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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수 기자

안녕하세요 에너지경제 신문 강찬수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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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리포트] 폭염, 태아 건강까지 위협한다…조산 1.41%가 폭염 탓

기후위기로 인한 기록적 폭염이 임산부와 태아 건강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는 대규모 국제 연구 결과가 나왔다. 특히 폭염은 단순한 여름철 불쾌감을 넘어 조산(早産, preterm birth)을 유발하는 환경 요인으로 작용하며,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산모일수록 위험이 더 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산은 임신 20주를 지나 임신 37주(36주 6일) 이전에 분만하는 것을 말한다. 스페인 발렌시아 대학과 스위스 베른 대학 등 국제연구팀은 최근 국제학술지 '국제 환경(Environment International)'에 발표한 논문에서 이같은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 논문은 전 세계 13개국 250개 지역의 출생 자료 약 8600만 건 가운데 따뜻한 계절에 출생 자료 3660만 건을 분석했다. 한국은 연구 대상 13개국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국내 연구진이 2019년에 발표한 논문도 비슷한 분석 결과를 제시한 바 있다. ◇폭염일수록 조산 위험 높아졌다 연구 대상 국가는 호주·브라질·캐나다·칠레·에콰도르·에스토니아·이스라엘·이탈리아·일본·파라과이·스페인·스위스·미국이었다. 연구진은 폭염 노출 뒤 4일 이내 조산 위험 변화를 분석했다. 그 결과 따뜻한 계절에 발생한 조산의 약 1.41%가 폭염 탓인 것으로 추정됐다. 이는 출생 100만 건당 약 855건의 조산이 폭염 때문에 발생한다는 의미다. 국가별로는 스위스가 100만 명당 628건으로 가장 낮았고, 파라과이는 1347건으로 가장 높았다. 폭염 강도가 높아질수록 조산 위험도 커졌다. 연구진은 평균적으로 따뜻한 계절 기준 75퍼센타일(전체 더위 가운데 상위 25% 안에 드는 더운 날) 수준의 '중간 강도 폭염'에서는 조산 위험이 2.80% 증가했다. 95퍼센타일(전체 더위 가운데 가장 심한 상위 5% 수준의 극심한 폭염) 수준의 '극한 폭염'에서는 위험이 3.80% 증가했다고 밝혔다. 특히 폭염 발생 직후 0~1일 사이에 위험 증가가 가장 컸다. ◇“폭염은 진통을 촉발하는 방아쇠" 연구진은 폭염이 단지 극단적인 미숙아 출산만 늘리는 것이 아니라, 임신 후기 전체에서 진통을 촉발하는 '방아쇠(trigger)' 역할을 한다고 분석했다. 연구 결과 임신 31~40주 사이가 폭염에 가장 민감한 시기로 나타났다. 후기 조산(late preterm birth) 위험은 중간 강도 폭염에서 2.21%, 극한 폭염에서 3.84% 증가했다. 흥미로운 것은 정상 출산 범주에서도 영향이 확인됐다는 점이다. 임신 37~38주의 조기 만삭 출산(early at-term birth)과 39주 이상 만삭 출산(full at-term birth)에서도 폭염 노출 시 출산 위험이 증가했다. 이는 폭염이 임신 주수와 관계없이 분만 자체를 앞당길 수 있음을 시사한다. 연구진은 논문에서 폭염이 임산부 몸속에서 다양한 생리학적 스트레스를 일으킨다고 설명했다. 고온은 체내 염증 반응(inflammation), 산화 스트레스(oxidative stress), 혈관 수축을 유발할 수 있다. 이런 반응은 태반 기능을 손상시키고 자궁 내 성장 환경을 악화시키며 조기 진통을 촉진할 가능성이 있다. 또 임신 중에는 태아 성장으로 체내 열 생산은 증가하지만 체중 증가로 열 발산은 어려워진다. 여기에 탈수와 혈액 점도 증가, 자궁 혈류 감소 등이 겹치면 태아와 태반에 부담이 커지면서 조산 위험이 높아질 수 있다. 동물실험에서는 열 스트레스가 내분비계와 호르몬 균형에도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것이 자궁 수축을 촉진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젊은 산모·저소득층이 더 취약 폭염의 영향은 모든 임산부에게 동일하지 않았다. 연구진은 젊은 산모, 교육 수준이 낮은 산모, 저소득층, 미혼모, 그리고 여아를 임신한 경우 폭염에 더 취약한 경향이 나타났다고 밝혔다. 특히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산모일수록 도시 열섬 현상이 심한 지역에 거주하거나 냉방 접근성이 낮고, 다른 환경 스트레스에 동시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고 연구진은 분석했다. 도시 열섬(heat island) 현상은 건물과 아스팔트가 많은 도심에서 낮 동안 열을 흡수했다가 밤에도 열을 내뿜으면서 도시 외곽 지역보다 기온이 더 높아지는 현상이다. 연구진은 대륙성 기후 지역에서 위험이 더 컸다는 점에도 주목했다. 캐나다와 에스토니아에서는 극한 폭염 시 조산 위험이 상대적으로 크게 증가했지만, 브라질이나 에콰도르 같은 열대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약한 연관성이 관찰됐다. 이는 평소 더위에 대한 적응 수준과 냉방 인프라 차이 때문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서울 연구도 “폭염이 조산 증가" 확인 한국에서도 유사한 결과가 확인됐다. 지난 2019년 고려대 이종태 교수와 미국 예일대 손지영 연구원 등은 국제 저널인 '환경 연구(Environmental Research)'에 관련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당시 논문에서 연구팀은 2004~2012년 서울 단태아 출생 81만3820건을 분석했다. 그 결과 임신 전 기간, 출산 전 4주, 출산 전 1주 동안에 열지수(heat index)가 상승하면 모두 조산 위험이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임신 기간 전체에서 열지수가 약 5.5℃ 상승할 경우 조산 위험은 최대 3.3% 증가했다. 열지수는 기온과 습도를 함께 계산해 사람이 실제로 느끼는 더위를 나타내는 지표다. 단순 기온이 같은 33℃라도 습도가 높으면 땀이 잘 증발하지 않아 몸이 더 덥게 느껴지는데, 이를 반영한 수치가 열지수다. 따라서 열지수는 단순 기온보다 폭염이 인체에 미치는 부담을 더 잘 보여준다. 서울 연구에서는 젊은 산모와 고령 산모 모두 폭염에 취약했다. 25세 미만 산모는 폭염 노출 시 조산 위험이 1.187배로 가장 높았고, 35세 이상 산모 역시 위험 증가가 확인됐다. 또 저학력 산모가 사회경제 수준이 낮은 지역에 거주할 경우 위험은 더욱 커졌다. ◇“폭염 대응이 곧 태아 건강 정책" 연구진은 특히 기후변화가 심화될수록 폭염의 빈도와 강도가 증가해 미래 세대 건강 부담 역시 커질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폭염은 이제 단순한 계절 재난이 아니라, 태아의 생존과 건강까지 위협하는 새로운 공중보건 위험으로 떠오르고 있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기후위기 시대에 임산부 보호 대책을 폭염 정책의 핵심 축으로 포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우선 폭염특보 발령 시 임산부에게 즉각 경고 메시지를 보내고 냉방시설 접근을 지원하는 공공 보건 체계가 필요하다. 도시 열섬 현상이 심한 저소득 지역에 대한 냉방 지원과 녹지 확대도 중요하다. 의료기관은 임신 후기 산모를 대상으로 폭염 행동수칙을 적극 안내해야 하며, 충분한 수분 섭취와 외부 활동 제한, 적정 실내 온도 유지 등을 권고할 필요가 있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대기오염 개선의 역설: 공기 깨끗해지면 ‘강한 태풍’ 만들어진다

인류의 건강을 위해 대기오염 물질을 줄이려는 노력이 오히려 태풍을 활성화하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그동안 미세먼지와 같은 에어로졸이 온실가스로 인한 태풍의 위력을 억눌러왔으나, 공기질이 개선되면서 이러한 '방패' 효과가 사라지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와 중국 난징 정보과학기술대학교, 중국 국가기상센터 등의 연구팀은 최근 국제 학술지인 '환경 과학과 기술(Environmental Science & Technology)'에 인위적 에어로졸이 태풍 발생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논문을 게재했다. 연구팀은 첨단 기상 모델(WRF-Chem) 시뮬레이션을 통해 북서태평양 지역을 분석한 결과, 인간 활동으로 배출된 에어로졸이 태풍 발생 지수(genesis potential index, GPI)를 약 24% 감소시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정량적으로 밝혀냈다. 이에 따라 대기오염을 줄이는 정책은 억제되었던 GPI를 다시 상승시켜 태풍 활동을 활성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대기오염 물질 중 황산염(Sulfate)과 블랙카본(Black Carbon)이 태풍의 형성을 방해하는 가장 강력한 억제 인자로 나타났다. ◇태풍을 잠재우는 '열역학적-역학적' 메커니즘 GPI는 특정 지역의 환경이 태풍이 형성되기에 얼마나 유리한지를 평가하는 데 사용되는 지표다. 대규모 기후 변동성과 태풍 발생 사이의 연관성을 정량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널리 사용된다. GPI는 잠재 강도(potential intensity), 상대 습도(relative humidity), 절대 와도(absolute vorticity), 수직 바람 시어(vertical wind shear) 등에 의해 결정된다. 논문에 따르면 황산염은 햇빛을 산란시켜 해수면 가열을 약화시킨다. 해수면 온도가 낮아지면 태풍의 연료인 잠열 공급이 줄어든다. 잠열은 물이 수증기로 변할 때 받아들였다가 물방울로 응결할 때 다시 방출하는 에너지를 말한다. 블랙카본은 대기 중에서 태양복사를 흡수해 상층 대기를 덥히는데, 이는 대기를 안정화해 강한 상승기류 형성을 방해한다. 이 두 물질은 공통적으로 수직 바람 시어를 강화하고, 중층 상대습도를 낮추며, 저층 와도를 약화시킨다. 태풍의 씨앗이 자라기 어려운 환경을 만드는 셈이다. 바람 시어는 대기의 높이에 따라 바람의 방향이나 세기가 달라져 태풍의 구조를 비틀고 성장에 방해를 주는 힘이다. 와도는 공기가 소용돌이치며 회전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값으로, 클수록 태풍의 씨앗이 더 쉽게 만들어진다. ◇공기질 개선에 따른 '태풍의 역습' 우려 반대로 대기오염을 줄이면 그동안 에어로졸에 의해 억제되었던 기상 조건들이 태풍에 유리하게 변하게 된다. 연구팀은 에어로졸이 줄어들 경우, 그동안 가려져 있던 온실가스에 의한 온난화 효과가 그대로 드러나면서(unmasking) 태풍의 수명이 길어지고 강도는 더욱 세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에어로졸 수치가 높은 환경에서는 태풍의 수명이 짧아지고, 강도가 약해지며, 이동 속도 또한 느려지는 경향이 확인됐다. 이번 연구는 대기오염 저감 정책이 기후 위기 대응에 있어 복잡한 '트레이드오프(trade-off, 상충 관계)'를 발생시킬 수 있음을 시사한다. 공기질 개선은 공중 보건 측면에서 반드시 필요하지만, 이로 인해 강화될 태풍 리스크에 대비하는 지역 맞춤형 기후 적응 전략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에어로졸 저감이 가져올 기후적 영향에 적절히 대비하기 위해서는 온실가스 감축과 오염 물질 저감을 동시에 고려하는 통합적인 평가 프레임워크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왜 ‘탄소중립’ 대신 ‘기후위기대응’일까? 이창훈 위원장에게 직접 물었다[창간 인터뷰]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고 제안하는 방식으로 기후정책이 수립되도록 할 것이다." 이창훈 국가기후위기대응위원회 민간위원장은 취임 한달을 맞아 지난 15일 에너지경제신문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혔다. 기후위원회는 지난 1월 2050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에서 확대 개편됐다. 기존 탄녹위가 온실가스 감축과 녹색산업 육성 등 경제·산업 중심 기능에 초점을 맞췄다면 새 기후위는 기후재난 대응과 기후적응까지 포괄하는 조직으로 역할이 확대됐다. 이 위원장은 기후위원회 명칭 변경 배경에 대해 “기존 탄소중립이라는 표현 자체가 온실가스 감축 중심 개념이었다면 지금은 기후위기가 현실화된 상황"이라며 “단순한 감축뿐 아니라 적응도 굉장히 중요한 현안이 됐다"고 설명했다. 특히 이번 개편의 핵심 변화로 시민 참여 확대를 꼽았다. 기후위원회는 시민들이 직접 정책 의제를 정하고 토론하는 '기후시민회의'를 새롭게 운영하고 있다. 이 위원장은 “기후시민회의는 장기적으로 운영되는 시민의회 모델에 가깝다"며 “시민들이 의제를 스스로 정하고 학습과 토론을 거쳐 정책 제안을 만드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이어 “기후시민회의는 단순히 200명의 공론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국적 공론화 모델로 확장하려 한다"며 “학교나 단체에서도 모의 기후시민회의 형태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도록 자료와 프로그램 제공도 검토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위원장은 “정부 부처는 사업을 추진하는 역할이고 위원회는 그 사업과 계획이 제대로 수립되고 이행되는지를 점검하는 역할"이라며 “기후 관련 정책들을 사전에 모니터링하고 사후에도 모니터링하는 것이 위원회의 핵심 기능"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이창훈 위원장과 일문일답. -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에서 국가기후위기대응위원회로 명칭이 변경됐다. 명칭 변경에는 어떤 의미가 담겼는가. ▲ 원래는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였는데, 이번에 국가기후위기대응위원회로 바뀌게 됐다. 가장 큰 변화는 기존의 감축 중심 기조에서 조금 더 확대된 개념으로 전환된 데 있다고 본다. 탄소중립이라는 표현 자체가 온실가스 감축 중심 개념이었다면, 녹색성장은 그 과정에서 경제도 후퇴하지 않도록 기회를 만들자는 의미가 강했다. 즉 탄소중립녹색성장은 감축 중심적 성격이 매우 강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기후위기가 현실화된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단순한 감축뿐 아니라 적응도 굉장히 중요한 현안이 됐다. 그런 의미에서 이름을 기후위기대응위원회로 바꾸지 않았나 생각한다. 감축뿐 아니라 적응을 부각시키고 지금의 위기 상황 자체를 표현하기 위해 '위기'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본다. - 기후위원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정부와 협력을 넘어 견제하는 역할도 해야 하지 않나. ▲ 위원회의 역할과 관련해서는 정부를 지원하는 역할도 있지만 일정 부분 긴장 관계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민간위원들에게도 이야기했는데 위원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모니터링'이라고 본다. 모니터링은 사전 모니터링과 사후 모니터링으로 나눌 수 있다. 사전적으로는 탄소중립 기본계획이나 온실가스 감축·적응 관련 주요 계획들을 심의한다. 결국 정책이 제대로 수립됐는지를 검토하는 기능이다. 사후적으로는 계획이 실제로 잘 이행되고 있는지를 점검한다. 예를 들어 연도별 목표를 달성하고 있는지 정상적으로 추진되고 있는지를 이행점검하는 것이 위원회의 고유 업무다. 결국 기후 관련 정책들을 사전과 사후에도 모니터링하는 것이 핵심 기능이다. 정부 부처는 사업을 추진하는 역할이고 위원회는 그 사업과 계획이 제대로 수립되고 이행되는지를 점검하다 보니 어느 정도 긴장 관계는 있을 수밖에 없다. 이번 정부 들어 법 개정으로 이행점검 기능도 강화됐다. 위원회에서 이행점검 결과에 대해 의견을 내면, 각 부처는 3개월 내 답변을 해야 한다. 그런 부분들이 이번 정부 들어 보다 강화된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 기후위원회 내에 시민회의가 운영된다고 들었다. ▲탄녹위 시절에도 민간위원들은 있었지만 이번에는 '기후시민회의'라는 형태가 새롭게 도입된 것이 특징이다. 국회 공론화위원장을 맡았을 때의 공론화위원회는는 공론조사 성격이 강했다면 이번 기후시민회의는 장기적으로 운영되는 시민의회 모델에 가깝다. 시민들이 의제를 스스로 정하고 해당 의제에 대해 학습과 토론을 거쳐 정책 제안을 만드는 방식이다. 즉 기존 정책 의사결정 구조 안에 직접민주주의 요소를 도입했다고 보면 된다. 현재 200명 규모로 운영된다. 다만 중간 탈락 가능성을 고려해 약 10%를 추가 모집해 총 220명 정도를 모집했다. 또 하나 특징은 기존 공론화와 달리 시민들이 운영 구조까지 직접 결정한다는 점이다. 국회 공론화 때는 공론화위원회가 절차와 발표자, 전문가 선정 등을 모두 결정했는데 이번에는 시민들이 그런 부분도 상당 부분 직접 결정하도록 설계했다. 200명 중 약 20명을 기획참여단으로 구성해 의제 선정, 강연자 선정, 학습 과정 설계 등 전체 프로세스를 관리하도록 했다. 물론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외부 자문단 약 10명을 별도로 둬 지원하도록 하고 있다. - 시민회의 임기는 어떻게 되는가. ▲ 올해부터 매년 순환형으로 할 계획이다. 원래 임기는 2년인데 올해는 롤링 방식으로 운영하려 한다. 올해 200명 중 100명은 올해까지만 활동하고 나머지 100명은 내년까지 활동한다. 내년에 새롭게 100명을 추가 선발해 항상 신규 100명, 2년차 100명 구조로 운영하는 방식이다. 기후시민회의에서 나온 정책 제안은 위원회가 정부에 전달하고 정부 부처는 3개월 내 답변을 하도록 할 계획이다.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정책으로 최대한 수용하도록 유도하려 한다. - 미래세대 소송에 따른 헌법재판소 결정 이후 탄소중립녹색성장기본법 개정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헌법재판소 결정에 따라 현재 국회에서 입법 논의가 진행 중이다. 다만 아직 최종 결정이 난 상황은 아니다. 핵심 쟁점은 감축 경로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이다. 선형적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초기 감축을 더 강화하는 방식으로 갈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다. 가급적이면 상반기 국회 내에 정리가 되면 좋겠지만 현재 협상이 계속 진행 중이다. 지방선거 일정 등 여러 변수도 있어서 시간이 다소 걸릴 가능성이 있다. - 공론화 조사 결과에서는 초기에 더 빠르게 감축하는 경로(오목형)가 우세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공론화 질의문에서 위헌소지가 있는 나중에 더 많이 감축하는 경로(볼록형)을 넣어 질타를 받기도 하지 않았나. ▲공론화 과정에서는 모든 가능성을 시민들에게 열어놓고 논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사실 위로 볼록한 감축 경로는 헌법불합치 결정 취지와 맞지 않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많았다. 그런데도 다양한 선택지를 열어뒀다. 결과는 굉장히 놀라웠다. 위로 볼록형은 2%밖에 나오지 않았고, 오목형이 78%, 선형이 20%였다. 300명의 시민 참여단뿐 아니라 별도로 운영했던 40명의 미래세대 그룹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결국 시민들은 최소한 선형보다는 더 적극적인 감축을 원한다는 의미라고 본다. 물론 최종 결정은 입법권자인 국회의 몫이지만 국민들이 생각하는 방향성은 분명하게 나타났다고 본다. - 2030년 온실가스감축목표(NDC)와 2050 탄소중립 달성을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목표 설정 자체에만 지나치게 몰입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아무리 좋은 목표를 세워도 달성하지 못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달성이다. 특히 이재명 정부 임기가 2030년에 끝나기 때문에, 2030년 목표를 실제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가 굉장히 중요하다. 정부 정책 수단은 크게 세 가지다. 규제 정책, 지원 정책, 홍보·소통·교육 정책이다. 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야 한다. 예를 들어 기업에는 배출권거래제를 보다 엄격히 운영해 감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호를 줘야 한다. 동시에 산업 기반이 무너지지 않도록 감축 기술 개발 지원이나 재정 지원도 충분히 이뤄져야 한다. 시민 참여도 굉장히 중요하다. 시민들이 저탄소 제품을 구매하거나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는 것만으로도 기업에 강한 시그널이 되고 실제 감축 효과도 있다. 현재 국민들은 기후위기에 대한 관심은 높지만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는 데는 간극이 있다. 이 간극을 줄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과제다. 기후시민회의 역시 단순히 200명의 공론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국적 공론화 모델로 확장하려 한다. 학교나 단체에서도 축약형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도록 자료와 프로그램을 제공하려 한다. 예를 들어 중·고등학교에서 모의로 기후시민회의 형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좋은 정책 제안 공모전까지 연결하는 방식도 고민하고 있다. - 온실가스 감축에서 지방자치단체 역할이 중요하다. 지자체하고는 어떻게 협력할 계획인가. ▲온실가스 감축에서 상당 부분은 지자체 역할이다. 산업·발전 부문을 제외하면 대부분 지역 단위 정책이 많다. 지자체의 역량이라는 건 인력과 예산, 전문성인데 어떻게 지원할 수 있을지 계속 고민하고 있다. 예산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하라고만 할 수는 없어 중앙정부 차원의 지원 확대가 필요하다. 탄소중립지원센터 예산 같은 경우에도 충분하지 않다고 본다. 올해 하반기에는 이런 부분을 좀 더 들여다볼 생각이다. - 화석연료에서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은 어떻게 보고 있는가. ▲재생에너지는 가장 큰 이슈라고 생각한다. 최근 에너지 위기를 겪으면서 국민들의 재생에너지에 대한 관심도 커진 것 같다. 특히 이번 위기에서 가장 혜택을 본 나라가 중국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중국은 태양광·풍력을 대규모로 확대했거 배터리 산업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화석연료 의존 리스크를 줄였을 뿐 아니라 산업 경쟁력 측면에서도 큰 이득을 봤다. 우리도 하루빨리 보다 신속하게 재생에너지로 전환해야 한다고 본다. 그중 영농형 태양광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2030년까지 100기가와트(GW), 2050년까지 400GW 수준 태양광을 확대하려면 결국 영농형 태양광 비중이 절반 이상은 돼야 한다. 다행히 최근 입법으로 영농형 태양광 관련 입지 규제와 이격거리 규제 등이 상당 부분 개선됐다. 2024년부터 논의됐던 내용이 2년 만에 정리된 점은 긍정적이라고 본다. -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정의로운 일자리 전환의 필요성도 함께 제기되고 있다. ▲정의로운 전환은 핵심 과제 중 하나다. 전문위원회도 별도로 구성해 집중적으로 다루려 한다. 고용노동부는 고용 문제, 산업통상부는 산업 전환 문제를 다루지만 지역 전체 전환 문제는 개별 부처가 해결하기 어렵다. 특구 지정 등은 기후위원회가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본다. 특히 석탄발전 지역 노동자 문제는 굉장히 중요하다. 여성·고령 노동자들은 전직이 쉽지 않다. 한국노총 사무총장도 기후위원회 민간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일자리 전환을 신경 써서 추진하려 한다. 독일처럼 탈석탄위원회를 통해 장기 전환계획을 만든 사례도 참고하고 있다. - 탄소배출 저감과 기후 적응 중 어느 쪽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보는가. ▲개인적으로는 감축 정책을 오래 해왔기 때문에 감축이 조금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국민들이 실제 체감하는 것은 적응 정책이다. 폭염, 산불, 건강 리스크 같은 문제는 국민들이 몸으로 체험한다. 문제는 적응 정책이 감축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점이다. 감축은 온실가스라는 단일 지표와 명확한 목표가 있다. 하지만 적응은 가뭄, 산불, 건강, 산업 리스크 등 목표 자체가 다목적이고 정량화도 어렵다. 국제적으로도 적응 목표를 설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재는 한국환경연구원과 국립환경과학원에 각각 기후위기적응센터가 운영되고 있다. 과학원은 데이터와 정보 관리 중심이고 연구원은 정책과 적응대책 수립·평가 등을 담당한다. - 마지막으로 국민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기후위기는 이미 현실화됐고 지구온난화 추세를 되돌리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온실가스 감축 목표 달성도 굉장히 어렵다. 기업뿐 아니라 국민들도 함께 노력하지 않으면 목표 달성이 어렵고 더 큰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국민들께 조금 더 관심을 가져주시고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데 동참해주셨으면 좋겠다. 다만 국민들에게만 요구할 문제가 아니라 정부가 먼저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민들이 기후 실천을 보다 편하게 할 수 있도록 정부가 시스템과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일회용 플라스틱을 줄이기 위한 다회용컵·다회용기 시스템 같은 것들도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 이창훈 위원장 프로필 △1967년 광주 △상문고 △서울대 경영학과 △독일 브레멘대 경제학 석·박사 △2022년~2025년 제13대 한국환경연구원 원장 △ 2026년~ 제4대 국가기후위기대응위원회 민간위원장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이원희 기자 wonhee4544@ekn.kr

사이언스가 주목한 1180만 건의 경고…“인간의 발길이 야생동물을 멈추게 한다”[환경포커스]

도로나 건물을 덜 지으면 야생동물은 더 안전해질까. 지금까지 생태 보전 정책은 대체로 이런 전제 위에 서 있었다. 도로와 건물, 농경지 같은 물리적 개발이 얼마나 자연을 훼손했는지를 중심으로 서식 환경을 평가해온 것이다. 하지만 미국 예일대와 스미스소니언, 캐나다·유럽 등 국제연구팀이 최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 발표한 대규모 분석 결과는 다른 사실을 보여준다. 야생동물이 단지 인간이 남긴 구조물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실제로 언제 어디에 나타나는지 자체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행동을 바꾼다는 것이다. 이번 연구는 인간과 야생동물의 공존을 생각하는 방식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중요한 것은 “어디를 개발할 것인가"만이 아니라 “언제, 얼마나, 어떤 방식으로 사람이 드나들 것인가"라는 이야기다. ◇미국 전역 야생동물 4581마리 추적 연구진은 미국 전역에서 위성 위치 확인시스템(GPS) 추적기를 부착한 포유류와 조류 37종, 4581개체의 이동 기록 약 1180만 건을 분석했다. 대상에는 회색늑대·코요테·퓨마·흰꼬리사슴·무스 같은 포유류와 큰까마귀·캐나다두루미·대백로 같은 조류가 포함됐다. 도시 주변에서 인간과 자주 마주치는 종부터 비교적 자연성이 높은 지역에 사는 종까지 다양하게 포함됐다. 핵심은 이 동물들의 이동 정보와 인간의 활동 정보를 따로 확보한 뒤, 이를 같은 공간과 시간 축 위에 올려 비교했다는 점이다. 동물의 경우 GPS 추적기를 통해 '이 개체가 언제 어디 있었는가'를 정밀하게 기록했다. 이를 통해 동물이 하루나 일주일 동안 얼마나 넓은 영역을 움직였는지, 어떤 환경을 선택해 이용했는지를 계산했다. 인간 활동 정보는 위치정보 분석 기업 세이프그래프(SafeGraph)가 제공한 스마트폰 이동 통계를 활용했다. 개별 사람을 추적한 것이 아니라, 특정 지역에 하루 동안 스마트폰 이용자가 얼마나 머물렀는지를 익명화된 집계 자료로 정리한 것이다. 쉽게 말해 연구진은 '어느 늑대가 어느 날 어느 지역을 이용했는가'와 '그날 그 지역에 사람이 평소보다 얼마나 더 있었는가'를 비교한 셈이다. ◇'개발 정도'와 '실제 사람 출현'을 분리했다 이번 연구가 주목받는 이유는 인간 영향의 두 요소를 분리해서 분석했다는 점이다. 하나는 지형 개조인데, 도시화, 도로, 농경지, 에너지 시설처럼 인간이 장기적으로 자연을 바꿔놓은 흔적을 말한다. 다른 하나는 인간 출현으로, 특정 시점에 사람이 실제로 얼마나 자주 그곳에 나타났는지를 뜻한다. 기존 연구는 대개 이 둘을 하나로 봤다. 도로나 건물이 많으면 사람도 많을 것이라고 가정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 논문에서 연구진은 코로나19 시기의 특수한 상황을 활용했다. 2019년과 2020년 미국에서는 이동 제한으로 사람들의 외출이 급감했다. 도시와 도로는 그대로였지만 사람의 움직임만 크게 줄어든 것이다. 이 덕분에 연구진은 '동물이 반응한 이유가 개발된 환경 때문인지, 실제 인간 출현 때문인지'를 비교적 분명하게 가려낼 수 있었다. ◇야생동물 65% 이상이 인간 존재에 반응 분석 결과, 전체 종의 65% 이상이 인간 출현 자체에 반응했다. 포유류의 67%, 조류의 68%가 인간이 많이 나타나는 시기에 활동 영역이나 자원 이용 방식을 바꿨다. 포유류는 대체로 더 민감했다. 인간 활동이 많아질수록 활동 반경이 중앙값 기준으로 11%나 줄었다. 코요테의 경우 인간 출현이 늘어나면 활동 범위를 평균 11.3㎢ 줄였다. 인간이 남긴 음식물 같은 자원을 이용하면서도 인간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좁은 안전권 안에서 움직인 것으로 해석된다. 반면 회색늑대는 오히려 활동 범위가 넓어졌다. 인간을 피해 더 멀리 우회하거나 새로운 이동 경로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조류는 더 다양하게 반응했다. 큰까마귀는 인간 활동이 늘어날수록 활동 범위를 약 26㎢ 넓혔다. 인간이 남긴 음식물이나 도로변 사체 같은 자원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선 결과다. 같은 인간 적응형 동물이라도 어떤 종은 숨었고, 어떤 종은 기회를 찾아 움직인 것이다. ◇더 자연스러운 곳일수록 더 민감했다 흥미로운 점은 자연성이 높은 지역일수록 동물의 반응이 더 강했다는 사실이다. 전체 종의 약 60%에서 인간 출현 효과가 서식지의 개발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 상호작용이 확인됐다. 같은 수준으로 사람이 나타나더라도 이미 도시화된 지역보다 자연성이 높은 숲과 초원에서 동물의 행동 변화 폭이 더 크게 나타났다는 뜻이다 연구진은 이를 인간에 대한 '익숙함'의 차이로 해석했다. 인간과 자주 접촉하는 도시 주변 동물은 어느 정도 인간에 익숙해져 반응 폭이 작지만, 사람과 마주칠 일이 드문 야생 지역의 동물은 인간 출현을 더 강한 위험 신호로 받아들여 즉각적으로 이동 경로와 활동 범위를 조정한다는 것이다. 이는 보호구역 관리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자연이 잘 보존된 지역일수록 출입 관리가 더 정교해야 한다는 뜻이다. ◇공존의 해법은 “언제 들어갈 것인가" 이번 연구 결과, 야생동물은 우리 인간이 남긴 도로나 건물만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 자체를 감지하고 살아간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려면 '어디까지 개발할 것인가'를 넘어, 우리가 언제 자연 속에 들어갈 것인가도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야생동물 보호가 단순한 출입 금지나 상시 개방 같은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본다. 대신 시간과 빈도를 조절하는 '동적 관리'가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번식기 특정 시간대에는 탐방객 출입을 제한하고, 야행성 동물이 활발히 움직이는 시간에는 차량 통행을 줄이는 식이다. 공간을 완전히 분리하는 대신 서로 다른 시간대를 쓰도록 조정하는 방식이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데이터는 뜨겁게, 지구는 차갑게”…그린 데이터센터 기술혁명[창간기획]

AI 시대의 가장 문제 중 하나는 “AI가 전기를 너무 많이 먹는다"는 점이다. 생성형 AI와 초거대 데이터센터 확산으로 전 세계 전력 수요가 급증하는 가운데, 글로벌 기업과 연구진은 이제 단순히 전기를 더 생산하는 것을 넘어 “전기를 덜 쓰는 기술"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데이터센터를 둘러싼 경쟁의 핵심이 서버 성능에서 냉각·효율·저전력 기술로 이동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엔비디아의 CEO 젠슨 황은 “미래의 모든 개별 데이터센터는 전력의 제한을 받게 될 것이고, 이제 '전력 제한 산업'이 됐다"고 지난해 말한 바 있다. 현재 데이터센터의 최대 고민은 '열'이다. AI 연산에 사용되는 그래픽 처리장치(GPU) 서버는 엄청난 열을 발생시키고, 이를 식히기 위해 막대한 전력이 다시 소비된다. 실제로 데이터센터 전체 소비 전력의 상당 부분은 냉각 설비에 사용된다. 이 때문에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냉각 효율 혁신에 사활을 걸고 있다. 가장 주목받는 기술 중 하나는 수중 데이터센터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스코틀랜드 앞바다에서 '나틱(Natick) 프로젝트'를 통해 수중 데이터센터를 2년 이상 운영하며 냉각 효율과 서버 안정성을 실증했다. 중국 역시 상업용 수중 데이터센터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바닷물을 활용하면 냉각 전력 사용량을 크게 줄일 수 있고, 소음과 열 배출 문제도 완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한국 역시 관련 기술 개발에 뛰어들고 있다. 울산시는 해양수산부와 한국해양과학기술원(KIOST)을 중심으로 수중 데이터센터 표준 모델 개발을 추진 중이며, GS건설·포스코 등 민간기업도 참여하고 있다. 삼성 역시 바다 위에 데이터센터를 띄우는 '플로팅 데이터센터' 모델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예 우주로 가는 데이터센터도 있다. 우주의 온도는 영하 270도로 매우 낮아 열 관리에 유리하고, 태양광 효율도 극적으로 높일 수 있다.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는 자신이 설립한 우주 기업 스페이스X와 인공지능(AI) 기업 xAI의 합병을 통해 우주 AI 데이터센터를 구축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를 위해 지구 궤도에 로켓 100만 대를 발사하겠다는 계획을 당국에 제출했다. 구글, 스타클라우드, 카우보이 스페이스 등도 우주 데이터센터를 준비하고 있다. 냉각 기술 혁신은 데이터센터 구조 자체를 바꾸고 있다. 미국 국립재생에너지연구소(NREL)는 지하 염수층에 냉기를 저장해 여름철 데이터센터 냉각에 활용하는 저류층 열에너지 저장(RTES) 기술을 연구 중이다. 이 기술은 기존 냉각 방식 대비 전력 소비를 대폭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소프트웨어 기술 역시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미국 연구진은 AI 작업 우선순위를 자동 조정해 전력망 부담이 커질 때 데이터센터 전력 사용량을 실시간으로 줄이는 기술을 실증했다. 데이터센터가 단순한 전력 소비자가 아니라 전력망 안정화에 참여하는 '유연한 자산'으로 진화하고 있는 셈이다. GPU와 반도체 효율 개선 경쟁도 치열하다. 전력 손실을 줄이는 차세대 전력 변환 칩과 저전력 반도체 구조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고, 운영체제(OS) 코드 최적화만으로 데이터센터 전력 사용량을 줄이는 기술도 등장하고 있다. AI 시대 경쟁력이 단순한 연산 속도를 넘어 “얼마나 적은 전기로 AI를 돌릴 수 있는가"로 이동하는 모습이다. 에너지저장장치(ESS) 역시 핵심 기술로 떠오르고 있다. 메타는 100시간 이상 전력을 저장할 수 있는 장주기 ESS 도입을 추진 중이다. 글로벌 시장에서도 유기 전해질(유기용매 기반 전해액)을 사용하는 유기 흐름 배터리와 차세대 장주기 저장 기술 개발 경쟁이 본격화되고 있다. 재생에너지 간헐성을 보완하면서 데이터센터 전력 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움직임이다. 미래 데이터센터는 단순한 서버 집합체가 아니라 하나의 에너지 시스템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발전·저장·냉각·수요반응(DR)·폐열 활용이 하나로 연결되는 방향이다. 일부 국가는 데이터센터 폐열을 지역 난방에 활용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 물론 과제도 적지 않다. 수중 데이터센터는 해수 부식과 유지 보수 문제가 있고, 우주 데이터센터는 방사선과 냉각·발사 비용 등 현실적 한계가 크다. 다만 업계에서는 AI 시대 전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국 “더 많은 발전소"와 함께 “더 적게 쓰는 기술혁신"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데 공감대가 커지고 있다. 에머랄드 Al의 수석과학자이기도 한 아이세 코스쿤 미국 보스턴대학 교수는 지난 3월 한 컨퍼런스에서 “데이터센터는 이제 단순히 전력을 소모하는 거대한 소비자가 아니다. 전력망 관리에 능동적으로 참여해 전력망에 도움을 주는 '자산'이 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열리고 있다"고 강조했다. 데이터센터가 소프트웨어 혁신을 통해 전력망의 수요에 맞춰 사용량을 실시간으로 조절하는 '그리드 상호작용 자산'으로 진화해야 함을 역설한 것이다. 결국 미래 데이터센터 경쟁은 GPU 숫자만으로 결정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냉각 효율과 전력 최적화, 저장 기술과 저전력 반도체, 그리고 전력망과 얼마나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느냐가 새로운 경쟁력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전지성 기자 jjs@ekn.kr

“보이지 않는 탄소폭탄”…지하수 고갈이 전 세계 온실가스를 늘린다

지하수를 퍼 올리는 일이 단순한 물 부족 문제를 넘어 전 세계 온실가스를 늘리는 숨은 배출원이 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그동안 지하수 고갈은 농업용수 부족이나 식수 안보 차원에서 주로 논의돼 왔지만, 실제로는 땅속에 저장돼 있던 탄소를 대기 중으로 방출해 기후변화를 악화시키는 요인이라는 사실이 처음으로 전 지구 규모에서 확인된 것이다. 중국 톈진대학교 수리공학 지능형 건설·운영 국가중점실험실 연구팀은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논문을 최근 국제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Nature Communications)'에 발표했다. 연구팀은 논문에서 “지하수 고갈로 인한 탄소 배출은 지금까지 전 세계 탄소 예산 계산에서 간과한 중요한 배출원"이라고 밝혔다. ◇연간 5,200만 톤…초원보다 많은 탄소 배출 연구팀에 따르면 지하수는 단순한 물 저장고가 아니라 거대한 탄소 저장소 역할도 한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가 빗물과 함께 지하로 스며들면 높은 압력과 낮은 온도 환경에서 물속에 녹아 중탄산염(HCO₃⁻) 형태로 안정적으로 저장된다. 이는 자연적인 탄소 흡수 과정의 일부다. 문제는 인간이 지하수를 대량으로 퍼 올릴 때 발생한다. 지하수위가 낮아지면 압력이 떨어지고, '헨리의 법칙'에 따라 물속에 녹아 있던 이산화탄소가 기체 형태로 빠져나온다. 이를 '탈탄산(decarbonation)'이라고 한다. 헨리의 법칙은 일정한 온도에서 액체에 녹는 기체의 양은 그 기체가 액체에 가하는 압력에 비례한다는 법칙으로, 기체는 압력이 높을수록 더 많이 녹고 압력이 낮아질수록 빠져나온다는 것이다. 여기에 탄산칼슘이나 탄산마그네슘 같은 광물이 침전되는 과정에서도 추가 이산화탄소가 발생한다. 쉽게 말해, 뚜껑을 연 탄산음료에서 기포가 빠져나오듯 지하수가 빠져나갈 때 탄소도 함께 새어 나오는 셈이다. 연구팀은 2000년부터 2020년까지 전 세계 17만1000개 관측정 자료와 80개국 2만8902개의 지하수 수질 자료, 그리고 그레이스(GRACE) 위성 데이터를 결합해 분석했다. 그 결과 지하수 고갈로 인해 전 세계에서 매년 평균 5200만 톤의 이산화탄소가 대기 중으로 방출되는 것으로 추정됐다. 이는 전 세계 초원의 순탄소 배출량(약 3,500만 톤)을 웃도는 수준이고, 자연 화산가스 배출량과 비교해도 무시하기 어려운 규모다. ◇중국·브라질·인도가 최대 배출국 국가별로는 중국(연 670만 톤), 브라질(660만 톤), 인도(580만 톤)이 가장 많은 배출량을 기록했다. 특히 중국 화북평원과 인도-갠지스 분지, 브라질 북동부 등 대규모 관개농업 지역이 대표적 '탄소 핫스팟'으로 꼽혔다. 이 지역들은 식량 생산을 위해 지하수를 집중적으로 퍼 올리면서 지하수위가 빠르게 낮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전체도 적지 않은 배출 규모를 보였다. 연구팀 분석에 따르면 동아시아 지역의 지하수 고갈 유래 탄소 배출량은 연간 약 720만 톤에 달했다. 이는 세계 주요 권역 가운데서도 높은 수준이다. 특히 중국 북부의 화북평원은 동아시아 최대 배출 거점으로 지목됐다. 한반도 역시 동아시아 권역에 포함되지만, 논문은 한국만을 별도로 분리한 정량 수치는 제시되지 않았다. 다만 논문에 수록된 전 지구 배출 강도 지도에서는 한반도 일부 지역에서도 지하수 관련 탄소 방출이 나타나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는 한국에도 시사점이 크다. 한국은 중국이나 인도처럼 대규모 지하수 관개국은 아니지만, 농촌 지역과 일부 산업단지에서 지하수 의존도가 높고, 기후변화로 가뭄 빈도가 증가하고 있다. 연구진은 지하수 사용량이 늘어날수록 동아시아 전체 탄소 배출 부담도 커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물 관리가 곧 탄소 관리" 이번 연구는 탄소 배출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꾸게 한다. 온실가스는 공장 굴뚝과 자동차 배기관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연구팀은 논문에서 “지하수 관리가 더 이상 물 안보만의 문제가 아니라 기후정책의 핵심 과제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까지는 지하수를 보존하는 이유가 물 부족 방지에 있었지만, 앞으로는 탄소 감축 전략의 하나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지하수 재충전 확대, 농업용수 효율 개선, 지역별 모니터링 강화, 그리고 전 지구 탄소예산 모델에 지하수 항목을 포함하는 새로운 정책 틀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풍력 터빈, 주민 건강 해치지 않는다”…미국 연구 사실일까?

탄소중립 시대의 핵심 에너지원으로 꼽히는 풍력발전을 둘러싸고 다시 논쟁이 벌어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풍력 터빈에서 발생하는 저주파 소음이 인근 주민의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예상과는 다른 연구 결과가 발표됐기 때문이다. 이번 대규모 장기 연구 결과는 일반적인 이격거리에서는 풍력 터빈이 주민 건강에 직접적인 악영향을 미친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결론 내렸다. 다만 연구진은 초근접 거주자에 대한 표본 한계를 인정하면서, 한국처럼 국토가 좁고 인구 밀도가 높은 국가에는 결과를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고 단서를 달기는 했다. ◇12년간 추적…소비 기록까지 분석한 '정밀 검증' 독일 아우크스부르크대학교와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피츠버그대학교 연구팀은 최근 국제학술지 '미국 국립과학원 회보(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에 발표한 논문에서 이같은 분석 결과를 공개했다. 연구진은 2011년부터 2023년까지 12년 동안 미국 전역 12만 가구 이상의 건강 패널 데이터를 추적했다. 여기에 미국 지질조사국이 보유한 약 7만5000기의 풍력 터빈 위치 정보와 설치 시점을 결합해, 터빈 설치 전후 주민 건강 상태 변화를 분석했다. 분석 대상은 불면증·수면장애·우울증·불안·두통 등 정신적·신체적 건강지표였다. 특히 이번 연구는 기존 논문들과 달리 설문 응답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연구진은 실제 소비 행태까지 추적해 수면제·진통제·커피·약품 구매량 변화를 분석했다. 또, 미국 시간사용 조사 자료를 활용해 수면시간과 야외활동, 운동시간 변화 여부까지 함께 살폈다. 풍력 터빈이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면 이런 생활 패턴과 소비 데이터에서도 변화가 포착돼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유의미한 건강 악영향 없었다"…주요 지표 변화 없어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풍력 터빈 설치 이후 불면증·우울·불안·두통 등 주요 건강지표에서 유의미한 증가가 나타나지 않았다. 수면제와 진통제 구매량 역시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변화가 없었다. 주민들의 실제 수면시간과 운동량, 야외활동 시간도 달라지지 않았다. 연구진은 “풍력 터빈 노출이 중간 규모 이상의 건강 악영향을 유발할 가능성은 통계적으로 배제된다"고 설명했다. 이는 풍력 터빈이 인근 주민 건강을 광범위하게 해친다는 일부 주장과 상반되는 결과다. 다만 연구진은 이번 결과를 과도하게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가장 큰 한계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 거주하는 주민 표본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분석 대상 지역에서 터빈과 인구 중심지 간 중앙값 거리는 약 6㎞였고, 절반 이상이 3~10㎞ 범위에 분포했다. 5㎞ 이내 거주 가구는 전체의 42%였지만, 3㎞ 이내처럼 극히 가까운 거주자는 적어 작은 건강 영향이 있더라도 통계적으로 검출하기 어려웠다. 즉 이번 연구는 “미국의 일반적인 풍력 입지 조건에서는 건강 피해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뜻이지, “터빈 바로 옆 주민도 절대 영향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건강과 삶의 질은 다른 문제…'성가심'은 여전히 현실 논문은 건강 문제와 삶의 질 저하를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직접적인 질병 발생이 없더라도 풍력 터빈은 주민 삶의 만족도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연구진이 주목한 '성가심(annoyance)'은 단순히 “시끄럽다"는 수준의 불편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특정 환경 요인이 반복적으로 스트레스를 유발해 주민이 느끼는 지속적 불쾌감과 생활 통제감 상실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대표적인 원인은 그림자 깜빡임(섀도 플리커)이다. 터빈 날개가 햇빛을 주기적으로 가리면서 집 안 벽이나 창문에 규칙적인 깜빡임을 만드는 현상으로, 일부 주민에게는 집중력 저하와 시각적 피로를 유발할 수 있다. 특히 해가 낮게 뜨는 계절 아침과 저녁에 민감하게 체감된다. 또 다른 요인은 시각적 위압감과 경관 침해다. 높이 150m를 넘는 대형 터빈이 산 능선이나 마을 인근에 들어설 경우, 주민들은 “늘 거대한 기계가 자신을 내려다본다"는 심리적 압박을 느낄 수 있다. 이는 단순 미관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익숙하게 누려온 생활환경이 낯선 산업시설에 의해 점령당했다는 박탈감과 연결된다. 저주파 특유의 웅웅거림과 진동감도 문제로 꼽힌다. 의학적 위해가 명확히 입증되지는 않았지만, 일부 주민은 실내 창틀이나 문짝의 미세 진동과 함께 느껴지는 반복적 저주파를 “귀가 아닌 몸으로 듣는 소리"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감각은 특히 야간의 정숙한 환경에서 더 크게 인지돼 잠들기 전 예민함과 불안감을 높일 수 있다. ◇풍력 확대의 핵심은 '건강 논란'보다 '공정한 수용성' 이 연구 결과를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다는 점도 주목된다. 미국은 국토가 넓고 인구 밀도가 낮아 풍력 터빈과 주거지 사이 충분한 이격거리를 확보하기 쉽다. 반면 한국은 산지가 많고 가용부지가 제한적이어서 육상 풍력단지가 마을과 더 가까운 거리에서 조성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저주파 소음이나 특정 주파수대의 가청 저주파, 그림자 깜빡임이 주민에게 더 크게 체감될 가능성이 있다. 연구진 역시 “인구 밀집 지역과 더 가까운 국가에서는 결과가 달라질 수 있으며,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풍력 터빈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다른 이유도 있다. 재산가치 하락 우려와 절차적 불신이 더해지면 심리적 반발은 증폭된다. 사업 설명회가 형식적으로 진행되거나 주민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고 느낄 경우, 같은 소음이라도 훨씬 더 강한 스트레스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다수 선행연구의 공통된 결론이다. 실제로 해외 연구들은 풍력 반대가 건강 피해 자체보다 “왜 우리 동네만 희생해야 하느냐"는 공정성 문제와 더 밀접하다고 보고해왔다. 결국 풍력 확대의 성패는 건강 위해성 논쟁을 넘어, 과학적 이격거리 기준 마련과 실시간 소음 모니터링, 그림자 깜빡임 저감 기술, 주민참여형 수익공유, 투명한 입지선정 절차 같은 사회적 설계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자연이 가진 회복력 활용해 기후 위기 해결…‘에코테크’가 뜬다

기후위기와 생물다양성 붕괴, 해수면 상승, 초대형 산불과 폭염…. 인류가 맞닥뜨린 환경 위기는 갈수록 복합적이고 거대해지고 있다. 이른바 환경신데믹(eco-syndemic) 혹은 다중위기(polycises)다. 이는 기존의 산업기술만으로는 대응이 쉽지 않다. 이에 과학계는 새로운 해법을 주목하고 있다. 바로 에코테크(Ecotech), 우리말로 '생태기술'이다. 자연을 보호의 대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가진 회복력과 순환 원리를 첨단 기술처럼 활용해 인류 문제를 해결하자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최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Science Advances)'에 실린 논문 '에코테크: 지구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자연 과정의 활용'에서 체계적으로 제시됐다. 이 논문은 미국 듀크대 니컬러스 환경대학의 브라이언 R. 실리먼 교수 연구팀이 세계 각국 연구자들과 함께 작성했다. 연구팀은 논문에서 “생태계를 수동적 배경이 아니라 인류 생존을 떠받치는 능동적 기반시설(인프라)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전자 조작 시대에서 생태계 설계 시대로 지난 80년간 인류는 바이오기술의 힘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뤘다. 유전자 조작, 세포치료, 백신 혁신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생산성 극대화를 위한 단일작물 재배는 생물다양성을 해쳤고, 화학물질에 의존하는 농업은 토양과 수질을 악화시켰다. 에코테크는 이러한 방향을 크게 바꾼다. 바이오기술이 생물체 내부를 들여다보는 미시(微視)기술이라면, 에코테크는 생물과 환경의 상호작용 전체를 다루는 거시(巨視)기술이다. 쉽게 말해, 나무 한 그루의 DNA를 바꾸는 대신 숲 전체가 더 건강하게 순환하도록 설계하는 기술이다. 에코테크는 우리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형태로 구현되고 있는데 8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생태계 경작: 네덜란드의 '마커 와덴(Marker Wadden)' 프로젝트는 준설된 퇴적물을 활용해 인공 섬과 습지를 조성하여 수질을 개선하고 생물 다양성을 높였다. △자연 기반 해법: 생태계 먹이사슬 포식자를 재도입하는 '리와일딩(Rewilding)'을 통해 생태계의 자연스러운 에너지 흐름과 영양 순환을 회복시킨다. △생태 모사: 흰개미집의 환기 구조를 모방하여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면서 실내 공기를 순환시키는 능동적 냉각 건물을 설계한다. △생태계 재료 과학: 3D 프린팅으로 제작된 바이오닉 산호는 실제 산호 구조를 복제하여 미세 조류의 서식처를 제공하고 광효율을 높인다. △생태계 유전학: 환경 DNA(eDNA) 기술을 활용해 물이나 공기 샘플만으로 그 지역의 생물 다양성, 침입종 유무, 멸종 위기종의 이동을 실시간 모니터링한다. △생태계 에너지: 식물-미생물 연료 전지 기술을 통해 습지 식물의 뿌리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전기로 변환한다. △생태 치료: 꿀벌의 면역력을 높이는 유익균(Probiotics)이나 박쥐의 질병을 치료하는 항생제를 환경에 살포하여 야생 동물의 복원력을 높인다.. △생태-지구공학: 바다에 철분을 공급하여 식물성 플랑크톤의 성장을 촉진함으로써 대기 중 탄소 흡수량을 극대화한다. ◇세계 곳곳에 에코테크 사례들 등장 ①콘크리트 대신 살아 있는 방파제: 자연기반 해법 대표 사례는 미국 동부 해안의 리빙 쇼어라인(Living Shoreline·살아 있는 해안선) 프로젝트다. 기존 해안 방어는 콘크리트 방파제를 세운다. 즉각적 효과는 크지만 시간이 지나면 균열이 생기고 유지비가 늘어나면서 해양 생물 서식지를 파괴한다. 이에 비해 에코테크는 굴 암초와 해초, 염습지를 복원해 파도의 에너지를 흡수하도록 만든다. 굴은 시간이 갈수록 군락을 키워 구조를 강화하고, 식물 뿌리는 토사를 붙잡아 침식을 막는다. 자연이 스스로 자라며 방어력을 높이는 셈이다. 논문은 이런 방식이 일부 지역에서 전통 방파제보다 장기 복원력과 경제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②아프리카 '거대한 녹색 장벽': 생태계 경작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남쪽 사헬지대에서는 '거대한 녹색 방벽(Great Green Wall)' 사업이 진행 중이다. 주민들이 땅에 반달형 홈을 파면, 여기에 빗물이 고이고, 수분이 오래 유지된다. 이 구덩이에 토착 식물이 자라면서 토양도 살아난다. 단순한 조경사업이 아니라 자연의 물순환 구조를 모방한 에코테크다. 효과는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토양 유실은 줄어들고, 농업 생산성은 증가하고, 지역 일자리가 늘어난다. 또, 기온 상승이 완화되고, 탄소 흡수가 늘어난다. 환경 복원이 곧 지역경제 활성화로 이어지는 대표 사례다. ③나무처럼 숨 쉬는 도시, 싱가포르 '슈퍼트리': 생태계 재료 과학 싱가포르 남부 마리나베이(Marina Bay) 해안 매립지에 있는 '가든스 바이 더 베이(Gardens by the Bay)의 슈퍼트리는 도시형 에코테크의 상징이다. 슈퍼트리는 높이 50m 안팎의 인공 구조물 표면을 식물이 덮고 있다. 태양광 패널이 전기를 생산하고, 빗물을 모아 재활용하며, 식생이 도시 열을 낮춘다. 연구진은 주변 기온을 최대 5℃ 낮추는 냉각 효과가 있다고 소개했다. 도시 인프라가 단순한 철골 구조물이 아니라 하나의 생태계 장치가 되는 것이다. ◇돈이 되는 자연…미래 거대 시장 가능성 에코테크는 환경운동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거대한 산업이 될 수 있다. 연구진은 생태복원 서비스, 자연기반 탄소시장, 환경센서, 생태 데이터 분석, 친환경 도시 인프라 등에서 거대한 시장이 열릴 것으로 전망한다. 강력한 특허 보호와 정책 지원이 뒷받침되면, 2030년대에는 바이오기술 시장에 버금가는 규모로 성장할 가능성도 제시됐다. 산업혁명이 석탄과 철을 활용했다면, 미래의 생태혁명은 숲과 바다, 습지와 미생물을 활용하는 시대가 될 수 있다. 바로 자연이 자원이고, 자연이 자본이다. 에코테크는 자연을 지키자는 선언이 아니다. 자연과 함께 성장하는 새로운 산업 전략인 셈이다. 이 때문에 에코테크가 자연과 기술의 조화를 추구하더라도, 어디까지 인간 개입을 허용할 것인가는 여전히 중요한 논쟁거리다. 하지만 기후위기가 심화할수록 자연이 가진 회복력을 잘 파악해서 그것을 정교한 기술로 살려내려는 노력은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 생각이기도 하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AI 데이터센터는 초대형 전기난로”…도시열섬 현상 실제 입증

인공지능(AI) 산업의 폭발적 성장과 함께 급증하는 데이터센터가 도시 열섬 현상을 부추기는 새로운 환경 위험 요인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미국 애리조나주립대학교 지리과학-도시계획대학원의 데이비드 J. 세일러 교수 연구팀은 최근 미국기계학회(ASME)가 발행하는 학술지 '지속가능한 빌딩과 도시를 위한 공학 저널 (Journal of Engineering for Sustainable Buildings and Cities)'에 발표한 논문에서 데이터센터에서 배출되는 폐열이 인근 주거지역의 기온을 실제로 상승시킨다는 사실을 현장 관측을 통해 최초로 입증했다. 연구진은 애리조나주 피닉스 대도시권의 대형 데이터센터 4곳 주변을 차량 이동식 정밀 온도센서로 측정해 주변 지역 기온 변화를 분석했다. ◇근처에선 한낮 태양보다 2~6배 강한 열 연구진이 주목한 것은 데이터센터의 엄청난 폐열 밀도다. 일반적으로 도시 전체의 인위적 열 배출량은 ㎡당 10~75와트(W) 수준이다. 도쿄 도심의 최고 밀집지역조차 약 1600W/㎡ 수준이다. 반면 이번에 측정된 애리조나의 주도(州都) 피닉스 대도시권의 최신 공랭식 데이터센터들은 2000~6000W/㎡의 열을 뿜어냈다. 이는 한낮 태양 복사열(약 1000W/㎡)의 2~6배에 달한다. 예를 들어 피닉스의 위성도시인 메사(Mesa)시에 위치한 NTT PH1 데이터센터는 36㎿ IT 부하(데이터센터 안에서 서버·저장장치·네트워크 장비 같은 핵심 IT 장비들이 실제로 소비하는 전력 용량이 36㎿(메가와트)라는 뜻)를 처리하는데, 전체 소비전력은 약 47㎿에 이른다. 이는 미국 가정 약 4만 가구가 동시에 쓰는 전력과 맞먹는 열을 한곳에 집중 배출하는 셈이다. 같은 피닉스의 위성도시인 챈들러에 위치한 사이러스원(CyrusOne)이란 업체의 대형 캠퍼스형 시설은 더 크다. 총 169㎿ IT 용량에, 전체 소비전력은 약 220㎿나 된다. 18만 가구 이상이 내는 것과 같은 규모의 열을 단일 부지에서 방출한다. 쉽게 말해 데이터센터는 '초대형 전기난로 수십만 대를 한 블록에 몰아놓은 것'과 비슷하다. ◇최대 500m 떨어진 주택가까지 영향 측정 결과는 예상보다 뚜렷했다. 데이터센터 바람이 불어가는 방향의 주거지역 기온은 반대편보다 평균 0.7~0.9℃ 높았다. 최대 상승폭은 2.2℃에 달했다. 영향 범위는 시설 경계에서 100~500m까지 확인됐다. 일부 지역은 아파트 단지와 데이터센터가 5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시설별로 보면 △사이러스원(챈들러 시) 약 0.5~0.8℃도 상승, 최대 500m 확산 △얼라인드 (챈들러) 약 0.7℃ 상승 △디지털 리얼티 (챈들러) 평균 1℃, 최대 2℃ 상승 △NTT PH1 (메사) 0.9℃ 상승, 300~500m 범위 영향 등이다. 연구진은 “폐열 플룸(plume), 데이터센터가 품어내는 뜨거운 공기 덩어리는 바람 방향과 정확히 일치해 이동했다"면서 “주변 기온 상승은 데이터센터가 직접 원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설명했다. 논문에 따르면 이 배출된 폐열 플룸은 주변 공기보다 8~14℃ 더 뜨겁고, 피닉스 여름에는 50℃를 넘기도 했다. 이 공기가 초속 2~4m 속도로 밀려 나오면서 바람을 타고 주변으로 퍼진다. ◇도시 열섬 현상을 부추겨 데이터센터는 도시 열섬 현상을 부추긴다. 다만 전통적 열섬과는 다른 '국지적 열섬'이다. 기존 도시 열섬은 아스팔트, 콘크리트, 자동차, 건물 축열 등이 복합적으로 도시 전체를 덥힌다. 반면 데이터센터는 특정 지점에서 매우 강한 열을 집중 배출해 '포켓형 열섬(data center heat island)'을 만든다. 연구진은 피닉스에 이미 이런 포켓형 열섬이 다수 형성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향후 데이터센터가 급증하면 도시 전체 열환경을 재편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가운데 연구진은 흥미롭게도 도시 열섬 현상의 완화 가능성도 포착했다. 챈들러의 한 데이터센터 주변에서는 물이 흐르는 공원과 수목지대가 폐열 일부를 상쇄하는 냉각 효과를 보였다. 즉, 충분한 녹지와 물순환 설계는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다만 한계도 있다. 데이터센터 폐열은 워낙 강해 단순한 잔디 조성만으로는 부족하다. ◇주민건강·생태계 피해 가능성도 현재까지 직접적인 건강 피해가 확인된 것은 아니다. 다만 연구진은 폭염 지역에서는 1~2℃의 추가 상승만으로도 냉방 전력 수요와 열 스트레스 위험이 크게 증가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피닉스처럼 여름철 낮 기온이 43℃를 넘는 지역에서는 △실외 체감온도 악화 △열사병 위험 증가 △야간 냉방 부담 확대 △전기요금 상승 △저소득층 에너지 빈곤 심화 등이 발생할 수 있다. 연구진은 이를 “데이터센터가 주변 가정의 냉방비를 올리는 역설적 피드백 루프"라고 표현했다. 논문에서는 생태계 직접 영향은 아직 조사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시 생태학 관점에서는 우려할 만하다. 기온이 지속적으로 1~2℃ 상승하면 △곤충 활동 주기 변화 △야간 냉각 감소 △토양 수분 증발 증가 △도시 조류·식물 생육 교란 △미(微)기후 의존 생물 서식지 악화 등이 나타날 수 있다. 특히 도시 녹지 가장자리나 소규모 습지는 이런 미세 기온 변화에 민감하다. ◇“AI 인프라 확장, 열관리도 함께 설계해야" 데이터센터로 인한 도시 열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해법이 있을 수 있다. 먼저 배출구를 상향 설계해 뜨거운 공기를 위로 분산할 필요가 있다. 배출 속도·각도를 최적화해 열기가 지면 근처를 따라 확산하는 것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로는 건물 간격을 확대해 열기 데이터센터 부근에 정체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세 번째로는 더워진 냉각수를 회수해 지역난방에 활용할 필요가 있다. 폐열을 에너지로 재사용하자는 것이다. 네 번째로는 데이터센터 근처에 완충 녹지 설치를 의무화할 필요도 있다. 녹지를 통해 열을 흡수하고, 증발산을 강화해 열을 식히자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입지 규제 강화다. 주거지와 최소의 이격거리를 확보하도록 하는 것이다.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 사용량은 2024년 약 415TWh(테라와트시, 1TWh=10억kWh)에서 2030년 945TWh로 두 배 이상 증가할 전망이다. 연구진은 “AI 시대 데이터센터는 디지털 인프라이자 동시에 새로운 도시 기후 인프라"라며 “전력망 영향만 볼 것이 아니라 도시 미기후까지 포함한 환경영향평가 체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GDP 수치만으로 국가가 정말 발전했는지 알 수 없다”

국내총생산(GDP) 중심의 국가 성과 측정 방식을 넘어, 사람의 '삶의 질'과 지구의 지속가능성을 함께 평가해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공식 제안이 나왔다. 유엔(UN) 사무총장이 지난해 구성한 'GDP를 넘어서 - 독립 고위급 전문가 그룹(Independent High-Level Expert Group on Beyond GDP)'은 최근 최종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 제목은 《가치 있는 것을 측정하기: 사람과 지구를 위한 진보의 나침반(Counting What Counts: A Compass of Progress for People and Planet)》이다. 보고서는 브루킹스연구소의 경제연구 프로그램 선임연구원인 캐럴 그레이엄이 총괄 편집을 맡았으며, 컬럼비아대학교의 조지프 E. 스티글리츠 등 세계적인 경제학자와 공식통계 분야 전문가 14명이 공동 집필했다. 이들 전문가는 “우리가 무엇을 측정하느냐가 우리가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는지를 결정한다"면서 “GDP에 대한 과도한 의존에서 벗어나 보다 입체적이고 지속가능한 국가 진보 측정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GDP 성장의 역설…숫자 늘었다고 삶이 나아졌나 GDP는 일정 기간 한 나라 안에서 생산된 재화와 서비스의 총가치를 보여주는 대표 경제지표다. 경제 규모와 성장 속도를 비교하는 데 강력한 도구로 활용돼 왔다. 그러나 보고서는 GDP가 애초에 국민 삶의 질(well-being)이나 사회적 안녕을 측정하도록 설계된 지표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지난 수십 년간 많은 국가에서 GDP는 증가했지만, 불평등 심화와 환경 파괴, 공공기관에 대한 신뢰 약화, 사회적 고립 등은 오히려 악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특히 GDP는 무급 돌봄노동이나 디지털 공공재의 가치를 반영하지 못하면서, 산림 훼손이나 자원 고갈처럼 미래 기반을 잠식하는 활동도 경제 생산으로 계산하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다. 단기 경제성장은 포착하지만 장기 지속가능성은 놓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성장의 역설'이라고 규정했다. 경제가 성장해도 시민들이 삶의 개선을 체감하지 못하고, 공동체의 신뢰와 미래 자산이 약화된다면 그것을 진정한 진보(발전)라 보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GDP 대체 아닌 보완…31개 핵심지표 제시 전문가 그룹은 GDP를 폐기하자고 주장하지 않는다. 대신 GDP를 보완할 수 있는 'GDP를 넘어서 대시보드(Beyond GDP dashboard)'를 제안했다. 대시보드는 자동차 계기판처럼 여러 핵심 지표를 한눈에 보여주는 종합 표시 체계를 뜻한다. 이 대시보드는 총 31개 핵심 지표를 통해 국가의 현재 상태와 미래 지속가능성을 다층적으로 측정하는 체계다. 대시보드는 네 개 축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 축은 '기초 원칙'이다. 평화·인권·지구 존중이라는 세 가지 기본 가치를 측정한다. 분쟁 사망자 수, 차별 경험 비율, 여성 폭력 피해율, 온실가스 배출량, 생물다양성 온전성 지수 등이 포함된다. 두 번째 축은 '현재 삶의 질'이다. 가처분소득, 노동의 질, 건강수명, 교육 수준, 디지털 역량, 치안, 삶의 만족도, 외로움, 공공서비스 만족도, 대기질, 식수 접근성 등 시민이 실제로 체감하는 삶의 조건을 측정한다. 특히 '삶의 만족도'와 '외로움' 같은 주관적 지표가 포함된 점이 눈에 띈다. 세 번째 축은 '형평성과 포용성'이다. 상위 1% 부(富) 점유율, 지니계수, 사회적 빈곤율, 남녀 임금격차, 지역 인프라 접근성, 다차원 빈곤지수 등을 통해 성장의 혜택이 얼마나 고르게 분배되는지를 평가한다. 네 번째 축은 '지속가능성과 회복력'이다. 이는 미래 세대의 안녕을 떠받치는 국가의 자산 기반을 평가하는 영역으로, 생산·인적·사회적·제도적·자연 자본이라는 5가지 자본 개념을 중심으로 측정된다. ◇'5가지 자본'으로 미래를 측정하다 보고서가 제시한 가장 새로운 개념은 '5가지 자본'이다. ①생산 자본은 도로·철도·항만 같은 사회기반시설과 공장·기계·설비 등 경제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물리적 자산을 뜻한다. 한 사회가 재화와 서비스를 안정적으로 생산하고 공급할 수 있는 기반으로, 전통적인 GDP 성장의 핵심 토대가 되는 요소다. ②인적 자본은 국민이 보유한 교육 수준과 건강 상태, 직업 능력, 디지털 활용 역량, 창의성과 문제 해결 능력 등을 포괄한다. 개인의 생산성과 혁신 역량을 높이고 사회 전체의 장기 경쟁력을 좌우하는 미래 성장의 원천으로 평가된다. ③사회적 자본은 공동체 구성원 사이의 신뢰와 협력, 상호부조, 시민 참여, 사회적 연대 의식 등을 의미한다. 사회적 자본이 높을수록 갈등을 줄이고 위기 상황에서 공동 대응이 가능해져 사회의 안정성과 회복력이 커진다. ④제도적 자본은 정부와 공공기관, 사법·행정 시스템이 얼마나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자산이다. 정책 집행의 신뢰성, 법치주의, 부패 통제, 공공서비스의 질 등이 포함되며, 시민과 시장이 제도를 신뢰할수록 국가 운영의 지속가능성이 높아진다. ⑤자연 자본은 토지와 물, 산림과 토양, 광물자원, 대기, 생태계 서비스와 생물다양성 등 인간 삶과 경제활동을 떠받치는 자연의 기반 전체를 뜻한다. 식량 생산과 기후 조절, 수자원 공급, 탄소 흡수 같은 기능을 제공하며, 훼손될 경우 미래 세대의 삶의 질과 경제적 지속가능성까지 위협할 수 있다. 전문가 그룹은 생산 자본이 늘더라도 자연 자본이나 사회적 자본이 훼손되면 지속가능한 성장이 아니라고 경고했다. 이는 GDP가 놓치는 '자산 고갈'을 포착하기 위한 장치다. ◇국가별 도입 권고…2027년까지 대시보드 구축 이런 지적에도 불구하고 보고서를 작성한 전문가 그룹은 GDP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GDP는 여전히 경제활동을 측정하는 핵심 지표라는 것이다. 다만 GDP 수치만으로 국가의 발전을 판단하는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는 것이 이번 보고서의 핵심 메시지다. 보고서는 “GDP는 경제의 속도를 보여줄 수는 있지만,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려주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세계가 기후위기와 불평등, 사회적 단절이라는 복합위기에 직면한 지금, 국제사회는 '얼마나 성장했는가'보다 '무엇을 위해 성장하는가'를 묻기 시작했다. 이번 보고서는 그 질문에 대한 첫 번째 글로벌 설계도로 평가된다. 한편, 보고서는 각국 정부가 2027년까지 자국 실정에 맞는 'GDP를 넘어서 대시보드'를 구축해 정책과 예산 편성 과정에 반영할 것을 권고했다. 이를 위해 통계 시스템 강화와 정기적 국민 체감조사, 자연자본 회계 구축, 정책 효과 평가 기준 개편 등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또한 유엔 차원의 연례 글로벌 보고서를 통해 국가별 진척 상황을 비교·관리하는 국제 기준도 마련할 계획이다. ◇한국에도 적잖은 변화 예고…정책·기업 평가기준 바뀔 수도 이번 UN 보고서는 한국에 당장 법적 의무를 부과하는 것은 아니지만, 중장기적으로는 국가 정책 평가와 기업 경영 환경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다. 가장 큰 변화는 국가 성과 평가 기준의 확대다. 지금까지 한국은 성장률과 수출, 고용, 물가 등 경제지표를 중심으로 정책 성과를 평가해 왔다. 그러나 새로운 체계가 국제 표준으로 자리 잡을 경우, 앞으로는 삶의 질과 사회적 신뢰, 불평등 수준, 환경의 질, 자연자본 보전 여부 등이 국가 경쟁력을 판단하는 핵심 지표로 부상할 수 있다. 정부 역시 정책 성과를 설명할 때 단순한 성장 수치보다 국민 삶의 개선 정도와 미래 지속가능성을 함께 제시해야 하는 압박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예산 편성 방식에도 변화 가능성이 제기되고 통계 인프라 확충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보고서 권고에 맞추려면 국가데이터처를 중심으로 관련 부처가 협력해 새로운 조사 체계와 자연자본 회계 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수도 있다. 산업계에도 영향이 예상된다. 특히 UN이 강조한 자연자본 회계가 본격 도입되면 대규모 개발사업이나 산업단지 조성, 에너지·건설 투자 평가에서 단순 경제효과뿐 아니라 생태 훼손 비용과 복원 가치까지 함께 반영될 수 있다. 이에 따라 기업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역시 탄소배출 감축을 넘어 지역사회 신뢰와 생태계 보전, 공동체 기여도까지 폭넓게 평가받는 방향으로 진화할 가능성이 있다. 강찬수 기후환경 전문기자 kcs25@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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