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Arm), 반도체의 그림자 거인 [곽인찬의 뉴스가 궁금해?]](http://www.ekn.kr/mnt/thum/202309/2023091901001139000054742.jpg)
반도체의 ‘그림자 거인’ 암(Arm)이 미국 나스닥 시장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9월14일(현지시간) 상장하자마자 시가총액이 650억달러(약 86조원)을 넘어섰다. 이후 주가가 조금 내렸지만 19일 시가총액은 여전히 600억달러에 육박한다. 암이 어떤 회사이길래 증시가 흥분한 걸까? 암을 어떻게 일본 소프트뱅크가 소유하게 됐을까? 암과 한국 반도체 기업은 어떤 관계인가? 우리나라엔 암과 같은 ‘슈퍼을’이 왜 없을까?◇ 모바일 혁명의 숨은 조력자암의 설립은 1990년으로 거슬러 오른다. 영국 에이콘 컴퓨터와 미국 애플, VLSI테크놀로지 3사가 합작했다. Arm은 Advanced RISC Machines의 약자다. 본사는 영국 케임브리지 교외에 있다. 명문 케임브리지대에서 차로 10분 거리다. 1997년 휴대폰 최강자로 군림하던 핀란드 노키아가 암이 설계한 칩을 선택했다. 암은 단번에 적자를 벗고 성장 궤도에 올랐다. 2007년 애플 창업주 스티브 잡스는 아이폰을 세상에 내놨다. 이때 잡스는 아이폰에 들어갈 칩 공급을 인텔에 타진했다. PC와 서버용 칩 시장을 지배하고 있던 인텔은 잡스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자 잡스는 암을 대안으로 골랐다. 아이폰은 모바일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덩달아 아이폰에 들어갈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암의 가치도 다락같이 뛰었다. 현재 암은 휴대폰 AP 설계 시장의 90%를 장악하고 있다. 암은 반도체 회로설계(디자인)를 전문으로 한다. 칩을 만드는 회사에 설계도를 넘겨주는 대가로 로열티를 받는다. 별도 생산시설이 없다는 점에서 이른바 팹리스(Fabless)로 분류된다. 설계 능력이 워낙 출중한 덕에 모바일 AP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다. 예컨대 애플, 엔비디아, 삼성전자, TSMC 등 고객사들은 모바일 칩을 만들 때 암의 기본 설계도를 사용한다 ◇ 10년 앞을 내다본 손정의의 안목일본 스기모토 다카시가 쓴 ‘손정의 300년 왕국의 야망’에 따르면 소프트뱅크를 창업한 손정의는 2006년께부터 암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스기모토는 니혼게이자이신문 기자다. "앞으로 잡스가 만들게 될 모바일 기계는 세계를 바꾸어 놓을 정도로 임팩트가 있을 것이다. 아미 모바일 인터넷 시대의 막을 열게 되겠지. 그렇다면…암이 모바일 인터넷 시대의 플랫폼을 장악할 것이다."암에 대한 손정의의 짝사랑은 2016년 열매를 맺었다. 이 해 손정의는 휴가 중이던 스튜어트 챔버스 암 회장을 터키 휴양지에서 만나 "암을 매수하고 싶다. 단순한 출자가 아니라 100% 매수"라고 제안했다. 결국 손정의는 234억파운드(약 290억달러, 39조원)을 주고 암을 손에 넣었다. 동시에 손정의는 런던증시에서 암 상장을 폐지했다. ◇ 엔비디아가 눈독4년 뒤 미국 엔비디아가 암 인수를 추진했다. 엔비디아는 그래픽처리장치(GPU) 칩 분야의 선두주자다. 엔비디아는 인수금액으로 400억달러를 제시했다. 그러자 영국 정부가 안보를 이유로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영국과 유럽연합, 미국의 공정거래 당국은 엔비디아와 암의 결합이 반도체 시장 경쟁을 제한할 우려가 크다고 판단했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퀄컴 등 대형 IT 기업들도 양사 결합에 반대했다. 결국 암을 인수하려던 엔비디아의 계획은 2022년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SK하이닉스와 퀄컴 등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암 인수를 추진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나 소문에 그쳤다. 지난 9월14일 암은 나스닥 상장에 성공했다. 사실 암이 나스닥 시장을 찾은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지난 1998년 암이 런던증시에 상장할 때 나스닥엔 주식예탁증서(DR)를 상장했다. 다만 본무대를 아예 뉴욕 나스닥으로 옮겼다는 점에서 이번 IPO(기업공개)는 특기할 만하다. ◇ 원천기술의 힘반도체는 기술력이 뛰어나면 자연 독점을 누린다. 네덜란드 ASML이 반도체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독점 공급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미국과 일본도 특정 반도체 설계, 소프트웨어, 장비, 소재 분야에서 배타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선진국들이 가진 원천기술의 힘이다. 한국은 반도체 제조 강국이지만 원천기술만 보면 빈 구석이 많다. 서울대 공대 교수들은 공저 ‘축적의 시간’에서 "우리 산업이 처한 경쟁력의 위기는 고부가가치 핵심기술, 창의적 개념설계 역량의 부재에 있다"며 "이런 역량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경험과 지식을 축적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확보된다"고 말했다.원천기술은 인내심을 먹고 자란다. 당장 성과가 나오지 않더라고 참고 기다리는 인내가 필수다. 대한상의, 산업연구원 등 민·학·연은 17일 ‘산업 대전환 제언’을 정부에 전달했다. 그중 "정부가 투자지주회사를 설립해 첨단산업분야 인내자본을 형성해줘야 한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암과 같은 초기술력을 가진 기업은 하루아침에 나오지 않는다. 한국판 암이 나오려면 정부가 돈을 지원하되 성과가 미진해도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경제칼럼니스트>반도체 설계 기업인 암(Arm)의 르네 하스 최고경영자(CEO) 등 관계자들이 9월14일 뉴욕 나스닥 시장에서 개장 벨을 울리고 있다. 암은 이날 나스닥에 상장됐다. 사진=로이터/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