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박원 편집국장
올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필리프 아기옹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와 피터 하윗 브라운대 명예교수는 조지프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 혁신 원리를 수리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을 제시했다. 아기옹-하윗 모형이 그것인데 핵심 메시지는 최적의 경쟁 환경에서 창조적 파괴를 통한 혁신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모형에 따르면 기업이 시장을 독점해 경쟁할 필요가 없거나 과도한 경쟁으로 혁신에 성공해도 초과 이윤을 장담할 수 없을 때는 공격적인 혁신에 나서지 않는다. 양 극단의 중간 지대에서 창조적 파괴의 동인을 얻는다. 가로축을 경쟁 정도, 세로축을 혁신 활동으로 놓고 봤을 때 역 U자의 비선형의 그림이 그려진다는 것이다.
이는 상식적으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기업이 시장을 독점 또는 과점하고 있으면 굳이 혁신할 이유가 없다. 수익성이 떨어지면 공급을 줄여 가격을 높이면 그만이다. 경쟁이 심해도 공격적 혁신을 꺼리게 된다. 기업이 '창조적 파괴'를 목표로 신기술이나 제품을 개발하려는 목적은 이윤 증대에 있다. 막대한 자금을 날릴 위험이 큰 데도 연구개발(R&D) 투자에 나서는 이유는 독보적인 기술로 미래 시장을 독점하기 위한 것이다. 문제는 너도나도 창조적 파괴를 기대하며 신기술에 투자하는 상황이다. 혁신 기술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면 기업들의 이윤 증대분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기업은 R&D 투자를 줄이면서 혁신 활동은 역 U자의 하강 구간에 접어든다.
아기옹-하윗 모형은 한국 경제에서 창조적 파괴 수준의 혁신이 왜 어려운지 설명해 준다. 창조적 파괴가 이루어지려면 시장에 새로운 플레이어가 진입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경제력이 대기업과 특정 산업에 집중된 상태라 경쟁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현대차 등 대기업이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경제를 주도 하는 산업도 반도체와 자동차 등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적다. 그러다 보니 대기업 한두 곳의 실적이 추락하면 경제 전체가 휘청한다.
이처럼 한국 경제는 소수의 지배적 기업들이 안정적으로 과점하는 구조가 고착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강자가 출현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물론 대기업도 혁신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삼성전자의 R&D 투자는 다른 세계적인 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하지만 대기업의 혁신은 '창조적 파괴'를 동반하지 않는다. 기존 질서를 뒤흔드는 창조적 파괴보다는 시장 지배력을 방어하고 유지하기 위한 '점진적 혁신'에 치중하기 때문이다. 범위를 국가 차원으로 넓혀도 그렇다. 한국은 어느 나라보다 R&D에 많은 예산을 쏟아붓고 있으나 이것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혁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우리도 1970년대 산업화 초기에는 많은 혁신이 이루어졌다. 기업들은 신기술에 과감하게 투자해 시장 지배력을 높이려 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창조적 파괴가 일어났다. 그때는 누가 최종 승자가 될지 알 수 없는 '백가쟁명'의 시대였다. 그러다 보니 아기옹-하윗 모형의 역 U자의 상위 구간을 유지할 수 있었다. 대기업들은 지금과 달리 창조적 파괴 수준의 혁신에 도전했고, 이는 대한민국이 10대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하는 기반이 됐다.
하윗 교수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발표 직후인 지난 13일 기자회견에서 한국 경제가 혁신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확고한 반독점 정책을 가지는 게 매우 중요하다. 혁신은 젊은 층에서 더 쉽게 일어난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혁신의 흐름이 개별 국가의 (고령화) 인구통계 변수에 의해 제한되지 않도록 다른 곳에서 오는 아이디어에 개방적이어야 한다." 소수 대기업이 아닌 청년 기업가들이 창조적 파괴에 끊임없이 도전할 수 있는 경쟁적 시장 환경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석학들의 충고가 던지는 정책적 함의는 자명하다. 자본과 네트워크, 인재가 소수 대기업에 쏠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의 경쟁력과 매력도를 획기적으로 높이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청년들이 대기업 입사에만 매달리지 않고 스타트업과 벤처를 설립해 창조적인 신사업에 도전할 수 있다.
대기업의 기술 탈취을 막고 모험 자본이 될성부른 신생 기업에 투자될 수 있도록 벤처산업 생태계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 미국처럼 인수합병(M&A) 시장을 활성화해 창업하면 큰돈을 벌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핵심이다. 대기업에 인재와 자원을 더 쏠리게 할 섣부른 규제 완화는 금물이다. 규제를 풀더라도 혁신을 유도할 경쟁 환경 조성을 최우선 순위에 둬야 한다. “규제되지 않는 독점은 혁신을 방해한다." 하윗 교수의 이 말에서 '창조적 파괴'가 사라진 한국 경제를 구할 힌트를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