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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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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위 숨겨진 위험, 우주방사선 (중)] 북극 항로와 비행 고도…피폭의 주범을 파헤치다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25.09.16 18:30

가장 빠른 길의 그림자…비행 고도와 위도, 피폭량 결정
은하 우주방사선, 태양 활동 극소기 지구 대기권에 난입
러-우 전쟁, ‘북극 항로 회피 경제적 부담’ 수치로 증명

2023년 11월 당시 사무장급이던 대한항공 승무원의 위암 사망이 우주방사선 노출에 따른 '산업재해'로 처음 인정되면서 '하늘 위 숨겨진 위험'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높아졌다. 에너지경제신문은 대한항공 조종사들이 한국항공운항학회에 투고한 '항공 승무원의 우주방사선 피폭 저감에 관한 연구' 논문을 근거로 국내 항공승무원들이 마주한 '우주방사선 피폭'의 실태를 과학적 데이터로 분석하고, 그 원인과 현실적인 저감 방안을 심층적으로 조명해 본다. 기획 내용은 총 3회에 걸쳐 △상편 문제의 심각성 △중편 피폭의 핵심 원인 △하편 구체적인 해법과 미래 과제 순으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북미 노선에 투입되는 항공기는 북극 항로 운항 중 형형색색의 발광(發光)이 나타나는 오로라 현상과 조우함과 동시에 우주방사선에도 노출된다. 사진

▲북미 노선에 투입되는 항공기는 북극 항로 운항 중 형형색색의 발광(發光)이 나타나는 오로라 현상과 조우함과 동시에 우주방사선에도 노출된다. 사진=구글 생성형 AI 제미나이

대한항공 승무원 피폭의 주범 '북극항로 방사선'…최단거리 경제효율성의 대가

항공사에게 북극항로(Polar Route)는 아시아와 북미 동부를 잇는 가장 매력적인 선택지다. 기존 태평양항로에 비해 비행시간을 30분에서 최대 1시간까지 단축하고, 그에 따른 유류비를 절감할 수 있어 경제적 효율성이 매우 높다.


대한항공은 지난 2006년 8월 국내 항공사 최초로 북극항로 운항을 시작했고, 뉴욕·애틀랜타·워싱턴·시카고·토론토 등 5개 핵심 미주노선에 북극항로를 적극 활용해 왔다. 또한, 최근 5년 간 미국 동부노선의 북극항로 이용률은 평균 65%에 이를 정도로 대한항공의 기재운용 전략의 핵심 요소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 '하늘 위 지름길'은 심각한 방사선 노출이라는 대가를 요구한다. 우주방사선은 크게 태양에서 오는 '태양 우주방사선(SCR, Solar Cosmic Ray)'​​과 태양계 밖 은하에서 오는 '은하 우주방사선(GCR, Galactic Cosmic Ray)'으로 나뉜다. 지구는 거대한 자기장을 형성해 이 고에너지 입자들의 상당수를 막아내는 보호막 역할을 한다.


하지만 지구 자기장의 힘은 모든 지역에서 동일하지 않다. 적도 지역에서 가장 강력하고 자기장이 대기로 수렴하는 남극과 북극의 양극 지역으로 갈수록 급격히 약해진다. 따라서, 북극 상공을 비행하는 것은 이 방사선 보호막의 가장 취약한 지점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 같은 고도라고 해도 북극항로를 비행할 때의 우주방사선량은 다른 중위도나 저위도 항로에 비해 월등히 높을 수밖에 없다.




대한항공 조종사 노동조합(KAPU) 등 회사 구성원들은 북극항로 취항 초기부터 이 같은 방사선 노출 위험에 대한 우려를 지속적으로 제기해 왔다. 결국, 북극항로가 제공하는 경제적 이익은 승무원들의 건강을 담보로 얻어지는 것일 수 있다는 치명적인 딜레마를 안고 있다.


노선과 고도가 피폭량을 결정한다

우주방사선 피폭량은 단순히 비행시간에만 비례하지 않는다. '어디를, 얼마나 높이' 비행하는 지가 결정적인 변수다. 대한항공의 자체 피폭 관리 프로그램(CARI-6M) 데이터를 분석한 연구는 이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연구는 대한항공이 취항하는 뉴욕·로스앤젤레스·런던·시드니·방콕 등 5개 대표 노선의 지난 2014~2018년 5년간 왕복 피폭선량을 비교했다. 그 결과는 노선별로 극적인 차이를 보였다.


2018년 기준 북극항로를 이용하는 뉴욕 노선의 1회 왕복 피폭선량은 평균 0.174밀리시버트(mSv)에 달했다. 반면, 대표적인 저위도 노선인 방콕 노선은 0.023mSv에 불과했다. 이는 단 한 번의 뉴욕 비행이 방콕 비행 7.5회에 해당하는 방사선에 노출된다는 의미다.


고도 역시 피폭량을 좌우하는 핵심 요인이다. 우주방사선은 지구 대기권에 진입하며 공기 분자와 충돌해 점차 에너지를 잃는다. 따라서 대기층이 두꺼운 저고도일수록 안전하고, 공기가 희박한 고고도로 올라갈수록 방사선량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연구진은 “고위도(북위 50도 이상) 노선에서 고고도(8000m 이상)로 비행하는 경우 고도가 높을수록, 비행 시간이 길수록 우주방사선에 많이 노출되고 피폭선량은 급격히 증가한다"고 결론 내렸다.


항공사들이 연료 효율을 높이기 위해 가능한 한 높은 고도로 비행하려는 경향이 결국 승무원들의 피폭량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는 셈이다.


항로-태양권 전위(HCP, Heliocentric Potentials)값 간 상관 관계도(좌)와 실제 고도 차이에 기인한 우주방사선량 노출 정도를 나타낸 그래프. 자료=한국항공운

▲항로-태양권 전위(HCP, Heliocentric Potentials)값 간 상관 관계도(좌)와 실제 고도 차이에 기인한 우주방사선량 노출 정도를 나타낸 그래프. 자료=한국항공운항학회지 '항공승무원의 우주방사선 피폭 저감에 관한 연구'

태양의 역설…활동이 잠잠할 때 더 위험하다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태양 활동이 활발할 때 오히려 지구에 도달하는 우주방사선은 줄어든다. 이는 '태양의 역설'이라 불릴 만한 현상으로 승무원 피폭 관리에 있어 매우 중요한 변수다.


태양은 약 11년 주기로 흑점 활동이 활발해지는 극대기와 잠잠해지는 극소기를 반복한다. 태양 활동이 극대기에 이르면 강력한 '태양풍'이 발생하는데, 이 태양풍이 마치 방패처럼 태양계 외부에서 날아오는 은하 우주방사선(GCR)을 밀어내 지구에 도달하는 양을 줄여준다. 반대로 태양 활동이 극소기에 접어들면 이 방패가 약해져 더 많은 은하 우주방사선이 지구 대기권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연구진은 태양 활동의 지표인 '태양권 전위(HCP:Heliocentric Potentials)' 값과 노선별 피폭선량을 비교해 이 역설적인 관계를 명확히 입증했다. HCP 값은 태양 활동이 활발할수록 높아진다.


태양 활동이 극대기였던 2014년에 비해 극소기로 향하던 2018년에는 HCP 값이 크게 낮아졌고 이에 반비례해 고위도 노선인 뉴욕과 런던의 피폭선량은 뚜렷하게 증가했다. 반면에 저위도 노선인 시드니와 방콕은 태양 활동주기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는 태양 활동주기에 따른 피폭량 변화가 주로 극지방 항로에서 발생하는 문제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이러한 분석은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우주방사선 피폭은 예측 불가능한 재해가 아니라 11년 주기로 변동하는 '예측 가능한 위험'이라는 것이다.


항공사는 태양 활동주기를 고려해 극소기에 접어드는 시기에는 고위도 노선 운항에 대한 보다 강화된 안전 조치를 적용하는 등 동적인 위험 관리가 가능하다. 원자력안전위원회는 항공승무원 안전관리 차원에서 우주방사선량을 실시해 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러한 예측 가능성이 승무원 피폭 저감을 위한 실질적인 운항정책 변화로 이어졌는지는 의문이라는 지적이다.


한편, 2022년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러시아 영공 폐쇄는 의도치 않은 '거대한 실험'이 됐다. 대한항공을 포함한 많은 항공사들은 기존에 북극항로를 통과하던 미주 동부노선을 알래스카와 태평양을 경유하는 남쪽항로로 우회해야만 했다.


이 때문에 비행시간이 편도 기준 1시간에서 1시간 40분가량 늘어나고 유류비가 증가하는 등 막대한 경제적 비용이 발생했다. 이는 역설적으로 북극항로 회피라는 피폭 저감 방안이 가져올 경제적 부담을 현실세계에서 수치로 드러낸 것이다. 러-우크라 전쟁이라는 지정학적 충격은 항공승무원 안전(피폭 저감)과 항공사 비용(유류비 증가) 사이의 균형점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 지에 대한 더 깊은 논의를 촉발하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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