 창조적 파괴에 끊임없이 도전할 수 있는 경쟁적 시장 환경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석학들의 충고가 던지는 정책적 함의는 자명하다. 자본과 네트워크, 인재가 소수 대기업에 쏠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의 경쟁력과 매력도를 획기적으로 높이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청년들이 대기업 입사에만 매달리지 않고 스타트업과 벤처를 설립해 창조적인 신사업에 도전할 수 있다. 대기업의 기술 탈취을 막고 모험 자본이 될성부른 신생 기업에 투자될 수 있도록 벤처산업 생태계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 미국처럼 인수합병(M&A) 시장을 활성화해 창업하면 큰돈을 벌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핵심이다. 대기업에 인재와 자원을 더 쏠리게 할 섣부른 규제 완화는 금물이다. 규제를 풀더라도 혁신을 유도할 경쟁 환경 조성을 최우선 순위에 둬야 한다. “규제되지 않는 독점은 혁신을 방해한다." 하윗 교수의 이 말에서 '창조적 파괴'가 사라진 한국 경제를 구할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장박원 편집국장 jangbak@ekn.kr

[장박원 칼럼] 트럼프 식 정치는 정치가 아니고 술수

우리 국민 10명 중 8명이 한미 관세 협상에서 미국이 3500억 달러를 선불 요구하는 게 부당하다고 답했다.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리얼미터가 전국 유권자 1008명을 상대로 긴급 현안 여론조사를 한 결과다. 미국의 압박에 대한 반감은 영남과 호남, 보수와 진보, 세대와 상관 없이 고르게 나타났다. 어찌 보면 이는 당연한 조사 결과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최근 언행을 보면 과연 대한민국을 진정한 동맹 국가로 존중하고 있는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사실 한미동맹은 한국 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미국을 위한 부분도 상당하다. 대한민국은 동북아, 더 나아가 세계적인 질서와 균형 측면에서 미국의 이익에 큰 비 중을 차지한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은 주한미군 주둔이 미국의 이익과는 관계없는 것처럼 무례한 언행으로 외교 정책을 펴고 있다. 한미 무역 협상도 마찬가지다. 이재명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며 15%의 관세로 합의했으면서도 회담 내용이 귓전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3500억 달러 투자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들고 나왔다. 원금 회수 때까지 각각 50%씩 이익을 분배하고 원금 회수가 끝나고 나면 90%를 미국이 가져가겠다는 것이다. 더욱이 투자 방식이나 대상을 트럼프 대통령이 정하겠다고 한다. 횡포도 이런 횡포가 없다. 중세시대 노예를 팔고 사는 강자들의 착취성 경제 논리를 한미 무역 협상에 적용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미동맹은 한국의 전쟁 방어용 안보 만을 위한 70년 전과 성격이 완전히 달라졌다. 2025년 한미동맹은 같이 잘 사는 경제 동맹 위에 있다. 미국은 대한민국을 똑바로 인식해야 한다. 과거 우유나 밀가루를 원조 받던 나라가 아닌 세계 10위권의 경제국이며 군사력도 세계 5위 반열에 우뚝 선 선진국이다. 정치 측면에서도 대한민국 국민의 민주주의 역량은 충분하다.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는 동행하지 않을 수 없는 불가 분의 관계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성숙된 판단으로 미국을 지켜보면서도 지금의 트럼프 대통령 언행에 갸우뚱하는 분위기다. 진정한 우방이며 동맹국인가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본지가 의뢰한 리얼미터 조사에서 우리 국민 80% 이상이 한미 관세 협상이 부당하다고 답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한국의 의견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3500억 달러라는 현금은 우리 외환 보유액의 85%에 해당한다. 달러 부족으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겪은 우리 국민은 그 악몽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만약 미국이 우방과 동맹의 기본 이념을 무시하고 억지 요구를 꺾지 않는다면 우리 국민은 분노할 수밖에 없고 반 트럼프 정서는 더 확산할 것이다. 세계가 긴밀하게 연결되는 글로벌 시대에 트럼프 대통령은 정치를 하는 게 아니고 혼자만의 정치로 고립을 자초하고 있다. 관세로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 할 것 같지만 미국에게, 아니 트럼프 자신에게 부메랑이 될 게 뻔하다.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들과 관련 기업들도 스스로 무덤을 파면서까지 트럼프 대통령에게 순응하지 않을 것이다. 일부 국가는 이미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가 합당하지 않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간교하다 못해 치사한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 술수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기(MAGA)보다 국제사회에서 존경은커녕 고립을 자초하는 자충수가 될 것이다. 장박원 기자 jangbak@ekn.kr

[장박원 칼럼] ‘기후에너지환경부’ 이념에 갇히면 망한다

기후에너지환경부가 10월 1일 드디어 닻을 올린다. 기후 환경과 에너지 정책을 모두 총괄하는 부처의 필요성은 찬반이 극명하게 엇갈리며 오랜 기간 논의가 이어졌다. 국회미래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산업부 에너지 조직과 환경부를 합치려는 입법 활동이 시작된 건 2012년부터다. 이때부터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한 정부 부처의 지배구조(거버넌스) 개편과 관련한 법률 개정안이 지속적으로 발의됐다. 그러나 규제 부처인 환경부와 에너지 산업 육성을 담당하는 조직이 조화를 이룰 수 없을 것이라는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특히 기후 위기를 막아야 한다는 당위론에 에너지 안보가 뒷전으로 밀리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는 의견이 많았다. 기후에너지환경부 출범을 앞두고도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인공지능(AI) 사용이 확산하면 에너지 수요가 폭증할 텐데 환경 문제에 매달리다 전력 부족 사태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재생에너지에만 의존하다 보면 전기요금이 폭등할 수도 있다. 이를 막으려고 과거 정부처럼 전기요금을 억지로 묶어두면 많은 부작용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적자에 허덕이는 한국전력의 투자 여력이 급속이 떨어지며 급증하는 전력 수요에 대응할 수 없게 된다. 정부도 이런 걱정이 현실이 되는 것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기후 환경과 에너지 정책을 조화시킬 수 있을까.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11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밝힌 의견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정책을 놓고 이념 전쟁을 하면 안 된다. 에너지 믹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원전도 있는 건 써야 한다. 저는 철저한 실용주의자이다. 기후에너지환경부는 기후에너지부를 만들어서 환경부를 갖다 붙였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에너지부, 에너지 차관, 환경부서, 규제부서, 환경 담당 차관이 한 부서 안에서 막 갑론을박하며 정책을 결정하는 것하고 아예 독립 부서가 돼서 서로 말도 안 하는 거 하고 어떤 게 낫나. 에너지 분야는 내부 토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게 더 시간 절감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대통령은 이에 대한 근거로 전기차 보조금을 예로 들었다. 환경부 주도로 보조금을 주었더니 중국산 전기버스가 국내 시장을 장악했다는 것이다. 이는 환경 보존 측면만 생각해 보조금을 지급한 결과다. 만약 환경과 산업 정책을 담당하는 조직이 같은 부처에 있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렇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는 게 이 대통령 생각이다. “에너지와 기후 환경 정책을 지금처럼 따로 놔두면 안 된다. 차라리 에너지 담당 부서와 환경부서가 그 안에서 치열하게 토론하게 해야 한다." 이 대통령의 논리는 그럴 듯하지만 치명적인 함정이 있다. 현실과 괴리돼 있다는 점이다. 에너지 정책 담당자와 기후 환경 담당자가 치열한 토론을 통해 최선의 방안을 도출할 것이라는 기대는 기대로 끝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모든 조직에서는 파워 게임이 벌어진다. 이권을 놓고 다툰다. 이견을 가진 두 집단이 합의점을 찾지 못하면 결국 가장 큰 권력을 쥔 사람이 최종 결정을 내리게 된다. 정부 부처에서는 장관이 최종 결정권자다. 장관이 누구냐에 따라 에너지와 기후 정책은 일방적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 만약 장관이 기후 환경을 중시하는 전문가라면 에너지 안보가 소홀해질 수 있다. 에너지부와 환경부를 합친 유럽 국가들이 바로 이런 문제로 어려움에 겪고 있다. 이들 나라에서는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전기요금이 급등했다 . 미래 세대와 지구를 살리기 위해서는 탄소 배출을 줄여야 한다. 기후변화로 지구촌이 홍역을 앓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탄소 중립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탄소 중립이 모든 가치의 최상위에 있지는 않다. 꼭 가야 할 길이지만 국민 안전과 생명, 국가의 번영을 희생하면서까지 밀어붙여야 하는 지고지순의 가치라고는 할 수 없다. 기후에너지환경부가 '기후 이념'에 갇혀 에너지 산업을 등한시하면 국가 안보와 국민의 삶이 위협받을 수 있다. 기후에너지환경부가 탄소 중립과 에너지 안보 둘 중 하나를 고르는 식으로 정책을 펼쳐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실패가 불 보듯 뻔하다. 치열한 토론을 통해 최적의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우리보다 먼저 기후 환경과 에너지 조직을 하나의 부서로 합쳐 실패했던 유럽 국가들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정책을 놓고 이념 전쟁을 하면 안 된다. 나는 철저한 실용주의자다." 이재명 대통령은 기후에너지환경부의 성공으로 이 말을 증명해야 한다. 장박원 기자 jangbak@ekn.kr

[장박원 칼럼] ‘녹색 사기’라는 거짓 선동이 초래할 파국

현자들은 더 이상 나무를 베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이 섬에서 가장 큰 부족을 이끌고 있는 추장은 막무가내였다. 벌목으로 세상이 망할 것이라는 주장을 '사기'라며 목청을 높였다. 그는 부족 연합회의가 열린 자리에서도 열변을 토했다. “나무가 이렇게 많은데 무슨 소리를 하고 있나. 아무리 많은 나무를 베도 숲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과거에도 나무가 곧 없어질 것이라고 했으나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게 드러났다. 저 숲을 보라. 우리 조상 때보다는 덜 하지만 여전히 울창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이 섬을 살리기 위해 벌목을 자제해야 한다는 건 나무 가격을 높이려는 자들의 음흉한 음모일 뿐이다. 누구나 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쓰고 배를 만들게 해야 한다. 그래야 풍요로운 삶을 이어갈 수 있다. 벌목을 막는 모든 논리와 주장은 사기다. 베는 나무 수를 줄였다가 다시 늘린 몇몇 부족을 보라. 그들의 생활이 다시 풍요로워지지 않았나." 그는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연설했으나 실상은 전혀 달랐다. 섬 한 쪽에서는 이미 과도한 벌목으로 이상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숲이 사막화하면서 주변 토양도 메말라갔다. 예전에 비해 작물 수확량이 확 줄었다. 식량 부족으로 기존에 살던 곳에서 이주해야 하는 주민도 나타났다. 마구잡이 벌목으로 숲과 농경지가 사라지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이런 현상을 주의 깊게 관찰해온 현자들은 나무 베는 양을 줄이지 않으면 숲이 사라져 섬 전체가 사막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모든 주민이 소멸하는 끔찍한 미래를 피하려면 지금 당장 벌목을 자제하고 숲을 살려야 한다고 권고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관행과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거대한 석상을 세우는 일도 멈추지 않았다. 석상을 세우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통나무가 필요했다. 통나무를 이용해 큰 돌을 옮겼기 때문이다. 석상은 각 부족의 명예를 드높이는 목적 외에 실용성은 없었다. 현자들은 이런 이유로 나무를 베어서는 안 된다고 말렸다. 하지만 이들의 충고는 무기력하기만 했다. 각 부족의 지도자는 석상을 세워야만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주민들은 석상 크기가 부족의 자존심을 상징한다고 생각했다. 부족 연합회의에서 벌목 규제를 사기라고 외친 추장도 섬에서 가장 큰 석상을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새 숲은 사라졌고 나무도 몇 구루 남지 않았다. 사막화한 땅에서는 농작물이 자라지 않았다. 양식이 부족하자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서로 잡아먹기 시작했다. 식인 관습이 생긴 것이다. 이제 소멸은 시간 문제였다. 섬은 서서히 폐허가 됐다. 숲은커녕 나무 한 구루 남지 않았다. 섬에서는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이방인이 우연히 이 섬을 발견했을 때는 인간은 사라지고 해변에 거대한 석상들만 나란히 서 있었다. '총, 균, 쇠'의 저자 재러드 다이아몬드가 또 다른 명저 '문명의 붕괴'에 소개한 이스트 섬의 비극을 상상력을 가미해 묘사해봤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23일(현지시간)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기후변화가 대사기극이라고 했는데 이런 거짓 선동이 초래할 파국을 좀 더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다. 남태평양에 있는 이스터 섬은 주민들이 삶의 터전인 숲을 스스로 파괴한 탓에 멸종한 대표적 사례다. 지금의 탄소 배출과 기후 위기는 똑같은 오류를 반복할 수 있다. 그런데도 트럼프 대통령은 억지 논리로 기후변화라는 명백한 사실을 부정한다. “기온이 올라가든 내려가든 무슨 일이 벌어지든 기후변화가 되는 것이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지구 냉각이 세상을 멸망시킬 것이라고 했다. 탄소 발자국(온실가스 배출량)은 악의적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꾸며낸 사기다. 이 '녹색 사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실패할 것이다." 그의 주장을 반박할 자료는 차고 넘친다.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가파르게 증가했다. 산업화로 화석연료 사용이 급증한 결과다. 과다한 탄소 배출로 인한 이상 기후 현상은 몇 권의 책으로 써도 모자랄 만큼 많다. 올 여름 우리가 겪은 폭염도 기후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알고도 거짓말을 했다면 정치·경제적 의도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기후변화를 사기로 몰고 간 그의 거짓 선동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지금 당장 기후 위기에 대응하지 않으면 미래 세대는 엄청난 고통을 받게 된다. '녹색 사기'라는 거짓말은 지구촌을 또 다른 이스터 섬으로 만드는 악마의 속삭임이다. 장박원 기자 jangbak@ekn.kr

[장박원 칼럼] 규제 개혁의 성공 열쇠는 ‘넛지’

역대 대통령 중에 '규제 개혁'을 이야기하지 않은 이는 없었다. “규제는 없애는 게 원칙이고 존치하는 것은 예외"(김대중 전 대통령 1998년 3월 규제개혁위 출범식) “불합리한 규제는 없애고 시장 감시와 견제 기능은 강화"(노무현 전 대통령 2004년 4월 규제개혁위 회의) “전봇대를 뽑겠다는 심정으로 규제 없앨 것"(이명박 전 대통령 2008년 2월 대통령직인수위) “규제는 손톱 밑 가시, 암 덩어리 규제"(박근혜 전 대통령 2014년 3월, 규제개혁 장관회의) “규제 혁신은 선택이 아닌 생존 문제"(문재인 전 대통령 2019년 2월 규제 샌드박스 현장 방문 중에) “혁신 가로막는 규제는 기업의 모래주머니"(윤석열 전 대통령 2022년 8월, 취임 100일 기자회견) 이재명 대통령도 “거미줄처럼 얽힌 규제를 확 걷어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15일 열린 '제1차 핵심규제 합리화 전략회의'에서다. 눈길을 끄는 발언도 나왔다. 산업 재해에 대해 기업인 처벌보다 과징금을 부과하겠다는 것과 경영 판단에 배임죄 적용은 과도하다는 대목이다. 하지만 기존 규제를 바꾸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모든 규제는 이해당사자가 있고 이들의 생업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불합리한 규제가 사라져 대다수 국민이 혜택을 보더라도 불이익을 보는 쪽이 있게 마련이다. 규제 개혁에 저항하는 이들을 '기득권자'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사회적 약자 중에도 규제 개혁으로 타격을 입는 이들이 있다. 오랜 기간 굳어진 '관행'에 순종하는 사람들의 성향과 현장 분위기도 걸림돌이다. 많은 이들이 불합리한 규제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바뀌거나 사라졌을 때 발생할 위험을 감수하려고 하지 않는다. '공무원 복지부동'이란 말도 그래서 생긴 것이다. 이 대통령 역시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이날 회의에서도 “복잡한 이해관계와 입장 차이로 규제들이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잘못하면 회의 몇 번 하고 끝나버릴 가능성이 적지 않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어느 정부도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한 이 난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중국 춘추시대 5대 패자 중 한명인 초나라 장왕의 참모 손숙오 일화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당시 초나라 수레는 문제가 많았다. 너무 낮아 말이 끌기 어려웠다. 이는 기동성을 떨어뜨리는 치명적 약점이었다. 이에 초장왕은 수레바퀴를 더 크게 만드는 규제를 시행하도록 명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엄청난 혼란이 일어날 게 불 보듯 뻔했다. 수레를 보유한 권문세족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손숙오는 고민 끝에 바퀴 교체를 강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수레가 높아지는 개혁안을 착안했다. 성문과 관청 문지방 턱을 높인 것이다. 그 결과 작은 바퀴를 단 기존 수레로는 문턱을 넘을 수 없게 됐다. 관청을 드나들기 위해선 큰 바퀴로 교체해야만 했다. 이런 식으로 손숙오는 직접 규제하지 않고 왕이 명한 정책 목표를 달성했다. 이는 전형적인 넛지(Nudge)에 해당한다. 넛지는 옆구리를 슬쩍 찔러 특정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을 말한다. 넛지 이론 주창자인 미국 시카고대 리처드 세일러 교수가 2017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으며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는 대표 저서인 '넛지'에서 몇 가지 성공 사례를 소개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의 남자 화장실 소변기 중앙에 파리 그림을 그려 넣은 게 대표적이다. 남성들이 소변을 볼 때 무의식적으로 파리를 조준하면서 변기 밖으로 튀는 소변 양이 80% 줄었다. 화장실은 청결해졌고 청소비용도 절감됐다. 장기기증 서약을 늘리기 위해 운전면허증 갱신 때 '장기기증에 동의함'을 기본 값으로 설정한 디폴트 옵션, 학교와 회사 구내식당에서 건강에 좋은 샐러드나 과일을 눈에 잘 띄는 곳에 배치하는 아이디어, 전력 회사가 각 가정에 보내는 고지서에 해당 가구의 전기 사용량과 함께 이웃의 평균 사용량을 함께 표시한 것 등도 넛지를 활용한 정책이다. “만약 사람들이 더 나은 선택을 하도록 만들고 싶다면 그들에게 더 쉬운 길을 만들어줘라." “선한 의도를 가진 정책이라도 그 과정이 너무 복잡하고 번거롭다면 사람들을 돕는 게 아니라 방해하는 '슬러지'에 불과하다." '넛지'에 나온 대목인데 이재명 대통령이 역대 정부와 달리 규제 개혁에 성공하려면 꼭 새겨들어야 할 명언들이다. 장박원 기자 jangbak@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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