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위 숨겨진 위험, 우주방사선 (하)] 정책·규제를 넘어 ‘안전 문화’로 정착돼야…해법은?

2023년 11월 당시 사무장급이던 대한항공 승무원의 위암 사망이 우주방사선 노출에 따른 '산업재해'로 처음 인정되면서 '하늘 위 숨겨진 위험'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높아졌다. 에너지경제신문은 대한항공 조종사들이 한국항공운항학회에 투고한 '항공 승무원의 우주방사선 피폭 저감에 관한 연구' 논문을 근거로 국내 항공승무원들이 마주한 '우주방사선 피폭'의 실태를 과학적 데이터로 분석하고, 그 원인과 현실적인 저감 방안을 심층적으로 조명해 본다. 기획 내용은 총 3회에 걸쳐 △상편 문제의 심각성 △중편 피폭의 핵심 원인 △하편 구체적인 해법과 미래 과제 순으로 연재한다. 우주방사선 피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항공기 운항을 전면 중단할 수는 없다. 핵심은 위험을 인지하고 데이터를 기반으로 관리하며, 합리적인 수준에서 저감하는 것이다. 대한항공 현직 기장들이 주도한 연구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3가지 저감 방안을 명확히 제시한다. 이는 단순한 제언을 넘어 항공사의 운항 스케줄링과 비행 계획 시스템에 직접 적용 가능한 실행 계획에 가깝다. ①개인별 북극 항로 비행 횟수 제한 특정 승무원이 고위험 노선에 집중적으로 투입되는 것을 막아 단기간에 과도한 피폭이 누적되는 것을 방지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다. 이는 연간 총 피폭량이 법적 한도에 근접하는 승무원들을 보호하는 데 필수적인 조치다. ②고위도-저위도 노선 균형적 배분 이는 보다 정교한 접근법으로 승무원의 비행 스케줄을 하나의 포트폴리오처럼 관리하는 개념이다. 요컨대 한 승무원이 피폭량이 높은 뉴욕 비행을 했다면 다음 비행은 피폭량이 현저히 낮은 방콕이나 시드니 노선에 배정해 월간 또는 연간 누적 피폭량을 평균화하고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스케줄링 기반의 저감 방안은 이미 대한항공에서도 수용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대한항공 노사는 2021년 7월 협의를 통해 승무원의 비행 노선과 시간을 관리하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해 연간 6mSv에 근접하는 피폭량을 기록한 승무원을 북극 항로가 아닌 노선이나 비행 시간이 짧은 노선에 자동으로 배정하는 시스템을 도입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연구에서 제시된 방안이 기술적으로 충분히 구현 가능하고 노사 양측의 공감대를 얻고 있음을 보여주는 긍정적인 신호다. ③고위도 노선 운항 시 계획 비행 고도 하향 항공기는 일반적으로 공기 저항이 적어 연료 효율이 가장 높은 최적 순항 고도로 비행한다. 그러나 이 고도는 우주방사선 노출 측면에서는 가장 위험한 고도일 수 있다. 연구는 비행 계획서상 고도를 의도적으로 낮출 경우, 방사선량이 얼마나 감소하는지를 시뮬레이션 프로그램 'CARI-6M'을 통해 정량적으로 분석했다. 분석 결과 순항 고도를 단 2000ft(약 610m)만 낮춰도 평균 13.2%의 피폭선량 저감 효과가 나타났고 4000ft(약 1220m)를 낮추면 그 효과는 25.6%에 달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 저감 효과가 저위도 지역보다 고위도 지역에서 더 크게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이는 가장 위험한 구간에서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데이터는 항공사와 규제 당국, 그리고 노조 간의 논의를 '해야 한다, 말아야 한다'의 이분법적 대립에서 '어느 수준까지가 합리적인가'의 과학적 토론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강력한 근거가 된다. 비근한 예로 4000ft 하강이 연료비 측면에서 부담이 크다면 2000ft 하강이라는 절충안을 통해 여전히 13% 이상의 의미 있는 안전 개선을 달성할 수 있다. 이는 급진적인 변화 없이도 점진적이고 데이터에 기반한 안전성 향상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고도 조절과 북극항로 우회는 필연적으로 경제적 비용을 수반한다. 고도를 낮추면 공기 밀도가 높아져 항공기 저항이 커지고, 이는 곧 유류 소비 증가와 비행 시간 연장으로 이어진다. 이는 항공사의 운영 비용을 직접적으로 상승시키는 요인이며, 탄소 배출량 증가라는 환경적 부담으로도 작용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러시아 영공 폐쇄는 이러한 비용 증가가 어느 정도인지를 현실에서 보여줬다. 북극항로를 이용하지 못하고 남쪽으로 우회하게 된 미주 동부 노선들은 편도 비행 시간이 최대 1시간 40분까지 늘어났고, 이는 고스란히 추가 유류비와 운영비 부담으로 돌아왔다. 결국 이 문제는 '안전'과 '경제성' 사이의 고전적인 줄다리기 문제로 귀결된다. 그러나 최근의 법적 판결들은 이 저울의 균형추를 안전 쪽으로 상당 부분 이동시켰다. 과거에는 추가 유류비가 명확한 '비용'으로 인식된 반면, 승무원의 건강 문제는 잠재적이고 불확실한 '리스크'로 취급됐다. 하지만 이제 우주방사선 피폭으로 인한 질병이 구체적인 '산재'로 인정됨에 따라 승무원의 건강 문제는 수백억 원에 이를 수 있는 법적 배상·기업 이미지 실추·우수 인력 이탈 등 명확하고 측정 가능한 '비용'이 됐다. 따라서 이제 항공사는 단기적인 유류비 절감과 장기적인 법적·재무적 리스크 관리 사이에서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야만 하는 입장이 됐다. 연구가 제시한 데이터 기반의 점진적 저감 방안들은 이 균형점을 찾는 과정에서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이는 더 이상 회피할 수 없고 기업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필수적인 경영 과제다. 정부는 항공 승무원의 우주방사선 피폭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관련 규제를 꾸준히 강화해왔다. 과거 국토교통부와 원자력안전위원회로 이원화 돼있 관리 체계는 2023년 6월 11일부터 원안위로 일원화됐고, '생활주변방사선 안전관리법(이하 생활방사선법)' 개정을 통해 항공사의 책임과 의무가 대폭 강화됐다. 개정된 법률과 그 하위 규정인 '항공운송사업자의 우주방사선 안전 관리 규정'은 승무원의 연간 피폭 방사선량 관리 기준을 6mSv로 명시했다. 이는 과거 '5년간 100mSv'라는 복잡한 기준보다 훨씬 더 엄격하고 명확하다. 또한 항공사는 승무원의 연간 피폭량이 6mSv를 초과할 우려가 있는 경우, 즉시 저감 조치를 취해야 할 의무를 진다. 법령이 명시한 조치는 △기존 계획된 국제 항공 노선보다 피폭 방사선량이 낮은 노선으로 변경 △탑승 예정 국제 항공 노선 횟수의 조정 △국제·국내 항공 노선을 탑승하지 않는 근무로 변경 등이다. 이는 앞서 연구가 제시한 스케줄링 기반의 해결책을 법적으로 강제한 것이다. 아울러 항공사는 우주방사선 측정 장비나 검증된 평가 프로그램을 사용해 노선별·개인별 피폭량을 정확히 조사·분석하고, 그 기록을 승무원이 75세가 되거나 마지막 운항 후 30년이 될 때까지 보관해야 하며 관련 내용을 정부에 보고해야 한다. 이 외에도 승무원에게 우주방사선의 위험성과 안전 관리에 대한 정기적인 교육을 실시하고, 이에 관한 건강 진단을 받게 해야 한다. 이러한 규제 강화는 정부 차원의 항공 승무원 안전 관리의 중요한 진일보다. 이는 항공사가 더 이상 재량에 따라 안전 조치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법적 의무로서 승무원의 피폭량을 적극적으로 관리하고 저감해야 함을 의미한다. 국내에서의 규제 강화는 긍정적이지만 세계 유수의 항공사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체계적인 우주방사선 관리 시스템을 운영해왔다. 이는 국내 제도가 국제 표준에 발맞춰 가는 과정에 있음을 보여준다. 유럽연합(EU)은 이미 1996년 유럽 원자력 공동체(EURATOM) 지침을 통해 항공 승무원을 직업적 피폭자로 간주하고 보호 조치를 의무화했다. 이에 따라 독일은 2001년부터 관련 법규를 시행했고 루프트한자는 연간 피폭량이 1mSv를 초과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승무원을 의무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루프트한자는 독일 항공우주센터(DLR)와 협력해 '항공 경로 선량 계산을 위한 유럽 프로그램 패키지(EPCARD)'와 같은 공식 승인된 계산 프로그램을 사용해 각 비행편의 피폭량을 산출한다. 이 데이터는 승무원 관리 시스템과 직접 연동돼 고피폭 승무원의 스케줄을 조정하는 데 활용된다. 또 정기적인 기내 실측을 통해 계산 프로그램의 정확도를 검증하는 등 과학적 신뢰도를 높이는 데도 힘쓰고 있다. 에어프랑스는 프랑스 항공 당국과 협력해 2000년대 초반부터 '시버트(SIEVERT)'라는 독자적인 컴퓨터 시스템을 개발해 운영 중이다. 이 시스템은 은하 우주방사선뿐만 아니라, 예측이 어려운 '태양 입자 현상(SPE)' 발생 시의 피폭량까지 계산go 실시간에 가까운 위험 관리를 지원한다. SIEVERT 시스템의 계산 결과는 실제 항공기에서 측정한 값과 15% 이내의 오차를 보일 정도로 높은 정확도를 자랑하며, 이는 프랑스 승무원 피폭량 관리의 과학적 기반이 되고 있다. 이들 사례는 20여 년 전부터 정부와 항공사가 함께 과학적 데이터에 기반한 정교한 관리 시스템을 구축했고, 피폭량 계산 결과를 승무원 스케줄링이라는 실질적인 인력 운용에 직접 연동해 '사전 예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공통점을 보여준다. 이는 대한민국 항공업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명확히 제시한다는 평가다. 승무원들의 우주방사선 피폭 문제는 이제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왔다. 한 승무원의 안타까운 죽음으로 시작된 사회적 관심은 사법부의 역사적인 판결과 정부의 강력한 규제 강화로 이어졌다. 대한항공 역시 자동화된 스케줄링 시스템 도입을 약속하는 등 변화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해결은 법적 의무를 이행하는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규제는 최소한의 안전망일 뿐, 승무원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안전 문화(Safety Culture)'가 기업의 운영 철학에 깊이 뿌리내려야 한다. 이는 항공사의 모든 의사결정 과정에 승무원의 건강이라는 변수가 당연하게 포함돼야 함을 뜻한다. 요컨대 비행 계획을 수립할 때 운항 관리사는 단순히 최단 거리와 최적 고도를 계산해 연료 효율성만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해당 항로와 고도의 예상 피폭선량을 함께 비교 평가해야 한다. 만약 약간의 고도 하향이나 항로 변경으로 피폭량을 크게 줄일 수 있다면 추가되는 연료비를 '안전을 위한 투자'로 인식하고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의사결정 구조와 기업 문화가 필요하다. 이는 '가능한 한 낮게(ALARA, As Low As Reasonably Achievable)'라는 방사선 방호의 대원칙을 기업 경영에 체화하는 과정이다. 이제 남은 과제는 대한항공을 비롯한 국내 항공업계의 리더십에 달려 있다. 승무원의 안전을 단순한 규제 준수 항목이나 비용 문제로 여기는 시각에서 벗어나 기업의 최우선 가치이자 지속가능한 성장의 핵심 동력으로 인식하는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하늘길의 안전은 항공기의 안전 외에도 그 길을 만드는 사람들의 건강과 안전이 보장될 때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 박규빈 기자 kevinpark@ekn.kr

[하늘 위 숨겨진 위험, 우주방사선 (중)] 북극 항로와 비행 고도…피폭의 주범을 파헤치다

2023년 11월 당시 사무장급이던 대한항공 승무원의 위암 사망이 우주방사선 노출에 따른 '산업재해'로 처음 인정되면서 '하늘 위 숨겨진 위험'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높아졌다. 에너지경제신문은 대한항공 조종사들이 한국항공운항학회에 투고한 '항공 승무원의 우주방사선 피폭 저감에 관한 연구' 논문을 근거로 국내 항공승무원들이 마주한 '우주방사선 피폭'의 실태를 과학적 데이터로 분석하고, 그 원인과 현실적인 저감 방안을 심층적으로 조명해 본다. 기획 내용은 총 3회에 걸쳐 △상편 문제의 심각성 △중편 피폭의 핵심 원인 △하편 구체적인 해법과 미래 과제 순으로 연재한다. 항공사에게 북극항로(Polar Route)는 아시아와 북미 동부를 잇는 가장 매력적인 선택지다. 기존 태평양항로에 비해 비행시간을 30분에서 최대 1시간까지 단축하고, 그에 따른 유류비를 절감할 수 있어 경제적 효율성이 매우 높다. 대한항공은 지난 2006년 8월 국내 항공사 최초로 북극항로 운항을 시작했고, 뉴욕·애틀랜타·워싱턴·시카고·토론토 등 5개 핵심 미주노선에 북극항로를 적극 활용해 왔다. 또한, 최근 5년 간 미국 동부노선의 북극항로 이용률은 평균 65%에 이를 정도로 대한항공의 기재운용 전략의 핵심 요소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 '하늘 위 지름길'은 심각한 방사선 노출이라는 대가를 요구한다. 우주방사선은 크게 태양에서 오는 '태양 우주방사선(SCR, Solar Cosmic Ray)'​​과 태양계 밖 은하에서 오는 '은하 우주방사선(GCR, Galactic Cosmic Ray)'으로 나뉜다. 지구는 거대한 자기장을 형성해 이 고에너지 입자들의 상당수를 막아내는 보호막 역할을 한다. 하지만 지구 자기장의 힘은 모든 지역에서 동일하지 않다. 적도 지역에서 가장 강력하고 자기장이 대기로 수렴하는 남극과 북극의 양극 지역으로 갈수록 급격히 약해진다. 따라서, 북극 상공을 비행하는 것은 이 방사선 보호막의 가장 취약한 지점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 같은 고도라고 해도 북극항로를 비행할 때의 우주방사선량은 다른 중위도나 저위도 항로에 비해 월등히 높을 수밖에 없다. 대한항공 조종사 노동조합(KAPU) 등 회사 구성원들은 북극항로 취항 초기부터 이 같은 방사선 노출 위험에 대한 우려를 지속적으로 제기해 왔다. 결국, 북극항로가 제공하는 경제적 이익은 승무원들의 건강을 담보로 얻어지는 것일 수 있다는 치명적인 딜레마를 안고 있다. 우주방사선 피폭량은 단순히 비행시간에만 비례하지 않는다. '어디를, 얼마나 높이' 비행하는 지가 결정적인 변수다. 대한항공의 자체 피폭 관리 프로그램(CARI-6M) 데이터를 분석한 연구는 이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연구는 대한항공이 취항하는 런던·로스앤젤레스(LA)·시드니·방콕·뉴욕 등 5개 대표 노선의 지난 2014~2018년 5년간 왕복 피폭선량을 비교했다. 그 결과는 노선별로 극적인 차이를 보였다. 2018년 기준 북극항로를 이용하는 뉴욕 노선의 1회 왕복 피폭선량은 평균 0.174밀리시버트(mSv)에 달했다. 반면, 대표적인 저위도 노선인 방콕 노선은 0.023mSv에 불과했다. 이는 단 한 번의 뉴욕 비행이 방콕 비행 7.5회에 해당하는 방사선에 노출된다는 의미다. 고도 역시 피폭량을 좌우하는 핵심 요인이다. 우주방사선은 지구 대기권에 진입하며 공기 분자와 충돌해 점차 에너지를 잃는다. 따라서 대기층이 두꺼운 저고도일수록 안전하고, 공기가 희박한 고고도로 올라갈수록 방사선량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연구진은 “고위도(북위 50도 이상) 노선에서 고고도(8000m 이상)로 비행하는 경우 고도가 높을수록, 비행 시간이 길수록 우주방사선에 많이 노출되고 피폭선량은 급격히 증가한다"고 결론 내렸다. 항공사들이 연료 효율을 높이기 위해 가능한 한 높은 고도로 비행하려는 경향이 결국 승무원들의 피폭량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는 셈이다.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태양 활동이 활발할 때 오히려 지구에 도달하는 우주방사선은 줄어든다. 이는 '태양의 역설'이라 불릴 만한 현상으로 승무원 피폭 관리에 있어 매우 중요한 변수다. 태양은 약 11년 주기로 흑점 활동이 활발해지는 극대기와 잠잠해지는 극소기를 반복한다. 태양 활동이 극대기에 이르면 강력한 '태양풍'이 발생하는데, 이 태양풍이 마치 방패처럼 태양계 외부에서 날아오는 은하 우주방사선(GCR)을 밀어내 지구에 도달하는 양을 줄여준다. 반대로 태양 활동이 극소기에 접어들면 이 방패가 약해져 더 많은 은하 우주방사선이 지구 대기권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연구진은 태양 활동의 지표인 '태양권 전위(HCP:Heliocentric Potentials)' 값과 노선별 피폭선량을 비교해 이 역설적인 관계를 명확히 입증했다. HCP 값은 태양 활동이 활발할수록 높아진다. 태양 활동이 극대기였던 2014년에 비해 극소기로 향하던 2018년에는 HCP 값이 크게 낮아졌고 이에 반비례해 고위도 노선인 뉴욕과 런던의 피폭선량은 뚜렷하게 증가했다. 반면에 저위도 노선인 시드니와 방콕은 태양 활동주기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는 태양 활동주기에 따른 피폭량 변화가 주로 극지방 항로에서 발생하는 문제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이러한 분석은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우주방사선 피폭은 예측 불가능한 재해가 아니라 11년 주기로 변동하는 '예측 가능한 위험'이라는 것이다. 항공사는 태양 활동주기를 고려해 극소기에 접어드는 시기에는 고위도 노선 운항에 대한 보다 강화된 안전 조치를 적용하는 등 동적인 위험 관리가 가능하다. 원자력안전위원회는 항공승무원 안전관리 차원에서 우주방사선량을 실시해 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러한 예측 가능성이 승무원 피폭 저감을 위한 실질적인 운항정책 변화로 이어졌는지는 의문이라는 지적이다. 한편, 2022년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러시아 영공 폐쇄는 의도치 않은 '거대한 실험'이 됐다. 대한항공을 포함한 많은 항공사들은 기존에 북극항로를 통과하던 미주 동부노선을 알래스카와 태평양을 경유하는 남쪽항로로 우회해야만 했다. 이 때문에 비행시간이 편도 기준 1시간에서 1시간 40분가량 늘어나고 유류비가 증가하는 등 막대한 경제적 비용이 발생했다. 이는 역설적으로 북극항로 회피라는 피폭 저감 방안이 가져올 경제적 부담을 현실세계에서 수치로 드러낸 것이다. 러-우크라 전쟁이라는 지정학적 충격은 항공승무원 안전(피폭 저감)과 항공사 비용(유류비 증가) 사이의 균형점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 지에 대한 더 깊은 논의를 촉발하는 계기가 됐다. 박규빈 기자 kevinpark@ekn.kr

[하늘 위 숨겨진 위험, 우주방사선 (상)] 대한항공 승무원 죽음으로 드러난 ‘공중산업재해’

2023년 11월 당시 사무장급이던 대한항공 승무원의 위암 사망이 우주방사선 노출에 따른 '산업재해'로 처음 인정되면서 '하늘 위 숨겨진 위험'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높아졌다. 에너지경제신문은 대한항공 조종사들이 한국항공운항학회에 투고한 '항공 승무원의 우주방사선 피폭 저감에 관한 연구' 논문을 근거로 국내 항공승무원들이 마주한 '우주방사선 피폭'의 실태를 과학적 데이터로 분석하고, 그 원인과 현실적인 저감 방안을 심층적으로 조명해 본다. 기획 내용은 총 3회에 걸쳐 △상편 문제의 심각성 △중편 피폭의 핵심 원인 △하편 구체적인 해법과 미래 과제 순으로 연재한다. 지난 2021년 5월, 대한항공에서 26년 간 근무했던 베테랑 승무원 송 모 씨가 위암 4기 진단을 받은 지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의 비극을 넘어 항공업계의 오랜 관행과 승무원들의 건강권 문제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2023년 10월, 근로복지공단 서울남부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송 씨가 위암으로 사망하자 우주방사선 노출과 관련된 '산업 재해'로 처음 인정했다. 공단 측은 “고인의 누적 노출 방사선량이 측정된 것보다 많을 수 있고, 장거리 노선의 특성상 불규칙한 식생활 요소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송씨의 위암과 업무 사이에 상당한 인과 관계가 인정된다"고 판정했다. 송 씨는 1995년부터 2021년까지 연평균 1022시간을 비행했고, 이 중 절반 가량은 우주방사선 노출량이 5배 이상 높아지는 북극 항로를 통과하는 미주·유럽 노선이었다. 이 결정은 항공 승무원들이 비행 중 자연적으로 노출되는 우주방사선이 단순한 근무 환경의 일부가 아니라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실질적인 직업적 위험 요인임을 국가 기관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첫 사례로 남았다. 항공사는 더 빠르고 경제적인 운항을 위해 더 높은 고도에서 지구의 자전과 바람을 최대한 활용하는 최단 거리 항로를 비행한다. 특히 북미 동부와 유럽을 잇는 노선에서 시간과 연료를 획기적으로 절약해주는 북극 항로는 항공사의 수익성을 극대화하는 핵심 경로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 효율성의 이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대가가 존재했다. 지구 자기장의 보호가 가장 약한 극지방 상공과 대기의 방어막이 얇아지는 높은 고도는 우주에서 쏟아지는 고에너지 입자인 우주방사선에 가장 많이 노출되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송 씨의 산재 인정은 항공업계, 특히 국내 최대 항공사인 대한항공에 파장을 일으켰다. 회사 운영 효율성과 승무원의 건강권이라는 두 가치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지점에서 우주방사선이 불가피한 것인지, 혹은 충분히 관리하고 저감할 수 있는 문제인지에 대해서다. 지금껏 항공 승무원의 우주방사선 피폭은 업무 환경의 일부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이어진 법적 판단들은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우주방사선 피폭을 직업병의 영역으로 편입시켰다. 근로복지공단의 결정은 단일 사례에 그치지 않았다. 지난달 28일 서울행정법원은 2009년부터 근무하다 2019년 백혈병 진단을 받은 전직 승무원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요양 불승인 처분 취소 소송 1심에서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우주방사선에 포함된 전리방사선은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가 지정한 발암 물질"이라며 “방사선은 최소량으로도 잠재적으로 해를 끼칠 수 있고 누적 방사선량이 특정 수준에 도달하지 않았다고 해서 안전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특히 해당 승무원의 총 비행시간 7672시간 43분 중 4600여시간이 8시간 넘는 장거리 비행이었던 점을 고려할 때 평균적인 승무원보다 더 높은 수준의 우주방사선에 노출됐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명확한 '문턱값(threshold)'이 없는 저선량 방사선의 확률론적 위험성을 인정한 것이다. 이러한 법적 판결들은 대한항공을 비롯한 항공사들의 기존 입장을 무력화시켰다. 대한항공은 송 씨의 사례에서 “승무원의 누적 피폭 방사선량이 안전기준인 연간 6mSv를 초과하지 않도록 관리했으며, 위암과 우주방사선의 상관 관계는 밝혀진 바 없다"는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그러나 법원과 질병판정위원회는 단순히 법적 기준치인 연간 6mSv를 준수했는지 여부를 넘어 직업 환경 자체가 질병 발생에 '상당한 인과 관계'를 가졌는지를 판단했다. 이는 항공사의 책임 패러다임이 '규제 준수'에서 '실질적 위험 관리'로 전환됐음을 의미한다. 2009년 미국 우주 기상 워크숍에서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항공 승무원의 연간 평균 피폭선량은 3.07mSv로 원자력 관련 종사자 1.87mSv, 방사선 의료 종사자 0.75mSv를 크게 상회했다. 이는 일반인의 연간 선량 한도인 1mSv의 세 배가 넘는 수치다. 2018년 기준 1회 이상 국제선 비행을 한 대한항공 직원의 연평균 피폭선량은 운항직 2.321mSv, 객실 승무원은 2.970mSv에 달했다. 개인별 최고 피폭량은 연간 법적 한도인 6mSv에 근접하는 5.648mSv(운항), 5.392mSv(객실)를 기록한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객실 승무원의 평균 피폭량이 운항 승무원보다 높은 점이 주목할 만하다. 연구진은 그 원인으로 객실 승무원이 특정 기종에 고정되지 않고 다양한 항공기에 탑승하며, 고위도·장거리 노선인 미주·유럽 노선 비행 횟수가 많고, 연평균 비행 시간도 899시간인 조종사들보다 긴 1014시간에 달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는 피폭 문제가 특정 직책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항공사의 인력 운용·스케줄링 정책과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음을 시사한다. 항공 승무원이 노출되는 우주방사선은 한 번에 대량의 방사선을 쬐는 급성 피폭과는 성격이 다르다. 비행 때마다 비교적 낮은 선량의 방사선에 장기간에 걸쳐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만성 저선량 피폭'에 해당한다. 저선량 피폭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과학적으로 명확히 규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라는 것이 연구진의 입장이다. 10mSv의 방사선 노출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밝혀내려면 500만명, 1mSv의 경우 5억명이라는 비현실적인 규모의 연구 대상이 필요해서다. 그러나 과학적 인과 관계 입증의 어려움이 위험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저선량 방사선 피폭의 가장 큰 우려는 암이나 유전적 돌연변이와 같은 '확률론적 영향(stochastic effects)'이다. 이는 피폭선량이 높을수록 질병 발생 확률이 증가하지만 발병 여부를 단정할 수는 없는 특성을 가진다. IARC는 우주방사선의 주성분인 전리방사선을 '사람에게 암을 일으킨다는 증거가 확실한 물질'이라는 이유로 '그룹 1(Group 1)'로 분류하고 있다. 프랑스 식품환경산업안전보건청(ANSES)를 포함한 제반 연구 기관들도 항공 승무원 집단에서 편평세포암·흑색종을 포함한 피부암과 백혈병 등 특정 암의 발병률이 일반인에 비해 높게 나타나는 결론을 도출해냈다. ANSES는 문헌과 IARC 논문을 언급하며 태양과 우주방사선이 원인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비행 경력 20년 이상, 연간 900시간 이상 비행하는 승무원의 경우 추가적인 암 발생 위험이 최대 140명당 1명꼴로 평가되기도 했다. 이는 일반적인 암 발생 빈도인 평균 5명당 1명보다는 낮지만 특정 직업군에서 관찰되는 분명한 위험 증가 신호라는 분석이다. 최근의 산재 인정 사례들은 이러한 의학·통계적 개연성을 법적 인과 관계로 인정한 결과물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항공사는 더 이상 과학적 불확실성을 방패 삼아 책임을 회피하기 어려워졌다. 이로써 항공사는 단순히 법적 한도를 넘지 않도록 관리하는 소극적 대응을 넘어 예방 원칙에 입각해 피폭량 자체를 합리적으로 달성 가능한 가장 낮은 수준으로 줄이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입증해야 하는 새로운 법·사회적 책무를 안게 됐다는 평가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당사는 법에 의해 정한 기준으로 우주방사선 노출량을 철저히 관리 중이며 건강 상담 등 필요한 의료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며 “아울러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판정을 위한 자료 제공과 역학 조사에도 적극 협조하고 있고 판정 결과를 따르고 있다"고 전했다. 박규빈 기자 kevinpark@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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