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9월 23일(토)
암(Arm), 반도체의 그림자 거인 [곽인찬의 뉴스가 궁금해?]

반도체의 ‘그림자 거인’ 암(Arm)이 미국 나스닥 시장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9월14일(현지시간) 상장하자마자 시가총액이 650억달러(약 86조원)을 넘어섰다. 이후 주가가 조금 내렸지만 19일 시가총액은 여전히 600억달러에 육박한다. 암이 어떤 회사이길래 증시가 흥분한 걸까? 암을 어떻게 일본 소프트뱅크가 소유하게 됐을까? 암과 한국 반도체 기업은 어떤 관계인가? 우리나라엔 암과 같은 ‘슈퍼을’이 왜 없을까?◇ 모바일 혁명의 숨은 조력자암의 설립은 1990년으로 거슬러 오른다. 영국 에이콘 컴퓨터와 미국 애플, VLSI테크놀로지 3사가 합작했다. Arm은 Advanced RISC Machines의 약자다. 본사는 영국 케임브리지 교외에 있다. 명문 케임브리지대에서 차로 10분 거리다. 1997년 휴대폰 최강자로 군림하던 핀란드 노키아가 암이 설계한 칩을 선택했다. 암은 단번에 적자를 벗고 성장 궤도에 올랐다. 2007년 애플 창업주 스티브 잡스는 아이폰을 세상에 내놨다. 이때 잡스는 아이폰에 들어갈 칩 공급을 인텔에 타진했다. PC와 서버용 칩 시장을 지배하고 있던 인텔은 잡스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자 잡스는 암을 대안으로 골랐다. 아이폰은 모바일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덩달아 아이폰에 들어갈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암의 가치도 다락같이 뛰었다. 현재 암은 휴대폰 AP 설계 시장의 90%를 장악하고 있다. 암은 반도체 회로설계(디자인)를 전문으로 한다. 칩을 만드는 회사에 설계도를 넘겨주는 대가로 로열티를 받는다. 별도 생산시설이 없다는 점에서 이른바 팹리스(Fabless)로 분류된다. 설계 능력이 워낙 출중한 덕에 모바일 AP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다. 예컨대 애플, 엔비디아, 삼성전자, TSMC 등 고객사들은 모바일 칩을 만들 때 암의 기본 설계도를 사용한다 ◇ 10년 앞을 내다본 손정의의 안목일본 스기모토 다카시가 쓴 ‘손정의 300년 왕국의 야망’에 따르면 소프트뱅크를 창업한 손정의는 2006년께부터 암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스기모토는 니혼게이자이신문 기자다. "앞으로 잡스가 만들게 될 모바일 기계는 세계를 바꾸어 놓을 정도로 임팩트가 있을 것이다. 아미 모바일 인터넷 시대의 막을 열게 되겠지. 그렇다면…암이 모바일 인터넷 시대의 플랫폼을 장악할 것이다."암에 대한 손정의의 짝사랑은 2016년 열매를 맺었다. 이 해 손정의는 휴가 중이던 스튜어트 챔버스 암 회장을 터키 휴양지에서 만나 "암을 매수하고 싶다. 단순한 출자가 아니라 100% 매수"라고 제안했다. 결국 손정의는 234억파운드(약 290억달러, 39조원)을 주고 암을 손에 넣었다. 동시에 손정의는 런던증시에서 암 상장을 폐지했다. ◇ 엔비디아가 눈독4년 뒤 미국 엔비디아가 암 인수를 추진했다. 엔비디아는 그래픽처리장치(GPU) 칩 분야의 선두주자다. 엔비디아는 인수금액으로 400억달러를 제시했다. 그러자 영국 정부가 안보를 이유로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영국과 유럽연합, 미국의 공정거래 당국은 엔비디아와 암의 결합이 반도체 시장 경쟁을 제한할 우려가 크다고 판단했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퀄컴 등 대형 IT 기업들도 양사 결합에 반대했다. 결국 암을 인수하려던 엔비디아의 계획은 2022년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SK하이닉스와 퀄컴 등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암 인수를 추진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나 소문에 그쳤다. 지난 9월14일 암은 나스닥 상장에 성공했다. 사실 암이 나스닥 시장을 찾은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지난 1998년 암이 런던증시에 상장할 때 나스닥엔 주식예탁증서(DR)를 상장했다. 다만 본무대를 아예 뉴욕 나스닥으로 옮겼다는 점에서 이번 IPO(기업공개)는 특기할 만하다. ◇ 원천기술의 힘반도체는 기술력이 뛰어나면 자연 독점을 누린다. 네덜란드 ASML이 반도체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독점 공급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미국과 일본도 특정 반도체 설계, 소프트웨어, 장비, 소재 분야에서 배타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선진국들이 가진 원천기술의 힘이다. 한국은 반도체 제조 강국이지만 원천기술만 보면 빈 구석이 많다. 서울대 공대 교수들은 공저 ‘축적의 시간’에서 "우리 산업이 처한 경쟁력의 위기는 고부가가치 핵심기술, 창의적 개념설계 역량의 부재에 있다"며 "이런 역량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경험과 지식을 축적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확보된다"고 말했다.원천기술은 인내심을 먹고 자란다. 당장 성과가 나오지 않더라고 참고 기다리는 인내가 필수다. 대한상의, 산업연구원 등 민·학·연은 17일 ‘산업 대전환 제언’을 정부에 전달했다. 그중 "정부가 투자지주회사를 설립해 첨단산업분야 인내자본을 형성해줘야 한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암과 같은 초기술력을 가진 기업은 하루아침에 나오지 않는다. 한국판 암이 나오려면 정부가 돈을 지원하되 성과가 미진해도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경제칼럼니스트>반도체 설계 기업인 암(Arm)의 르네 하스 최고경영자(CEO) 등 관계자들이 9월14일 뉴욕 나스닥 시장에서 개장 벨을 울리고 있다. 암은 이날 나스닥에 상장됐다. 사진=로이터/연합뉴스

[곽인찬 칼럼] 아무도 신경 안 쓰는 저성장의 위기

정책 분석가인 미셸 부커는 지난 2008년 미국에서 터진 금융위기를 회색코뿔소에 빗댔다(‘회색코뿔소가 온다’). 누구라도 코뿔소를 보면 덜컥 겁부터 난다. 자리에 주저앉는 이도 있고, 어떤 이는 "저건 코뿔소가 아냐"라고 애써 부인한다. 그래봤자 피할 도리는 없다. 부커는 코뿔소를 보고도 못 본 척한 결과가 전대미문의 금융위기였다고 주장한다. 지금 한국 경제에서 회색코뿔소는 뭘까. 한두 마리가 아니지만 가장 덩치가 큰 코뿔소는 바로 저성장이다. 정부는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1.6%에서 1.4%로 낮췄다. 한국은행은 1.4%를 유지하면서도 중국 부동산 부진이 이어질 경우 1.2%까지 떨어질 걸로 내다봤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당초 1.5% 전망치를 1.4%로 낮췄다. 씨티, JP모건 등 대형 투자은행들은 내년에도 성장률이 1%대에 머물 것으로 본다. 한국 경제는 2%를 밑도는 저성장에 익숙하지 않다. 오일쇼크, 외환위기, 금융위기, 코로나위기 등 이례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지난 반세기 우리 경제는 늘 위만 보고 달렸다. 그 덕에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다. 하지만 저성장은 스멀스멀 다가와 우리 옆에 섰다. 돌이켜 보면 경고음은 오래전부터 울렸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해리 덴트는 "한국의 호황과 불황, 부동산, 산업화 주기는 일본을 22년 뒤처져 따라가는 경향이 있고, 실제로 그래왔다"면서 "한국은 2018년 이후 인구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마지막 선진국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2018 인구절벽이 온다’). 지난해 합계출산율은 0.78명으로 역대 최저를 경신했다. 생산가능인구(15~64세)는 2017년부터 감소세로 돌아섰다. 아이 울음소리가 사라진 마을이 번창할 리가 없다. 개인이건 나라건 온통 빚더미에 올랐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00%를 넘어섰다. 주요 20개국(G20) 가운데 호주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 미국(74%), 일본(68%)을 앞질렀다. 국가채무는 내년 1196조원으로, GDP 대비 51%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국가채무 비율 자체는 아직 양호한 편이지만 증가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 빚에 찌든 경제가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다. 요즘 일본 경제를 보면 부럽다. 올 2분기(4~6월) 실질 GDP 성장률은 전분기 대비 1.2% 증가했다. 연율로 환산하면 무려 4.8%에 이른다. 일본은 4%대 성장을 향해 나아가는데 거꾸로 한국은 1%대 저성장의 늪으로 달려가는 꼴이다. 올해 성장률 역전이 일어나면 25년만에 처음이다. 일본 경제를 두고 잃어버린 20년이니 30년이니 하던 말은 옛날 이야기가 됐다. 대신 한국이 바통을 이어받을 판이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구조개혁을 게을리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작심 발언을 했다. 그는 "우리나라는 저출산과 고령화가 워낙 심하기 때문에 이미 장기 저성장 구조에 와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해법으로 노동, 연금, 교육을 포함한 구조개혁을 주문했다. 문제는 ‘구조’를 바꾸는 개혁이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이 총재는 "이해당사자 간 사회적 타협이 어려워서 진척이 안 된다"고 탄식했다. 구체적으로 "저출산, 노인 문제를 생각하면 이민, 해외노동자 활용, 임금체계에 대한 논의도 필요한데 진척이 없다"는 것이다. 구조개혁은 뼈를 깎는 작업이다. 그러나 기득권 카르텔은 철옹성처럼 단단하다. 독일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재임 1998~2005년)는 하르츠개혁으로 노동시스템을 바꾸는 데 성공했지만 정권을 잃었다. 만약 구조개혁을 접어둔 채 돈 풀고 금리 내리는 재정·통화 정책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고 하면? 그것이야말로 "나라가 망가지는 지름길"이라고 이 총재는 말했다. 과연 우리는 구조개혁을 성사시킬 능력이 있는가? 대답은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 서로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지금 여야는 상대를 헐뜯느라 여념이 없다. 의회를 지배하는 야당의 대표는 단식 농성 중이고, 대통령 스케줄엔 야당 대표를 만날 일정이 없다. 내년 4·10 총선을 앞두고 정쟁은 더 격화될 게 틀림없다. 타협의 정치는 장기 실종 상태다. 성장률이 1%의 늪에 빠졌지만 아무도 이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듯하다. 경제가 성숙하면 성장률은 떨어지는 게 당연하다고 보는 걸까? 그러다 큰코다친다. 남미 여러나라에서 보듯 선진국 문턱에서 미끄러진 사례가 한 둘이 아니다. 장기 저성장은 현실이다. 위기다. 그러나 위기가 닥쳤는데도 위기인 줄 모른다. 이게 더 큰 위기다. 코뿔소한테 엉덩이를 들이받힌 뒤에야 겨우 정신을 차리려나.곽인찬 경제칼럼니스트

산은 이전 서둘 일 아니다 [곽인찬의 뉴스가 궁금해?]

서울에 본점을 둔 KDB산업은행을 부산으로 옮기려는 계획이 착착 진행 중이다. 동시에 반발도 커졌다. 윤석열 대통령은 산은을 부산으로 이전하겠다고 수차례 밝혔다. 대선 공약이고, 인수위가 정리한 지역공약에도 들어 있다. 내년 4·10 총선을 앞두고 여당인 국민의힘은 부산 이전에 힘을 쏟고 있다. 당사자인 산은은 물론 주무부서인 금융위원회, 균형발전을 총괄하는 국토교통부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반면 산은 노조는 이전에 결사 반대다. 국민의힘 소속이지만 오세훈 서울시장도 반대다. 이동걸 전 산은 회장도 부정적이다. 결정적으로 국회 다수당인 더불어민주당이 미온적이다. 부산으로 옮기려면 산은법부터 바꿔야 한다. 민주당이 제동을 걸면 도리가 없다. 1954년에 설립된 산은은 지난 70년 가까이 국가 산업발전의 주춧돌 역할을 했다. 부산 이전을 둘러싼 찬반 논란을 살펴보자.◇ 윤 대통령 수차례 약속 윤 대통령은 부산 이전을 여러번 약속했다. 작년 1월 당시 윤 후보는 "외자를 도입해 재벌 그룹이 클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했던 산업은행의 기능도 많이 변화했다"며 산은을 서울 여의도에서 부산으로 옮기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3월 당시 윤 당선인은 인수위 사무실로 출근하는 길에 "제가 부산으로 본점을 이전시킨다고 약속을 했으니까 그대로 (하겠다)"고 말했다. 작년 5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부산 지역 공약을 정리하면서 산은 이전을 못박았다. 이어 작년 8월 경남 창원 부산신항 한진터미널에서 열린 제7차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윤 대통령은 "산업은행은 부울경(부산·울산·경남) 지역으로 이전해 해양도시화, 물류도시화, 첨단 과학산업 도시화로의 길에 꼭 필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작년 9월 강석훈 산은 회장은 취임 100일 기자간담회에서 "국가의 최고 책임자들이 정한 것을 제가 뒤집을 수 없다는 점을 (직원들이)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고 말했다.◇ 푸시하는 정부·여당이전 프로그램은 올들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지난 5월 국토교통부는 국가균형발전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산은을 부산 이전 공공기관으로 결정했다고 고시했다. 이로써 산은은 수도권에 잔류하는 공공기관에서 빠졌다.7월엔 산은이 모든 기능과 조직을 부산으로 이전하는 계획을 금융위원회에 보고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앞서 산은은 3월부터 이전 관련 외부 컨설팅을 진행했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9월 7일 "사실 산업은행 부산 이전은 올해 초 윤 대통령의 강력한 지시가 있었다. 대통령이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고, 용역결과보고서 작성 과정에서도 부산 이전을 무조건 A안으로 추진하라는 지시도 했다"고 소개했다. 부산에서 열린 ‘부산 금융경쟁력 제고 대책 마련을 위한 현장 간담회’에서다. 이어 김 대표는 "모든 준비가 갖춰졌고 법 하나 고치면 되는데 그걸 안 고쳐준다. 참 기막힌 일"이라고 민주당을 비판했다. ‘법 하나’는 산은법 4조①항을 말한다. "한국산업은행은 본점을 서울특별시에 둔다"는 내용이다. ◇ 반대 목소리도 커졌다산은 노조는 지난 12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이 산업은행 부산 이전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외부 컨설팅 용역까지 조작했다"며 "부산 이전 컨설팅을 전면 백지화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노조는 "사측이 지난 2∼7월 삼일PwC에 의뢰해 진행한 컨설팅 용역 과정에서 대통령의 외압이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됐다"고 주장했다.지난 7월 노조는 한국재무학회에 자체 의뢰한 컨설팅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이에 따르면 산은이 부산으로 이전할 경우 산은 기관으로는 7조원, 국가 경제적으론 15조원의 손실이 예상된다. 노조는 산은 고객과 협업기관의 83.8%가 부산 이전에 반대한다는 설문조사 결과도 공개했다.민주당의 입장은 지난 3월 이수진 원내 대변인이 내놓은 서면 브리핑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원대대변인은 "멀쩡한 청와대를 두고 대통령실 이전을 밀어붙이던 것과 뭐가 다른가"라고 비판했다. 이어 "산은 본점을 이전해야 한다면 그 권한은 국회에 있다"며 "대통령 한마디에 국회 동의도 없이 막무가내로 이전 추진하겠다니 깡패가 따로 없다"고 주장했다.오세훈 서울시장의 견해도 주목할 만하다. 오 시장은 작년 4월 취임 1주년 기자간담회에서 "전세계 어느 나라가 한 나라에 두 개의 금융도시 정책을 구사하는 나라가 있느냐"고 반문하면서 "몇몇 국책은행을 지방으로 내려보내는 것은 국가적인 견지에서 자해적인 결과로 귀결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어 오 시장은 "국토 균형발전을 추구해나가는 과정에서 함께 손해 보는 ‘제로섬 게임’이 되면 안 된다"고 말했다.문재인 정부에서 임명한 이동걸 전 산은 회장은 지난해 5월 퇴임 기자간담회에서 강한 어조로 반대의 뜻을 밝혔다. 그는 "산은은 국가 정책 차원에서 굉장히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데, 그 기능이 저해되면 큰 일"이라며 "논리적 토론 없이 주장만 되풀이되고 껍데기만 얘기되는 상황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에 두 개의 금융중심지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오세훈 서울시장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고 말했다.◇ 속내 복잡한 민주당외형상 민주당은 이전에 제동을 거는 분위기다. 그러나 내부 사정은 좀 복잡하다. 부·울·경 출신의원들은 총선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지난 5일 박재호 의원 등 민주당 의원 12명은 산은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산은법 1조(목적)에 지역균형개발을 추가하고, 4조(본점)의 ‘서울특별시’를 ‘부산 금융중심지’로 바꾸는 게 핵심이다.내년 봄 총선이 다가올수록 민주당 안에서도 산은 이전에 찬성하는 목소리가 더욱 커질 것임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누구 말이 타당한가산은 본사 이전엔 두가지 논리가 있다. 먼저 국토 균형발전이다. 지난 2003년 노무현 정부는 공공기관 이전 프로젝트에 시동을 걸었다. 이에 따라 한국거래소(부산), 국민연금공단(전주), 한국전력(나주), 한국관광공사(원주) 등 많은 공공기관이 서울을 떠나 전국 각지에 둥지를 틀었다. 올해는 프로젝트가 시작된 지 20년이 되는 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권, 특히 서울 집중 현상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수도권 인구가 시나브로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어선 게 그 증거다. 공공기관 이전으로 균형발전을 도모한다는 정책은 번짓수를 잘못 짚은 듯하다. ‘부산 금융중심지 육성’은 이전에 찬성하는 또다른 논리다. 2009년 정부는 서울 여의도와 함께 부산을 금융중심지로 지정했다. 이에 따라 문현동에 부산국제금융센터(BIFC)가 들어섰고 거래소, 예탁결제원, 자산관리공사(캠코), 주택도시보증공사(HUG) 등이 연달아 본사를 옮겼다. 부산을 파생상품, 선박금융 등에 특화된 금융중심지로 키운다는 전략도 마련됐다. 그러나 부산에 거점을 둔 외국계 금융사가 사실상 전무한 데서 보듯 부산 금융중심지 사업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 ‘정책금융공사’의 교훈산은 이전의 최대 변수는 내년 4·10 총선이다. 이미 국민의힘은 이전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중이다. 민주당도 부산 민심을 고려하면 완강하게 반대할 수만은 없는 처지다.지난 2021년 초 여야는 부산시장 보궐선거(4·7)를 앞두고 앞다퉈 부산 가덕도 신공항 건설을 약속했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경쟁하듯 가덕도를 찾았다. 산은 이전을 두고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여야 모두 6년만에 간판을 내린 한국정책금융공사 사례를 유념할 필요가 있다. 정책금융공사는 이명박 정부 시절이던 2009년 가을에 출범했다. 산은에서 정책금융만을 떼어냈다. 정책금융 부담을 던 산은을 국가대표급 투자은행(IB)으로 육성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2015년 정책금융공사를 산은에 재흡수시켰다. 보수 정부가 편 정책을 다른 보수 정부가 뒤집은 셈이다.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작년 4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정책금융공사 혼선에 대해 "결론적으로 국세가 많이 낭비됐고, 정책 실패라는 것에 대해서는 부인할 여력이 없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당시 금융위 부위원장을 맡았다. 이 총재는 "개인적으로 배운 게 있다면 산은 민영화와 같이 장기간에 걸친 구조 개혁은 여러 정부에 걸쳐서 해야 한다"면서 "당시에는 맞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추진했는데 큰 피해를 본 사례가 있다"고 말했다. ‘여러 정부에 걸쳐서 해야 한다’라는 말에 방점을 찍고 싶다. 기능 분리 또는 본점 이전은 산은의 본질을 건드린다. 그런 만큼 신중하게 추진할 필요가 있다. 성급하게 다루면 정권따라 이러저리 흔들린 정책금융공사 사례가 되풀이 될 수 있다. 산은 강석훈 회장은 지난 4월 부산상공회의소가 주최한 부산경제포럼에서 "갈등 속에서 이전이 아니라 축복받는 이전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축복 받는 이전’이 되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공청회를 열 번, 스무 번 하더라도 합의를 도출하는 노력을 펼쳐야 한다. 그래야 정책금융공사 실책을 반복하지 않는다. 최악은 총선을 앞두고 산은이 정략적 딜의 희생양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런 일만은 없길 바란다. <경제칼럼니스트>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가 지난 6월 21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산업은행 부산이전 당정 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화웨이와 미국, 또 불거진 악연 [곽인찬의 뉴스가 궁금해?]

중국이 화웨이 ‘쾌거’로 들떴다. 중국 최대 IT기업 화웨이는 8월 말 7나노미터(㎚·10억분의 1m) 칩이 내장된 신형 휴대폰 ‘메이트60 프로’를 출시했다. 화웨이의 휴대폰 업그레이드는 3년만이다. 새 칩은 화웨이의 반도체 설계 자회사인 하이실리콘이 설계하고, 중국 파운드리(위탁생산) 기업인 SMIC가 생산을 맡았다. 이를 두고 중국이 미국의 뺨을 때린 것이란 평가가 나왔다. 미국의 집요한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독자적인 반도체 혁신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의 견해를 대변하는 환구시보는 "지난 3년간의 침묵 이후 화웨이가 마침내 최신 스마트폰을 출시했다"며 "이는 미국의 극단적인 억압이 실패했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화웨이는 미국과 악연이 깊다. 반미 애국주의의 선봉에 선 기업이 바로 화웨이다. 중국은 화웨이를 앞세워 과연 반도체 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 ◇ 화웨이의 와신상담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시절부터 세계 최대 통신기업 화웨이를 정조준했다. 2018년 12월 캐나다 정부는 멍완저우 화웨이 부회장을 밴쿠버 공항에서 체포했다. 화웨이가 이란에 대한 제재를 위반했다는 이유에서다. 물론 그 뒤엔 미국이 있었다. 멍완저우는 화웨이 창업자인 런정페이의 딸이다. 멍 부회장은 2년 9개월 간 가택연금 상태로 재판을 받다가 2021년 9월 풀려났다. 중국은 온갖 고초를 겪은 ‘영웅’ 멍 부회장을 전세기로 모셔왔다. 관영 CCTV는 귀국 장면을 생중계했다. 런정페이는 틈만 나면 ‘상감령’을 언급한다. 상감령(上甘嶺)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가을 미군과 중국군이 오성산 일대 저격능선과 삼각고지에서 벌인 전투를 말한다. 중국은 이를 상감령 전투라 부른다. 상감령은 대미 항전 승리의 상징으로 통한다. 오성산은 현재 철원 맞은 편 북한 땅에 속해 있다. 2019년 5월 관영 CCTV와 인터뷰에서 런 회장은 "지금은 (미국에) 얻어맞아 밀려 내려갈 수 있지만 다시 일어나 고지에 올라 결국 정상에 설 것"이라고 말했다. 미·중 무역전쟁에 대해선 "단기 돌격전이 아닌 장기 지구전을 준비하고 있다"면서 "우리는 싸울수록 더 강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7월 중국 언론 매체들은 "우리는 달러가 아니라 인재를 비축하고 있다"는 런 회장의 말을 일제히 보도했다. 런 회장은 인민해방군 통신 장교 출신이다. 미국은 늘 중국 공산당이 화웨이 뒤에 있다고 의심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아예 화웨이를 ‘스파이웨이’라고 불렀다. 미국은 화웨이 통신 장비의 사용을 금지했다. 나아가 한국 삼성전자와 대만 TSMC 등 우방국 기업들이 화웨이를 비롯한 중국 기업들에 첨단 반도체 칩, 장비, 설계, 소프트웨어 등을 팔지 못하도록 길을 막았다. 이런 난관을 뚫고 화웨이가 7나노미터 칩을 탑재한 새 휴대폰 모델을 내놨으니 중국이 흥분할 만도 하다. ◇ 중신궈지(SMIC)는 어떤 회사 ‘메이트60 프로’ 휴대폰에 탑재된 7나노미터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는 SMIC가 만든 ‘기린 9000s’로 확인됐다. 지난 2000년 상하이에 설립된 SMIC는 중국 최대의 파운드리 업체다. 파운드리는 다른 데서 반도체 설계를 넘겨받아 생산을 전문으로 하는 기업을 말한다. 대만 TSMC가 대표적인 파운드리 업체다. 크리스 밀러 터프츠대 교수가 쓴 ‘칩 워’에 따르면 SMIC는 리처드 창이란 인물이 "골드만삭스, 모토로라, 도시바 같은 국제 투자자들로부터 끌어온 15억달러를 밑천 삼아 창업했다." 리처드 창은 중국 난징 출신이지만 대만에서 자랐고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인물로, 미국 반도체 기업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에서 경력을 쌓았다. 하지만 "창은 (SMIC에서) 쫓겨났고 민간 투자자들 역시 중국 정부에 지분을 내놓게 되었다. 2015년에는 중국 공업정보화부 전직 관료가 SMIC의 새로운 회장으로 지명되면서 SMIC와 중국 정부의 관계를 분명히 했다." 요컨대 ‘메이트60 프로’는 화웨이와 SMIC가 대미 결사항전 각오로 개발한 합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 반도체 굴기에 성공할까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5월 대만에서 열린 IT 박람회에서 "중국의 반도체 자립 능력이 충분하다"며 "중국을 얕봐선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은 이번 기회를 활용해 자국 현지 기업을 육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만계 미국인인 황 CEO는 중국을 세계 반도체 공급망에서 제외하려는 조 바이든 행정부의 전략에 부정적이다. "중국과의 칩 전쟁은 미국 기술 기업에 큰 피해를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픽처리장치(GPU) 칩을 제조하는 엔비디아는 AI의 시대로 총아로 떠오른 기업이다. 로이터통신은 5일 중국이 반도체 산업 활성화를 위해 3000억위안(약 55조원) 규모의 국가 지원 투자 기금인 ‘중국집적회로산업투자기금’을 조성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신기술 개발은 연구개발(R&D) 자금 규모에 비례하는 경향을 보인다. 앞서 중국은 지난 2015년에 ‘제조 2025 전략’을 발표했다. 반도체 굴기가 핵심 과제 중 하나다. 반도체 자급률을 2025년까지 70%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게 목표다. 지금으로선 목표 달성이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긴 시야로 보면 중국이 그 방향으로 한발씩 나아가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 반도체 굴기 쉽지 않을 것 반도체는 설계, 장비, 소재, 생산 등 단계별 공급망이 서로 얽힌 대표적인 산업으로 꼽힌다. 어느 한 나라 또는 한 기업이 모든 걸 다 잘할 수는 없다. 대만 TSMC의 창업자인 모리스 창 전 회장은 지난 8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중국이 미국과 반도체 경쟁에서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는 미국이 주도하는 한·일·대만 반도체 동맹을 언급하며 "우리가 (반도체 공급망의) 급소(choke point)를 잘 통제하고 있다. 이 급소를 쥐고 있는 한 중국이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고 말했다. 밀러 교수도 비슷한 견해를 보인다. "여러 나라에 걸친 공급망을 지닌 분야에서 기술 독립은 언제나 허황된 꿈일 수밖에 없다. 기계장치부터 소프트웨어까지 공급망의 다양한 측면에서 경쟁력 있는 기업을 보유하지 못한 중국의 기술 독립은 더욱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칩 워’)는 것이다. 밀러 교수는 대중 제재에 동참한 네덜란드 ASML 사례를 든다. ASML는 첨단 칩 제조에 필수적인 극자외선(EUV) 장비를 독점 공급한다. 이 장비는 웨이퍼에 반도체 회로를 새길 때 쓴다. "극자외선 시스템의 구성 요소 중 하나일 뿐인 레이저만 해도 완벽하게 구현된 45만7329개의 부품을 조립해야 만들어진다. 설령 그들(중국 스파이)이 ASML의 내부 전산망에 침입해 설계도를 다운받았다고 한들, 이토록 복잡한 기계는 파일 하나 내려받듯이 손쉽게 복사해서 붙여넣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이 틈날 때마다 ASML 경영진을 만나 극자외선 장비 공급에 공을 들이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 ‘화웨이 쇼크’는 아니다 중국의 화웨이 ‘쾌거’는 냉정히 보면 그리 흥분할 일도 아니다. 파운드리 1위 TSMC와 2위 삼성전자는 이미 3나노미터 칩 시장을 두고 선점 경쟁을 벌이고 있다. 화웨이는 7나노미터 칩이다. 아직은 최첨단 기술력과 간격이 있다. 삼성전자는 2018년에 7나노미터 칩을 양산했다. 이번에 화웨이는 다시 미국을 자극했다. 당장 대중 강경파인 마이크 갤러거 하원의원(미중전략경쟁특위 위원장)은 성명을 통해 "상무부는 화웨이와 SMIC에 대한 모든 기술 수출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대중 반도체 제재에 물이 새는 곳은 없는지 재차 면밀히 살필 것으로 보인다. 기업에도 비상이 걸렸다. SK하이닉스는 화웨이 휴대폰 신제품에 자사 메모리 반도체가 들어갔다는 소식에 화들짝 놀랐다. SK하이닉스는 "화웨이에 대한 미국의 제재가 도입된 이후 화웨이와 더 이상 거래하지 않고 있다"고 서둘러 해명했다. 이어 "곧바로 미국 상무부 산업안보국에 신고했고, 경위를 파악하기 위한 조사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향후 SK하이닉스를 비롯해 반도체 기업들은 대중 거래에 한층 더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이는 적어도 단기적으론 중국의 반도체 굴기 전략에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곽인찬의 뉴스가 궁금해 HUAWEI TECH-SMARTPHONES/SUPPLIERS 중국 IT기업 화웨이는 8월말 7나노미터 칩을 탑재한 신형 휴대폰 ‘메이트60 프로’로 출시했다. 사진=로이터/연합뉴스

윤활유 기업의 변신은 무죄 [곽인찬의 뉴스가 궁금해?]

전기차가 대세가 되면 윤활유를 만드는 회사들은 뭘 먹고 살지? 걱정할 거 없다. 물론 전기차는 엔진오일이 필요 없다. 대신 모터와 배터리의 열을 식히는 냉각유가 필요하다. 자동차 기어 등 기계 사이의 마찰을 줄이는 윤활유도 여전히 필요하다. 윤활유 지크(ZIC)를 만드는 SK엔무브는 며칠전 ‘지크 브랜드 데이’ 행사를 가졌다. 여기서 박상규 사장은 "전기차 시대를 맞아 윤활유 수요가 꺾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섣부른 판단"이라고 말했다. 박 사장은 전기차도 모터를 냉각하고 기어 마찰 저항을 줄이는 윤활유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SK엔무브는 전력 효율화 시장을 선점해 미래기업으로 도약한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내연기관 시대의 연비 효율화가 전기차 시대를 맞아 전력 효율화로 진화한 셈이다. 전력 효율화 시장은 오는 2040년 54조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추산된다. ◇ 각광받는 액침냉각 시장 전력 효율화 분야에서 요즘 핫 아이템은 액침냉각 시장이다. 액침(液浸)은 액체 곧 냉각유에 담근다는 뜻이다. 영어로는 Immersion Cooling이라고 한다. 데이터 센터를 예로 들어보자. 서버를 대량 가동하는 데이터 센터는 1년 365일 한겨울이다. 서버에서 나오는 열을 식히기 위해 에어컨을 줄기차게 가동하기 때문이다. 이를 공랭식이라 한다. 공기를 차갑게 해서 열을 식힌다는 뜻이다. 그런데 공랭식은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 에어컨 돌리는 비용이 만만찮다. 열을 식히는 효율도 썩 좋지 않다. 2010년대 중반 암호화폐(가상자산) 채굴이 세계적으로 유행했다. 비트코인 가격이 폭등할 때라 너도나도 채굴에 뛰어들었다. 전력 소모가 큰 고사양 대용량 컴퓨터가 불티나게 팔렸다. 채굴용 컴퓨터는 전기 먹는 하마가 됐고, 컴퓨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도 골칫거리였다. 이를 계기로 액침냉각 기술이 새삼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데이터 센터 서버를 전기가 통하지 않는 냉각유 통에 통째로 푹 담그는 식이다. 액침냉각은 공랭식에 비해 냉각 효능이 탁월하다. 데이터 센터의 경우 전력 효율을 30% 이상 개선할 수 있다는 통계도 있다. 최근 반도체 기업들은 칩 크기를 줄이는 경쟁 대신 패키징(포장) 기술 향상에 힘을 쏟는다. 칩을 층층이 쌓으면 성능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다. 이를 패키징 곧 후공정이라 부른다. 이를테면 10나노 칩이라도 쌓아서 연결하면 최첨단을 달리는 5나노칩도 당하지 못한다. 문제는 역시 발열이다. 냉각유는 전력을 보관하는 에너지 저장 시스템(ESS)에서도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 ESS는 잦은 화재가 걸림돌이다. 에너지를 저장한 배터리에 자주 불이 붙기 때문이다. SK엔무브는 데이터 센터, ESS, 전기차용 배터리 등의 열관리를 위한 액침냉각 시장이 2020년 1조원 미만에서 2040년 42조원 규모로 확대될 것으로 자체 추산한다. ◇인텔이 투자에 앞장 글로벌 IT 업체 중에선 미국 인텔이 액침냉각 기술 개발에 앞장서고 있다. 인텔은 지난해 5월 액침 냉각유 기술 개발에 7억달러를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2009년에 설립된 미국 GRC(Green Revolution Cooling)도 액침냉각 기술에 특화한 기업이다. SK엔무브는 지난해 GRC에 2500만달러(약 334억원) 규모의 지분 투자를 단행했다. 윤활유 경쟁사인 GS칼텍스는 2021년 전기차 전용 윤활유 ‘킥스(Kixx) EV’를 출시했다. 에쓰오일(S-Oil)은 작년 10월 ‘S-OIL 세븐 EV’를 내놨다. 디지털 시대에 제때 적응하지 못한 사례로 흔히 코닥을 든다. 코닥은 카메라 필름 시장을 지배했다. 기득권을 과감하게 버리지 못하는 바람에 아뿔싸, 승자의 저주에 빠졌다. 생물학자 찰스 다윈은 적자생존을 말했다. 적응하지 못하면 그 생물은 도태된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국내 윤활유 기업들은 전기차 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컴퓨터·배터리 열 관리는 미래 수익원으로 떠올랐다. 이들의 변신 노력은 박수를 받을 만하다. 발언하는 박상규 SK엔무브 사장 박상규 SK엔무브 사장이 5일 서울 광진구 그랜드워커힐에서 열린 ‘지크(ZIC) 브랜드 데이’ 행사에서 미래 비전과 사업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SK엔무브가 선보인 데이터센터 액침 냉각 시스템 SK엔무브 관계자가 5일 서울 광진구 그랜드워커힐에서 열린 ‘지크(ZIC) 브랜드 데이’ 행사에서 액침 냉각을 활용한 데이터센터 열관리 시스템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곽인찬의 뉴스가 궁금해

국민연금 3차 개혁 관전포인트 [곽인찬의 뉴스가 궁금해?]

국민연금 개혁이 고지를 향해 첫 걸음을 디뎠다. 갈 길은 멀다. 그러나 시작이 반이라고 했으니, 첫 발을 내딘 것만도 의미가 있다. 보건복지부 산하 자문기구인 국민연금 재정계산위원회는 9월 1일 공청회를 열고 국민연금 개편에 대한 큰 그림을 제시했다. 여러가지 시나리오를 내놨지만, 요약하면 보험료율을 현행 9%에서 향후 5년에 걸쳐 12% 또는 10년에 걸쳐 15% 또는 15년에 걸쳐 18%까지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연금 받는 나이를 현행 65세(2033년)에서 68세(2048년)로 높일 것을 제안했다. 국민연금법에 따라 정부는 5년마다 연금의 건강을 체크해서 국회에 보고하도록 돼 있다. 맨 먼저 재정계산위가 보고서를 내면 정부는 여론을 수렴한 뒤 대통령 승인을 거쳐 10월말까지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을 국회에 제출한다. 국민연금은 1988년 출발했다. 지금까지 두 번, 1998년 김대중 정부와 2007년 노무현 정부 때 손질했다. 윤석열 정부는 임기 내 연금 개혁을 추진 중이다. 심각한 저출생·고령화 추세 속에서 연금을 고쳐야 한다는 당위성에는 모두가 공감한다. 그러나 보험료를 더 내라고 하면 모두가 손사래를 친다. 윤 정부는 과연 임기 내 국민연금을 뜯어고칠 수 있을까? ◇ 1차 개혁안, 뭘 손봤나 1998년 3월 김대중 정부는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급여 수준(소득대체율)을 70%에서 55%로 낮추고, 연금을 타는 나이를 2013년 이후 5년 단위로 한 살씩 높인다는 내용이다. 당시 국회에선 야당인 한나라당의 힘이 가장 셌다. 1998년 9월 한나라당은 급여 수준을 60%로 낮추는 독자적인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냈다. 정부안대로 55%까지 낮추면 근로자의 최저 노후생활 보장이 어렵다는 이유를 댔다. 국회는 같은 해 12월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급여 수준은 한나라당 뜻대로 60%가 됐고, 수급 개시 연령은 정부 뜻대로 2013년부터 61세로 높아졌다. 오는 2033년 수급 개시 연령이 65세로 높아지는 것은 바로 이 개정안에 따른 것이다. ◇ 반쪽에 그친 2차 개혁안 참여정부 시절 개혁안은 노무현 대통령이 뒤에서 밀고 유시민 복지부 장관이 총대를 멨다. 2003년 8월 정부는 국민연금 제도개선 공청회를 가졌다. 이때 재정계산이 처음 실시됐다. 현행 제도를 유지할 경우 2047년에 기금이 바닥을 드러낸다는 계산이 나왔다. 정부는 애초 세게 나갔다. ‘더 내고 덜 받는 안’을 제시했다. 보험료율을 9%에서 2010년부터 5년마다 1.38%포인트씩 올리자는 내용을 담았다. 이렇게 하면 2030년 보험료율이 15.9%까지 오른다. 소득대체율은 60%에서 50%로 낮추자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개정안은 2007년 국회에서 ‘그대로 내고 덜 받는’ 식으로 정리됐다. 보험료율은 9%에서 바뀌지 않았다. 대신 소득대체율은 2028년까지 단계적으로 40%로 낮추도록 설계됐다. 소득대체율 하향은 현재진행형이다. 이 덕에 기금 소진 시점이 좀 뒤로 미뤄졌다. 그러나 본질적인 개혁과는 거리가 있다. ◇ 기회 흘려보낸 문재인 정부 2018년 8월 4차 재정계산을 두고 여론이 들끓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의 동의와 사회적 합의 없는 정부의 일방적인 국민연금 개편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얼마 뒤 재정계산위원회가 공청회에서 개선안을 공개했으나 이미 대통령이 ‘퇴짜’를 놓은 뒤였다. 재정계산위는 소득대체율을 45%로 높이되 보험료율을 2%포인트 즉각 인상하는 안 등을 제시했다. 2018년 12월 복지부는 4가지 안을 담은 종합운영 계획안을 내놨다. 그 중 하나는 맥빠진 ‘현행 유지’다. 연금 개혁은 욕 먹을 각오를 하고 밀어붙여도 될까말까다. 정부가 연금법 개정에 미지근한 태도를 보이는 데 표에 민감한 국회가 팔 걷고 나설 리가 없다. 그렇게 연금 개혁은 물건너갔다. 국회 의석을 고려하면 문재인 정부가 소극적인 자세를 보인 게 못내 아쉽다. 2020년 봄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은 압승을 거뒀다. 마음만 먹으면 어떤 법도 처리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정부·여당은 무슨 이유인지 연금 재정의 둑을 쌓고 보장성을 강화할 기회를 흘려보냈다. ◇ 3차 개혁 짐은 윤석열 정부로 지난해 2월 대선 토론에서 윤석열·이재명·안철수 후보는 국민연금 개혁에 뜻을 모았다. 그만큼 현 정부 임기 안에 개혁이 이뤄질 것이란 기대가 크다. 현재 국민연금 개혁은 두 갈래로 진행 중이다. 먼저 국회는 연금개혁특위 아래 민간자문위를 운영 중이다. 1기 자문위는 3월 경과보고서를 특위에 제출했다. 하지만 보험료율(9%), 의무가입상한(59세), 수급개시연령(2033년 65세)을 모두 올려야 한다고 제안했을 뿐 똑 부러진 방안을 제시하진 못했다. 연금특위는 오는 10월까지 활동하는 2기 민간 자문위를 출범시켰다. 윤 정부 역시 10월까지 국민연금 종합운영 계획을 확정해 국회에 보고할 예정이다. 정부가 과연 단일안를 낼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이후 본격적인 개편 논의가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연금 개혁은 법 개정 사안이라 국회가 최종 결정권을 쥐고 있다. 내년 4·10 총선은 국민연금 개혁의 최대 변수로 꼽힌다. 지금과 같은 여소야대 지형이 이어지면 난관이 예상된다. 전통적으로 진보 민주당은 연금개혁에서 소득대체율 상향을 중시한다. 반면 보수 국민의힘은 재정 안정에 무게를 둔다. 이번에 재정계산위가 내놓은 개선안엔 소득대체율 부분이 빠졌다. 소득대체율을 중시하는 위원이 표결에서 퇴장하는 일도 있었다. 민주당이 다수당 지위를 유지할 경우 소득대체율부터 손보자고 나설 게 틀림없다. 총선 결과 여대야소로 지형이 바뀌어도 연금 개혁이 일사천리로 이뤄지길 바라는 건 무리다. 그만큼 연금개혁, 특히 보험료율 조정은 여야 모두에게 민감한 사안이다. 1차, 2차 사례에서 보듯 국민연금 개편은 여야 간 ‘기브 앤 테이크’가 불가피하다. 이왕 대선 토론에서 뜻을 모았으니, 여야 지도자들이 국민연금 개혁을 협치의 모델로 삼으면 좋으련만. 국민연금 재정계산위원회 공청회 9월 1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국민연금 재정계산위원회 공청회에서 이기일 보건복지부 차관과 김용하 재정계산위원장 등 참석자들이 박수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곽인찬의 뉴스가 궁금해

현대차가 총대 멘 정년연장 [곽인찬의 뉴스가 궁금해?]

현대차 노조가 파업에 들어갈 움직임을 보인다. 8월24일 실시한 파업 찬반투표에서 노조는 89%가 찬성에 표를 던졌다. 올해 임금·단체협약 교섭에서 단연 돋보이는 쟁점은 정년 연장이다. 노조는 정년을 최장 64세까지 연장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 4월에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노조원들은 정년 연장을 올해 임·단협에서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로 꼽았다. 현재 법정 정년은 60세다. 국민연금을 받는 나이는 점차 높아져 2033년 65세가 된다. 여기서 연금 크레바스(공백) 우려가 나온다. 또한 저출산에 따른 노동력 부족은 국가적 과제다. 지난해 합계출산율은 0.78명으로 역대 최저로 굴러떨어졌다. 정년 연장은 노동력 부족을 완화하는 방안 중 하나로 자주 거론된다. 현대차에서 정년 연장은 어떤 과정을 밟아왔는지, 정부는 정년 연장에 대해 어떤 정책을 펴왔는지, 해외 사례는 어떤지 등을 살펴보자.◇ 정년 연장 총대 멘 현대차몇 년 전부터 정년 연장은 현대차 노사 협상의 단골 메뉴다. 일부 성과도 있다. 노사는 2018년 시니어 촉탁직 신설에 합의했다. 60세 정년을 맞은 직원은 1년 간 계약직으로 원래 하던 일을 더 할 수 있다. 그러나 시니어 촉탁직은 임시방편이다. 노조는 아예 정년을 64세로 높일 것을 꾸준히 요구하고 있다. 그래야 국민연금 수령까지 소득 공백을 메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측도 고민이 깊다. 사실 정년 연장은 정부와 국회가 다루어야 할 국가적 과제다. 한 회사가 떠맡기에는 부담이 크다. 더구나 현대차는 내연기관에서 전기차로 대대적인 전환을 진행 중이다. 전기차는 기존 휘발류·경유 차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품이 적고 생산이 간편한 편이다. 굳이 정년을 연장하면서까지 인력을 충원할 필요가 없다. 이 결과 정년 연장을 둘러싼 노사 협상은 수년째 답보 상태다.◇ 정부는 어떤 생각인가전임 문재인 정부는 경제부총리가 이끄는 인구정책 태스크포스(TF)를 중심으로 정년 연장 문제를 다뤘다. 지난해 2월 4차 인구정책 TF는 "고령자 계속고용제도 도입을 위한 사회적 논의를 추진한다"고 말했다. 계속고용제는 정년을 연장하거나, 정년을 없애거나, 직원을 재고용하는 것을 말한다. 윤석열 정부도 계속고용제 도입을 추진 중이다. 올 1월 정부는 ‘제4차 고령자 고용촉진 기본계획(2023~2027)’을 발표했다. 고령자고용촉진법에 따라 고용고용부 장관은 5년마다 기본계획을 수립할 의무가 있다. 고령자 고용에 관한 최상위 체계라 할 수 있다. 기본계획은 ‘자율적 계속고용 지원 확대’를 추진 과제로 제시했다. 단체협약·취업규칙 등에 계속고용제를 도입한 중소·중견기업에 대해 재정 지원을 확대한다는 방침도 밝혔다. 기본계획은 우수 사례로 크라운제과와 한라시멘트 사례를 들었다. 크라운제과는 정년을 62세까지 연장(2016년)하고, 정년 후 3년 간 재고용을 보장했다. 한라시멘트는 노사 합의에 따라 정년 퇴직자 15명을 재고용(2021년)했고, 특정 공정 노하우를 갖춘 퇴직자 22명을 재고용(2022년)했다. 기본계획은 일정도 제시했다. 2023년 1분기에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 계속고용 논의체를 구성한 뒤, 2분기에 본격적인 사회적 논의를 거쳐, 연말에 계속고용 로드맵을 마련한다는 시간표다. 기본계획에 따르면 현대차 노사 간 정년 연장 논의는 기업 자율에 의한 바람직한 진전이다.◇ 걸림돌은 없나장애물이 없는 정책은 없다. 정년 연장의 최대 걸림돌은 임금피크제다. 노조는 임금피크제 없는, 곧 소득 감소 없는 정년 연장을 원한다. 회사는 인건비 부담을 내세워 임금피크제를 필수 조건으로 여긴다. 경사노위는 지난 7월에 ‘초고령사회 계속고용 연구회’를 늑장 발족시켰다. 하지만 노동계는 빠진 반쪽 출범이다. 한국노총은 정년 연장이 임금피크제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불참했다.지난 5월 대법원은 ‘합리적 이유’ 없이 나이만을 기준으로 적용된 임금피크제는 무효라는 판단을 내렸다. 관련법을 보면 이는 당연한 판결이다. 고용자고용촉진법은 1조(목적)에서 "이 법은 합리적인 이유 없이 연령을 이유로 하는 고용차별을 금지한다"고 못박았다. 비용 절감에 신경쓰지 않을 수 없는 기업들로선 임금피크제 없는 정년 연장은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또 다른 걸림돌은 청년 일자리다. 지난 2016년부터 300인 이상 기업과 공공기관은 정년을 60세로 높였다. 한국개발연구원(KDI) 보고서에 따르면 고령자 고용이 1명 증가할 때 청년 고용은 0.2명 감소한 것으로 분석됐다.지금도 질 좋은 청년 일자리가 모자란다고 난리다. 현대차는 청년들이 서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곳이다. 이 마당에 정년이 연장돼 신규 채용이 줄면 청년층 불만은 불을 보듯 뻔하다. ◇ 임금체계 개편은 또다른 장벽윤석열 정부는 계속고용제 도입을 직무·성과 중심의 임금체계 개편과 한묶음으로 다룬다. 사회적 논의의 핵심도 이 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직무급제 전환은 난관투성이다. 강성 노조가 자리잡은 대기업과 공기업은 호봉제가 지배적이다. 연공서열을 기초로 하는 호봉제 아래선 나이가 벼슬이다. 근무연수가 차면 절로 봉급이 오른다. 직무급제는 하는 일에 따라, 성과급제는 실적에 따라 연봉이 달라진다.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노조는 호봉제를 유지하면서 정년만 연장되길 바란다. 그러나 정부는 노동개혁 차원에서 호봉제를 직무급제로 바꾸려 한다. 윤 정부가 출범한 뒤 노·정 관계는 악화일로다. 이 마당에 직무급제 전환을 강행할 경우 충돌이 불가피하다. ◇ 정년 연장은 가야 할 길현대차 노조는 귀족 노조로 불린다. 평균 연봉는 1억원 수준이다. 이런 회사가 정년까지 늘려달라고 파업에 나설 경우 ‘과욕’이라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그러나 정년 연장은 꼭 현대차 노사가 아니라도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숙제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저출생률을 고려하면 이미 선제 대응 타이밍을 놓쳤다고 볼 수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출생아 수는 24만9000명에 그쳤다. 출생아 수가 25만명 밑으로 떨어진 것은 관련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1970년 이후 처음이다. 2021년 기준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합계출산율이 1을 밑도는 유일한 나라다. 고령화 선도국인 일본은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려 2006년 65세까지 고용확보 조치를 의무화했다. 이를 계기로 계속고용제가 널리 퍼졌다. 이어 2020년에는 근로자가 만 70세까지 일하기를 원할 경우 기업이 계속고용을 위해 노력할 의무를 부여했다. ‘기본계획’에 따르면 미국과 영국은 아예 정년이 없다. 싱가포르는 법정 정년이 63세이지만 2030년까지 65세로 연장된다. 현대차 노사가 정년 연장에 어떤 결론을 내리든 정부는 이를 존중하면 된다. 그러나 정년 연장을 기업 자율에 맡기는 건 한계가 있다. 한국은 고령화·저출산 속도가 세상에서 가장 빠른 나라다. 국가 경제의 지속성을 고려하면 정부가 앞장서고 국회가 이를 법령으로 뒷받침하는 게 정도다. <경제칼럼니스트>현대자동차의 2023년 임금·단체협약 교섭에서 정년연장이 쟁점으로 떠올랐다. 노조는 최장 64세까지 연장을 요구하고 있다. 사진은 서울 양재동 현대차 본사. 사진=연합뉴스

한미 통화스와프 상설 라인 구축하자 [곽인찬의 뉴스가 궁금해?]

8·18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에서 외교안보 스포트라이트에 가려 묻힌 게 있다. 바로 한·미·일 3국 재무장관 회담이다. 정상회의 공동성명(캠프 데이비드 정신)은 "(연례적인 3국 정상, 외교장관, 국방장관 및 국가안보보좌관 간 협의와) 아울러 우리는 첫 3국 재무장관 회의를 개최할 것"이라고 명시했다. 이르면 올 10월 모로코 마라케시에서 열리는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 연차총회에서 사상 첫 3국 재무장관 회담이 열릴 수 있다. 세 나라 재무장관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떤 과제를 다뤄야 할지 등을 알아보자. ◇G7의 출발도 재무장관 회의 꼭 50년 전 조지 슐츠 미국 재무장관은 서독(현 독일), 영국, 프랑스 재무장관을 백악관 지하 도서관에서 만났다. 비공식 모임이었지만 멤버가 화려했다. 서독 헬무트 슈미트 재무장관은 나중에 총리가 된다.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프랑스 재무장관은 얼마 뒤 대통령이 된다. 이 모임을 ‘도서관 그룹’이라 부른다. 같은 해 슐츠는 4개국에 일본을 더해 G5 재무장관 회담을 가졌다.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은 다섯나라 정상이 모여 친교를 나누자고 제안했다. 1975년 프랑스가 첫 G6 정상회의를 주최했다. G5에 이탈리아가 추가되면서 G6가 됐다. 나중에 캐나다가 그룹에 포함됐다. 결국 현재 우리가 보는 G7 정상회의는 G4 재무장관 회담이 출발점이다. ◇역사를 바꾼 플라자 합의 1980년대 초 미국은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1979년에 터진 이란혁명의 여파다. 폴 볼커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은 무시무시한 고금리 정책을 폈다. 한때 연방기금금리는 20%에 달했다. 금리가 치솟자 달러는 강세로 치달았다. 자동차 등 제조업체와 곡물을 재배하는 농민들은 달러 강세에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강달러로 수출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이 바람에 가뜩이나 좋지 않던 미국 무역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환율을 인위적으로 손보기로 했다. 제임스 베이커 재무장관은 1985년 9월 뉴욕에 있는 플라자호텔에서 일본, 서독, 영국, 프랑스 재무장관들을 만났다. 일본에선 다케시타 노보루 재무장관이 참석했다. 이들은 대폭적인 달러 가치 절하에 합의했다. 직후 일본 엔화 가치는 급등했다. 한때 달러당 180엔에 육박하던 엔화 환율은 120엔대로 떨어졌다. 이를 플라자 합의라 한다. 엔화 가치가 급등하자 부동산 등 자산에 거품이 끼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 거품이 꺼지면서 일본 경제가 침체의 늪에 빠졌다. 결국 5개국 재무장관들이 합의한 플라자 합의는 일본 경제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상설 통화스와프 구축이 과제 지난 6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일 재무장관 회의에서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스즈키 슌이치 일본 재무장관은 8년만에 통화스와프 복원에 합의했다. 100억달러 규모다. 통화스와프는 위기 때 꺼내쓰는 비상금 통장이다. 한·일 관계가 나빠지면서 한때 수백억 달러 규모이던 한·일 통화스와프는 2015년 제로가 됐다. 윤석열 정부 들어 한·일 관계가 순풍을 타자 자연스럽게 통화스와프도 재개됐다. 경제 위기 때 가장 확실한 안전판은 미국 연준과 맺은 통화스와프다. 연준은 기축통화 달러를 이론상 무한대로 발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한국은 연준과 300억달러 통화스와프 협정을 맺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금융시장에서 원화는 안정세로 돌아섰다. 2020년 코로나 위기 때도 한국은 600억달러 통화스와프 협정을 연준과 체결했다. 이 역시 외환시장 안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연준은 위기가 끝나면 곧바로 협정을 종료한다. 600억달러 스와프는 2021년 12월에 끝났다. 그런데 예외가 있다. 연준은 2013년부터 캐나다, 영국, 일본, 유럽연합(EU), 스위스 5개국과 상설 통화스와프 라인을 구축했다. 상설 라인을 가동하면 위기 때 연준과 통화스와프 협정을 맺으려 발을 동동 구를 필요가 없다. 물론 5개국은 특수성이 있다. 바로 이웃한 캐나다는 최대 교역국 중 한 곳이고, 유로·엔·파운드·스위스프랑은 무역 결제에서 국제통화 대우를 받는다. 현실적으로 원화는 아직 그런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상설 통화스와프 라인 구축은 한국 경제 안정에 꼭 필요한 요소다. 작년 7월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이 방한했을 때도 한·미 통화스와프 재개 이야기가 나왔다. 당시 양국은 필요하면 외화 유동성 공급장치 등 다양한 협력 방안을 실행한다는 인식을 공유했다. 그러나 아직 이렇다 할 성과는 없다. 3국 재무장관 회의 개최를 명시한 캠프 데이비드 정신을 상기하면 미국이 그만큼 한국을 중시한다는 뜻이다. 일본은 이미 미국과 상설 통화스와프 라인을 가동중이다. 한국은 그 위에 올라타면 된다. 통화스와프는 미국 재무부가 아니라 연준 소관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옐런 장관은 직전 연준 의장 출신이다. 적어도 가교 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 한·미·일 재무장관 회의는 한·미 통화스와프 상설 라인을 구축하는 데 다시 없는 기회다. 곽인찬의 뉴스가 궁금해 윤석열 대통령,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 접견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7월 1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을 접견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국제유가를 좌우하는 변수들 [곽인찬의 뉴스가 궁금해?]

국제유가가 강세다. 올 상반기 브렌트유와 서부텍사스유(WTI) 가격은 배럴당 60~70달러 선에서 거래가 이뤄졌다. 지금은 80달러 안팎이다. 그나마 요 며칠 하향세를 보이고 있어 다행이다. 중국 불황에 대한 우려가 기름값을 끌어내리는 것으로 보인다. 국제유가는 상장사 한국전력의 실적에 영향을 미친다. 전기료 인상 여부를 좌우하는 핵심 변수이기도 하다. 최근 국제유가를 결정하는 요인은 뭔지, 앞으로 기름값이 어떻게 될지 등을 살펴보자. ◇ OPEC 감산 작전 지난해 10월 OPEC 플러스(OPEC+)는 하루 200만배럴 감산을 발표했다. 하루 세계 원유 공급량의 2%에 해당하는 규모다. OPEC+는 원유를 수출하는 23개국 연합체다. 주도국은 세계 1위 원유 수출국 사우디아라비아다.작년 가을이면 세계 경제에 인플레이션 먹구름이 짙게 끼었을 때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를 비롯해 각국 중앙은행들은 경쟁하듯 금리를 올렸다. 이 마당에 OPEC+의 원유 감산은 인플레이션에 불을 지른 격이다. 공급이 줄면 자연 값이 뛰기 때문이다. 미국은 발끈했다. 심지어 사우디가 러시아 편을 들고 있다는 비판까지 나왔다.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러시아는 기름값이 올라야 전비를 충당할 수 있다. 그러나 사우디는 끄덕하지 않았다. 감산 결정은 수요·공급을 조절하기 위한 경제적인 이유에서 나온 것이라고 반박했다. 나아가 OPEC+는 올 4월에 하루 166만배럴 추가 감산을 발표했다. 작년 10월 감산과 별도다. 역시 사우디가 주도했다. 이뿐 아니다. 사우디는 OPEC+와 상관없이 7월부터 독자적으로 자발적인 감산(100만배럴)에 들어갔다. 독자 감산은 9월까지 연장된 상태다. 러시아를 비롯해 여러 나라가 사우디에 동조해 자발적인 감산에 착수했다. ◇수요·공급이 최대 변수국제유가를 결정하는 요인은 다양하다. 그러나 원인이 무엇이든 결국은 수요와 공급으로 귀착된다. 중동에서 전쟁이 터지면 기름값이 뛴다. 공급 불안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원유 수출국들이 감산을 발표할 때마다 국제유가는 들썩일 수밖에 없다. 사우디는 왜 오랜 우방 미국과 얼굴을 붉히면서까지 감산을 주도하는 걸까? AP 통신이 흥미로운 분석을 내놨다. 바로 ‘비전 2030 프로젝트’에 들어갈 자금 마련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비전 2030은 실세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추진하는 대대적인 개혁 프로그램이다. 장차 석유산업에 대한 의존을 낮추고, 민간 부문을 육성하는 게 핵심이다. 5000억달러를 투입하는 미래도시 ‘네옴(Neom) 시티’ 건설도 프로젝트의 일부다. 러시아는 사우디에 열심히 맞장구를 치는 중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들어갈 전비를 마련하려면 고유가가 절대 유리하기 때문이다. 2021년 기준 러시아는 사우디에 이어 세계 2위 원유 수출국이다.◇ 차이나 변수 등장중국은 사우디와 가깝다. 시진핑 국가 주석은 지난해 12월 사우디를 국빈 방문해 환대를 받았다. 중국은 러시아와도 친하다. 시 주석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말이 통하는 몇 안 되는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그런데 중국 경제가 침체 조짐을 보이면서 묘한 일이 벌어질 참이다. 중국은 원유 수입 시장의 큰손이다. 지난해 중국은 3660억달러(약 485조원)어치의 원유를 수입했다. 압도적인 세계 1위다. 이는 글로벌 원유 수입량의 23%에 해당한다. 사우디-러시아-이라크 순으로 중국에 원유를 많이 수출한다. 요즘 중국 경제에 먹구름이 끼었다. 성장률은 예전만 못하고, 수출도 쪼그라들었다. 물가가 마이너스로 진입하면서 디플레이션 우려도 나온다. 비구이위안 등 대형 부동산 개발업체들은 디폴트(채무불이행) 리스크에 시달리고 있다. 부동산은 중국 국내총생산(GDP)의 25%를 차지할 만큼 중요한 산업이다. 전세계가 지금 중국 경제에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잔뜩 긴장해서 지켜보는 중이다. 차이나 변수는 이미 유가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로이터 통신은 8월15일자 기사에서 ‘부진한 중국 경제 데이터에 유가 1% 넘게 하락’이란 제목을 달았다. 향후 원유시장 판도는 OPEC의 감산과 차이나 변수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힘이 센지에 달렸다는 시각도 있다. 만약 유가가 더 떨어지면 결과적으로 중국이 사우디의 고유가 전략에 브레이크를 거는 셈이다. ◇한전도 긴장, 정부도 긴장최근의 국제유가 오름세는 한국전력 실적에 악영향을 미친다. 발전원가가 비싸지기 때문이다. 일반 기업이라면 원자재가 상승 요인을 판매가에 슬쩍 얹으면 된다. 그러나 공기업 한전은 그럴 수 없다. 전임 문재인 정부는 전기료 인상을 최대한 억눌렀다. 그 부담이 고스란히 윤석열 정부로 넘어왔다. 윤 정부는 올 2분기까지 전기료를 꾸준히 올렸다. 다만 3분기엔 동결했다. 한전 적자를 고려하면 전기료는 더 올리는 게 맞다. 전임 한전 사장들이 말한 대로 아직은 두부(전기료)가 콩(연료가격)보다 싼 형편이다. 한전채 발행으로 당장 적자를 메울 순 있지만 임시방편일 뿐이다. 결국은 한전이 다 갚아야 할 돈이다. 정부도 고심이 크다. 내년 4월 총선이 실시된다. 전기료를 또 올릴 경우 여론 반발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다시 동결하면 전임 정부처럼 한전 적자를 방치하는 잘못을 되풀이하는 격이다. ◇향후 유가 전망은한국은 원유 수입국 순위에서 중국-미국-인도에 이어 세계 4위다. 세계 원유 수입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6.7%로 5위 일본을 약간 웃돈다. 그만큼 국제유가가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넓고 깊다. 한국 경제에 최상은 하향 안정세다. 그러나 유가는 우리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8월 석유시장 보고서에서 올해 세계 석유 수요가 사상 최고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여름철 항공여행, 발전용 석유 사용, 중국 정유화학 활동 증가 등을 배경으로 꼽았다. 수요가 늘면 가격이 오른다.한가닥 기대는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9월 9일 인도 뉴델리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사우디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와 회담을 검토중인 것으로 보도됐다. 양국 관계가 예전으로 돌아가면 사우디의 감산 기조에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산유국 이란의 역할도 주목된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2018년 이란핵협정(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에서 탈퇴한 뒤 이란산 석유는 거래금지 품목이 됐다. 그러나 음성적인 거래는 이뤄진다. 바이든 행정부는 이란과 핵협정 복원을 논의 중이다. 최근에 수감자 맞교환에 합의하기도 했다. 이란이 미국의 묵인 아래 원유 생산을 늘린다면 국제유가 하락세에 도움이 된다. 전통적으로 이란은 중동 패권을 놓고 사우디와 앙숙이다. 1960년 설립된 OPEC은 전형적인 이권 카르텔이다. 그러나 석유라는 비장의 무기를 손에 쥔 탓에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다. 미국도 영향력 행사에 한계가 있다. 석유, 석탄, 가스 등 화석연료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지 못하는 한 OPEC의 힘은 쉽게 사그라들 것 같지 않다. <경제칼럼니스트>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본부 건물. 사진=AP/연합뉴스

[곽인찬 칼럼] 중국, 중진국 함정에 빠지나

중국 경제가 심상찮다. 세계 경제에도 먹구름이 끼었다. 중국은 수출 세계 1위 국가다. 경제 규모는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크다. 좋은 소식이든 나쁜 소식이든 다른 나라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대중 수출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말할 것도 없다.무엇보다 부동산이 불안하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 1990년대 초반 일본 경제가 무너질 때 집값, 빌딩값이 폭락했다. 그 뒤 일본은 근 30년 동안 불황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도 진앙은 부동산이었다. 리만 브라더스를 비롯해 대형 금융사들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곧 비우량 주택담보채권에 대량으로 투자했다. 집값이 급락하자 채권은 휴지조각이 됐다. 중국에서 부동산은 국내총생산(GDP)의 25%를 차지할 만큼 비중이 크다. 그래서 더 불안하다.요즘 중국 경제는 여기저기 골병이 든 듯하다. 성장률은 뚝 떨어졌고, 수출은 몇 개월째 감소세다. 소비자물가가 마이너스를 보이면서 디플레이션 우려마저 나온다. 게다가 청년실업률(16∼24세)은 6월에 21%를 넘어섰다. 7월 통계는 아예 공개하지 않았다. 사회주의 중국에서 청년들이 일자리가 없어 쩔쩔매다니 이런 모순이 또 있을까?세계은행은 10년 전 ‘차이나 2030’이란 보고서를 냈다. 중국 국무원 산하 싱크탱크 발전연구중심(DRP)과 공동으로 썼다. 좀 오래된 자료이지만 지금 읽어도 흥미롭다.보고서에 ‘중진국 함정’(Middle Income Trap)을 다룬 대목이 있다. 1960년에 중진국이던 101개 국가 가운데 불과 13개국만이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데 성공했다. 성공한 나라는 일본, 홍콩, 싱가포르, 아일랜드, 대만 그리고 한국 등이다. 반면 라틴아메리카와 중동의 여러 나라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중간소득 국가에 도달했지만 선진국으로 점프하지 못했다.보고서가 중진국 함정을 다룬 이유는 명백하다. 중국도 자칫 그 함정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보고서는 중국이 2030년 전에 고소득 국가로 진입하려면 6대 개혁을 이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첫째 시장경제의 기초를 다지는 구조개혁을 단행하라. 둘째 혁신의 속도를 높여라. 셋째 ‘그린’ 경제로 가는 기회를 잡아라. 넷째 모두를 위한 사회보장 제도를 구축하라. 다섯째 추가 세수를 통해 재정 시스템을 보강하라. 여섯째 세계 시장과 통합을 가속화하라.말이 쉽지, 구조개혁은 뼈를 깎는 작업이다. 예컨대 보고서는 국가 역할을 축소하고 민간부문을 강화하라고 주문한다. 실제론 어떤가? 시진핑 국가주석이 이끄는 중국 정부는 전례없이 민간기업을 옥죄고 있다. 알리바바는 중국을 대표하는 혁신기업이다. 그러나 창업자 마윈은 정부에 대고 쓴소리를 했다는 이유로 사실상 무대에서 사라졌다.세계 시장과 통합도 갈 길이 멀다. 중국이 ‘일대일로’ 전략을 앞세워 독자 노선을 걷자 미국은 디커플링 전략으로 맞섰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조 바이든 현 대통령은 앙숙이다. 그러나 대중 견제만큼은 일심동체다. 바이든은 얼마전 "중국은 똑딱거리는 시한폭탄"이라며 중국을 자극했다. 지난주 캠프데이비드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의에서 3국은 첨단기술 공급망 3각 연대를 구축하기로 합의했다. 반도체의 경우 대만까지 합해서 칩4 동맹은 사실상 반중 연대다.중국이 중진국 함정에 빠질지 여부는 누구도 장담하기 어렵다. 다만 세계은행 보고서를 잣대로 재면 선진국 도약은 쉽지 않아 보인다. 40여년 전 중국 개혁·개방을 이끈 덩샤오핑은 도광양회(韜光養晦) 네 글자를 외교 기조로 삼았다. 힘을 더 비축할 때까지 꾹 참고 기다리라는 뜻이다. 특히 초강대국 미국과 다투지 말 것을 당부했다.2200년 전 한나라의 명장 한신은 젊을 때 불량배 바짓가랑이 밑을 긴 적이 있다. 겁쟁이 취급을 받았지만 장차 큰 뜻을 이루기 위해 당장의 치욕을 참았다. 한신과 덩샤오핑은 닮은 구석이 있다.사실 중국 부동산이 곧 무너질 것처럼 보는 건 과장된 측면이 있다. 부동산 거품을 빼기 위해 돈줄을 조이는 건 보기에 따라선 더 큰 재앙을 막는 과감한 결정이다. 그러나 중국 경제가 압축성장에 따른 진통기에 들어선 것만은 부인하기 힘들다.중국은 중진국 중에서도 상위 소득국가에 속한다. 조금 더 참으면 선진 고소득국가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 바로 이런 때 미국과 사사건건 대립하는 게 과연 현명한 전략일까. 어쩌면 중국은 지금 제 손으로 중진국 함정을 파고 있는지도 모른다. 경제가 뒤틀리면 정치고 뭐고 다 소용없다. 중국이 덩샤오핑의 선견지명과 한신의 지혜를 곱씹어 볼 때다.곽인찬 경제칼럼니스트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