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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헌의 체인지] 국정감사와 권력분립의 충돌··· 헌정의 선을 그을 때

정치는 언제나 권력의 경계 위를 걷는다. 국정감사도 그중 하나다. 감사라는 이름 아래 감시와 견제는 민주주의의 필수 장치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것은 '개입'과 '간섭'의 경계로 흐려진다. 13일 시작된 법제사법위원회 국감에서 대법원장 국정감사 증인으로 출석을 놓고 충돌 논란을 빚는게 그 예다. 국회는 국민의 대표로서 사법부를 감시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하고, 법원은 사법의 독립이 흔들릴 수 있다고 반발한다. 어느 쪽도 완전히 틀리지 않지만, 헌법이 말하는 삼권분립의 정신은 어느 한쪽의 '승리'로 완결되지 않는다. 국정감사는 헌법 제61조가 규정한 국회의 권한이다. 국정 전반에 대한 감사와 조사, 국민을 대신한 통제의 기능을 수행한다. 여당은 이를 통해 “국민의 눈높이에서 권력을 감시한다"고 말하고, 야당은 “행정부뿐 아니라 사법부도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기관이기에 예외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특히 법원 내 인사 문제나 특정 판결의 배경이 정치적 이해와 얽혀 있다는 의혹이 불거질 때, 국회의 '확인권'은 더욱 강하게 작동한다. “사법부라고 해서 성역이 될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헌법이 규정한 권력분립은 단순히 권한의 분배가 아니라, 상호 간섭을 금지하는 질서의 합의다. 법원은 법률의 해석과 판결을 통해 최종적 판단을 내리는 기관이다. 입법부가 그 내부 판단 구조를 증인석에서 따지기 시작하면, 그 순간 사법부의 독립은 흔들린다. 비슷한 논쟁은 해외에서도 있었다. 1950년대 미국 의회는 연방대법관 몇 명을 증인으로 소환하려 했다. 특정 판결이 의회의 입장과 충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법무부와 법학자들은 한목소리로 “이는 사법권의 독립을 침해한다"고 반대했다. 결국 대법관들은 의회 출석을 거부했고, 이후 미국에서는 사법부 수장을 청문회나 감사 자리에 세운 전례가 사라졌다. 대신, 연방대법원은 '윤리 보고서'와 '행정 투명성 문건'을 매년 의회에 제출하면서, 제도적으로 설명 책임을 다하는 방식을 택했다. 직접 심문 대신 제도적 투명성으로 신뢰를 회복한 것이다. 독일도 마찬가지다. 연방헌법재판소의 소장이나 판사들은 국회 청문회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 사법평의회와 헌법위원회를 통해 간접적으로 법원 행정이 통제된다. 프랑스에서는 아예 사법부에 대한 국정감사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 국가는 모두 '견제는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통해 권력분립을 살아 있는 시스템으로 만든다. 우리의 경우, 국회가 대법원장을 증인으로 부르려는 시도는 헌법상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헌정의 역사에서 “할 수 있다"가 곧 “해야 한다"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민주주의는 절제가 있어야 지속된다. 여당은 “사법부가 정치적으로 편향돼 있다"는 국민 여론을 배경으로, 사법권을 '책임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반면 야당은 “정권이 사법부를 길들이려 한다"고 반발하며, 대법원장의 출석은 '정치적 압박'으로 본다. 결국 한쪽은 투명성을, 다른 한쪽은 독립성을 명분으로 내세운다. 문제는 이 논쟁의 밑바닥에 '사법 불신'이라는 공통된 뿌리가 있다는 대목이다. 정치가 법원을 신뢰하지 못하고, 국민이 판결을 믿지 못하는 상황에서 견제와 개입의 경계는 더욱 희미해진다. 국회가 대법원장을 불러 세워 질문을 던진다고 해서 신뢰가 복원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법부가 정치의 무대에 서는 순간, 재판의 권위는 정치적 해석에 잠식된다. 한국 현대사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1988년, 제5공화국 청문회 당시 사법부의 일부 인사들이 정치적 책임 논란에 휩싸였다. 하지만 당시 국회는 대법원장 출석 요구를 끝내 철회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사법부를 국회의 증인석에 세우는 순간, 권력분립의 마지막 선이 무너진다."그 선을 넘지 않음으로써, 한국 민주주의는 최소한의 헌정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재판의 투명성, 법원행정처의 권한 남용, 판사 인사제도의 폐쇄성 등은 꾸준히 비판받아왔다. 하지만 그것을 고치기 위한 방식이 '정치적 청문회'가 되어선 안 된다. 미국처럼, 사법부가 스스로 국민 앞에 행정 보고를 제출하고, 윤리 감시 제도를 강화하는 방식이 보다 지속 가능하다. 국정감사와 권력분립의 충돌은 정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국회가 사법부를 감시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사법부도 정치로부터 독립할 권리가 있다. 양쪽 모두 헌법의 일부를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헌법이 요구하는 것은 '모두의 권리'보다 '각자의 절제'다. 견제는 필요하지만, 신중해야 한다. 개입은 유혹적이지만, 헌정의 질서는 그것을 금한다. 민주주의의 품격은 힘을 어떻게 쓰느냐보다, 어디서 멈추느냐로 판가름난다. 국정감사는 감시의 눈이지만, 그 눈이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헌정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사법부가 독립을 잃는 순간,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도 함께 흔들린다. 오늘의 논란은 단지 대법원장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이 앞으로도 헌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느냐의 시험대다. 견제의 힘과 절제의 미학, 그 중용의 지점이 지금은 어딘지 정확히 알 수없지만 모두의 노력과 연구,시행착오를 통하면 적절한 지점은 반드시 나올것이다. 여기서부터 진짜 민주주의는 자란다.

[이슈&인사이트] 한미 관세협약은 트럼프 치적 과시용, 경제 을사늑약으로 귀결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이 미국에 투자하기로 한 3,500억 달러와 관련해 '선불'이라고 발언함으로써 양국 간 관세 협상 전망은 한층 어두워졌다. 특히, 미국측이 한국측 요구조건인 통화스와프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어 사실상 타결하기가 어려워졌는데, 이러한 상황에서는 타결해서는 결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한국 경제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 위성락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도 언론 인터뷰에서 미국 측 요구에 대해 “객관적이고 현실적으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범위"라고 선을 그었다. 3500억달러는 한국의 최근 5년 치 전 세계 해외직접투자(FDI) 금액보다 클 뿐만 아니라 한국 외화보유고의 84%가 넘는 금액이다. 이 정도로 막대한 금액을 보증, 대출 등을 거의 동원하지 않으면서 단기에 현금 투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트럼프는 한국은 부자 나라라고 하면서 일본처럼 빨리 합의서에 서명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5,500억 달러 투자에 합의한 일본은 기축통화국이고 외환보유고가 한국 보다 훨씬 많을 뿐더러 해외에 많은 자산을 가지고 있어 한국과는 확연히 다르다. 트럼프는 당초 중국에 대한 관세전쟁을 강조했다. 그러나 중국이 희토류를 무기로 강력 대응하자 관세부과 유예 조치를 취하면서 원래 공언했던 싸움을 벌이지 못하고 있다. 대신 EU, 일본, 한국 등 동맹국을 상대로 팔을 비틀고 소위 '삥땅'을 뜯어 정치적으로 활용하려고 한다. 사실 트럼프는 큰 위기에 봉착해 있다. 관세부과로 소비자물가는 오르고 있어 국민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그러자 관세 수입을 재원으로 활용해서 이른바 '배당금(Dividend)' 형태로 국민들에게 직접 현금을 지급하는 방안까지 고려하고 있다. 미국의 국가 부채는 사상 최대로서 37조 달러를 넘어선 상황이다. 연방정부 셧다운 사태가 지속되고 있고, 이민자 단속을 강행하면서 시위대와의 충돌도 격화되고 있다. 급기야 국경순찰대가 시위대 여성에게 총격을 가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시카고에 주방위군 병력 배치를 승인했다. 트럼프는 세계 최강대국 미국을 엉망진창 속으로 빠뜨리고 미국의 이미지를 심각하게 훼손시키고 있다. 트럼프의 관세폭탄 정책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국제사회의 반감을 불러일으키기만 하고 미국의 경제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트럼프가 압박을 가한다 해도 트럼프의 요구에 응해서는 안 된다. 한국에게는 죽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현재 환율이 1400원을 넘고 있는데, 만약 한국이 미국의 요구에 양보하면 막대한 현금이 단기간에 빠져나가 외환시장이 요동치고 실물 경제 전반에 타격을 주게 된다. IMF 위기 같은 외환위기가 올 것이 뻔하고, 한국 경제는 고꾸라진다. 한미 관세협정에 사인하는 것은 경제적인 을사늑약에 사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국이 합의하지 않으면 미국은 계속 압박할 것이나,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관세전쟁으로 미국내 소비자 물가가 크게 오르고 있어 불만이 커지고 있다. 연방순회항소법원이 '국제비상경제권법(IEEPA)'을 근거로 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부과가 불법이라고 판결하였다. 물론 연방대법원 판결이 남아 있지만 마구잡이식 관세폭탄 투하 모우멘텀은 상실했다. 중간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트럼프는 궁지에 몰릴 것이다. APEC 계기에 한미관세를 타결하려는 움직임도 있으나 여기에 연연하면 안 된다. 정부는 치열하게 협상하되 사인하는 것은 가능한 미루고, 사인안할 수도 있다는 각오로 임해야 한다. 그리고 언론과 시민단체, 그리고 국회는 트럼프 요구의 문제점과 부당성을 강하게 제기해야 한다. 물론 정부가 “가장 성공적인 협상이었다. 합의문을 작성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잘 되었다"고 자화자찬하였는데, 이것은 잘못되었지만, 그 후 태세 전환하여 다행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관세 협상 합의문에 사인했으면, 탄핵 당했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가지고 야당에서 반미선동 운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지금은 여야가릴 것이 없다. 오로지 국익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행동해야 한다. 이강국

[이슈&인사이트] 홈쇼핑의 답은 ‘신뢰 큐레이션’

유통은 간단한 수학으로 움직인다. 매출 = 고객 수 × 구매량 × 객단가. 문제는 모든 채널이 이 공식을 똑같이 풀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래서 홈쇼핑의 해법도 기술 모방이 아니라, '믿을 만한 사람이 대신 골라주는 신뢰'에서 찾아야 한다. 유통의 역사는 기술과 생활양식이 맞물릴 때 도약했다. 철도·전철이 사람을 실어 나르자 백화점은 역세권에서 '고객 수'를 극대화했다. 자동차와 전산 물류가 깔리자 대형마트·창고형 점포는 '구매량'을 키우며 성장했다. 오늘의 온라인은 택배 혁신과 추천 알고리즘으로 '객단가'와 '구매 편의'를 동시에 밀어 올린다. 업태마다 같은 공식을 서로 다른 축으로 풀어온 셈이다. 한때 홈쇼핑은 '집에서 편히, 설명을 들으며 사는' 혁신 채널이었다. 그러나 최근 대응은 단편적 모방에 그쳤다. 디지털 채널만 늘려 '고객 수'를 흉내 내고, 고가·대용량 편성으로 '객단가·구매량'을 억지로 끌어올리지만, 온라인·라이브커머스와의 정면 승부에서 차별성이 옅다. 결국 홈쇼핑이 팔아야 할 것은 배송 속도나 최저가가 아니라, 소비자의 '검증 피로'를 덜어주는 신뢰의 큐레이션이다. 핵심은 쇼호스트의 역할 재정의다. 쇼호스트는 단순 진행자가 아니라 구매 대리인(Proxy)이다. 가격 비교·품질 확인·위험 신호를 대신 봐 주고, 그 과정과 근거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글로벌 아트페어에서 이름난 갤러리 앞에 줄이 길듯, 큐레이터의 브랜드가 작품 가치를 증폭시키는 것과 같은 원리다. 홈쇼핑도 '쇼호스트 브랜드화'를 통해 신뢰를 자산으로 축적해야 한다. 해법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권한과 책임을 묶은 쇼호스트 모델. 상품 발굴·검증 권한을 부여하고, 반품률·재구매율·클레임률 지표를 성과보상과 직결하라. 방송을 잘했다는 주관평가 대신, 신뢰지표를 '현금화'하는 구조로 바꿔야 한다. 둘째, 품질·안전 검증 인프라의 전면 업그레이드. 원재료·공정·인증·A/S 체계를 사전에 점검하고, 방송 중에는 근거자료(시험성적서, 리콜 이력, 비교테스트)와 한계를 투명 공개하라. 신뢰는 '노출된 검증'에서 나온다. 셋째, 디지털과 사람의 결합. AI 추천·라이브·숏폼은 보조수단이다. 핵심 메시지는 사람(쇼호스트)의 큐레이션으로 전달하고, 디지털은 그 신뢰를 확산·재방문으로 전환한다. 특히 공영홈쇼핑의 과제는 더 명확하다. 대기업과 가격으로 싸울 이유가 없다. 대신 중소기업·소상공인 상품에 '신뢰의 필터'를 입혀 시장 진입비용을 낮추는 공공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방송 한 번에 끝나지 않고, 동일 카테고리에서 '기준'을 세우는 게 중요하다. 예컨대 건강기능식품이라면 유효성 근거 레벨(무작위대조·관찰·기전), 원료 출처, 표시·광고 준수도 등을 카테고리 룰로 고정하고, 쇼호스트가 그 룰을 지키며 추천하는 방식이다. 규칙이 쌓일수록 소비자는 '그 채널은 믿고 본다'고 느낀다. 측정도 바꿔야 한다. 단기 매출 대신 △재구매율 △반품·클레임률 △신규고객 유입 중 추천 기반 비중 △방송 후 검색량·구독 증가 같은 신뢰 KPI를 보조지표가 아니라 주지표로 승격하라. 그래야 편성·소싱·보상 체계가 함께 움직인다. 공급자에게도 같은 신호를 줘야 한다. “과장 광고로 1회 매출을 내는 브랜드"가 아니라 “귀찮은 질문에도 답할 준비가 된 브랜드"가 방송 기회를 얻는 구조로 재설계하라. 결국 유통의 공식은 변하지 않는다. 달라져야 하는 것은 어떤 축을, 어떤 무기로 극대화하느냐다. 홈쇼핑이 살 길은 '고객 수·구매량·객단가'의 기계적 확대가 아니다. 소비자가 기꺼이 시간을 맡기고 돈을 예치할 수 있을 만큼 검증을 대신해 주는 신뢰다. 쇼호스트를 큐레이터로, 방송을 '근거가 보이는 추천'으로 바꾸는 순간, 홈쇼핑은 다시 공식을 자기 편으로 끌어당길 수 있다. 실행은 복잡하지 않다. 모든 상품에 1페이지짜리 '팩트카드'를 의무화하고, 쇼호스트·제조사가 반품·클레임률에 연동해 리스크를 함께 지는 계약으로 바꾸면 된다. 나아가 분기마다 신뢰 KPI를 외부에 공시해 시장의 감시를 끌어들이면, 과장과 왜곡은 자연히 걸러진다. 그 결과 소비자는 '싸서'가 아니라 '믿어서' 사게 되고, 홈쇼핑은 다시 필요한 채널로 돌아올 수 있다. 박주영

[김병헌의 체인지] 이재명 정부, ‘실용’의 끝은?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직전 어느날 밤 서울 도심의 한 카페. 스무 살 청년들 서넛이 유튜브 정치 채널을 보며 박장대소를 터뜨린다. 누군가는 대법원장을 조롱하는 밈을 공유하고, 또 다른 이는 “이번 부동산 대책으로 무조건 집값은 떨어진다"며 장담한다. 현실은 결코 단순하지 않지만, 그들의 스마트폰 속 세계는 한 편의 쇼처럼 흘러간다. 문제는 이 환상과 흥분이 점점 더 사회의 의사결정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는 원래 제도와 법, 차가운 숫자와 데이터에 근거해 움직여야 한다. 지금은 감정과 영상, 팬덤과 음모론이 제도를 압도하고 있다. 대법원장을 둘러싼 의혹이 국회의 의제가 되고, 사실 확인보다 유튜브 채널의 해석이 더 큰 힘을 발휘한다. 합리적 토론은 자취를 감추고, 여론조사 수치만이 진실인 것처럼 소비된다. 결국 정치가 냉정한 판단을 잃고 흥분의 무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경제와 외교도 걱정스럽다. 지금도 지지부진한 한미 관세 협상을 보자. 정부는 3500억 달러 투자와 관세 15% 인하를 성과라고 홍보했지만, 따져 보면 이익보다 손해가 크다. 한국은 이미 자유무역협정을 통해 무관세 혜택을 받고 있었고, 투자 규모는 GDP 대비 일본이나 유럽보다 훨씬 무겁다. 투자 성격조차 불분명한 상황에서 합의서 한 장 없이 “성공"이라 포장한 것은 현실을 가린 자화자찬일 뿐이다. 국가 재정을 담보로 한 거대한 모험을 “성과"라 부르는 것은 책임 있는 협상이 아니라 눈속임에 가깝다. 아파트로 대표되는 부동산 정책은 더 심각하다. 문재인 정부가 5년 동안 28번 대책을 쏟아내고도 실패했던 이유는 수요 억제와 공공임대에만 매달렸기 때문이다. 이재명 정부 역시 같은 길을 가고 있다. 주택담보 대출을 제한하고, LH 중심의 공급 확대를 내세웠지만, 정작 민간 건설사들은 움츠러들었다. 서울의 아파트 공급은 오히려 줄고, 청년들의 내 집 마련 꿈은 멀어졌다. 공공임대 확대가 근본 해법이 될 수 없음은 이미 입증됐다. 하지만 집권 세력은 여전히 민간 공급보다는 표심 관리에 유리한 방식에만 집착한다. 시장은 더 왜곡되고 집없는 서민들의 고통은 커져만 간다. 에너지 정책 역시 불안하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실험으로 원전 생태계가 붕괴된 뒤 이제야 회복 기미를 보이는데, 이재명 대통령은 원전 건설 백지화 가능성을 시사했다. 재생에너지가 중요하다는 데 이견은 없지만, '15년이 걸린다'는 이유만로 원전 포기 가능성에 자락을 깔아놓았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국가 에너지 안보는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업계도 투자를 멈추고 인재는 해외로 빠져나갈 수 밖에 없다. 단순한 정책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경쟁력의 근간을 흔드는 선택이 되는 셈이다. 정치도 과거의 그림자가 가시지 않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반대 진영을 몰아붙였다면, 이재명 정부는 내란 청산을 내세우며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국회는 합의와 타협 대신 거대 여당의 단독 처리가 일상화되었고, 관행은 무너지고 있다. 제도와 규칙이 무너진 자리에는 선동과 진영 논리뿐이다. 국민은 점점 정치에 대한 신뢰를 잃어가고, 대립과 갈등이 깊어진다. 더 큰 문제는 많은 시민들이 이런 정치 속에서 오히려 '힘을 가졌다'는 착각에 빠진다는 대목이다. 유튜브와 SNS는 짜릿한 정치적 흥분을 제공한다. 지지자들은 자신이 국가의 주인공이 된 듯한 환상을 맛본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검찰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범죄자들은 무죄를 받기 쉬워졌고, 피해자들은 변호사비 부담에 시달릴 일만 남았다. 정치적 흥분은 달콤하지만, 실제 삶은 더 고단해진다. 결국 손해는 국민이 본다. 이재명 정부의 문제는 몇 가지 정책 실패가 아니다.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환상에 기대려 한다는 것이가장 큰 문제다. 관세 협상에서 포장된 성과, 부동산과 에너지 정책에서 반복되는 오류, 청산 정치라는 이름의 대립과 갈등, 팬덤 정치와 음모론이 제도를 압도한다. 현실을 외면하고 눈앞의 환상에 취한 결과다. 정치는 흥분과 쇼의 무대가 아니다. 차가운 이성과 냉정한 계산 위에서만 나라가 굴러갈 수 있다. 지금처럼 환상과 감정에 기대는 정치가 계속된다면, 이재명 정부는 문재인 정부의 실패를 단순히 답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깊고 심각한 위기로 향할 수밖에 없다.

이재명 정부의 ‘청년미래적금’ 장밋빛 약속에도 실효성 논란

이재명 정부가 추진하는 청년미래적금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엇갈리고 있다. 역대 정부에서도 청년을 대상으로 한 금융상품을 내놓았으나 실효성은 크지 않았다. 더욱이 정권마다 납입액·만기·정부 기여금 등이 바뀌면서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청년미래적금에 대해서도 청년들은 반신반의하고 있다. 내년 6월 출범을 목표로 설계된 청년미래적금은 만 19~34세 청년을 대상으로 한 3년 만기 단기 상품이다. 월 최대 50만원을 납입하면 정부가 납입액의 6~12%를 기여금으로 추가 지원한다. 특히 중소기업 신규 취업자 등 일부 청년층에는 우대형 기여율을 적용해 혜택을 확대할 방안도 검토 중이다. 이에 비해 윤석열 정부의 청년도약계좌는 5년 만기 장기 상품으로 월 최대 70만원을 납입할 경우 소득 수준에 따라 정부 기여금이 추가되며 이자와 배당소득은 비과세 혜택이 제공됐다. 장기 상품인 만큼 청년들이 목돈을 마련할 수 있는 구조였지만 5년이라는 긴 기간과 상대적으로 높은 납입 부담이 단점으로 꼽혔다. 청년미래적금은 단기화와 우대형 설계로 부담을 완화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장기 목돈 마련이라는 정책 취지와 맞지 않는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청년들의 가장 큰 고민은 소득 불안정으로 매달 일정 금액을 납입하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점이다. 서울에서 취업을 준비 중인 오모(37) 씨는 “월세, 공과금, 식비 등 생활비를 고려하면 50~70만원의 적금 납입은 큰 비중을 차지한다"며 “적금에 가입할 여력이 있는 청년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기존 청년도약계좌와의 비교 속에서 적금을 유지할지 새 상품으로 갈아탈지 고민하는 청년들이 많은 상황이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강민국 국민의힘 의원실이 금융감독원에서 제출받은 '청년도약계좌 가입 및 운영 현황'에 따르면 7월 말 기준 중도해지 인원은 총 35만8000명에 달했다. 이는 누적 가입자 225만명(일시 납입 가입자 포함)의 15.9%에 이르는 수치다. 지난 2023년 말 중도해지율인 8.2%에서 7.7%p 늘었다. 납입 금액이 10만원 미만인 가입자들의 중도해지율이 39.4%로 가장 높았다. 이어 10만원 이상 20만원 미만 가입자들이 20.4%, 20만원 이상 30만원 미만은 13.9%의 중도해지율을 나타냈다. 납입 최대 금액인 70만원을 내는 청년들의 중도해지율은 0.9%로 가장 낮았다. 금융위원회는 청년도약계좌 가입자를 대상으로 청년미래적금으로 갈아탈 수 있는 방안 등도 검토하고 있다. 정권 교체마다 상품의 이름과 제도가 바뀌면서 정책 신뢰도도 흔들리고 있다. 지난 2013년 박근혜 정부는 중소기업 재직 청년 지원을 위해 '청년내일채움공제'를 도입했다. 문재인 정부는 '청년희망적금'으로 바꿔 사업을 확대했다. 이어 윤석열 정부는 다시 '청년도약계좌'로 이름을 바궜다. 전 정부의 청년 정책 흔적을 지우려는 듯한 모습이 반복됐다. 일관성 있는 정책 집행이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제도 전반에 영향을 주면서 청년들이 장기적인 자금 계획을 세우는 데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는 김모(30)씨는 “청년 적금 제도가 바뀌었다는 사실에 당황했던 적도 있었다"면서 “몇년을 주기로 계속해서 변경되면서 혼란이 가중된다는 느낌이 크게 들고 있다"고 말했다. 납입 여력이 부족한 청년들이 실제로 혜택을 받기 어려울 수 있다는 지적도 많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돈을 가지고 일정 금액을 납입할 수 있어야 가능한 구조"라면서 “청년을 위한 정책인데 형편이 어려운 청년을 위한 정책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회사와 노조, 정치권의 '노사정 협력모델'을 도입해야는 제안도 나왔다. 노민선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청년 관련 공제 사업이 축소되는 상황에서 청년을 지원하기 위한 진일보한 정책"이라서도 “청년들의 중소기업 유입을 촉진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청년이 일정 금액을 납입하면 정부가 매칭하는 모델도 좋지만 중소기업이 함께 참여하는 노사정 협력 모델을 활성화해야 한다"며 “중소기업이 함께 매칭에 참여하면 청년들의 장기 재직과 연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노 연구위원은 “인공지능(AI) 인력이나 연구개발(R&D), 석박사 등 전문 인력을 대상으로 중소기업과 함께 참여하는 공제 사업을 만드는 것도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김종환 기자 axkjh@ekn.kr

경북도, AI·인구정책 선도 의지 천명··· APEC D-30 앞두고 현안 브리핑

APEC 성공 개최와 추석 대비 종합 대책 발표 경주=에너지경제신문 정재우 기자 경상북도는 10월 1일 경주엑스포공원 대회의장에서 추석을 앞두고 도정 주요 현안을 종합적으로 설명하는 언론인 간담회를 열었다. 이번 간담회는 2025 APEC 정상회의 개막이 30일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 도민들에게 준비 상황을 알리고 협조를 당부하는 자리였다. 아울러 추석 명절 대비 민생 대책, 최근 국회를 통과한 산불특별법 추진 방향, 지역공약 및 국정과제 대응 계획 등도 함께 공개됐다. ▲'경북형 AI 협력 비전' 제안 이철우 도지사는 APEC 핵심 의제 중 하나인 'AI 협력'에 대응하기 위해 '경북형 AI 협력 비전'을 새롭게 제시했다. 인구 돌봄 AI, 재난 대응 AI, 문화·관광 AI, 마을 공동체 AI, 새마을 글로벌 AI 등 5대 모델을 기반으로 'AI 새마을형 미래공동체'를 조성하겠다는 구상이다. 그동안 경북도는 '메타버스수도 선포', '메타AI과학국 신설' 등으로 AI 정책을 선도해왔으며, 첨단 연구개발과 인프라 확충에 힘써왔다. 이번 발표는 단순한 기술 도입을 넘어 돌봄·재난·관광 등 도민 생활과 밀접한 분야를 AI와 접목시켜 공동체 행복을 실현하는 데 방점을 찍고 있다. ▲대한민국 인구정책 새 규범 제안 인구구조 변화 대응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제안이 나왔다. 경북도는 지난해 전국 최초로 '저출생과 전쟁'을 선포하며 인구 문제 해결에 선제적으로 나선 바 있다. 이날 간담회에서 이 지사는 이를 전국적 모델로 발전시켜 '대한민국 인구 변화 대응 규범'을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주요 내용은 △저출생 극복을 위한 구조개혁과 인식 전환 △체감 가능한 지원정책 마련 △국립 인구정책 연구원 경북 설치 △APEC 글로벌 인구협력위원회 설립 등이다. 특히 저출산·고령화는 APEC 회원국 모두가 직면한 과제인 만큼, 경북의 경험과 정책 모델을 아시아·태평양 국가들과 공유해 국제 협력의 장을 열겠다는 구상이다. ▲APEC 정상회의 개최지·의제 제안 정상회의와 관련해 이 지사는 한·미·중 정상 간 주요 회담 장소로 국립경주박물관을 제안했다. 그는 “루브르박물관에서 국제 경제질서 합의가 이뤄졌던 것처럼 경주박물관에서 새로운 자유무역 질서가 태동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또한 미국과 북한 정상이 경주에서 만나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는 '경주 빅딜'에 대한 기대도 언급했다. 더불어 DMZ 골프장 조성, 원산 조선소 건설 등을 제안하며 한반도 긴장 완화와 남북 협력의 계기를 만들자는 의견도 내놓았다. ▲추석맞이 민생안정 대책 추석을 앞두고 도민 생활 안정을 위한 종합 대책도 함께 발표됐다. 경북도는 산불 피해 지역 주민, 저소득층, 위기가구를 위한 '온기나눔 릴레이'와 이동 클리닉을 확대하고, 물가 관리와 비상진료체계 가동, 교통 편의 대책 등을 마련했다. 이 지사는 “귀성객과 도민 모두가 따뜻하고 안전한 명절을 보낼 수 있도록 세심한 준비를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산불특별법 통과에 대한 감사와 비전 지난 9월 25일 국회를 통과한 '산불특별법'과 관련해 이 지사는 “추석을 앞두고 도민께 큰 선물을 드리게 되어 기쁘다"며 국민과 공직자에게 감사를 전했다. 이어 “피해지원 및 재건위원회, 산림투자선도지구, 산림경영특구를 통해 사라지는 마을을 살아나는 마을로, 바라보는 산을 돈이 되는 산으로 바꾸겠다"고 혁신적 재창조 의지를 밝혔다. ▲지역공약·국정과제 추진 계획 경북도는 정부의 지역공약과 국정과제를 차질 없이 추진하기 위해 도·시군·연구원·민간전문가가 참여하는 체계적 관리체계를 마련했다. 또한 정부의 균형성장 전략인 '5극3특' 구상에 발맞춰 대구·경북 공동 협력사업을 지속 추진하며, 지역 발전과 국가 성장에 기여한다는 방침이다. 이철우 지사는 “APEC 성공 개최를 위해 빈틈없는 준비로 경북의 역량을 세계에 알리겠다"며 “경북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이 초일류 국가로 도약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아울러 “도민과 귀성객 모두가 가족, 친지와 함께 넉넉한 한가위를 보내기를 바란다"고 전하며 추석 인사도 전했다. 정재우 기자 jjw5802@ekn.kr

“113만명 빚탕감 수혜 본다”...李정부 ‘배드뱅크’ 새도약기금으로 출범

이재명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배드뱅크'가 '새도약기금'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출범했다. 정부는 코로나19로 취약계층, 소상공인의 부채 부담이 누적된 가운데 최근 경기부진, 대출금리 상승 등으로 어려움이 가중된 만큼 이들의 부채 부담을 덜고, 새롭게 도약할 수 있도록 특단의 부채 부담 경감 방안을 마련했다. 새도약기금을 통해 7년 이상, 5000만원 이하 연체채권을 일괄 매입해 소각 또는 채무조정을 실시하고, 7년 미만 연체자 등 기금 매입 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연체자에는 특별 채무조정 프로그램을 한시로 운영한다. 1일 금융위원회, 한국자산관리공사는 서울 중구 신용회복위원회 본사에서 '새도약기금 출범식'을 개최했다. 이날 출범식에는 정무위원회 여당 간사인 강준현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이억원 금융위원장, 이세훈 금융감독원 수석부원장, 정정훈 캠코 사장, 양혁승 새도약기금 대표이사, 조용병 은행연합회장을 비롯한 협약기관장 등이 참석했다. 새도약기금이라는 명칭은 올해 7월부터 8일까지 국민공모를 접수한 후 심사 과정을 거쳐 최종 선정됐다. 새도약기금은 상환능력을 상실한 연체자를 지원하고자 7년 이상, 5000만원 이하 연채채권을 일괄 매입해 소각·채무조정하는 프로그램이다. 엄정한 소득·재산 심사를 거쳐 정말 갚을 수 없는 경우에만 소각한다. 금융사 및 공공기관이 보유한 금융채권을 지원하며, 사행성·유흥업 관련 채권, 외국인 채권 등은 지원에서 제외된다. 총 재원은 8400억원이다. 2차 추가경정예산으로 재정 4000억원이 투입됐고, 금융사가 약 4400억원을 출연한다. 금융권 기여금액 가운데 은행이 3600억원으로 가장 많은 금액을 부담한다. 이어 생명보험사 200억원, 손해보험사 200억원, 여신전문금융회사 300억원, 저축은행 100억원이다. 새도약기금은 이달부터 연체채권 매입을 시작해 향후 1년간 협약기관으로부터 채권을 일괄 인수한다. 이후 행정데이터를 수집해 채무자의 보유 재산 및 소득 심사를 거쳐 내년부터 순차적으로 소각 또는 채무조정을 단행한다. 중위소득 60% 이하(1인 가구 기준 월 소득 154만원 이하) 또는 생계형 재산을 제외한 회수 가능한 자산이 없는 경우 상환능력 상실자로 판단해 채권이 완전 소각된다. 중위소득이 60%를 초과하거나 회수 가능한 자산은 있지만 채무액에 미달하는 경우 30~80% 원금 감면, 분할상환 최장 10년, 이자 전액감면, 상환유예 최장 3년 적용 등이 지원된다. 만일 중위소득 125%를 초과하거나 회수 가능 자산이 채무액을 초과하는 경우 추심을 재개하고, 법적 조치 등을 통해 상환을 요구한다. 다만 기초생활수급자 등에 대해서는 별도의 상환능력 심사 없이 연내 우선 소각을 추진한다. 정부는 새도약기금으로 총 16조4000억원 규모의 장기 연체채권을 매입하고, 총 113만4000명이 수혜를 입을 것으로 추산했다. 새도약기금이 협약 참여 금융사로부터 대상 채권을 일괄 매입함에 따라 채무자가 별도 신청하는 절차는 없다. 금융사가 새도약기금에 채권을 매각할 때, 새도약기금이 상환능력 심사를 마쳤을 때 각각 채무자에게 개별 통지된다. 금융위는 형평성을 높이기 위해 5년 이상 연체자에 대해서는 새도약기금과 동일한 수준의 특별 채무조정을 3년간 지원한다. 5년 이상 연체자는 최대 80%의 원금 감면, 분할상환 최장 10년을 지원받는다. 7년 이상 연체하고 채무조정을 이행 중인 이들에게는 은행권 신용대출 수준의 저리 대출을 총 5000억원 규모로 3년간 지원한다. 정부는 이번 채무조정으로 장기 연체자들의 제도권 경제 복귀를 돕고, 정상적인 경제 활동을 통해 소득 창출이 가능해질 것으로 기대했다. 장기 연체자들은 급여 압류 공포 등으로 정상적인 경제활동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어려움이 해소되는 것이다. 특히 장기 연체자들은 불법 사금융에 가장 직접적으로 노출된 이들로, 향후 범죄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 이억원 금융위원장은 축사에서 “코로나19에 따른 경제 충격 대응 과정에서 취약계층, 소상공인의 부채 부담은 크게 확대됐고, 대출금리 상승, 극심한 내수 부진으로 취약계층, 소상공인의 부채는 감당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 사회 통합 차원에서 특단의 채무조정 정책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채무조정을 통해 빚의 굴레에 갇혀 있던 분들이 다시 경제 활동 주체로 복귀한다면 고용시장, 소비에도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이 위원장은 “새도약기금이 단순한 부채 탕감에 그치는 것이 아닌, 상환능력을 상실한 분의 재기 지원을 통해 우리 경제의 선순환 구조를 회복하고, 우리 사회의 신뢰와 공동체 연대를 강화하는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나유라 기자 ys106@ekn.kr

150조 ‘국민성장펀드’ 본격 시동...AI 30조 투자·운용위 신설

정부가 국민성장펀드의 자금 중 30조원 이상을 인공지능(AI) 분야에 투입하기로 했다. 금융권과 산업계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운용위원회도 신설해 첨단산업 투자에 속도를 낸다는 구상이다. 1일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본점에서 열린 정부·금융권·산업계 합동 간담회에서 금융위원회,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업통상자원부는 국민성장펀드 운용 방향을 공식화했다. 이날 회의에는 권대영 금융위 부위원장, 류제명 과기정통부 2차관, 문신학 산업부 차관을 비롯해 주요 금융사 임원과 전략산업 기업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국민성장펀드는 향후 5년간 AI·반도체·바이오 등 국가 전략산업 전반을 지원하는 초대형 투자 프로그램이다. 재원은 총 150조원으로, 이 중 절반은 산업은행이 운영하는 첨단전략산업기금에서 조성되고, 나머지는 민간 자금과 국민·금융권 참여로 마련된다. 정부는 우선 AI 분야에 최소 30조원을 배정할 방침이다. 과기정통부는 이번 투자가 한국을 글로벌 'AI 3강'으로 도약시키기 위한 대규모 프로젝트 발굴에 집중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산업부 역시 펀드가 성공하려면 산업계의 전문성과 금융권의 투자 역량이 결합돼야 한다며, 유망 기업 선별과 프로젝트 발굴 과정에 적극 협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금융위는 풍부한 시중 유동성이 부동산 등 비생산적 부문에 머무르지 않고 AI와 첨단산업 전환에 투입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민간 전문가가 기금 운용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구조를 재편하기로 했다. 첨단전략산업기금 운용심의회를 민간 중심으로 꾸리고, 하위 사무국에도 금융권 경력자를 채용하거나 파견 받아 현장성을 높인다는 계획이다. 또한 '국민성장펀드 운용위원회'(가칭)를 설치해 산업계·금융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정례적으로 반영한다. 권대영 부위원장은 펀드의 성패는 어떤 프로젝트를 어떤 절차를 거쳐 선정하느냐에 달려 있다며, 민간과 긴밀히 협력하는 구조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산업계 참석자들은 정부와 정책금융기관이 투자 손실을 선제적으로 분담하고, 장기 투자가 불가피한 첨단기술 기업에도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송재석 기자 mediasong@ekn.kr

[이슈&인사이트] 생산적 금융의 대전환과 국민경제 성장

한국 경제가 저성장과 양극화 문제에 직면한 가운데, 정부는 금융 부문에서 '생산적 금융'으로의 대전환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 생산적 금융은 자금이 비생산적인 가계부채나 부동산으로 쏠리는 현상을 극복하고, 혁신기업·첨단산업 등 실물경제 성장 부문에 자금을 집중되는 금융 정책을 말한다. 2025년 금융위원회를 중심으로 정부는 정책금융, 금융회사, 자본시장 세 분야에서 생산적 금융 체제를 구축, 국민경제의 새로운 성장 동력 창출을 목표로 한다. 정부가 발표한 생산적 금융 정책의 핵심은 국민성장펀드 150조원 조성을 통한 미래 전략산업과 지역경제 집중 투자이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 반도체, 바이오 등 첨단산업과 벤처 생태계에 장기자본을 공급해 혁신 성장을 촉진한다. 동시에 부동산 금융 관련 공적보증 축소 및 기술금융 강화로 자금 흐름을 전환한다. 이로써, 은행과 보험사는 자본규제 합리화를 통해 생산적 투자 여력이 확대될 전망이다. 또한, 금융회사에 대한 감독과 핵심성과지표(KPI)를 재정비해 과도한 위험 회피를 완화하고 생산적 대출을 장려한다. 하지만, 금융업권 현장에서는 여전히 몇 가지 문제점이 지적된다. 금융권은 부동산 및 가계대출의 비중이 높은 데다, 기업대출의 위험과 낮은 수익성으로 생산적 금융 확장에 소극적이다. 주택담보대출 위험가중치(RW) 상향으로 은행의 주담대 자금 공급 여력이 줄어드는 반면, 벤처기업 등에 대한 투자 RW는 낮춰 투자 여력을 확대하였으나 금융권 내부의 리스크 관리 관행과 수익 모델 변화가 병행되지 않으면 정책 효과가 제한적일 수 있다. 이에 따라 손실 흡수 장치 및 세제 혜택 등 추가 인센티브 설계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국내 금융업권이 생산적 금융으로 전환하는 데 또 다른 중요한 문제점은 금융회사의 투자 역할 제약과 업무범위 제한이다. 현재 은행 등 금융회사는 법적·제도적으로 본업과 밀접한 부수업무 외에는 참여가 어렵고, 기업 지분 보유에도 제한이 많아 사회적 투자나 혁신·지역 재건, 기후 대응 사업 등 생산적 금융 확대에 직접적으로 뛰어들기 어려운 구조다. 이로 인해 은행의 혁신기업이나 지역경제 활성화에 필요한 자본 투입과 적극적 투자자로서의 역할 수행이 제한되고 있다. 일본은 2021년 은행법을 개정해 '지속가능 사회 구축에 이바지하는 업무'를 은행 본사와 자회사 업무로 허용하는 등 은행 업무범위를 단계적으로 확대해 이러한 문제를 해소한 바 있다. 국내 금융업권의 지속가능성 확보와 혁신 투자를 유도하도록 금융 업무범위 확대 및 자율성 부여가 필요한 상황이다. 이는 금융회사가 보다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 생산적 금융에 기여하도록 하는 필수적 제도 개선 과제로 꼽힌다. 하지만, 금융업권에서 생산적 금융이 제대로 확산될 경우 국민경제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는 크다. 우선, 첨단산업과 벤처기업의 자금 조달이 원활해지면서 신성장 동력과 고용 창출이 확대된다. 이는 국내 산업구조의 혁신을 촉진하고, 저성장과 양극화 문제 완화에 기여한다. 또한, 금융자원의 효율적 분배는 자본 생산성을 높여 잠재성장률을 증가시키고, 경제 활력 회복에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는 국민소득이 증대되고, 국가 주요 산업의 지속가능한 혁신 투자도 가능해져 국민경제의 경쟁력 강화에 기여할 것이다. 은행, 제2금융권, 보험업이 생산적 금융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각 권역별 맞춤형 개선 노력이 필요하다. 은행은 자본규제 완화와 위험가중치 조정을 계기로 기업대출, 특히 중소·중견기업 및 혁신기업에 대한 금융 공급을 확대하고, 기술금융과 관계형 금융을 활성화해야 한다. 제2금융권은 지역 소상공인과 창업기업에 대한 금융지원 강화를 위해, 신용평가 모델 개선으로 보다 포용적인 대출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보험업은 중장기 자본을 활용한 인프라 투자와 친환경·신산업에 대한 투자 비중 확대를 통해 국민경제의 생산성 향상에 기여할 수 있다. 이와 함께 금융당국은 금융권의 리스크 관리 체계 개편과 성과평가 지표에 생산적 금융 비중을 반영하는 등 동기 부여 장치를 강화해 각 금융업권이 생산적 금융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정부의 생산적 금융 대전환 정책은 한국 경제 재도약을 위한 필수 과제이다. 금융업권이 혁신과 지역경제를 적극 지원하는 체제로 변화할 때 국민경제 전체에 긍정적 파급 효과가 기대된다. 금융규제 개선과 정책금융 강화, 금융회사의 효과적 리스크 관리와 성과 지표 혁신 등이 이루어져야 생산적 금융이 국민경제 성장의 든든한 기반이 될 것이다. 서지용

“노란봉투법, 사용자 범위·교섭단위 통합 등 보완해야”

'노동조합법 제2·3조 개정안'(노란봉투법)의 시행을 앞두고 사용자 범위 구체화 등 정부·국회가 후속 조치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법 도입 취지를 살리면서도 산업 현장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형태의 보완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는 의견이다. 국회노동포럼(대표의원 이학영)은 지난 30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노란봉투법 시행,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토론회를 열고 이같은 내용을 논의했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은 축사에서 “근로계약 당사자가 아님에도 단체교섭 의무를 부과하기 위해서는 그 요건이 명확해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당사자가 이를 수긍하지 못할 것이고 장기적인 법률 분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걱정했다. 이어 “노란봉투법 후속 조치로 마련되고 있는 정부 매뉴얼에는 사용자 범위와 노동쟁의 개념 등을 최대한 구체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동계는 노란봉투법 후속조치 마련 관련 방어적인 입장을 내비쳤다.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은 “후속 조치라는 '꼬리'가 노란봉투법 취지라는 '몸통'을 흔들어서는 안된다"며 “노조법 개정 취지가 온전히 작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은 “사용자가 교묘하게 법 문구 뒤에 숨어 또 다시 하청노조 처우개선을 외면하도록 허용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발제를 맡은 박귀천 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노조법상 사용자 개념 확대에 따라 교섭방식 등 기준이 달라질 것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박 교수는 “30여년 전 쓰인 노동법 교과서를 봐도 근로자와 근로계약을 맺고 있는 사업주가 아닌 외부 기업을 그 근로자가 소속한 노조에 대해 단체교섭상 사용자 또는 부당노동행위의 주체로 봐야 할 경우가 있다고 적혀 있다"며 “기존 학설에서도 고용주가 아니더라도 이와 근접·유사한 지위에 있는 자는 단체교섭 당사자로 본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노란봉투법 사용자 개념 판단은 헌법상 노동3권 보장의 관점을 기본으로 해야 한다"며 “근로자 파견과 노조법상 사용자 판단은 구분돼야 한다. 근로자 파견과 유사한 기준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노동3권 보장 관점에서 노조법상 사용자 판단이라는 기본 틀이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교섭창구단일화 제도는 원하청 교섭을 고려하지 않은 제도라는 점에서 당장 적용하는 게 타당한지 의문"이라며 “여러 사업 또는 사업장을 대상으로 하는 교섭단위 통합제도를 입법해 다수 하청 노조들이 교섭단위 통합을 통해 원청과 교섭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두 번째 발제자로 나선 권두섭 법무법인 여는 변호사는 “노란봉투법은 '서로 대화를 하라'는 것이니지 '하청 노조의 요구를 들어주라'는 것이 아니다"며 “개정 이후 정부·국회·노사가 할 일도 그동안 막혀 있던 대화를 촉진하는 방향이 돼야 사회적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고 말했다. 권 변호사는 “노동부가 가이드라인을 만들어버리면 원청 사용자측 교섭거부 빌미만 제공할 가능성이 크다"며 “누구와 교섭을 해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는 노사 당사자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사용자 범위에 대한 해석은 단체교섭권 보장이라는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진 토론에서 황용연 경총 노동정책본부장은 “노란봉투법은 위헌 문제가 제기되고 있고 산업현장 혼란과 기업 경쟁력 약화를 초래할 우려가 크다"며 “추상적이고 모호한 개념에 따른 사용자성 확대는 죄형법정주의의 명확성 원칙 위반"이라고 진단했다. 류제강 한국노총 정책본부장은 “사용자성 판단을 보다 명확히 하고 경영권 사안이라 하더라도 근로조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경우 단체교섭·쟁의 대상이 될 수 있어야 한다"며 “교섭 절차 관련해서는 개별 뿐 아니라 원·하청 연대교섭, 산별교섭 등 다양한 형태가 제도적으로 보장될 수 있도록 현실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린 인하대학교 교수는 “하청이 많아지면 응해야 할 교섭 단위가 늘어 현실적 어려움이 있다"며 “이러한 문제는 법률로 강제하기보다 단체교섭의 자유권적 성격을 고려해 당사자들이 해결하도록 두는 게 바람직하다. 정부와 노동위원회는 자발적인 창구 단일화 및 교섭 단위 통합을 유도하고 이를 촉진하기 위한 행정적 지원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헌우 기자 yes@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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