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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내란 17번·민생 4번…1년 전에 사는 정청래

“새해 1호 법안은 2차 종합특검이다." 지난 26일 취임 첫 기자회견에서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내놓은 첫 메시지는 또다시 '특검'이었다. 내란·김건희·채해병 등 3대 특검이 끝나기도 전, 후속 성격의 특검을 새해 국정의 출발점에 세운 것이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내란'이라는 표현이 17번 등장한 반면, '민생'과 '경제'는 합쳐 4번에 그쳤다. “내란과의 전쟁 계속되고 있다"며 엄중함을 강조하는 그의 언어는 지난해 12월 3일 밤 특전사 헬기가 국회 의사당 위를 비행하던 시점에 멈춰 있는 듯 하다. 정 대표는 이미 6개월전 경선 출마때부터도 입에 '내란 청산'을 달고 살았다. 최선봉을 자처해 '당대포'라는 별칭을 얻은 그는 “모든 것을 바쳐 싸우겠다", “차돌같이 단단하게", “전광석화처럼 해치우겠다."고 했다. 취임 후에도 “내란 청산이 시대정신"이라 외치며 야당과의 관례적 악수까지 거부했다. 당시 12·3 비상계엄 사태의 여진이 남아 있었다. 그의 강경한 어조는 진보 성향 중도층까지 결집시키는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검찰개혁 등 숙원 과제가 전광석화처럼 처리된 것도 사실이다. 집권 여당이 된 지 6개월, 내란 특검도 180일간의 수사 끝에 일단락됐다. 하지만 그의 언어는 여전히 내란 청산에 고착돼 있다. 물론 아직 12.3 비상계엄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완료되지는 않았다. 오는 1월 '수괴'인 윤석열 전 대통령 등 주요 관련자들의 내란 혐의 1심 판결을 계기로 사법적·역사적 성격 규정이 완료된다. 미진한 점도 없지 않다. 앞으로 사상 최악의 반헌법적 중대 범죄인 내란을 누가 어떻게 기획하고 실행하고 도왔는지 철저히 밝혀내고 모조리 사법 처벌해야 하는 것도 맞다. 그러나 민생을 책임진 정치의 영역에선 협치가 절실하다. 야당과 협력해 각종 법안을 처리해야 할 정 대표가 대화는커녕 악수도 거부하면서 내란 청산만 읊고 있는 현실은 암울하다. 무엇보다 시급한 민생 법안들이 정쟁의 포로가 되고 있다. 통일교 특검과 2차 종합특검을 둘러싼 여야의 격돌 속에서 197건의 법안이 본회의에서 표류하고 있다. 정년 65세 연장 법안은 해를 넘길 위기에 처했고, 반도체특별법조차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다. 특검에만 매달리는 여당도, 필리버스터만 앞세운 야당도 국민 눈에는 똑같은 직무유기일 뿐이다. 정치의 본질은 대결이 아닌 조율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김하나 기자 uno@ekn.kr

[기자의 눈] 흥행으로 증명된 IMA, 이제는 ‘어디에 쓰느냐’가 남았다

연말 증권가의 화두였던 종합투자계좌(IMA)가 예상보다 빠르게 시장의 답을 얻었다. 제도 도입 이후 첫 상품부터 4영업일 만에 1조원이 넘는 자금이 몰려 IMA는 '정책 실험'이 아니라 '현실 상품'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그동안 발행어음 이후 뚜렷한 대안을 찾지 못하던 대형 증권사들에게도 IMA는 새로운 성장 카드로 자리매김하는 분위기다. 흥행 자체는 분명한 성과다. 기준금리 인하 기대 속에 예·적금 대안을 찾던 개인 자금이 대거 유입됐고, 자산관리(WM) 자금이 기업금융과 직접 연결될 수 있다는 구조 역시 시장의 관심을 끌었다. '모험자본 공급 확대'라는 정부의 오랜 정책 구호가 제도권 상품으로 구현됐다는 점에서도 의미는 작지 않다. 다만 IMA의 빠른 흥행이 곧 제도의 완성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부터가 더 중요한 구간이다. IMA는 예금도, 전통적인 공모펀드도 아니다. 장기 자금을 바탕으로 기업금융과 대체투자 자산에 투자하고, 만기까지 보유할 경우 증권사가 약정에 따라 원금 지급 책임을 지는 구조를 지닌 상품이다. 수익과 안정성을 동시에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 강점이지만, 그만큼 구조에 대한 이해가 전제돼야 한다. 문제는 이 복합적인 구조가 판매 현장에서 얼마나 충분히 설명되고 있느냐다. 흥행 초기일수록 수익률과 안정성만 강조되기 쉽고, 투자 대상 자산의 성격과 유동성, 손익 구조에 대한 설명은 뒷전으로 밀릴 가능성이 크다. IMA가 단순히 '은행 예금보다 조금 더 주는 상품'으로 인식되는 순간 모험자본 공급이라는 제도 본연의 취지는 흐려질 수밖에 없다. 모험자본의 핵심은 높은 수익률이 아니라 불확실성을 감내하고 성장의 시간을 함께 나누는 데 있다. IMA 역시 마찬가지다. 안정적인 기업대출과 회사채뿐 아니라 비상장·사모 영역의 자산까지 포괄하는 구조라면, 그에 따른 위험 역시 투자자와 명확히 공유돼야 한다. 흥행 이후의 단계에서는 '얼마나 팔렸는가'보다 '어디에 쓰이고 있는가'가 더 중요한 질문이 된다. IMA는 발행어음 이후 증권사들이 다시 한 번 꺼내 든 대규모 자금 조달·운용 수단이다. 제도상으로는 최대 수십조원까지 확장될 수 있는 만큼 그 자금이 어떤 기업과 산업으로 흘러가는지는 자본시장의 방향성을 좌우할 수 있다. 생산적 금융의 이름에 걸맞게 IMA가 단기 수익 경쟁을 넘어서 중장기 성장 자본의 통로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는 이제부터 증권사의 운용과 설명 책임에 달려 있다. 흥행은 출발선일 뿐이다. IMA가 또 하나의 '잘 팔린 금융상품'으로 남을지 아니면 자본시장의 체질을 바꾸는 계기가 될지는 지금부터의 선택이 가를 것이다. 윤수현 기자 ysh@ekn.kr

[기자의 눈] “왜 접냐” 비웃음은 틀렸다…삼성 트라이폴드가 증명한 ‘도전의 값어치’

“귀찮게 왜 접냐", “이러다 네 번도 접겠네"…. 삼성전자의 두 번 접는 스마트폰 '갤럭시 Z 트라이폴드'(Z 트라이폴드) 출시를 앞두고 온라인 커뮤니티에 쏟아졌던 말들이다. 새로운 폼팩터(기기 외형)에 대한 기대도 있었지만 실용성과 가격에 대한 의구심이 더 컸던 탓일까. 익숙하지 않은 변화 앞에서 네티즌들의 경계심이 먼저 작동한 반응이었다. 하지막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분위기는 정반대였다. Z 트라이폴드는 지난 12일 출시 직후 완판됐고, 17일 온라인에 재입고된 물량 역시 단 2분 만에 매진됐다. 359만원을 웃도는 고가임에도 '없어서 못 사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초도물량이 많지 않다는 점을 감안해도 시장 반응은 예상을 뛰어넘는다. 이런 장면은 낯설지 않다. 삼성전자가 폴더블폰을 처음 선보였을 때와 닮아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19년 '갤럭시 Z 폴드', 이듬해 'Z 플립'이 등장했을 당시에도 반응은 냉담했다. 그러나 지금은 글로벌 스마트폰 제조사 대부분이 폴더블 시장에 뛰어들었고, 한때의 '기이한 실험'은 새로운 표준 후보로 자리잡았다. 이 같은 흐름은 삼성이 새로운 시도를 주저하지 않는 기업이라는 점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지난해 '갤럭시 S24 시리즈'를 통해 인공지능(AI)을 전면에 내세우며 'AI 스마트폰'이라는 개념을 시장에 던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당시의 회의론과 달리 스마트폰 경쟁의 기준은 분명 달라졌다. 물론 모든 도전이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올해 선보인 초슬림폰 '갤럭시 엣지'는 기대에 못 미쳤다. 2013년 출시된 '갤럭시 라운드' 역시 시장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실패한 시도는 분명 존재한다. 그럼에도 실패 사례들이 '도전의 가치'를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기술 혁신의 역사에서 실패는 예외가 아니라 과정에 가깝다. 한때 휴대폰 시장의 절대강자였던 노키아가 변화 앞에서 주저하다 몰락한 사례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왜 접느냐'는 질문은 필요하다. 그러나 비웃음과 조롱으로 던져진 질문은 발전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지금의 트라이폴드는 완성형 해답이라기보다 또 하나의 실험에 가깝지만, 그 실험이 시장에서 의미 있는 반응을 얻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삼성이 추구하는 도전의 값어치는 충분히 증명됐다. 김윤호 기자 kyh81@ekn.kr

[기자의 눈] 재생에너지·히트펌프 보급 목표, 연연하지 말았으면

기후에너지환경부는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발전 설비용량을 100기가와트(GW), 재생열에너지인 공기열 히트펌프를 2035년까지 350만대 보급하겠다고 밝혔다. 이 목표는 경제성보다는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를 우선 고려해 설정됐다. 현재 재생에너지 발전 설비용량은 약 35GW 수준이고 히트펌프 보급 대수 역시 40만대가 채 되지 않는다. 각각 5년 안에 약 3배, 10년 안에 9배 가까이 늘려야 해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다. 이 분야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억' 소리가 나올 만한 수치로 실현 가능성에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기자 입장에서 정부가 제시한 정책 목표가 달성되지 못할 경우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이 목표 수치를 달성하지 못했다고 해서 정책 실패라고 보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기술 발전에 따라 보급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시장과 환경을 조성해 주는 일이다. 실제로 기후부는 재생에너지 단가 목표를 태양광은 2030년 킬로와트시(kWh)당 80원, 육상풍력은 150원, 해상풍력은 2035년까지 150원 이하로 제시했다. 비록 히트펌프는 목표 단가를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최대한 비용을 낮추는 방향으로 보급이 이뤄질 것이라 믿는다. 보급 확대와 단가 인하를 동시에 추진하겠다는 계획이겠지만 정책의 우선순위를 따진다면 보급 숫자보다 단가에 더 무게를 둬야 한다. 이르면 내년 상반기부터 재생에너지는 신재생에너지공급의무화(RPS)에서 경매제도로 전환된다. RPS가 대규모 발전사에 재생에너지 설치를 강제해 왔다면 경매제도는 발전사업자 간 경쟁을 촉진해 단가를 낮추는데 초점을 맞춘 제도다. 재생열에너지는 발전과 달리 아직 시장이 초기 단계에 있는 만큼 청정열에너지공급의무화 제도로 출발한다. 내년 청정열에너지법이 통과되면 RPS처럼 대규모 열생산 사업자에게 청정열 생산 시설 설치를 의무적으로 부여하는 방식이 될 전망이다. 이 두 제도가 재생에너지 시장을 형성하고 합리적인 산업 생태계를 조성하는 방향으로 작동해야 한다. 기업들이 태양광 셀, 풍력 터빈, 히트펌프의 효율 향상 기술에 꾸준히 투자할 수 있도록 명확한 수요 신호를 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동시에 국민에게는 전기요금과 난방요금 측면에서 합리적인 수준의 부담을 제시해야 한다. 일정 수준 요금 인상은 불가피하겠지만 가계와 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부담이 전가된다면 기후 정책은 정치적 역풍을 피하기 어렵다. 기후 정책의 지속 가능성은 경제적 수용성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경제 기반을 훼손하면서까지 추진되는 기후 정책은 후손들에게 부담을 전가할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2050년 탄소중립 달성 시점 자체를 늦출 위험도 안고 있다. 이원희 기자 wonhee4544@ekn.kr

[기자의 눈] 부동산 대책, 늦어도 실효성 있게 내놔야

최근 에너지경제신문과 리얼미터가 진행한 정부 부동산 대책 관련 여론조사에는 눈에 띄는 대목이 있었다. 전체적으로는 정부 대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응답이 우세했지만, 세대별로 들여다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긍정 평가는 40~60대에 집중됐고, 30대와 70대에서는 부정 응답이 더 많았다. 같은 30대인 기자 역시 이 결과가 낯설지 않았다. 최근 정부가 잇따라 내놓은 부동산 대책이 체감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개인의 감각일 수도 있었겠지만, 여론조사 결과로 확인되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결국 집을 가진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의 인식 차이라고 볼 수 있다. 무주택자들이 정책을 체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비교적 분명하다. 정부가 잇따라 대책을 발표했지만 집값이 눈에 띄게 하락하지도 않았고, 상승 흐름 역시 완전히 꺾였다고 보기 어렵다. 그 사이 전세 매물은 줄고, 비싼 월세로의 전환은 가속화됐다. 규제의 효과는 매매보다 임대 시장에서 먼저 나타났고, 그 부담은 무주택자에게 돌아갔다. 집값을 잡겠다는 정책의 목적에는 무주택 실수요자와 서민 주거 안정도 포함돼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들이 가장 먼저 주거 불안을 체감하고 있다. 정책이 많아질수록 삶이 나아졌다는 느낌은 오히려 멀어졌다. 30대는 출산과 양육을 앞둔 세대이자, 향후 부동산 시장의 핵심 수요층이다. 이들이 정책에 등을 돌린다는 것은 정책 신뢰가 약해지고 있다는 신호로 읽어야 한다. 정부는 그동안 6·27 부동산 대책, 9·7 주택 공급 대책, 10·15 부동산 대책 등을 연이어 내놨다. 대출 규제 강화와 규제 지역 확대 등 수요 억제 중심의 정책이 골자였다. 그러나 기대만큼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자 다시 추가 공급 대책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최근 김윤덕 국토교통부 장관은 “공급 문제는 신뢰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추가 공급 대책 발표를 늦출 수도 있다"고 언급했다. 정책 신뢰가 중요하다는 말에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급하게 내놓은 대책이 또다시 불신을 키운다면 차라리 늦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다만 방향은 분명해야 한다. 입주까지 수년이 걸리는 대규모 개발보다는 도심의 빈 상가·오피스 등을 주거 공간으로 전환하는 방식처럼 비교적 빠르게 효과를 낼 수 있는 대안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부동산 정책은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체감되지 않는 대책을 반복하는 것보다 늦더라도 실효성 있는 한 수가 낫다. 정부가 쏟아내야 할 것은 대책의 개수가 아니라 현실에 닿는 해법이다. 서예온 기자 pr9028@ekn.kr

[기자의 눈] 저당(低糖)과 딸기시루

올해 식품업계를 관통한 키워드를 하나만 꼽으라면 무엇일까. 제로슈거, '저당(低糖)'이 아닐까 싶다. 비건에서 시작된 트렌드는 저속노화로 번졌고, 올해는 '저당'이라는 키워드가 업계를 휩쓸었다. 소스부터 주류까지 '저당'은 식품업계 전반에 스며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해 특히나 재미있었던 취재현장을 떠올려보니, 박현영 생활변화관측소 소장의 강연이 떠올랐다. '2026 식품외식산업 전망'을 주제로 진행된 박 소장의 강연에서 무릎을 '탁' 치게 한 부분은 바로 '저당'과 함께 떠오른 '성심당 딸기시루케이크' 이야기였다. 박 소장은 “저당 제품을 찾아 먹고 혈당 패치를 사서 당 수치를 체크하는 당신은 누구이며, KTX를 타고 대전까지 가서 4시간을 기다린 후 '당 폭탄' 딸기시루를 사오는 당신은 또 누구라는 말입니까"라며 “이게 바로 현대인이 가진 '모순의 식문화'"라고 설명했다. 생각해보면 굳이 성심당의 딸기시루케이크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두바이 초콜릿이나 스웨덴 캔디, 토핑이 잔뜩 올려진 디저트 음료를 많이도 마셨던 것 같다. 박 소장은 '딸기시루케이크'로 대변된 디저트가 주는 베네핏(benefit)을 '위로' 라고 해석했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돌보아야 하는 장수 시대에, 사람들이 가진 두려움이 디저트에 대한 갈증으로 표출됐다는 설명이다. 지금 시대에 디저트를 즐긴다는 것은 일종의 사회생활이자, 나에게 전하는 위로다. 제시된 트렌드대로라면 내년에도 식품업계에는 '위로'에 대한 소비자 니즈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박 소장은 식감에 대한 기발한 변주를 통해 소비자에게 재미있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디저트 업계의 화두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조금은 결이 다른 이야기지만, 2025년을 마무리하는 길목에 서니 나는 올해 누군가에게 어떤 위로를 어떻게 전했는지 돌이켜보게 된다. 2025년의 마지막 만큼은 나를 돌보고, 서로를 위로하는 한해가 되기를 바란다. 정희순 기자 hsjung@ekn.kr

[기자의 눈] 자사주는 ‘경영권 방어’ 수단이 아니다

식민 지배, 전쟁, 군사독재, 외환위기. 한국 근현대 경제사를 꿰뚫는 핵심 키워드다. 파란만장한 역사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구조를 탄생시켰다. 옥스퍼드 사전에도 등재된, 대체 불가능한 한국 고유의 단어 '재벌(Chaebol)'이다. 재벌 대기업 중심 경제 발전은 우리나라를 빠르게 선진국 반열에 올리는 데 기여했다. 석유 한 방울 없는 나라가 글로벌 석유화학제품 생산거점으로 거듭났다. 기술·자본 모두 부족했던 삼성은 '반도체 초격차 신화'를 썼다. 국민들도 마음속으로 '한국 기업'을 응원했다. 해외에서 삼성·현대차의 로고를 보면 많은 이들이 묘한 뿌듯함을 느낀다. 100년 넘게 이어진 독립운동정신의 연장선인 듯하다. 외국계 자본이 우리 기업 지분을 사들이면 이를 '공격'이라고 표현한다. 정부는 대기업 총수를 '동일인'이라고 지정하며 별도로 관리한다. 글로벌 스탠다드 관점에서는 어느 하나 평범한 게 없다. 문제는 어느 순간 재계가 '한국의 특수성'과 '재벌 특혜'를 혼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뜨거운 감자인 자사주 소각 의무화 논란 사례가 대표적이다. 재계는 해당 상법 개정에 반대하며 “경영권 방어 수단이 사라진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자사주는 주주 전체의 돈으로 사들인 '회사의 자산'이다. 주주가치 제고를 위해 이를 소각하는 게 전세계 자본시장의 상식이다. 특정 총수 개인의 지배력 유지를 위해 이를 우호 세력과 맞교환하는 행위는 배임이라고 보는 게 합당하다. 회사 돈으로 본인 경영권을 지킨다는 생각 자체를 했다는 게 놀랍다. 자사주를 경영권 방어 '꽃놀이패'로 활용하는 관행은 재계의 도덕적 권위를 스스로 갉아먹는 행위다. 기업이 법의 허점을 이용해 주주 권익을 침해하면서 노동계·정치권을 향해 “법과 원칙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재계가 노동조합법 제2·3조 개정안(노란봉투법) 등에 반대할 때 내세운 명분도 '글로벌 기준'이 아니었나? 자사주를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고집하는 것은 재계가 '기득권 지키기'에 스스로 매몰돼 있음을 자인하는 꼴이다. 명분이 무너지면 시장, 주주, 국민 모두 기업의 편에 서지 않는다. 여헌우 기자 yes@ekn.kr

[기자의 눈] 2030년 재생에너지 100GW, 목표가 아니라 주문(呪文)이 되고 있다

기후에너지환경부가 내세운 '2030년 재생에너지 100GW 보급' 목표를 두고 에너지 업계 안팎에서는 고개를 갸웃하는 반응이 적지 않다. 숫자만 놓고 보면 야심차다 못해 과감하지만, 현실을 들여다보면 이 목표는 정책이라기보다 선언에 가깝다. 현재 국내 재생에너지 설비는 태양광을 중심으로 빠르게 늘었지만, 계통에 실질적인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설비는 여전히 제한적이다. 인허가 단계와 계획 물량을 모두 포함하더라도 2030년까지 추가로 수십 기가와트(GW)를 안정적으로 흡수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지금과 같은 속도와 구조라면 매년 두 자릿수 GW의 신규 재생에너지를 계통에 무리 없이 연결해야 하는데,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목표다. 문제는 단순히 '설비 용량'이 아니다. 재생에너지는 지역 편중이 심하고 출력 변동성이 크다. 특히 태양광과 풍력은 전력 수요와 시간대가 어긋나는 경우가 많다. 발전 설비는 늘었지만, 이를 뒷받침할 송전망과 계통 보강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전력망 포화로 인해 발전을 줄이거나 접속을 대기하는 재생에너지 설비가 적지 않다. 재생에너지 확대 과정에서 반복되는 주민 수용성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태양광은 산지 훼손 논란, 풍력은 소음·경관·어업권 갈등이 뒤따른다. 행정 절차를 아무리 간소화해도 사회적 갈등까지 단기간에 해소하기는 어렵다. 조직 개편이나 부처 명칭 변경이 곧바로 현장의 합의를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산업적 측면에서도 고민은 깊다. 재생에너지 발전단가는 지속적으로 낮아지고 있지만, 계통 보강 비용과 출력 제한, 보조서비스 비용까지 감안하면 전체 전력 시스템 비용은 오히려 상승하는 구조다. 인공지능(AI), 반도체, 데이터센터 등 전력 다소비 산업은 값싸고 안정적인 전력을 요구하는데, 재생에너지 확대만으로 이 조건을 충족할 수 있을지에 대한 답은 아직 명확하지 않다. 그럼에도 '2030년 재생에너지 100GW'라는 숫자가 제시된 배경은 분명하다. 국제사회에 대한 의지 표명, 탈석탄·에너지 전환 정책의 상징성, 그리고 새 정부 에너지 정책의 방향성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히 강렬한 수치다. 하지만 목표는 숫자 자체가 아니라, 그 숫자를 현실로 만드는 경로가 있을 때 의미를 갖는다. 에너지 전환은 장부상의 용량 경쟁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설비를 설치했느냐가 아니라, 그 전기가 언제나 필요한 순간에 쓰일 수 있느냐다. 이제는 재생에너지 100GW라는 구호를 넘어, 24시간 무탄소 전력(24/7 CFE)이라는 보다 현실적인 질문에 답해야 할 때다. 그렇지 않다면 2030년 재생에너지 100GW는 기후정책의 이정표가 아니라, 또 하나의 공허한 숫자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전지성 기자 jjs@ekn.kr

[기자의 눈] ‘국중박’ 유료화, 걸맞은 전시 콘텐츠 선행돼야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국립중앙박물관(국중박)은 2008년부터 무료로 전환해 입장료 없이 관람 가능하다. 꾸준한 방문객의 증가로 지난 11일 1945년 개관 이후 79년 만에 연간 관람객 600만 명을 돌파했다. 올해는 전 세계적으로 신드롬을 일으킨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 영향으로 그 인기가 폭발했다. 방문객이 급증하면서 입장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서고, '오픈 런' 현상이 일어날 정도다. 그렇다보니 이전까지 크게 개의치 않았던 대기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한정된 공간에 많은 인파가 몰리는 것에 대해서 불만사항을 표출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래서 나온 방안이 사전 예약제와 유료화다. 지난 10월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이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상설 전시 유료화 언급 이후 온라인상에서 찬반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향후 다양한 논의를 거쳐 유료 입장료 정책이 확정된다면 국중박을 향하는 발걸음이 뚝 끊길까.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초반 시행착오의 시기를 슬기롭게 이겨내고 안정적으로 정착한다면 지금보다 더 쾌적한 관람이 가능하지 않을까. 사전 예약제의 경우 디지털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고령자와 외국인 등이 현장에서 구매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일례로 일부 야구장에서는 고령자 및 장애인에 한해 현장에서 키오스크를 사용하지 않고도 직원의 도움을 받아 티켓을 구매할 수 있도록 운영하고 있다. 유료화는 금액이 관건이다. 17년 가까이 무료로 관람해온 시설의 유료 전환을 심리적 저항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입장료의 적정선을 찾아야 한다. 결정 과정에서 충분한 여론 수렴은 반드시 뒷받침돼야 한다. 많은 이들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유료 전환하지만 돈을 내는 만큼 기대한 만족도를 충족하지 못하다면 오히려 방문객이 감소하는 등 예상과 전혀 다른 결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 관람객 수를 자랑하는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은 일반 22유로(약 3만8000원),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성인 기준 30달러(약 4만4000원)의 입장료를 받고 있다. 고령자, 장애인, 학생, 미취학 아동, 지역 주민에게는 입장료 할인, 무료 관람 등 다양한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국중박이 올해 처음으로 루브르, 바티칸, 영국박물관에 이어 세계 4위 방문객 수를 기록하는 글로벌 박물관 대열에 합류한 만큼 해외 사례를 고려해 입장료 정책을 도입한다면, 그에 걸맞은 전시 콘텐츠를 선보여야 관람객의 이탈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백솔미 기자 bsm@ekn.kr

[기자의 눈] 원화 스테이블코인, 시장은 뛰는데 법안은 못 간다

네이버파이낸셜과 두나무의 합병 소식은 원화 스테이블코인 시장에 대한 기대감을 한층 끌어올리고 있다. 국내 최대 간편결제 사업자인 네이버파이낸셜과 국내 최대 가상자산거래소인 두나무가 손을 잡은 것은 원화 스테이블코인 성장성에 대한 강한 자신감이 전제되지 않으면 내리기 어려운 결정이기 때문이다. 두 회사의 합병이 이뤄지면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부터 유통, 결제까지 전 과정을 아우르는 단일 생태계를 구축하며 시장을 주도할 가능성이 크다. 이를 발판으로 글로벌 시장도 본격적으로 확대하겠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다. 네이버 뿐만 아니다. 은행과 주요 핀테크, 블록체인 기업들도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에 대비해 물밑 준비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시장 속도와 달리 제도는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의 출발점인 디지털자산기본법(가상자산 2단계 법안) 입법이 지연되고 있어서다. 네이버파이낸셜과 두나무가 구상하는 생태계 역시 법적 근거가 마련되지 않으면 현실화하기 어렵다. 입법 지연의 배경에는 금융위원회와 한국은행 간 이견이 자리하고 있다. 한은은 금융시스템 안정을 위해 은행이 51% 이상 지분을 가진 컨소시엄만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이 가능하다는 은행 51%룰을 주장하고, 인가 과정에서 유관기관의 만장일치 합의와 한은의 검사권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이에 금융위는 과도한 요구라며 난색을 표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사실상 주도권 싸움으로 보는 시선이 적지 않다. 문제는 그 사이 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업계는 금융시장 변화에 맞춰 선제적인 준비에 들어갔지만 명확한 기준이 없어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판단하기 어렵다며 혼란을 호소한다. 사업을 서두르자니 향후 규제 리스크가 부담이고, 기다리자니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는 딜레마에 빠졌다. 실제 미국, 유럽, 일본, 홍콩 등 주요국은 스테이블코인 관련 법안을 마련하고 제도권 편입에 나섰다. 세계적으로 혁신 경쟁이 치열해진 가운데 한국은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모습이다. 앞서 국회 정무위원들은 금융위에 지난 10일까지 정부안을 마련할 것을 요구했으나 금융위는 또다시 제출하지 못했다. 쟁점 대부분이 해소됐다는 설명이지만 불확실성은 여전하다. 여당 의원들은 당 차원에서 국회 입법을 추진하겠다는 계획인데, 업계는 업계 의견이 충분히 반영된 정부안 마련이 우선이란 입장이다. 더 늦기 전에 시장이 출발할 수 있는 최소한의 법적 틀부터 마련돼야 한다. 글로벌 디지털 금융 시장에서 한국이 설 자리를 지키기 위한 결단이 필요한 때다. 송두리 기자 dsk@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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